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2>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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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2>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4. 12.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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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교육, 지도, 지원이 '자립' 이라는 목표를 내세울 때, 그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분명 고민이지. 하지만 여기에는 명확한 지침이 있네.

 

답은 하나, '존경' 일세.

 

교육의 입구는 그것 외에 없어.

 

존경이라니, 의외의 답변이네요! 그러니까 그거, 부모를 존경하라, 교사를 존경하라, 상사를 존경하라는 겁니까?

 

아닐세. 예를 들면 자네 학급에서의 경우, '자네' 가 먼저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나.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된다네.

이것은 집에서든 혹은 사회조직에서든,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세. 부모가 먼저 아이를 존경한다, 상사가 먼저 부하직원을 존경한다. 역할로 보자면 '가르치는 쪽' 에 있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쪽' 에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존경이 없는 곳에서 좋은 인간관계는 생길 수 없고, 좋은 인간관계 없이는 자네의 뜻을 전할 수도 없네.

 

어떤 문제아라도 존경하라고요?

 

그래. 근원에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경' 이니까. 특정한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 나아가 평생 만날 일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타인을 존경하는 걸세.

존경이란 무엇인가. 이런 말을 소개하지.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이 세계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둘도 없이 소중한 '그 사람' 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 이어서 프롬은 이런 말을 덧붙였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라고.

 

무슨 뜻이죠?

 

눈앞의 타인을 바꾸려고도 조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뭔가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을 인정한다. 이를 넘어서는 존경은 없네. 그리고 만약 누군가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 을 인정받는다면, 그 사람은 큰 용기를 얻게 되겠지.

 

 

 

 

 

 

 

 

 

 

 

 

 

 

 

분명 우리는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네. 그리고 당연히 타인이 될 수도 없어. 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것과 타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상상할 수 있네. 아들러는 이렇게 제안했지. 먼저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같은 마음이고 같은 인생을 산다면 어떨까?' 를 생각해보라고. 그렇게 해보면 '반드시 나도 이 사람과 같은 과제에 직면하겠지' 라고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반드시 나도 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겠지' 라고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이쪽에서 뭔가 권하라는 말이 아닐세. 그저 '아이들의 관심사' 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지. 자네가 보기에 아무리 저속한 놀이일지라도 일단은 그게 어떤 건지 이해하려고 해보게. 스스로 해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함께 어울려 놀아보게. '놀아주는 것' 이 아니라 자네도 즐겨보라는 걸세. 그제야 비로소 아이들은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 인간으로서 '존경'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걸세.

 

 

아이만이 아닐세.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한 존경의 구체적인 첫걸음일세. 회사에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혹은 국제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타인의 관심사' 에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네.

 

 

 

 

 

 

 

 

 

 

 

 

 

 

 

한 면에는 '나쁜 그 사람' , 다른 면에는 '불쌍한 나' 라고.

 

그래. 카운슬링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둘 중에 하나의 이야기를 내내 하다 가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하소연하거나, 자신을 탓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혹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털어놓지. 카운슬링뿐 아닐세.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할 때,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각하기란 그리 쉽지 않네. 하지만 이렇게 시각화하면 결국 이 두 가지밖에 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네. 분명 자네도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해 서로 이렇다 저렇다 논할 필요가 없다네. 자네가 아무리 '나쁜 그 사람' 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불쌍한 나' 를 알아달라고 해도, 그리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는 될지언정 본질을 해결하지는 못하니까.

 

그럼 어떡하라고요!

 

삼각주의, 지금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면, 거기엔 뭐라고 적혀있을 것 같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맞아.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그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어. '불쌍한 나' 도 필요 없고. 자네가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봤자 나는 흘려듣겠지.

 

선생님은 사람도 아니에요!

 

내가 냉담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니라네.

 

아뇨! 선생님은 그저 적당한 논리를 대서 "우는소리 그만해"라고 비난할 뿐이에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나약함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오만한 강자의 이론만 밀어붙이고 있다고요!

