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밤의 끝을 알리는>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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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밤의 끝을 알리는>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5. 1. 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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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싶은 책이 30권이 넘어서 차례대로 빌리려고 리스트를 만들어놨는데, 다른 책들은 잠시 제쳐두고 이 책부터 읽었다. 심규선 님이 쓰셨으니까. 이 책을 최우선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규선 님을 아는 사람은 그녀가 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난 규선님을 안다.

 

 

 규선 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녀가 '부르는 사람' 인 건 알 듯 하다. tv와 같은 대중매체에 자신의 모습을 거의 노출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 이상 들어봤을 곡들을, 또 매니아 층이 깊은 보석같은 곡들을 많이 쓰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가수' 나 '부르는 사람' 이라는 수식어는 규선 님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한없이 부족하다.

 심규선 님은 '쓰고 부르는 사람' 이라는 문장을 이름표로 달고 다녀도 될 만큼 그 수식어와 잘 어울리는 분이다. 규선 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수식어가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규선 님을 잘 모른다면, 우선 규선 님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고, 자신이 부르는 곡과 그것들의 가사를 모두 직접 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랫말들은 단순히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에 짝지어지기 위해서 지어진 글들이 아니다. 

 

 

 나는 규선 님을 '글'과 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에 대해서 잠시 얘기해보고 싶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은 언어, 즉 문자다. 우리는 몸짓이나 표정을 보고 타인의 감정을 읽기도 하지만, 우리가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다면 사람종을 제외한 다른 생물종과 같이 매우 한정적인 종류의 표현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선조의 지식을 물려받지 못했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 글은 우리가 간절히 전하고 싶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를 전달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나는 글을 쓰는 것보다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대체가 불가능한 독보적인 행위다. 난 같은 공간에서 매일 얼굴을 보며 몇 십 년을 함께 생활한 가족보다도 내가 쓴 글을 본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내 안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인간이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표현의 행위로써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가사를 직접 써서 노래를 부르는 건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이 써주기 보다는 내가 직접 글을 쓰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를 노래를 직접 작곡 또는 작사하는 사람은 규선님 말고도 있다. 대중 매체에선 그런 사람들을 싱어송라이터라고 부르는 듯 하다. 근데 나는 왠지 그 말도 규선님을 칭할 때 만큼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규선님에게는 '자신이 부를 곡을 직접 쓰고 그 곡의 가사도 직접 쓰는 사람' , 또는 '가사를 잘 쓰는 가수'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내 마음이 불편한, 무언가가 더 있다. 그리고 그 귀한 무언가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내가 규선 님의 글을 보았을 때 순수하게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였다. 그건 마치 세상을 바꾼 과학자의 이론, 유명한 화가의 그림, 한강 작가님의 소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몸짓 같은 것을 볼 때 느껴지는,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사람을 볼 때의 감정과 비슷했다. 작은 거인을 본 것 같은 느낌. 규선 님의 글은 쓰여진 낱말들이나 비유, 표현 등 문장의 형태가 일반인이 쓸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말하고 싶은 건, 나는 규선 님의 글에서 글쓴이의 피를 뽑아서 써내려간 느낌을 받는다. 그것들을 읽으면 혈액을 공급받는 기분이 들곤 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가는 사람이 타인의 피를 나눠 받으면 살 수 있듯이, 규선님의 글에는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피를 나누어주기 위해선 날카로운 주삿바늘로 살을 뚫고, 많은 양의 피를 뽑아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이토록 다정하고 통찰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팠던 기억을 꺼내고, 감정의 근원을 탐구하고, 다양한 학문에 발을 담그며,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내가 타인이 되어보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한다. 나는 살면서 규선 님의 글처럼 영혼을 감싸주는 것 같은 안락하고 따스한 글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살면서 규선 님의 글처럼 진심어린 위로의 글을 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잘 위로하기 위해서는 잘 써야하는데, 글을 잘 쓰는 능력이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나까지 충만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겐 규선 님이 그런 사람이다.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고, 떠올리면 따듯하고, 닮고 싶고, 그냥 응원하고 싶은 사람. 내게 있어서 그런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셀 수도 없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intro

 

연둣빛 사과 한 알

 

 

 

 

 어린 시절에는 서른 살이 되면, 적어도 서른 살이나 그 언저리에라도 이르면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죄책감 없이, 자신의 무지와 방종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약간은 자유로워진 채로 말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롯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자기 안을 곁눈으로라도 들여다보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내부와의 차단을 시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지해지기, 깊은 상념에 빠지기, 나 자신의 안을 내밀하게 관찰하고 심연을 들여다보기 같은 일들은 시도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급격한 속도로 우울해지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이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무언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써내기에 성공하는 방법이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나도 갖가지 핑계를 동원해 쓰기의 징집령에서 도망쳐 다녔다. 가장 좋은 핑계는 아직 충분한 나이에 이르지 않았다는, 더 나이를 먹어야만 한다는 값싼 변명이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서른이라는 나이는 지루한 5,000m 달리기의 결승선에 펄럭이는 피니시 라인과도 같은 상징이었다. 그때가 되면 어지간한 혼란은 모두 잠재워져 있을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든 '뭐라도' 결정되어 있을 것이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겪은 서른은 마치 어딘가의 경계에 끼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어리지는 않지만 다 늙어버린 것도 아닌. 순진무구함은 간신히 벗겨냈지만 그렇다고 그리 완숙하지도 않은.

