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여수의 사랑』 책 메모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강 『여수의 사랑』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5. 4. 20. 17:49

본문

728x90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과 마주쳤을 때 처럼. 온 몸의 털이 쭈뼛쭈뼛 일어나는 것 같아. 목덜미가 수축하는 것 같아. 등과 어깨의 근육이 말려올라가고. 누군가가 칼을 들고 내 뒤에 서있는 것 같아. 내 정수리 위에 도끼가 매달려있는 것 같아. 차가 많이 다니는 곳에서 어린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같아. 금방이라도 소중한 사람이 죽을 것 같아서. 그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할 것 같아서. 잡고 있던 끈을 놓을 것 같아서. 애원하고 싶어. 그러지 말라고.

 

 

 

 

 

 

 

 

 

 

 

 

 

 

 


 

 

 

 

 

 

 

 

 

 

 

 

 

 그때 여자는 가벼운 목례를 하며 소리 없이 웃었는데, 그것은 백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무구한 웃음이었다. 가까이서 본 여자의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은 몹시 헝클어져 있었다. 두꺼운 겨울 외투는 이제 보니 단추가 하나씩 어긋나게 채워져서 정강이께의 밑단이 ㄱ 자로 각져 있었다. 닦는 일을 게을리하여 검은색에 가까워진 고동색 구두는 옆쪽의 밑창이 반 뼘쯤 떨어져서 걸을 때마다 흰 맨발의 살갗이 드러났다.

 그 허술하고 이상스럽기까지 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얼굴에 어린 고즈넉한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무척 지친 기색이었다. 오랫동안 여행하다가 돌아온 사람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피로와 너그러움이 그녀의 얼굴에 저녁 역광 같은 따뜻한 그늘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어딘가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묘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외투째로 두들겨 빨아주고 싶을 만큼 단정치 못한 그 여자에게 막연한 호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놀란 여학생이 뒤돌아보며 어머나, 죄송합니다, 라는 사과의 말을 외치려던 바로 그 찰나, 중년 여자는 무지막지하게, 자신의 얼굴을 때린 그 딱딱한 종이 뭉치로 여학생의 얼굴을 내갈겼다. 여학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중년 여자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악써댔고 여학생의 도톰한 입술 속에서 흡사 경기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란 끝에 버스가 출발했을 때 여학생은 버스 뒷편의 손잡이에 매달려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고, 중년 여자는 운전석 뒤에 앉은 한 남학생에게 뻔뻔스럽게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중년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지하철에서 밟을 밟혔다. 나는 머쓱한 얼굴을 한 그 발의 주인을 매정스럽게 쏘아보았다. 자선을 요구하면서 지나가는 노인과 고아 들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토큰 하나라도 그들에게 쥐어주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던 기억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회상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객실의 음산한 풍경 속에 내 얼굴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 가면 같은 얼굴을 뒤집어쓴 사람이 더 이상 눈물 따위를 흘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몸속의 혈관들은 모두 가문 저수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그 눈빛은 노골적인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이를 악문 채 나를 포함한 맞은편의 사람들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는 섬뜩한 살의마저 담겨 있었다. 사내는 모든 인간들에게 살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하여 인생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냉랭했다. 젊은 부부는 사죄와 위로의 말을 간신히 내뱉은 뒤 사 가지고 간 과일과 고기, 그리고 얼마간의 자기앞수표가 든 봉투를 슬며시 내려놓고 현관을 나섰다. 그들이 승강기에 오르려는 찰나, 사내의 방에서 무시무시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팔과 한 다리로 기어 나와 사과 궤짝을 힘껏 현관 밖으로 밀어낸 사내는 돈 봉투와 비닐에 싼 쇠고기를 복도에 내팽개쳤다. 빳빳한 수표들이 공중에 날렸다. 잘 저미어진 핏빛 살코기들이 복도에 질펀하게 흩어졌다.

 

 

 

 

 

 

 

 

 

 

 

 

 

 

 그런데 이날 오후 사내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자 사내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성냥불을 당겼을 때 피어오르는 황냄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번 들이켜면 폐 속에서 평생토록 분해되지 않는다는, 불가항력적인 파멸의 냄새였다.

