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메모한 책은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다. 이 책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유형화하거나 평균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현대 사람들에게 평균적인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평균이라는 개념은 매우 큰 집단 간의 특징을 비교할 때는 유용하지만 개개인을 판단할 때는 언제나 틀렸다는 것을 여러 사례와 연구를 토대로 주장하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임경선 작가님과 친해서 알게 된, 가수 겸 작가 겸 책방 주인 요조님이 한 유튜브 영상에서 인생책으로 소개하셔서 읽게 됐다. 읽어보니까 왜 추천하셨는지 알 것 같고 이런 책 소개해 줘서 감사한 마음이다.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적이 많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분야들을 공부하는 데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해서 괴로워한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의무적으로 학기, 학년에 따라 모두 똑같이 정해진 수업을 듣는다. 학생 개개인이 수업 내용을 이해했는지는 상관없이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진도를 나간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에 모두 똑같이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만 바라보며 매일 늦은 시간까지 공부한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아침에 등교하느라 충분한 수면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긴 것은 당연히 건강에도 좋지 않다. 학교를 가는 것, 그리고 개근상을 받는 게 인생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프거나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거나 다른 중요한 일정이 있어도 학교에 간다. 한 명의 인간이 실제로 인생 전체를 살아가면서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내용들을 담은 시험 하나가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복잡한 인간의 개개인성은 무시한 채로,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학생들을 모두 똑같이 언어, 수리, 외국어 따위의 고정된 과목으로 평가한다. 수능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수능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더 재능이 있는,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학생들을 우등생, 열등생으로 나누고 등급화한다. 마치 성공을 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가 존재하는 것처럼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걷게 한다.
늘 이러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공교육의 시스템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왔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특성은 무시한채로 모두가 의무적으로 똑같은 수업을 받게 하고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은 아이들의 재능이 발휘되지 못하게 억제한다.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건 당연히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지만 부모님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부모님들은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자식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직접 탐색할수 있게 해줘야 한다. 세상에는 수능 공부 말고도 정말 다양한 능력과 재능,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모님들은 안정적인 길을 걷게 한다는 명목하에 아이에게 수능 공부를 시킨다. 분명 무엇인가에는 재능이 있을 아이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기회도 없이 공부를 시작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좁은 상자에 가두는 행동이다. 단순히 보호자라는 이유로 아이의 삶을 강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학대 행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공부가 나쁜 게 아니다. 그 어떤 흥미도 없이 누군가가 시켜서,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꾸역꾸역 괴로움을 참고 견뎌내는 게 나쁜 거다. 본인이 욕심이 없으면 그 괴로움을 끝까지 참아내도 결국 그 끝은 안 좋을 수 밖에 없다.
외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기와 지역의 문화에서 평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우월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열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외모를 비하한다. 또한 평균에 비해서 뚱뚱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건강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거라고 경고한다. 사람은 모두 내장 기관의 크기는 물론이고 체질과 체형이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평균을 이용해서 BMI(체질량 지수)같은 것을 만들고, 이 측정값이 평균이면 아름답고 건강한 몸이고 평균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인 것처럼 광고했다. 이런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은 마른 몸을 갖기 위해서 무리해서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고, 평생 외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형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정도 정해진, 자신만의 체질이 있고 이것은 게으름과는 상관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메모했던 글이 있어서 바로 밑에 첨부했다.
당신의 생산성이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평생 들어왔다면, 몸으로부터 소외당할 가능성이 높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자신의 몸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일부로 보지 않고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본다. 즉 신체를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자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살찐 여성이 이런 담론에 넘어가기 쉽다. 살찐 여성은 자신의 몸을 날씬한 아름다움에 최대한 맞추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듣는다.
“아름다움으로 평가받는 건 정말 지겹고 지치는 일이야. 아무도 원치 않는데 말이지.” 내 친구 제시 올리버Jessie Oliver가 한 말이다.
제시 올리버는 발성 지도자이자 뛰어난 오페라 가수이며, 살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유포하는 활동가다. 팟캐스트 〈살에 대한 수다Fat Outta Hell〉에서 제시와 동료 진행자는 특대 사이즈 비키니를 찾는즐거움부터 체격이 큰 사람도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갖춘 식당 찾기의 어려움 등 살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제시는 오랫동안 살에 대한 부정적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터와 진료실과 공연예술계에서 살찐 사람들이 맞닥뜨린 비난과 배척에 대해 비판했다. 자신이 살 공포증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의 살에 대한 혐오가 ‘게으름이라는 거짓’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제시는 몸소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내 생각에 다이어트 산업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똑같이 돈을 버는 유일한 산업이야. 체중을 감량하지 못하면 계속 노력해야 하지. 감량에 성공한 사람에겐 빠진 체중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온갖 제품들을 팔아. 신이 다시 살찌는 걸 용납하지 않거든.”
살에 대한 혐오는 기업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019년 다이어트 산업은 미국에서만 그 가치가 7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산업은 2018년에서 2019년 사이 4퍼센트 성장했고, 대부분의 분석가는 이 산업이 향후 몇 년 동안 계속 성장할 것이라 예측한다. 다이어트 사업은 매우 광범위하고 거대해서 다이어트 알약부터 ‘폭풍 감량’ 운동 강좌, 성형수술, 복부 압박 벨트까지 팔지 않는 게 없다. 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쏟아부을 대상은 많다. 많은 기업이 살을 빼는 데 돈을 계속 쓰도록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다.
사회의 살에 대한 혐오는 사람들이 ‘완벽’이라는 임의적인 기준을 좇으며 열심히 운동하도록 몰아붙인다. 이 혐오 때문에 우리는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 상관없이 헬스장과 피트니스 강좌에서 몸을 날씬하고 ‘탄탄’하게 만들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살에 대한 혐오는 누구나 미의 기준이 되어버린 부유한 백인 유럽인들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이 보내는 배고프다는 신호는 믿을 게 못 되며, 알약이나 식사 대용 셰이크로 억눌러야 한다고 믿게 한다. 그런 방법들이 거의 효과가 없다고 통계상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몸만들기’를 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 연간 수천 달러를 쓰게 한다.
“오래전부터 살에 관한 많은 연구와 과학의 돈줄은 다이어트 산업이었어. 그래서 모든 연구 결과가 다이어트 제품 기업들이 ‘당신을 고칠 수 있는 제품이 여기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제시돼. 우리는 고쳐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게 되지.” 제시가 한 설명이다.
체중 감량을 통해 몸을 ‘고쳐야’ 한다는 이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을 빼려는 시도는 십중팔구 실패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식단 조절, 운동, 수술, 보조제 모두 장기적으로 신체를 변화시키는 데 효과가 없다. 연구에 따르면 체중 감량을 시도한 사람들의 95퍼센트에서 97퍼센트가 5년 내에 요요현상을 겪었다. 게다가 우리 모두 살찐 것을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배웠지만, 많은 연구를 통해 살을 빼고 찌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정한 과체중을 유지하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해롭다고 밝혀졌다.
이 모든 증거에도 사람들은 살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게으름’의 신호로 보도록 배웠기 때문에 살과의 전쟁을 계속한다. ‘살’과 ‘게으름’은 주로 함께 쓰이는 단어들이다. 둘 다 사람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역겨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더 열심히만 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라고 주장하며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가난한 사람들의 불운에 대해 그들을 탓하는 것처럼, 덜 먹고 더 운동만 하면 살을 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살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인 신체 이미지를 덧씌운다.
십 대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나는 꽤 심각한 섭식 장애를 앓았다. 가능한 한 먹기를 거부하고, 아무리 바쁘거나 피곤해도 매일 한 시간 이상 운동했다. 2014년에 심각하게 아팠을 때, 영양실조가 과로와 함께 주된 원인이었다. 나에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강박적인 과로와 섭식장애 둘 다 게으름에 대한 두려움과 나는 ‘충분히’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건강해지기 위해 육체 고통이 미덕의 표시라는 믿음을 버려야 했다. 또 살이 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해야 했다. 그때까지 평생 나는 살찐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 없이 ‘게으르며’, 그들이 맞닥뜨린 배척과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섭식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찐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에 도전해야 했다.
출처: https://alokdalok1.tistory.com/666 [알록달록 음악세상:티스토리]
난 인간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렇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절대적으로 뛰어날 수도 없다. 생명의 본질이 그렇다.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같은 방법으로 더 뛰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재밌고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맥락에서는 어떤 사람이 되는 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성공을 위한 정해진 경로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무언가를 처음 배울 때 있어서 이미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 전문가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인생의 행운이라는 것에는 100% 동의한다. 예를 들면 노래나 미술 같은 것을 처음 배울 때, 또는 수영이나 탁구, 격투기와 같은 운동을 처음 배울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기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시작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실력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딱 거기까지다. 기본 원리를 배운 후에는 본인이 직접 경험해가며 자연스럽게 자기에게 맞는 방식들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뇌, 내장, 체형을 비롯해서 무엇하나 같은 게 없는 개개인을 '평균적으로' 좋은 방법이라는 이유로 강압적으로 교육시키거나 1차원적인 시험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은 개개인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유를 빼앗긴 채로 사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절대 겪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시간 낭비다.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공에서도 멀어진다. 난 부모가 아이에게 알려줄 건 자유에 대한 책임, 즉 법이 정해놓은 최소한의 선, 합리적이고 지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판단할 수 있는 선과 악을 교육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정말 위험한 길로 빠지려고 할 때를 제외하면 아이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 원하는 경험들을 할 수 있게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만 해준다면 아이는 알아서 자신만의 성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만약에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게 되면, 난 아이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을 거다. 특히 공부만큼은. 아이가 진지하게 학교를 다니기 싫다고 하면 흔쾌히 자퇴시켜 줄 거다.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다고 하면 그 또한 흔쾌히 아이를 지원하고 아이의 의사를 존중할 거다. 아이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욕심이 조금 있다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꼭 만들어주고 싶다. 인간이 성장하는 데에 좋은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고 싶거나 배우고 싶을 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분야를 세계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에게 1:1교육을 공짜로 받는 거나 다름없다. 책 한 권에 내가 평생동안 공부해도 깨닫지 못할 정수들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책 한 권으로 나눠 받을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한 사람분의 인생을 더 살 수 있는 거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100년을 버는 거다. 책을 읽는다고 그 안의 내용을 모두 완벽히 이해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비약일 순 있지만 어쨌든 나는 좋은 책은 세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합리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를 믿지 않게 해주고, 우주와 생명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수영과 격투기 정도는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수영은 생존에 필수적이면서 부상 위험 없이 평생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땀에 젖지 않고 항상 쾌적하다. 운동 하는 내내 괴로운 감정 없이 기분 좋은 상쾌함만 느낀다. 수영을 하고 씻고 집에 오면 몸 전체가 스트레칭 된 것 같이 가볍다.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그런 개운함은 수영에서 밖에 못 느끼는 것 같다. 수영을 배우고 나면 오히려 물속에 있을 때가 물 밖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느낀다.
격투기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혹시 모를 괴롭힘을 받아서 자신감을 잃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고, 곤경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기 쉽고, 비겁하게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격투기, 특히 복싱은 스파링이 정말 재밌다. 세게 하는 거 말고, 잘하시는 분이 받아주시는 스파링은 매일 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다. 하고 있으면 실력이 늘고 있다는 느낌, 내가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샌드백 때릴 때나 스파링 할 때 부상 위험이 큰 운동이긴 하지만 안전하게만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어쨌든 운동이니까 몸을 아예 안 움직이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좋다. 아이가 재미없어 하면 어쩔 수 없고. 격투기는 싸움이 아니다. 싸움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하고 잔인한 행동이다. 싸움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와 상관없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을 거다. 복싱은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고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내 경험상 세상의 모든 운동, 아니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배우든 간에 1~3개월만 정도만 배워도 충분하고 그 뒤부턴 혼자 연습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오래 배울 필요는 없다.
아래부터는 내 메모다. 이렇게 따뜻한 책이 나와줘서 무척 고맙고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아이들도.
0명이었던 것이다.
조종사 4,063명 가운데 10개 전 항목에서 평균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조종사는 팔 길이가 평균치보다 길지만 다리 길이는 평균치보다 짧은가 하면 또 어떤 조종사는 가슴 둘레가 평균치보다 넓은 편지만 엉덩이 둘레는 좁은 편으로 나타나는 식이었다. 대니얼스가 더 놀라워했던 의외의 결과는 따로 있었다. 10개 항목 가운데 임의로 3개 항목만을 골라서, 이를테면 목둘레, 허벅지 둘레, 허리둘레만을 고르는 식으로 비교해본 결과에서도 3개의 전체 항목에서 평균치에 드는 조종사의 비율이 채 3.5퍼센트도 안 됐다. 대니얼스가 얻어낸 이러한 결과를 통해 논의의 여지 없이 명백이 입증됐다시피 평균적인 조종사 같은 것은 없었다. 평균적인 조종사에게 맞는 조종석을 설계해봐야 어느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조종석을 설계하는 셈이었다.
클리블랜드 건강박물관에 조각상으로 전시돼 있던, 전형적 여성상인 '노르마Norema'와 신체 치수가 근접한 여성을 뽑는 대회였다.
'노르마'는 유명한 부인과 의 로버트 L. 디킨슨 박사가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와 합작해탄생시킨 작품으로서 벨스키가 1만 5,000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에게 수집한 신체 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빚어낸 조각상이었다. 디킨슨 박사로 말하자면 브루클린 병원 산부인과 과장, 미국 부인과학회 회장, 미국 의학협회 산과학 부문 의장을 지내던 당대의 유력 인물이었다. 예술적 자질도 뛰어나 한 동료로부터 '산과학계의 로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으며 의학계에 몸담고 있는 내내 그런 재능을 활용해 다각도의 크기와 모습으로 여성을 스케치하며 신체 유형과 신체 동작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당대의 과학자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디킨슨 역시 대규모로 자료를 수집해 얻어낸 평균치가 중요한 사실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믿었다. '노르마'가 바로 그런 신념에 따른 중요한 사실의 상징이었다. 디킨슨은 자신이 수천 건의 자료로 산출해낸 평균값이 여성의 전형적 체격, 즉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돼준다고 믿었다.
클래블랜드 건강박물관은 '노르마' 조각상을 전시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미니어처 조각상까지 판매하며 '노르마'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선전하면서 '노르마' 열풍에 불을 댕겼다. 어느 유명한 체질인류학자는 '노르마'의 체구를 "인체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칭했고 예술가들은 '노르마'의 아름다움을 "뛰어난 귀감"이라고 찬양했는가 하면 체육 담당 교사들은 '노르마'를 젊은 여성의 이상적 외형의 표상으로 삼으며 그 이상형에서 벗어난 학생에게는 운동을 권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 목사는 '노르마'가 정상적 신앙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설교하기까지 했다. 열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노르마'는 「타임」에 기사로 오르고 신문 삽화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C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미국인의 외모>의 소재로 다뤄져 시청자들에게 정상 체격을 확인해보는 기준으로서 그 신체 치수가 떠들썩하게 소개될 정도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에 심사 위원들은 대다수 참가자들의 신체 치수가 평균치에 근접해서 승부가 밀리미터 단위로 아슬아슬하게 갈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막상 대회가 열리자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9개 항목의 치수 중 5개 항목에 한정한 경우에서도 평균치에 든 여성은 3,864명의 참가자들 가운데 40명도 되지 않았다. 9개의 전체 항목에서 평균치에 가까운 여성은 마사 스키드모어까지 포함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대니얼스의 조사에서 평균 체격의 조종사라는 것은 없다고 밝혀졌듯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에서도 평균 체격의 여성은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증명됐다.
하지만 대니얼스와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 기획자들은 똑같은 결과에 맞닥뜨렸음에도 그 결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결론에서는 사뭇 다른 해석을 내렸다.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 당시의 대다수 의사와 과학자들은 대회의 결과를 '노르마'가 잘못된 이상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해석해 미국 여성들이 대체로 건강하지 못하고 몸 상태가 나쁘다는 식의 결론이 주류를 이뤘다. 그런 결론을 내린 인물의 한 예가 클리블랜드 건강박물관 관장이던 내과 의사 브루노 겝하드였다. 그는 전후의 여성들 대부분이 군 복무에 부적격일 만큼 형편없다고 한탄하며 "그런 부적격자들은 생산자로서도 소비자로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라는 주장으로 핀잔을 줬다. 그러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력 향상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니얼스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렸다. 1952년에 대니얼스가 쓴 글을 읽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평균적 인간'의 관점을 취하는 사고 경향에 곧잘 빠지는데 이는 조심해야 할 함정이다. 평균적인 공군 조종사를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는 이 집단만의 어떤 독특한 특징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특징, 즉 신체 치수의 극도의 다양성 때문이다." 대니얼스는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정상에 대한 인위적인 이상을 더 열심히 따르도록 권고하기보다 이 책이 토대로 삼은 다음의 반직관적 결론에 이르렀다. 평균적 인간을 바탕으로 삼아 설계된 시스템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공군은 평균을 참고 기준으로 삼던 관행을 버리고 개인 맞춤형을 새로운 지침 원칙으로 삼으면서 설계 철학에서 비약적 진전을 이뤘다. 이제는 개개인을 시스템에 맞추기보다 시스템을 개개인에 맞추게 됐다. 또한 지체 없이 실행에 나서 전 조종석을 각 항목의 치수에서 5~95퍼센트 범위 내에 드는 다양한 치수를 가진 조종사들에게 맞춰 설계하도록 지시했다.
항공기 제작자들은 이 같은 새로운 지시를 전달받자 초반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관련 엔지니어링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꺼려했다. 하지만 군에서 한사코 태도를 바꾸지 않자 항공 엔지니어들은 저렴하면서도 실행하기 쉬운 해결책을 꽤나 금세 내놓으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엔지니어들은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조절 가능한 시트를 설계해냈는데, 이는 현재 모든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 잡힌 바로 그 기술이다. 또 조절 가능한 가속페달을 만들어내고 조절 가능한 헬멧 조임 끈과 비행복도 개발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설계상의 해법을 실용화하고나자 조종사들의 비행술이 크게 향상되면서 미 공군은 지구 최강의 공군으로 도약했다. 그 직후 미군의 전 부문에서 평균치를 중심으로 표준화할 것이 아니라 장비를 다양한 체격에 맞추도록 명하는 지침이 발표됐다.
군에서 그런 파격적 변화를 그토록 신속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시스템 변화가 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시급한 문제에 대한 실용적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군이 병사들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군대 밖의 사회에서도 군의 선례를 따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사회가 사람들을 잘못된 이상에 비춰 비교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개개인으로서 바라보고 개개인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그러기는커녕 대다수 학교, 직장, 과학 단체들이 여전히 '노르마'의 유효성을 믿고 있다. 자의적인 기준, 즉 평균치에 따라 조직을 설계하고 연구를 수행하면서 우리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허상적 이상과 비교하도록 내몰고 있다.
우리에게는 일평생 평균이라는 잣대가 졸졸 따라다닌다. 우리는 평균에 얼마나 근접한가, 또 평균을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따라 평가를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교에 다닐 때는 평균적인 학생의 성적과 비교돼 등수와 등급이 매겨지고, 대학에 지원하면 등급과 시험 성적이 지원자 평균치와 비교당한다. 입사 지원 시에도 등급과 시험 성적만이 아니라 자질과 경력과 인성 점수까지 지원자 평균치와 비교된다. 취업이 되고 나서도 연례 평가로 해당 직무 수준에서의 직원 평균치와 대비돼 또다시 비교당하기 십상이다. 재정적 기회조차 평균 점수에서의 이탈 여부에 따라 평가되는 신용 점수에 근거해 정해진다.
