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지기 전에
아침 일곱 시까지 나랑 얘기했어. 배가 아프다고, 출근길에 병원에 데려다달라더라구. 늦어서 안 된다고 했어. 택시 타고 가라고 만 원짜리 두 장 놓고 나왔어. 짜증도 냈어. 이 죄를 어떻게 하니.
은희 언니와 여섯 살 터울 지는 유일한 남동생이었다. 사인은 급성 복막염이었다. 그날 오전 열한 시경, 자신의 방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그를 어머니가―이태 전에 홀로되었고 다리가 불편한―발견해 구급대를 불렀는데, 결국 여섯 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그때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가 메뉴판을 펼치고 막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은희 언니는 주변의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그 이야기 때문에, 그날 은희 언니가 들려준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잊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그때 처음으로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밝아지지 않은 새벽, 시체가 재가 되고 뼛덩이들만 하얗게 남은 자리에 여태 지글지글 끓는 심장. 그걸 내려다보다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는 어떤 여자. 그 여자가 고개를 들면, 무섭도록 낯익은 얼굴―꺼진 눈, 두드러진 광대뼈, 검게 죽은 내 입술이 그을린 살갗 가운데 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그림도 골똘히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길이 어긋나, 서로가 볼 수 없는 곳을 더듬는다.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 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 구걸하고 싶던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 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그 밤, 식은 찻주전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나눈 꿈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즈음 반복해 꾸던 꿈에 대해 내가 먼저 은희 언니에게 말했다.
난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자꾸 여행 꿈을 꾸는지 몰라. 다 언니 때문이야.
되풀이되는 꿈속의 시간은 비슷하게 오후 세 시경이었다. 나는 윤이와 함께 낯선 도시에 가 있다. 머물 시간은 하루뿐인데, 이런저런 까닭으로 여태 숙소를 나가지 못했다. 방에는 창문이 없거나, 너무 가까운 앞 건물에 막혀 있거나, 살풍경한 빈터를 향하고 있다. 어디든 볼 만한 곳으로 나가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텐데, 여기까지 와서 숙소에만 있을 순 없지 않나, 이대로 밤이 되면 안 되지 않나, 초조해하며 시계를 보다 잠에서 깨곤 했다.
실없이 웃음을 섞어 들려준 꿈 이야기였는데, 뜻밖에 은희 언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거, 여행 꿈이 아닌 것 같아.
그 순간 깨달았다. 무심코 털어놓은 그 꿈이 얼마나 적나라한 고백이었는지. 지금 내가 있는 데가 오후 세 시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뿐인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며 으스러뜨려왔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며 은희 언니가 말했다.
나도 그런 거 있어, 몇 년 전부터 자주 꾸는 꿈.
·····밤이 깊었는데 집에 못 돌아가는, 조금 뻔한 꿈이야.
일산으로 이사한 게 언젠데, 꿈에서 돌아갈 곳은 늘 수유리 옛집이야. 삼양동 어디쯤에서부터 난 헤매고 있어. 요즘 개발된 뉴타운이 아니라, 가파른 언덕배기에 구불구불 뒤얽힌 골목에서. 갑자기 큰길이 나오면 가로등은 죄다 꺼져 있고, 버스도 택시도 사람도 없어.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탱크처럼 단단한 트럭들만 무섭게 질주해.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면 너무 춥고, 인적이 없고, 다리가 아파.
그때 어느 집 부엌에서 물 쓰는 소리가 들려서 창을 들여다보면, 젊었을 적 엄마를 닮은 여자가 있어. 곱고 몸피가 작고 웃음이 선한 여자. 들어와요, 여자가 문을 열어주곤 손을 내밀어보라고 해. 내가 손을 내밀면, 여자가 바가지에 따뜻한 물을 퍼서 조금씩 흘려줘. 손을 다 씻으면 여자가 수줍게 방으로 안내해. 밝아질 때까지 눈을 붙이고 가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서워, 방은 조그맣고, 바닥은 아무것도 안 깔린 검은 모래흙이야. 흙 위로 사금파리들이 날카롭게 돋아 있고, 창문은 유리 없이 뻥 뚫려 있어. 산 아래 불빛들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여. 추워. 다리가 아파. 사금파리에 찔릴까봐 앉을 수도 없어. 그렇게 다정하게 날 맞아준 여자가, 왜 이런 무서운 방으로 안내했을까. 여자가 부엌에서 물 쓰는 소리가 들려. 떨면서 난 중얼거려. 밝는 대로 떠나야지. 여기 이대로 서 있다가, 밝는 대로 몰래 떠나야지.
