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여성들이 전쟁에서 겪은 일들을 쓴 책이다. 김현아 작가가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글로 옮겼기에 그녀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구어체로, 사투리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30년,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얘기하듯이 그녀들은 그 일들을 모두 기억한다. 그 어떤 말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을.
나는 상상한다. 아니, 그녀들의 생생한 증언을 읽다가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펼쳐지는 지옥의 풍경.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와 내 가족들에게 총을 쏘는 내 나라의 군인들. 수류탄과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 길거리에 쌓여 있는 시체. 몸통 없이 굴러다니는 아이의 머리. 젖가슴이 도려내진 여성의 시체.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 당하는 여성. 창자가 몸 밖으로 튀어나온 채로 기어서 엄마를 찾아다니는 여섯 살 아이. 화약 냄새. 피냄새. 사람이 죽을 때 내는 소리. 비명 소리.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만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전쟁이 무엇인지, 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기와 칼을 들 힘조차 없는 노인까지. 죽었다. 그들은 죄가 없었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 허무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다. 그들의 억울한 심정을 가늠하는 게 가능할까. 살아남은 이들의 상실감은 어떤 느낌일까.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가는 느낌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책을 읽으며 작가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써야 하는 글'이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했다. 화가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도 나는 전쟁을 알지 못했다. 같은 편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민간인들의 삶을 알지 못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에게 저지른 일들을 알지 못했다. 전쟁과 관계없이 몇 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여성을 향한 일상의 폭력들. 구역질을 느낀다. 지금도 전세계에 폭력이 만연하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아이에게 자행되는 부모의 폭력. 여성을 향한, 남성을 향한, 무언가가 다른 사람을 향한, 외모 직업 성격 취향 인종 장애 동성애····· 인간이 서로를 향해 휘두르는 은근하지만 분명한 일상의 폭력들. 그것들을 폭력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할만큼 폭력에 둔감한 사람들.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성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써야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책을 다시 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작년 가을 무렵이다. 북미회담이 열리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지금 돌이켜보면 까마득하지만 불과 1년 전 이맘때만 하더라도 금방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미국은 강도 높은 비난과 협박성 발언을 매일 쏟아내고 북한 역시 험악한 말 폭탄을 터뜨리며 맞대응하던 시기였다. 언론은 미국의 입장을 '중계' 하기에 급급하고 우익 인사들은 공공연히 전쟁을 부추겼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기획이 사방에서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이 땅에서, 내 아이들과 이웃들과 사랑하는 이들이 사는 이 땅에서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박하게 들었다.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 잘 안다. 전쟁은 무기를 든 군인들이 일정한 구역에서 벌이는 게임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통이 깨지고, 여자들이 집단강간을 당한 채 죽임을 당하고, 이웃들이 한날한시에 다연발기관총을 맞으며 죽어가는 일이 전쟁이다.
전쟁의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젊은 여성들이 전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종편을 비롯한 언론에는 '남성' '전문가'들이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MD니 핵우산이니 ICBM이니 핵과 미사일을 말하고, 화면에는 중무장한 남성 군인들이 등장했다. 마치 전쟁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듯이. 거짓과 환상의 화면 위로 내가 만난 여자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처음 『그녀에게 전쟁』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을 쓰면서였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제로 베트남을 답사하고 책을 쓰던 중, '전쟁과 여성'이라는 꼭지로 베트남 여성의 전쟁 경험을 넣으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랄까, 맥락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단순히 이야기가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구겨 넣으려고 해도 자꾸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책에 녹아들지 않은 채 충돌하고 엉키고 길을 잃는 형국이었다. 그 꼭지를 덜어내니 오히려 한 권의 책으로 단정하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정리된 원고를 무심히 들여다보니 아하, 달랐다. 전쟁에 대한 여성의 경험과 기억은 남성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지금까지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남성의 시선에서 기록되고 해석되고 재현되었음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나는 수많은 베트남 여성을 만났다. 온몸에 총탄의 흔적을 가진 할머니, 고엽제로 정신이 이상해진 아주머니, 한쪽 다리로 살아가는 내 또래 여자, 부모를 잃고 험한 세상 혼자 헤쳐나가느라 굽이굽이 설움이 온몸에 흐르던 여자,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호명을 통해 내 앞에 나타났던 여자들···.