 

그렇지 않네. 가령 평소 우리 카운슬러들은 이 삼각주를 상담자에게 건네주기도 한다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으니,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골라서 보여주세요"라고 요청하지. 그러면 많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르고, 그 말할 내용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네.

 

 

 

 

 

 

 

 

 

 

 

 

 

 

아니, 만약 '야단친다' 라는 방법이 교육상 효과가 있다면, 처음 몇 번 야단쳤을 때 문제행동을 하는 일이 없어져야지. 그런데 왜 '늘' 야단치는 걸까? 왜 '늘' 화난 표정을 짓고, '늘'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나?

 

·····그만큼 말을 안 들어요, 그 아이들이!

 

아니지. 그거야말로 '야단친다' 라는 방법이 교육상 전혀 효과가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네. 설령 내년에 자네가 처음부터 심하게 야단친다고 해도 상황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걸세. 오히려 더 심해질지도 모르지.

 

 

 

 

 

 

 

 

 

 

 

가령 자네 교실에서 폭력 사태를 빚은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세. 별거 아닌 말싸움이 주먹이 오가는 싸움으로 발전했네. 자네는 이 두 학생을 어떻게 할 텐가?

 

그런 경우라면 큰 소리로 야단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냉정하게 두 사람의 해명을 들어야지요. 아이들을 달래가면서 차근차근 '왜 싸우게 되었는지' 혹은 '왜 때렸는지' 얘기를 듣겠습니다.

 

학생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뭐 "쟤가 이런 말을 해서 화가 났다" 또는 "나한테 심한 짓을 했다"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양쪽의 해명을 듣고,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 따지고 나서, 잘못이 있는 쪽에서 사과를 하게 해야죠. 하지만 모든 싸움에는 각자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 서로 사과하는 것이 맞겠지요.

 

두 사람이 납득할까?

 

그야, 각자 내 말이 옳다고 우기겠죠. 그저 조금이라도 좋으니 '나한테도 잘못이 있을지 몰라' 하고 생각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싸움에 대해선 양쪽 다 책임을 물어야죠.

 

 

 

자네는 학생들에게 '원인' 만 들었어. 하지만 원인을 아무리 파고들어 봤자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만 할 뿐이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그 아이들의 '목적' 에 주목하고,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라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 한 쪽의 일방적인 요구가 통하지 않고, 객관적인 데이터 같은 상대를 설득할 자료를 준비해야 할 때도 있네. 게다가 지불하는 비용에 대해 즉효성과 확실성이 많이 떨어지지.

 

말씀대로예요. 지긋지긋해요.

 

그렇게 논의에 싫증난 사람, 또는 논의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어떻게 할까? 알 수 있겠나?

 

설마 물러나는 건 아니겠죠?

 

그런 사람들이 최후에 선택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바로 폭력이라네.

 

 

폭력에 의존하면 시간도 노력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밀어붙일 수 있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지. 폭력이란 어디까지나 값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네. 폭력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인간으로서 너무 미숙한 행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네.

 

 

 

 

 

 

그렇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분노란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야단칠 때 조금도 감정적이지 않아요. 발끈해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다 따져본 후에 냉정하게 야단을 치는 거라고요. 이성을 잃고 분노하는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비유하자면 실탄이 장전되지 않은 공포탄을 쏘았다고 말일세.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냥한 사실은 변하지 않네. 거기에 장정된 것이 실탄이든 아니든, 자네는 한 손에 총을 들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거라네.

 

그럼 하나만 묻죠. 예를 들어 칼을 들고 농성하는 나쁜 놈이 있어요. 그러한 상대가 죄를 짓고 싸움까지 걸어와요. 그 주목 끌기인지 권력투쟁인지 하는 싸움을요. 근데 왜 손에 총을 들고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나쁘다는 거죠? 어떻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는 건가요?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할 때 부모와 교육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들러는 "재판관의 자리를 내려놔라" 라고 말했네. 자네한테는 판결을 내릴 특권이 없네.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은 자네의 일이 아닐세.