 일단 서른이 되고 나면 바깥에서의 기류가 현격히 달라진다. 이십 대에는 저지르고도 등 두드림 몇 번과 함께 용서받을 수 있었던 일이나 저지르지 못한 이유로도 등 두드림을 받을 수 있었던 일들이 모두 비난이나 우려의 시선으로 변한다. 문제는 가장 강렬한 시선이 바로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재단하고 평가하기 시작한다. 자기 스스로 무의식중에 내려주었던 유예기간을 어느새 넘겨버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서른 살은 언제나 혼돈 그 자체다. 그 상태로 이리저리 휘청댈 만큼의 강한 풍속은 줄곧 유지되며, 뭐라도 붙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또 수년 정도가 홀연히 흘러가버린다.

 자, 그렇게 된 것이다. 엉겁결에 서른 살을 달성하고도 몇 년이나 더 지난 어느 날, 나는 내가 이뤄냈거나 혹은 실패했다고 믿는 일들의 열거 앞에서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직도 글을 전혀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노래를 쓰는 것만큼이나 글을 쓰는 것 역시 내 운명의 한 조각이라고 믿어왔던 듯하다. 비록 나의 재능이 충분치 않고 박힌 심지가 그리 올곧지 못해도 언젠가는 그래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딱히 그래야 하는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음악가로서의 삶으로 나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고 글쓰기에 투신해도 좋을 만큼 이렇다 할 글재주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늘 문제가 되는 불꽃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불꽃은 성냥 한 개비만 한 주제에 놀랄 만큼 탐욕스러우며 다 타고 나면 고운 재로, 고운 재에서 다시 불꽃이 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중에 있다. 나는 쥔 부지깽이 하나 없는 그 불꽃의 관리자다. 불은 꺼져서도, 너무 활활 타올라서도 안된다.

 불꽃은 내가 읽은 글들을 모두 살라 집어삼키고도 계속 배고프다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급기야는 타인의 문장뿐 아니라 나의 것을, 거기 등 뒤에 숨겨놓은 부끄러운 낱말들까지도 전부 내놓으라고 한다. 그게 남 보이기에 낯 뜨겁거나 한심할 만큼 어설플지라도 별 상관없다는 듯이. 나는 또 쩔쩔매기 시작한다. 가사에서 드러낼 수 있는 정도가 어쩌면 나의 한계일진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과연 무언가를, 과연 쓸 수 있을까?

 

 십 대에 박완서 님과 피천득 님의 수필을 접한 이후로, 나는 노인기까지 생존한 작가들과 그들의 글 사이에 성립하는 어떤 모순성을 숭배했다. 그것은 회갈빛 재 속에서 피어난 초엽처럼 경이로웠으나 동시에 한없이 평범하였고, 그런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으로 반짝이기 때문에 대조적으로 더욱 초연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였다. 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예술가들이 인생 전체를 바쳐 비로소 소유하게 된 힘과 부드러움에, 어린 나는 기쁘게 굴복했던 것이다. 시대와 삶이 한 개인의 인생에 내린 숙제를 전부 마친 사람만이 그 빛나는 것들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나의 예술가적 목표는 곧 '최대한 생존하기'로 바뀌었다. 충분한 시간만큼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좋은 것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용기 없음을 비난하는 내부의 목소리에 대해 강하게 항변할 구실로 삼으면서.

 동경은 옳고 그름을 정확히 구분하려 들었던 이분법적인 내 어린 시절의 고집 속에서 굳건한 경계석이 되어 늘 거기 있었다. 쓰기에 대한 꿈은 아름다웠으나 늘 내 키보다 까마득히 더 높게 뻗어 있는 담장이었다. 감히 올려다보기에도 무안할 만큼, 너무나 아름답지만 너무 높은 벽처럼 말이다.

 나는 그 벽에 다가가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결국은 주춤거리다가 다시 뒤로 크게 물러서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높은 이상을 경외시한다.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무엇이 있거나, 혹은 있었을 것이다.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감히 만질 수도 없는 보물처럼. 그것을 건드렸다가 흠집을 입힐 바에는 작은 유리관 속에 넣어두고 평생 바라만 보더라도 간직만 하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하고 연약한. 그러나 더 연약한 쪽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꿈은 품에서 떨어트리더라도 파열음을 내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지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치도 채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만 갔다.

 

 나의 도망침은 내 십 대와 이십 대 전체를 통해 불규칙하고 연쇄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내가 노래를 쓰느라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동안, 혹은 그 안을 샅샅이 훑고 뒤지는 동안 일어나곤 했던 도망친 꿈과의 조우는 그 즉시 새로운 도망침을 부추겼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아마도 설익었을 것이 분명한 내 안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니면 미숙한 나의 상태를 스스로 마주하는 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고통에 대한 변명으로 글이 부족한 것은 아직 '충분한 나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참 오래 되뇌었다.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렇다면 충분한 삶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린 시절 처음 운율이 있는 짧은 시 비슷한 것을 짓고 나서, 나는 꼭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충분한 삶'은 줄곧 나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일까?

 나의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문장과 글감이 내 머릿속 재판소에서 기각되거나 즉결 심판되었다. 가까스로 풀려난 시상들은 스스로 날아가서 노랫말이 되었다. 글쓰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참 편리하고 쉽게 돌아서 갔다. 그렇게 이리저리 휘감기며 흘러도 시간은 1초도 틀림이 없었다. 현재에 이른 것이다.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서른이 되었을 때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조차 이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노래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더듬더듬 유추할 뿐. 대단히 특별한 일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기록해둔 노래들이 아니라면 나는 흩어져가는 기억 속에서 별 수 없이 그냥저냥 살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그 시절에 태어난 노래들 속에 단단히 새겨져 있다. 그래서 노래를 들으면 기억 속 영사기에서 어떤 장면들이 타르르르 낡은 소리를 내며 펼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함께 있었으며, 무슨 꿈을 꾸엇고,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지가. 그나마도 써두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어제를 기억했을까? 어제를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내가 어제와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

 

 나의 지난 노래들에서는 대부분 설익고 덜 여문 풋내가 풍긴다. 마치 한 입 베어 물면 떫고 쌉싸름한 향기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연둣빛 사과 한 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풋사과의 시고 푸른 맛을 우리는 차마 잊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설익은 맛의 기억과 같은 특징들 때문에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애틋해하고 뒤늦게는 용서도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훌륭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따지는 기준이 필요 없다. 마치 풋사과처럼, 그 당시의 현재에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에.

