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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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5. 3. 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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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간결하고, 차가운 문장들. 화해도, 양보도, 심리 분석도 없다. 정확한 단어들만이 있을 뿐이다. 정확함에 대한 열정. 완전무결한 단호함 속에서, 아니 에르노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_르몽드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화제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라, 혹은 그 사람이 가봤던 장소 등,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것들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때때로 전화벨 소리는 수화기를 천천히 집어들고 "여보세요?"라고 말할 때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 내가 가졌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 사람의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실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전화선 너머에 있는 상대방을 증오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A의 목소리를 확인할 때는 거의 질투심마저 일었던 고통스럽고 긴 기다림이 너무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마치 제정신을 잃었다가 느닷없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알려오면―그런 경우는 그가 아내의 의심을 사지 않고 늦게 들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좋은 '기회'였다―나는 또다른 기다림 속으로 빠져든 나머지 생각을 할 수도, 무언가를 바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내가 즐길 수 있을지 자문해보아야 할 정도였다). 샤워를 하고 유리잔을 꺼내놓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집 안을 정돈하는 일 등,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이 들떠서 부산을 떨뿐이었다. 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사람이 전화로 사나흘쯤 후에 들르겠다고 알려와 그 사람과의 다음번 만남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면,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식사 약속마저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해서 우리의 약속이 깨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차를 몰아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는 3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때 문득 교통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곧 '내 삶이 여기서 끝나게 될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종종 내가 저지르거나 당할 다소 비극적인 사고나 질병을 상상해서 그것으로 내 욕망을 저울질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상상을 통해 내가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내 욕망이 운명에 대항할 만큼 큰지 그 정도를 측정해보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내 집이 불에 타버려도 괜찮아' 하고 상상하는 식이다. (원주)

 

 

 

 

 

 

 

 

 

 그 사람이 떠나자 엄청난 피로가 나를 짓눌러왔다. 곧바로 집안을 정리하지 못했다. 나는 유리잔, 음식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접시,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방바닥과 복도에 흩어져 있는 겉옷과 속옷 들, 카펫에 떨어진 침대 시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미술관에 소장된 다른 어떤 그림도 내게 주지 못할 힘과 고통을 간직한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 서 있을 때면, 저 여자들도 나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 약속이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헬스클럽의 미용체조 강습, 아이들의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내겐 그런 종류의 모든 일들이 하찮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 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우편집배원들의 파업에도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A는 절대로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까(물론 결혼한 남자로서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일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또 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 창녀촌을 단골로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통속 소설에 정신이 빠져 있는 여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내 안의 무엇이 그 사람들과 닮았는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11월 11일에 다녀갔다"라거나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하는 식으로 정확한 날짜를 밝히는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도 않다(그런 것들은 절반가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꽃이나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그 사람은 내게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이내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조차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질투는 나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증거라는 생각에,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 중에서 질투의 증거로 생각되는 것은 탐욕스럽게 기억해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크리스마스 휴가에 여행 떠날 거야?"라는 그 사람의 물음은 그저 흔한 일상적인 물음일 뿐이지 내가 누구와 스키를 타러 갈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회적으로 하는 질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어쩌면 그 사람은 그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으로 내가 여행을 떠나기를 바랐던 걸까?). 나는 가끔 나와 정사를 나누며 보낸 오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지 자문해보았다. 정사를 나눈다는 것, 그 자체일 뿐이겠지. 어쨌든 또다른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방송이나 영화를 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특히 그 내용이 사랑이나 에로티시즘을 다룬 것이거나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이웃집 여인>을 볼 때는 그 사람도 나처럼 우리와 등장인물들을 비교하면서 보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면, 그 역시 그날 저녁 나를 떠올리며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고, 영화를 통해 우리 관계를 더욱 아름답고 정당하게 느꼈을 거라고 믿어버렸다. (반대로 영화로 인해 우리 관계가 그 사람에게 위험하게 생각됐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애써 떨쳐버렸다. 혼외정사를 다룬 영화는 한결같이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니까.)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시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의 차이 때문에 너무나 불안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 사람도 분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생각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그 사람과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오는 것일 뿐, 나 스스로 애써 그런 것들을 찾아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이전에 즐기던 독서나 외출 따위의 모든 활동을 자제했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나는 상사가 요구하는 시간 외 근무를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RER이나 지하철, 혹은 대합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나는 앉기만 하면 이내 A를 생각하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영상과 기억들이 넘쳐나서, 마치 머릿속으로도 몸의 다른 기관들처럼 육체적 쾌락을 느끼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의 A의 직위나 역할은 뭇 여성들의 숭배를 끌어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반면 내게는 그 사람을 내 곁에 붙들어둘 만한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 같았다. 파리 시내에 나가게 될 때면 나는 어느 거리에서든 그 사람이 옆자리에 여자를 태운 채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만약 그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오만하고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똑바로 몸을 펴고 걸었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결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며 걸었다. 차창을 내리고,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한껏 높이고, 소 공원이나 뱅센 숲으로 차를 모는 그 사람의 환영이 나를 뒤쫓았다.

 

 

 

 

 

 

 

 

사람들이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며 각각의 작품이 만들어진 때와 특징 등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내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었다.

 

 

 

 

 

 

 

 

 박물관에서도 사랑을 표현한 작품들만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나체상에 마음이 끌렸다. 그것들을 보며 A의 어깨선을, 배를, 성기를, 그리고 특히 허리에서 서혜부로 이어지며 안쪽으로 부드럽게 파인 곡선을 떠올렸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앞에서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남성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토록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 당시 여자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 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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