 

 

 

질책을 포함한 '폭력' 은 인간으로서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일세. 아이들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질책을 받았을 때, 폭력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이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다' 라는 통찰이 무의식에 발동하네. 이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큰 문제일세. 자네는 미숙한 인간을 '존경' 할 수 있나? 혹은 폭력적으로 위협하는 상대로부터 '존경' 을 받는다고 느낄 수 있나? 분노와 폭력이 수반된 커뮤니케이션에는 존경이란 없어. 오히려 경멸을 초래할 뿐이지. 질책이 본질적인 개선책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걸세. 

 

 

 

 

 

 

 

 

 

 

 

 

 

 

 

 

 

 

게다가 주변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미성년 상태' 에 잡아두려고 자립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리스크며 두려움에 관해 이런저런 수를 동원해서 주입하네.

 

뭣 때문에요?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서지.

 

왜 그러는 걸까요?

 

그건 자네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의 자립을 막고 있으니까.

 

제가요?!

 

그래, 틀림없어. 부모 그리고 교육자는 아이들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과보호하네. 그 결과,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의 지시에만 따르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아이'로 키우게 돼.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어도 마음은 여전히 아이인 채로 다른 사람의 지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으로 말일세. 그래서는 자립할 수 없네.

 

아니, 적어도 저는 아이들의 자립을 바라고 있어요! 왜, 제가 뭐가 아쉬워서 아이들의 자립을 방해하겠어요?

 

모르겠나? 자네는 학생들이 자립하는 것이 두려운 걸세.

 

왜, 왜요?!

 

만약 학생들이 자립해서 자네와 대등한 입장이 되면 자네의 권위는 무너지네. 자네는 지금 학생들과 '수직관계' 를 맺고 있어. 그리고 그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이는 교육자뿐 아니라 많은 부모가 잠재적으로 안고 있는 두려움일세.

 

아, 아니, 저는·····

 

또 하나, 아이들이 실패했을 때, 특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당연히 자네에게도 그 책임을 묻겠지. 교육자로서의 책임, 관리 감독의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부모라면 부모로서의 책임. 그렇지?

 

네, 그거야 물론이죠.

 

어떻게 하면 그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아이를 지배하는 걸세. 아이들에게 모험을 허락하지 않고, 무난하고 다치지 않을 길만 걸어가게 하는 거야. 가능한 한 컨트롤할 수 있는 곳에 두는 거지. 아이들을 걱정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닐세. 자신을 위해서지.

 

아이들이 실패했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렇다네. 그러니까 교육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사람, 그리고 조직의 운영을 맡고 있는 리더는 늘 '자립' 을 목표로 내세워야 하네.

 

 

 

 

 

 

 

그래. 학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 이라는 큰 목표에 공헌했다는 공헌감을 갖는다, 그 공헌감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 수밖에 없지.

 

·····공헌감.

 

3년 전에도 말했을 걸세. 행복의 본질은 '공헌감' 이라고. 만약 자네가 학생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기 원한다면, "선생님 덕분" 이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건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자립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해주게.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의존' 적이고 '무책임' 한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교육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립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죠? 추상적으로 말고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가령 아이가 "친구네 집에 가서 놀아도 돼?" 라고 물었네. 이때 "물론이지"라고 허락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숙제를 다 하고 나서"라고 조건을 다는 부모도 있네. 놀러 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부모도 있겠지. 이는 모두 아이를 '의존' 적이고 '무책임' 한 위치에 놓이도록 하는 행위일세. 그러지 말고 "그런 건 스스로 결정해도 돼"라고 가르쳐줄 것.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가 있으면 제공해줄 것. 그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라네.

 

스스로 정한다·····. 아이들에게 그만한 판단력이 있을까요?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네가 아직 학생들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기 때문일세. 정말로 존경한다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겠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할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부모나 교사가 '골라준' 길이어도 마찬가지지. 왜 아이들의 선택은 실패로 끝나고, 자신이 골라준 길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나?

 

하지만 그건·····.

