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어딘) 『활활발발』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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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어딘) 『활활발발』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5. 3. 28.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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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om/shorts/wLksEjnrMw0?si=z4h4MGSXQrv5IE8Q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영상이다. 오늘 메모한 책인 『활활발발』의 저자이고 '어딘' 글방을 운영하며 젊은 작가들을 길러낸 김현아 작가님이다. 책 표지를 보면 '김현아 지음'이 아닌 '어딘 지음' 이라고 쓰여있다. 어딘 글방러들이 서로를 본명이 아닌 별칭으로 부르는데, 김현아 작가님은 "어딘"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이를 저자명으로 쓴 듯하다.

 제목부터 특이한 『활활발발』,재밌게 읽었다. 책을 읽다 보니 김현아 작가님은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오래전부터 한강 작가님과 『소년이온다』를 사랑하신 듯 하다. 글방의 사람들에게도 읽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왔고 서로 생각을 나눠왔던 걸로 보이는데, 글방러들이 부러웠다. 이런 작가님과 글방을 함께 했다니. 살면서 가끔 만나는 큰 행운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위의 짧은 영상 덕분에 김현아 작가님의 책을 검색했다. 좋은 글을 알아보고 타인을 순수하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난 본능적으로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 작가님의 글이라면 나와 결이 맞겠다는 예감이 들어서 김현아 작가님의 『그녀에게 전쟁』과 『활활발발』 두 권을 빌렸고, 내 예상이 맞았다.

 김현아 작가님을 알게 돼서 기분이 좋다. 아래부터는 김현아, 『활활발발』 메모이고 난 이제 『그녀에게 전쟁』을 읽으러 가야겠다.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50739

 

어딘 “독서, 경계없이 마음껏 유영하는 일” | 예스24 채널예스

켜켜이 층층이 인류의 경험이 내 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사랑, 이 순수한 순결한 고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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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h.yes24.com/Article/Details/48304

 

어딘 "글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는, 참 뭉클한 시간들" | 예스24 채널예스

글을 쓰는 삶과 빌딩 청소를 하는 삶과 농사를 짓는 삶은 동등합니다. 어떤 삶이든 스스로의 경험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지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우연히’ 글쓰기를 하게 된 사람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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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라는 건 문장이 이루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하나의 완벽한 문장, 또 하나의 완벽한 문장, 또 하나의 완벽한 문장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글이 되는 거죠. 그중에 한 문장이라도 불량품이 있다면 부실 건물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오늘 지니가 가지고 온 글은 어떤 이야기를 그냥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전달하는 거예요. 그건 글이 아니고 그냥 에피소드일 뿐이죠. 글쓰기는 문장과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땅 위에 하늘 아래 드러내는 작업이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튼튼하고 정교한 '문장'을 만들어야 해요."

 

 

 

 

 

 

 

 

 

 

 

   "치 글 너무 좋아요. 문장이 가볍고 탄력 있어요. 담백하고 정갈해요. 잘 쓰려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글, 그래서 잘 쓴 글이죠. 앞의 문장이 뒤의 문장을 부르고 뒤의 문장이 앞의 문장을 받치고 있어요. 종종 그런 말 하잖아요. 다 써놓고 어떤 한 문장을 빼봤을 때 와르르 무너지는 글이 정말 잘 쓴 글이라고. 그 말인즉슨 꼭 써야 할 문장, 반드시 필요한 문장만으로 이어갔다는 거죠."

 

 

 

 

 

 

 

 

 

 

 

   글방이 가장 불타오를 때는 어떤 글이 금기를 넘어설 때다. 모두의 마음 밑바닥에 있지만 차마 쓰지 않는, 쓰지 못하는 이야기들. 누군가 그중에 어떤 것들 건드렸을 때, 게다가 그 글이 너무 재미있고 잘 썼을 때, 오도도 소름이 돋으면서 발생하는 짜릿한 전율. 오, 저렇게까지 써도 되는 거야? 여기는 이런 글 막 써도 안전한 곳인 거야? 그다음 주부터 글방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비로소 생각의 습관, 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작가란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낯설게 하기, 글쓰기의 핵. 설명만으론 가닿기 어려운 이 지점은 때로 좋은 글 한 편으로 정확하게 가늠된다.

 

   어디까지 쓸 것인가? 알고 보면 글쓰기는 용기와 관련된 행위다. 눈부신 한 편의 글 안에 전투의 상흔이 이곳저곳 깊게 배어 있는 까닭이다. 견고한 질서 완고한 관습 치밀한 통제를 부수고 깨뜨리고 균열을 내는 것, 글쓰기란 그런 것이므로 우리는 종종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피를 지혈하고 깊게 배인 상처를 싸매주고 뜯겨나간 옷자락을 수선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종종 기억과 기록은 동일하지 않으며 문자 안에 다 담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말로도 글로도 복구되어지지 않는 상처, 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쓰는 일이란 그러므로 공적인 기억의 바깥을 떠도는 배제된 혹은 은폐된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일 수도, 문자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무덤에서 부장품을 발굴하는 일일 수도, 표현되어지지 않는 것의 표정을 더듬는 일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었다. 끝내 남는 것은 부드럽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 이라는 게 다만 놀라울 뿐.