그녀들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폭격으로 산천이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여자들은 농사를 짓고, 아이를 돌보고, 가축을 기르고, 죽은 사람을 수습했다. 전투에도 참여했다. 전쟁이 결코 남성의 영역이 아님을 온몸으로 입증한 베트남 여자들.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와 겨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이 여성들 덕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베트남 여성이 경험한 전쟁 이야기를 따로 써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한국 여성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가 경험한 전쟁에 관해 나는 알고 있나, 한국전쟁은 어떤 식으로 기록되고 전승되고 있나? 일산·마산·대구·부산·강화도·거창을 다니며 전쟁을 겪은 여자들을 만났다. 한국전쟁에 대한 경험을 듣고자 찾아간 자리에서 나는 매번 그녀들의 전 생애를 듣게 되었다. 놀라운 이야기꾼들이었다. 도대체 저 많은 이야기가 어떻게 저 작은 몸에 쟁여있었을까. 경계, 침묵, 망설임··· 그 시간 후에 그녀들이 풀어헤친 가슴에는 무덤이 있었다. 말의 무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들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오지 못한 말들은 내부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녀들에게 전쟁과 그 이후의 일을 묻지 않았다.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던 말을 가슴에 묻고 밭에서, 부엌에서 그녀들은 기르고, 돌보고, 다독였다. 황폐한 세상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오늘 저 들판이 초록으로 풍요롭고 강물이 햇살로 눈부시며 밤하늘의 별이 빛나는 것은 그녀들 덕분이다, 온전히.
베트남인이든 한국인이든 그녀들의 공통점은 말이 목까지 차올라있다는 거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줄줄 나오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를 통해 전쟁이 남성과 여성에게 같은 경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쟁의 처음와 끝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 때 나는 가장 먼저 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었다. 전쟁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때, 전쟁이 무엇을 파괴하는지 알 때 비로소 NO WAR, 이 땅에서의 평화가 간절할 것이기에.
전환의 시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절실하다. 부디 남과 북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 체제를 만들어내기를 기원한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을 막기 위해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자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모두에게 평화로운 세상이다.
그녀에게 평화
2018년 8월, 정릉에서 김현아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기록한다는 것
"너희가 전쟁을 알아?"
여성이 전쟁이나 국가 안보를 말할 때 많은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 참전군인들과의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 실지로 그들은 팔뚝에 난 총상의 흔적을 내밀며 말했다.
"너희가 총을 쏴봤어? 너희가 폭탄이 쏟아지는 전장에 있어봤어?"
그 말은 전쟁이 곧 전투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전쟁이 전투이기만 하다면 차라리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은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일어난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아무도 그 비극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전투가 멈추었다고 전쟁이 끝났다는 말은 전쟁의 비극을 축소하고, 전쟁에 연루된 사람들과 다양한 계급·계층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하는 일이다. 폭격이 멈추었다고 전쟁이 끝났다는 말은 전쟁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이들이 원하는 바다. 전쟁으로 인한 영혼의 상처나 회복되지 않은 상처 따위는 시선의 바깥으로 처리되기를 그들은 바란다.
전쟁은 무력을 가진 이들이 힘의 논리로 충실하게 세계를 재편해가는 과정이며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엠네스티 여성인권보고서에 따르면 여성과 어린이가 전쟁 난민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남성들의 몫이다. 아니, 무기와 권력을 쥔 남성 전문가들의 몫이다. 통계수치 및 과학적 근거와 이론으로 그들은 전쟁 담론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남성 전문가들의 자료에는 문제의식이 빠져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전쟁 때 일어나는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고, 근본적으로 두 경우는 같다는 문제의식.