변명할 수 있을까.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름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
에우로파
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 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커피 한 잔씩을 들고 공원 분수대 앞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을 때, 인아는 결혼 초에 겪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시댁에서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회를 떠온 남편과 그의 형제들이 저녁으로 매운탕을 끓여 먹자며 커다란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거기 담겨 있던, 회를 뜨고 남은 물고기를 별생각 없이 양푼에 옮겨 담았어. 그런데, 수돗물을 받아서 막 씻으려는데 그 물고기 뼈가 세차게 퍼덕였어. 살은 다 발라졌는데 아직 살아 있었던 거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어. 양푼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이며 윗옷에, 부엌 바닥에 물이 마구 튀었어. 다행히 물고기는 개수대 안으로 떨어졌어. 그걸 보고 모두들 웃어댔어. 이걸 어떡해요, 살아 있어요, 내가 말하니까 큰동서가 웃으면서 대답했어. 뭘 어떻게 해, 동서가 알아서 해봐. 난 우는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뼈만 남아서 꿈틀거리는 그 물고기를 씻어서, 냄비에 넣고 뚜껑을 덮었어.)
거기까지는 아직 평범한 이야기였다. 오 년이 더 지난 여태까지 그 물고기가 가끔 악몽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도, 좀 지나치다 싶긴 했지만 이해할 만 했다.
덤덤하다 못해 거의 무기력한 내 대답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듯, 인아의 목소리가 차츰 열기를 띠었다. 어떻게 맥락이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 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는 선 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당황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인아는 수년 전에 보도되었던 치과 의사 살인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이야, 물속에 담긴 시신이 늦게 부패한다는 걸 그 사람은 배워서 알고 있었던 걸까? 그걸 계산해서 여자의 목을 조르고, 정교하게 알리바이를 맞췄던 걸까? 그럴 수 있을 만큼 침착했던 걸까? 그런데 그 사람의 몸속 혈관은 내 몸속 혈관하고 똑같은 선들을 가지고 있지. 하천의 지류가 흐르는 선, 나무가 가지를 펼쳐 올리는 선하고 똑같은 선 말이야. 같은 지하철 출구에서 그 사람과 내가 우연히 서로를 지나쳐 갔다면, 그 사람은 나와 함께 곡선의 일부가 되어서, 태연하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을 거야, 그렇지?)
그쯤에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했다. (인아야, 오늘 왜 그래? 무슨 얘길 하려는 거야?) 그 순간 인아는 폭발했다. 지나치게 뻑뻑하게 감은 오르골처럼 부서졌다. 자잘한 부속들이 사방으로 튀듯 더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취중 독백 같은 문장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아가 최근에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논리와 인과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을 통과해,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넘어갔다가 우연히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상한 열기와 집요함을 그 와중에 얻어냈다는 것을. 그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걸 겪고도 부서지지 않은 인아의 가냘픈 몸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훈자
이태 전 인솔자 자격으로 신입 사원 연수에 참가했을 때, 모두 잠든 새벽 그 여자 혼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숙소에서 가까운 용문사까지 걸어 올라갔던 일. 전날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수차례 발이 미끄러졌던 것. 경내에 서 있는 기괴한 모습의 늙은 은행나무를 향해 걸어가, 눈 묻은 바짓단을 털며 안내문을 읽었던 것.
수령 1100년
성별 Female
그때까지 그 여자는 천백 년 된 생명체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 나무-여자의 늙고 깡마른 우듬지를 향해 그 여자는 고개를 꺾어 쳐들었다. 무엇인가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줘봐, 그 여자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가야 하는 건지, 당신이 대답해봐.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 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 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 떴다.