 

   오늘 당신과 내가 쓰는 한 편의 이야기는 사피엔스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상추의 이야기이며 고양이의 이야기이며 창밖의 까마귀와 그가 먹는 홍시의 이야기일 것이다. 사피엔스의 일이란 좁쌀의 일이면서 우주의 일이기에.

 

 

 

 

 

 

 

 

 

 

 

   하와이에서 돌아온 나에게 룻다가 건넨 환영 인사는 간결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나도 한마디로 대답했다. 3백 명의 작가를 네 안에.

   "폴란드 상공에서 폴란드를 내려다보니까 온 천지가 숲이더라. 폴란드 사람들은 마음마다 숲이 있겠구나, 쉼보르스카의 시가 저런 배경 속에서 나오는 거구나 싶다가 문득 핀란드 사람들은 마음마다 호수를 하나씩 품고 있겠구나 생각했어. 핀란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작고 큰 호수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거든. (···) 그 오묘한 시간 속에서 잉태된 것이겠구나. 그럼 내 마음속에는 아마도, 아마도 산맥들이 물결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 작가를 안다는 건 그가 살아온 곳의 지형과 그 지형이 만들어낸 수많은 생명들, 순록 여우 물소 코끼리 기린 나무늘보 캥거루 은사시나무 동백나무 자작나무 고사리 냉이 튤립 가오리 돌고래 망둥이 전갱이 블루베리 파파야 모자를 삼켜버린 뱀 사막을 건너는 쌍봉낙타 등등이 내 안에 함께 산다는 거지. 그다음은 그냥 그대로 두면 돼. 그들이 어울려 저절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든. 별과 달과 금성과 마그마와 비소와 바이러스까지, 너무 미세해서 보이지 않는 것부터 너무 거대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너무 미약해서 들리지 않는 소리부터 너무 광대해서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함께 사는 마음이 만들어진다면, 룻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을 거야.

   사냥하고 춤추고 불을 피워 요리하고 술 담그고 수영하고 싸우고 토라지고 기도하고 달리고 꽃피우고 잉잉대고 짹짹대면서 네 안의 모오든 생명들이 제 할 일을 하느라 바쁠테니 너는 그저 손이나 빌려주면 되는 거지. 시쳇말로 그분이 오신 거야. 그때도 아아 하품이나 하면서 좀 더 딴청을 부리거나 만화책이나 보면서 뒹굴며 지내도 좋아. 결국 이야기가 네 멱살을 잡고 책상 앞에 앉히면, 할 수 없지, 쓰는 거지, 어쩌겠어."

 

 

 

 

 

 

 

 

 

 

 

   글을 쓰게 하는 본연의 힘은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느냐, 그것도 얼마나 절실하게, 얼마나 혹독하게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다 깎은 뒤 거울 속에 남은 것은 여전히 됫박머리였다.

   이왕 깎은 걸 어떡하니, 다음번에 다시 잘 깎아주마.

   그러길래 왜 아저씨는 이발만 열심히 하지 잡담을 하느냔 말예요.

   나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마침내 이발사는 덜컥 의자를 젖히며 말했다.

   정말 접시처럼 발랑 되바라진 애구나, 못쓰겠어,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 주둥이부터 나왔니?

   못쓰면 끈 달아 쓸 테니 걱정 말아요, 아저씨는 배 속에서 나올 때 손모가지에 가위 들고 나와서 이발쟁이가 됐단 말예요?

― 오정희, 「중국인 거리」

 

 

 

 

 

 

 

 

 

 

 

   녹초가 된 몸을 다시 일으키는 건 문장들이다. 환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서도 후루룩 국수를 건져 먹으면서도 상사의 훈계를 들으면서도 떠오르는 문장들, 연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아낼 때도 친구들과 헐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둥둥둥 표류하고 부유하는 문장들. 아아 이제 다 끝났어, 청소도 빨래도 보내야 할 팩스도 써야 할 편지도 해야 할 안부 전화도, 산란하고 산만한 모든 일을 마침내, 끝내고 책상 앞에 잠시 넋을 놓고 앉아, 가만히 빈 종이를 혹은 빈 화면을 바라보노라면 꼬물꼬물 올챙이 같은 것들이, 겅중겅중 소금쟁이 같은 것들이, 파르르르 물잠자리의 날갯짓 같은 것들이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헤엄쳐다니다 첫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물꼬가 터지면 와르르 몸을 뚫고 나오는 이야기들. 내가 아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 첩첩이 겹겹이 등뼈에 횡격막에 십이지장에 쓸개에 혈관에 섬모에 스며들어 있던 이야기들, 산 사람의 이야기, 죽은 사람의 이야기, 토끼의 이야기, 느티나무의 이야기, 거위의 이야기, 박쥐의 이야기, 바람의 이야기, 별의 이야기가 손끝으로 달려온다. 북유럽의 이야기, 남태평양의 이야기, 중앙아시아의 이야기가 절로 얽히고설킨다. 쓰다 보면 문득 짙은 의심이 든다. 내가 쓰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글이란 이야기가 나를 이용해 생을 흭득하고 이어가고 확장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작가의 몸이란 어쩌면 이야기를 전하는 경로가 아닐까. 그 길에 꽃 피고 새 울고 은성한 그늘 드리우라고 모질고 냉정하게 담금질하는 거 아닐까. 작가의 재능이란 그러므로 행운이면서 동시에 고난일 수밖에.