그들의 브리핑은 전쟁을 겪은 여성의 경험과 기억을 배제하고 여성과 남성에게 전쟁의 시작과 끝이 다르다는 점도 전제하지 않는다. 전쟁와 평화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여성의 삶이 위험스럽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가부장적 질서의 구조적인 폭력 안에서 싹튼다. 전쟁이 선포된 바 없어도 여성들은 가까운 남성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밤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다 인신매매를 당하고, 이른 새벽 도서관에 가다 성폭행을 당한다. 여성을 가두는 공포, 그것은 보이지 않기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있기에 대항하기 어렵다.
가정폭력은 남성 개인의 인성 문제로 인식되고, 강간은 여성의 처신과 관련이 있다는 관습은 깨지지 않고 반복된다. 여성이 맞다 죽어도 사적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수많은 강간이 일어나도 오랫동안 반복되어 오히려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듯 전쟁이 나닌 시기에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성별화된 폭력은 전시에는 합법적으로 장려된다. 같은 나라 여성에게 향했던 폭력이 다른 나라 여성으로 옮겨간 것일뿐, 여성이 대상이라는 점은 같다. 각각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어떻게 성차별 의식을 만들어내고 구조화되어 억압으로 작동하는지 드러내는 일은 그래서 중욯다. 자연스러워 보이나 어떤 집단이 의식적이고 구조적인 시스템에 따라 강화되고 유지되는 견고한 일상.
특히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군부독재를 통해 형성된 군사문화가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유고 질서와 결합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국가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의 삶에 대해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일상의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우리 안의 성차별 의식과 싸워나가야 하는 이유다. 일상 속 여성에 대한 성차별 의식을 바꾸어낼 때만이 전쟁 중 행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한 사회에서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가 규정한 성 역할, 성 규범, 사회적 기대를 내면화함으로써 그 문화가 규정한 남성다운 남자와 여성다운 여자로 구성된다. 특히 가난한 집 맏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동생을 업어 키우고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그녀의 청춘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맨날 집에서 일하느라 친구들하고 앉아 놀지도 못했다. 설거지 하고, 산 밑에 가서 물 길어다 나르고, 양철통이 없어 사기 그릇도 많이 깼지. 시집올 때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은 부모가 결정했고 그녀 역시 삶의 다른 가능성은 꿈꾸어보지도 못했다. 마을 여자들은 그녀의 엄마와 비슷한 삶을 살았고 동네 언니들이나 친구들도 때가 되면 시집을 갔다. 결혼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므로 그녀도 인생의 수순으로 생각했다.
"내가 시어머니하고 같이 올라가니까, 재실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같이 모여있었어. 마을 사람들 말이, 저녁때 군인들이 피난 가라 카드라네. 그 소리 들은 사람이 지금 해가 져서 어두운데 어찌 피난 가겠냐고, 내일 아침 일찍 단속해가지고 피난간다 했는데, 웬걸 그다음날 아침부터 총알이 펑펑 날아오는데, 점심 지나 서너시까지 볶았는기라. 비행기에서도 총알이 비 오듯이 내려오제, 대포 쏘제. 나는 아이를 보듬고 전각 뒤에 있는데, 담에 포가 날아와서 파편이 나한테 날아와서 피가 줄줄 흘러. 우리 시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거기 전각에서 심부름하는 사람 집으로 간다고 가는데, 아이를 보듬고 그대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아이가. 그래서 내가 아이를 보듬고 밭으로 갔는데, 거기서 총을 열두 방을 맞았는기라. 내가 온데 맞아놓으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이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가만히 누워가 있었거든. 그때 우리 시조모가 어떻게 우리를 보고 왔는기라. 내가 아이를 보니까 고추가 올라와 있는 거라. 남자애들은 죽으면 고추가 올라간다 하데. 그래서 내가 아를 땅에 눕혀 놓고··· 후··· 그건 말로 다 못한다."