우리 대다수가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다시피 인성 평가의 점수, 표준화된 평가에서의 등급, 평균 학점, 수행평가 등급이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자녀들이나 학생들이나 종업원들의 능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개인을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의 평균이라는 이 개념은 우리 뇌리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여간해선 진지한 의문을 품기가 힘들다. 우리는 이따금씩 평균이라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평균을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객관적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로서 받아들인다.
내가 평균이라는 이런 측정 방식이 거의 언제나 틀리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개개인을 이해하는 문제에 관한 한 평균은 결과적으로 부정확하고 현혹적일 가능성이 높다면? 조종석 설계와 '노르마' 조각상처럼 이런 평균의 이상이 잘못된 허상일 뿐이라면?
이 책의 주요 전제는 언뜻 보기엔 단순하다. 즉 평균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아이도 동료도 학생도 배우자도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기분을 띄워주려고 꺼낸 빈말도 아니요, 겉멋만 부린 빈 구호도 아니다.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실질적 귀결들이 뒷받침하고 있는 그런 과학적 사실이다.
단순한 통계학적 이치를 내세워 평균적인 사람들도 일부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그 자명해 보이는 가정마저도 필히 폐기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이유를 납득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평균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을 비교할 경우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각자 다른 그룹에 속한 2명의 개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칠레의 조종사들과 프랑스의 조종사들 간의 실력을 비교하는 경우라면 이때는 평균이 유용한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조종사나 한 사람의 배관공이나 한 사람의 의사가 필요한 순간이거나, 이 아이를 가르쳐야 하거나 저 종업원을 채용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다시 말해 어떤 개개인과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면 평균은 쓸모가 없다. 아니, 쓸모없다는 말도 과분한 표현이다. 평균이 사실상 한 개인의 가장 중요한 면모를 알아보지 못하게 속일 경우엔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신체 치수 따위는 없듯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같은 것도 없다. 평균적 학생이나 평균적 직원도 없고 그 점에서라면 평균적 두뇌 역시 없다. 이러한 일상화된 개념들 모두는 잘못된 과학적 상상이 빚어낸 허상이다.
최근에 들어 세포생물학자, 종양학자, 유전학자,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들이 이 새로운 개개인학의 원칙을 하나둘씩 채택하면서 세포, 질병, 유전자, 두뇌, 행동 등의 연구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재계에서 손꼽히는 기업 여러 곳에서도 이런 원칙을 도입해왔다. 실제로 개개인성의 원칙은 모든 영역에 차츰차츰 적용되고 있는 중이다.
재능을 희귀한 산물쯤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의 우수성을 육성하고 고용주들은 더 폭넓은 인재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잠재력에 안타까워하고 있거나,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펼칠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꿈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아이가 독해력이 부족한 경우라고 가정해보자. 이때 학교에서는 단순히 독해력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적 읽기 수업의 필요성을 인식해 그에 따라 아이의 학습을 조절해줄 수도 있다. 이번엔 당신의 부하 직원 중에 업무 수행력이 부진해 동료들로부터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찍힌 지원이 한 명 있다고 쳐보자. 이 경우엔 그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도 그의 행동 맥락을 파악해 그가 동료들과의 관계를 다지고 업무 능력을 대폭 향상시키도록 격려해주면서 부서 내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개개인성의 원칙을 적용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며 그런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나면 평균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내가 인생 반전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엔 직관에 따라, 또 그 뒤엔 의식적 결심에 따라 개개인성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2002년에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캠퍼스의 신경과학자 마이클 밀러는 언어 기억과 관련해 한 가지 실험을 벌였다. 이 실험에서는 먼저 16명의 실험 참가자들을 한 명씩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뇌 스캐너 장치에 눕게 한 상태에서 일련의 단어들을 보여줬다. 이어서 얼마간의 휴식 시간을 준 뒤 또 다른 배열의 단어들을 보여주며 앞에서 봤던 단어라고 여겨지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버튼을 누르게 했다. 이때 각 참가자가 특정 단어를 좀 전에 봤는지 안 봤는지 판단하는 순간마다 fMRI 스캐너를 통해 그 참가자의 뇌를 스캔하면서 뇌 활동에 대한 일종의 디지털 '지도'를 만들었다. 밀러는 실험을 마친 뒤 신경과학자들이 으레 따르는 방식대로 실험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시 말해 모든 참가자의 뇌 지도를 취합해 평균을 산출함으로써 평균적 뇌 지도를 만드는 방식의 보고서였다.
뇌의 단층촬영에 따른 새로운 신경과학적 발견에 대한 발표 기사를 보게 된다면, 즉 사랑을 느낄 때 뇌의 어느 영역이 활성화된다거나 공포를 느낄 때 뇌의 어느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식의 연구 발표 글을 읽게 된다면 그것이 다름 아닌 평균적 뇌 지도의 발표라고 봐도 거의 틀림없다.
이 방법에서는 평균적 뇌가 보통의 전형적인 뇌에 해당하고 각 개개인의 뇌는 이런 보통 뇌의 변형에 해당한다는 식의 가정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의 동기로 작용했던 가정과 흡사하다. 이런 식의 가정으로 인해 신경과학자들은 왼손잡이 사람들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게 된다.(왼손잡이 사람들의 뇌는 보통의 뇌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뇌 활동이 평균적 뇌 활동에서 너무 크게 벗어나 있는 사람들조차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런 이탈자들이 평균적 뇌에 대한 견해를 흐려놓을까 봐 우려돼서다.
"정말 놀랐습니다. 개개인의 뇌 지도는 그나마 두 명 정도만 눈을 잔뜩 찡그리고 봐야 겨우 평균적 지도와 비슷해 보일 정도였고 대다수는 평균적 지도와 판이하게 달랐어요."
각 참가자의 뇌는 평균적 뇌와 달랐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 서로 간에도 모두가 달랐다.
어떤 참가자들의 뇌는 주로 왼쪽 영역이 활성화된 반면 또 다른 참가자들은 오른쪽 영역이 활성화됐다. 주로 뇌의 앞쪽이 활성화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뒤쪽이 활성화되는 이들도 있었다. 참가자에 따라 활성화 영역의 표시 형태가 인도네시아 열도의 지도처럼 길쭉하고 빼곡한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공백에 가까운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에서는 모든 참가자가 예외 없이 똑같았다. 즉 모든 참가자의 뇌 지도가 평균적 뇌 지도와 비슷한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다. 밀러의 분석 결과는 길버트 대니얼스가 손의 모양을 조사하면서 얻은 결과와 유사했으며, 차이점이라면 이번에는 연구 대상이 손발 같은 신체가 아니라 생각, 감정, 인격의 요람인 한 기관이라는 점뿐이었다.
밀러는 그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일로 저는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런 식의 개개인별 기억 수행 패턴이 불규칙 잡음 같은 무작위 패턴이 아니라 개개인별로 나름의 체계를 띠는 패턴 같다고요. 말하자면 각 개인의 기억 시스템이 저마다 독특한 신경 패턴으로 이뤄져 있다는 확신이었죠. 하지만 제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그런 패턴의 차이가 미묘하지 않고 현저하게 두드러진다는 점이었죠.
밀러가 사람들의 뇌에서 발견한 이 '현저한' 차이는 단지 언어 기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얼굴 인식과 심상에서부터 절차적 지식('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방법에 관한 지식) 습득과 감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연구에서도 발견돼온 차이다. 이런 차이는 무시하기 힘든 시사점을 던져준다. 평균적 뇌를 바탕으로 사고나 인식이나 인격에 대한 이론을 세울 경우 그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 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수십 년 동안 신경과학계 연구에 지침이 돼온 가정은 근거 없는 헛된 가정이다. 평균적인 뇌라는 것은 없다.
우리 학교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학생 개개인을 평균적 학생에 비교해 평가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입사 지원자와 직원 개개인을 평균적 지원자와 평균적 직원에 대조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평균적 신체나 평균적 뇌 같은 것은 없다.
과학자들, 학교들, 기업들 모두가 '평균적 인간'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수용하게 된 배경에 얽힌 비화를 이야기하려면 18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해에 일반인에겐 이름도 생소하겠지만 아주 저명한 과학자 아돌프 케틀레라는 젊은 청년이 대학을 졸업했다.
케틀레는 인간의 평균을 해석하며 바로 이런 생각을 적용시켰다. 즉 개개인이 오류에 해당하고 평균적 인간이 참 인간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케틀레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평균 가슴둘레를 계산한 뒤 각 병사의 가슴둘레가 자연 발생적 '오류'의 경우에 해당하는 반면 평균 가슴둘레가 '참된' 병사, 즉 신체적 오점이나 흠이 없는 완벽한 치수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케틀레는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도 같은 노선의 논리를 펴며 우리 모두가 말하자면 인간의 보편적 원형의 결함 있는 모사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원형을 '평균적 인간'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평균'으로 평가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열등하거나 부족한 부류, 즉 평범한 부류로 여기기 예사다. 하지만 케틀레에게는 평균적 인간이 완벽 그 자체이자 자연이 꿈꾸는 이상으로서 오류라곤 없는 표상이었다.
케틀레는 평균적 인간의 숨겨진 얼굴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열정에 들떠 평균 키, 평균 체중, 평균 얼굴빛 등등 자료의 입수가 가능한 인간 특징에 대해 닥치는 대로 모조리 평균을 냈다. 평균 결혼 연령, 평균 사망 연령도 계산했다. 연간 평균 출산, 평균 교육 수준, 심지어 연간 평균 자살률까지도 계산했다. 그런가 하면 케틀레 지수(현재의 체질량지수 BMI에 해당한다)를 고안해 평균적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남성과 여성의 평균 BMI를 산출하기도 했다. 케틀레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평균값 모두는 유일한 참 인간, 즉 평균적 인간의 숨겨진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케틀레는 평균적 인간을 우러러 받든 반면 평균에서 벗어난 불운한 개인들에 대해서는 그에 맞먹는 혐오감을 가졌다. 실제로 이렇게 주장했다. "평균적 인간의 비율 및 몸 상태와 다른 모든 측면은 무조건 기형과 질병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 간주된 비율이나 형태와 비슷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측된 한계를 초과하는 모든 것은 기형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
인간의 마음은 '변호사들'이나 '노숙자들'이나 '멕시코인들' 같은 한 집단의 전체 구성원들이 일련의 공통적 특징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으로 가정하면서 사람들을 단순화해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한 편인데 케틀레의 연구는 이런 경향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이내 사회학의 토대로 자리 잡았다. 케틀레가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후로 과학자들은 무한대로 보이는 다양한 유형들의 특징을 'A형 성격', '신경증형', '사사건건 참견형', '리더형' 등으로 규정지으며 그룹의 그 어떤 개인이든 평균적 일원의 특징을 알면, 즉 그룹의 유형을 알면 그 개인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케틀레가 제시한 평균적 인간이라는 이 신과학이 점점 혼란이 가중돼가던 인간 통계 분야에 반가운 질서를 부여하는 듯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정형화하고 싶은 인간 본유의 충동에 정당성을 입증해줬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겠지만 케틀레의 이 개념은 들불처럼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다수의 정부가 국민을 이해하고 사회정책을 구상하기 위한 기초 토대로서 케틀레의 사회물리학을 채택했다.
케틀레가 착안해낸 이 평균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바야흐로 평균의 시대를 열었다. 다시 말해 평균이 정상이 되고 개개인이 오류가 되며 과학이 정형화에 정당성을 각인시켜주는 시대라 열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가정에 따라 결과적으로 공군에서는 평균적 조종사에 맞춰 조종석을 설계하게 됐고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나의 지도 교수들은 평균적 뇌의 지도를 해석하는 요령을 가르치게 됐다. 수 세대에 걸쳐 부모들은 자녀가 평균 기준에 따라 성장하기 못할까 봐 초조해하게 됐고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건강이나 사회생활이나 경력이 평균에서 너무 크게 이탈할 때면 불안감을 느끼게 됐다.
하지만 평균의 시대 개막을 얘기하면서 케틀레만 짚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로 그치는 셈이다.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프랜시스 골턴 경으로, 처음에는 케틀레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신봉했으나 나중엔 케틀레의 비난자로 유명세를 떨친 인물이었다.
케틀레는 평균에서 과도하게 벗어나는 것이 '기형'에 해당한다고 간주했으나 골턴은 이 벨기에인의 견해를 절반의 진실일 뿐이라고 봤다. 골턴과 빅토리아 여왕과 아이작 뉴턴같이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훌륭한 대가들은 절대 기형이 아니라 이른바 "우월층Eminent"에 속한다고 여겼다. 한편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능충Imbecile"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골턴은 평균에서 벗어나는 개개인을 '오류'에 해당한다고 여겼던 케틀레의 신념에 거부감을 가졌다. 그런 반면에 케틀레의 유형 개념에는 공감했다. 그 자신도 인간이 우월한 이들, 저능한 이들, 평범한 이들로 유형이 각각 분류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골턴은 인간을 최하위 계층인 '저능충'에서부터 중간 계층인 '평범층'을 거쳐 최상층인 '우월층'까지 14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는 평균의 의미에 획기적 변화를 일으켜 평균을 정상의 개념에서 평범함의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골턴은 의미의 변화만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갔다. 우월층이 별개의 부류에 든다는 확신이 너무 굳건한 나머지 한 사람의 계층은 지적·신체적·도덕적 차원을 아우르는 모든 자질과 면모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주장까지 폈다. 말하자면 지력이 우월층에 들 겨우 그 사람의 용기와 정직함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도 우월할 가능성이 대체로 높고, 수학 실력이 최하위층 언저리에서 맴돌 경우엔 미모나 자기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력도 평균치 한참 밑으로 처지기 십상이라는 얘기였다. "통계자료가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최고의 자질들은 대체로 상호 관계에 있다. 평국에서 판사, 주고, 정치인, 진보의 선도자가 된 이들을 한창 전성기 때 한 팀으로 짰다면 막강한 운동 팀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골턴이 1909년에 남긴 글이다.
골턴이 착안한 통계법은 하나같이 그 자신이 이름 붙인 이른바 '평균 이탈의 법칙'에 입각해 개개인의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평균보다 얼마나 월등하거나 열등한가라는 개념을 그 바탕에 뒀다. 현재의 21세기 사고에서는 수재들은 '평균 이상'이고 무능력자들은 '평균 이하'인 것이 너무 당연하고 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한 사람에게서 기인된 것이라는 얘기가 극단적 단순화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골턴은 거의 혼자 힘으로 인간의 가치는 평균치에 얼마나 근접한가에 따라 측정될 수 있다는 케틀레의 확신을 밀어내고 인간의 가치는 평균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 더 잘 측정된다는 개념을 들어앉혀놨다. 케틀레의 유형 개념이 1840년대에 지성계를 사로잡았듯 1890년대에 골턴의 계층 개념도 지성계를 매료시켰다. 1900년대 초반에 이르자 인간은 능력별로 하위에서부터 상위까지 분류된다는 관념이 사실상 사회과학계와 행동과학계 전체에 침투하게 됐다.
평균의 시대, 다시 말해 1840년대 케틀레의 사회물리학적 착안에서 비롯돼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그런 문화적 시대를 특징짓자면 사회의 거의 모든 일원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2가지 가정을 꼽을 만하다. 바로 케틀레의 평균적 인간 개념과 골턴의 계층 개념이다. 케를레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도 평균이 정상을 판단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라고 믿게 됐다. 특히 신체 건강, 정신 건강, 성격, 경제적 지위와 관련해서 유독 그런 믿음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과라는 편협한 기준에 따른 개개인의 계층이 개개인의 재능을 판단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믿음도 갖게 됐다. 이 2가지 개념이 현재 전 세계의 교육 시스템, 대다수의 채용 관행, 상당수 직원 업무 평가 시스템 이면에서 구성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다.
케틀레가 개개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끼친 영향력은 아직도 우리의 시스템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우리의 사생활을 보다 확실하고도 밀접하게 틀어쥐고 있는 것은 바로 골턴의 유산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평균 이상이 되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평균 이상이 되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하거나, 아니면 (정말 끔찍하게도!)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플스는 에세이에서 평균주의자들이 득세하면 미래가 어찌될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 평균주의자들은 대체로 살인, 자살, 결혼의 통계를 이런저런 현상에 대한 시대적 균일성의 증거로 내놓고 있다. (중략) 우리는 사람이기보다는 인간 군상으로 취급된다. (중략) 우리는 퍼센트의 정도에 따라 고생길행이냐 성공행이냐가 갈린다. 운명이 개인적으로 정해지기보다는 통계적 그룹의 일원으로서 배당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현대의 이런 산술상의 미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만도 하다. 우리가 묵인할 겨우 이 미신은 장차 인류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고정불변의 운명으로 인한 파멸이라기보다 숫자상의 기준에 따라 개인적으로가 아닌 평균적으로 떨어지는 그런 운명의 파멸이다.
평균주의자들의 커져가는 영향력에 우려를 나타낸 이들은 시인들만이 아니었다. 의사들 역시 평균을 활용해서 치료 중인 개개인들을 진단하는 것에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환자에게 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 100명 중 80명이 치유된다는 말을 해줄 수는 있지만 (중략) 그런 말은 환자에게 그다지 기운을 돋워주지 못한다. 환자가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치유되는 그 환자들 가운데 드느냐의 여부다." 실험의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프랑스의 의사 클로드 베르나르가 1865년에 쓴 글이다. "의사들은 이른바 큰수의 법칙이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어느 위대한 수학자는 이 법칙을 놓고 언제나 전체로는 옳지만 개별적으로는 틀리는 법칙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하지만 사회는 이 초반의 이의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그 결과 현재 우리는 만나는 개개인마다 반사적으로 평균에 비교해서 판단하고 있으며 그 개개인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매스컴에서 평균적 시민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수(미국의 경우 8.6명)를 보도하거나, 평균적 사람이 평생 동안 키스를 나누는 파트너의 수(여성의 경우 15명, 남성의 경우 16명)나 평균적 부부가 매달 돈 문제로 싸우는 횟수(미국의 경우 3회)를 보도하면 저절로 이 수치에 스스로를 대조해보지 않는 사람을 보기 드물다. 대조해본 결과 자신이 적정한 수준 이상의 파트너들과 키스를 한 것으로 나오면 우쭐한 감정이 솟기도 하고 그 수준에 못 미치면 자기 연민이나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유형화와 계층화가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하고 마땅한 일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이제 우리는 그런 판단이 어떠한 경우든 예외 없이 판단을 받는 사람의 개개인성을 묵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더 이상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케틀레 이후 150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19세기의 그 시인들과 의사들이 우려했던 그대로 모두 평균주의자가 돼버렸다.
그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잊히지 않는 기억 2가지는 넣고 찍고, 넣고 찍고, 넣고 찍고, 또 넣고 찍고를 끝도 없이 반복하던 것과 교대 근무시간의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그 귀청 찢어지는 금속성 종소리다. 그곳에서의 근무는 한마디로 인간성 말살의 경험이었다. 그곳에서는 알루미늄 공장 근로자로서 나의 개개인성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의 시인 사이플스가 경고했던 것처럼 나는 '인간 군상'으로 취급됐다. 단지 하나의 통계군이자 평균적인 근로자일 뿐이었다. 이것은 그냥 우연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작업장 전체가 평균주의의 신조, 즉 개개인이 평균과 비교돼 평가되고 분류되고 관리될 수 있다는 가정에 따라 설계됐던 것이다.
