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회복하는 인간>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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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회복하는 인간>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4. 12. 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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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들을 보고 있다.

 당신의 부어오른 양쪽 복숭아뼈 아래, 정강이에서부터 내려온 인대가 발등으로 막 꺾어지는 자리에 그 구멍들은 뚫려 있다. 왼쪽의 구멍 안으로 보이는 회백색 물질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한다.

 왜 화상을 입자마자 바로 처치를 안 한 거죠? 오른쪽은 괜찮은데, 여기 왼쪽 피부 조직은 좀 심각합니다.

 삼십대 후반의 의사는 고등학생처럼 머리를 바싹 치켜 깎았다. 흰색 진료 가운은 토요일 오후라선지 풀기 없이 늘어져 있다.

 마취하고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겠지만, 그 전에 조금 두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환경을 잘 만들어 주면 조직이 회복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수술이라는 말에 약간 겁을 먹고 당신은 묻는다.

 그럼, 수술을 해야 할지 말지를 언제 알 수 있나요?

 앞으로 삼 일 동안·····

 의사는 달력에 눈길을 준다.

 항생제 드시고 레이저 치료 받으면서 지켜보기로 하지요.

 의사의 군청색 만년필이 차트 위를 어지럽게 달리는 것을 당신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당신에 대한 의사의 태도는 담담하고 차갑다. 도대체, 닷새 전에 화상을 입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세균 감염이 되어 찾아온 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저, 드레싱을 다시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방금 우산을 든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온 당신이 묻는다. 앳된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의사 선생님이 드레싱 해주셨잖아요? 레이저도 소독하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눈 나빠지니까 들여다보지 마세요.

 나무라며 나가는 간호사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신은 왼쪽 복사뼈 아래의 구멍을 들여다본다. 회백색으로 화농된 조직 위로 꿈틀거리는, 붉은 핏줄들 같은 광선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작은 키 때문에 늘 굽이 있는 단화를 신고, 자유스러운 밝은 색 옷을 걸치고, 흰색과 노란색 계열의 스카프를 두르고,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엔 언제나 어렴풋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던 것을.

 

 

 

 

 

 

 

 

 

 

 

 

 

 

 

 

 

 당신이 두 발목에 화상을 입은 것은 닷새 전, 왼쪽 발목을 접질린 다음 날이었다. 침을 맞을 만큼 심하게 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은 동네의 한의원을 찾아갔다. 맵시 있는 개량 한복 치마를 입은 오십대 중반의 한의사에게 말했다.

 예전에 오른쪽 발목을 접질리곤 대수롭잖게 여겼더니 아직까지도 좋지 않아서요. 이번에 삔 왼쪽은 미리 확실히 치료하려구요.

 한의사는 당신을 침대에 눕도록 했고, 왼쪽과 오른쪽 발목에 모두 침을 꽂아 주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왜 그렇게 진하지요?

 당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피곤해서요.

 어쩌다 발목을 삐었나요?

 산에 갔다가·····

 한의사는 침을 꽂은 자리에 붉은 적열등을 쬐어 주고는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뜸을 뜰 거예요. 쌀알만큼 쑥을 뭉쳐서 이 자리에 뜨면, 만성이 된 통증까지 나아집니다.

 한의사는 플러스펜을 꺼내 들고는, 당신의 양쪽 복숭아 뼈 아래의 인대에 굵은 점을 찍어 뜸자리를 표시했다.

 직접구라서 뜨거워요. 그래도 잠깐이니까. 괜찮겠지요?