말로, 다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이야기해도 그날 겪은 일은 재현되지 않는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가슴속에 더 답답해지는 이야기. 어떤 단어를 골라도 어떤 표현을 해도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 가슴 속의 불덩어리와 점점 더 멀어지는 얼음처럼 매끄럽고 차가워져 버리는 말. 이럴 때 말은 마음을, 기억을 배신한다.
황점순이 겪은 이 사건은 '곡안리 민간인학살 사건'이다. 1950년 8월 11일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곡안리에서 이 마을 주민 85명이 미군의 사격으로 집단학살되었다.
1990년대 들어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유족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간부나 회원 등의 공식 지위를 얻어 진상규명에 참여하게 되고, 유족회는 그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공간이 된다. 이렇게 남성들이 자신이 당한 억울함이나 고통을 말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을 공적인 차원으로 하게 된 반면, 여성들은 기억의 복원 작업에서도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났다.
마을별로 현지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연구자들이나 기록자들은 대부분 남성을 주요 증언자로 선택했다. 남성 연구자 대부분이 여성들, 특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공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할머니들의 말을 주요 증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사실 현지 조사단은 마을 단위에서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과 피해 사례를 밝히기 위해 마을의 대표적 피해 사례를 말해줄 사람을 증언자로 찾게 된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대다수 여성은 보도연맹이 무엇인지, 남편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혹 안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보편적 언어'로 말하지 못한다. 증언자로 선택된 여성은 피해 사례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경험과 느낌, 태도, 가치, 의미 등을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기록자에게 신세타령이나 고생담으로 들리기 쉽다. 이를테면 할머니들은 마을에 일어난 사건보다는 혼자서 자식들을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가를 주로 이야기하므로 남성 연구자들은 여성을 중요 정보자로 선택하지 않게 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런 증언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정확한 통계나 수치로 측정되지 않는 슬픔은 입증할 방도가 없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별로 쓸만한 게 아니게 되고 만다.
한국전쟁 당시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닫혀있던 시기였다. 여성 대부분이 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하지만 남성들은 일기나 메모, 회고 형식으로 당시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피해 정도를 기록으로 남긴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기록된 자료들만을 토대로 접근한다면 여성들의 경험은 대부분 묻혀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남성들이 한국전쟁의 경험 주체가 되고, 우리가 흔히 '정치적 공간'이라 부르는 곳에서 일어났던 남성의 활동만이 역사에 기록된다.
타인의 고통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느낌을 통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내온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목격한 부조리와 불합리에 영혼의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구경꾼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고통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생생한 체험으로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보는 순간 나의 고통으로 전이된다.
"딸들을 키우면서 늘 조바심을 쳤어요. 전쟁이 나면 어떡하나, 불안이 늘 따라다녔어요. 아프가니스탄 이야기가 나오면 난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6·25 때 우리 이야기다. 그 아픔은 내 아픔이에요. 전쟁은 없어야 해요. 그런데 같이 모여서 문학 공부를 하는 남자들 중에는 이러저러해서 전쟁은 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이 사십대고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인류가 왜 전쟁을 하는지."
우리, 즉 그들이 겪어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꾸임남성 디엔반현.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67년 1월 한국 해병에 의해 민간인 3,340명이 죽고 1,734세대가 피해를 당했으며 961명이 상처를 입고 610억 동의 피해를 봤다고 베트남 사람들이 말했다. 학살 과정에서 한국군은 시체를 다시 불도저로 밀어버렸다고 했다. 한 생존자는 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 단 한 사람도 이 마을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한국 참가자들은 당황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한국 참가자들에게 두 다리가 잘린 피해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문제는 배로 돌아온 이후에 발생했다. 당시 배 안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토론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얽히면서 "한국은 일본에 사과하고 반성하라고 하면서 베트남에 대해서는 왜 사과하지 않느냐"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일본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면서 돈을 벌지 않았느냐, 고엽제에 시달리는 한국 군인들도 피해자다, 한국도 남의 나라 전쟁에서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일을 했으므로 일본이 한국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응옥을 데려갔다. 그리고 차례로 강간했다. 강간은 생물학적인 욕구라기보다는 약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연대 의식을 확립하기 위한 의식일 수 있다. 그렇기에 전시 강간은 집단으로,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들었어요. 살려주세요. 절 구해주세요. 응옥의 비명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응옥은 고함을 지르며 저항했어요."