평균주의가 원래 수학을 확용해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던 유럽의 두 과학자의 연구에서 발전한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여전히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는 흥미를 끌 만한 난해한 철학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당신과 나는 평균이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면을 특징지으며 자존심의 가장 내밀한 판단에까지 침투해 있는 세계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떻게 추상적인 상아탑적 추측에서 비롯된 평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기업과 학교의 주류 조직 원칙으로 올라서게 된 것일까? 이는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라는 한 명의 인물에 의해 주도된 결과였다고 답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경제학자는 한 글에서 테일러가 "20세기 남녀의 사적·공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일지 모른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테일러는 평균주의의 중심 지침, 즉 개개인성의 등한시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업계의 비효율성을 체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과거에는 인간이 최우선이었다면 미래에는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그러면서 기업은 고용인들이 제아무리 특출한 인재라 해도 시스템을 개개 고용인에게 맞춰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시스템에 잘 맞는 평균적 인간을 고용해야 한다고 밝히며 이런게 단언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평범한 능력을 갖춘 동시에 기업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 사실의 분석을 통해 찾아낸 정책, 계획, 절차에 따라 일하는 개개인들로 구성된 조직이 각자의 번득이는 착상에 따라 일하는 천재들로 이뤄진 조직보다 더 순탄하고 안정적이기 마련이다.
테일러는 1890년대부터 평균 방법이 오류를 최소화해준다는 가정과 같은 방식으로 비효율성을 최소화해줄 새로운 산업 조직의 비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비전이란 바로 표준화standardization였다. 엄밀히 말하면 케틀레가 정부 관료 조직과 과학적 자료 수집 부문에서 표준화를 옹호한 최초의 과학자였으나 테일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력 표준화에 대한 그 자신의 착상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의 수학 선생님 한 분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 수학 선생님은 테일러와 같은 반 학생들에게 자주 수학 문제들을 풀어보게 시키고는 문제를 다 풀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손을 들게 했다. 이때 스톱워치를 사용해 학생들의 문제 푸는 시간을 잰 뒤에 평균적 학생이 문제를 다 풀기까지 얼마나 걸리는 지를 계산했다. 그런 다음 과제를 내줄 때 이 평균 시간을 활용해서 평균적 학생이 정확히 2시간이 걸릴 만한 과제가 되려면 몇 개의 문제를 넣어야 할지를 계산했다.
테일러는 이 수학 선생님의 숙제 표준화 방식이 산업계의 업무 처리 표준화에도 활용 가능할 것임을 인식했다.
테일러는 삽으로 한 번에 퍼 넣을 최적의 석탄량을 21파운드(약 9.5킬로그램)로 산정했다. 그런 다음엔 이 평균치를 중심으로 전체 산업 공정을 표준화해 각 공정의 수행 방식을 고정시켰고(테일러는 이 삽질 공정의 경우 21파운드의 양이 언제든 가장 능률적인 최적의 양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근로자들은 이 표준을 어겨서는 안 됐다. 내가 규정된 그대로 알루미늄 판금을 해야 했던 것과 같은 식이었다.
테일러에 따르면 특정 공정을 완수할 "단 하나의 최선책"이 늘 있기 마련이며 그 단 하나의 최선책은 바로 표준화된 방법이었다. 테일러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려는 근로자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미국의 공정들은 테일러의 표준화 원칙을 받아들이면서 부랴부랴 작업 규칙을 게시하고 표준 작업 절차를 담은 책자를 발간하고 작업 지시 카드를 발행하는 식으로 직무 수행에 반드시 따라야 할 방식을 제시했다. 한때 창의적인 장인으로 추앙받던 근로자들은 이제 자동인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현대 기업들에서는 표준화가 테일러의 초반 제안 형식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형식으로, 즉 내가 알루미늄 판금 공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었던 그런 형식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 공장의 일은 사실상 나에게 첫 번째 정규직 일자리였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나는 그처럼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지루한 업무가 유타주 어느 특정 회사만의 독특한 경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2년 뒤에 대형 신용카드 회사의 고객 서비스 담당자로 취직해 에어컨이 켜진 사무실에서 편안한 회전의자에 앉아 일하게 됐다. 근무 환경이 예전 그 공장의 일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아니었다. 이번에도 내 역할은 철저하게 테일러의 표준화 원칙에 따라 틀이 잡혀 있었다.
나는 요령이 상세히 적인 고객 응대 메뉴얼을 받았고 지시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이 매뉴얼을 어겨서는 안 됐다. 매뉴얼에는 고객 응대를 평균 시간 안에 해결하도록 정해져 있었고 따라서 내 업무는 매 응대별 소요 시간에 따라 평가됐다. 응대 시간이 평균 시간을 넘으면 모니터에 빨간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는 응대의 질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완료 버튼을 누르는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컴퓨터는 매 응대 종료 후 내 평균 시간을 새로 고쳐서 그룹 평균과 비교해 보여줬다. 물론 그 갱신 평균은 나의 상관에게도 전송됐다. 내 평균이 그룹 평균을 초과하면 상관이 내 자리로 찾아왔는데 나는 그런 상사의 방문을 몇 차례나 받았다. 내 평균이 계속해서 그룹 평균을 초과했다면 상사는 나를 해고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해고를 당하기 전에 그만뒀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나는 소매점, 식당, 판매점,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겨 다녔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내 일은 "시스템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라는 테일러의 신념에 따라 표준화돼 있었다. 나는 어떤 직장에서든 기계의 한 부품일 뿐이었고 개인적 독창력을 발휘하거나 개인적 책무를 맡을 기회가 없었다. 직장마다 가급적 평균치에 근접하라는 식의, 아니 다른 모든 직원과 똑같되 더 잘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테일러가 도입시킨 이 새로운 직책은 최근의 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관리자'였다.
관리자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개념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당시 19세기 기업의 통념에는 반하는 것이었다. 테일러 이전에 기업들은 육체노동 없이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비생산적인' 직원들을 불필요한 비용 손실로 여겼다. 실제적 일은 하지 못하면서 업무나 기획하고 앉아 있는 그런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일러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공장에는 일손을 지휘할 브레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1906년 한 강연에서 사원들과 관리자들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우리의 조직에서는 인간의 창의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창의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키는 대로 명령에 순종하고 시키면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태도입니다."
테일러는 표준화와 관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1911년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 『과학적 관리의 원칙』에 정리했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경영 부문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12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됐다. 이 책의 출간 직후 과학적 관리법, 즉 흔히 불리는 명칭대로 '테일러주의'가 전 세계 산업계를 휩쓸었다.
기업 소유주들은 기업 구조의 재편성에 나서서 부서와 하위 부서를 만들어 각 부서마다 테일러주의적 관리자를 수장으로 두며 조직도를 새로운 초점으로 삼았다. 또한 인사부와 인사개발부를 설치해 직원의 발굴 · 채용 · 직무 배치 업무를 맡겼다. 테일러주의의 영향으로 기획실, 능률성 향상 전문가, 산업 조직 심리학, 시간연구 공학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제 사고와 기획 업무가 현장 업무와 별개로서 분명하게 분리됨에 따라 기업들은 그런 사고와 기획 업무 수행의 최선책을 알려줄만한 전문가를 찾고자 하는 갈망에 목말라했다. 이런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 경영 컨설팅업이 탄생했고 프레더릭 테일러는 세계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가 됐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퉈 그의 견해를 들으려고 몰려들자 테일러는 종종 조언의 수수료로 현대 가치 250만 달러에 상당하는 금액을 요구하기도 했다.
관리자들은 케틀레와 골턴의 과학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근로자 각자를 스프레드시트의 셀처럼, 일람표의 숫자처럼, 교체 가능한 평균적 인간처럼 다뤄도 된다고 여겼다.
초기 교육 개혁가들이 치중한 것은 새로운 학교 시스템에서 맡아야 할 임무의 문제였다. 당시에 인도주의적 관점을 지닌 일단의 교육가들은 교육이란 모름지기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학습하고 기량을 키울 환경을 마련해줌으로써 자신만의 재능과 관심사를 발견할 자유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인도주의자들은 심지어 필수과목을 없애고 학생들에게 색다른 과목들을 다양하게 마련해줘야 한다는 제안까지 냈다. 하지만 막상 전국적 규모의 의무 고등학교 시스템을 수립하게 됐을 때 이 인도주의적 모델은 달라도 한참 다른 교육 비전, 즉 테일러주의적 비전에 밀려 무시되고 말았다.
이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싸움의 한쪽에 서있던 인도주의자들은 북동부 지역 대학에서 안락하고 배타적으로 활동하던 트위드 재킷 차림의 점잖은 학자들이었다. 반면 이들이 맞선 상대는 표준화와 위계적 관리의 중요성에 치중하는 실용적인 산업자본가들과 야심 찬 심리학자들이 뭉친 폭넓은 연대 세력이었다. 이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은 교육적 자결권 같은 인도주의적 이상은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공립학교가 한 교실에 100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있는데다 그중 절반은 영어도 못하고 또 상당수는 빈곤 가정 출신인 여건에서 교육가들로선 어린 학생들에게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자유를 부여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요지의 지적이었다.
이들 교육적 테일러주의자들이 내세운 교육의 새로운 임무는 많은 학생들이 테일러화된 새로운 경제에 나가 활동할 만한 적성을 갖춰주는 일이었다. 이들은 평균적 근로자들로 이뤄진 시스템이 천재들로 이뤄진 시스템보다 효율적이라는 테일러식 원칙에 따르면서, 학교는 특출난 재능을 길러주려 애쓸 것이 아니라 평균적 학생을 위한 표준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한 예가 존 D,록펠러가 지금을 대주어 설립된 이른바 일반교육위원회로서 다음은 이 위원회가 1912년에 테일러주의식의 자체적 학교 비전을 담아 발표한 논평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나 이들의 자녀들을 철학자다 학자나 과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우리는 작가, 연설자, 시인, 문인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 화가, 음악가가 될 만한 인재를 발굴하려는 것도 아니다. (중략) 이미 차고도 넘치는 변호사, 의사, 목사, 정치인을 키우려는 것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내세우는 과업은 아주 단순 명료할 뿐만 아니라 아주 훌륭하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모아 작은 공동체를 꾸려서 그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가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일들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한다.
학생들을 (성적이나 관심사나 적성별이 아닌) 나이별로 나눠놓고 그렇게 분리된 그룹별로 교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표준화된 시간 동안 수업을 받게 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이 미래의 직장생활에 정신적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차원에서 공장의 종을 흉내 낸 학교 종을 도입하기도 했다.
테일러주의적 교육 개혁가들은 교육에 새로운 전문 역할을 도입하기도 했다. 바로 커리큘럼 기획자였다. 과학적 관리를 모델로 삼은 이 커리큘럼 기획자들의 역할은 학생들의 지도 내용 및 방법, 교과서의 필수 주제, 학생들의 성적 채점 방식 등 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과정에 대해 낱낱이 정하는 고정불변적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었다. 표준화가 전국의 학교로 퍼져 나감에 따라 교육위원회들은 발 빠르게 테일러주의식 관리 구조를 본뜬 상의하달식 위계 관리를 채택해 교장, 교육감, 교육구 교육감 들에게 실무 기획의 역할을 맡겼다.
1920년에 이르렀을 무렵 미국의 대다수 학교들은 테일러주의의 교육 비전에 따라 조직돼 있었다. 각각의 학생을 평균적 학생으로 다루며 학생들 저마다의 배경, 자질, 관심사는 무시한 채로 모든 학생에게 표준화된 동일 교육을 시킨다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손다이크는 학교의 테일러주의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모름지기 학교란 어린 학생들을 각자의 재능에 따라 구분해 저마다에게 맞는 삶의 지위를, 즉 관리자형일지 근로자형일지, 탁월한 리더형일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지를 효율적으로 정해 그에 따라 교육 자원을 제대로 배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손다이크의 교육관이었다. 또한 "평등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를 좌우명을 삼으며 우등생을 가려내 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붓는 것이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손다이크는 프랜시스 골턴의 개념을 열렬히 옹호하며 그를 "아주 공정하고 과학적인 인물"이라고 떠받들었다. 골턴의 계층 개념은 물론, 한 가지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른 대부분의 일에도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에도 공감을 했다. 골턴의 이런 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 학습이론을 꺼내놓기도 했다. 말하자면 학습 속도가 빠른 뇌를 타고난 사람들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학교에서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반면, 둔한 머리를 타고난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은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못하고 평생 고생할 팔자라는 이론이었다.
손다이크는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진학해 그 월등한 재능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 쓰이도록 학교가 길을 내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평균 언저리에 맴돌 것으로 추정되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경우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아니면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이라도 당장 산업 경제의 테일러주의 근로자로서의 역할을 맡도록 일터로 진출시키는 편이 낫다고 봤다. 학습이 더딘 학생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신속히 자원 투입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다이크는 자신이 바라는 학생 등급화 시스템을 세우는 데 일조하기 위해 쓰기, 철자 능력, 산술, 영어 이해력, 그리기, 읽기 등의 표준화 시험을 마련했고 이 시험들은 이내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급속도로 채택됐다. 손다이크는 이쯤에서 그치지 않고 사립 학교들과 명문 대학들의 입학시험을 기획했는가 하면 심지어 법대 입학시험까지 짰다. 손다이크의 이런 구상에 따라 영재, 우등생, 특수교육 대상 학생, 교육 진로(특정 과목 및 커리큘럼에 따라 학생들을 학업 능력별로 나눈 것. 처음엔 학업 성취도가 비슷한 학생들끼리 배우게 되나, 시간이 지나면서 학습 속도에 따라 차이가 벌어진다)등의 개념이 탄생했다. 손다이크는 성적을 학생들의 전반적 재능을 등급화하기 위한 편리한 척도로 활용하는 것에 지지 입장을 취하면서 대학은 GPA 상위층과 표준화 시험 점수 상위층에 드는 학생들을 선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성적 상위층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직업을 택하든 그 직업에서 성공할 가능성 또한 가장 높기 때문이라는 (골턴의 계층 개념에 따른) 신념에 의거한 믿음이었다.
교육 역사상 가장 영향력 높은 인물에 들었던 사람이 교육은 학생의 실력을 변화시키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으며 따라서 우월한 두뇌를 타고난 학생들과 열등한 두뇌를 타고난 학생들을 구분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한정돼 있다고 믿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오늘날 손다이크의 등급 중심적 교육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서 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그 벽 안에 꼼짝없이 가둬놓고 있다. 교사들은 매 학년 말에 행정관들에게 평가를 받고 그 결과 등급에 따라 승진, 벌칙, 재직 자격이 좌우된다. 학교들과 대학들 자체도 주간지처럼 재학생들의 평균 시험 성적과 GPA에 큰 무게를 부여하며, 여러 출판물에서 등급을 매기고 그런 등급이 대입 지망생들이 지원 대학을 정할 때 참고 기준이 된다. 기업들은 직원 채용 결정에서 지원자의 출신 학교 성적과 등급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때로는 이런 기업들 자체도 직원들 중에 고급 학위 소지자와 명문대 졸업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전세계 국가의 교육 시스템도 PISA(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시험 같은 국제적 표준화 시험에서의 국가별 성적을 기준으로 순위가 매겨진다.
현재의 21세기 교육 시스템은 손다이크가 의도했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평균적 학생에 맞춰 설계된 표준화 교육 커리큘럼상의 수행력에 따라 분류돼 평균을 넘어서는 학생들에게는 상과 기회가 베풀어지고 뒤처지는 학생들에게는 제약과 멸시가 가해진다.
21세기에 접어든 뒤 두 번째 10년을 맡고 있는 지금도 우리들 각자는 평균에 얼마나 근접한가에 따라, 또는 평균을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따라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터의 테일러주의화와 학교의 표준화 및 등급화 시행이 무슨 실패작이라도 된다는 주제넘은 주장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실패작도 아니다. 사회가 평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업들은 번창을 누렸고 소비자들은 보다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게 됐다. 테일러주의는 사회 전반적으로 임금을 인상시켰으며 어쩌면 지난 20세기의 그 어떤 경제 발전기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대학 지원자들과 구직자들이 평균화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족벌주의와 연고주의가 줄어든 한편 불리한 배경 출신의 학생들에게 전례 없는 수준의 출세 기회가 부여됐다. 사회의 자원 배분을 우등생에게 집중시키고 열등생에게는 배제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믿었던 손다이크의 엘리트주의 신념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그는 부와 상속된 특권이 학생의 기회를 결정짓는 요소가 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도 지니고 있었다(반면에 그는 지적 능력의 차이가 민족성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봤다). 손다이크는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을 미국인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한편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진 미국인의 수를 6퍼센트에서 81퍼센트로 껑충 뒤어오르도록 이끈 학업 환경을 확립하는 데도 일조했다. 전반적으로 보면 미국 사회 전역에서의 보편적 평균주의 시스템 시행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부유한 민주주의의 수립에 기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됐다.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가 그러했듯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영재들이 영재로 불리는 이유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똑같은 표준화 시험을 치르지만 더 뛰어난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위권의 입사 지원자들이 심사에서 호감을 얻는 이유는 다른 모든 지원자들과 똑같은 종류의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더 뛰어나서다. 우리는 개개인성의 존엄을 상실했다. 우리의 독자성은 성공에 이르는 길에 놓인 점이거나 장애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한눈팔기쯤으로 전락해버렸다.
기업, 학교 정치인 들 모두가 하나같이 개개인성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현실은 누가 봐도 모든 것이 당신보다 시스템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는 상황이다. 회사의 사원들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취급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일한다. 학생들은 꿈을 절대 이루지 못할 듯한 불안감을 안겨주는 시험 결과나 성적을 받아 든다. 우리는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성공에 이르는 바른길은 한 가지뿐이라는 식의 말을 듣는다. 대안적 진로를 따르면 길을 잘못 디뎠다거나 순진하다거나 그냥 틀렸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뛰어난 역량 발휘가 시스템의 순응보다 우선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개개인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인위적 기준에 순응할 필요 없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배우고 발전하고 기회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바란다. 이런 바람을 품게 되면 이 책의 동기이기도 한 아주 값진 의문이 절로 일게 마련이다. 개개인이 오로지 평균을 참고해야만 평가될 수 있다는 신념에 입각해 있는 시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개개인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만한 조건을 구축할 수 있을까?
몰레나는 평균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개개인성을 무시한 채로 개개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모순된 가정에서 기인함을 깨닫고, 이 오류에 '에르고딕 스위치ergodic switch'라는 명칭을 붙였다.
1800년대 말, 물리학자들은 한창 기체의 작용을 연구 중이었다. 당시에 물리학자들은 깡통 안에 담긴 기체의 용적, 압력, 온도 같은 기체 분자의 종합적 특성은 측정할 수 있었으나 개별적 기체 분자의 모양이나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그룹 기체 분자의 평균적 작동 방식을 활용해 개별 기체 분자의 평균적 작동 방식을 예측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일명 에르고딕 이론이라는 일련의 수학 원칙, 즉 그룹에 대한 정보를 활용해 그룹 개개인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때 명기하는 바로 그 원칙을 연구했다.