   글방에 오는 이들에게 나는 종종 우아한 독자로 남으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하지만 우아한 독자로 남고 싶은 사람은 결코 글방에 오지 않는다. 재능의 발견이 곧 고초로 이어지는 운명에 이끌린, 자기 의지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선택'을 받은, 해사하고 맑은 눈망울들이 글방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아직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눈을 빛내며 기지개를 켠다.

 

 

 

 

 

 

 

 

 

 

 

   글을 읽고 그 자리에서 바로 피드백을 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글방러들이 글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이 현장에서 하는 비평이다. 합평회는 자신의 글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좋은 글에 대한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쓰는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라면,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논평은 대부분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말이기도 하다. 겉보기에는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기실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상기시키며, 그러니 섬세하게 예리하게 맹렬하게 피드백을 하라고 나는 종종 말하곤 했다. 명징하고 깐깐하고 정직한 비평의 언어가 쌓이고 쌓일 때 자신의 글에도 엄정할 수 있다고.

   한 편의 글로서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었는가, 한 문장 한 문장이 어떤 식으로든 주제에 복무하는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끝 문장을 예측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실패한 글 아닐까, 캐릭터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가, 새로운 이야기는 보편적 형식에 익숙한 이야기는 실험적 형식에 담자, 마지막까지 긴장이 유지되는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긴 문장을 실패하지 않고 쓸 자신이 없다면 가능한 한 짧은 문장으로 훈련을 하자, 이런 말들이 오갔던 것 같다.

 

 

 

 

 

 

 

 

 

 

 

   "글 쓰는 사람의 배경을 일일이 알고 글을 읽는 경우가 있나?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박경리 작가를 모르면서 『토지』를 읽잖아. 김애란 작가를 모르면서 『달려라 아비』를 읽고 우리가 박완서, 한강을 알아? 『친절한 복희씨』를 읽으면서 박완서 작가를 추측하고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한강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거지. 근데 왜 글방에서는 글 쓴 사람의 사정을 알고 글을 읽어야 하지?"

 

 

 

 

 

 

 

 

 

 

 

   뭐야, 오늘 이 양반들 작두 타는 날인가. 글의 본질을 이웃집 고양이 이야기하듯 하네. 훌륭함과 야비함과 잔인함과 긍휼함과 미추를 동시에 내포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환멸과 환희, 몸을 지닌 것들에 대한 애틋함과 황홀함과 슬픔, 나무와 강과 화성과 사이보그와 멧돼지와 고래 사이에서 서성이고 헤매고 탄식하는, 너이면서 나, 동일한 질료로 만들어지지만 눈부신 독자성을 지닌 이야기들. 매주 글방에서 마주치는 것들이다.

 

 

 

 

 

 

 

 

 

 

   '글과 작가를 분리해서 생각합시다. 그리고 글방에서 나왔던 글은 글방 안에서 소화하고 끝냅시다. 그 작가가 쓴 글을 인용하고 싶다면 반드시 허락을 받고 합시다. 또 하나, 말로 글을 옮기지는 맙시다.'

 

 

 

 

 

 

 

 

 

 

   글이 주는 위안이란 서로 다른 여러 세계가 교차하고 충돌하고 비껴가고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우주에 자신이 속해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누추하고 남루할 줄 알았던 내 존재가 맙소사, 다른 수많은 별들과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구나, 목격할 때다. 내 후회가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내 절망이 누군가의 징검다리가 되고 내 뜨거운 눈물에 춥고 쓸쓸한 누군가가 밥을 말아 먹는다는 걸 아는 것, 글이 주는 위안일 것이다.

 

 

 

 

 

 

 

 

 

 

   '나의 사적인 에로티시즘'. 이 글감을 내보낸 데에는 아마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연애와 파탄과 사랑과 이별과 섹스야말로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끈질긴 관심이며 모든 예술의 원천 아니던가. 글방러들 역시 이 주제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중반의 글방러들은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 말인즉슨 이야기를 하고 싶긴 한데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두고 약간의 머뭇거림이 보였다는 거다.

