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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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5. 6. 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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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임경선 작가가 애호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 하루키의 책은 이번에 처음 읽은 건데, 오래 알고 있던 사람의 책을 읽듯이 편안한 감정이 들었다. 간결하고 고요한 문체. 글을 쓰는 방식이나 삶에 대한 태도가 임경선 작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눈에 잘 들어온다.

 나와 결이 잘 맞는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겐 유사한 특징이 있다. 개인의 자유로움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개인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분노한다는 것. 그들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작은 폭력일지라도,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인지한다. 폭력의 대상이 본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향한 폭력을 대할 때와 똑같이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사회적 규범이나 원칙에 갇히지 않고 삶의 부조리함을 꿰뚫어 보는 본능적이고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예리한 감각이다. 그런 통찰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본인들만의 단단한 고집이 있다. 존중받아 마땅한 정당한 고집.

 나와 잘 맞는 책을 찾고 싶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 제일 자연스러우면서도 좋은 방법은, 이런식으로 한 점에서 시작해서 나뭇가지가 자라듯이 점점 뻗어나가는 거다. 특별히 좋았던 책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점에서 시작된다.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그러다 읽을 게 없어지면 그 작가가 즐겨 읽었다고 하는 책이나 좋아한다고 밝힌 작가의 책을 읽어본다. 책을 고를 때 성공 확률이 가장 높았던 방법이다.

 

 

 

 

 

 

 

 

 

 

 

 


 

 

 

 

 

 

 

 

 달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대체로 오랜 시간 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깊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글쎄, 도대체 나는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확실히 추운 날에는 어느 정도 추위에 대해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어느 정도 더위에 대해 생각한다. 슬플 때는 어느 정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즐거운 때는 어느 정도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앞에서도 썼듯이,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두서없이 떠올릴 때도 있다. 때때로(그런 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소설의 괜찮은 아이디어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흭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을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풍경 속에 타인과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타인과 다른 것을 느끼며, 타인과 다른 말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손에 들고 읽어준다는 드문 상황도 생겨난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나는 원래 장거리 달리기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학교 체육 시간은 좋아하지 않았고, 운동회 같은 것은 진저리 치게 싫었다. 그것은 위로부터 "자, 해라" 하고 강요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은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내가 공부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소정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든 마친 다음, 소위 '사회인' 이 되고 나서부터다.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번역 기술도 그렇게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내 돈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걸렸고 시행착오도 거듭했지만, 그런 만큼 배운 것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는 없다' , 쉽게 말하면 그런 뜻이 된다.

 가게를 경영하고 있을 때도 대체로 같은 방침이었다. 가게에는 많은 손님이 찾아온다. 그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상당히 좋은 가게다, 마음에 든다, 또 오고 싶다' 라고 생각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단골이 되어준다면 경영은 이루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 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경영자는 명확한 자세와 철학 같은 것을 가치로 내걸고, 그것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비바람을 견디며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고 하면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 "무척 의지가 강하시군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을 받으면 물론 기쁘다. 욕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 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 마라톤은 만인을 위한 스포츠는 아니다. 소설가가 만인을 위한 직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권유를 받거나, 요구를 받아 소설가가 된 것은 아니다(만류를 당한 적은 있지만).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글을 읽고 흥미를 갖게 되어 '자, 한번 달려볼까?' 하는 생각으로 실제로 달려보니 '어, 꽤 즐겁잖아!' 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그건 물론 바람직한 현상이긴 하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로서 무척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데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도박에 흥미를 지닌 사람도 있다. 학교에서 체육 시간에 학생 전원에게 장거리를 달리게 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참, 안됐다' 하고 동정해 마지않는다. 달리려는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또는 체질적으로 적합치 않은 사람에게 무조건 장거리를 달리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고문과 같다. 괜한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중학생이나 고교생에게 획일적으로 장거리를 달리게 하는 것은 그만 두는 게 좋습니다, 하고 충고하고 싶지만, 아마 그런 것을 나 같은 사람이 말해서는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을 것이다. 학교란 그런 곳이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 라는 진리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절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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