 별다른 의심 없이 당신은 네, 라고 대답했다.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 두는 뜸을 직접구라고 부른다는 것을 당신은 그날 처음 알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당신은 비명을 질렀다. 상냥한 형리같은 간호사는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하고 당신을 달랬다. 왼쪽 발목까지 살갗이 타는 동안 당신은 계속 소리를 냈고,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당신의 언니의 그것과 똑같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무심코 수도꼭지를 덜 잠근 것처럼 소리 없이, 끝없이 흐르는 당신의 눈물에 간호사는 당황했다. 당신이 더듬더듬 양말을 신고, 구두를 꿰어 신고, 카드로 진료비를 계산하고 한의원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향해 걸어갈 때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한의원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당신은 일에 몰두했다. 예정에 없이 나흘을 쉰 뒤였으므로 일은 몹시 밀려 있었다. 당신은 비몽사몽간에 이를 닦았고, 오 분 만에 급하게 샤워를 했고, 머리를 말릴 틈도 없이 기획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언제 메인보드가 날아가 버릴지 모를 이 킬로그램짜리 낡은 노트북을 양어깨에 둘러메고 도서관과 카페를 전전하며 라디오 대본을 썼다. 눈이 떠지지 않을 때마다 커피를 마셨고, 뜨겁게 달아 오른 휴대폰을 붙들고 게스트를 섭외했고, 녹화 시간 내내 스튜디오의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으며 방송을 챙겼다. 그러는 사이 왼쪽 발목의 뜸자리에서 수포가 부풀고, 양말 속에서 수포가 터지고, 그 자리가 세균에 감염돼 빨갛게 부푸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상처가 욱신거릴 때면 발목을 삔 자리가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토요일 아침 녹음실에서 아픔을 참지 못하고 발등까지 양말을 내려 보았을 때에야 당신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흘긋 상처를 본 다혈질의 피디는 당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 작가! 원,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무식해? 아무리 작은 화상도 제때 치료 안 하면 무섭다는 거 몰라요? 손 자르고 발 자르는 게 남의 일 같아요?

 

 

 

 



 

 

 

 

 

 

 

 

 

 

 

 

 

 

 

 당신의 언니는 눈에 띄게 후리후리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사람들은 평범한 외모의 당신이 언니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성장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열등감을 가졌던 쪽은 당신의 언니였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한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ㅡ특히 아버지와ㅡ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그녀 자신은 견실한 사업체를 가진 여덟 살 연상의 잘생긴 형부와 결혼했고, 거실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았고, 먼 나라의 왕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식기들을 장식장에 진열해 두었지만, 마치 냄새가 싫은 음식을 꺼리듯 자신의 인생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당신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당신과 언니, 둘 가운데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

 

 

 

 

 

 

 

 

 

 

 

 

 

 

 

 

 

 그 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십 년 가까이 쏟아부은 노력들을 당신은 어머니로부터 낱낱이 들어 알고 있었다. 한방병원에서 지은 고가의 탕약들. 배꼽 아래에 흉이 생길 때까지 받았다는 쑥뜸 치료. 불임 시술을 위한 검사들. 초조하게 시술 날짜를 기다리던 시간. 잔혹하게 반복된 계류유산.

 가족 모임에 당신이 나타나면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당신은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애썼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보려 애썼다. 그녀가 웃을 때면 장난꾸러기처럼 찡그려지는 콧잔등을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언니는 자신을 태우지 말고 땅에 묻어 달라고 형부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그녀다운 유언인지 당신은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죽었던 사람이 관 속에서 되살아나는 허술한 리얼리티 드라마를 텔레비전으로 보며 그녀는 당신에게 소곤소곤 말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얼마나 다행이니? 화장해 버렸음 저 사람 어쩔 뻔했니?

 심장이 좋지 않은 당신의 아버지는 영결식만 치른 뒤 고모 내외와 함께 먼저 귀가했고, 형부의 부축을 받고 묏자리까지 올라온 어머니는 하관이 끝날 때까지 수차례 흙바닥에 주저않았다. 어머니를 부축해 내려오다가 당신은 호되게 발목을 삐었고, 신음을 삼켰고, 그따위의 일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이제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이틀 뒤 두 번째로, 이틀이 더 지나 세 번째로 다시 당신이 의사에게 그 상처들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모른다. 하루만 더 지켜보죠, 라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당신이 다시 구두를 앞코로만 끌고 걷는 묘기를 해 수납을 하리라는 것을, 오후 여섯 시가 지나 야간 진료비가 추가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붉은 거미줄 같은 레이저 광선이 훑고 지나가는 왼쪽 발목의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죽어 있는 회백색의 피부 조직을 보며, 드레싱을 할 때 왼쪽은 아팠지만 오른쪽은 오히려 아프지 않았던 걸 기억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아마 신경이 죽어 버린 모양이지, 생각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수술을 하면 이 죽은 부분을 도려내는 거겠지. 가장자리 생살에서 피가 흐르겠지.