   이럴 땐 승부수를 던지는 편이 좋다. 나의 '사적인' 에로티시즘. 그러니까 딴 사람들이야 어떻든 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를 써 오면 된다. 물론 글방에는 합의된 원칙이 있다. 글과 글쓴이를 구분할 것,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다루는바 글 속에 광이노가 살인범과 도둑과 사기꾼이 나와 자기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글 속 등장인물의 것임을 알고 맥락 속에서 읽어낼 것, '나'라는 1인칭을 쓴다 하더라도 글쓴이 자신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임을 잊지 말 것, 설사 자전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글에 '사실' 그 자체는 있을 수 없고 작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사건만이 있음을 명심할 것 등등.

 

 

 

 

 

 

 

 

 

 

 

   그날 우리가 공유한 것은 '어, 여기까지 써도 되는 거야?'에 대한 공감이었다. 미스빈의 글은 그러니까 금기와 위반을 두고 '어디까지 쓸 것인가?'를 질문하는 글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어떤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자라면서 우리는 마음의 이야기를 적절히 감추고 비틀고 때로는 외면하는 법을 배운다. 예술은 그 숨기고 피하고 입 다물었던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나는 종종 글방에서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죽여버리고 싶어 아버지"라고 썼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놀란다. 그렇게 글을 쓴 이가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 깊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혀놓은 이야기를 누군가가 글로 꺼낼 때 독자는 비로소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내가 패륜아나 별종이나 개망나니가 아니었구나, 하며 작가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고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집요한 탐구를 하게 된다.

   글을 쓰는 일은 재능보다, 성실함보다,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종종 글방러들에게 말하곤 했다. '어디까지 쓸 것인가'는 '내 마음의 우물을 어디까지 들여다볼 것인가'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차곡차곡 입력된 관습과 지식과 정치와 경제와 윤리의 체계를 의심하고 살짝 깨물어 부수어보기도 하고 와장창창 깨트려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가 작가라고, 나는 스스로 두려워하면서, 말하곤 했다.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다. 21세기, 지금 목숨을 내어놓고 말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 혹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주류의 시스템이 이를 부인하고 두려워하고 때로 작가를 위협하는가? 이야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위반의 대가를 치를 용기, 그것을 함께 기르자고 글방 같은 걸 계속하는 거라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생각한다.

 

 

 

 

 

 

 

 

 

 

   금기의 기원, 해묵은 윤리와 도덕에 대한 통렬한 비판, 여자의 몸에 깃든 싱싱한 야심, 남자의 몸에 깃든 달콤한 부드러움,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N개의 성, 권위에 대한 도전, 위반과 탈굴종. '나의 사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글감은 수많은 이야기로 확장되고 흐르고 치환되었다.

   그 중심에는 미스빈이 있었다. 솔직하고 정직하고 정확하게 스스로를 드러낸 미스빈의 글 덕분에 다른 글방러들의 글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때로 한 편의 탁월한 글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문화적 카오스를 만들어내며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글방이 활활발발해지는 순간이다.

 

 

 

 

 

 

 

 

 

 

   "음, 청탁을 받았다면 매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내 글이 어디에 실리는가는 어떻게 쓸 것인가와 연관이 안 될 수가 없으니까. 원고 매수도 정해져 있고 잡지의 성격도 있을 거고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쌈박하게 담아내야 하잖아. 전작으로 출판을 하는 거라면 독자도 마음 잡고 내 책을 선택하고 읽어내려는 의지를 갖는 건데 잡지라면, 음, 여러 다양하고 쟁쟁한 글 가운데 하나니까 조금 더 전략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첫 문장에 집요하게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지. 어쨌거나 네 글 앞에 독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어라, 뭐지, 이 글? 같은 느낌을 일단은 들게 하는 첫 문장이면 좋을 듯해."

 

 

 

 

 

 

 

 

 

 

   "위험한 시도이지만 잘만 쓴다면 승산이 있겠지. 그 첫 문장을 읽고 책을 샀거든. 『토지』도 첫 문장이 인상적인데."

   "찾아볼까요? 이거 같아요 어딘, 이렇게 시작되는 거 맞아요?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우리는 첫 문장에 대해 조금 더 떠들다 전화를 끊었다. 양치를 하고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 누우니 울리에게 보내주고 싶은 첫 문장들이 몇 개 떠올랐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 그래도 역시 이 문장이 압권이네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프레젠트가 없는 크리스마스란 정말 시시해."

   조가 양탄자 위에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가난한 건 지긋지긋해."

   메그는 자신의 낡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지었다.

 

   내 인생의 '첫' 첫 문장이었다.

