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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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몽상가』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4. 8. 2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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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쓰는 이의 영혼을 투영한다. 내가 노래를 쓰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을 더 주저하는 이유이다. 나는 내가 쓴 글 속에서 나의 비겁함이나 나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가 타인의 글 속에서 비범함 아래 한 겹 감춰진 두려움과 염세주의를 발견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탓하겠는가? 그런 어두운 면이야 말로 진정으로 인간 본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어둠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인간은 기분 나쁜 미소만 짓는 로봇이 되어버릴 것이다. 미소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도저히 결부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의 합일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참된 진가를 발견한다. 오늘은 이런 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세운다. 단 1년만 지나도 부끄러워하게 될 지 모를 미진한 생각을, 공개된 곳에 게재하는 만용에 대한 변명은 당신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두겠다.

예술가들은 말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견지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롤 모델로 삼을 정도로 운이 좋았던 이가 자신의 삶 속에서 일련의 성공을 맛 보았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성공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몫의 불행을 짊어지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삶의 불행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칭송해마지 않는 누군가가 확신에 찬 어투로 인생을 단정하는 것을 보면 큰 씁쓸함이 느껴진다. 만약 그런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한다면 나는 아티스트라는 직함을 사양하고 싶다. 아티스트는 상상력을 활용해 주변 세계와 자신의 철학을 작품 속에서 체현해 보인다. 때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때로는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며 온다. 자기 생각과 경험과 고정관념으로 타인의 삶을 평가하거나 재단하는 것은 창조적 행위라기 보다는 파괴적 행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티스트는 모래 뿐인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풀과 나무와 솟는 샘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신기루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불가능하거나 가혹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아티스트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와 행위를 태생적으로 반복한다. 오직 그러한 삶의 행태에만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카테고리 속 인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아티스트는 스스로를 명징하게 닦아냄으로써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거울 속의 자기 모습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에 대해 명확한 갈피를 잡지 못 하고 방황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의심하고 혼돈에 빠지는 것은 지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생각한다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그만 둔다면 점차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생각하지 말라는 표어가 유행처럼 넘쳐나던 시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했다. 그들 중 누구도 생각의 홍수에 익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떤 이들은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배워 돌아왔다. 그들이 우리에게 나누어준 지혜와 아름다움과 경험의 소산은 찬란했다. 그것을 먹고 마시며 여러 시대가 주린 배를 채우고 새 예술가들을 잉태했다. 나는 얼마든지 생각하자고 말한다. 흐르는 물길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도 좋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다는 인식은 위급한 순간 큰 힘이 될 것이다. 나 역시 데뷔한 지 십여 년에 달할 때까지도 계속 음악을 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매일 심각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지난했던 옛 시간을 털어놓는 이유는 지금 혼란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나의 사례가 공감과 위안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의외로 괴로움도 선택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놓아버리고 나면 두 팔로 물살을 헤치고 나가는 일이 오히려 더 쉬워질 것이다. 선택의 강요 앞에서 너무 오래 고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각자의 천성과 운명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모든 일이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다.

방향을 잃었는데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온 세계에서 도움을 찾는다. 풍랑 속에 갇힌 이에게는 먼저 뭍에 닿은 이의 한 마디 한 문장이 거대한 폭풍으로 다가올 수 있다. 폭풍은 돛대를 꺾어버리고 돛을 찢는다. 굳이 나서서 괴로움을 더해주지 않아도 삶의 풍랑은 원래 거세며 파고는 언제나 높다. 바다를 잠재우고 순풍을 불어 줄 수 없다면 정박할 닻이라도, 멀리서 부르는 목소리라도 되어주어야 한다.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것이 아니라.