 

아이들이 실패했을 때, 분명 자네에게도 책임을 묻겠지. 하지만 거기에 자네 인생을 거는 건 아니잖아.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본인뿐이야. 그래서 '과제의 분리' 라는 발상이 탄생한 것이고. 즉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결국 자네가 책임질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과제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지.

 

아이들을 내버려두라고요?

 

아니.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지지해주고 도와주라는 말이네. 그리고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되, 너무 가깝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지. 비록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는 사실을 배우게 되겠지.

 

 

 

 

 

 

 

 

 

 

 

 

 

 

 

 

 

 

 

실제 지구는 그러한 환경이 아니야. 식량은 한정적이고, 주거지도 누가 제공해주지 않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을 해야지.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요컨대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지.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니, 말 상대가 필요한 존재니 하는 걸 따지기 이전에 생존 차원의 문제일세. 그리고 타인과 '분업'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어야만 하네. 의심스러운 사람과는 협력할 수 없으니까.

 

 

분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직업에 귀천은 없어. 한 나라의 장관, 기업의 경영자, 농부, 공장 근로자, 혹은 직업으로 보는 사람이 극히 드문 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은 '공동체의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이며 우리는 그것을 분담하는 것뿐이라네.

 

자연계에서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라서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리를 짓고 '분업' 이란 작업 방식을 도입했다. 분업하면 매머드도 쓰러트릴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집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분업이란 좋고 싫음을 떠나 '타인을 신용하는 것' 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분업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타인을 신용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자립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해 나는 "존경부터 시작하라"라고 말했네.

왜 존경일까? 존경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되네. 즉 존경이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 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 이라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너희는 '너희' 인 채로 있으면 된다. 특별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너희' 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존경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전하면, 아이들은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고 자립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할 걸세.

 

 

 

 

 

 

 

 

 

 

 

 

 

 

에리히 프롬은 말했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지.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행동에 나서고,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예를 들면 상대의 호의를 무심코 눈치챈 순간, 그 사람이 신경 쓰이고 차츰 좋아지게 되네. 흔한 일 아닌가?

이는 비록 이쪽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사랑 받는다는 보증' 이 확보된 상태라네.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내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라는 보장 같은 걸 느끼네. 이 보장을 바탕으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지. 한편 프롬이 말하는 '사랑한다는 것' 에는 이러한 보장이 전혀 없네. 상대가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네.

 

·····사랑에 보장을 바라서는 안 된다.

 

그래. 왜 인간이 사랑에 보장을 바라는지 알고 있나?

 

상처받고 싶지 않다,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런 거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상처받을 게 빤해' , '틀림없이 비참한 기분을 느낄 거야' 라고 절반은 확신하기 때문일세.

나는 잘난 데가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누구와도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보장 없는 사랑은 시작하고 싶지도 않다. ·····이건 전형적인 열등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발상이네.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 핑계로 자신의 열등감을 들고 있으니까.

과제를 분리하게. 사랑하는 것은 자네의 과제야. 상대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는 타인의 과제라네. 자네가 제어할 수 없지.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것. 그것뿐일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

 

 

 

 

 

 

 

 

 

 

춤을 추는 걸세. 알 수도 없는 미래의 일일랑 생각하지 말고, 존재하지도 않는 운명일랑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짝과 '지금' 을 춤추는 거지. 아들러는 춤을 '두 사람이 함께 참가하는 놀이' 라고 해서 아이들에게도 널리 권장했네. 사랑과 결혼은 바로 둘이서 추는 춤과 같은 거라네. 어디로 갈지 생각하지 말고, 서로 손을 잡고 오늘이라는 날에 행복을 느끼며, 지금이라는 순간만을 직시하고, 빙글빙글 쉬지 않고 춤을 추는 걸세. 두 사람이 오래 춤을 추며 그려낸 궤적을 사람들은 '운명' 이라 부르겠지.

자네는 지금 인생이라는 무도회장의 벽 앞에 서서, 그저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네. "이런 나와 춤을 출 사람이 있을 리 없어"라고 단정 짓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운명의 상대' 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더 이상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으로 보호하면서.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겠지.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게. 운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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