 

 

 

 

 

 

 

 

 

 

 

   시기와 질투, 용기와 배신과 사랑이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들을 잘 다루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솜씨라고 나는 종종 말하곤 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내 안을 잘 들여다보면 파렴치한 상상, 부끄러운 기억, 세속적인 탐욕, 고결한 이상, 순결한 박애 따위 온갖 욕망의 가지들이 삐죽삐죽 벋어 있지 않나? 작가는 그중에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지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 이지 않을까. 어떤 가지에 꽃이 피고 어떤 가지는 바람에 부러지는지, 어떤 가지에 새가 앉고 어떤 가지가 깊이 옹이가 박히는지, 골똘하게 오랜 시간 들여다보노라면 나무가 나무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햇빛과 비와 흙과 벌과 나비와 벌레와 불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하여 나무가 그 이름이 나무일 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모이고 깃들여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라는 걸 알게 될 때 비로소 읽을 만한 글이 쓸 손이 준비되는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그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촘촘하게, 선연하게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돼. 그를 둘러싼 세계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도와 역학이 드러나니까, 그로 인해 세상의 윤곽이 뚜렷해지니까. 그중에 나는 어느 지점에 어느 비탈에 옹송그리고 서있는지도 보이고. 벌을 보려 하니 꽃이 보이고 꽃을 보려 하니 열매가 보이고 열매를 보려 하니 새가 보이고 새를 보려 하니 하늘이 보이고 하늘을 보려 하니 구름이 보이고 구름을 보려 하니 비가 내리고 비를 피하다 보니 당신을 만났네요, 뭐 그런 거지. 경계를 구획하는 일은 그러므로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밥 같은 거 잘 못해도 설거지 같은 거 잘 못해도 걸레 같은 거 깔끔하게 짜지 않아도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아픔 같은 거 잘 알아채지 못해도 남의 수난 같은 데 조금 무심해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종의 절멸 같은 것 신경 쓰지 않아도 어떤 생명의 고통 같은 것 공명하지 않아도 당대의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한 끼 맛있는 밥상을 차릴 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임을 안다고 해서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다. 입맛 좋은 소녀들은 어쩌다 나를 만나 밥과 글이 동등하다는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을 뿐이다. 밥과 글이 동등할 때 흑인과 백인이 어찌 평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밥과 글이 동등할 때 여자와 남자가 어찌 대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밥과 글이 동등할 때 노새와 토끼와 인간과 해와 달과 그림자가 어찌 동일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밥과 글이 동등할 때 세상의 모오오든 것이 어찌 바람의 딸이고 아들이지 않을 수 있으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지독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적인 기록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질이 될 것이며 오, 놀라지 마시라, 장차 인공지능의 전두엽이 될 것이었다.

 

 

 

 

 

 

 

 

 

   당시 리사의 글은 손이 쓰는 글이었다. 머리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손이 쓰는 글은 저절로 쓰이는 글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나면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는 생각으로 쓴다기보다 손이 절로 움직여 문장을 만든다, 라고 나는 종종 글방러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생에서 내가 살았던 경험이 DNA 속에 누적된 그 오래고 오래고 오랜 이야기와 만나 새로운 나선을 생성하는 창발의 순간, 비로소 세상에 없던 문장이 출현하는 시간이다. 오래 벼리어 날 선 손이 하는 일이다. 의지와 결심과 무관하게.

 

 

 

 

 

 

 

 

   진정한 작가는 쓰고 싶은 글도 잘 쓰지만 써야 하는 글도 잘 써야 한다고 나는 종종 글방러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은폐되거나 의도적으로 삭제된 이야기들, 왜곡되고 감추어진 사실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은 이종의 마음, 언어를 벗어난 혹은 언어 밖의 시공간, 그런 이야기들까지 다루어야 작가라는 이름을 달 수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아보며, 얘기하곤 했다. 손이 온전히 풀려 있을 때는 어떤 글감이 주어지든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 오냐, 기다렸다는 듯이 쓸 수 있다고 간간이 말은 했지만 막상 조개와 하야티가 근 1년을 그리하니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전장의 한가운데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손, 이었다.

 

 

 

 

 

 

 

 

   더없이 혁명적인 창조는 반발과 저항을 부른다.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불안을 어떤 이에게는 희열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을 다루는 것이 예술이다 문학이다 글쓰기다.

   언제나 어디서나,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손을 벼리어두어야 한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 너에게 들은 이야기,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 오래전 죽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 오지 않은 세상에서 보내는 전언, 동네마다 서 있는 느티나무가 서리서리 품고 있는 그 이야기는 불현듯 느닷없이 나에게 온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푸르게 날을 갈아두어야 한다.

   사실 일을 한다는 건 글을 쓰는 일에 다름 아니다. 기획안에 메일 쓰기에 초대장에 보고서에 인터뷰에 소식지에···. 글쓰기는 일터에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다. 기분 좋은 편지 한 통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감동적인 글 한 편이 회원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창의적인 카피가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를 하고 논리적인 글모음은 시대의 담론이 된다.

