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주는 간접경험이 이토록 강렬한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읽고 실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이 책은 작가가 실제로 본인이 겪었던 것을 쓴 자전적 소설이다. 낙태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묘사한 장면에서 입을 벌리고 읽었다. 임신 중절 수술이 불법인 시기에 어린 여학생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보였다. 난 남자인데도 내가 마치 당사자가 된 것 처럼 무서웠고, 시간을 돌리고 싶었고, 내가 잘 되기를 바랐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찰나의 사건이 한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생각했다.
최근에 책 읽으면서 느낀 점, 외국 책은 문장이 한 번에 이해가 안 돼서 몇 번 다시 봐야 할 때가 우리나라 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아니 에르노의 책 재밌게 읽었고, 알랭 드 보통,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들이지만, 이번에 한강 작가님의 소설을 읽어보니 원어로 읽을 때만 느껴지는 문장의 촉감 같은 게 있는 듯 하다. 더 자연스럽게 읽힌다. 책에 쓰인 지역들 이름이나 묘사되는 환경들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근데 그것보다는 문장의 형태 자체가 쓰여진 그대로의 느낌이 있다. 번역한 글은 딱딱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한강 작가님의 문장은 감탄이 나올 만큼 비범함이 느껴지면서도, 참 잘 읽힌다. 직접 읽어주는 것 같다. 누구는 문장을 어렵게 쓰고 누구는 쉽게 쓰고 이런 말이 아니고, 또 어떤 책이 더 낫고 못났고의 의미는 아니고, 아무튼 좋은 책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한강 작가님 책 또 읽고 싶다. 전부 읽어야지.
과제물 검토가 끝났다. 흐릿하지만 똑같은 장면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7월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섹스하는 몸의 움직임과 사정. 여러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장면 때문에 나는 여기 있었다.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 춤처럼 여겨졌다. 보채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남자는 오로지 내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고자 이탈리아에서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하는 몸짓과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정자, 이 모든 것을 내가 병원 대기실에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도 섹스와 연결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의사가 내 번호를 불렀다. 진찰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징조이리라 생각했다. 진찰실 문을 닫으며, 그녀는 아주 빠르게 "음성이에요."라고 말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다음부터 진찰실에서 의사가 늘어놓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는 유쾌하고 호의적인 인상이었다.
아주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 번 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금발 여자도 마찬가지일지 알고 싶어졌다.
중절하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못 할 일은 아니었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범한 시련이리라 짐작했다. 내 앞을 지나간 수많은 여성들이 새겨 놓은 길을 따라가면 될 듯싶었다. 청소년기부터 소설에서 읽었거나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소리 죽여 떠들어 대던 대화가 전해 준 이야기들이라면 많이 알고 있었다. 뜨개질바늘, 파슬리 끝단, 비눗물 투여, 승마 등 중절에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하여 막연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최고의 방법은 이른바 '야매' 의사 혹은 '천사를 만드는 여자'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를 만나는 일이라는데, 이들은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비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작년에 이혼한 젊은 여자는 스트라스부르 출신 의사가 자기 아이를 유산시켜 줬다고 얘기를 해 줬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쥐었다.'라는 말 말고는 자세한 내막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쥘 각오는 서 있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험을 준비하고 여름 방학을 기다리며 수업과 발표, 카페와 도서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왔다. 이제 시간은 이런 일들로 채워지는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었다. 시간은 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 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 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 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 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임신 확인서를 찢어 버린 지 삼 일째 되는 날, 학교 안뜰에서 결혼도 하고, 직업도 있는 장 T.를 만났다. 이 년 전, 빅토르 위고 관련 수업을 들을 때, 그가 출석할 수 없어서 노트를 복사해 줬다. 그의 열정적인 말투와 참신한 사고방식이 나와 맞았다. 기차역 광장에 있는 메트로폴 카페로 차를 마시러 갔다. 그때 말을 돌려 가며 임신 사실을 알렸다. 아마도 그가 나를 도와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가 피임의 자유, 가족계획과 관련한 비합법적인 협회의 일원임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런 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드러난 성기를 본 듯 호기심과 음탕함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어제의 모범생이 궁지에 처한 여자로 갑작스레 변한 상황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와, 그리고 언제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 상황을 털어놓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그에게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지라도, 그의 호기심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는 루앙 외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기숙사 방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내는 유아용 의자에 앉은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있었다. 