 

 

 

 

 

 

 

 

 

 

 

 

 

 "이보시오."

 설마 나를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뒤돌아서서 흘긋 사내에게 눈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음울한 얼굴은 분명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증오에 찬 눈빛과 달리 사내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온몸의 무게를 목발에 의지한 채 그는 피로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수리를 향해 혈관들이 거꾸로 솟구쳤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어 사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명환은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더럽고 음울한 낯빛에 어리어 소름 끼치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전 존재를 내 대답 한마디에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명환은 가등을 등지고 있었으므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어둠만이 명환의 표정인 것 같았다. 한 발 한 발 육박해오는 명환으로부터, 나는 발뒤축을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야금야금 음식을 축내며,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버텨왔어! 이것이 사는 건가? 이대로 살아남으라는 건가? 그게 결국 네 양심이라는 건가? 똑바로 말해봐, 넌 그저 달아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나한테서, 이런 볼썽사나운 놈한테서 도망치려는 거지!"

 명환은 목이 잠겨 있었다. 갈라진 고함 소리가 적요한 광장을 흔들었다.

 "·····도망치려는 거야, 영영 잊어버리려는 거야! 넌, 넌 나보다 더 비겁한 인간이야·····!"

 명환의 손이 내 목을 향해 치켜 올라왔다. 어둠이 꿈틀거렸다. 불빛들이 낱낱이 부서졌다.

 나는 무릎을 광장 바닥에 짓찧었다. 주먹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외쳤다. 모든 두려움을, 일생 동안 키워온 두려움을 깨뜨리듯이 울부짖었다.

 "불을 켜세요!"

 

 

 

 

 

 

 

 

 

 

 

 

 

 인규는 언제부턴가 비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신 독이 그의 얼굴에 냉정한 껍질을 응고시켜오고 있었다. 때로 인규는 자신의 비정함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껍질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는 늦은 밤에 숲을 헤매다가 덫에 걸린 짐승과 같았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는 덫에 걸렸다. 그는 새벽을 기다렸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울부짖고 신음하는 것에마저 지쳐버렸으므로 이제 그는 날카로운 덫에 찢겨 피가 흐르는 다리를 핥으며 기다렸다.

 새벽은 고통을 멎게 해줄 것이었다. 박명 속에서 신의 얼굴을 한 사냥꾼이 걸어올 것이었다. 자신의 노획물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솜씨 좋은 사냥꾼은 일격에 그를 사살해줄 것이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고 인규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진규가 자신의 인생의 덫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인규는 울면서 걷고 있었다. 눈물도 흘리지 않은 채 어깨만 들먹이며 목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송곳니가 입술 안쪽을 파고들어 갔다. 이제 이틀쯤 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뒤집어보면 흰 흉터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단지 인내해야 한다는 본능,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서 멈출 수는 없다는 본능에 의지해 숨죽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다.

 "진규야, 진규야아."

 일주일 전의 늦은 밤이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인규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공중전화 박스까지 비를 맞으며 달려 나온 것이었다.

 "안 돌아오느냐, 으응? 안 돌아올 테냐?"

 "어머니!"

 인규는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저 인귭니다."

 어머니는 인규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규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쉬어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어머니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서 외쳐댔다.

 

 

 

 

 

 

 

 

 

 

 

 

 

 

 

 

 빗소리가 인규의 귓속을 활퀴었다. 어머니가 빗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돌아오겠느냐?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밤바람이 인규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영안실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우거진 나무들은 금세라도 인규를 향해 쓰러질 것처럼 무성한 가지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인규는 휘청거리며 그것들을 노려보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언덕을 넘자 지대가 높은 곳에 거대한 병동이 있었다. 인규는 병동 맞은편으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노랗고 붉은 불빛들이 적요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인규는 통증을 느끼며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외마디 신음이 악물린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어쩌지 못할 인간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파고드는, 파고드는 이 손톱 하나 어쩌지 못한다.