나무에게서 등을 돌리자, 방금 그 여자가 빠져나온 산길이 아직 어두컴컴했다. 날카로운 주황색 빛은 그 여자의 두 눈꺼풀에, 얼얼한 망막 위에 해독할 수 없는 문자처럼 찍혀 번득였다.
너를 낳던 날엔 비가 왔지.
가랑이로 피를 너무 흘려서. 새벽까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
온몸의 관절들이 부어올랐지.
괴물처럼 얼굴이 부풀었지. 눈이 떠지지 않았지.
거품처럼 연한 네 몸을 만질 수 없었지.
손을 뻗어 껴안을 수 없었지.
당신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렇게 지치지 않지.
·····그렇지 않아. 지치지만 견디는 것뿐이야.
어쨌든 당신이 존경스러울 뿐이야.
아니, 내가 느끼기에 당신은 나를 경멸하는데, 혐오하는데.
아니, 내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내 삶이야. 불가피하게 당신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지. 당신이라는 여자를 따로 혐오하지 않아.
그럼, 그렇게 당신의 삶을 혐오할 때 그 속에 있는 아이는? 아이도 혐오해?
·····그렇게 거칠게 말하지 마. 나를 몰아세우지 마.
엄마, 난 횡단보도를 건널 때 눈을 감아.
그럼 온 세상이 환해져.
변신할 것 같아.
정말 변신할 것 같아.
그 여자는 운전대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준다. 인터체인지로 접어들며 다급히 속력을 줄인다. 첫 신호등 앞에서 급정거하며 기도한다. 신을 믿어본 적 없으니 되는 대로 내뱉는다.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
파란 돌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 내가 처음 먹으로 그려보았던 나무 기억하나요.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하고 당신은 덧붙여 말했지요. 그날 오후 내내 당신의 서가를 뒤져 나무 그림들을 봤습니다. 실레가 그린 어리고 섬약한 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 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 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밤과 낮 들이 뒤엉켜 날짜로 확실하지 않은 지난해 그날, 파르스름한 새벽이 점점 밝아지며 나무들이 연둣빛을 되찾는 찰나, 나는 노끈을 말아 쥔 채 산비탈에 서 있었습니다. 잎사귀들의 색채가 그토록 명징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처음 알았습니다. 여린 연둣빛이, 푸르러진 초록빛이, 수없는 겹의 그 색채들이 눈동자를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내 몸 구석구석을 멍들이며 시큰시큰하게 부딪쳐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깨면 약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건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나는 돌아서서 아파트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땅과 머리가 심장 뛰듯 함께 흔들리며 울렸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우리는 손을 잡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았습니다.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화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텐데.
작은 피멍이 든 당신의 손등을 내 뺨에 가만히 쓸며 나는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가볍게 웃었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당신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향해 함께 웃어줘야 하는 건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너만 한 나이였어. 스테로이드 제제로 이 년 넘게 치료해도 듣지 않고, 부작용으로 온몸은 씨름 선수처럼 부풀어 올랐지.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상처를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말을 아끼려는 듯 당신은 다시 웃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뻣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당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우주 공간에서 방금 폭발했거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별의 형상을. 그러니까, 당신의 얼굴을.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왼손
그는 코를 심하게 골았다. 세 식구가 함께 안방에서 자던 때, 아내는 아이의 작은 뒤척임에도 눈을 떠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그러곤 갑자기 그의 베개를 당겨 뺐다가 다시 밀어 넣거나, 그의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버리거나, 그의 몸을 흔들어서 완전히 돌아눕도록 했다. 잠결이었지만 그는 아내의 손길이 부드럽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발 잠들고 싶다는 아내의 정직한 갈망, 그것을 방해하는 육중하고 시끄러운 동물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는 코를 골았을 테지만 아내는 어떻게든 참아낸 모양이었다. 아내의 손길이 거칠어진 것은 그녀의 생활이 못 견디게 피곤해졌기 때문이리라. 그가 따로 자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다행스러워하는 기색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서재로 침대를 옮기고 난 첫 밤을 그는 가끔 기억했다. 다시 자취생 신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잠을 청하며 그는 약간의 행복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행복감은 껌에서 단물이 빠지듯 사라졌다. 대신 그는 하루하루 잠이 얇아졌다.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곤 했으며, 일단 깨고 나면 무수하게 만져지는 어둠의 겹, 예민한 수면의 마디들을 일일이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야근이 잦은 편이고 출근 시간이 이른 그에게 숙면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서서히 체중이 빠졌고, 더욱 서서히 말수가 줄었다. 그 변화가 워낙 완만했기에 아내를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왼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막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말고 할 틈도 없이 왼손은 정확하고 기민하게 뻗어 나가 그녀의 뺨에 얹혔다. 매끄러운 뺨의 감촉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커다랗게 치켜뜬 눈에 밤 불빛들이 술렁였다. 그의 왼손은 번지듯 뺨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섬세한 콧날을, 이마를,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을 때에야 그의 왼손은 짧게 떨며 멈췄다.