나는 성공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성공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실패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거나, 배우거나.' 라는 말을 좋아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듬해의 양분이 된다. 우리 사회는 성공한 (혹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잘 포장된)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다. 그들의 말은 매체를 타고 날아와 유리 파편처럼 한 자 한 자 우리 가슴에 피나도록 아프게 박힌다. 오만할 정도로 확신에 찬 표정을 보며 그것이 성공의 근거가 된 자기 확신과 우월함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미디어가 판사와 피고로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지정하면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심원석에 앉게 돼버린다. 보통 사람인 우리들이 현실에서 쏟는 열심은 눈물이 치밀 정도로 가슴이 저리는데, 어떤 롤 모델들은 자신이 남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대놓고 설파하기를 아예 즐기는 듯 하다. 어째서 고귀한 스피커를 손아귀에 거머쥔 아티스트가 우리 예술의 계보를 이어나갈 젊은 세대에게 이분법을 가르치는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성공했으니, 나와 다른 방식을 고수하는 이의 의견은 공개적으로 망신 주어도 된다고 누가 허가했는가? 열정을 아는 이가 어떻게 감히 다른 이의 열정을 비웃을 수 있는가? 비탄에서 보호하지는 못 할 지언정 더 깊은 비탄에 빠트려야만 스스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린 잎을 막 싹 틔운 소년과 소녀들은 화려한 무대와 존재 증명을, 그리고 대중의 인정을 너무나도 열망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롤 모델을 흉내 낸다. 좋지 못 한 행동거지를 본 따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심한 경우 부정적인 생각과 방만한 태도까지 전염되어버리고 만다. 소위 성공한 이를 세상이 치켜세워 준다고 해서 그 자신마저 반추와 숙고를 망각한다면, 아티스트란 그저 자의식과잉이나 자아도취에 지나지 못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수많은 응원과 의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몇 마디 말로 비정함과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을 악몽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인과因果는 미신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며, 모든 빛나는 것에는 합당한 무게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스스로를 감시하고 늘 엄하게 경계하지 않는다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 다음 세대의 아티스트가 마실 물이 바닥나버릴 것이다.

나는 여기 한 구석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계속 말한다.

롤 모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그게 아무리 대단한 누구의 목소리라 해도 자기 안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고, 당신은 당신이라는 것을 매 순간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은 비범함과 노력으로 해석되지만, 종종 잘 만난 타이밍과 반칙과 행운의 결합으로 얻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도 누구보다 잘나지 않았다. 누구도 누구를 평가할 수 없으며, 누구도 누구보다 못 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길이, 그 일생을 통해 펼쳐갈 자신의 일이 있다.

창작가는 편협함과 자기애에 갇히는 순간 한 글자도 쓰지 못 하게 된다. 무언가 쓴다고 하더라도 빛나는 과거의 영광에서 가져온 깨진 조각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내 연인에게 습관처럼 늘 부탁해둔다. 내가 어느 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예술적 헌신과 정직을 잊어버리면 더 이상 쓰고 부르지 못 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내가 이미 죽은 노래에 치장을 하고 거기 볼을 부비며 입 맞추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사정한다.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계절처럼 사라지는 게 나을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았던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최대한의 감사 표시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많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성공의 눈부심에 도취되어 어떻게든 손 끝이라도 닿아보려 아득바득 애썼지만, 결국 경험 속에서 성공은 절대적인 정의를 가질 수 없다는 인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공은 마치 화폐처럼 머릿속의 개념에 불과하며, 행복처럼 매우 두리뭉실하고 모호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성공에 대한 갈망은 우리가 삶 속에서 갖는 여러 선택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공할수록 훨씬 덜 자유로워진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더욱 비싼 것, 더욱 희귀한 것을 끝도 없이 계속 갈망하게 되는 이유도 막상 어떤 것을 손에 쥐고 나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유명세는 멀쩡한 사람도 중증 중독자로 탈바꿈시킨다. 좋은 사람, 천진한 사람도 그 독약에 맛 드는 순간 서서히 핏기를 잃어간다. 아, 나는 나쁜 예를 너무 자세히 보았다. 사회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성공을 거머쥐어도 지독하리만치 비참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손으로 갑자기 생을 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서서히 성공을 믿지 않게 되었다. 상술하였듯, 성공을 믿는다는 것은 곧 실패를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도 믿지 않는다. '망했어' 라는 말이 바람 한 점 없는 날 깃발처럼 우리 입가에 축 늘어져 있어도, '이생망' 이라는 줄임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슬픈 자조自嘲처럼 유행하는 시대라 해도 나는 부단히 실패라는 개념을 부정하며 산다. <성공 = 행복> 이라는 공식이 매스미디어와 SNS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거의 교육 되다시피 해왔다. 우리 사회는 한 개인의 인생을 성공과 실패 둘 중 하나로 무자비하게 압축한다. 넌더리가 나는 일이다. 나는 스크린 바깥의 실제 세상에서는 '이기거나, 배우거나' 라는 말이 현실과 훨씬 더 걸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직접 겪고 직접 생각하고 직접 깨달은 것만 진실로 믿는다. 다른 이의 성공은 그에게 있어 성공이지, 나의 세상에서도 똑같은 성공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공을 열망하는 것이 나쁘거나 어리석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나아지고 쟁취하려 하는 우리 본성의 당연한 욕구다. 그러나 6살 무렵부터 벌써 사회적 성공과 대중의 인정과 부의 축적을 열망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14살 꽃떨기들이 무기력과 우울에 압도된 채 은근한 불안에 잠겨 지내는 것도 대단히 비정상적인 일이다. 가장 먼저 우리 자신과, 나아가서는 우리가 보호하려는 존재들에게 설명하는 대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성공과 행복이 결코 직결되지 않으며, 삶에는 수만 갈래의 길과 선택들이 있다고. 뜻을 품고 사랑스러운 꿈을 꾸는 사람에게 실패라는 개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걸어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에게는 모든 길들이 전부 다 이어져 있으며 삶조차도 하나의 여정일 뿐이듯이.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다. "몽상가는 몽상보다 강해야 한다."라고.