 그따위, 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마른 눈을 깜박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이제야 살아나네요.

 당신의 왼쪽 발목의 구멍 속에서, 회백색 조직 가운데 샤프심으로 찍은 것 같은 불그스름한 점 하나가 생긴 것을 보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아주 진행이 더디긴 하지만, 일단 이게 살아난 걸 보니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습윤 테이프 안에서 끝없이 하얀 진물이 흐르고, 일주일에 두 번 레이저 치료를 위해 열어 보는 상처를 변함없이 샤프심으로 찍은 붉은 점 하나이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한 달도 더 지나서야 그 붉은 점이 두 개가 되고, 두 달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굵은 연필로 찍은 점 정도로 커지리라는 것을 모른다.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의사가 미간을 모으며 헛웃음을 웃으리라는 것을 모른다.

 

 

 

 

 

 

 

 

 

 

 

 

 

 

 

 그녀가 그 봉합 수술을 받는 동안 어린 당신은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수술실에 함께 들어갔기 때문에 당신은 복도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고, 그래서 더욱 무서웠던 것이다. 마침내 수술실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울먹이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다. 커다란 멸균 가제와 반창고를 우스꽝스럽게 이마에 붙인 채 머뭇머뭇 반복해 말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먼 화요일 오후의 레이저 치료실에서, 간호사가 습윤 테이프를 뗀 순간 처음으로 선홍색 피가 흥건히 흘려내리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처음으로 그 자리가 쓰라리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모른다. 그날 이후 놀랍도록 빠르게 진물이 줄어 가리라는 것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지금 당신은 갈대밭 가장자리에 누워 있다. 자전거는 천변의 바위 위로 나동그라져 세차게 헛바퀴가 돌고 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당신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과 팔꿈치의 피부가 벗겨진 게 분명하다. 땅에 부딪친 어깨와 골반이 뻐근하게 아파 온다.

 이따위,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있다.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해설

 

 

 

 

 

 

 

치유될 수 없는 인간 삶의 근원적 아픔

 

조연정(문학평론가)

 

 

 

 

 

 

 한강의 소설에는 언제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그려진다. 이때 그들로부터 강조되는 것은 아픔의 원인이나 그것의 치유 과정이 아니라 오로지 아픔이라는 상황 그 자체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특별한 불행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고통의 상황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의 삶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채 삶이 고통 그 자체라는 듯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그 삶을 지탱하는 무수한 통념들,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조건 자체가 견딜 수 없는 폭력이라는 듯 한강의 인물들은 생생한 고통의 감각들을 호소하며 섬세한 강인함으로 이 삶을 가로지르고 있다. 힘없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주어진 조건을 긍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조건과 온 힘을 다해 대치하고 있는 한강의 인물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삶을 끝장내거나,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거나, 한강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어쩌면 이 두 가지뿐이다. 나 자신이 고통으로부터 회복되는 것은 나를 둘러싼 이 세계 전체를 절대 회복 불가능한 상태 속에 방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은 발목에 입은 화상을 방치해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어 병원을 찾아온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언니를 얼마 전 잃었고 장례를 치른 날 산을 내려오다가 발목을 삐었고 치료차 한의원에 갔다가 직접구라는 뜸에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방치해 조직을 도려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소설에 대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의 상처 극복 과정을 다룬 소설이라 단순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족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지만 언니에 대한 이 여자의 사랑은 특별한 것으로 그려진다. 언니는 특별한 외모를 갖고 있었고 특별한 남자와 결혼했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평범한 외모의 고집 센 동생에게, 그래서 별 볼 일 없이 살아가는 그녀에게 열등감을 가졌었다. 언니는 "마치 냄새가 싫은 음식을 꺼리듯 자신의 인생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하는 아이를 갖지 못해 점점 어두워져 갔고 결국 불치병에 걸려 죽어갔지만, 언니 삶의 불행은 단지 그러한 불운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언니는 애초에 그녀에게 어울리는 행복한 상황들에 적응하지 못했다.