하 티 호이의 미간이 사납게 모였다. 그녀는 가슴을 모아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고개를 들기만 해도 개머리판이 날아들었어요. 그때 응옥이 마구 뛰어왔어요. 헝클어지고 짓밟힌 응옥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어요. 그러나 응옥은 다시 잡혀갔어요. 한국 군인들은 응옥을 끌고 가며 'VC, VC' 하고 소리쳤어요. 응옥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이마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어요. 응옥의 이마에서 피가 마구 쏟아져 내렸어요. 그런 응옥을 데려다 한국군은 다시 강간을 했어요. 응옥의 비명으로 온 동네가 가득 찼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비명이 잦아들기 시작했어요. 응옥은 기절했어요."
할머니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적 언어 이외에는 없었다. 할머니들에겐 집단강간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도 없었다. 어떤 할머니는 "당했다"라고, 어떤 할머니는 "그 짓을 했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손님을 받았다"라는 말밖에 자신의 체험을 언어화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파괴당했는지 설명할 때도 할머니들은 자기 몸의 어떤 부분을 지칭할 '언어'를 찾지 못해 당황했다. '거기' 혹은 '아래', '밑'이라는 말은 오히려 수치심을 자극했다.
몸에 대한 언어가 없다는 건 존재하나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몸에 대한 역설적인 이야기이다. 할머니들은 그런 밤이면 가슴이 뛰고 손발이 떨려 제대로 잠을 못 잔다고 했다. 밀림의 밤을 맨발로 헤매거나, 길게 줄을 선 남자들이 기다리는 수용소의 작은 방에 갇히는 꿈을 꾸어야 했다.
베트남전은 강간전이라 불러도 될 만큼 수많은 강간이 자행되었다. 강간은 국제법상으로 위법일 뿐 아니라 군사 법규에도 위반된다. 그런데도 강간은 전쟁 중에 가장 흔히 일어나는 범죄이다. 때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고 은폐되기도 하지만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다.
새삼 거론할 바 없이 '전쟁에는 강간이 뒤따른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였다. 그런 한편 '전시 강간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다'란 견해는 강간하는 군인들에게 가책을 덜게 하고, 이 범죄를 당연하게 여기게 했다. 한 참전군인은 베트남에 간 한국 군인들 사이에 "강간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거였어요. 그 여자가 증인이 되는 셈이니까.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강간을 당하거나 하면 항의하고 그랬거든요. 그 당시에는 그게 참 이상했어요. 자기 나라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에게 항의하고 시위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간당했다고 그렇게 떠들지 못하잖아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감추고 숨겨야 할 일을 이 사람들은 부대 앞에 와서 시위하고 그랬거든요."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준공식에 참여한 한국 여자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할머니들이 그 여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여자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이 팽팽한 긴장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30년 만에 와서 하는 일이 이거야? 정작 여기에 와야 할 사람들은 오지도 못했는데, 저기, 저 사람들, 저 사람들은 저렇게 행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고. 당신들끼리 이러고 가면 끝이야? 끝이냐고."
그녀가 가리키는 길 저 너머에 이쪽을 향해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보라고, 정작 여기에 와야 할 사람들은 오지도 못했다고. 저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 저 사람들이 정말로 여기에 와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눈물이 목까지 차올라서 끅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때 겨우 여덟 살이었어. 여덟 살이었다고. 우리 부모님도 그때 돌아가셨어. 나 혼자만 남았다고. 내가 살아온걸···."
기어이 눈물이 넘쳐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할머니들이 이야기했다.