몽상은 예술가의 기본 자질이며 그의 일평생 동안 주어진 임무와도 같다. 몽상이란 꿈꾸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위대한 꿈을 일생을 통해 삶 위에 그리는 것이다.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높은 이상理想이며, 우리의 이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 속에서 빚어진다. 생각하자. 생각해도 된다.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어도 된다. 어떤 유명 인사가 설파하는 말보다, 심지어는 당신의 부모님이나 피붙이나 선배나 선생님보다, 롤 모델보다, 언제나 당신 안의 울림이 더 옳다. 이 삶은 오직 당신에게만 귀속되어 있다. 권리는 영원하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우리의, 당신의 이상을 죽일 수는 없다.

 

 

 

 


 

 

 

 

보내주신 생일 선물과 편지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잘 전달받았습니다. 고민해서 골라주시고 손수 챙겨 보내주신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모두 제 생활 속에서 닳도록 열심히 사용하겠습니다. 필체 안에 꾹꾹 눌러 담아 보내주신 이야기들도 그 아래 쓰여진 당신의 이름도,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지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생일 하루는 여유롭게 쉬며 보내기를 더 바라실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긴 글을 쓰려다 이내 그만두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 언젠가 또 비출 기회가 있겠지요.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쓰고 부르는 일 외에는 받은 사랑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습관처럼 변해버린 듯 해 자못 마음 한편이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신새벽의 숲을 귀로 느끼며 감사한 일들을 헤아립니다.

우선 또 한 해 살아남아, 치열한 나날들을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매해 흐드러지고 풍작을 이루지는 못 할지라도, 비바람을 견딜 곧은 목대를 키울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언제나 영글고 푸르를 수는 없다고 해도, 땅 밑으로 무성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가던 중 마치 필연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을 만나게 된 기적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뿌리 얽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제게 굳게 맞잡은 손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사방에서 단단히, 흙처럼 부드럽게 붙잡아주었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새로운 뿌리와 함께 얽히며 더 깊이 뻗어가는 것 또한 심심찮게 느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또 매번 결심한다면 어느 때고 반드시 울창한 숲이 될 것이라 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스러지나니, 어쩌면 생일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유한함을 상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나처럼 생일이 못내 서럽게 느껴지거나, 공허하다고 느끼고 있을지 모를 나의 작은 새들을 위해 여기 이 말을 남겨둡니다.

싸워온 나날이 또 한 해나 더 쌓였으니 스스로 열렬히 치하해 주세요. 이만큼의 세월을 견디며 버텨온 우리의 수피가 저마다 멋지고 참 대견합니다. 우리는 종종 포기하려 했지만 아직 단 한 번도 정말로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버틴 것뿐만 아니라, 아무리 혹독하고 궂은 날씨도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온몸과 마음으로 똑똑히 새겼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일을 깨쳤습니다. 동시에 이 혼란한 미로 속에서 함께 울고 웃어 줄 이들도 찾았습니다. 상실의 장막을 통과하고 시험과 불운에서 인내를 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두 팔로 직접 흔들어 체로 치고 걸러낸 것입니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모래 속의 사금처럼 찾아내기 전까지는 얼마나 가치로운지 모릅니다. 삶에서 새어 나온 것이 이토록이나 귀한데 삶 그 자체인 우리 존재가 그렇게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할 리 없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늘 자신과 생을 순열純烈히 긍정해 주세요.