·····새장 밖으로 한번 나온 새한테 가장 무서운 건 새장일 거야. 그런 새를 붙잡으려면 발톱이며 부리에 찢길 수밖에 없겠지. 설령 새장에 다시 넣는 데 성공한다 해도 아마 새는 제풀에 죽고 말 거야. 네가 날 붙잡을 거란 얘기가 아니라, 만에 하나 붙잡았다 해도 너한테 득이 될 거 없었을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한 거야. 미안해할 것 없어.
·····미안해
그 말 이제 그만하고 가.
그의 왼손이 먼저, 그의 몸이 뒤따라 그녀를 안으려 했다. 그녀는 그를 뿌리치며 일어서더니 작업대를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어조와 달리 그녀의 동작은 격렬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높아졌다.
내가 가라고 했지. 내가 이래서 연애 따위 다시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열에 들뜬 생각, 눈물, 나답지 않은 행동, 복잡한 것, 바닥까지 보고 또 보여주는 것····· 싫고 지겨워. 이쯤에서 그냥 가.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엉거주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선혜야, 내 말 들어봐.
그의 왼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물기에 젖은 채 번쩍이는 그녀의 눈이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며 열렸을 때, 그는 무작정 입술을 포개며 그녀를 안았다.
너 정말 못 알아듣는구나. 이거 놔.
그녀는 힘차게 그를 뿌리쳤다. 그녀가 진지하게 그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똑똑히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나, 그의 왼손은 아직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미안해 정말, 이 손 때문에·····
그는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의 왼손이 그녀의 빗장뼈를 더듬으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찔한 부드러움에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놓으라고 했지!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왼손이 그녀의 풍성한 치마 속으로 뻗어 들어간 것이다.
미쳤어! 이거 놓으라니까?
그녀가 소스라치며 물러서는 동안 그의 왼손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둥근 무릎을, 허벅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발, 왜 이래! 이러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날카로운 비명으로 뱉어졌다. 왼손을 끌어당기려 몸부림치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미안해, 난·····
그녀의 몸에서 가장 따뜻한 곳에 왼손이 닿은 순간, 예리한 불꽃같은 감각이 그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그는 사방으로 흩튀는 피를 보았고, 그녀의 떨리는 손에 들린 작업용 커터 칼을 보았다.
신장 서랍에서 찾아낸 공구용 망치를 들고 그는 떨며 욕실의 거울 앞에 섰다. 왼팔을 부러뜨리면 왼손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내일 아침엔 언제나처럼 출근할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그의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아내와 아이도 되찾아올 것이다. 그의 어깨에 칼을 꽂은 그녀는 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잠 못 이루지도, 의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감촉이 떠오른 순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용서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늘어뜨려져 있던 왼손이 오른손을 붙든 것은 그때였다. 그는 신음을 뱉으며 왼손을 뿌리치려 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다시는 꿈틀거리지 말라고 했지!
왼 어깨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붉은 피가 뭉게뭉게 번져 나왔다. 왼손이 오른 손목을 비틀었다. 오른 손목이 놓친 망치가 그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그는 목쉰 비명을 질렀다.
죽일거야····· 죽이고 말겠어.
입술을 비틀며 그는 헐떡였다. 절름절름 걸음을 떼다 욕실 문턱에 걸려 엎어졌다. 그는 오른손을 뒤로 뻗어 망치를 집었다. 망치를 쥔 주먹으로 바닥을 짚으며 어두운 부엌까지 배를 밀고 기어갔다. 망치를 놓고 앉아 더듬더듬 싱크대 문을 열었다. 칼집에 꽂힌 과도를 뽑아냈다.