"그래, 누구도 못 오고 누구도 못 왔어. 오늘 준공식이 열리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
"선물은 이거뿐이야? 우리집은 여섯 명이 죽었어. 그러면 선물도 여섯 개를 줘야 할 거 아냐."
"나는 사는 게 힘이 든다고."
그제야 나는 어떤 안도가 몰려들었다. 준공식 내내 느껴지던 어떤 불편함의 정체가 비로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날 행사는 위령비 준공식이다. 한날한시에 죽은 사람들, 이유도 영문도 없이 풀숲에서, 당산나무 아래서 목이 잘리고 젖가슴이 잘린 채 죽은 사람들의 혼백을 위로하는, 불에 타 그을은 자식의 시체나 부모의 주검을 목격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가슴에, 어깨에, 등에 매달고 살아온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는 자리다. 통곡과 눈물이 범람하고 억울함에 가슴을 쥐어뜯고 나뒹굴며, 키를 넘는 분노 때문에 누군가 한국인인 우리에게 원망과 저주의 욕설도 퍼부어야 마땅한 자리였다.
그런데 준공식은 너무나 깔끔하게 끝이 났다. 아마 인민위원회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모두를 초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식적인 행사에서 누군가 통곡을 하고 나뒹굴고 예정에 없던 발언을 한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그래서 유족 대표도 감정을 절제할 줄 알고 자신의 언어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으로 뽑았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날 행사에서 발언한 사람은 모두 남성들이었다. 사 인민위원회주석, 현 인민위원회 부주석, 성 우정조직국장, 모두. 유일하게 나와 우리의 노은희 대표만이 여성으로 발언했을 뿐이다.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남성들이었다.
여자들은 공식적인 자리가 파하고서야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다. 공식적인 행사 내내 참고 참았던 누군가의 독한 슬픔과 눈물이 터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해서야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것도 뙤약볕 아래에서.
"당신들은 왜 우리 마을에 올 때는 늘 응웬 수 할아버지 집에만 갑니까? 우리 집에도 왔어야지."
그랬다. 응웬 수 할아버지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가장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주는 분이었다. 물론 우리가 그만 만난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 갔을 때 그 집을 거점으로 삼은 건 사실이다.
"이름도 틀리게 올라갔다구, 위령비에."
위령비에 이름이 새겨진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생계보조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할머니에겐 그 사실이 몹시 중요하다.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이야기해···"
그 와중에도 입을 꼭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혹은 못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누군가는 내 손을 잡고 울었다. 그렇게 베트남의 여자들과 한국의 여자들이 모여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쩐 티득 할머니가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빈손이었다. 준공식 기념품으로 우리가 준비한 인삼차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그녀는 그날 사건으로 일곱 살 난 아들을 잃었다. 나와우리가 퐁니 마을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퐁니 마을 사건을 취재한 <한겨레 21>을 들고 간 적이 있다. 그 속에는 목이 잘린 그녀의 아들, 일곱 살짜리 아이의 얼굴이 덩그러니 길 위에 떨어져 있었다. 한참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잡지를 달라고 했다.
"이제 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해. 우리 애 얼굴. 이 사진이라도 제사를 지낼 때 쓰고 싶어."
몸이 없는 일곱 살짜리 꼬마의 얼굴, 그녀는 오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쩐 티 득 할머니는 그랬다.
"그러고도 내가 살아. 목숨이 길어. 아이를 그렇게 잃고도··· 모르겠어. 평생에 좋은 게 없어."
그릭호 함께 간 나와우리 회원의 일곱 살짜리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내밀어 이리 오라고, 자기한테 오라고 말을 걸었다. 갈퀴 같은 할머니의 손. 그 손으로 할머니는 분향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향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아마 준공식의 연설문들과 연설한 사람들, 몇몇 사진이 위령비 준공식의 공식적인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준공식 내내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여자들,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사람들,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혹은 못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비공식적인 이야기가 되어 분분히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말함으로써 나는 기록한다. 공식적인 준공식에는 없던 눈물과 통곡, 너무 화가 나서 심장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던 숨들, 터뜨려야 한다. 상처, 액체, 신경 줄을 딸 떠다니는 분노, 오줌보를 팽팽하게 하는 긴장, 배설해야 한다. 이 비공식의 언어들. 공식의 장에서 떠밀려 난, 초대받지 못한 언어들.