 

 

 

 

 

 

 

 

 

 

 

 

 이십층가량 되어 보이는 병동에는 층마다 한두 군데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방에서는 환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앓는 사람들의 방은 어두웠다. 마치 하나하나의 창이 지쳐 눈을 감은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수많은 짐승들이 새벽을 기다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가 하고 인규는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 밤이 끝날 무렵, 자신도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규는 병동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친 발이 자꾸만 허공을 헛디뎠다. 공기가 춤추었다. 숨이 차오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비탈길을 올라와 녹슨 철제 대문을 힘주어 열고 나면 정환은 대문 안쪽에 기대어 서서 저물어가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때마다 정환을 사로잡은 것은 구덩이 하나하나에 우뚝 솟은 나무들의 환영이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환영은 모두 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낭창낭창한 처녀의 허리처럼 흔들리는 목련 꽃송이며 라일락 향기가 황량한 마당에 가득했다. 진달래나무들에 시선이 멎을 때면 환영은 더욱 풍요해져서, 눈이 멀 것 같은 붉은 꽃바다에 정환은 오한이 드는 줄도 모르고 거기 서 있었다.

 

 

 

 

 

 

 

 

 

 

 

 

 텔레비전과 형광등을 끄고 문단속을 하는 인기척만이 외딴집의 적막을 깨뜨렸다. 정환은 언제나처럼 그 소리에 뜻 없이 귀를 기울이며 아픔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깊은 수면을 청했다. 갖가지 상념이 아득하게 침전하고, 깨어나면 모든 것이 정리된 아침일 것이다. 정환은 전신의 긴장을 푼 채 자신의 인생을 지배해온 질기고 부질없는 희망들이 밤의 혼곤함 속에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될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그 소리가 차츰 커지면서 정환은 잠이 달아나버렸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문틈에 귀를 댔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에 섞여 잦아들어야 할 소리는 오히려 격렬하게 자정의 적요를 활퀴었다.

 정환이 무슨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힘에 이끌려 그는 세 들어온 뒤 처음으로 거실과 연결되는 문을 열었다.

 계약을 위해 현관을 통하여 들어가본 적이 있는 황막하던 거실이 뜻밖에 어두우면서도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에 그는 놀랐다. 그것은 촛불 때문이었다. 거실 벽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형형색색의 초들이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푸르고 붉고 연보랏빛인 초들은 길이와 굵기가 제각각이었으며, 정환의 그림자를 여러 개로 분산시켜 무시무시하게 흔들리도록 했다.

 정환의 기척 때문인지 울음소리가 별안간 멈추었다.

 "괜·····찮으십니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정환은 자신의 아우성치는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욕실로 다가갈 수도, 돌아서서 다시 자신의 방문을 열 수도 없었다. 그의 그림자들은 외치고 있었다. 돌아가라, 어서 돌아가라, 돌아가라.

 그림자의 명령대로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정환의 가슴은 무섭게 뛰고 있었다. 일백 평의 외딴집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한 침묵뿐이었다.

 

 

 

 

 

 

 

 

 

 

 

 

 인간의 조상들은 약한 근육과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낮 동안 뿔뿔이 흩어져 수렵과 채취를 하다가 해 질 무렵이면 무리의 본거지인 동굴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잦은 이동은 맹수들이 잠든 야간에 이루어졌으므로, 밤에 돌아왔다가는 무리에서 낙오되기 십상이고 낙오는 비참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식량을 찾아 강으로 숲으로 헤매던 인간의 조상들은 불타는 황혼을 신호로 하던 일들을 모두 팽개치고 자신들의 동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본능이 지금까지 후예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이른바 황혼병, 혹은 귀소 본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동식은 자신에게 그 본능이 유난히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육신의 병이 영혼을 어떻게 물어뜯느지를 동식은 그때 알았다. 헛구역질을 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목과 어깨와 다리에 올라타고 매달린 수많은 귀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내뱉고 들었던 말, 유행가 가사, 책에서 읽은 모든 단어와 문장 들이 이명처럼 울리며 귓속과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동식은 완전한 통증을 배웠으며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만해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육체의 무력함과, 그 무력한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자 앞에서는 어떤 희망도 그리 눈부시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얼었던 육체 위로 강한 햇빛을 받자 동식은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다. 빛은 몸 구석구석에 눅어 있던 습기를 증발시켰으며, 혈관을 흐르던 검붉은 어둠의 알갱이들을 잘게 부수어주었다. 동식은 자신의 고단한 근육들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빛에는 모든 절망과 고통들을 우스꽝스럽고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이제 유리창으로도 여과되지 않은 채 생생하게 온몸을 덮치는 햇살은 그를 더욱 안도하게 했다. 어둠의 결박이 풀어진 듯한 자유스러움이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던 씁쓸함이 치미는 것만은 누를 수 없었다. 그것은 젊은 날을 병에 고스란히 지불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따금 느낄 수 있는 회한일 터였다.