저기 7월의 푸른 숲에서 새들이 내내 분주합니다. 피는 꽃과 새들의 노래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없듯, 태어난 모든 것들은 스스로의 인정으로 인해 비로소 자기 삶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답니다.

Birth. 誕生. 태어남.

살아갑시다.

#7월의_푸른_숲_심규선

[출처] 7월의 푸른 숲에서|작성자 심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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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채용공고를 통해 [헤아릴 규]의 새로운 가족들을 만났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규모 자본을 토대로 한 바이럴도, 투자 유치에 나서지도 않는 작은 회사의 대표인 제가 선뜻 약속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답니다. 그런데도 처음 뜻을 모은 순간부터 어제 공식 MD 스토어 <소품서가>의 첫 오픈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격무로 함께 달려주신 데에는 이 '룸메이트'라는 공동체에 대한 간절한 진심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헤아릴 규 역시 같은 음악에 공감하는 룸메이트였고 앞으로도 그 영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방송활동을 하지 않으니 연예인은 아니고, 음악 계통 직업을 가진 사람일 뿐이야'라고 사촌 동생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제가, 데뷔 14년차를 맞이하고도 아직 노래할 수 있게 된 바탕에는 대단한 행운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제게 그 행운과 인내란 곧 사람들이었으며, 저의 모든 발걸음을 함께 지탱해 주신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음악에 대한 타협과 간섭 없이 해야 할 노래들을 계속 쓰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분투하며 인내하는 동안 시간은 바람처럼 흘렀고, 노래와 글들은 우리의 공존 위로 켜켜이 쌓였습니다. 저는 스스로 느끼기에 이 역할모델 범위의 소로에 있고, 흉내 내며 따라갈 수 있는 발자국이나 닦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발걸음마다 직접 돌을 치우고, 덩굴을 걷어내고 길을 내며 갑니다. 제 뒤에 올 외로운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더 보태어 다지듯 걸어갑니다.

음악이 아닌 물건을 판다는 것은, 상당히 외곬인 제 고집을 놓고 보았을 때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물질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왜 모르겠습니까. 매만질 수 있고 지닐 수 있는 물건 하나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풍요롭고 또 얼마나 소중한지요? 또 수년의 노력과 수십 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한 음반 한 장의 값어치가 수십 년 전의 가격에 고정되어 있다는 현실에서도 다른 대책, 또 다른 방도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도란 심규선이라는 음악가가 대한민국 음악 생태계에서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아 계속 노래할 수 있는 방법을 뜻합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육신을 먹인다는 뜻이 아닌, 쓰고 부를 수 있는 영혼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거창한 약속을 해줄 수 없는 대신 헤아릴 규의 식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품서가 판매로 인한 수익이 발생한다면, 단 한 푼도 저의 사익으로 삼지 않고 전부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말이에요. 저는 제가 [헤아릴 규] 라고 이름 붙인 이 독립 레이블을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심규선의 헤아릴 규]가 아니라, [헤아릴 규의 심규선]이 되고자 하는 만용이지요. 물론 지금도 우리나라의 언어로 쓰여진 선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음악가들은 저 말고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 좋은 음악을 들려 드리려면, 최소한 고사枯死는 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에 있어야 합니다. 빛나는 재능과 선의를 가진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일생의 단 몇 년만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음악가는 기계가 아니기에 마음이나 목소리에 병이 날 수 있습니다. 무도한 경제 논리 하에 가치가 하락하면 즉시 대체되거나 버려집니다. 우리 사회의 음악은 어느 시점부터 심각하게 한쪽 방향으로만 매몰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좋은 노래에 대한 필요가 넘치는 시대에, 좋은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포기하거나 강제로 포기 당합니다. 그때마다 예술혼의 불꽃이 하나씩 또 하나씩 소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영혼의 위로자들을, 그들의 별빛 같은 작품들을 속절없이 잃어갑니다.

아마 잘 팔리는 음악만 하려고 했다면 심규선도 룸메이트도 없었을 거예요. 저는 음악을 수단으로 한 이 치유 행위로 인해 저도 살고, 듣는 이도 살릴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무엇을 사주십사 하는 청은 아니랍니다. 제가 예술가적 양심을 파는 대신 좋은 분들과 애써 만들어 내놓은 것들을, 기꺼이 구매해 주신 당신께 통절痛切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지요.