발설, 이제 그녀의 것이다. 적나라한 그녀의 것. 그 발설.
이야기해주십시오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원하시는 대로 어디에서든지 시작해, 우리에게까지도
이야기해주십시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너무 많이 울어서 이야기를 잘 못 들었어요. 옛날얘기 다시 하는 거 많이 아프실 텐데, 폐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당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어. 아마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던 듯해. 하지만 그녀의 목에서 나온 소리는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비명도 아니고 탄식도 아닌 어쩌면 그 둘이 뒤섞인, 목울대가 꺽 꺽 하는 이상한 소리였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쓰러지고 비틀대는, 아직 말이 되지 못한 혈액 덩어리, 그건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글로는 쓸 수 없는 어떤 소리였다.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침묵이 이어지고 다시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을 때 그녀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걸 보았다. 팽팽한 긴장과 맹렬한 분노와 치미는 슬픔이 몸의 바깥으로 나오는 길을 찾고 있는 듯했어. 심장이 마구 고동치고 호흡이 빨라지는 게 멀리 앉아 있는 나에게도 전달이 될 정도였으니. 출구를 향해 동시에 뻗쳐 나오려는 이야기들의 아우성으로 그녀의 몸이 팽창될 대로 팽창되었을 때 퍽, 먼저 터진 건 눈물이었다. 눈물이, 넘쳐, 흘렀다. 내 목도 메어서 아파지더구나. 그러고도 그녀가 '말'을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고 우리는 그 침묵을 받아안아야 했다. 마침내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때 여섯 살이었어. 너무나 어렸지만 그날 아침부터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너무 선명해요. 그때 우리 엄마는 시장에 장사를 다니셔서 아침 일찍 장에 나가셨어요. 근데 이제 아이들이 어렸거든. 내 밑으로 동생들이 있으니까. 위로는 오빠가 하나 있었고. 그래서 엄마가 아침에 장에 나갈 때 우리들을 이모네에 데려다줬어요. 이모 집에는 외할머니도 계셨어요. 외할머니와 이모가 우리들을 온종일 돌봐주면 엄마는 밤 늦게서야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그랬어요. 엄마가 우리를 맡겼던 건 돌봐줄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이모 집이 좀 튼튼했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시장 갈 때마다 우리 형제들을 다 불러다가 이모 집에 데려다 놓고 가셨어요. 그날도 엄마는 우리를 이모 집에 데려다주고 금방 나갔는데, 엄마가 나가자마자 바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모가 이모 아이들, 우리 형제들, 그리고 마을 사람 몇 명을 데리고 방공호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발자국 소리 같은 게 났어요. 한국군들이 온 거예요.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무슨 수류탄 같은 거 하나를 땅굴 안으로 던지더라구요. 굉장히 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그때 우리 보고 땅굴 밖으로 올라오라고 신호를 보냈어요. 근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이모가 일단 아이 하나만 먼저 올려보냈는데 아이가 나가자마자 한국군들이 총을 쏘는 거예요. 나가면 죽겠구나 하고 있는데 이번엔 안쪽으로 총을 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 나갔어요. 한국군들이 우리를 일렬로 쭉 세웠는데, 이모하고 할머니 빼고는 다 애들이었어요. 근데 우리를 일렬로 세우자마자 수류탄을 막 던지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땐 내가 총을 맞았는지 아닌지 감각도 없었어요. 어린 내 동생이 쓰러지는 걸 보고 나도 곧 기절했죠. 눈을 떴을 때는 제일 먼저 오빠가 보였어요. 오빠는 하반신이, 엉덩이가 정말 다 날아가서 너덜너덜해져 있었어요. 그 옆에선 동생이 피를 울컥울컥 쏟고 있었고. 근데 내가 너무 어려서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오빠는 온몸이 너덜너덜 찢겨졌는데도 엄마 찾으러 가자고 하고, 동생은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그래도 엄마만 찾더라고요."