 

 

 

 

 

 

 

 

   누간가가 머리가 아파, 얘기할 때 사실은 모두 제각각 자신이 겪은 두통을 상상한다. 타인의 고통이란 어쩌면 자신의 경험치로 가늠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는, 정확히 닿을 수 없는 지점이다. 타인이 겪는 육체의 고통은 그러므로 추측일 뿐이다.

 

 

 

 

 

 

 

 

   누구도 이들에게 어떤 글을 쓰라고 요구하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불현듯 눈을 든다, 아득하고 광활한 세계, 미세하고 섬약한 생명들을 향해. 그리로 홀리듯 나아가고 다가간다. 이야기는 겹치고 흐르고 관통하고 당기고 밀며 이 시대의 풍경을 오롯이 드러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불화와 갈등과 처참한 패배와 깊게 그어진 상처와 까맣게 타들어간 잿더미가 된 그 이야기들 안에 아마도 이 우울의 시대를 벗어날 탈주의 방향과 비상구가 비밀스럽게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 해, 경험만으로 쓰는 데는 한계가 있어. 여탐 글에 대해 합평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매번 빼놓지 않고, 특히 여탐에게, 지치지도 않고 하고 또 했던 말이다. 글이라는 건 말이야 네 이야기를 쓰는 것 같지만 네가 속한 세상을 재현하는 거야. 네가 써 온 아르바이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일상에서 어떻게 구동되는지 읽어내잖아. 공부라는 건 세상을 작동시키는 기제를 파악하는 거야. 무엇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관찰과 해석이 예민하지 않으면 읽으나 마나 한 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러니 여탐, 공부를 해.

   연애 글을 써 오면 나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종의 존속을 위한 생물학적 호르몬의 분비로 말미암은 현상인가, 잠시의 정신병증인가 혹은 이미지인가 또는 교환인가,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등한 사랑은 가능한가, 다자연애는 왜 부정당하는가, 동성애자의 사랑은 왜 금지당하는가, 산업혁명 이전의 연애와 이후의 연애는 어떻게 다른가, 연애의 법칙과 공식은 시대별로 어떻게 다른가, 새들이 펼치는 구애와 물범의 구애와 인간의 구애는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이것을 모르고 연애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얼마나 순진하며 스스로를 혹은 독자를 기만하는 일인가.

 

 

 

 

 

 

 

 

   엄마와의 갈등에 대한 글을 써 오면 가족의 기원에 대해 공부하라고 얘기했다. 인간이 사바나의 숲으로부터 나와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는 지금 같은 가족의 형태를 유지했을까, 인간이 표범과 같이 표표히 혼자 살지 않고 무리를 지어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혼인의 형태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그것은 진화인가 혹은 한 성의 승리인가, 사적 소유의 축적과 가부장제의 연관성을 무엇인가, 신라시대 김유신이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인가 당시 지배계급의 구조에서 기인한 것인가, 너를 규정하는 금지와 금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런 질문 끝에 나는 말하곤 했다. 네게 입력된 도덕과 윤리를 의심하고 때로 가차 없이 탕탕탕 박살 내지 않는 한 너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류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인류에 대한 정치한 탐구가 없는 한 글은 반복일 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이 반복적인 글을 읽는 거지.

 

 

 

 

 

 

 

 

   나는 왜 여기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나? 글쓰기는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리라. 여행도 명상도 요가도 산책도 달리기도 책 읽기도 설거지도 요리도 아마 해법 중의 하나일 것이고 그중에 공부도 포함될 것이다. 공부는 DNA에 축적되어 있는 수많은 경험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DNA 속에는 내 엄마 아빠가 그 엄마의 엄마 아빠가 그 아빠의 엄마 아빠가 다시 그 엄마의 엄마 아빠가 했던 사랑과 좌절과 탐험과 열망과 불안과 희열과 흐느낌과 속삭임이 각인되어 있다. 공부란 1만여 년 전의 인류가, 20만 년 전의 인류가 했던 경험과 기억을 마음껏 공유하는 것이다. 부모미생전의, 어쩌면 아직 인간도 훨씬 전, 광합성만으로 생을 푸르게 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선연하게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몸은 벗어나지만 이야기는 남기고 떠난 이들이 꼭 전하고 싶고 전해야만 했던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인 것이 지금의 내 몸이라면 내 글쓰기는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이야기이리라 아마도.

 

 

 

 

 

 

 

 

   무엇을 쓸 것인가, 절멸의 불안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시는 위로가 될 것인가 피난처가 될 것인가 비상구가 될 것인가. 시는 인간을 구할 것인가 개를 구할 것인가 닭을 구할 것인가 나무를 구할 것인가 돼지와 소와 양과 거위와 고래와 물고기를 구할 것인가. 언어가 사물을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무너져 내리고, 친구는 위태로운데, 시인이여, 세상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위험을 혹은 용기를 당신은 선택하려는가.

 

 

 

 

 

 

 

 

   "십대가 쓴 글 맞아? 놀라워, 섹스를 이렇게 다룰 수 있다니."