 

 

 

 

 

 

 

 

 

 

 

 

 

 

 


 

 

 

 

 

 

 

 

 

 

 

해설

 

강계숙

(문화평론가)

 

 

 

 

 

 

 

 

 초판 해설에서 김병익은 『여수의 사랑』을 가리켜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고,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지금의 그의 나이로 살았을 196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속해 있을, 어둡고 간난스럽고 한스러운 세계"이며, "유행적인 것을 도모하지 않은 채, 전통의 세계와 정통의 양식 속에서 그의 정서와 문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어도 겉보기로는, 풍요하고 밝고 미래는 한없이 열려 있는 듯한 이 1990년대 중반에, 이 시절의 풍속에 어울려야 할 나이의 젊은 작가가, 왜 그처럼 지쳐 있는지, "이 가볍고 환한 세상에서 누가, 발랄해야 할 이십대의 그를 사랑도, 화해도 거부하게, 아니 그것에 다다르기조차를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묻는다. 『여수의 사랑』에 관한 한 이 물음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핵심적인 지적이다. 김병익은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의 좌절감"과 "고전적 낭만주의"에서 답을 찾았지만, 삶의 원초적 고단함에서 발원하는 호소가 세대를 아우르는 정서적 교감을 낳는 보편성의 흭득으로 나아간다는 설명에 충분히 긍정하면서,

 

 

 

 

 

 

 

 

 

 

 

 

 

 

 

 

 그는 실존적 죽음에 따른 정서적 여파보다 각각의 청춘에 추상적 관념이 아닌 육체적 사건으로 닥친 '상징적 죽음'의 개별적 과정과 낯낯의 사정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는 자들의 사연을 소설화한다. 죽음에 감염된 삶, 혹은 삶에 이미 죽음이 내재된 형국은 『여수의 사랑』이 제각각 죽음의 사연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해결의 기미가 없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으로 인물들에게 잠재해 있다.

 

 

 

 

 

 

 

 

 

 

 

 

 

 