가만있어, 그렇게.
움직임을 멈춘 왼손을 향해 그는 악문 잇사이로 내뱉었다.
난 널 잘라버릴 수도 있어····· 알겠어? 뼈만 부러뜨리는 걸 다행으로 알아.
그는 오른손을 뻗으면 바로 닿도록 칼을 두고 망치를 집었다. 눈을 빛내며 망치를 치켜 올렸다. 벼락같이 왼손이 따라 올라와 망치를 잡아챘다. 이번에는 그의 오른손이 왼 손목을 비틀었다. 망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 손목의 통증에 그의 미간이 조여졌다.
경고했지, 널 죽여버리겠어!
그의 오른손이 과도를 움켜쥐었다. 순간 뱀처럼 솟구쳐 오른 왼손이 오른 손목을 거머쥐었다.
놔····· 이거 놔.
그의 얼굴 근육들이 뒤틀렸다. 이마의 핏줄들이 꿈틀대며 일어섰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오른 손목이 돌연 부러지듯 뒤로 꺾였다. 왼손이 과도를 낚아챘다.
그거 내려놔, 어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은 흠뻑 젖어 번들거렸다. 그의 오른손이 왼손을 덮쳐잡았다. 숨찬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어서, 이리 내지 못해!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한 순간, 울부짖는 비명이 아파트의 정적을 찢었다.
어둡고 차가운 부엌 바닥에 그의 몸은 길게 쓰러져 누웠다. 겁결에 칼이 꽂힌 가슴이 흐느끼듯 한차례 떨었다. 열린 욕실 문으로 흘러나온 희끗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충혈된 눈가의 끈적이는 얼룩을, 피 묻은 왼손이 어루만져 붉게 물들였다.
노랑무늬영원
그 개는 지금 살아 있을까. 죽었어야 할 그 개는. 내 차 바퀴 아래 형체 없이 으스러졌어야 했을 그 개는.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의 늘어난 인대나 금 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 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로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생긴다는 말인가?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일 때가 있다. 내 몸의 미세한 움직임, 숨의 들락거림, 시간의 유동까지 느껴지는 상태. 이를테면,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간 것 같은 상태. 너무나 멍해져서, 전화가 와도 의식하지 못하다가 벨 소리가 끊기기 직전에야 알아차린다. 알아차린다 해도, 일어서야 한다거나, '전화를 놓쳤구나' 하는 다급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들이, 그토록 이상하게 만져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
그럴 때의 내 모습은 귀신처럼, 혹은 유체 이탈을 경험하는 요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남편은 자신의 방에서 나오다가, 거실 바닥에 그런 상태로 앉아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긴 했지만 내면은 충일했고 활기찼다. 아침마다 아파트 옆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여덟 바퀴씩 달렸고, 요리책을 뒤적여 매일 다른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아홉 시간씩 쉬지 않고 작업을 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 있었다.
머리를 다쳐서 그런 거야?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당신, 얼마나 이상해졌는지 알고 있어?
언젠가 남편이 나에게 고함을 질렀을 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물 밖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굴절돼 내 머리에 부딪쳐 왔다. 내 몸이 어항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싸고 있는 물과, 물이 담긴 커다란 유리벽 바깥에 그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짖고 싶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 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입원 두 달째에 접어들었을 때, 워낙 인내심이 부족한 여인이었던 어머니는 종종 짜증을 냈다. 마침내 '돈은 보태줄게, 간병인을 써라. 난 정말 병원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하며 화장 진한 얼굴로 떠난 어머니를, 사고 전이었다면 버림받은 아이의 심정으로 그리워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면이 어머니의 솔직하고 시원스러운 점이라며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삼십 년간 일관돼온 내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두 달 동안, 밝은 조명 아래 찬란히 드러난 어머니의 성품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경솔함, 허영, 배려의 부족, 이기심. 삼십 년 동안 내가 그녀를 오해하며 살아왔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고 환멸만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감정의 반응은 빛바랜 연민에 가까웠다. 마치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이 내 몸을 타고 흘러서 연민이라는 깔때기를 타고 몸 밖으로 떨어져 내린 뒤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은 씁쓸한 경험이었다.