 나는 왜 자신의 설익음에 대해서 그토록 너그럽지 못했을까? 그 파아란 설익음이 존재하여서 붉은 농익음도 있다는 걸 무시하면서. 지금은 내가 왜 완전해지기를 기다렸는지도,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우리의 눈앞에서 손등 위에 내린 눈송이처럼 금세 녹아 없어져버릴 것이기에, 만약 내 인생에서 어떠한 일을 언젠가 반드시 하겠노라 한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제부터는 달리 말하기로 한다. '지금'이 바로 '글을 쓸 때', '그 일을 저지를 때'라고. 어설프고 풋내 나는 글일지라도 종종 써보려 한다. 나의 새파란 설익음을 당신과 함께 나눴으면 한다.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멋진 것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데,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공포감이 듭니다."

 "후회할 걸 알면서, 같은 실수를 매번 또 저질러요."

 "행복해지고 싶은데, 나는 그냥 내가 너무 싫어요."

 "매일 죽고 싶은데, 사실 너무 살고 싶어요."

 

 크고 작은 모순들은 이렇게 좋지 못한 조합으로 묶여 있다. 서로 엉켜 있는 정반대의 것들이 우리의 삶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걸 손 놓고 지켜보곤 한다. 모순은 수십 겹으로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 같다. 그것을 끝까지 풀어헤쳐 보면 언제나 불쾌한 콤플렉스 한 뭉치가 똬리를 틀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다.

 

 

 지금 내 모습과 꿈꾸는 모습 사이의 거리는 행성과 행성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멀어 보이기에,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순순히 납득해 버리기가 별로 그렇게 힘이 들지도 않는다.

 두려움에 설득당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싸운다. 내가 가진 모순성과 불완전함이 나의 존재에 개성과 특별함을 부여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나는 기성곡의 고음 부분을 다른 친구들처럼 아름답게 소리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스스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콤플렉스가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고 그리하여 간신히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중저음을 가졌는지를 말이다.

 

 

 내가 그토록 부끄러워하고 절망했던 나의 특질은 사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꽤 적합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가끔 목표한 문을 통과하지 못해서 죽고 싶을 만큼 좌절하고 지독하게 부러지거나 꺾인다. 선한 당신은 모든 탓을 자신의 부족함에 돌리기도 한다. 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해보지 못할 것이다. 당장 죽는 순간이 닥쳐와도 우리는 여전히 무분별하고 모순적이며 절대적으로 불완전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기' 만큼 많은 힘이 드는 일도 끄떡없이 해내고 있는 상태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한 번쯤은 시도해보자. 나도 그렇게 한다. 이 방법은 낡았지만 늘 틀림없는 효과를 발휘한다.

 

 

 지금에 이르러 어떤 다정한 사람들은 내게 목소리가 '완벽하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스스로 믿기지는 않지만 어떤 누군가에게 나는 '완벽한' 목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좌절 중이었던 그 소녀에게 이 말을 전해준다면, 그 아이는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 그 애는 절대 그 말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좌절과 절망이 그런 것이다. 그것은 새까맣고 무거운 장막처럼, 우리를 덮어버린 다음 보지도 듣지도 꿈꾸지도 못하게끔 하는 데 그 용도가 있다. 과거의 소녀와 지금의 나의 목소리가 달랐을까? 다른 노래를 부르는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는 바로 별것 아닌 데 있다. 장막을 걷어버리고 나왔는가, 아니면 아직 그 안에 있는가의 정도 차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완벽하지 않았을까?

 

 

 나는 좌절에 맞닥뜨릴 때, 종종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것을 사랑하는데. 당신도 소리 내 말해보라.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이건 정말 효과가 있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것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어쩌면 콤플렉스는 우리 인생의 길잡이이자 당신만의 사랑스러운 특징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가 따라 걷는 닦인 길에서 벗어나 작은 오솔길에 들어서게 하며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한다. 나 역시 지독한 콤플렉스와, 그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멋진 것들을 쭉 나열한 뒤 분류할 수도 있을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오히려 자신 있었던 것에 발이 걸려 호되게 넘어졌던 횟수와도 비슷할지 모른다. 콤플렉스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쁜 것은 우리를 덮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박차고 일어날 때 그것들도 자연히 스르르 벗겨질 것이다.

 

 오늘 내가 우리에게 기록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존재를 누름돌처럼 짓눌러대는 우리의 콤플렉스들을 어깨에 이고 가지 말고 이제 그냥 놔버리자는 것.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이 나를 어떤 길로 이끄는지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제의다.

 우리는 이미 옳은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 길을 피해 가려 애쓰기도 한다. 그런 점이 바로 우리 인생의 역설이며 아주 흔하게 맞닥트리는 모순일 것이다. '너의 즐거움을 따라가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해보면 어떨까 한다. '너의 콤플렉스를 따라가라'라고. 그러면 당신은 분명 처음 보는 새로운 길로 그 즉시 들어서게 될 거라고.

 

 

 

 

 

 

 

 

 

 

나의 외계

 

 

 

 나의 독서량은 대단치 않지만 독서관은 특이한 편이어서, 책 내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다지 곤란함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 흥분과 찬탄을 느낄 뿐, 저자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놓은 업적을 내가 단번에 깨칠 수 있으리라고는 착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대단히 기술적인 것은 동시에 대단히 예술적이기도 하며, 고도의 예술 또한 놀라우리만큼 많은 과학적 체계들을 지닌다. 나는 '저곳'과 '이곳'의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 또한 많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무슨 비밀이라도 발견해내는 느낌으로 이 책 저 책을 마구 들추어 본다.

