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주는 간접경험이 이토록 강렬한지 여지껏 몰랐다. 책을 읽고 실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이 책은 작가 본인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쓴 자전적 소설이다. 낙태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묘사한 장면에서 입을 벌리고 읽었다. 임신 중절 수술이 불법인 시기에 어린 여학생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보였다. 난 남자인데도 내가 마치 당사자가 된 것 처럼 무서웠고, 시간을 돌리고 싶었고, 내가 잘 되기를 바랐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찰나의 사건이 한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생각했다.
최근에 책 읽으면서 느낀 점, 외국 책은 문장이 한 번에 이해가 안 돼서 몇 번 다시 봐야 할 때가 우리나라 책을 읽을 때보다 많다. 아니 에르노의 책을 재밌게 읽었고, 알랭 드 보통,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들이지만, 이번에 한강 작가님의 소설을 읽어보니 원어로 읽을 때만 느껴지는 문장의 촉감 같은 게 있는 듯 하다. 더 자연스럽게 읽힌다. 물론 책에 쓰인 지역들의 이름이나 묘사되는 환경들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근데 그것보다는 문장의 형태 자체가 쓰여진 그대로의 느낌이 있다. 원어로 읽는 책은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것 같다. 누구는 문장을 어렵게 쓰고 누구는 쉽게 쓴다는 말은 아니다. 또 어떤 책이 더 낫고 못났고의 의미도 아니다. 그냥, 좋은 책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한강 작가님 책 또 읽고 싶다. 전부 읽어야지.
중절하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못 할 일은 아니었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범한 시련이리라 짐작했다. 내 앞을 지나간 수많은 여성들이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면 될 듯싶었다. 청소년기부터 소설에서 읽었거나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소리 죽여 떠들어 대던 대화가 전해 준 이야기들이라면 많이 알고 있었다. 뜨개질바늘, 파슬리 끝단, 비눗물 투여, 승마 등 중절에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하여 막연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최고의 방법은 이른바 '야매' 의사 혹은 '천사를 만드는 여자'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를 만나는 일이라는데, 이들은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비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작년에 이혼한 젊은 여자는 스트라스부르 출신 의사가 자기 아이를 유산시켜 줬다고 얘기를 해 줬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쥐었다.'라는 말 말고는 자세한 내막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쥘 각오는 서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험을 준비하고 여름 방학을 기다리며 수업과 발표, 카페와 도서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왔다. 이제 시간은 이런 일들로 채워지는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었다. 시간은 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 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 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 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모든 이야기가 유치하고 쓸데없어 보였다. 친구들 방에서 자질구레한 자기들 일상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아침엔가 문헌학 수업을 같이 들었던 몽펠리에 출신의 한 여자애가 도서관에서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 상세하게 생모르 거리에 있는 자기 셋방과 하숙집 주인, 입구에 있는 빨래 건조대, 보부와진 거리에서 개인 수업을 하는 자신의 일상 따위를 떠들었다. 자기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만족스럽게 묘사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미칠 것만 같았고, 혐오감이 일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 누워서 뜨개질바늘을 조심스럽게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궁 경부를 찾지 못한 채 더듬었고, 고통을 느끼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력감에 절망했다.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 되었다. '아무것도 못 함.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울음. 정말 너무 지겹다.'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나서 N. 의사에게 전화했다. 의사에게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몸을 상하게 했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중절을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다 되었음을 그가 알아 주길 바랐다. 그는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얘기했다. 의사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나를 맞았다. 진찰을 하고 나서 모든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몹시 낙담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여전히 갈등하고 있고, 양보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페니실린은 먹어야 해요, 일주일 전후로. 처방전을 써 줄게요."
병원을 나서며, 마지막 기회를 망쳐 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법을 피해 무언가 해 달라는 요구를 끝내 하지 못했다. 임신 중절에 대한 나의 욕망을 의사가 들어주려면, 오로지 눈물을 더 흘리고, 더 애원해 보고, 내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최선을 다해 설명했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 어쩌면 잘못 생각했을지도. 오로지 그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그는 내가 패혈증으로 죽는 일만은 막고 싶어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임신 중절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 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소변이 엄청나게 마려웠다. 복도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고, 문 앞에 있는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허벅지 사이로 타일이 보였다. 온 힘을 다 주었다. 수류탄이 터질 때처럼 문까지 물이 튀었다. 작은 아기 인형 같은 형체가 불그스름한 줄 끝에 매달려 성기에서 대롱대롱했다. 이것이 내 안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걸 가지고 내 방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손으로 쥐었다. ― 낯선 무게감이었다. ― 그리고 내 허벅지 사이에 그것을 꼭 끼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나는 짐승이었다.
O.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를 부른 후 조용히 말했다. "나왔어."
우리는 둘 다 내 방에 있다. 다리 사이에 태아를 놓고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O.에게 탯줄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가위를 집어 든다. 어느 부분을 잘라야 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른다. 우리는 커다란 머리에 투명한 눈썹 아래로 두 개의 푸른 점 같은 눈이 있는 작은 몸을 바라본다. 인디언 인형 같다. 성기를 바라본다. 작은 남자 성기 같다. 그러니까 내가 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O.는 스툴에 앉아서 울고 있다. 우리는 조용히 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말로 표현 못 할 장면이다. 희생의 장면.
우리는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O.가 방에 가서 빈 비스킷 봉지를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그것을 넣는다. 나는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안에 돌멩이가 있는 것 같다. 변기 위에서 봉지를 뒤집는다. 변기 물을 내린다.
일본에서는 중절한 태아를 미즈코, 물의 아이라고 부른다.
나는 피를 흘렸다.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잘린 탯줄에서 피가 불규칙하게 쏟아졌다. 나는 침대 위에 움직이지 않고 누웠다. O.는 수건들을 건넸는데, 피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의사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 없이도 잘 해결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였다. 출혈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에게 당장 의사가 필요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내려가서 수위실 문을 두르렸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확신했다.
당직 의사가 들어오는 장면으로 그날 밤의 2부가 펼쳐진다. 그 밤은 삶과 죽음의 순수한 경험에서 폭로와 심판의 자리로 바뀌었다.
의사는 침대 위에 앉았고, 내 턱을 손으로 쥐었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어떻게 이렇게 했냐고, 대답해!" 그는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나를 보라고!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결코!" 그의 광기 어린 눈 때문에 내가 맹세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게 방치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처방전 노트를 꺼내면서 말했다. "넌 오텔디유에 가게 될 거야." 나는 개인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치 나 같은 여자가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란 그 병원뿐이라고 알려 주고 싶은 듯 그는 "오텔디유."라고 단호하게 한 번 더 말했다. 의사는 왕진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서 지갑 속에 든 돈을 가져갔다.
들것에 실려 방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이 흐릿했고, 안경도 쓰지 못했다. 항생제도, 그날 밤 1부에서 보여 준 냉정도,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야 끝날 일이었다. 출혈이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따져 봤다. 아마도 자르면 안 되는 탯줄을 자르면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청소년기부터 간직해 온 내 육체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기 있고, 비밀스러운 성기가 달려 있던 육체, 그 후로도 달라질 것 없는 남자의 성기 ― 더 생기 있고, 여전히 비밀스러운 ― 를 빨아들였던 육체를. 나는 전시되고, 사방으로 벌려진 성기와 바깥으로 열어서 긁어낸 배를 갖고 있었다. 엄마의 몸과 다를 바 없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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