이젠 두 손 다 틀렸어, 라고 중얼거린 순간이, 나에게는 그 이른 봄날의 교통사고보다 더 결정적인―더 무서운―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연극이 갑자기 막을 내린 데 이어, 객석에서조차 추방된 것과 같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부터 시작됐다. 가까스로 유예되고 있었던, 격렬하고 부정적인,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 후회, 수치, 분노, 원망, 증오, 억울함, 비참함, 살의. 그리고 혼자라는 것. 철저히, 당연히, 언제까지든 혼자라는 것.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가장 나쁜 것은 그때 내가 퇴원한 상태였다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 있거나 남편과만 지냈다는 것이다. 격렬한 감정들의 파고를 타고 나는 점점 더 내려갔다. 인간의 밑바닥을 향해, 무서운 속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장 낮은 지점, 동물적인 지점까지 내려갔다고 기억한다. 치매 노인의 정신세계가 이런 것일까 짐작될 만큼, 종종 나는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잘 뿐인, 그야말로 본능과 무의식으로만 남은 존재였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세면대에 딸린 거울을 보면, 숱한 동물적 감정들로 출렁거리는 내 내면이 간신히 한 겹의 피부로 봉합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알고 있다. 지난 이 년은 나에게만 특별한 체험이었던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인생이 끝장났다면, 그의 인생도 끝장난 것이다. 한때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엮여버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육 년 전이었다. 일 년간의 연애 뒤 우리는 결혼했다. 특별히 열렬한 관계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사고가 있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며 지냈다. 서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고, 다정히 들어줬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특별히 다정했을 때는 헤어진다는 것이 싫어서, 유일하게 헤어지는 이유는 죽음뿐일 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했던 적도 있다. 죽으면 두 사람 모두 화장해서 뼛가루를 섞어버리자고도 했다―농담을 섞어서―. 다시 태어나서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달라졌을 텐데, 그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까.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겨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 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 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 편의 강가에 남았다.
그즈음부터 나는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멍멍하게 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항 밖의 굴절된 세상을 바라봤다. 당신 얼굴만 보면 미쳐버리겠어. 뭐야, 나는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죄로 내가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 거지?
알잖아. 나에게는 손이 없어. 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당신을 사랑했겠지만. 어깨를 주물러주고, 발이며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웃었겠지만. 그러고 나면 모든 불화가 멈추었겠지만. 좋아하는 콩나물밥을 함께 해 먹고, 야, 양념장이 정말 맛있어, 라고 당신이 말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간절히 뻗어, 밤늦도록 사랑을 나누면 그만이었겠지만.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 삼십 년 동안 잘못 살아왔다는―거짓으로 살아왔다는―느낌만이 강렬한 진실로 만져졌으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아니, 과연 계속 가고 싶기는 한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변화를 원하는 건가. 과연 뭘 하겠다는 건가, 나는. 이 부서진 두 손으로.
거세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 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을 가져 타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때 나에게 그 물이 약간이나마 고여 있었다면, 이제는 마른 흙바닥만 남아 있었다.
알고 있다. 거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니, 내 책임이 전부라는 것을. 사고를 당한 것은 불운이었지만, 그 후의 내 감정, 내 행동은 모두 선택된 것이었다는 것을. 삶과 나 사이의 거리가 들떴을 때, 잇몸과 이가 들뜨듯이 무엇도 씹기 어려워 괴로웠을 때, 나는 오히려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 막대한 사랑과 감사,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배를 쥐고 웃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한 일은, 모든 사랑을 잃은 뒤 다시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끌어안고 있던 짐을 물살에 떠밀리는 동안 놓쳐버리고 만 것처럼, 매우 쉽게.
그런 나를 자책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진실이 가리키는 길로 가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볼 것이다. 뜬 눈으로―설령 훗날 돌이켜보아 감은 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뜬 눈으로 가볼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이 없다. 자기기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속임수 없는 희망이 아니라면 소용없다. 어떤 속임수도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투명함이 나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렇게 자신을 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제는 마치 내가 한 마리 빙어가 된 것처럼,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인다. 아무것도 자신에게 속일 수가 없다.