 

 

 나의 소중하고 작은 새에게.

 나는 당신이 텍스트에 목을 축였으면 한다. 갈증을 채우고 깃 사이사이에 엉긴 먼지들을 씻어 내려 그 안에서 날개를 펴고 참방대는 몸짓이 되길 바란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어깻죽지가 기름때로 엉겨 붙기 쉽다. 스스로 더러워진 깃을 골라내지 않으면, 이내 날아오르기를 시도하는 일조차 버거워지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 갇혔다고 느낄 때 회색 하늘과 먼지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하는 것은, 그 어딘가에 아름다운 쉴 곳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일탈적 여행이 성사되지 않는다 해도 당신 마음 속에 있는 작은 새는 언제든지 새로운 앎을 통해 우리 행성계의 끝자락과 그 너머까지도 가볼 수 있다.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문제가 점처럼 하찮게 보이는 대기권의 높이까지, 텍스트적 만족감이 안겨주는 정신적 고양을 통해 날아오르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니 영혼을 일으켜 때때로 텍스트에 투신해보는 것은 어떨까. 맑은 샘물처럼 오랜 시간 숙고함으로써 정제된 문장들에 몸을 담그고, 당신 안에서 튀어오르는 단어와 낱말들을 백지 위에 쏟아냄으로써 무거운 머리를 비워내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예술과 텍스트의 공통점은 그것이 언제나 양방향으로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순수한 의도를 가진 예술은 행위자와 경청자 모두를 언제나 동시에 치유해낸다.

 

 글과 그 안에 담긴 생각은 우리가 가진 어떤 종류의 목마름도 손쉽게 해소해낸다. 나도 5분 남짓한 가사들로 하여금 그러한 순간들을 재현해보려 늘 꿈을 다지곤 한다. 어떤 글들은 시대의 향기와 풍경을, 때로는 총성과 외침을 내포하고 있으면서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거나 강한 고리를 엮여 있다. 한 개인의 일생을 거쳐 탈고되어온 믿음 혹은 그 신념의 방향은 우리의 삶이 아홉 갈래 혹은 그 이상의 갈래로 얼마든지 퍼져나갈 수 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나와 당신은 점점 좁혀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자신의 세계에서 종종 질식하는 느낌을 경험한다. 우리는 일부러라도 바깥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하고 그런 의미로 모든 텍스트와 그를 포함한 예술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외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한한 외계를 누비며 행성과 행성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사실 바로 거기에 개인적 세계의 팽창과 연결, 구원이 있다.

 

 좋은 글은 안개 속에서 몽롱해진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등대의 빛처럼 직선으로 날아든다. 선대의 '우리'가 남긴 중요한 비밀들을 잘 간직했다가 다시 후대의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하라는 임무를 맡기기도 한다.

 내 생각에 텍스트는 인간 내면의 가장 완성적 표현이며 모든 예술의 시작이자 뿌리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의 무자비함에 대항한다. 처음 본 타인을 향한 희생이나 미움을 내포하는 사랑 혹은 가족을 해친 자에 대한 연민처럼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는 복잡한 감정계를 지닌 우리들이 후대에 남기고 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 선택에 따른 유전적 정보만은 아닐 것이다. 텍스트는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우리의 정신적 유산을 복제하여 가장 널리 퍼트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노래가 들려지길 꿈꾸지 않는다.

필요한 당신에게 온전히 가닿기를.

필요한 순간에 온전히 쓰이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고,

그것으로 나에게 이미 충분하다.

 

앨범 <몸과 마음> 중에서

 

 

 

 

 

 

 

 


"너의 앞에 내가 설게

너는 너무나도 작고 약하지만

아름다운 안을 가진 걸"

 

 

 

 


 

 

 

 

 

 

 

 

 

 

 

 

생존자에게서 온 편지

 

 

 

 다정한 당신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상처를 준 일보다 상처받았던 일이 훨씬 많이 때문에 본능적으로 다친 쪽의 상태에 먼저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런 어두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거나 자기 우울함을 옮기는 건 아닌지 두려워한다. 때론 '징징대서' 미안하다는 말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가장 마음이 아프다. 그런 표현들은 아마 당신의 안에서 나온 말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들었던 말이지, 들어야 했던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당신이 걱정하는 것처럼 당신의 무게는 결코 나에게 가중되지 않는다. 나의 책임이 당신에게 지워질 수 없듯 당신의 어둠도 오직 당신만의 것이기에.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였거나 그것을 이해하는 누군가와 고통을 나누었을 때, 그 무게가 변화함을 단번에 느낀다. 그래서 자기 짐을 떠넘겼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지고 있던 것을 잠시 땅에 내려놓은 것뿐이다. 너무 오래 지고 있어 내 몸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듯한 멍에를, 잠시나마 내려놓고 팬 등을 서로 살펴주듯이. 그러니 부디 안심해달라. 내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당신의 무게는 전가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때때로 등을 맞대며 서로의 체온과 마음을, 이야기와 노래를 한없이 나눌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아픈 고백을 통해 당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내가 얼마나 애틋한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상처가 심연에서 꺼내어져 내게로 왔다는 점에서 나는 또 한 번 행복하다. 우리의 상처는 어둠 속에서 간직될 때만 우리를 해칠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말이나 글로 바깥에 내뱉고 나면, 그 끌어낸 행위 자체만으로도 괴물은 제 이빨과 발톱을 몽땅 잃는다. 우리는 충동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내 안에서 나가라고, 나는 더 이상 너를 먹이고 살찌우기 않겠다고 외치고 싶은 그 충동을.