에르고딕 이론은 아주 간단하다. 에르고딕 이론에 따르면 그룹 평균을 활용해 개개인에 대해 예측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거려면 먼저 다음의 2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 번째, 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할 것. 두 번째, 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미래에도 여전히 동일할 것. 특정의 독자적 그룹이 이 2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그 그룹은 '에르고딕'으로 인정되면서, 그룹의 평균적 행동을 활용해 개개인에 대한 예측을 이끌어내도 무방하다고 간주된다. 19세기 물리학자들에게는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기체 분자의 대다수는 그 명백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에르고딕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굳이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 역시 에르고딕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몰레나도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룹 평균을 활용해 개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인간이 모두 동일하고 변하지 않는 냉동 클론(복제 생물)이어야만 유효한 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냉동 클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급화와 유형화 같은 기본적인 평균주의 방식의 대부분조차 인간이 냉동 클론이라는 식의 가정을 취했다. 바로 이를 이유로 들어 몰레나는 이런 가정을 에르고딕 스위치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에르고딕 스위치라는 것은 일종의 지적 '유인술'로 생각하면 된다. 말하자면 과학자, 교육가, 기업 리더, 채용 관리자, 의사가 평균주의의 유혹에 속아 개개인을 평균과 비교함으로써 개개인에 대해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내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정작 실제로는 개개인에 대해 중요한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에르고딕 스위치의 실제적 결과를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다. 지금 당신이 키보드에 입력하는 속도에 변화를 주면서 오타의 수를 줄이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라. 이 문제를 평균주의식으로 접근할 경우 여러 사람의 타이핑 실력을 측정한 뒤에 평균 타이핑 속도와 평균 오타 수를 비교하면 된다. 그러면 평균적으로 타이핑 속도가 더 빠를수록 오타 수가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에르고딕 스위치가 등장할 순서다. 쉽게 말해, 이때 평균주의자는 당신이 타이핑의 오타 수를 줄이고 싶다면 타이핑을 더 빠르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짓기 마련이다. 실제로 타이핑 속도가 빠른 사람들은 대체로 타이핑 실력이 뛰어난 편이며 따라서 그만큼 오타 수가 적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룹 차원'에서의 결과다. 개개인의 차원에서 속도와 오타 사이의 상관관계를 모형화해보면, 이를테면 당신의 각각의 속도별 오타 수를 측정해보면 타이핑을 더 빨리 할수록 오타가 더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에르고딕 스위치를 작동하면, 다시 말해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그룹에 대한 정보로 대체하면 제대로 틀린 답을 얻게 된다.
개개인성 성명을 발표한 직후 몰레나는 한 대학에서 그에 관한 자세한 강연을 펼치며 평균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각성의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한 심리학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의견을 밝혔다. "지금 혼란 상태로 들어가자는 얘깁니까!" 아마도 이것이 몰레나가 평균주의의 모순적 핵심 오류를 소개할 때마다 정신측정학자들과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견해일 것이다. 그 누구도 몰레나의 수학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몰레나의 수학 논리를 납득하면서 몰레나의 결론이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이들조차도 여전히 똑같은 우려를 표했다. '평가와 모형화와 개개인 선별에서 평균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런 일을 수행한단 말인가?
이런 식의 실용상의 반박은 평균주의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력을 이어오며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온 이유는 물론이고, 그동안 기업, 대학, 정부, 군대에서 평균주의를 그토록 적극적으로 수용해온 이유를 잘 드러내준다. 즉 평균주의가 이용 가능한 다른 그 어떤 수단보다도 효과적이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유형, 등급, 평균 중심의 기준은 아주 편리하다. 예를 들어 '저 여자는 평균보다 똑똑해.', '저 남자는 졸업반 때 반에서 2등을 했어. 또는 '저 여자애는 내성적이야.' 같은 식으로 말하면 편하다. 말이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수학 논리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맞는 얘기 같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평균주의가 산업 시대에 딱 들어맞는 철학이기도 했다. 산업 시대는 기업이나 학교의 관리자들이 수많은 사람을 가려내서 표준화하고 등급화한 시스템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시키는 데 효율적인 방법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으니 그럴 만하다. 평균은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안정적이고 투명하고 능률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며, 대학 행정관들과 기업 인사 관리자들은 그냥 말뿐이더라도 학생들과 직원들의 등급화와 연관된 나름의 문제들을 얘기하긴 했으나 개개인을 평균에 비교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게 될 일은 없었다.
몰레나는 자신의 개개인성 성명에 대한 동료들의 견해를 들은 뒤 평균을 활용할 수 없다면 무엇을 활용해야 하느냐는 그 의문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기면서 다소 복잡한 수학적 증거를 통해 평균주의가 틀렸다고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정말로 평균의 독재를 완전히 타도하고 싶다면 평균주의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개개인의 이해에서 등급화나 유형화보다 더 적절한 결과를 얻게 해주는 실질적 방법이 필요하다고.
평균의 시대를 특징짓는 2가지 가정은 무엇인가?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케틀레의 신념과 한 가지 일에 탁월한 사람은 대다수의 일에서 탁월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골턴의 신념이다. 그러면 이번엔 개개인의 과학이 내세우는 주된 가정은 뭘까? 개개인성이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즉 개개인은 오류가 아니며 개개인을 (재능, 지능, 인성, 성격 같은) 가장 중시되는 인간 자질에 따라 단 하나의 점수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평균주의자들이 활용하는 수학 이론은 이른바 스터티스틱스statistics('통계학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로 통한다. 정적인 값static value, 즉 불변의 정적이고 고정된 값의 수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레나와 동료 연구원들은 개개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역동적 시스템dynamic system이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수학, 다시 말해 가변적이고 비선형적이며 역동적인 값의 수학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균주의의 주된 연구 방법은 종합 후 분석이다. 먼저 여러 사람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뒤 그 그룹의 패턴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이 그룹 패턴(평균이나 그 밖의 통계치)을 활용해 개개인을 분석하고 모형화한다. 반면 개개인의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분석 후 종합을 유도한다. 먼저 각 개개인의 패턴을 살펴본 다음 이런 개개인별 패턴을 취합해 종합적 통찰을 얻어낼 방법을 찾는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유아 발달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일명 보행 반사라는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붙잡고 씨름했다. 보행 반사란 갓난아이를 안아서 똑바로 일으켜 세워주면 아이가 마치 걷는 것처럼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작을 가리킨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이 보행 반사를 놓고 인간에게 선천적인 보행 본능이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보행 반사는 아주 알다가도 모르겠는 수수께끼였다. 아이가 생후 2개월쯤 되면 이 반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좀 크면 안아서 일으켜 세워줘도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그러다 걸음마를 떼기 직전쯤 되면 보행 반사가 마술처럼 스르륵 다시 나타난다. 대체 이런 보행 반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또다시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초반엔 이 보행 반사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전통적인 평균주의 방식, 즉 종합 후 분석 방식을 활용했다. 모든 과학자가 보행 반사를 신경 발달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유아들을 살펴보며 보행 반응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평균 연령을 계산한 다음 이 평균 연령을 신경 발달상 여러 지표의 평균 연령과 비교했다. 그 결과 한 가지 신경 발달 과정이 보행 반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미엘린 형성, 즉 뉴런이 (신경섬유를 보호하는 덮개 역할을 하는) 미엘린 수초를 형성하는 생리적 과정이었다. 이를 근거로 과학자들은 '미엘린 형성론'을 제시했다. 모든 아기는 선천적으로 보행 반사를 타고나지만 뇌의 운동 제어 센터가 미엘린 형성을 개시하면 이 반사 반응이 사라지며, 그러다 뇌의 운동 제어 센터가 더 발전하면 다시 그 반응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1960년대 초에 이르면서 미엘린 형성론은 보행 반사에 대한 의학계의 표준적 해명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신경 장애 진단의 기초가 되기까지 했다. 내과나 신경과 의사들은 아기의 보행 반사가 제때에 사라지지 않으면 아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신경 장애가 있을지 모른다고 부모에게 주의를 줬다. 심지어 소아과 의사와 아동심리학자 대다수는 부모가 나서서 아이에게 보행 반사를 분발시켜주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그럴 경우 정상적 발달을 지체시키고 신경과 근육에 이상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별나고 비실제적인 미엘린 형성론은 수십 년 동안 미국 소아학계를 지배했고 에스터 텔렌이라는 젊은 과학자다 없었다면 21세기까지도 그 지배력을 이어갔을지 모른다. 그녀는 과학자로서 발을 막 내디뎠던 무렵 동물을 연구하던 중에 생물학자들이 고정불변이라고 주장해온 여러 가지 본능적 행동이 사실은 대체로 개개 동물의 독특한 기벽에 따라 아주 가변적임을 밝혀냈다. 텔렌은 이런 발달 분야의 연구를 계기로 역동적 시스템의 수리를 공부하다가 마침내 각 아동의 개개인성에 초점을 맞춰 보행 반사를 재검토해보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텔렌은 2년에 걸쳐 40명의 갓난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매일 매일 각 아기들의 사진을 찍어 개인별 신체 발달을 검토했다. 아기들을 러닝머신 위에서 여러 가지 자세를 잡아주며 각 아기들의 개인별 동작 반식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와 분석에 따라 마침내 보행 반사가 사라지는 이유를 설명할 만한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포동포동한 허벅다리 때문이라는 가설이었다.
텔렌의 조사 결과 갓난아이들 가운데 체중 증가가 유독 더딘 아기들은 조사 기간 중의 대다수 시기 동안,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다리를 움직이는 경향을 보였다. 또 체중 증가가 유독 빠른 아기들은 가장 빨리 보행 반사가 사라지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는 단지 다리 근육이 다리를 들어 올릴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의 주된 요소는 허벅다리릐 통통함 자체가 아니었다. 근력 대비 체지방 비율이 중요했기 때문에 신체 성장의 속도가 관건이었다. 그 이전까지 단지 평균 연령과 평균 체중을 비교했던 과학자들이 이렇다 할 결과를 밝혀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종합 후 분석 접근법은 아이들 각각의 발달 패턴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렸지만 텔렌의 분석 후 종합 접근법은 그런 패턴을 잘 드러내줬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행 반사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서 포동포동한 허벅다리가 첫선을 보였을 때 대다수 연구가들은 단박에 일축했다. 하지만 텔렌은 일련의 기발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포동포동 허벅다리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입증해냈다. 그중 한 실험은 아기들의 몸을 물에 담그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서 텔렌이 아기들의 몸을 물속에 담그자 보행 반사가 다시 나타났다. 가장 포동포동한 허벅다리를 가진 아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텔렌은 아기들의 다리에 무게가 각각 다른 추를 매달아 어떤 아기들이 보행 반사를 잃게 될지 알아맞히기도 했다.
에스터 텔렌이 각 아기들의 개개인성을 연구하면서 얻어낸 이러한 설명은 평균주의 연구가들이 수 세대에 걸쳐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들은 관심을 가져야 할 진짜 이유가 아기의 통통한 허벅다리인데도 부모들에게 아기의 뇌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알려줬을 뿐이다.
길버트 대니얼스가 조종석을 평균적인 조종사가 아닌 모든 조종사에게 맞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제안을 처음 꺼냈을 당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는 과거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회사들이 조종석의 유연성을 제품 홍보의 중요 포인트로 삼고 있다.
평균주의는 우리의 사고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제한된 패턴에 따르도록 유도한다. 게다가 그런 패턴에 따른 견해가 너무 자명하고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제한된 패턴을 대체로 의식하지도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수많은 평균에 비교해 평가하도록 조장하며, 아니 강요하며 우리에게 그 정당성을 끝도 없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직업적 성공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급여를 평균 급여와 비교해야 한다. 학업 성과를 판단하기 위해 자신의 GPA를 평균 GPA와 비교해야 한다. 결혼이 늦은 편인지 이른 편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자신이 결혼한 나이를 평균 결혼 연령과 비교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평균주의식 사고에서 자유로워지면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차츰 직관적인 일이 됐다가, 더 지나면 당연한 일로 굳어질 것이다.
구글은 초반까지만 해도 채용 결정 방식이 포춘 선정 500대 기업 대다수와 똑같았다. 각 입사 지원자의 SAT(대학 수능 시험) 점수, 학교 GPA, 학위를 검토한 뒤 그중 최상위층에 드는 지원자들은 채용했다. 얼마 뒤 구글 마운틴뷰 본사는 만점에 가까운 SAT 성적, 수석 졸업,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스탠퍼드대학교,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하버드대학교 등의 명문대 출신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직원들로 넘쳐났다.
소수 몇 개의 기준이나 심지어 단 하나의 기준에 따른 개개인의 등급화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만 흔히 쓰이느 관행이 아니다. 기존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다. 2012년에 세계 최대 컨설팅 전문 기업 딜로이트는 6만 명이 넘는 자사 직원 전원을 대상으로 근무 실적에 따른 점수를 매기고 나서 그해 말에 '협의 회의'를 열어 그 점수들을 가지고 1~5까지의 등급을 정하는 것으로 최종 평가를 내렸다. 다시 말해, 각 직원을 단 하나의 숫자로 평가했다는 얘기다.
개개인의 재능이나 실적을 단 하나의 단계나 단 몇 가지 단계에 따라 등급 매기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2015년에 구글, 딜로이트, 마이크로소프트 모두 자사의 등급 중심 채용·평가 시스템을 수정하거나 폐기했다.
구글은 성장과 수익성을 꾸준히 지켜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중반에 인재 선발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감지했다. 고용 결과가 경영진이 생각했던 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빈발했다. 회사 내 신입 사원 채용 담당자들과 경영자들 사이에서 성적, 등급, 졸업장같이 대다수 기업에서 흔히 활용하는 기준으로는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재능을 가진 수많은 지원자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됐다. 실제로 구글의 품질관리 부서 인사 담당자 토드 칼라일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하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논친 인재'를 분석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자금을 쏟기 시작했죠."
딜로이트에서도 2014년에 이르면서 단 하나의 점수로 직원을 평가하는 방식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싿. 당시에 딜로이트는 직원의 업무 성과 등급을 계산하는 일에 매년 200만 시간 이상을 할애했다. 이렇게 막대한 시간을 쏟아부으면서도 등급 매기기의 가치에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예전에 딜로이트에서 간부 계발 부서 책임자로 일했던 애슐리 구달은 마커스 버킹엄과 함께 쓰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에 실은 한 기사에서 단 하나의 점수로 등급을 매기는 방식이 직원의 진짜 업무 성과보다는 그 업무 성과를 등급 매기는 사람 특유의 경향을 더 많이 드러낼 수도 있다는 조사 결과를 계기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전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스택 랭킹이 완전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2012년에 배너티 페어는 한 기사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스택 랭킹에 의존했던 그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명명했다. 그런 식의 업무 성과 등급 매기기 시스템은 직원들에게 등급 경쟁을 시키고 직원들 사이의 협력 의지를 꺾어놓았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직원들이 자신의 등급이 더 깎일까 봐 업무 성과 상위권자들과는 일하길 꺼리게 됐다는 점이다. 이 기사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스택 랭킹의 시행으로 사실상 "회사가 비대하고 요식적인 집단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혁신적 아이디어를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며 억압해버리는 관리자들에게 도리어 보상을 내리는 식의 의도치 않은 사내 문화가 형성됐다." 2013년 말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돌연 스택 랭킹을 폐지해버렸다. 그렇다면 구글, 딜로이트, 마이크로소프트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일차원적 사고방식이 그 답이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개개인성의 첫 번째 원칙인 들쭉날쭉의 원칙이 잘 설명해준다.
들쭉날쭉의 원칙
우리 인간의 머리는 천성적 경향에 따라 체격, 지능, 성격, 재능 등 인간의 복잡한 특성을 일차원적 단위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체격에 대해 평가해보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한 개개인을 체격이 큰지, 작은지, 아니면 보통인지로 따진다. 어떤 남자가 체격이 크다는 얘기를 들으면 팔과 다리가 굵직하고 덩치 큰 사람을 떠올린다. 몸 전체가 다 크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여러 방면에서 두루두루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데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평균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사회 시스템, 그중에서도 특히 기업과 학교들은 성적, IQ, 급여 같은 단순한 단위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비교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우리 머리의 천성적인 일차원적 사고 경향을 더욱 부추겨놓았다.
하지만 일차원적 사고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개개인의 그 어떤 특성에 적용해보더라도 엉터리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 체격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위의 사진에는 9가지 항목에 대한 두 남자의 신체 치수가 함께 실려 있다. 참고로, 이 항목들은 길버트 대니얼스가 조종사들과 관련된 획기적 연구에서 분석했던 바로 그 9가지 항목이기도 하다.
키
체중
어깨너비
팔 길이
가슴둘레
몸통 둘레
허리둘레
엉덩이둘레
다리 길이
어느 쪽 남자의 체격이 더 클까? 언뜻 보면 답이 뻔한 것 같지만 두 남자를 각 항목별로 비교해보면 예상외로 답하기가 애매해진다. 오른쪽 남성은 키가 크지만 어깨너비가 좁다. 왼쪽 남성은 허리둘레가 비대하지만 엉덩이 둘레는 평균 치수에 가깝다. 그냥 간단하게 남성별로 신체 치수의 9개 전체 항목을 평균 낸 뒤 어느 쪽 남성의 체격이 더 큰지 정할 수도 있다. 단, 그럴 경우 각 남성의 평균 치수가 거의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게다가 두 남성이 체격이 똑같다고 말하거나, 둘 중 한쪽을 평균이라고 평가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오판인 셈이다. 따져보면 왼쪽 남성은 2가지 항목(팔 길이와 가슴둘레)에서 평균이며 오른쪽 남성은 딱 1가지 항목(허리둘레)에서 평균에 겨우 걸친다. 결국 '어느 쪽 남성의 체격이 더 클까?'라는 질문은 간단히 대답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위와 같은 식의 질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질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자 개개인을 체격에 따라 등급 매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인간과 관련된 중요한 진실이자 개개인성의 첫 번째 원칙인 들쭉날쭉의 원칙이 부각된다. 이 원칙에서는 일차원적 사고를 통해서는 복잡한 데다 '균일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관점을 취한다. 그렇다면 들쭉날쭉하다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다음의 2가지 기준에 부합돼야 한다. 첫 번째, 반드시 다차원으로 이뤄져 있을 것. 두 번째, 반드시 이 여러 차원들 사이에 관련성이 낮을 것. 들쭉날쭉성은 단지 인간의 체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재능, 지능, 성격, 창의성 등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인간의 거의 모든 특성이 들쭉날쭉하다.