장 T.는 아내에게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대충 둘러댔다. 친구 한 사람이 도착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아내는 시금치를 곁들인 토끼 요리를 내왔다. 토끼 고기 아래 비친 녹색을 보자 구토감이 일었다. 임신 중절을 하지 않는다면, 내년에 나도 장의 아내처럼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 학교 선생인 그의 아내는 교구를 구하러 어딘가에 가야 한다며 조금 전 방문한 친구와 나갔고, 나는 장 T.와 설거지를 했다. 그는 나를 안더니, 섹스를 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몸을 빼내서 설거지를 마저 했다. 옆방에서 아기가 울었고, 나는 토하고 싶었다. 장 T.는 식기의 물기를 닦고 나서 슬그머니 나를 껴안았다. 돌연 그는 본연의 말투를 되찾은 듯싶더니, 나의 도덕성을 알아보려고 그랬다고 우겼다. 그의 아내가 돌아왔고, 부부는 내게 자고 가라고 말했다. 늦은 시각이었고, 부부 중 누구도 나를 몰아낼 만큼 비정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오후에 책가방을 메고 나섰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는 헝클어져 있지 않았고, 전부 그대로였다. 그리고 거의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삶의 혼돈이 시작되고 있음을 가늠한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모든 이야기가 유치하고 쓸데없어 보였다. 친구들 방에서 자질구레한 자기들 일상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아침엔가 문헌학 수업을 같이 들었던 몽펠리에 출신의 한 여자애가 도서관에서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 상세하게 생모르 거리에 있는 자기 셋방과 하숙집 주인, 입구에 있는 빨래 건조대, 보부와진 거리에서 개인 수업을 하는 자신의 일상 따위를 떠들었다. 자기 세상에 대해 하나하나 만족스럽게 묘사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미칠 것만 같았고, 혐오감이 일 정도였다.
나 같은 여자들은 의사의 하루를 망쳤다. 돈도 연줄도 없는 ― 그렇다고 무턱대고 의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 그런 여자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고, 영영 의사 면허증을 앗아 갈 수도 있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의사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 누워서 뜨개질바늘을 조심스럽게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궁 경부를 찾지 못한 채 더듬었고, 고통을 느끼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력감에 절망했다.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 되었다. '아무것도 못 함.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울음. 정말 너무 지겹다.'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나서 N. 의사에게 전화했다. 의사에게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몸을 상하게 했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중절을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다 되었음을 그가 알아 주길 바랐다. 그는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얘기했다. 의사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나를 맞았다. 진찰을 하고 나서 모든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몹시 낙담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여전히 갈등하고 있고, 양보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페니실린은 먹어야 해요, 일주일 전후로. 처방전을 써 줄게요."
병원을 나서며, 마지막 기회를 망쳐 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법을 피해 무언가 해 달라는 요구를 끝내 하지 못했다. 임신 중절에 대한 나의 욕망을 의사가 들어주려면, 오로지 눈물을 더 흘리고, 더 애원해 보고, 내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최선을 다해 설명했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 어쩌면 잘못 생각했을지도. 오로지 그만이 말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그는 내가 패혈증으로 죽는 일만은 막고 싶어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임신 중절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언어 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검경을 유일하게 가져올 수 있는 다음 수요일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여자는 내게 비눗물이나 청소용 세제 같은 것이 아니라, 탐침관을 넣을 터다. 비용은 400프랑이며 현금으로 줘야 한다고 거듭 확인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 두려고 했다. 친근감 따위는 없었다. 말을 놓지도 않았다. 게다가 신중했다.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여자는 핵심만을, 마지막 생리 일자, 비용, 시술 방식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렇게 순수하게 물질적인 방식은 낯설지만 안심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정이나 도덕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험상 P.-R. 부인은 딱 필요한 대화만 해야 시간 낭비나 혹은 생각을 바꾸게 할지 모르는 눈물과 감정의 토로를 피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 다리 사이로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길가 반대로 난 다른 창문들, P.-R. 부인의 흰머리가 보였다. 이런 곳에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학교에서 몸을 숙이고 책을 보는 여학생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다림질을 하고 있을 엄마를, 보르도 거리를 거닐고 있을 P.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자기 주변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전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계속 내게 '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고 묻게 할 뿐인데.
이제 방의 이미지에 다가선다. 분석이 불가능하다. 그 이미지 속에 잠식될 수밖에 없다. 내 다리 사이로 검경을 집어넣고 분주히 움직이던 여자가 나를 태어나게 하려는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안에서 내 엄마를 죽였다.