 

 이렇게 우리는 서로 연대하기 위해 서로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방송 매체에 출연하지 않는 나를 당신이 알게 된 것은 '발견하였다'는 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노래 '안'의 가사에서 말하듯 '화살처럼 서로를 향해 쏘아진 채' 우리는 만나게 된 것일지 모른다. 덕분에 나는 많은 사람 속에서도 뭉뚱그리지 않고 늘 거기 선명하게 파란빛을 내는 당신을 본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조금이나마 당신의 영혼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당신에게 또 한 번 고마워한다. 서로를 두드렸고 기꺼이 열어주었음에 감사한다. 그러한 연대감이 우리의 노래를 완성한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집단적 무의식을 공유하며, 비슷한 것들을 소유하거나 박탈당하곤 한다. 그래서 아무리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해도 모두가 조금씩은 일련의 접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우리는 음악이라는 위로에 한데 뿌리를 두고 거기에 속해 있다. 그 숲에는 나와 당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우거지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가지를 맞대고 있다. 만날 수 없는 동안 나는 혼자 노래하기도 하지만 너무 염려치 않아도 좋다. 나는 당신이 내가 매일 노래하는 극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 객석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어도, 나는 당신이 분명 거기 있는 것을 안다.

 

 어떻게 하면 우울과 후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나는 과거의 슬픔을, 이미 일어난 어떤 일들을 내 뒤에 두기로 자주 결심한다. 그것들과 함께 사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것을 앞세우고 뒤꽁무니를 따라 걷는 것은 더 지옥일 것이다.미래에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멋진 일이 일어나든, 우울과 후회가 먼저 가서 그것들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애써 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안에 턱끝까지 잠기게 되면, 그런 어리석은 착각도 곧잘 하게 된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이럴 거라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판결을 쉽게 내려버리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과거에는 그렇게 빼앗긴 시간들도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내 귀가 들으라고 내 입으로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이 깜짝 놀라서 내 곁에서 물러서도록, 악을 쓰고 발을 구르면서 마구 달려가버리는 것이다.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버렸다면 언제든지 쉬어도 좋지만, 느릿느릿한 우울이 가까이 따라붙는다고 느껴질 때는 힘을 내서 가고 매일 또 가는 것이다. 내일을 바라보는 것은 창밖을 보는 일과 비슷하다. 비행기에서도, 달리는 기차에서도,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창밖의 풍경은 언제나 설렘과 기쁨을 준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울면서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거울 대신 창밖을 보려고 할 뿐이다.

 

 슬프고 괴로운 일은 매일 일어난다. 어제도 어떤 끔찍한 뉴스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피해자라는 말이 불편하다. 그 말은 계속해서 나를 가두고 비난한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이 내 마음을 크게 때렸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다그쳐왔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내가 게을렀기 때문에,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 모든 일이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그 아이의 잘못이었을까? 한때의 실수로 그렇게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잘못되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 증거도 있다. 당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개 보여준 글을 읽으며 당신이 겪었던 슬픔 위에 세워진 용기를 본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매일 살아남아 다시 한 번 더 내게 생존을 약속한다. 나는 당신을 세게 안아줄 수 없어 급한 대로 이곳에 글을 남겨두기로 한다. 주먹이 꽉 쥐어질 만큼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당장 고개를 들고 어깨를 피라고. 당신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고. 당신 인생의 떳떳하고도 유일한 생존자라고.

 

 

 

 

 

 

 

 

 

 

 

둥지 짓는 새

 

 

 

 금.

 응달에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하등 무가치해 보일 뿐인 저 여윈 가지들을 새들은 한곳에 나르고 엮어 모아 아늑한 둥지로 완성해낸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때 사뭇 감탄하고 대견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완성된 '둥지'라는 결과를 눈으로 보고 단순 이해할 뿐, 둥지를 이루고 있는 저 하나하나의 나뭇가지를 모두 별개의 노력으로 인식해내지는 못 할 것이다.

 지금 허공에 쌓아 올리고 있는 우리의 허술하고 투박한 삶의 얼개. 누가 응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지켜봐주는 일도 없이 처음부터 삐뚤빼뚤 혼자 엮어나가야만 하는 것이 어쩌면 바로 우리들의 삶이자 둥지다. 지칠 만큼 긴 시행착오를 거치며 견딜 수 없이 느린 듯 보이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뭔가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완성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우리의 작은 시도들이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혹은 이해하면서.

 

 토.

 며칠째 둥지 짓기에 진척이 없다. 마찬가지로 며칠째 단 한마디도 덧대어지지 않는 곡 작업에 이골이 나버린 나는, 아예 가까운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둥지의 주인들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하지만 해가 다 저물어가도록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드는 작은 새의 모습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잠시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씩씩하게 마음을 챙겨 주변을 걷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어쩌면 그 새들은 다른 곳에 둥지를 짓기로 한 것일지 모르겠다. 공원 초입 어귀에서 늘 사람 시선을 타는 나무 위보다, 더 아늑하고 따사로운 자리를 발견해낸 것일지 모르겠다. 둥지를 짓는 데 필요한 작은 나뭇가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나느 빙긋이 웃는다. 새들을 보내준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새들이 여태 짓고 있던 둥지에 미련을 느껴서,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도 없고 새로운 도전이 두려워진 바람에, 아니면 떠나도 되는지 그냥 머물러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서 가슴 치며 밤새 괴로워하는 일 같은 건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의 낭비는 오직 사람만이 한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마음속에서 나뭇가지들을 가만히 엮어가며 형태를 만들어본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때 조그맣게 옆으로 난 갈래 길을 발견한다면, 소란 떨 것 없이 그 순간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도 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의식적으로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쉽게 용기 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래도 된다'는 말보다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따르고자 하는 충동 앞에서도 늘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더해 일정 부분 죄악감마저 느끼게 되는 이유다. 온갖 불안과 불편, 불리가 날뛰며 우리를 거칠게 밀어낸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에서 저만치 나가떨어진 뒤에 이미 주어진 길만 따라 걷도록 종용한다.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그렇게 잘못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또 다른 나무 위에 새로운 둥지 짓기를 시작해도 된다. 나는 '그래도 된다'라고 조그맣게 소리 내 말해본다. 그래도 된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는다. 다시 시작해도 된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그래도 된다'.

