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재밌는 소설은 지구를 다 뒤져도 찾기 힘들 거야. 정말 오랜만이야. 읽는 걸 멈출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어서, 이걸 계속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심지어 컴퓨터 게임도 하기 싫은 느낌은. 처음 알았어. 글을, 문장을 이렇게 쓸 수도 있다는 걸.
그랬다. 정말 나는 변태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이 스물한 살의 여자애가, 단지 자신을 예쁘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를 환자로, 혹은 위험한 인간으로 주목했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했다.
서른 살을 넘기도록, 명색이 조각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면서도, 나는 그때까지 아름답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내 감정의 전극을 건드릴 때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정신이 번쩍 들고, 혈관들이 살아나며, 때로 누선이 자극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같을 때보다 다를 때가 더 많았다. 이상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모두가 꺼리는 것일 때도 있었다.
무엇인가 숨겨져 있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그 숨겨진 것 위로, 저 아이는 저렇게 이상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어떤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다만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만이 나에게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흡사 짐승의 소리 같은, 분절되지 않은 비명이 세면장의 얇은 베니어판 사이로 터져나왔다. 비명은 점점 굵어지고 커졌다. 작업실 천장을 무너뜨릴 듯한 굉음으로 높아지더니, 느닷없이 급강하하며 울부짖는 소리로 바뀌었다. 괴물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의 울음 소리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L은 잠자코 내 침묵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나, 어때요?'라고 묻는 듯 그녀의 입술 끝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 표정은 좀 전의 말씨와 마찬가지로 비아냥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일종의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동안 무엇을 그렇게 비웃으며 살아왔던 것일까.
"많이 변했구나."
"내가 그랬잖아요. 변할 거라구."
"어디 잠깐 들어가서 차 마실까?"
"나, 바쁜데."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예쁜 여자들이 흔히 자신의 구애자들에게, 혹은 습관적으로 모든 남자들에게 내보이는 오만과 허영, 힘의 과시를 읽었다.
까다롭고 당당해 보이던 그녀는 뜻밖에 온순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대로 하여금 마치 갑작스런 유혹을 받은 것처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였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였다.
웃음이 얼굴에서 채 가시기 전에 그녀의 눈에게 빛이 꺼졌다. 그녀의 시선은 아무런 생기가 담겨 있지 않은, 흡사 인형의 얼굴에 박힌 유리알 같은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는데, 그것은 마네킹의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자연스럽던 그녀의 몸놀림은 굳었다. 호흡까지 멎은 것 같았다. 어깨도 배도 석고상처럼 딱딱했다.
고작 1, 2초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좀더 오래 지속됐다면, 어느 정도 관찰력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짧았고, 가까이 있는 P조차도 전혀 이상한 기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석고 마스크의 안쪽에 석고를 부어 처음 그녀의 얼굴을 떴을 때, 나는 정수리에서부터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문 그녀의 얼굴은 실물과 똑같이 아름답고 균형 잡힌 것이었다. 딱딱하고 얄팍한, 흰 석고 껍데기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 얼굴이 왜 그토록 오싹한 이물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잠시라도 작업실에 두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물건은 섬뜩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비친 내 얼굴은 고요하고 침착했다.
별안간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웃음을 그칠 수 없다는 듯 온몸을 흔들어대며, 그만 눈물이 질금질금 비어져나온 눈시울을 훔쳤다.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출렁대는 머리카락을 보았고, 그녀를 비추는 밤하늘의 자잘한 별들을 보았고, 이 낯설고 화려한 집의 정적 속에서 울려오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결코 멈추지 않는, 금속성의 음향을 들었다.
천천히 알게 됐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도 별수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
처음 널 봤을 때, 날 보는 눈이 끔찍하다고 느꼈어. 뼈까지 투시되는 듯한 악몽이었지. 한데, 동시에 네가 싫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한번쯤, 이런 이야기를 미친 듯이 지껄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란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유쾌한 장난인지, 과한 농담인지, 진심인지, 단순한 폭력인지, 제어할 수 없는 광기인지 나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것을 알 수 없는 한 어떤 행동도 불가능했다. 만일 그녀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면, 좀 전에 내 입술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힘으로 나이프를 꽂는다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소름이 일어섰다.
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일까. 가난, 실업, 우울증, 탈속. 그 중 무엇이라도 좋겠으나, 내 경험으로 비춰볼 때 그 답은 질병이다. 그후 지나간 2년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예기치 못했던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거리에 나오면, 이 사회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영의 소형 승용차 뒷좌석에 실려 병원과 병원을 옮겨다니는 동안 내가 차창 밖으로 본 것은 다른 행성의 삶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여자들, 청바지 차림의 대학생들, 햇빛, 상점들, 횡단 보도, 버스들과 전철역, 그 모든 것들이 외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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