   나도 그랬다. 읽을 때마다 글쓴이의 통찰과 관조와 마음자리가 감탐스러웠다. 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란 곧 삶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경험을 몸에서 떼어내 세상 속으로 보내고 그 풍경을 곰곰이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다. 애증과 수치와 모욕과 공포와 분노를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것으로 다룰 줄 알게 되기까지의 스스로를 '견디는' 혹독한 시간과 스스로를 '넘어서는' 고단한 수련이 필요하다. 「어머니 전상서」는 글이 혹은 세상이 아름다우면서 아플 수 있고 아픈 것이 나쁜 것은 아니며, 우리가 서로에게 낙하하는 것은 부서지지 않기 위함임을 보여준다.

 

   어머니, 접니다. 99.

   일단 한번 웃고 넘어가지요, 에헷. 그래야 편지가 귀여워지니까요. 어머니는 귀여운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최대한 많이 웃으며 편지를 써 내려가고 싶지만, 얼마나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 하거든요. 다시 말해, 여기서는 '앞으로 어머니 말씀 잘 듣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깁니다. 이런 편지를 쓰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저도 참 마음이 아프네요. 저··· 그러면 이야기를 이어나가도 될까요?

 

   어머니, 저 처녀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발가벗고서 비비적대는 것이 섹스의 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하는 소립니다.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요즘 친구들 대부분이 제 나이와 비슷하게 첫 섹스를 경험한다고는 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어머니 생각처럼 순수하지도 않고, 순수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아, 입만 열면 어머니께 죄송한 말들이 쏟아지네요.

   제가 첫 섹스를 함께한 사람은 다행히도 제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고 그래서 그와 연애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숱한 말과 글로, 또 언제부턴가는 몸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몸의 표현은 따스했고 매혹적이었고 아름다웠지요. 어떤 단어로도 다 표현되지 않는 그때의 느낌을 어머니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나다.

   스킨십의 문을 연 뒤로 새로운 설렘과 즐거움에 무척이나 들떠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진도를 더 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드라마 주인공들은 데이트 과정에서 누구도 섹스를 하지 않더라고요. 그 이쁘고 착한 기지배들은 뽀뽀 두 번 하고 아주 행복한 얼굴로 웨딩드레스를 입더라고요. 훗날 내 남편이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어머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상심하실까 하는 미안함으로 죄스러워 섹스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욕망과 죄스러움의 싸움이 지지부진하게 몇 개월간 이어졌고, 결국 제가 도달한 결론은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떠 있는 애인 때문에 내린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주체적으로 살고팠고 그와 섹스하고 싶었습니다. 내 처녀성은 언젠가 만나게 될 남자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더해 누구의 핑계도 대지 않고, 유보도 하고 싶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달간을 제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 사람이었고 콘돔도 챙겼으니 너무 큰 걱정은 저 한구석에 접어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어머니 세상에 얼마나 못된 새끼들이 많은 줄 아십니까? 콘돔 안 끼는 새끼, 섹스를 강요하는 새끼, 자신만의 기괴한 성적 취향을 요구하는 새끼 등등. 이런 새끼는 고추를 꺾어버려야 합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저는 누구를 성 불구자로 만든 일은 없으니 안도하셔도 됩니다).

   저는 첫 섹스 이후 내 몸을 내 멋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는 저 자신이 애가 아니라고 생각되더군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는 구구절절 설명하기 힘든 어떤 변화가 몸에도, 마음에도 찾아온 것이었지요. 이제 처녀가 아닌 것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만 빼고요. 저는 위에 썼다시피 제가 처녀가 아니게 되었을 때 남들이 보낼 시선을 두려워했을 뿐, 다른 고민이나 준비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섹스 후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생각하지 않았고, 첫 섹스는 제가 살아가며 단 한 번 겪게 될 중요한 사건이자 변화와 성장의 계기이니 낭만적이고 황홀한 축제여야 했는데 당시 상황이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미련이 남는 부분이지요.

   너무 웃지 않을 것 같아 이쯤에서 한 번 웃고 넘어갑니다. 에헤헷.

 

   청심환을 하나 드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른 섹스 파트너들을 압니다.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얼마간 유지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의 핸드폰에서 어떤 아저씨와 어머니가 홀라당 벗고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을, 아버지의 차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편지에 '그날 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다 벗고 이야기만 했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만 지금의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밤 목소리를 높이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의문의 아저씨와 아줌마가 우리 가정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그 새끼 / 그년만 아니면 나는 매일 밤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혹여나 고아원에 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울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서 핸드폰 속의 아저씨와 얼굴도 모르는 편지의 주인공을 그려놓고 펜으로 짓이기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말도 못하게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매일 식탁에 마주 앉는 두 분을 미워했습니다. 배우자가, 저처럼 사랑스러운(!) 딸이 있는 사람들이 왜 밖에서 '그 짓'을 할까. 이건 정말 동물이다. 더럽다, 그렇게 부모님을 생각했습니다. 또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제가 섹스를 '그 짓'으로 더는 표현하지 않게 된 것도 다 제가 섹스를 경험한 뒤의 일입니다. 섹스는 '그 짓'으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 괜찮은 것이란 걸 알게 되었거든요. 섹스가 가져다주는 따뜻함, 설렘이 가져다주는 활기, 어떤 두려움과 불안을 삼키는 몸의 체온들, 나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과정. 종종 섹스 중에 눈물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젠가 문득 어머니 아버지도 이런 것들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불안하고 두렵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언가를 애타게 쫓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망측스럽게도 섹스 중에 말이지요.