"아무튼 오빠랑 동생 둘 다 엄마가 필요한 것 같았어요. 오빠는 기어서라도 엄마를 찾으러 가더라고요. 나는 걸을 수 있었는데 오빠가 기니까 같이 기었어요. 근데 그렇게 목이 마르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내 몸에서 피가 엄청나게 흐르고 있었던 거야. 난 내가 다쳤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가다가 보니 옆에 웅덩이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길 내려가서 막 물을 마시는데 오빠도 목이 마를 거 같은 거예요. 피를 많이 흘리니까. 오빠한테 이 물을 가져닺고 싶은데 손에 담아서 가면 물이 손에서 다 빠져나가고 다시 담아도 또 빠져나가고. 오빠는 계속 목이 마르다고 했어요.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한도 끝도 없이 엄마를 찾아갔어요.
나중에 한국 잡지(『한겨레21』) 사진을 보니까 우리가 걸어갔던 길옆에 엄마가 누워있더라구요. 내가 엄마 엄마 외치면서 걸어갔던 길이었어요.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서 쌓여있는데 무서워서 가까이 못 갔거든요. 그리고 그때 난 우리 엄마는 시장에 갔으니까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시장을 가다가 한국군을 마주친 거 같아요. 시장을 못 갔나봐. 그때 내가 엄마를 알아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엄마 얼굴 한 번 더 봤을 걸. 또 하나는 그때 내가 너무 어렸지만 내 동생을 업고 갔으면 내 동생이 살았을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어렸던 게 너무 원망스러워. 동생한테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두고 갔는데. 결국 엄마도 못 찾고 동생도 죽었어요. 다 후회스러워요. 한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우리 엄마 보셨어요? 이렇게 물어봤더니 '너희 엄마 살았을 거다. 너희 엄만 시장 갔잖아.'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한참 더 걸었어요. 근데 어른들이 보기에 오빠가 너무 많이 다친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살아있을 거라고 안심시키고 오빠를 병원으로 보냈어요. 그때까지 나는 내가 다친 줄은 몰랐는데 오빠를 보내고 나를 봤더니 내 창자가 배 밖으로 다 나와 있는 거예요.
글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너도나도 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녀의 목메임, 혼돈, 절망, 회한, 분노···. 그러나 사, 그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한가운데서도 그날은 너무 선명하더구나. 마치 어제처럼. 그날의 태양, 그날의 피, 동생의 눈빛, 들길, 죽은 사람의 손, 웅덩이의 물빛. 그러니까 그날은 그녀 안에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날 그곳을 몸에 품고 지금껏 살아온 거라. 기억이 되지 못한 지난 시간은 두통으로 어지럼증으로 체증으로 그녀의 몸을 떠돌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집요하게 당신을 점령하고 있는 그 기억, 삶과 죽음이 뒤엉켜있는 당신의 생, 과거와 사투를 벌이는 현재, 당신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 화를 내도 된다고 아니 소리 지르고 쫓아내고 욕을 해야 한다고. 너희는 우리를 그렇게 죽여놓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구나, 여행까지 하고 이런 데까지 올 수 있구나,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되뇌었다.
사, 어른이 된다는 건 '나'가 확장되는 일이더구나. 내 몸 하나만 나인 줄 알았는데 저 나무, 저 거미, 저 철봉, 저 강물, 응웬 티 탄, 오늘 내 밥상에 올라온 멸치마저 '나'임을 알아가는 것. 그러니 네 이야기가 세상 모오든 여자들의 이야기이고 세상 모오든 여자들의 이야기가 네 이야기임을, 사, 너라면 머지 않아 알아차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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