 하지만 소설의 언어로 죽음을 사는 것보다 죽음 '이후'의 삶을, 목숨은 끊기지 않은 채 죽음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영혼의 황폐함이 어떤 삶의 형태를 낳는가에 작가는 더 주목한다. 죽음 자체, 혹은 그것의 현현이 아니라 삶에 미치는 죽음의 지속적 파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음의 재현이나 현시가 아니라 현재적 영향과 추후의 효과가 사건화된다. 달리 말해, 죽음은 억압된 트라우마이고, 이 트라우마가 지금 어떻게 귀환하는가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음울한 베일처럼 서사의 배면에 죽음의 파문이 드리워져 있고, 인물이 앓고 있는 다양한 신경증은 서사의 전면을 차지한다. 가령, 『여수의 사랑』 곳곳에서 발견되는 "낯익은 체념과 회한", 무관심과 피로, 외로움, "지독한 여독", "무감각한 희망들", 사는 일의 귀찮음, 조로,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고독감", "불가항력적인 파멸의 냄새" 등은 정신적 외상에 따른 심리적 징후들이다. 『여수의 사랑』에는 이러한 병증과 정서적 장애가 가득하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심인성 질환을 동반한다. 정선은 심한 결벽증과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고, 인규는 힘껏 주먹을 쥐는 버릇 때문에 손바닥에 흉터가 있으며 이를 악무는 습관 탓에 성한 치아가 없다. 황씨는 딸에 대한 애도가 지나쳐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그를 지켜보는 정환은 위장 장애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동걸은 불현듯 엄습하는 이명에 시달리기 일쑤고, 명환의 불면증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육체의 타락으로 자신을 내몬 동식 곁에서 동영은 몽유병 환자처럼 밤을 새워 떠돈다. 소설의 서사는 이러한 심인성 장애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를 인과적으로 밝힌다. 마치 신경증 환자의 증례가 정신 분석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병인과 증상의 연관성을 추적하는 것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되짚어보려는 일환일 뿐,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그보다는 병적 징후로 가득한 자기 현존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그것의 강력한 영향을 인정하고, 그 영향력 속에서 온 힘을 기울여 현재를 진단하고 파악하고 조망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비록 죽음에 압도되어 밝은 전망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피폐를 목격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죽든 살든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트라우마가 가족의 죽음에서 연유한다는 점이다. 왜 굳이 '가족'일까? 앞서 기술한바, 『여수의 사랑』이 시대의 '상징적 죽음'에 대한 반향이라면, 가족의 죽음은 이 모든 병적 징후를 발생시킨 연원으로는 너무나 투명한 인자다. 가족의 죽음만큼 우울증을 유발하는 사태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여수의 사랑』을 처음부터 잘못된 역사적 층위에 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점이 한강의 작가로서의 철두철미한 탐색을 역으로 확인시킨다. 1990년대 내내 큰 대중적 호소를 얻었던 '운동권 서사'와 후일담 소설들이 역사와 사회, 민족과 민중 등 거대 서사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집단적 상처를 이야기할 때, 한강은 개인의 개별적 삶을 형성하는 원초적 토대와 내밀한 기원을 파고든다.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 그 무소불위의 힘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역사와 사회, 민족과 민중이라는 추상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뿌리의 구체를 파고드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사생활의 영역인 가족의 내력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여수의 사랑』이 그 시기 직면한 실존의 위기와 한계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예로 읽히는 또 다른 이유이다.

 한편 가족이 개인을 사회의 상징적 질서로 진입시키는 출발지이자 사회화를 위한 훈련 장소라 할 때, 죽음의 사유가 가족에게서 촉발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죽음의 외상 때문에 정상적으로 상징계 내부로 편입하기 힘들다는 점―『여수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남들처럼' 사는 일에 곤란함을 느끼는 부적응자들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어려움이 새로운 목숨을 얻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 작용하여 현실 부적응 상태의 자아를 주체화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가족의 죽음은 정신의 병을 초래하는 씨앗이자 역으로 자아에게 '되태어나기'를 요구하고 활성화하는 촉매제이다.

 

 그 밤에 그 사람은 몇 살이었을까, 몇 번째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있었을까.

 나는 열세 살이었어. 죽은 어머니의 장롱 서랍을 정리하던 그해 이른 봄날 [·····] 진저리 쳤던 때가 처음이었으며, 그 겨울 초입의 밤에 두번째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지.

 이제부터 새 목숨으로 살아가야 할 몇십 년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지. 그동안에도 대체 몇 번을 더 되태어나야 할지 짐작할 수 없었어. 그러기 위하여 그때마다 다시 죽어야 할 일이 막막하고 두려워져서, 이미 희끗희끗 헐기 시작한 입술 안쪽을 떡니로 악물고 있었지.

―「철길을 흐르는 강」(『내 여자의 열매』, p.342)

 

 

 

 

 

 

 

 

 

 

 

 

 

 

 

 