이 2가지 기준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인간의 체격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쪽 남성이 키가 더 큰가?' 이런 질문에는 답을 하기가 쉽다. 키는 일차원적이므로 키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인간의 체격 치수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서로 별 연관성이 없는 여러 가지 다른 차원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앞의 도표를 보자. 이 사진의 가운데에 보이는 세로띠는 대니얼스가 한때 규정했던 말 그대로 '평균 조종사'의 치수대에 해당한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공군에서 대다수 조종사의 체격이 이 세로띠 범위에 들 것이라고 여겼던 이유는 평균 치수의 팔을 가진 사람은 다리와 몸통도 평균 치수일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격 치수는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가정이다. 실제로 대니얼스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9가지 항목 중 4가지 이상에서 평균 치수에 해당하는 조종사는 2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고 전체 항목 모두에서 평균에 드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평균대를 넓혀 각 항목의 중간 30퍼센트가 아닌 중간 90퍼센트를 포함시킨다면 어떨까? 얼핏 생각하면 대다수 사람들의 체격이 이만큼이나 넓은 평균대에 들어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체 중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의 대다수가 다소 비대한 편이거나 다소 왜소한 편인 신체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평균에 맞춰 설계된 조종석은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게 설계된 조종석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타협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체격 치수가 일차원적인 것처럼 속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를테면 의류의 대량 생산처럼 누구에게든 기막히게 맞지는 않는 대가로 저렴하게 생산된 셔츠나 바지를 누구나 사 입을 수 있는 경우라면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크다면, 예를 들어 고가의 웨딩드레스를 수선하거나 자동차 에어백 같은 안전장치를 설계하거나 제트기 조종석을 설계하는 등의 경우라면 체격 치수의 다차원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타협이 아니다. 잘 맞추려면 지름길이란 없다. 전반적으로 모든 치수가 잘 맞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중요한 특성은 거의 모두가 다차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재능이 특히 더 그렇다. 문제는 재능을 평가하려 할 때 흔히 평균에 의존하는 바람에 들쭉날쭉한 재능을 표준화된 시험상의 점수나 등급, 업무 실적 순위 같은 단 하나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경향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차원적 사고에 굴복하다간 결국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미국 프로 농구 NBA의 뉴옥 닉스 팀을 예로 살펴보자.
왕년의 NBA 스타 아이제이아 토머스는 2003년에 닉스의 감독을 맡으며 세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닉스를 더욱 보강할 방법에 대한 나름의 확실한 비전을 세웠다. 토머스는 선수들을 평가할 때 일차원적 원칙에 따라 농구 재능일 가늠했다. 즉, 경기당 평균 득점수만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평가했다.
토머스의 판단은 이랬다. 농구에서의 팀 성적은 상대 팀보다 높은 점수를 올리느냐 마느냐에 따라 좌우되니 선수들을 가장 높은 득점 평균의 조합으로 구성하면 평균적으로 승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가장 높은 득점에 목을 매는 것은 토머스만의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선수별 득점 평균은 연봉, 시즌 결산 수상자 선정, 경기 출전 시간을 결정할 때 대체로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다. 하지만 토머스는 팀 구성 선수 전원의 선정에서 이 기준 하나만을 최우선 요소로 삼았고 닉스는 토머스의 이런 우선순위를 실현해줄만큼 자금력이 탄탄했다. 사실상 닉스의 팀 구성은 기업들이 학력을 직원 채용의 주된 기준으로 삼는 방식과 다를 게 없는 일차원적 접근법을 활용한 것이었다.
닉스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NBA에서 최강의 득점 평균을 이룬 팀을 구성해냈다. 그리고 그 뒤에 4시즌 내리 고전을 면치 못하며 패전률이 66퍼센트에 이르렀다. 일차원적으로 조직된 닉스의 이 팀은 성적이 어찌나 형편없었는지 같은 기간 동안의 성적이 겨우 두 팀을 앞서며 하위권에서 맴돌 정도였다. 팀이 이처럼 형편없는 성적을 내게 된 원인은 들쭉날쭉성의 원칙으로 들여다보면 쉽게 설명이 된다. 농구 재능이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농구 성적과 관련해서 이뤄진 한 수학적 분석에 따르면 경기의 결과에 확실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최소한 5가지 차원으로, 득점, 리바운드, 공 가로채기, 어시스트, 블로킹이다. 그리고 이 5가지 차원의 실력은 대체로 서로 별 연관성이 없다. 예를 들어 공 가로채기에 뛰어난 선수는 대개 블로킹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구글, 딜로이트,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랬듯 닉스도 결국엔 깨닫게 됐다. 재능의 평가에서 일차원적 방식을 취해서는 원하는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는 얘기다.
하지만 치수나 재능 같은 인간의 특성이 들쭉날쭉한 것으로 인정되려면 다차원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각 차원이 비교적 독립적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독립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희박한 연관성이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 치수는 얘기가 다르다. 1972년에 미 해군에서는 대니얼스의 조종사 관련 연구에 따른 후속 조치로 해군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와 관련된 총 96가지 차원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검토해봤다.
검토 결과, 그 상호 연관성의 정도가 0.7 이상은 몇몇 가지에 그쳤고 대다수가 0.1 이하였다. 해군 조종사 신체 치수의 총 96가지 차원의 평균적 상호 연관성은 0.43에 불과했다. 이는 누군가의 키나 목둘레나 주먹 너비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나머지 차원의 치수를 얼추 가늠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미다. 한 사람의 신체 치수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랄 경우라면 집약적으로 간단히 파악해낼 방법은 없다. 들쭉날쭉한 측면의 세세한 면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지능은 어떨까? 지적 능력은 들쭉날쭉하지 않을까?
커텔은 컬럼비아대학교의 신입생 수백 명을 대상으로 수년에 걸쳐 일련의 신체 및 지능 검사를 실시하며 소리에 대한 반응시간, 색깔 이름 대기 능력, 10초 내의 판단력, 연속으로 기억해낼 수 있는 글자 수 등을 살펴봤다. 이런 여러 능력 사이에 강한 상호 연관성이 발견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시작한 검사였으나 막상 해보니 검사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나왔다. 사실상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지적 능력들은 확실히 들쭉날쭉했다.
등급의 열혈 신봉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보다 낭패스러운 결과는 또 있었다. 커텔이 신입생들의 학부 성적과 이 지능검사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살펴본 결과 둘 사이의 상호 연관성도 아주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여러 과목별 성적들 사이에서마저 상호 연관성이 낮았다.
커텔 이후로 거듭거듭 이어진 연구에서도 개개인의 지능은 들쭉날쭉하며 이는 성격과 기질 역시 마찬가지임이 밝혀졌다. 한 가지 일에 재능이 있으면 대다수 일에 재능이 있다는 식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교육 시스템을 세웠던 장본인인 에드워드 손다이크조차 (생략)
과학자, 의사, 기업가, 교육가 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일차원적 개념의 IQ 점수에 의존해 지능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개념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음악 지능이나 예술 지능이나 운동 지능 등 지능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물론 한 개인의 일종의 '전반적 지능', 즉 한 개인의 아주 여러 영역에 적용시킬 수 있는 그런 지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힘들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어떤 지적 업무를 맡기든 더 똑똑한 사람이 더 잘해낼 것이라고 넘겨짚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음의 도표를 보며 지능의 들쭉날쭉한 측면 2가지를 생각해보자. 이 도표는 웩슬러 성인용 지능검사에 따른 두 여성의 점수를 표시해놓은 것이며 참고로 WAIS는 현대의 지능검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2가지 검사법 중 하나다.
어느 여성이 더 똑똑할까? WAIS에 따르면 두 여성 모두 지능은 IQ 103점으로 똑같다. 그리고 두 여성 모두 IQ 100점으로 규정돼있는 평균 지능에 가깝다. 결국 어떤 일자리에 가장 똑똑한 지원자를 채용하려는 상황이라면 두 여성에게 모두 똑같은 지능을 매길만하다. 하지만 두 여성은 각자 지능의 강점과 약점이 확연히 다르며 따라서 이 여성들의 재능을 판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IQ 점수에 의존할 경우 확실히 오판의 소지가 다분하다.
신체 치수와 마찬가지로 WAIS를 통해 측정된 지능의 각 차원들간에는 싱호 연관성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즉 지적 재능은 들쭉날쭉해서 IQ 점수 같은 일차원적 값으로는 평가하거나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한 사람의 지능을 단 하나의 등급이나 수치로 평가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웬만해선 힘들다. 그러나 지능의 일차원적 평가의 오류는 이 도표상의 지능 단면들을 통해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지금껏 과학자들의 조사에서 드러났듯 지능을 더 세분해서, 이를테면 단어의 단기 기억이나 이미지의 장기 기억을 비교해보면 이런 '미세차원'에서도 상호 연관성이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능을 아무리 미세하게 나눠 살펴봐도 그 들쭉날쭉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 모두를 종합해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능력이 들쭉날쭉하다면 그토록 많은 심리학자, 교육가, 기업 임원이 여전히 일차원적 사고를 통해 재능을 평가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대다수가 평균주의 과학에 길들여져 은연중에 개개인보다 시스템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약한 상호 연관성을 바탕 삼아 편리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도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재능에 대한 일차원적 견해에 따라 직원을 선발할 경우 개개인에 대해 틀린 판단을 내릴 여지가 있긴 해도 평균적으로 따질 때 무작위로 직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더 나을 테니 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납득시켜왔다. 약한 상호 연관성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의미라고.
하지만 상호 연관성을 수학적으로 따질 경우 두 차원 간의 상호 연관성이 0.4로 나오면 각 차원의 행동에 대해 겨우 16퍼센트나 설명된다는 의미다. 어떤 것의 16퍼센트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까? 당신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16퍼센트를 설명해줄 수 있는 수리공이라면 그 수리공에게 선뜻 수리를 맡기겠는가?
물론 개개인보다 시스템의 효율성에 더 주안점을 둔다면 평균적으로 16퍼센트를 이해하는 것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명백히 낫다. 게다가 그 정도면 사람들의 그룹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데는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장기를 가려내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면 약간 얘기가 달라진다.
가장 먼저 칼라일은 무려 300가지 이상의 차원을 목록으로 짜며 여기에 표준화 시험 점수, 학위, GPA 같은 전통적 요소뿐만 아니라 다른 팀장들이 중요하다고 지목한 비교적 특이한 요소들(예를 들어 구글의 한 주요 임원은 컴퓨터에 처음 흥미를 갖게 된 때가 몇 살이었는지도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는 견해를 냈다)까지 두루 포함시켰다. 그다음에는 이 요소들 가운데 사실상 성공적 직원 발굴과 결부된 요소들을 분석해내기 위한 검증을 거듭했다. 그 결과는 놀랍고도 명확했다.
검증 결과 SAT 점수와 출신 학교의 명성은 재능을 미리 예견케해주는 지표가 되지 못했다. 프로그래밍 경진 대회의 우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적은 어느 정도 중요한 예견 지표였으나 그것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그러했다. "하지만 저느 구글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자료를 분석해보니 구글의 대다수 업무 영역에서 단 하나의 변수가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니, 단 하나의 업무 영역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해야 맞겠네요.
입사 지원자들의 학력과 경력을 철저히 무시했다. IGN의 입사 지원자들은 이력서 대신 '열정 소개서'를 제출하면서 4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코딩 능력을 검증받았다. 본질적으로 말해 IGN의 원칙은 이런 식이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당신이 전에 무슨 성과를 냈고, 프로그램을 어떤 식으로 배웠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당신이 능력이 있고 업무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열의에 차 있길 바랄 뿐입니다.
2011년에 104명이 이 코드 푸 프로그램에 지원해 28명이 선발됐는데 그중 절반만이 IT 분야의 학사 학위 소지자였다. 경제지 패스트 컴퍼니의 기사에서 밝혔듯이, IGN 사장 로이 바하트는 코드 푸를 통해 직원을 한두 명쯤 채용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걸었는데 실제로는 이 희망을 넘어서서 최종적으로 8명을 채용하게 됐다. 다음은 바하트가 패스트 컴퍼니에서 그 결과에 대해 밝힌 소감이다. "최종 채용자들의 이력서를 보면 도저히 그 직종에는 적임자가 되지 못하겠다고 말할 만한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지 이력서만 보고 판단한다면····· 꼭 예스라고 말할 만한 점도 없는 이들이죠. 말하자면 그 최종 채용자들은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그런 유형들입니다.
조직에서는 처음 들쭉날쭉성을 받아들이면 흔히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발굴할 방법을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재능을 알아볼 방법을 찾아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들쭉날쭉성의 원칙에서는 다른 관점을 갖는다. 우리가 간과된 재능을 알아본 것이라 해도 그 재능은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재능이라고, 그동안 쭉 있어왔고, 들쭉날쭉한 특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재능이라고. 따라서 진짜 난제는 재능을 구별할 새로운 방법 찾기가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게 시야를 방해하는 일차원적 눈가리개를 제거하는 일이다.
물론 가장 시급하게 제거해야 할 눈가리개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들이대는 눈가리개들이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더니 각 문제를 일종의 시각적 표로 전환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제리와 제니와 줄리의 관계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추론하게 해줬다. 그런 식의 방법은 나에겐 정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처음엔 제대로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지만 실제로 문제를 연달아 풀어봤더니 매번 정답을 맞혔다. 믿기지가 않았다. 2주 뒤 나는 GRE를 봤고 분석적 추론 영역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받았다.
내 GRE 지도 강사가 알아낸 문제 풀이 방법은 그 자신의 들쭉날쭉한 지능에는 잘 맞았으나 나의 들쭉날쭉한 지능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운 좋게도 아버지가 나의 들쭉날쭉성을 더 확실하게 알아봐줬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내 문제를 제대로 파악했다. 나의 문제는 약한 분석력이 아니었다. 모의시험에서 지도 강사의 방법대로 풀며 번번이 쓴맛을 보면서 선택했던 일차원적 관점이 아니라, 나의 가장 취약한 지능, 즉 작업 기억에 의존해 문제를 풀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다 아버지 덕분에 내 강점을 발휘할 만한 전략을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시험문제의 답을 제대로 풀며 내 진정한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당신은 외향형인가, 내향형인가? 언뜻 보기엔 간단한 이 질문은 사실 심리학에서 가장 해묵고 가장 논란 분분한 논쟁거리, 즉 성격의 본질이라는 문제와 결부돼 있다. 이 논쟁의 한쪽 편에는 특성심리학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분야의 심리학자들은 우리 인간의 행동이 내향성이나 외향성 같은 명확한 성격 특성들로 규정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그 과학적 뿌리는 인간의 기질과 성격이 "우리 인간 행동의 항구적 본질이자 영속적 요소"라고 주장한 바 있던 프랜시스 골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또 다른 편에서는 상황심리학자들이 우리 인간의 성격은 개인적 특성보다 환경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문화와 직접적 환경이 우리의 행동 방식을 좌우한다고 믿으면서, 이를테면 폭력 영화가 사람의 공격성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특성심리학자들이 확실한 승자로 올라섰다. 상황심리학자들은 대다수의 사람이 평균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는 있었으나 특정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대다수 사람은 권위자에게 명령을 받으면 잘 모르는 애꿎은 타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게 돼 있다고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신시내티 출신의 메리 스미스가 탤러해시 출신의 아비가일존스보다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은지 아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반면에 특성론자들은 특정 개개인의 행동을 더 잘 예측해냈다. 적어도 평균적으로 따지면 예측률이 더 높았다. 뿐만 아니라 기업에 훨씬 더 유용한 도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바로 성격 유형 검사였다. 오늘날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성 중심의 성격 검사 종류는 연간 2,500종에 이른다. 한 예로, 포춘 선정 100대 기업 가운데 89곳, 대학 수천 곳, 정부 기관 수백 곳은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 검사를 활용해 사람들을 4가지 차원의 성격 평가에 따라 16개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를 일련의 특성에 따라 평가하는 검사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한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그런 특성들을 알면 그 사람의 '진짜' 정체성을 꿰뚫을 수 있다는 우리의 뿌리 깊은 확신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정한지 쌀쌀한지, 게으른지 부지런한지,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의 여부는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 깊숙이 은밀하게 내재돼 있어서 이런 성격 규정이 그 어떤 환경이나 업무에서든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본질주의 사고라고 한다.
본질주의 사고는 유형화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성격 특성을 알면 그 사람을 특정 유형으로 분류해도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누군가가 특정 유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을 결론지을 수 있다고 여긴다. 나는 7학년 때 그런 식의 결론짓기를 겪었다. 영어 수업 중에 종이를 씹어 훅 불어서 맞히는 장난을 벌인 뒤의 일이었. 그 사건으로 (당연히) 나는 상담실로 불리어 갔고 그때가 내 첫 번째 상담실 방문이 아니었던 터라 공격성 척도 질문지를 작성해야 했다. 그 결과 내가 백분위수 70번째쯤에 든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학교에서는 학부모 면담을 요청했고 상담 교사는 부모님과의 면담 자리에서 그 자신의 견해에 따라 내가 '공격 성향 아동'이라고 알리며 증거를 꼬치꼬치 짚어줬다. 종이 씹어 불기, 그해 초에 벌였던 싸움을 비롯해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질문지 결과까지 모조리 말이다.
상담 교사는 공격성이 내 성격의 본질적인 단면이라고, 즉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짓는 특징이라고 믿었고 당연히 그럴 만했을테지만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나에 대해 예측을 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상담 교사는 부모님에게 나의 심리 상담을 권하며 공격 성향이 강한 아동은 대체로 학교생활에 애를 먹으며 대학 진학의 압박에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주의의 말을 했다. 내가 권위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 상담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나중에 직장 생활을 제대로 못 할지 모른다고도 알려줬다. 본질주의 사고에 의존해 사람들을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누군가의 특성을 알면 그 사람이 학교나 직장생활에서, 혹은 심지어 (데이트 사이트들의 표현 그대로) 로맨틱 파트너로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능력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사람들 그룹의 평균적 행동의 예측이 아닌 개개인의 행동 예측에 관한 한 특성은 사실상 별 역할을 못 한다. 사실 공격성과 싸움에 휘말리기, 외향성과 파티 즐기기 등 성격 특성과 행동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0.30을 넘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0.30이라면 얼마나 약한 상호 연관성일까? 상호 연관의 수리로 풀어보면 이 정도의 상호 연관성이라면 성격 특성이 행동의 9퍼센트를 설명해준다는 의미다. 겨우 9퍼센트다! 특성 중심의 성격 평가와 학업 성취도, 직업 성취도, 로맨스 성공 사이의 상호 연관성 역시 낮기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성격과 행동이 몇 개의 특성들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대체 우리의 성격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어쨌든 우리의 행동이 무작위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로지 상황에 따라서만 전적으로 좌우되지도 않는다. 특성론과 그 특성론을 뒷받침해주는 본질주의 사고가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개개인성의 두 번째 원칙인 맥락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워싱턴대학교 교수 유이치 쇼다는 아동 발달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이자 내가 개인적으로 전 심리학계를 통틀어 특히 좋아하는 과학자다. 특성론자들과 상황론자들 사이의 학술 논쟁이 최고조로 치달았던 1980년대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쇼다는 성격 연구에 착수했다. 결국 이 연구로 인해 뜻하지 않게 성격 논쟁의 한복판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됐으나 어느 쪽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일찍부터 두 접근법 모두가 불완전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접근법 모두 개개인의 진정한 복잡성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쇼다는 성격을 다루는 제3의 사고방식도 있다고 여겼다. 특성이나 상황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특성과 상황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관점에서의 또 다른 사고방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고방식이 타협적인 관점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쇼다 자신이 맞는다면 그 해묵은 성격 논쟁의 양쪽 진영 모두가 틀리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쇼다는 이렇게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공들여서 꼼꼼히 살펴봤다. 가장 먼저 각 아동의 개별적 행동을 분석한 다음 공통적인 패턴을 찾아본 결과 논란의 여지 없이 명백한 동시에 본질주의 사고에 직격탄을 날릴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즉 모든 아동이 상황에 따라 여거 가지의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재로선 이런 사실이 그리 놀랍지도 않을뿐더러 대뜸 이렇게 되물을 만한 일이다. "우리가 환경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거야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하지만 잠시 성격의 특성 모델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에서는 우리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주장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을 펴서 내향형이냐 외향형이냐 등의 기질이 상황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주의를 취한다. 특성 중심의 성격 검사에서는 우리 인간은 외향형 아니면 내향형이며······ 둘 다일 수는 없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쇼다가 조사해본 결과 실제로는 모든 아동에게 두 성향이 다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여자아이는 매점에서는 외향적이지만 운동장에서는 내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어떤 남자아이는 운동장에서는 외향적이지만 수학 수업에서는 내향적이기도 했다. 게다가 행동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는 상황만이 아니었다. 두 여자아이를 예로 살펴봤더니 한 아이는 매점에서는 내향적이면서 교실에서는 외향적이기도 한 반면 다른 아이는 매점에서는 외향적이면서 교실에서는 내향적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행동 방식이 개개인과 상황 모두에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한 사람의 '본질적 기질' 따위는 없었다. 물론 어떤 아동은 평균적으로 내향적인 편이거나 외향적인 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는 있었고, 사실 이 부분은 바로 특성심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균에 의존해 판단할 경우 한 사람의 행동에서 중요한 세부 요소들을 모조리 놓치는 셈이었다.