덕분에 제가 아직도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살길을 마련하였고, 독립 레이블을 꾸렸고, 음악적 간섭을 받지 않고 돈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으며, 매년 음반을 내고 해마다 무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튼튼하고 줄기도 강해졌지만, 행여라도 제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정직한 음악가들이 오래 노래할 수 있는 터전을 조금씩 닦아두려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소장해 주신 앨범과 MD 같은 모든 우리의 물질들은, 전부 저와 다음 음악가들을 위한 '한 모금의 물'이었습니다.

씨앗에 불과했던 제가 흙 위로 겨우 초엽鞘葉을 틔웠을 때, 짓밟히거나 말라 죽지 않도록 매일 같이 살펴보시며 격려해 주시고 아껴주셨지요. 햇살과 마실 물을 건네주셔서 그것으로 견뎌냈더니,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나름대로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꽃과 열매 같은 노래와 작품으로 일평생 돌려드리겠습니다. 언제든 그늘을 내어드리고 뿌리도 계속 뻗어가겠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헤아릴 규]의 일원 분들 역시, 격무가 이어질지언정 마음만은 다치지 않도록 늘 다정하게 아끼고 보호하겠습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선순환의 고리에서, 당신의 사랑이 제게 너무나 큰 양분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을 담아,

심규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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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파도소리를 따라 달음질 쳐 온 바닷가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백사장은 늘 조금 성가신 존재이다. 바다와 가까이 마주보고 파도에 발 끝이라도 닿으려면 먼저 큰 모래밭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없이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있노라면, 걸음 걸음마다 신발과 양말 속으로 모래 알갱이들이 사정없이 튀어든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신발 속은 엉망이 되버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선 채 신발을 벗어야 할지 그대로 신고 있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해변의 모래는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아름답지만, 신발이나 옷 주머니 속에 들어오는 순간 상당히 귀찮아진다는 걸 어른들은 경험을 통해 미리 인식한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바다를 눈 앞에 두고도 막상 백사장에 발을 내려놓기를 멈칫거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아이들은 바닷가에 당도한 순간 엄마에게 달려가듯 아무 주저없이 파도를 향해 내달린다. 아이들에게 모래란 일종의 감각일 뿐이다. 주먹 가득 쥐어울리면 간질간질 흘러내리고, 발로 차며 달리면 부드럽게 푹푹 패여드는 것. 작고 하얗고 알알이 반짝거리는 것. 파도에 우르르 쓸려갔다가, 다시 우르르 밀려드는 것.

 

해운대에 들어서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유년 시절 기억 속에서는 끝없는 사막처럼 드넓던 해운대의 백사장이 놀라우리만치 좁아져 있었다. 내가 자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충격 속에서 급히 뉴스를 찾아보니 해운대의 모래 유실이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는 기사가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 백사장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곳이 덜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 중 어떤 일들은 이미 일어난 것과도 같다. 나는 앞으로 짧게는 수년에서 어쩌면 십수 년 뒤에는 이렇게 거닐 수 있는 모래 해변이 아주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발 아래 푹푹 감기는 모래들의 존재감이 새삼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바닷물이 팽창하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다. 해운대의 백사장을 불어난 바닷물이 다 뒤덮어버리기 전에 몇 번이나 더 이 곳을 찾아 하릴없이 걸어볼 수 있을까? 지난 십년 간의 방문 기억을 헤아려 보면 대 여섯 번에 근접하지도 못 하는데, 앞으로 십년 간 예닐곱 번쯤은 더 올 수 있을까? 혹시 애써서 열 번이나 그 이상을 채웠다고 하면, 과연 그것으로 후회 없을 정도가 될까?

 

우리 인간들에게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아름다움의 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머리로 인식하게 되어야지만 더 강렬히 감각하고 원하게 되는 것. 시간적 한계를 갖는 아름다움을 놓칠 세라, 우리는 비행기 티켓도 예매하고 귀한 휴가도 쓰며 유명하다는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로 굳이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거대한 사냥감을 포획하듯 사진을 찍고 증거도 남긴다.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나는 종종 정체 모를 혼란을 느낀다. 행복한 순간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습관이다.