 요컨대,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오는 생물학적 출생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단 한 차례의 사건은 아니며,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 '새 목숨으로 살아가는 일'이 때때로 발생할뿐더러, 이를 위해서는 "그때마다 다시 죽어야" 하고 그 같은 죽음의 되풀이가 "막막하고 두려워져서" "입술 안쪽을 떡니로 악물"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는 상징적 죽음에 이어 도래하는 '상징적 재탄생'에 대한 작가 편의 서술이자 자기 성찰적인 의미 부여라 할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여수의 사랑』을 재독하면, 이 소설집은 '되삶'을 위해 죽음의 회귀라는 힘든 입사식을 치르는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그린 (무)의식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이삼십대라는 점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죽음의 집요한 귀환은 역설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통증을 수반하는 '되삶'의 일환이자 지난한 여정으로 인식된다. 이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주체의 자기 갱신을 실존의 절박함으로 파악하고 이 심원한 과제를 문학적으로 풀어가는 소설가 한강의 고유한 방법적 인식으로 자리한다. '새 목숨'에의 바람은 막연한 관념이기 쉽다. 불투명하고 추상적일수록, 생각만의 희구란 편안하고 수월한 해답이다.  그것이 관념의 위안과 유희가 되지 않으려면, 말로만 강조되는 상식과 거짓된 전망이 되지 않으려면, '되삶'은 죽음을 경유해야 한다. 더구나 그 결과가 삶의 긍정이나 행복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도 않으며, 주체는 난치의 병에 포박되거나 더 심각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여수'의 인물들은 그래서 아프고, 괴롭다. 그들은 주체의 재탄생을 위해 '다시 죽어야' 하는, 아니 '다시 죽고' 있는 스스로를 애도하는 중이다. 이들이 우울한 세번째 이유이다.

 

 

 

 

 

 

 

 

 

 

 

 

 

 

 

 '되삶'의 방법으로 죽음의 필연적인 경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수의 사랑』에 실린 소설들이 동일한 인물 관계를 반복하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아가 주체로서 재정립되기 위한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 구조적 특징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계에 '있음'만으로 존재론적 확실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경고이며,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실행, 구체적 현실과 관념적 꿈 사이의 간극을 실체화하는 방법이다. 분신의 등장은 주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결핍 가운데 찢겨져 있음을, 그로 인해 주체의 존립이 내적으로 붕괴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알리는 긴급 신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분신의 테마는 자주 환상의 형식을 취하고 이중적 담화의 형태를 띤다.

 

 

 

 

 

 

 

 

 

 

 

 

 

 

 

 그렇다면 왜 각각의 인물들이 분신 관계에 있다고 읽히는 것일까?