P.-R. 부인은 전부 다 준비해두었다. 도구들이 틀림없이 들어 있는 듯 보이는 냄비가 가스 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 부인은 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일을 시작하려는지 바빠 보였다. 발치에 하얀 수건을 깐 테이블을 두어 침대를 길게 늘렸다. 스타킹과 속옷을 벗었는데, 검정 치마는 벌어지는 스타일이어서 그냥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했다. "소리 그만 질러요, 착하지." 그리고 "일을 좀 하게 해 줘요." 그게 아니라면 하던 일을 끝까지 해야만 한다는 의미밖에 없는 다른 어떤 말들을 했으리라. 그 이후 불법으로 중절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 순간에 필요했던 말들, 때로는 연민을 담은 말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탐침관을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내 울었다. 계속 아팠고, 배 속에 묵직한 느낌만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얇고 붉은색 관이 떠다니는, 여전히 끊는 물이 담긴 대야가 있었다. 내 안에 넣을 작정으로 새로운 탐침관을 가져왔으리라 추측했다. 첫 번째 사용했던 것은 보지 못했다. 이건 꼭 뱀 같아 보였다. 대야 옆에는 빗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 그랬듯이, 여자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하게 될 일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여자가 대야에 있는 탐침관을 넣기 위해 먼저 것을 빼내며 소리쳤다. "정말 잘하고 있어요!" 산파나 할 법한 말이었다. 그때까지 이 모든 일을 분만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다. 여자는 내게 추가 비용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어렵게 손에 넣은 모델인지라 나중에 탐침관만은 다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객차에서 한 여자가 끝도 없이 손톱을 갈고 있었다.
소변이 엄청나게 마려웠다. 복도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고, 문 앞에 있는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허벅지 사이로 타일이 보였다. 온 힘을 다 주었다. 수류탄이 터질 때처럼 문까지 물이 튀었다. 작은 아기 인형 같은 형체가 불그스름한 줄 끝에 매달려 성기에서 대롱대롱했다. 이것이 내 안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걸 가지고 내 방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손으로 쥐었다. ― 낯선 무게감이었다. ― 그리고 내 허벅지 사이에 그것을 꼭 끼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나는 짐승이었다.
O.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를 부른 후 조용히 말했다. "나왔어."
우리는 둘 다 내 방에 있다. 다리 사이에 태아를 놓고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O.에게 탯줄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가위를 집어 든다. 어느 부분을 잘라야 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른다. 우리는 커다란 머리에 투명한 눈썹 아래로 두 개의 푸른 점 같은 눈이 있는 작은 몸을 바라본다. 인디언 인형 같다. 성기를 바라본다. 작은 남자 성기 같다. 그러니까 내가 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O.는 스툴에 앉아서 울고 있다. 우리는 조용히 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말로 표현 못 할 장면이다. 희생의 장면.
우리는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O.가 방에 가서 빈 비스킷 봉지를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그것을 넣는다. 나는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안에 돌멩이가 있는 것 같다. 변기 위에서 봉지를 뒤집는다. 변기 물을 내린다.
일본에서는 중절한 태아를 미즈코, 물의 아이라고 부른다.
나는 피를 흘렸다.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잘린 탯줄에서 피가 불규칙하게 쏟아졌다. 나는 침대 위에 움직이지 않고 누웠다. O.는 수건들을 건넸는데, 피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의사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 없이도 잘 해결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였다. 출혈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에게 당장 의사가 필요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내려가서 수위실 문을 두르렸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확신했다.
당직 의사가 들어오는 장면으로 그날 밤의 2부가 펼쳐진다. 그 밤은 삶과 죽음의 순수한 경험에서 폭로와 심판의 자리로 바뀌었다.
의사는 침대 위에 앉았고, 내 턱을 손으로 쥐었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어떻게 이렇게 했냐고, 대답해!" 그는 번쩍이는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나를 보라고!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결코!" 그의 광기 어린 눈 때문에 내가 맹세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게 방치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처방전 노트를 꺼내면서 말했다. "넌 오텔디유에 가게 될 거야." 나는 개인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치 나 같은 여자가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란 그 병원뿐이라고 알려 주고 싶은 듯 그는 "오텔디유."라고 단호하게 한 번 더 말했다. 의사는 왕진료를 내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서 지갑 속에 든 돈을 가져갔다.
들것에 실려 방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이 흐릿했고, 안경도 쓰지 못했다. 항생제도, 그날 밤 1부에서 보여 준 냉정도,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야 끝날 일이었다. 출혈이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따져 봤다. 아마도 자르면 안 되는 탯줄을 자르면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청소년기부터 간직해 온 내 육체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기 있고, 비밀스러운 성기가 달려 있던 육체, 그 후로도 달라질 것 없는 남자의 성기 ― 더 생기 있고, 여전히 비밀스러운 ― 를 빨아들였던 육체를. 나는 전시되고, 사방으로 벌려진 성기와 바깥으로 열어서 긁어낸 배를 갖고 있었다. 엄마의 몸과 다를 바 없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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