쇼다가 밝혀낸 결론은 특성론의 기본 신조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격을 평균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일단의 그룹에 대한 개괄적 결론을 끌어내려는 학자들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테지만 당신이 해당 직종에 최적임자인 직원을 채용하거나 어떤 학생에게 최대한 도움이 될 만한 상담을 해주려 할 경우라면 미흡하다. 더군다나 당신 자신에 대해 규정하는 경우라면 턱없이 미흡하다. 당신 자신을 단순히 '너그러운' 사람이나 '인색한' 사람으로 규정 내린다면 당신이 투철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운영난을 겪는 비영리단체에는 기부금을 내는 반면 돈 많은 모교에는 기부를 하지 않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한편 쇼다의 결론은 상황론과도 대치됐다. 쇼다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그 어떤 상황이든 사람마다 다르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성격심리학자들이 생각하기에 쇼다의 결론대로라면 인간의 성격에는 일관적인 면이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소용돌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해서 그때그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변한다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또 성격론자들로선 특성이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면 모델을 세울 기반이 흔들리는 셈이었다. 하지만 쇼다는 성격의 개념을 폄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과 맥락을 결합시킴으로써 성격론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사실 쇼다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만, 그것이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그런 일관성이 아닌 특정 맥락 내에서의 일관성일 뿐이다. 쇼다의 결론에 따르면 (뒤이어 이뤄진 수많은 연구들에 의거하더라도 마찬가지지만) 당신이 오늘 운전하는 동안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면 내일 운전을 할 때도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 아주 확실하다. 한편 당신은 일관적이지 않은 모습의 당신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근 호프집이라는 맥락에서 같은 밴드 멤버들과 비틀스의 리메이크 곡을 연주할 때는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식이다.
쇼다의 연구는 개개인성의 두 번째 원칙인 맥락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밝혀준 것이었다.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개개인의 행동은 특정 상황과 따로 떼어서는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으며 어떤 상황의 영향은 그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따로 떼어서는 규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행동은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독자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표출된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평균적 경향이나 '본질적 기질'을 이야기는 방식을 취해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맥락에 따른 행동 특징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잭이라는 이름의 동료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잭은 외향적이야."라는 식의 말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쇼다는 이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방식의 성격 묘사를 제안한다. 만약에(if) 잭이 사무실에 있으면 그럴 땐(then) 아주 외향적이다. 만약에 잭이 수많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럴 땐 약간 외향적이다. 만약에 잭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땐 아주 내향적이다.
나는 쇼다의 연구에 대한 글을 처음 읽었을 때 학창 시절에 '공격 성향 아동'으로 지목됐던 경험이 떠올랐다. 당시에 할머니는 내가 그런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말도 안 된다면서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 와서 노는 걸 보면 얌전하기만 한 아이인걸!" 이것은 할머니의 맹목적 편애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와 있을 때는 정말로 얌전했다. 내 공격성은 위협을 느낄 경우와 같은 아주 특정한 맥락에서 발동했다. 종이를 씹어 불어서 말썽에 휩싸였던 그 수업의 배경에도 나보다 덩치 큰 애들 셋이 툭하면 나를 못살게 굴던 맥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교실 밖에서는 가급적 그 애들을 피해 다녔지만 교실 안에서는 장난꾸러기가 돼 그 애들의 위압감에 대응하기 일쑤였다. 그 애들을 웃게 해주면 그 애들이 나를 덜 건드릴 것 같아서였다. 그 방법은 대체로 잘 통했지만 상당실 호출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내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랬다면 나에게 공격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대신, 또 '문제아'의 낙인을 찍는 대신 도움이 돼줬을 텐데, 왜 내가 그런 맥락에서 말썽을 피우는지를 헤아이려 애썼다면 내 성격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간주해버리지 않고 담임교사에게 귀띔을 하거나 나를 다른 반으로 옮기는 식으로 중간에서 조정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이후에 웨버주립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간파해낸 나 자신의 상황 맥락별 기질을 활용해 수업에 임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중에서도 신입생 시절에 아주 유용했던 한 방법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얼굴을 아는 학생들이 있는 강의는 피했던 것이다. 그런 특정 맥락에 놓이면 내가 장난꾸러기처럼 굴게 될 것 같고, 또 강의 시간에 장난꾸러기처럼 굴면 대학 공부를 제대로 못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가만히 주의해서 보니 나는 특정 학습지도 스타일에 잘 호응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며 이런저런 주장을 내놓도록 자극해주는 선생님들을 특히 좋아했다. 반면에 이미 주지의 사실이니 가만히 앉아서 가르쳐주는 대로 소화시키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고 여기는 듯한 선생님들의 수업에서는 답답함을 느끼며 집중을 못했다. 그래서 매 학기 초반이면 6개 과목을 신청해서 과목마다 최소한 한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 내가 아는 애가 있거나 교수님 스타일이 나에게 잘 맞지 않으면 해당 과목은 중도에 그만뒀다.
나는 특정 맥락에서의 내 행동 방식을 파악한 덕분에 대학생으로서나 그 밖의 입장에서나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천성이란 없다
성격에 관한 한 자신의 상황 맥락별 기질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다.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으로 굴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얌전하고 온순하게 굴기도 한다는 점이든, 자신의 내향성이나 외향성이 특정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점은 선뜻 받아들일만하다. 하지만 성실성은 어떨까? 의리나 친절함은? 이런 것들은 우리의 타고난 성품일까? 아니면 맥락에 따라 변하는 성품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성품을 뼛속 깊이 뿌리박힌 천성이라는 것이 통설로 굳어져왔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들이 동네 편의점에서 사탕을 몰래 훔치려다 들켰다는 얘기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다른 물건을 또 훔칠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그 아이가 집에 놀러 오면 아이 혼자만 두고 자리를 뜨기가 꺼려지기 십상이다. 심지어 그 아이에게 도덕성의 결함이 있다고 여기면서 앞으로 또 도둑질을 할 것이 뻔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부정행위를 하고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는 등 다른 비도덕적인 짓도 얼마든지 벌일 만한 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성품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다를 게 없다. 즉 맥락과 분리시킨 채로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봐야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감력, 존경심, 자제력같은 도덕성을 어떻게 심어주느냐를 놓고 여전히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또 전적으로 성실하거나 전적으로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고 믿는 시대에 이런 중요한 도덕적 자질 모두가 아주 개별화된 상황 맥락별 기질에 따라 특정지어진다는 개념은 도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품이 맥락적이라는 이런 개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하트숀은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본질주의 사고의 프리즘을 통해 성실성을 바라보면서 각 학생 개개인이 도덕성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 예상은 빗나갔다. 학생들은 도덕성에서 별 일관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가령 한 여학생은 자신의 시험지를 직접 채점할 때는 속임수를 썼으나 파티 게임에서 점수를 기록할 때는 정직했다. 또 어떤 남학생은 시험을 볼 때 다른 학생의 시험지를 커닝했으나 자신의 시험지를 직접 채점할 때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집에서는 돈을 훔쳤으나 학교에서는 돈을 슬쩍하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이처럼 실제로 조사해보니 도덕성은 맥락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도덕적 행동이 외부 상황에 따라 크게 특정되고 좌우된다는 학설에 대해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유례가 없을 정도의 당혹감을 보이고 있다. 조니가 집에서는 성실한 아이인데 아이 어머니에게 그런 조니가 학교 시험에서 커닝을 한다고 얘기하면 그 어머니는 믿지 않으려 들 것이다. 대중이 받아들이기 불쾌하더라도 이 상황 특정 학설은 잘 정립된 이론으로 여길 만하다. (중략) 성실성, 자비심, 협동심, 억제력, 끈기는 일반적 특성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습성이다.
키드는 먼저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마시멜로 실험의 본격적 개시에 앞서 신뢰하기 힘든 상황군의 아이들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어른을 대면시켰다. 예를 들면 미술 프로그램 중에 어른이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새로운 화구 세트를 가져와서 부러지고 닳은 크레용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잠시 후에 빈손으로 돌아오는 식의 대면이었다.
한편 신뢰할 만한 상황군의 아이들에게는 약속대로 새로운 화구를 가져다주는 어른과 대면하게 했다.
실험 결과, 신뢰할 만한 상황군의 아이들은 이전에 실시됐던 다른 마시멜로 연구들과 아주 흡사한 행동을 보였다. 몇몇 아이는 금세 유혹에 넘어갔으나 3분의 2에 가까운 아이들이 최대한도인 15분이 다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반면에 신뢰하기 힘든 상황군의 아이들은 아주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중 절반이 어른이 나가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시멜로를 먹어버렸다. 마시멜로를 1개 더 받을 수 있을 만큼 진득하게 참은 아이는 한 명뿐이었다. 자제력은 일종의 본질적 특성처럼 여겨지지만 키드가 증명했듯이 자제력 역시 맥락적인 것이다.
마시멜로 실험과 자제력이 성공의 열쇠라는 식의 그 실험 결론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본질주의 사고에 크게 구속돼 있는 한 영역, 즉 능력, 재능, 잠재력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우리는 이런 자질들을 본질적 자질이라고 여긴다. 개개인별로 이런 자질을 가진 사람도 있고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환경은 재능 같은 것에 미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 재능을 좌우하지도 재능을 싹틔우지도 못한다고 말이다.
이런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직원 채용 방식이다.
채용 담당자들은 고용주가 기대하는 경력, 기량, 자격증 등을 쭉 열거해 게시했다가 이 기준에 미달하는 지원자들을 걸러낸 뒤 나머지 지원자들 가운데 최적인 사람을 뽑는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상식적인 방법 같다. 지원자들은 사람에 따라 특정 기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커뮤니케이션 능통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멀티채널 마케팅 같은 분야의 '실력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 그것이 상식적인 직원 선발 방법이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물론 이런 방법에서의 오류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본질주의 사고에 속아왔기 때문이다.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직원의 '본질'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직원이 수행해야 할 직무의 수행력과 그 직무 수행이 행해질 맥락에 주목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실제로 그런 방법을 개척해낸 인물이 있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채용 컨설팅사인 루 애들러 그룹의 창설자 루 애들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수행력이 맥락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과 채용에서는 개개인을 최적의 맥락과 조합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것이 상식처럼 여겨질 거라고요. 하지만 막상 해보니 기업들에 상식을 실행시키는 일이 정말 어렵더군요."
그는 고용주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대신 수행되기를 바라는 직무에 대해 우선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기업들은 하나같이 커뮤니케이션 능통자가 필요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직무 설명서에 가장 흔히 기재돼 있는 기량이죠. 하지만 다방면에 걸친 '커뮤니케이션 능통자' 같은 건 없습니다. 특정 직무에 필요할 만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는 것이지. 그 모든 방면에서 능통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객 서비스 담당자의 경우라면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고객의 문제를 이해할 만한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회계사에게는 고위 임원에게 영업 적자가 수익에 끼치는 영향을 잘 설명하는 능력일 것이다.
맥락의 원칙은 우리가 거의 평생에 걸쳐 배워온 성격에 대한 사고방식과 정반대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당연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우리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뿌리 깊이 박힌 확신을 떨쳐내기 힘들어할지 모른다. 우리 대다수는 믿고 있다. 우리 인간을 본성 깊숙이 파고들어보면 본질적으로 낙천주의거나 냉소주의라고, 착하거나 무례하다고, 성실하거나 불성실하다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은 놓여 있는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식의 개념은 정체성의 근본적 신조에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성격이 고정돼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 뇌가 맥락에 굉장히 민감해서 우리가 놓인 환경에 알아서 적응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친구의 파티에 가서 외향적일 때는 뇌가 본능적으로 우리 행동을 비슷한 맥락에서의 경험과 비교해 걸맞게 행동하고 있다는 결론을 짓는다. 자신이 외향적이라고, 아니 적어도 파티에서는 외향적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직장에서는 스스로를 내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뇌가 자신이 동료들과 있을 때는 절제해 행동하는 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자신의 성격을 고정돼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성격이 특정 맥락 내에서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점성가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 점을 간파해냈고, 별점이 곧잘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덕분이다. 점성가가 레오스에 대해 때때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고 알려준다고 치자. 글쎄, 우리 모두는 때때로 수줍음을 탄다. 저마다 맥락에 따라 수줍음을 타는 경우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성격이 고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와는 다르다. 즉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과 한정된 범위의 맥락 내에서만 상호 교류를 나누는 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료와는 직장 내에서만 알고 지낼 뿐, 집에 놀러 가 그 동료의 가족들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닐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와는 주말마다 쇼핑하고 술을 마시지만 회의실에서 만나 함께 회의할 일은 없는 사이일 수도 있다. 자녀들과는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학교에서 보거나 자녀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특성처럼 느끼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당신이 그 사람들의 맥락에서 일부분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직장 상사가 옆에 있을 때에만 소심해지는 것뿐인데 직장 상사는 당신을 소심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한편 당신은 직장 상사가 고압적이고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사는 당신이 주위에 있을 때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탓에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본질주의 사고에서 탈피해 맥락과 관련된 상황 맥락별 기질을 의식하게 되면 개인적 · 직업적 삶에서 굉장한 이점이 생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 자신이 빛을 발할 만한 상황을 보다 쉽게 깨닫게 돼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서로 협력해 일하는 팀의 일원으로서는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일하는 경우에는 애를 먹는 편이라면 직무 시간의 90퍼센트를 집에서 독자적으로 일해야 하는 조건의 파격적 승진을 제안 받을 경우 승진에 따른 혜택과는 별개로 그 직무가 당신의 상황 맥락별 기질에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맥락의 원칙은 불리하거나 자멸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될 만한 상황적 요소를 분간하게도 해준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만한 맥락과 애를 먹을 만한 맥락을 감지할 줄 알게 되기는 어렵지 않다. 정작 어려운 부분은 따로 있다. 타인의 상황 맥락별 기질 생각하기다. 여전히 우리 사회생활의 구석구석 곳곳에는 본질주의 사고가 만연돼 있어서 그릇된 확신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가 넘어야 할 난관이자, 맥락의 원칙을 통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만한 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신경과민이라거나 공격적이라거나 쌀쌀맞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마다 그것이 하나의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타인의 상황 맥락별 기질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더 중요한 경우는 타인이 잘하도록 돕는 역할이 주어질 때, 즉 관리자, 학부모, 상담가, 교사 등등의 역할을 맡게 될 때다. 그런 역할에 임할 때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자녀나 직원이나 학생이나 의뢰인이 고쳐주고 싶은 좋지 않은 어떤 행동을 취하는 모습이 포착될 때마다 보다 생산적으로 처신할 수 있게 된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따지는 대신 맥락의 관점에 따라 '저런 맥락에서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자신이 판단할 때 좋지 않게 생각되는 행동을 보면 잠시 반응을 보류하며 (예를 들어 나의 공격적 행동이 미술 수업에서는 적용됐으나 할머니와 있을 때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타인이 잘하도록 돕는 역할이 맡겨져 있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가 타인을 우리 자신과의 상호 교류를 통한 하나의 맥락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타인에게 더 온정을 느끼고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직장 돌료가 이런저런 맥락에서 아무리 봐도 '까탈스러운' 사람 같아 보이더라도 회사 밖에서는 의리 있는 친구이자 자상한 언니이자 정겨운 이모일지 모른다. 또 그 점을 알고 나면 그 직장 동료를 함부로 판단하기가 힘들어진다. 선뜻 비호의적인 성격 특성 하나만으로 단정 지으면서 그 동료의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그 동료의 복잡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 사람에게는 당신과 그 사람 둘이 함께 놓여 있는 그 순간의 맥락만이 전부다 아님을 명심한다면 마음의 문이 열려 본질주의 사고로는 어림없는 수준의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이해와 존중은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 관계의 토대다.
갓난아이들에게 가장 중대한 인생의 지표 한 가지는 두 발로 혼자 일어서는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이 간단한 행동이 부모로서는 아이으 미래에 거는 모든 희망과 꿈과 단단히 엮여 있다. 정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리라 확신하고 싶은 바람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해진 기준에 따라 발달 과정이 잘 진전되는지 걱정스레 비교한다. 아이가 적절한 나이에 허리를 세워 앉는지, 적절한 방법으로 기어 다니고 있는지 유심히 지켜본다. 혹시 딸이 지표에서 뒤처지기라도 하면 보다 심각한 문제의 신호일까봐 불안해하거나 아이가 살면서 더딘 발달로 평생 괴로움을 겪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내 친구의 아들은 최근에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자세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워서 엉덩이와 다리는 바닥에 붙인 채 손의 힘으로 몸을 끌어당겨 기는 모습이 꼬맹이 인어 같았다. 친구는 급히 아들을 병원에 데려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이 아들의 다리나, 아니면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머리에 어떤 발달 장애가 일어난 징조일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이 얘길 듣고 과잉 반응이라며 킬킬거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한다. 내 친구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다수는 본능적으로 정상적 경로에서의 이탈을 뭔가 잘못됐다는 확실한 신호로 간주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평균주의 사고에 속아 '정상적' 뇌, 신체, 성격의 개념을 믿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평균주의 사고에 속아 믿게 되는 또 하나가 바로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거나 배우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하나의 올바른 경로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그 목표가 걸음마 떼기처럼 기본적인 목표이든 생화학자가 되는 것처럼 어려운 목표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이런 확신은 평균주의의 세 번째 정신적 장벽인 규범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규범적 사고의 핵심 가정은 이런 식이다. 평균적인 사람, 아니면 적어도 성공한 졸업생이나 전문가 같은 본받고 싶은 어떤 특정 그룹의 평균적인 일원이 따르는 길이 올바른 경로라는 것. 아동의 발달, 걷기, 말하기, 읽기 등등 온갖 것에는 정해진 지표가 있다고 알려주는 수많은 소아과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말을 믿는 것도 바로 그런 가정 때문이다.
기업에서 어떤 일이든 완수해내는 데는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고 봤던 그의 경영 이념과 믿음은 근무일과 주당 근무시간의 지속 기간을 결정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이 기간은 원래 공장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워진 임시 규범이었으나 현재 우리의 개인적 · 직업적 삶 전반에서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연중에 페이스메이커로 역할하고 있다.