 

 

 나도 모른다. 삶이 무엇인지, 그것이 결국에는 어떤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의미와 이유란 거대한 것들로, 이토록 작은 존재인 우리가 한 손으로 낚아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모든 물음도 여전히 물음인 채로 계속 거기 존재할지 모른다. 우리는 나뭇가지 한 개만큼의 깨달음을 엮어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삶의 이유가 이런 것은 아닐 듯하다. 남 보이기에 그럴듯한 뭔가를 기어이 완성해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느라 더 이상 노래하지도 날지도 못 한다면 그것이 과연 새에게 옳을까?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삶이 옳을까?

 

 일.

 나는 춤추듯 걷는다. 꽉 막힌 채 너무 오래 머리를 아프게 했던 낡은 작업물들을 책상 아래로 밀쳐내버리고 언제든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마음 한편을 비워두기로 한다. 지난 일주일간 새 둥지를 관찰하면서 알게 된 점 중에 하나는, 새들이 일면 나보다 혹은 사람보다 더 지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빈 둥지를 올려다볼 때마다 새들이 거기에 남겨놓고 간 전언을 어렵지 않게 상기한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초조해하지 말기를,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의식하지 말기를. 대단찮은 어제에 묶여 있지 말기를. 마음을 따르고, 늘 새로움을 선택하기를. 나아가기를.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상관없다는 강한 마음으로, 작은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모아 엮어가기를. 얽매이지 말기를.

 둥지를 짓는 새처럼, 둥지를 떠난 새처럼.

 살아가기를.

 

 

 

 

 

 

 

 

 

 

 

 

밤의 정원

 

 

 

 조화로운 화성과 그 위를 거니는 멜로디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음악 속 세계를 다양한 시대들로 순식간에 확장시키거나 색깔과 감촉, 시대정신과 철학을 불어넣는 역할은 언제나 가사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골머리를 싸매고 해석할 필요가 없어야만 하는 보편적 예술에서는, 도드라져 보이는 외관에 집중한 나머지 안에 있는 것들을 소홀히 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건 마치 형식과 스타일이라고 하는 금칠 된 빈 그릇만 있고 내용물은 아주 빈약하거나 아예 없는 것과도 같다.

 나름의 진중한 관찰 끝에 좋은 노래의 심부 안에는 공통적으로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부르는 노래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고자 했다. 그냥 노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좋은 노래를 하고 싶었고 거기에 대해 늘 목말라했던 것 같다. 집요했다.

 

 

 나는 끝을 모르고 계속 원하며, 늘 불충분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절박하게 어떤 훌륭한 것에 가닿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성장기가 비참했기 때문에 절실히 그 반대급부를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듣고서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처럼, 나는 온전히 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모래 더미들 사이에 파묻힌 채로 깊이 절감하게 되었다.

 

 

 최초의 습작들이 얼마나 어설프고, 가당찮은 재료로 쓰였는지 기억한다. 그래도 내가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재료라고 하는 것이 수준 낮아 보일지라도 진정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떠한 도움과 탄탄한 뒷배경도 없이 예술과 창작에 투신하고자 한다면, 나는 한 가지의 규율만을 가슴에 품고 갈 것을 권해주고 싶다. 다만 진실할 것, 절대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것.

 

 오직 진심 어린 실토만이 사람의 겹겹이로 둘러싼 온갖 껍질들에 침투하여 마음 저 안쪽까지 가닿게끔 한다. 굳이 집단 무의에까지 기대지 않더라도, 저이 역시 나만큼이나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를 선 긋는 장해물들을, 무의미한 형식으로 여기며 단호히 무시해야 한다. 동시에 때 묻은 자의식의 거울 앞에서 벗어나 헌신적인 경청자의 두 눈 속을 의심 없이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이 가장 맑고 선명한 투영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는 어느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채야 하는 것이다.

 

 빨리 화려해지고 싶어서 남의 꽃을 꺾어다가 자기 가지에 매달아본들, 대기를 온통 물들이는 향기마저 뿜어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을 들여 무던히 이루시라. 그렇게 이룬 것만이 빼앗을 수 없는 당신의 것이라고. 당신의 이름이며 당신이 설 땅이며, 당신이 세운 세계가 된다는 것을 정직히 믿으시라고.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게 하신 뒤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아 있거라.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연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나이에는 동정을 거부해야만 하는 나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순수한 연민은 사람이 내표할 수 있는 감정 중에서 가장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나는 종종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이 나쁜 것일까? 어떤 이들은 사회적 분위기와 통념이 그러하므로 무심결에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에 나를 맞추는 것은 아주 다정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동이지만, 사회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그러하기에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툭툭 튀어오르는 뻣뻣한 아이였다. 그래서 자라는 내내 말해서는 안 되는 단어처럼 취급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건방지게 나름의 철학도 조금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제로 가족의 죽음을 목도하자 돌로 만든 조각처럼 온 뇌가 즉시 굳어버렸다.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도 할아버지와의 헤어짐이 전혀 믿기지 않는 일상은 아침부터 밤까지 혼란 그 자체였다.