「회복하는 인간」이 유독 아픈 소설로 느껴지는 이유를 언니 삶의 불행과 남겨진 동생의 슬픔 때문이라고만 말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언니와 동생의 어떤 '관계'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동생은 "온 힘을 다해" 언니를 사랑했고 언니는 그것을 알면서도 동생을 외면했다.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동생은 포기했고 언니가 죽기 직전 몇 년간 둘 사이에는 왕래조차 없었다. 동생을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명명하며 현재형의 문장들로 써내려가는 이 소설은 자매 간 납득할 수 없는 관계의 어긋남, 그리고 남겨진 동생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그린다. 사실 이 짧은 이야기만을 통해 우리는 자매 간 관계가 파난난 이유나 이들 사이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상세히 알아챌 수가 없다. 이 소설은 두 여성에게 있었던 사실들을 군데군데 무심히 적어 놓으며 오로지 남겨진 동생의 아픔을 재현하는 데 힘쓴다. 이 소설 역시 아픔의 기원보다는 아픔의 상황 자체에, 관계 불능의 원인이나 해결보다는 어긋남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사실 '회복'이라는 말은 한강 소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아픈 발목에 놓은 "직접구"라는 뜨거운 뜸이 발목의 고통을 잊게 해줄 대증요법이 되지 못하고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놓았듯, 「회복하는 인간」은 무엇으로도 잊힐 수 없고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인간 삶의 근원적 아픔을 그린다. 그 아픔을 껴안고 가는 것만이 우리 삶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비평의 목소리

 

 

 

 

 

 

 

 무엇이 그를 좌절시키고 게워내게 하며 광기를 일으키게 하고 삶에 대한 피로 끝에 그것을 버리게끔까지 했을까. 이 가볍고 환한 세상에서 누가, 발랄해야 할 이십 대의 그를 사랑도, 화해도 거부하게, 아니 그것에 다다르기조차 포기하게 만들고 설움 많은 노파의 표정으로 삶의 우수에 젖도록 만들었을까. 이제 와서는 보기 힘든 그 암울한 세상과 가혹한 정서들이 하필 이 신선한 나이의 여자 작가에게 깊은 음영을 드리우며 그의 정신과 영혼을 그늘지게 하고 있을까. 그는, 풍성하고 활기찬 이 시대의 모습이란 한갓 겉모습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직 그만이 겪고 혹은 상상하고 있는, 지금의 눈으로는 예외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혹은, 인정하기 두렵지만, 그가 그려내는 아픈 풍경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인 모습으로 우리들 삶의 원형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근원적인 풍경인 것일까.

김병익

 

 

 

 한강은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내는 작가이다. 그 어떤 제재를 다루더라도 자신만의 고집스런 스타일과 상상력, 주제의식으로 오로지 한강만이 빚어낼 수 있는 그윽하고 깊은 파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그녀가 다루는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들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탐문한다. (···) 해체적이거나 영상적이거나 키치 스타일이 범람하는 1990년대식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고전적인 스타일은 역설적으로 낯설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전적으로 구식 소설을 썼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전적인 소설에서 찾아질 수 있는 신화소를 현대적 혹은 탈현대적 이상 심리로 변형, 생성하려는 한강 나름의 특징적 경향은, 옛것으로부터의 새로운 탈주를 시도한 것으로 읽혔고, 그런 독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우찬제

 

 

 

 한강 소설의 여성성, 채식성, 식물성, 예술성 등은 일상 속에서의 상식적 맥락과 이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처럼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지 않고 주체 내부에서 폐쇄적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내적 태도 혹은 윤리라고 할 만한 것을 이룬다. 그들의 태도는 종종 현실의 규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고 또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있는데, 그럼에도 해석의 장에서 그들의 태도가 갖는 현실적 의미는 그들의 성격이 주변의 인물들에게 미친 효과에 더 가깝고 그 인물들이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감각, 혹은 이미지가 타자의 경험과 자기의 경험을 엮고 다른 관념을 불러온다. 이 감각, 이미지를 핵으로 하여 현실에서의 작가의 경험과 텍스트로부터 연유한 관념들이 얽혀 허구의 우주를 형성한다. 경험과 관념보다 감각, 이미지가 중심에 놓여 경험과 관념을 엮고 이끈다는 점에서 경험이나 관념을 글쓰기의 기원으로 삼는 다른 글쓰기와 구분되는 한강 글쓰기의 고유한 발생적 맥락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손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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