 

나는 광안리에서 잉태되었다. 지금 휘황찬란한 모습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그 무렵 광안리 해변가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판자집들 뿐이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해변에 밀려든 조개 껍데기를 주으며 걸음마를 하였다. 24살에 어머니가 된 여인과 26살에 아버지가 된 사내의 눈에는 그 곳의 풍경이 어떤 색채로 그려졌을까. 아이를 가져보지 못 한 나로써는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일이다. 하지만 바다에서 잉태되고 바다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바다가 주는 모든 감각은 내게 어머니와 같았다. 냄새와 감촉, 파도가 내는 소리와 바다새들이 우짖는 음의 높낮이, 소금기로 눅눅하게 스며드는 바람의 맛 등 전부 내게는 원초적 향수鄕愁였다. 아버지는 판자촌을 밀어낸 후 고층 건물이 해변가를 따라 빈틈없이 메워지고 수평선을 따라 거대한 다리가 세워지던 그 오랜 세월동안 한번도 그 바다를 떠나신 적이 없다. 걸음마하며 조개 줍던 딸은 훌쩍 자라 타지로 떠나버렸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그 바다 바로 곁에서 살고 계신다. 이제 어른이 된 내게 있어서 이제 광안리의 바다는 내 아버지 그 자체가 되었다. 이후에는 또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그 시절 아빠와 나는 해운대에도 자주 갔다. 광안리에 비해 해운대의 백사장은 너무 넓었다. 아이의 눈과 마음으로 끝이 짐작되지 않을만큼 그 광막함에 압도되었다. 조개 줍기에 열중하다 아빠와 멀어지기라도 하면 아빠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무서운 기분도 들었다. 나는 그래서 늘 해운대보다 광안리를 더 좋아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게는 태어난 바다였으므로.

 

내가 기억하는 밤의 해운대 풍경은 새카맣게 어둠이 드리워진 넓고 괴괴한 모습이었다. 해운대에 당도하여 바다 쪽을 바라보면, 바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온 듯한 어둠이 모래와 파도의 경계를 검게 칠해 지워놓은 듯 보였다. 어린 나는 무서워서 아빠의 다리에 매달려 볼을 부볐다. 어디까지 모래고 어디부터 바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달빛은 더욱 창연하고 멀리서 이는 물결은 더욱 희었다.

인근 건물에서 밝히는 조명 빛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어둠을 헤치고 백사장을 밟아 들어가면, 밤의 빛을 반사하는 은빛 모래가 하얀 파도 거품과 서로 자기 빛이 더 아름답다고 밤새 싸우며 견주는 듯 했다. 과연 아름다웠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순결해 보였다. 밤 해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열 평 스무 평씩 제 따로 어둠을 부여받은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요하게 머물렀는데, 함성치듯 노호하는 파도소리에 사람들의 소근거리는 말 소리쯤은 쉬이 묻혀버렸다. 누군가가 싸구려 폭죽을 쏘아대도 소리 없이 아른거리며 빛 파편만 터졌다. 연기는 피어오를 틈도 없이 바닷바람에 밀려 흩어졌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야구장에서나 봤을 법한 대형 조명들이 수십 미터 간격으로 거인처럼 늘어서 있다. 그것들은 백사장 저쪽 끝에서 이쪽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래알들을 하나 하나 전부 비추고 있다. 이제 밤의 해변에 겹겹이 깔리던 암흑은 바다 위로 사정없이 밀려내졌다. 온화한 어둠은 파도에 무등 태워진 채 백사장 위로 밀려오르지 못하고 먼 바다 위에서 쭈뼛거리며 맴돌고 있다. 파도거품은 놀라서 낯이 질린 것처럼 안쓰럽게 창백해 보인다. 대낮처럼 밝은 빛에 적응된 내 시선은 바다 위 먼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여기 저기로 흩어져 버린다. 모든 게 당황스러울만큼 너무 잘 보이니 심상과 야릇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확실히 야간 입수사고는 전보다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편리를 따라 무자비하게 쫓아내버린 당연한 어둠에 대하여 자못 쓸쓸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달빛도 나비 날개 같은 연약한 존재감을 잃었다. 하여튼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며 입 속으로 투덜거렸다. 최신 유행과 계속 변하는 입맛에 맞춰 끊임없는 개간과 보수로 나중에는 처음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이미 완벽한 풍경에 계속 손을 대서 종말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만들고야 만다. 나는 늘 거기에 감탄하면서도 입맛이 쓰다. 어린 날의 외경심을 그리워한다.