꿈은 반복되는 두 개의 패턴 중의 하나다. 안개 낀 새벽길을 달리다가 자동차 앞으로 검은 개가 뛰어든다. 나는 힘껏 핸들을 감아 급회전을 하고 만다. 아니야, 브레이크를 밟았어야지. 차와 함께 개울로 곤두박질치며 눈을 뜨거나, 더 나쁘게는 피투성이의 내 몸을 허공에서 내려다보다가 깨어난다. 다른 하나의 패턴은 손과 관련된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총이나 흉기로 위협해서, 커다란 짐 꾸러미 따위를 두 손으로 들라고 명령한다. 안 돼, 라고 소리치지 못해 나는 떤다. 이래서는 안 돼. 밥도 내 손으로 못 먹게 될지도 몰라. 오른손만이라도 아물게 놔둬. 이가 부딪치는 추위에 깨어보면,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전 어릴 때부터 약골이었어요. 열한 살 때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적도 있죠. 식구들도 모두 제가 정말 죽는 줄 알았다더군요. 그때 죽었다면 지금 이렇게 그쪽을 업어줄 수도 없었겠다고 생각하니까·····
어린아이처럼 흡족하게 반짝이는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가 오래 비껴나 있었던 중심이 건강―건강한 육체를 가진 삶―이리라는 것을. 문득 그의 시선이 피붙이처럼 다정하다고 나는 느꼈다. 다시 그가 나를 업었을 때, 그의 몸에 내 젖가슴과 허벅지가 고스란히 닿는 것이 어쩐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그 후 일 년 가까이 나는 가끔 그를 기억했다. 그 산비탈, 인적 없는 바위 위의 휴식을. 그리고 후회했다. 그가 나를 다시 업기 위해 다가왔을 때, 왜 그 얼굴에 손을 뻗어 뺨을 만지지 못했던가를. 그의 등에 업혀 목을 안았을 때,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잔 솜털이 돋은 목덜미에 내 입술을 누르지 못했던가를.
그동안 혼자서 손과 입을 씻은 진욱이가 제 방에서 뭔가를 들고 나온다.
그게 뭐니?
내 도마뱀이요.
그걸 키우는 거니?
네.
촘촘한 철망으로 만든 집 안에 모래가 채워져 있다. 손가락만 한 선인장도 심어져 있다. 그 미니 사막 안에서, 손바닥 길이의 도마뱀이 말갛게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아휴, 내가 그것 때문에 정말.
소진이 마른 수건으로 정욱이의 얼굴을 닦으며 투덜댄다.
얘는 예쁜 동물들 다 놔두고 이걸 사달라지 뭐니? 백과사전에서 봤다나. 지난겨울에는 또 얼마나 사람을 놀래키고. 진욱이가 미니 사막을 내 발치로 밀어놓는다.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아 나는 아이와 나란히 바닥에 앉는다. 조심성이 있는 아이다. 도마뱀이 그랬던 것처럼 말갛게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 앞발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
앞발?
부산스럽게 싱크대 앞을 오가며 소진이 설명한다.
지난겨울에, 저 도마뱀이란 놈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아침에 깨어보니까 감쪽같이 없어진 거야. 무는 놈은 아니지만 그래도 찜찜하잖아. 양말을 꺼내려고 화장대 서랍을 여는데, 그 근처 어디 붙어 있다가 쏜살같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는 거 있지.
소진의 목소리가 연극적으로 높아진다.
엉겁결에, 너무 놀라서 서랍을 닫아버렸거든. 그 바람에 저 앞발이 잘라져버렸어. 나는 나대로 가슴이 벌렁벌렁한데, 진욱이는 울고불고, 도마뱀은 도마뱀대로 몸부림을 치는데·····
진욱이는 씩 웃으며 집게손가락으로 도마뱀을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이가 가리킨 자리를 본다. 도마뱀의 몸은 전체적으로 암갈색과 회색의 중간 색조인데, 과연 앞발에 뭉텅 잘린 자국이 있다. 그 위로, 원래 있어야 할 발보다 조그맣고 연약한, 투명한 흰빛의 두 발이 돋아나 있다.