 왜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진작부터 소리 내 대화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내려져 있는 어떤 선고가 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애써서 무시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갑작스럽게 사별에 맞닥트린 수많은 사람은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걸 묻어두고 눈물로 적시면서 싹 틔우는 대신 사정없이 끄집어내서 햇빛 아래 던져놓고 싶었다. 손톱만큼이라도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 있었으면 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종종 내가 죽는다는 상상을 한다.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안개 속에 갇혀 있을 때,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대번에 밝아지는 효과가 있다. 괴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 앞뒤 모를 어둠에 갇혀 있을 때라면 더욱 절실히 그렇다. 오직 죽음에 대한 자각만이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판단한다.

 

 

 나는 아직 정립되지 못한 빈곤한 철학으로 우리가 오직 경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삶의 꼭짓점에 언젠가 반드시 도달해야만 한다. 그런 것을 욕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 우리의 원죄라면, 삶을 갖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르려면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젠가 틀림없이 죽는다'는 지각은, 마취된 삶을 깨우는 각성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는다. 왜 영영 죽지도 않을 것처럼 원하는 것을 내일로 미루며 살아갈 것인가.

 

 

 나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 속에서,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더워지는 몇몇 순간들을 기억한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어느 날, 삶을 포기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죽어서도 알 수 없었을 눈부시게 경이로운 생의 한 페이지들을.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목마름을 모르던 시절들을. 한쪽 모서리가 고이 접혀 있고 그날의 눈물 자국도 함께 말라붙어 있는 그 기억들 속에서, 나는 여지없이 내 할아버지의 오랜 당부를 되새기게 된다.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는다. 그러므로 그 작은 사실은 결코 우리의 고민거리가 될 수 없다. 만약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죽고 싶다고 느낀대도 괜찮다. 그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울 만큼 삶을 원하고 있다는 반어이지 직해해야 할 뜻이 결코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렇게 잘못되지 않았다. 태양도 늙어가고 심지어 별도 죽느낟. 우리가 아는 모든 이와 우리 역시 언젠가는 틀림없이 죽는다. 애써 서두르지 않아도 그때는 꼭 온다. 그러니 온 생을 통해 다가올 죽음에 떳떳이 맞서보면 어떨까? 태어날 때 얻은 텅 빈 상자 안을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 넣었다고, 네가 내일 나에게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살아가겠다고.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가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삶의 유한함을 직시하며 작은 용기를 반짝이는 그때.

 우리는 수만 가지 색채 속에서 '살아 있음'을 본다. 삶은 그 무엇보다도 열렬하고, 내밀하며 충만하게 존재를 뒤흔든다. 우리는 언젠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허나 내 할아버지의 당부처럼, 살아 있으시라.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소로

 

 

 나의 사랑스러운 벗에게. 우리를 떠올리면 내 마음이 덥다. 나의 지난날과 오늘 당신의 고독이 마치 거울처럼 닮아 있는 듯해 더욱 애달프고 섧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길을 잃었다 생각했을 때조차 사실은 길 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충분한 만큼 울어도 좋다. 눈물을 가두고 모은들 바다라도 되겠는가? 필요한 만큼 아파해도 좋다. 우리는 부러진 다리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통증을 느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억지로 일어서기가 아니라 치료와 회복인 것이다. 그리고 당부컨대 너무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는 마시라. 길은 걸음 뒤에 자연히 나는 발자취일 뿐, 우리가 긍긍하며 찾아 나서야 할 보물도,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보조로 살며 정원을 가꾸듯 생에 시간을 들이시라. 작은 씨가 움트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라.

 우리는 나사도 부품도 아니고 살아서 꿈을 꾸는 존재이다. 사회가 이어 붙인 통념 혹은 그 부스러기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결코 잊지 마시라. 자신을 안다는 것 자체가 곧 대체될 수 없는 자존감이며 길 잃지 않게 하는 무수한 표지 중에 하나임을, 배우는 대신 이제 깨달으시라. 내다보는 대신 들여다보시라. 자기 안의 자신에게 먼저 묻고 또 물으시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세상을 무시하시라. 당신이 거기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의 세상도 있는 것이다. 사위가 전부 진창이라면 머무르고 싶은 곳에 이를 때까지 걸맞은 속도로 겸허히 가시라. 다리가 아파 멈춰 쉬는 것을 아까워 마시라.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자신에게 말을 걸며 그저 묵묵히 가시라. 어느 순간 주변이 고요해지고 세상의 넋두리들도 사라지면, 비로소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소리가 끊이지 않는 긴 돌림노래처럼 귓가에 머무르며 계속 들려오게 하시라.

 

 

 

 

 

 

 

 

 

 

 

 

무지개의 끝

 

 

 

 '당신의 모든 슬픔은 달래져야만 한다'고 나는 늘 말해왔다. 그래서 헤어짐을 겪은 뒤 나처럼 혼자 끌어안고 울고 있을 이들이 기댈 노래가 한 곡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안다. 사별의 슬픔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그러나 우리는 아파할망정 결코 후회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위이며 당신 인생의 굉장한 혜택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헤어짐은 두려워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지개처럼 영롱한 빛을 내는, 사랑의 오색찬란한 시간을 일부러 피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 헤어짐이 두려워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것은 결코 인생이 아닐 것이다.