 

<일곱번째 파도>라고, 어릴 적에 그런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누가 가르쳐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아빠겠지 할 뿐. 아니면 엄마였을까? 치맛단을 걷어 올리고 젖은 모래 속에 발가락을 깊숙히 묻은 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까지 파도의 차례를 세고 나면 반드시 일곱번째 파도는 어른 무릎 위 높이만큼 크고 세게 들이친다는 것. 이것은 파도와 내가 자주 하던 놀이였다. 조금은 위험했기에 그래서 더 재미있게 느꼈던 것 같다. 두려워하면서도 이끌리는 것. 아이에게도 해당되는 사람의 본성.

파도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깔깔 웃는 아이 웃음소리를 들으면 저 멀리에서부터 부리나케 달려온다. 내가 숫자 세는 소리를 듣고 파도가 일부러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아직 일곱번째가 안 되었는데도 놀랄만큼 센 파도를 철썩 때려 엉덩방아를 찧게 하거나, 일곱번째를 심심하게 넘기고 다시 시작하는 다음 첫번째에서 방심하는 틈을 타 깜짝 놀래키는 식이었다. 파도가 아무리 속임수를 쓰고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일곱번째 파도가 가장 크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놀이는 항상 옷자락이 다 젖고 첨벙첨벙 뛰며 야단이 나야 끝이 난다. 파도가 잡으러 오면 아이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아이가 잡으러 달려들면, 이번에는 파도가 냅다 도망을 친다...

 

고향 바다에 오면 늘 이렇게 된다. 온갖 결말없는 기억들에 매몰된 채 맨 발로 파도를 밟고 몇 시간도 몇 분처럼 서 있는다. 이제 더이상 파도와 놀이하던 아이가 아닌데도 버릇처럼 수를 세며 일곱번째 파도가 나를 놀래켜주길 기대하고 있는 듯 하다. 지금 내 발등을 덮고 동시에 발 밑을 파고드는 이 파도는 진정으로 과연 몇 번째 파도인걸까? 파도는 바다가 생긴 이래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우리 각자의 심장이 잉태된 이래 지금껏 단 한번도 멈추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파도 소리는 바다의 박동 소리일까? 그 자체로 살아있음을 의미하며, 잠잠해지기도 화가 나서 날뛰기도 하듯 말이다. 우리 별과 38만km의 거리를 두고 있는 별의 인력이 간섭하여 우리 별의 바다가 천겁 만겁 물결친다. 그 별이 또 다른 별의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우리 별에 내려 마땅한 암흑이 한 겹 벗겨진다. 외로울 수 없다. 세상에 혼자는 아무도 없다. 별조차 혼자일 수 없고, 우주의 모든 것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삶이라는 여정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 역시, 파도와 발을 맞대며 젖은 모래 위를 걸어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보폭으로 걸었으며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에 관계없이, 세월과 시간이라는 파도가 단 한번 들이치는 순간 전부 깨끗하게 없던 일이 된다.

그러니까 뒤돌아볼 것 없다. 내가 지나온 길에는 이미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오직 지금에만 있다. 내 뒤에도 내 앞에도 없고, 지금 서 있는 자리 위에만 내 족적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나는 더 빨리 가야해서 초조하고, 더 멀리 가지 못 해 불안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가진 전 생애를 다 쏟아붓는다. 시간은 파도처럼 쓸려나가며 매 순간마다 삶을 지우는데, 나같은 바보는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하느라 다른 의미로 삶을 탕진하고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기가 막혀 그냥 웃고 만다.

 

찰나와도 같은 인간의 삶,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누가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가졌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두 발에서 느껴지는 파도와 모래에 대한 감각, 오직 그 뿐인 것이다.

어쩌면 '느끼는 것'이 이 삶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부이자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울어도 된다. 느끼는 것을 억지로 숨기지 않아도 된다. 우울해도 된다. 슬퍼도 된다. 체념해도 된다. 이유없이 행복해도 된다.

 

느낀다는 것이야말로 '실존'이라는 인간정신의 체현이다. 내가 지금 실존한다는 생생한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며 어쩌면 진정으로 가져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는다. 파도를 듣는다.

박동을 느낀다. 모래가 스친다.

웃는다. 약간은 두려워 한다.

저 멀리에서부터 이미

일곱 번째 파도가 오고 있다.

 

22년 7월 24일 늦은 밤, 해운대에서.