그런데 신기하더라. 생물 시간에 배운 대로, 정말 발이 다시 돋아나는 거 있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미소 짓고 있는 소진의 얼굴을 나는 돌아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의 말없이 빛나는 얼굴에 어린 자랑을 들여다본다.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 노랑무늬영원.
붉은 혈관을 눈앞에 그린다. 빛 속에 손을 담그고 있다고 상상한다. 불길 같은 빛이 콸콸 흘러들어와 혈관을 채우는 것을, 무수한 붉은 피톨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그 힘으로 손의 손상된 관절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그린다. 간절히 집중한다.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나는 조금의 경제력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죽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나의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고작 서른세 살에 붓을 꺾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고 있다. 단지 숨 쉬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더 작아져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어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분명한 것은 이대로 그 순간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내지 않는다면, 진실을 살아보지 않는다면, 다시 그 순간이 닥칠 때 결단코 두려움과 후회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환영과 잿더미가 되어버린 뒤, 내가 움켜쥘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년 전이라고 했다―마음 한편에 미세한 파문이 일어났다가 차츰 잠잠해진다. 내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시 혼자서 걷고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바로 그 무렵 그는 죽었다.
결국 나와 아무 관계 없었던 사람이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긴 잠 속에 내 기억도, 설령 형체뿐이었다 해도,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의 목덜미도. 만져보지 못한 솜털과 따뜻한 살결도.
이마에서부터 땀방울이 흘러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오래 잊고 있었던 연민이 조용히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서 들어오는 건가, 이 조용한 마음은.
어디서 이 마음―살고 싶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울려오는 건가.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작업대에 놓인 아크릴 물감의 튜브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다가, 나는 팔레트와 물을 준비한다. 붓을 빨고, 먼지 낀 분채 병의 뚜껑을 비틀어 연다. 마음에 드는 색깔이 나올 때까지 노랑 계열의 물감들을 여러 방법으로 배합한다.
마침내 원하는 색을 찾는다. Q처럼 승화된 맑은 노랑은 아니다. 그보다 강하게 빛나는 불순물 없는 노랑이다. 나는 두 손바닥을 물감에 적신다. 미리 펼쳐놓은 한지에 찍는다. 왼쪽이 이지러진, 비대칭의 손바닥 자국이 노랑빛으로 날인되어 올올이 종이의 결 속으로 스며든다. 같은 물감을 세필로 찍어 그 아래 연도와 날짜를 적는다. 무엇인가 더 적으려다가, 붓을 내려놓는다.
나는 입술을 물고, 선잠에 새겨졌던 낯선 꿈을 되짚어본다. 내 두 손목에서 돋아난 투명하고 작은 새 손, 열 개의 투명한 손가락들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 팔뚝에 새겨진 선명한 노랑무늬가 신비해 팔을 들어 올렸다. 해를 등진 잎사귀들처럼, 내 팔뚝이 투명한 레몬빛이 되었다.
나는 몸을 일으킨다. 갑작스럽게 일어서는 바람에, 탁자에 놓여있던 수화기가 떨어진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매달려 있는 그것을 버려둔 채 나는 저무는 창으로 다가가 선다.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 들 사이로, 늦은 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 없이 몸을 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 있다. 말없이.
작가의 말
십이 년 만에 소설집을 묶는다.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소설들이어서인지, 책을 묶는 일이 어떤 작별처럼 무겁고도 홀가분하다.
단편은 성냥 불꽃 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오래 지켜보아주신 분들께,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귀한 도움을 주신 분들께,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이천십이년 가을
韓 江
이 소설들은 원고 청탁을 받지 않고 썼다. 혼자서 써놓고는 서랍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열어 조금씩 고쳤다. 그렇게 한 편 쓸 때마다 여러 달 시간을 들여서인지, 책 전체에 나 자신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을 직접 옮겨 놓은 것은 아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배어든 정서들이 있다. 두텁디두텁게. 간절하게. 때로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찌르듯 고통을 주며.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십이 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가만히 하나의 매듭을 지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지켜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표지에 사진을 싣게 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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