 서사를 이끄는 주동 인물들은 자신의 닮은꼴로 타자의 얼굴을 본다. 『여수의 사랑』은 동일자의 형상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분열적인 자의식의 투영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자기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어두운 상처의 인격화, 즉 트라우마의 외면화에 가깝다. 자흔과 동걸에게서 정선과 영현이 보는 것은 내면 깊숙이 자리한 자신의 상처이며, 거울 역할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억압된 트라우마의 객관적 상이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정선과 영현의 자기 응시는 자흔과 동걸이라는 거울에 비쳐 되돌려진 반사상이며, 자흔과 동걸은 그 반사된 상―정선과 영현이라는 거울―을 자신의 외상이 구체화된 외현으로 본다. 마주 세워진 거울의 끊임없는 반사가 이들 간에 오가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주체의 자기 대면은 단독자로서의 순수한 자기 응시일 수 없으며, 자아 찾기의 여정에는 '타자'라는 불순물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나 아닌 것'의 시선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만 비로소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 응시가 개시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흔, 정선, 동걸, 정환, 영진, 명환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는' 자들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영진은 명환이 어둠 속에서 매일 밤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친다. 영진의 분신인 명환의 응시는 영진에겐 거울에 비친 끔찍한 자기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분신 관계는 『여수의 사랑』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는 만큼 또 다른 의미망을 형성한다. 동일자로서 타자의 얼굴을 파악하는 주체의 서사를 이러한 분신의 설정에서 유추할 수도 있고, 상처의 공유라는 감정이입의 교류가 타자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진정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참된 윤리의 길을 트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타자의 응시가 억압된 것의 귀환을 촉발하는 상황은 주체에겐 내면의 병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태가 될 수도 있다. 정선이 자흔으로 인해 결벽증이 도지고 격심한 구토를 일으키는 예나 영현이 동걸의 이명을 똑같이 겪게 되는 예 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타자의 윤리학'을 말하는 일은 오히려 주체의 도덕적 우월감에서 기인한 자만의 소치일 수 있다. 이들의 독특한 분신 관계는 이를 암암리에 가리킨다. 억압된 것이 타자로부터, 타자를 통해 되돌아오는 과정이란 '나'에게 큰 고통이기에 타자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심정적 여유를 갖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주체는 우선 자신에 내재된 결핍의 흔적을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주체의 정신적 생존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권고와 메시지가 이러한 분신 테마에는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수'의 주인공들은 우울한 주체들이다. 우울의 주체란 애도를 과하게 수행 중인 주체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슬픔을 유발하지만, 그 슬픔이 지나쳐 애도를 적절한 시점에 종결짓지 못하면, 상실된 대상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고 애도는 주체의 자기 비하로 돌아서게 된다. 자아의 빈곤, 즉 계속적인 자기 비난이 주체 내부에서 심화되고, 해소되지 못한 슬픔의 침전물은 어느덧 자아의 일부가 된다. 친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처럼 자란 자흔의 짙은 피로와 여독, 아버지와 동반 자살 끝에 홀로 살아난 정선의 죄책감, 동생 진규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에 삶 전체를 소진하는 인규의 분노, 어머니와 동생 정임을 버리고 가출한 정환의 고독감, 아내와 배 속의 아이를 한날한시에 잃은 명환의 원한에 찬 절망은 애도가 지나쳐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 '부재하는 현존'으로, 마치 유령인 듯 합체한 우울증의 다양한 변주이다. 애도의 대상을 자기 안에 가두는 일은 우울증적 주체가 형성되는 첫 단계이다. 자아의 일부로서 대상을 보유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아란 곧 '상실된 타자'라는 역설이 주체 내부에 성립된다. 우울증은 자아가 타자의 상실을 타자와의 합치를 통해 만회함으로써 상실을 거부하고 대상을 보존하는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주체가 누군가를 자아의 분신이자 거울로 인식한다면, 게다가 그 '누군가'가 우울증적 주체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의 구체적 외현으로 나타난다면, 주체는 자신의 '애도의 과함(지나침)'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흔이 떠난 뒤, 정선이 오래전 떠나온 여수를 다시 방문하게 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자흔에게 여수는 우연히 마주친 상상 속의 그리운 고향이지만, 정선에게 그곳은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지옥의 공간이다. 그런 악몽의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를 뚜렷이 알지 못하지만, 자흔이라는 분신을 만남으로써 정선은 가족의 상실에 대한 오랜 애도 작업을 그만 끝내야 한다는, 그래야만 남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다. "거짓말 같은 젊은이, 스스로 기쁨을 저버렸던 저 모든 나날"의 회복을 위해 정선은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이 내리치는 폭우를 뚫고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를 맞닥뜨리고자 고향을 향해 간다. 정환이 황씨의 죽은 딸을 향한 기이한 추모 행위에 크게 동요하는 것도, 영현이 동걸의 '야간열차'에 대한 기묘한 집착을 자기 열망으로 환치하는 것도, 동식이 아버지의 실종 이후 동영의 방황을 불안과 초조 속에 제 일처럼 지켜보는 것도 모두 우울의 정체, 즉 애도의 과함을 감지한 데서 기인한다. 『여수의 사랑』에 반복되는 분신의 구조화는, 그러므로, 우울증적 주체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목도함으로써 비록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울지라도 치유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려는 자기 인식의 능동적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수의 사랑』은 각각의 개인이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각자의 '여수'를 향해 느릿느릿, 그러나 마치 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이 앓는 병이야말로 삶에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는지 모른다. '질병으로의 도피'는 자아를 위협하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들의 병은 생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 충동의 소산이 아니라 자기를 파괴시킬지도 모르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고자 의식과 무의식이 한판 싸움을 벌여 자아 내부에서 힘겹게 조율된 결과물이다. 그러니 '여수'의 인물들은 죽고자 아픈 이들이 아니라 살고자 아픈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되돌아간 '여수'는 결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친다. 이들의 여정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엔 치러야 할 삶과 죽음의 다툼이, 목숨의 치명적 회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젊은 영혼들의 이 길고 지루한 도정이 값지기만 하다.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 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