   이제 저는 어머니 아버지를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이 모든 것들이 확 풀어져버렸거든요.

   그냥, 그렇다고요. 에헷.

 

   어머니, 난데없는 질문 하나 드릴까 합니다.

   연애가 뭔가요? 요즘 제가 골몰하고 있는 고민거리가 바로 이것이라서요. 어머니가 저보다 연애를 많이 해보셨을 테니 여쭙는 겁니다. 연인과 친구의 경계는 어딘가요? 연인이라고 할 수도 없으나 친구도 아닌 오묘한 관계, 친구와의 만남에서 혹은 연애를 하다가 불현듯 도달하게 되는 이 지점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사실은 제가 지금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고 책과 인터넷에 떠도는 사랑 이야기 또는 친구 이야기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혼란을 깨끗하게 정리시켜줄 빛과도 같은 조언을 기다리면서요.

   연애 중 불안 요소와 맞닥뜨릴 때마다 제가 잡고 있던 것은 '연인'이라는 호칭이었어요. 그 호칭 속에 숨어 있는 암묵적 약속들, 적기적인 연락과 만남을 통해 애정 확인받기, 서로를 챙김, 서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거나 스킨십을 해서는 안 됨 등이 필요하고 이를 어길 시 반칙이 되어 화내거나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 바람의 근저에는 남겨지는 것,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나의 매력, 나의 아름다움, 나의 소중함 등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 온전한 내 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덜 매력적이거나 덜 소중한 것일까(나는 왜 사랑받지 못할까, 나는 진정 시시한 인간이던가 하면서 끝나지 않는 비교. 으, 생각만 해도 궁상맞고 찌질해지는 순간들이지요).

 

   그런데 이때의 느낌이 어머니 아버지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하던 순간의 그 느낌과도 어느 부분 비슷하더이다. 왜 아직도 이 공포는 내게서 떨어지지를 않는 것일까요? 유년기에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친구도 연애 도중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 친구는 왜 그런 걸까요? 좀 남겨지거나 버려지면 안 되는 건가요? 이게 그토록 두려워해야 하는 일일까요? 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의 가치를 확인하려 할까요? 이렇게 연애하는 것이 과연 건강할까요? 아, 또다시 머릿속이 시끌벅적해집니다.

   몸과 마음, 정신이 건강하게 연애하는 법, 연인 관계도 수많은 '관계' 중 하나라는 것, 첫 섹스는 준비 끝에 최대한 멋지고 빛나게 하라는 것, '그'와 '그 새끼'의 경계,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사는 법, 씩씩하지만 유들유들하게 싸우는 법, 공포과 싸우고 위로하며 함께 가는 법··· 세상에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노하우와 무기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어머니, 제가 궁금한 것은 왜 이런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수학이나 영어보다 더 유용하게 쓰일 것들이고,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고, 이렇게 부모님과 저의 얽힌 감정들을 풀어주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인지요?

 

   아아, 모르겠어요,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도 다 어느 과정 중에 있으신 것이겠지요.

   오늘 아침 안방의 꽃병이며 책들이며 화장품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도 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어머니, 에헷, 에헷, 에헷.

 

   손톱 밑으로 송골송골 맺힌 눈물이 얼 정도로 춥고 서글픈 날, 99 드림

― 99(구구), 「어머니 전상서」

 

 

   서늘하다, 여전히. 십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읽어봐도 전과 다름없이 유효한 글이다.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이토록 통렬히 하는 글을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어느 가을날의 저녁이었던가. 어쩌면 어느 봄날의 밤이었던 것도 같다. 창의적글쓰기를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가고 있다. 두세 명씩 무리 지어 수다를 떨며 가는 길, 앞에서 하는 99의 말이 들려왔다. 어른들 말 반만 들으면 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귀가 번쩍 뜨였다. 아마도 어떤 고민에 빠진 글방 동무를 위무하는 말이었으리라. 동무에게 용기를 주느라 한 말이 우연히 듣게 된 나에게 큰 안심을 주는 말이었음을 그때 99는 몰랐겠지. 그의 말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져서 랄랄라 명랑한 마음으로 밤길을 걸었다. 내가 하는 말의 반만 들어준다니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음껏 하고 싶은 얘길 해야지. 사피엔스의 진화는 어른들 말 따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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