테일러의 공장 근무시간 표준화는 우리 교육 시스템의 경직된 경로에도 영감을 줬다. 그 경로가 손다이크와 교육계의 테일러주의자들이 발전시키고 실행시킨 장본인이기에 하는 얘기다. 우리의 학교들은 100년 전과 똑같은 유연성 없는 학업 일정을 따르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고정된 수업 시간, 고정된 등교일, 고정된 학기 시스템으로 똑같은 '핵심' 과목을 가르쳐 모든 (정상적인) 학생이 똑같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게다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졸업하도록 짜놓은 탄력성 없는 똑같은 학제를 따른다.
정상적인 교육 경로에 정상적인 직업 경로까지 더해지면 평생 정상적인 경로를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면 초 · 중 · 고등교육을 12년간 받은 뒤 대학에서 4년을 보내고 신참 엔지니어로 취직한 다음 수석 엔지니어, 프로젝트 매니저, 부서장, 엔지니어 부문 부사장으로 착착 승진해가길 바라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계에도 정상적인 경로가 정해져 있다. 초 · 중 · 고등 과정, 대학 과정, 대학원 과정, 박사 학위 취득 후 연구생 과정을 거쳐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학과장의 순서다.
정상적인 성공 경로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의 전개를 이런 평균 중심적 기준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어 다니기 같은) 지표가 (독립해 마케팅 대행업체 운영하기 같은) 직업상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정상적인 시간이 항시 대기 중인 스톱워치처럼 우리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아이가 기기 시작하는 시기가 정상보다 늦거나 동창생이 이른 시기에 마케팅 부장이 되면 자신이(자신의 아이가) 뒤처진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 일쑤다.
규범적 사고라는 정신적 장벽을 극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인간의 발달 경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걷기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행동이라 명확히 규정되는 일련의 고정적 단계를 거쳐서, 즉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서 일어나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60여 년이 지나도록 내로라하는 쟁쟁한 연구가들과 의학 기관들이 아이들은 정상적인 발달 이정표에 따라 기고 일어서고 걷는다는 주앙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 권위자들은 다수 아동의 표본을 통해 집계된 평균 연령에 따라 '전형적' 아이가 거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일련의 연령별 지표를 지지했다.
걷기의 정상적인 경로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그 가정은 너무 직관적이고 명백하게 여겨져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캐런 아돌프라는 이름의 여성 과학자였다.
그 결과, 기어 다니이게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아기들은 무려 25가지의 다양한 경로를 따랐는데 각 경로마다 독자적 동작 패턴을 띠었고 모든 경로가 걷기로 발전했다.
정상적인 경로에서 규정된 대로라면 기어 다니기는 (배를 깔고 구르거나 팔과 다리를 나란히 움직이는 것처럼) 특정한 순서대로 특정 단계를 따라야 맞았다. 하지만 아돌프가 실제로 조사해보니 몇몇 아기들은 여러 단계를 동시에 나타내거나 여러 단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거나 아예 일부 단계를 건너뛰기도 했다. 한 예로 '배밀이'는 기기의 필수적인 단계여서 아기들이 걸음마를 떼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단계라는 것이 오래된 믿음이었으나 아돌프가 조사한 아기들의 절반 가까이는 배밀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돌프의 연구에서 증명됐듯이 생물학적으로 우리 인간은 미리 정해진 청사진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아돌프도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아기는 몸 움직이기 문제를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훨씬 더 도발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기어 다니기는 그 터득 방법이 여러 가지일 뿐만 아니라 기기 자체가 걷기 과정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단계가 아닐 수도 있다. 기기가 걷기 전의 필수 단계라는 개념은 문화적 산물이다. 아주 비정상적인 표본 집단을 토대로, 즉 상업화된 서구 사회 아이들의 행동을 표본으로 삼아 표준화 한 결과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트레이서는 2004년에 파푸아뉴기니에서 원주민인 오족을 연구하던 중 문득 별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생각해보니 그가 오족을 지켜본 지 20년째인데 그동안 오족의 아기가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 한 명도 기어 다니는 아기는 없었다. 그 대신에 트레이서가 붙인 호칭대로 '엉덩이 끌기 단계'를 거치며 똑바로 앉아 엉덩이를 땅바닥에 대고서 끌고 다녔다. 트레이서는 그곳 아기들의 운동 발달 패턴이 서구 과학에서 규정한 정상적인 경로와 크게 달라 보이는 이유를 알아보고 싶었다.
오족의 아기들은 거의 75퍼센트의 시간을 몸이 똑바로 펴진 자세로 아기띠에 업혀 다녔고 드물게 바닥에 내려진 경우에도 양육자들은 아기가 엎드려서 눕지 못하게 했다. 오족이 이렇게 아기들을 엎드려 눕지 못하게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기들을 바닥에 너무 오래 닿게 놔두면 자칫 치명적 병에 걸리고 기생충에 감염되기 쉽다는 사실을 의식해서였다.
서구에서는 가정의 바닥에 위험한 세균이 비교적 없는 것이 당연시되며 따라서 기어 다니는 것이 운동 발달에서 필수적인 단계인지 아닌지에 좀처럼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런 사례가 상기시켜주다시피, 우리는 평균적 행동 패턴을 들어 어떤 것이 고유하고 보편적이라는 증거로 해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따지고 보면 그 행동 패턴이란 것이, 애초부터 가능한 경로를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에서 유래된 경우임에도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경로들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발달상 경로를 잘못 들어 막다른 길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의학적 문제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개입이 필요한 아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런 의학적 문제도 걷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개인적이라 단순히 아기가 평균적 발달 경로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비교하는 식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발달은 (생물학적 발달이든, 혹은 정신적 · 도덕적 · 직업적 등등의 발달이든) 그 종류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이 없으며 이 사실은 개개인성의 세 번째 원칙인 경로의 원칙에서 근본을 이루는 토대다. 경로의 원칙은 다음의 2가지 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첫 번째,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는, 그리고 그 어떤 특정 목표를 위한 여정 역시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은 저마다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 두 번째,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경로는 당신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결정된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경로가 한 가지뿐이라고 믿으면 당신의 진전을 평가할 방법도 한 가지뿐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중대 시점마다 기준과 비교해 자신이 어느 정도 더 빠르거나 더 느린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는 개인의 성장 · 학습 · 발전의 속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더 빠른 것을 더 훌륭한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두 학생이 시험에서 똑같은 점수를 받았으나 한 학생이 시험 시간을 반이나 남겨두고 시험문제를 다 풀었다면 더 빨리 시험을 마친 학생이 더 재능 있는 학생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다른 한 학생이 과제를 완수하거나 시험을 마치는 데 추가 시간을 필요로 할 경우엔 그 학생은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더 빠른 것이 더 똑똑한 것이라는 가정을 우리 교육계에 도입시킨 장본인은 에드워드 손다이크다. 손다이크는 학생들의 학습 속도가 학생들의 기억력과 결부돼 있으며, 또 기억력은 학교생활과 직업생활에서의 성공과 결부돼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빨리 배우는 사람은 기억력도 좋다."
손다이크는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평가하는 한 방법으로 수업, 숙제, 시험의 시간을 평균적인 학생이 끝까지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따라 표준화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평균보다 빠른 것을 평균보다 똑똑한 것으로 동일시했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평균 시간을 배분해주면 똑똑한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더 뛰어난 수행력을 보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반면에 머리가 나쁜 학생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줘도 수행력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만큼 그런 학생들에겐 평균 시간보다 시간을 더 늘려줘 봐야 무의미하다고, 더군다나 괜히 똑똑한 학생들만 붙잡아놓는 꼴이니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현재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시험이나 과제를 내줄 때 추가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배정된 시간 안에 다 마칠 만큼 빠르지 못하면 교육상의 평가에서 그만큼의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당연시한다.
하지만 손다이크가 틀린 것이라면? 속도와 학습 능력이 관련이 없다면 아주 부당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는 얘기가 된다. 어쩌다 학습 속도가 빠른 학생들에게는 유리하지만, 그런 학생들 못지않게 똑똑하나 학습 속도는 느린 학생들에게는 불리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낸 셈이지 않은가. 속도와 학습 능력이 관계가 없다면 부디 속도가 더딘 학생들에게 새로운 내용을 배우고 과제나 시험을 끝까지 마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좋다면 좋겠다. 속도의 빠름이 아니라 결과의 질에 따라 학생들을 평가했으면 좋겠다.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하고 상벌이 따르는 부담 높은 시험에서의 수행력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순위 매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에서의 교육 기회는 속도와 능력이 얼마나 연관돼 있는가의 문제에 달려 있으면 그 문제의 답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의 선구적 연구 덕분에 이미 30년 전에 알려져 있었다.
블룸은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이 학업에 애를 먹는 이유는 학습 능력의 차이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교육과정에 강요된 인위적 제약, 특히 고정된 속도로 이뤄지는 그룹 지도 때문이라고, 게다가 학급 전체가 학습 내용을 터득할 속도를 커리큘럼 설계자가 결정해서 문제라고 믿었다.
블룸의 연구진은 무작위로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모든 학생들은 '가능성 이론' 같은 처음 접하는 과목을 배웠다. 첫 번째 그룹은 '고정 속도형 그룹'으로 전통적 방식으로 수업 내용을 배우면서 고정된 지도 기간 동안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싿. 두 번째 그룹은 '자율 속도형 그룹'으로 수업 내용과 총 지도 시간은 첫 번째 그룹과 똑같은 조건이었으나 자율적으로 학습 진도를 나가도록 허용하는 교사에게 지도를 받아서, 학생들이 경우에 따라 속도를 빠르게도 느리게도 조절하면서 새로운 개념마다 학습 시간을 필요한만큼 늘리거나 줄일 수 있었다.
블룸이 각 그룹의 성취도를 비교해봤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전통적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성취도는 빠를수록 똑똑하다는 신념 기준으로 예상될 법한 딱 그 수준이었다다. 지도 과정이 끝나갈 무렵에 이 그룹은 약 20퍼센트가 수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수준(블룸이 정한 기준상으로 최종 시험에서 85퍼센트 이상의 득점을 올린 수준)이고 그와 비슷한 비율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그 나머지인 대다수 학생은 중간쯤의 수준이었다. 반면에 자율 속도형 학생들은 90퍼센트 이상이 수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수준이었다.
블룸이 증명해냈듯, 학습 속도에 약간의 유연성을 허용한 결과 대다수 학생들이 아주 뛰어난 성취도를 나타냈다. 또한 블룸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의 개인별 다양한 속도는 학습 내용에 따라 결정됐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은 분수 부분에서는 거침없이 뚝딱 해치웠지만 소수 부분에서는 애를 먹는가 하면 또 다른 학생은 소수 부분은 후딱 뗐지만 분수 부분에서는 추가 시간이 필요한 식이었다. '빠른' 학습자나 '더딘' 학습자 같은 것은 없었다. 이 2가지 통찰(속도가 곧 능력은 아니라는 사실과 전반적으로 빠르거나 더딘 학습자는 없다는 사실)은 사실상 블룸의 선구적 연구가 이뤄지기 몇십 년 전에 이미 밝혀진 바 있으며, 그 이후로도 다른 학생들과 다른 내용을 활용해 수차례 같은 조사가 반복됐으나 그때마다 어김없이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학습 속도를 학습 능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반박의 여지 없는 오류다.
물론 이러한 연구를 통한 논리적 결론은 명백할 뿐만 아니라 유감스러운 부분도 많다. 우리 학생들에게 고정된 속도의 학습을 강요함으로써 수많은 학생의 학습 능력과 성취력을 인위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속도의 조절을 허용한다면 대다수 사람들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시스템 구조는 그런 개개인성을 고려해 설계되지 않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 모두의 잠재력과 재능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모델에서는 (고정된 기간이 지난 뒤 학생 성취도에 대해) 단편적 평가를 내릴 때 '얘들은 재능 있는 애들이고 얘들은 더딘 애들이군. 얘들은 특별반으로 배치해야겠네. 얘들은 다른 교실로 배치해야 할 것 같군.'이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을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공부하게 해주면 (중략) 6주 전에 더디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아이들이 이제는 재능 있는 아이들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거듭거듭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 혜택을 봤던 그 결과들 가운데 단지 시간상 우연의 일치 덕분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이가 이차방정식 풀기를 터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배우는 데 2주가 걸리든 4주가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치의과 학생이 충치 치료를 문제없이 처리하게만 된다면 그것을 익히는 데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의 삶에는 누군가가 통달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다시 말해 통달 해내는 것 자체에만 신경 쓰는 그런 영역들이 이미 많이 있다. 운전이 그 좋은 예다. 운전면허증에는 필기시험에서 떨어진 횟수나 마침내 면허증을 따낸 나이 따위가 기록되지 않는다. 누구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운전을 할 수 있게 허용된다. 변호사 시험 역시 좋은 예다. 변호사 자격증의 흭득은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어쨌든 합격만 하면 자격증을 딸 수 있다.
모든 학생이 저마다 학습 속도가 다르다면, 또 학생 개개인별로 다른 속도로 다른 시간에 다른 내용을 학습한다면 모든 학생을 고정된 속도에 따라 학습시켜야 한다는 개념은 구제 불능의 오류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수학이나 과학에 정말로 소질이 없었는가? 아니면 학급이 당신의 학습 속도에 맞춰주지 않았을 뿐인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각자가 다른 영역에서 다른 속도라 발전한다는 사실 역시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은 경로의 원칙에서 내세우는 두 번째 주장, 즉 인간의 발달에서는 보편적인 고정 순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성장하거나 학습하거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누구나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그런 일련의 단계 따위는 없다.
게젤은 눈에 보이는 온갖 것에서 평균 기반의 단계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기어 다니기의 발달에서는 "머리를 들고 가슴을 바닥에서 떼기, 몸을 빙 돌리기, 바닥에서 배를 끌며 몸을 앞으로 밀기, 배를 바닥에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몸을 앞으로 튕기기, 양손과 양 무릎을 짚고 몸을 율동적으로 흔들기, 양손과 양 무릎을 짚고 기기, 양손과 두 다리를 짚고 기기" 등을 포함한 22개의 단계를 찾아냈다. 그는 작은 공을 가지고 놀 때의 행동에서 58단계를 찾고, 딸랑이를 쥐는 행동에서는 53단계를 찾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게젤은 예일대학교의 실험실에서 아기들을 검사하면서 기준과 비교한 신체 발달 및 정신 발달 수준에 따라 '게젤 점수'를 매겼다. 그러면서 어떤 아이가 단계의 적절한 순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대개는 부모들에게 아이한테 뭔가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고 일러줬다. 이 '게젤 점수'는 입양의 기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게젤은 똑똑한 아기는 똑똑한 부모를 만나고 평균적인 아기는 평균적인 부모를 만나게 해줌으로써 자신이 입양 성공률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믿었다. 당시에 미국 소아과협회를 비롯한 수많은 의학 단체들이 게젤이 제시한 틀을 지지했고 게젤의 개념은 현재도 여전히 수많은 소아과 지침과 인기 양육서들에서 발달 지표상의 '정상적' 나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게젤을 비롯해 다수의 단계 이론가들은 발달을 일종의 불변의 사다리쯤으로 여기면서 우리 모두가 출생의 순간부터 이 똑같은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오르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일부 연구가들이 자신이 연구해본 아이들의 상당수가 보편적인 줄로 알았던 그런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개인별 발달과 이런 추정상의 정상적 경로 사이의 불일치가 아주 명백해지면서 발달과학에서 '변동성의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과학자들과 교육가들은 수십 년에 걸쳐 아이들이 단어의 의미를 알고 나서 단어의 글자를 분간할 줄 알게 되고 또 그다음에는 특정 단어와 운이 맞는 단어들을 만들 줄 알게 되는 식의 표준적 순서에 따라 단어들을 배운다고 가정했다. 이런 '표준적' 읽기 습득 순서는 그룹 평균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는데 피셔는 이런 평균주의식 접근으로 인해 과학자들과 교육가들이 읽기 습득 과정에서 중요한 뭔가를 간과해왔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분석 결과 아이들이 낱낱의 단어를 읽을 줄 알게 되기까지의 순서가 사실상 3가지로 다름을 알았다. 이 셋 중 하나는 아이들의 60퍼센트가 그 순서를 따르는 사실상 '표준적' 경로였다. 하지만 또 다른 순서는 첫 번째 순서와 똑같은 기능들을 수반하고 있으나 이어지는 차례가 달랐는데 30퍼센트의 아이들이 여기 해당했으며 이 차례대로 따라도 읽기 습득에는 지장이 없었다. 나머지 한 순서는 10퍼센트의 아이들이 해당했는데 다른 2가지의 순서와는 달리 이 차례를 따른 아이들은 나중에 읽기에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더디거나 부진한 부류로 분류됐으나 이른바 결점이 있는 경로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저능충이나 장애아로 치부하는 대신 개입과 보상적 지도 같은 특화된 형태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경로의 원칙을 통해 잘 납득되고 있다시피, 읽기에서 고정된 발달의 사다리가 없는 것처럼 경력을 비롯한 우리 삶의 다른 측면에도 고정된 발달의 사다리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뛰어난 과학자가 되려먼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대체로 과학계에서는 성공의 표준적인 수순에 대한 암죽적 전제가 있다. 대학원 졸업, 박사 학위 취득 후 곧바로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정규직 흭득, 연이은 고속 승진, 연구비 액수의 지속적 증액의 순이다.
"주목해서 인식해야 할 부분은 패턴은 달라도 모두가 우수한 성취를 이루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길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7명의 아이를 키우는 중이든 병든 부모 한 분을 수발하고 있든, 또 하루 24시간 연구실에 쳐박혀 있든 간에 언제든 뛰어난 연구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특정 목표에 이르는 경로는 저 밖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걸어갔던 여행자들이 닦아놓은 숲속의 보행로 같은 경로가 있다고 여기며 삶에서 성공하는 최선의 길은 그런 잘 닦인 보행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로의 원칙은 우리에게 다른 얘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신만의 경로를 처음으로 내고 그 길을 닦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나 우리가 겼는 모든 일에 따라 매번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그럴 수박에 없다고. 그리고 이는 기어 다니기를 배우는 중이든 마케팅 프로그램 기획 요령을 배우는 중이든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이런 사실은 곰곰 생각해보면 덜컥 겁이 날 만도 한다. 익숙한 이정표가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다는 암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이정표에 의존할 수 없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행동할 수 있을까? 이미 앞에서 살펴봤던 우리의 들쭉날쭉한 측면과 상황 맥락별 기질을 감안할 때 경로의 원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의지처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는지를 판단할 유일한 방법은 그 길이 우리의 개개인성과 얼마나 잘 맞는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대학생활에 한몫했던 내 결정들에 대해 따져보니 그 모든 결정은 하나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수성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유용한 길이 어딘가에 있지만 그 길이 어떤 형태일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내 결정들은 들쭉날쭉의 원칙, 맥락의 원칙, 경로의 원칙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협력 관계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나에게 잘 맞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그러니까 구체적 예를 들면 수강할 과목의 순서를 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들쭉날쭉성(지루함을 잘 견디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흥미가 끌리게 된 내용에는 초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측면 등)을 이해해야 했고 내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만한 맥락(고등학교 때 알던 아이들이 듣는 수어을 피하고 논쟁과 아이디어 중점식의 수업을 찾아보기)을 알아야 했다. 나는 내 들쭉날쭉한 측면과 상황 맥락별 기질을 이해한 덕분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독자절 경로를 정할 수 있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그곳으로 데려다줄 길이 100만 가지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든 당신에게 유용한 경로가 한 가지 이상은 있게 마련이라는 점과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최상의 경로가 미답에 가까운 경로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에 도전해 미답의 방향으로 나서보라. 그 방향을 따르면 평균적인 경로를 따르는 것보다 성공에 이를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가족들이 자신이나 아이들의 대학 졸업을 위해 이와 비슷비슷하게 고생을 겪는다. 이렇게 생활고를 겪는 희생 이면에는 이성적이고도 실용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고등 교육이 사회에서의 유일하고도 가장 요긴한 기회의 진입로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기를 쓰고 학위 취득에 매달리는 이유는 학위가 우리나 우리 자녀들에게 괜찮은 직장과 소득, 좋은 이웃과 여유 있는 삶을 누리게 해줄 최상의 기회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교육에는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거나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심어주거나 학생들을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해주는 등의 다른 목적들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고등교육에 여러 가지의 또 다른 가치 있는 목적들이 있다는 점에는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 모든 목적은 경력 쌓을 준비라는 주목적에 수반되는 부차적인 목적이라고 본다.