 

 

 

 

 

 

 

눈과 눈에 대한 고찰

 

 

 

 지겹고 고루하게 반복되는 삶은 사실 매일 생경하다. 우리의 세계는 빛과 색채로 가득 차 있어서 눈앞의 풍경이 아무리 익숙하든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랄 만한 멋진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를 다른 무언가에 빗대어 그 가치를 설정하지 말고, 존재 그 자체로 들여다보려는 소소한 결심만으로 충분하다. 뻔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전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우리를 붙잡아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눈의 결정을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찾아봤더니 '생성 시 결정의 온도와 수증기릐 과포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적혀 있었다. 쉽게 말해 구름 속을 떠도는 동안에 겪은 여러 가지 변화에 따라, 그리고 구름 속에서 떨어지면서 겪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두 개별적으로 다른 형태와 모양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갑자기 흥미가 동해 몇 시간 동안 모두 다른 수천 개의 눈 결정 사진들을 찾아보며 감탄을 반복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나뭇가지 모양, 육각 모양, 별 모양 같은 결정들을 제외하고서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아름다운 대칭들이 많이 있었다. 진정으로 감동할 만한 부분은 눈 결정의 완벽한 대칭성이나 복잡성이 아니라, 살아온 환경에 따라 똑같은 모양이 단 한 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깃든 드라마였다. 마치 우리 사람의 인생과도 너무나 닮아 있는 특징이 아닌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존재. 그러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차이들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정도.

 

 

 이처럼 우리가 수고와 의지를 들여 발견한 아름다움은 쉽게 스쳐간 아름다움들보다 오랫동안 우리 안에 새겨진다. 그렇기에 일부러라도 우리는 보기 위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눈으로 본 것만이 가장 오래 각인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의식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깊은 슬픔과 고독함, 두려움, 어둡고 끈적이는 마음의 늪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눈을 뒤덮어버릴 때도 있다.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침잠하여 안전하고 익숙한 늪 속에서 그저 웅크리고만 싶을 때,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면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해도 거부하며 비아냥거리고 만다. 무엇을 보아도 잿빛으로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 때야말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야 하는 가장 좋은 적기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우리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우리의 눈에서 안개를 걷어가고 삶의 전체와 세포들을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한다. 우리사 삶 속에서 미세한 아름다움들을 발견할 때, 그것이 당신이 찾아낸 것이고 찾아내야 할 만큼 작은 존재였음을 인지할 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피었다가 사라지기도 하며 그 사라짐을 통해 삶의 유한함의 직시하게 할 때, 비로소 나의 존재의 구성 또한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넘어지는 것이 당연했을지 모를 시간들을 지나 이제 나는 무언가를 통해서가 아닌 나 자신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찾아내길 바라고 있다. 단순히 보는 데 지나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그 안에서 수없이 발견해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날도 있지 않을까 한다.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옳은 눈으로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있을 날이. 그리고 그 안에서 녹지 않고 투명하게 빛나는, 자신만의 눈 결정을 발견할 수 있는 날이.

 

 

 

 

 

 

 

 


 

 

 

 

 

 

[소설]

 

바다 위의 두 사람

 

 

 

 

 '죽으려고 하는구나·····!'

 나는 급한 나머지 지팡이를 들고 허공을 휘적휘적 그었다. 뭐라고 소리를 쳐야 할 것 같은데 물 먹인 솜으로 목을 틀어 막힌 듯 엇, 어 하는 소리밖에 뱉어지지 않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저 어린놈이 풀쩍 뛰어내려 버리면 늙은이인 내가 따라 들어가 건져 올릴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 헛숨만 색색 새다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저····· 도둑 잡아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깜짝 놀란 소년이 홱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이 그의 야윈 얼굴에 하얗게 세로진 눈물 자국과, 아이답게 새하얀 흰자를 번쩍번쩍 반사하여 비추듯 밤의 어둠 속에서 드러내 보였다.

 

 

 

 

 

 

 

 

 

 

 

 

 

 아이들도 죽을 마음을 품을 수 있고 심하면 자살에도 성공할 수 있다. 아이들은 대체로 어른보다 덜 비겁하고 더 용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울함은 세상에서 이미 닳고 닳아버린 어른보다 훨씬 더 참아내지 못한다. 그 영혼이 순수할수록. 마음의 여백이 많고 흴수록.

 

 

 

 

 

 

 

 

 

 

 

 

 

 

 

 당시의 미숙하고 순진했던 나는 어머니가 나를 만나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억지로 사정해서 받아 나온 주소지를 들고 찾아가 길목을 서성거리면서 어머니와 마주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느 주말을 반납하고 찾아간 골목 어귀에서, 어머니가 찬거리를 사 들고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봇대 뒤로 숨어서 입을 틀어막고 있었는데, 어머니 손을 잡고 걷는 꼬마와 그 곁의 얼굴이 둥근 중년 남자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인상이 선해 보였고 한눈에도 어머니를 위하는 듯했다. 어머니는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 살도 좀 찌고 얼굴빛도 더 좋아 보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머니 곁의 아이는 조그만 꽃신을 신고, 아장아장 예쁘게 잘도 걸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내 어매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 속으로 낳은 아이를 깨끗이 잊고 웃으면서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못 되는 여인이었다. 아마 평생 살면서 어느 날 어느 때고 지독히도 고통스러웠을 것, 받을 벌이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다 받았을 것이다. 어매는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었다. 모든 곤란을 마주 보고 설 용기도 힘도 없었던 것뿐이었다. 나는 나이를 먹어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했다. 갓 이십 대 초반이나 되었을 어린 여자가, 바다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맞고 살며, 의지할 가족도 친구도 없이 장애아를 키우며 느꼈을 고독이나 공포를. 그리고 자식을 버린 여자라는, 어매가 평생 혼자서 시달렸을 낙인 같은 죄책의 그림자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죄의 꼬리표가, 어쩌면 파도처럼 들이치는 버려진 아픔보다 더 깊고 검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앎과 이해가 밀물처럼 차오르자, 원망과 미움이 오랜 세월 말라붙어 쩍쩍 갈라져 있던 그 드넓은 벌을, 용서로 뒤덮으며 흘러들어 결국에는 다 메웠다. 나는 평생에 걸친 오랜 세월을 들여서야 겨우 그 깊고 큰 물을 헤엄쳐서 건너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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