고등교육의 실리적 목적에 공감한다면 현재의 시스템이 미흡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은 졸업생들이 전공 분야의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구인 구직 사이트 커리어빌더에서 실시한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전공 분야 취업률은 31퍼센트에 불과하다) 너무 많은 고용주가 보수 좋은 고급직의 직원 채용에 애를 먹고 있다(인력 채용 업체 맨파워그룹에 따르면 채용률이 35퍼센트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고용주가 채용 졸업생들이 직무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며 푸념한다. 게다가 내가 굳이 근거를 들이대지 않아도 학비가 통제 불능 수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공감할 테지만 그대로 곡 짚고 넘어가고 싶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대학 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비용이 1985년 이후 538퍼센트 상승했다는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의 의료비 상승률 286퍼센트와 비교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상승률이다. 미국은 현재 학자금 대출액이 1조 1,000억 달러에 달하며 미국인의 신용카드 대출액까지 합산하면 이 액수는 더 늘어난다. 나는 아직도 남은 학자금 대출액이 상당해서(미국 여러 지역에서 괜찮은 주택을 구입할 정도의 액수다) 이 빚더미가 내 재정 전망에 먹구름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모두 대학들 탓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니, 적어도 일부 기업들이 직원들을 통계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자본주의 탓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는 대학들의 탓이 아니다.
기업계와 별로 다를 것 없이 우리 고등교육 시스템의 교육 모델도 테일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재의 대학들은 앞선 시대로부터 평균주의 시스템의 관리인 구실을 하면서 평균주의 시스템이 개개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고 모든 교육과정의 표준화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의 단점들(교육 비용은 물론, 다른 무엇보다 큰 문제인 졸업생들의 소양과 구직에 요구되는 소양 사이의 격차)은 오래 전에 자리가 잡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런 평균주의식 구조 때문이다.
오늘날 전문대학들과 대학교들이 자신들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즉 그 믿는 것이 문제 해결력과 비판적 사고력의 고취든 학생들의 관점 환기시키기든, 아니면 그 밖의 훌륭한 인도주의적 목적을 위해서든 간에) 알아둘 것이 있다. 우리의 현존 고등교육 시스템은 1세기 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표준화된 커리큘럼에서의 수행력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등급 매겨 분류시키려는 것이 그 명시적인 목적이었다. 현 교육 시스템에서는 최상위권 등급과 시험 성적을 받은 고등학교 학생들은 최고의 명문 대학에 들어가고 그 이후에도 최상위권 등급을 받은 대학생들은 최고의 전문 대학원에 입학할 뿐만 아니라 최고의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현 교육 시스템은 한마디로 교육판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에 해당한다. 일차원적 등급 매기기에 가학적일 정도로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학생이 평균 학생과 똑같이 하도록,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이 하되 더 뛰어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교육 시스템은 심지어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획일성을 강요한다.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똑같은 과외활동을 하되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하도록 강요당한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같은 전공을 택한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강의를 똑같은 시간 동안 들으면서 평균에 대비해 점수가 매겨지고 4년의 학업을 마치면 별다를 것 없이 획일적인 학위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학생들 자신과 부모들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말이다.
주디가 나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을 직접 옮겨보겠다.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개개인성을 완전히 무시하도록 짜여 있어요. 온통 평균과 선별 타령을 하면서 10대들이 입학 사정관의 눈에 들기 위한 허울이나 쫓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승화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이게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이 할 짓입니까? 모든 학생을 평균에 비교하는 일반적 시스템이 제대로 된 교육 시스템일까요? 아이들은 합격을 의식해 논술을 꾸며 쓰려 하고 별 신념도 없이 기계적으로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합니다. 해외에서 실시되는 SAT에서 부정행위까지 저지릅니다. 제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뭔지 아세요? 이 대학이나 저 대학에 입학하려면 사회봉사 활동을 몇 시간이나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해주죠. 성공한 인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학생 자신의 독자적인 개개인성을 이해하고 발현시키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너무도 많은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학생의 개개인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데급급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모든 학생들이 스스로를 부각시키려 기를 쓰는 방면에서 자신을 부각시키려 기를 쓰면서 비롯되는 문제입니다.
"대학 입학은 대체로 평균의 게임입니다. 사람들은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으며 그 평균의 게임을 펼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자신의 독자성을 버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되려고 기를 쓰는 목표상에서 조금 더 뛰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요. 하지만 평균을 놓고 겨루면 평균적으로 성공하기가 힘듭니다."
그렇다면 재능을 일차원적으로 등급 매기는 일이 실제로 얼마나 문제가 많을 줄 알면서도 우리 모두는 어째서 고분고분 평균의 게임을 계속해서 벌이는 걸까? 어느 16살짜리의 표준화 시험 점수나 어느 17살짜리가 코스타리카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도록 이바지한 일이 대법원 판사가 되거나 성공적인 신생 벤처기업 설립이나 암 치료법의 발견과 의미 있는 연관성이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모두가 평균의 게임을 벌이는 한, 그리고 대학들과 고용주들이 그 평균의 게임을 계속 이어가는 한 게임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학생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막대한 빚더미를 떠안아가면서까지 온갖 희생을 감수한다. 19세기의 등급 개념에 의거한 비좁고 가혹한 시스템에 따르기 위해, 즉 더 이상 일자리의 확실한 보증수표도 아닌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말이다. 우리의 평균주의 고등교육 시스템이 안겨주는 보장은 점점 낮아지는 중인 반면 고등교육 시스템이 부과하는 비용은 점점 높아지는 중이다.
고등교육의 구조가 학생들을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재능 있는 학생들과 재능이 없는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시스템 중심의 표준화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그릇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이 시스템이 아무리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낸다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묵인할 수 없는 실패들이 배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실패를 다루려면 현재의 상황 아래서 더욱 노력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시스템보다 개개인을 중시해 개개인 학생을 최우선이 되도록 고등교육의 기본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시스템의 평균주의 구조에서 학생 개개인을 중요시하는 시스템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개념을 채택해야 한다.
· 학위가 아닌 자격증 수여
· 성적 대신 실력의 평가
·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 허용하기
문제는 학사 학위의 취득 요건이 상당 부분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든 간에 학사 학위는 거의 예외 없이 똑같은 4년의 과정이 필요하다. 독일 문학을 전공하든 경영학이나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든 학사 학위 취득에는 똑같은 횟수의 학기에 걸쳐 거의 똑같은 총 이수 단위시간이 요구된다. 선택 전공이 아무리 어려워도, 학생의 학습 속도가 아무리 빠르거나 느려도, 다니는 대학이 작은 사립대학이든 드넓은 공립대학이든 간에, 학생이 희망하는 경력을 위한 필수 기량을 갖추게 됐든 아니든 간에, 필수 출석 시간을 기록하기만 하면 (그리고 낙제 과목이 없으면)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4년제 학위 옹호자들이 주장하길 그 덕분에 여러 분야에 걸쳐 이런 4년제 학위 취득에서 일종의 '형평성'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학위를 교육의 기본단위로 활용하는 것은 시스템에 몇 가지 명백한 결함을 초래하고 있다. 기계공학에서의 학사 학위 취득을 위한 4년 동안의 출석 시간을 다 채우고 다른 과목은 모두 이수하고도 인문학의 딱 한 과목을 이수하지 못한 경우엔 학위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4년 동안 수업료는 꼬박꼬박 납부했어야 한다.) 대학에서 정해놓은 모든 요건을 마치지 못하면 그 학생이 직장에 들어가 기계공학자로 일하기에 얼마나 잘 준비돼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명문대에서 컴퓨터과학 학위의 모든 요건을 채우고도 아직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할 준비가 갖춰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교육적 성취도의 기본단위로서 이런 학위를 대체할 논리적 대안이 있다. 바로 자격증이다. 자격증 수여는 아주 세분된 학습 단위별 자격 부여를 강조하는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웹 사이트 제작을 위한 자바 프로그래밍, 제1차 세계대전사, 페이스트리 제빵, 아시아 기후학 등등에 대한 자격증을 수여하는 식이다.
자격증 수여를 활용하면 표준화 학위를 위해 필요한 출석 시간을 벌기 위해 오직 한 대학에 4년동안 과도한 수업료를 내야만 하는 대학 프로그램은 없어도 된다. 단 몇 가지든 여러 가지든, 희망 경력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수만큼의 자격증만 따면 된다.
자격증의 개념은 조금 파격적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기량 중심의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역할을 해왔다. 한 예로 MIT에서는 이미 몇 가지 자격증 수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무크는 개인화된 자격증 수여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어떻게 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표준화된 학위의 취득에 필요한 출석 시간을 얻기 위해 4년 동안 단 한 곳의 대학에 과도한 수업료를 내야하는 대학 프로그램에 기대지 않아도 되고, 그 대신 자신이 택한 경력을 쌓기 위해 자신의 조건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비용으로 필요한 만큼의 자격증을 취득하면 된다.
고등교육의 평균주의 시스템에서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두 번째 요소는 기본적인 수행력 평가 방식, 바로 성적이다. 능력에 일차원적 등급을 매기는 성적은 과목을 얼마나 잘 터득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분야 내에서의 능력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해당 학생이 표준화되고 고정된 속도의 경로에서 학위 취득까지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갔는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성적에 의존한 수행력 평가에는 2가지 문제점이 따른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적이 일차원적 평가라는 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들쭉날쭉성의 원칙에 따르면 일차원적 등급 매기기는 개개인의 진정한 능력이나 기량이나 재능을 정확히 나타내주지 못한다.
"누군가 키, 체중, 식생활, 운동 활동을 종합적으로 측정해 단 하나의 숫자나 기호로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표시하자고 제안한다면 비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중략) 하지만 교사들이 매일같이 학생들의 성취도, 태도, 책임감, 노력, 품행 등의 측면을 종합해 단 하나의 점수를 내서 통지표에 기록하는 것에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성적의 두 번째 문제는 고용주들로선 특정 졸업자의 학위가 정확히 의미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복잡한 해석을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성적 증명서로는 그 학생의 기량이나 능력이나 일정 부분의 숙지 정도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만한 단서가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근거라고는 대학의 등급과 그 졸업생의 GPA뿐이다.
다행히 이 문제에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성적을 실력의 측정으로 대체하면 된다. 자격증은 특정 과목에서의 출석 시간 누적, 주어진 시간 내에서의 과제 완수, 중간시험에서의 우수한 평점에 따라 성적을 부여하는 대신, 그 사람의 관련 기량과 능력과 지식에서의 실력을 증명하면, 그리고 증명해야만 수여된다.
학생들 각자는 수업의 출석 시간 채우기가 아닌 실력의 입증으로 학위 취득을 위한 학점을 받는다. 또한 이미 잘 아는 영역의 경우에는 불필요한 수업을 들으며 앉아 있지 않고도 능력 시험을 통해 학점을 받을 수도 있다. 수업료는 자율 속도의 개념에 따라 6,000달러의 비용으로 2학기 시간 내에 이수할 수 있는 수만큼 자유롭게 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WGU는 운영 프로그램들의 산업계와의 연계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 분야별로 실력을 규정하는 2단계 과정을 두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프로그램 위원회'다. 말하자면 산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패널이 한자리에 모여 해당 분야의 졸업생이 실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갖춰야 할 지식과 능력을 정한다. 두 번째 단계는 전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 위원회'다. 이 위원회에서는 학생들이 필요한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능력 시험을 마련하고 있다.
현재의 대학들은 학생들의 교육 진로에서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고 있다. 당신이 대학 진학을 계획한다고 치자. 초반부터 대학은 학위 수여 프로그램 중 하나에 당신의 입학을 허용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입학이 허용된 다음엔 대학에서 학위 취득을 위해 수행해야 할 요건과 더불어 입학의 혜택을 입은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할 비용까지 지정한다. 당신의 교육 측면에서 당신에게 통제권이 있는 것이라곤 어느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와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의 문제뿐이다. 이제는 우리의 교육 구조가 자율 결정의 진로를 택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학생 개개인에게 더 많은 통제권을 양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력 중심의 자격증 수여를 토대로 삼아 고등교육 시스템의 다음 2가지 부가적 특징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면 된다. 첫째, 학생들이 단 한 곳의 대학을 선택해 교육을 받는 방식을 넘어서서 더 많은 교육적 선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 둘째로는 자격 인정 절차가 어느 측정 조직에도 종속돼서는 안 된다. 그래야 학생들이 자격증 취득 방법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격증을 쌓아나갈 수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학생들이 온라인상이든 교실에서든 고용주의 직업훈련소에서든 지역 대학에서든 자유로운 방식으로 수강할 수 있다. 전 세계 수천 명의 학생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을 수도 있고 지역의 개인 지도 교수에게 일대일 대면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야간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2주간의 단기 집중 강좌를 들을 수도 있다.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강한 스타일의 교수를 찾을 수도 있고 다정한 스타일로 지도하는 교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대부분의 과정을 독학으로 자신의 속도에 따라 공짜로 학습할 수도 있다. 선택은 학생들 개개인의 몫이다. 자신의 들쭉날쭉한 측면, 상황 맥락별 기질, 예산 등에 맞춰 자신이 관련 지식, 기량, 능력을 숙지하는 데 유용한 자격증 경로를 선택하면 된다.
자율적 진로는 학생들에게 여러 면으로 유익하다. 당신이 하나의 누적 자격증을 목표로 노력하는 중이라고 치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언젠가 연구원이 되려고 신경과학 분야 자격증을 취득할 계획이라고 해보자. 당신은 신경해부학 자격증, 신경 체계 자격증을 취득한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사람들을 돕고 상호 교류를 나누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과학 연구원의 판에 박힌 지루한 일과에 속하는 생리학 세부 분야에서의 경력 쌓기에 소홀하게 된다. 그래서 경력의 방향을 바꿔 임상심리학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는다. 이 경우엔 임상심리학과 관련된 신경과학 자격증을 이미 따놓은 터라 이 자격증을 임상심리학 자격증을 따는 데 누적 적용해도 된다. 아니면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일도 당신에게 썩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기존 흭득 자격증을 기반으로 삼아 의료 기기 마케팅쪽 경력으로 자격증을 재누적해도 된다.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전통적인 4년제 신경과학 프로그램을 밟고 있다가 전공을 바꾸면 그 전공의 놓친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추가 수업료를 들이거나, 제 학사 일정에 맞춰 마치기 위해 추가 수강까지 신청해 무리를 하거나, 신경과학 학위를 이수한 뒤 임상심리학 대학원 프로그램이나 경영 대학원에 다시 지원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선택의 경우엔 더 많은 시간과 수업료를 들여 정말로 좋아하는 학과를 배우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학과에 4년을 쏟아붓는 격이다.
자율 결정형 실력 중심의 자격증 수여 방식에서는 자신이 진정한 열정에 느끼는 분야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으로 인한 불이익이 더 적고 중간에 전공을 바꾸는 비용도 훨씬 적다. 사실 전 교육 시스템이 자율 결정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면 학생들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와 재능 있어 보이는 분야를 끊임없이 재평가해보도록 장려하는 한편 학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달은 것에 따라, 또는 변화하는 취업 시장에 따라 진로 계획을 자연스럽게 조정할 만한 방법도 생긴다.
사람들이 자율 결정형 교육 진로 얘기를 처음 들으면 가장 흔히 보이는 반응은 이것이다. "그러면 대학생들에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게 하라고요? 요즘 대학생 애들을 만나보고 하는 얘기예요?" 나는 19세가 40세보다 바보 같은 실수를 더 잘 저지르기 쉽다는 지적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맡기면 안 된다는 식의 시스템도 못마땅하다. 사실 개개인의 결정력을 빼앗고 시스템에 결정을 맡겨야 한다는 식의 개념은 전형적인 테일러주의다. 다시 말해 애초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렸던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학생 각자가 다른 모든 학생들과 똑같아지면 오히려 더 좋다고 강요하는 고등교육 시스템을 바라는가? 아니면 학생 각자에게 자신만의 선택을 내리게 해주는 시스템을 바라는가?
이런 개념이 채택되면 학생들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평균의 게임을 벌이는 대신에 전문적 우수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른 학생들과 대학의 최우수 입학 지원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대신 건축 회사나 인류학 연구소의 최고 직원이나 최고의 아동복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신이 아닌 진정한 자신이 된다.
게다가 자율 결정의 실력 중심 자격증 수여제는 끝도 없이 오르는 교육비의 문제를 해결할 길도 열어줄 것이다. 이런 개인화된 시스템에서는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바로 그 자격증에 관련된 수업료만 지불하면 그 외의 비용은 필요없다. 학생들이 한 교육기관에 4년간의 수업료를 꼼짝없이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육기관들이 가능한 한 최저 용으로 최상의 자격증 프로그램을 제시하며 학생들을 끌기 위해 경쟁할 것이다.
한편 기업들과 조직들로선 해당 직무에 필수적인 기량과 지식을 갖춘 입사 지원자들을 확신할 수 있다. 아무리 까다롭거나 복잡한 직무라 해도 그 해당 직무에 필요한 자격증의 조합을 구체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데다 일련의 자격증에 요구되는 구체적 실력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쓸모 있는 인재풀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지망생들에게 비용을 후원함으로써 희귀하거나 생소한 자격증이나 심지어 새로운 자격증까지도 취득하게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한 맞춤의 실행으로 기회균등에 가장 폭넓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만한 조직을 찾아본다면 가장 먼저 공교육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교육에서의 최대 화두가 '개인 맞춤 학습'이라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또 수많은 조직들이 시스템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전통적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아직도 거의 모든 것이 학생들에게 표준화된 똑같은 체험을 강요하도록 짜여 있다. 먼저 교재만 해도 '적정 연령'에 맞도록 기획되고 있다. 특정 연령의 평균적인 학생을 대상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얘기다. (부담이 큰 중요한 시험 상당수를 비롯해) 수많은 평가들은 연령이나 학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즉 해당 연령이나 학년의 평균적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학생들이 학습할 내용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학습하는 방법, 시기, 속도, 순서에 대해서까지 정해놓은 커리큘럼을 강요하고 있다.
커리큘럼 구성이 학년이나 연령에 따라 고정돼 있기보다는 개인별 능력과 속도에 맞춰지도록 해야 한다. 또 교육적 평가가 단순히 학생들을 서로 비교해 순위를 매기는 식이 아니라 개인별 학습과 진도를 평가하는 식으로 구성돼야 한다.
테일러주의의 세계관이 사회의 구조를 바꿔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나 서로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방식, 성공의 의미를 규정하는 방식까지 바꿔놓고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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