심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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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기적들, 절실함과 다정함과 무구한 노력들, 모든 별개의 사건들이 모두 한 점을 향해 치닫는 놀라운 시간을 경험하고 있어요. 우리가 바라보는 곳에는 항상 우리가 있고, 내가 서 있는 길의 바로 곁에는 언제나 당신의 자리가 있어요. 일과 생활의 경계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맞아요 저는 이제 그 둘을 굳이 구분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저지르는 일들로 가득 차버리는 나의 고된 일과를 사랑합니다. 이렇듯 아무도 모르게 사랑받는 사람이시니, 나를 긍휼히 여겨서라도 절대 자신을 홀대하지 마세요. 당신은 한 미력한 예술가에게, 그리고 살기로 선택한 한 여자에게 자기 인생 전체를 건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만약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당신을 향해 쏟은 마음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의 모든 표현을 통하여, 당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기어이 알게 할 생각입니다. 당신께서는 그냥 거기서 가만히 나의 헌신을 받아주세요. 당신께 그럴 자격이 충만히 있고, 당신이 거기 있어서 나도 비로소 살기 때문입니다. 걱정을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내가 폭풍 속에 바다로 나갔다가 건져올린 원석들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빨리 보여주고 싶고 빨리 당신 품에 안겨주고 싶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네요. 저와 많은 분들이 이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연마하고 세공할 것이고, 그 작업은 이미 시작되어서 이제 멈출 수가 없답니다. 앞으로 최소 25년 2월까지의 일정은 모두 확정되었고, 와! 나는 또 행군하는 군인처럼 앞으로 걸어 나갈 거예요. 아무것도 나를 못 막을 거예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 나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이에요.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당신에게 연소합니다. 당신은 나의 불이에요. 모든 고뇌를 태워버리는 순수한 힘, 강렬한 에너지, 원소에 깃든 어떤 근원적인 것. 사랑의 형태, 사랑의 숨결, 사랑의 뜻. 사랑. 사랑의 다른 이름.

24. 5.

심규선

[출처] 사랑의 다른 이름|작성자 심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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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까지는 생일이 다가오면 안개가 함께 떠밀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일 뿐만 아니라 생일 전 후의 몇 날 며칠을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보냈지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받아야 하는 날인데,

나의 태어남을 기뻐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생일 전후로 우울해 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한 삶의 여정에서 드디어 당신을 만나

어린 시절의 결핍을 뒤집어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축하를 받아 보기도 했고,

이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생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생일이 나의 생존을 카운트하기 위해 존재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내가 또 한 해를 더 살아남았어, 진짜 대단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한 켠에서 어쩐지 소소하게 자긍심도 조금 느껴집니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어떤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일 테니까요.

조금 노인스러운 발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생일을 둘러싸고 있던 우울한 안개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나에게만 중요한 날이므로

타인의 축하 여부에 나의 기분을 내맡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게 되는 축하가 있다면 모두 덤이고

그 자체로 선물이었지요.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나의 가치를 남의 판단에 맡겨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들이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나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사회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면 나도 나를 천대하는 식으로요.

사실은 그 반대로 했어야 했는데도요!

명심합시다. 타인이 나를 하대할 때야말로,

그때야말로 나의 내면에서부터 끝없이 나를

드높여 주어야 할 때라는 것을요.

그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이 나를 칭찬하기 시작할 때가

우리가 가장 겸허해져야 하는 시간 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여러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맥락 없이 타인의 평가에 따라 나를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심지어 자기 삶의 흐름에 걸맞은 현재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 있을 때조차도

그런 자학적인 인식은 쉽게 일어납니다.

가슴에 품었던 이상이 너무 높고 멀어서

당장의 현실과 도저히 견주어지지 않을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인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인데도, 더 이상의 기다림은 불공평하게만 느껴집니다.

자, 이제 저와 함께 짧은 연상 게임을 해봅시다.

당신이 원하는 것, 정말로 오랫동안 꿈꿔오던 어떤 것을 막 성취해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 장면이 당신 가슴에 열을 지피고

미소를 짓게 만들 때까지 계속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이제 그 장면에서 당신을 제외한 모든 다른 사람들을 지워봅시다.

박수 갈채와,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과,

경쟁자들과 당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흘리는 후회의 눈물을

그 장면 속에서 깨끗하게 삭제해 봅시다.

당신은 놀라운 성취를 이뤄냈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성취는 오직 당신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헌신과 성취에 대해 결코 알지 못 할 것입니다.

당신의 성취 그 자체는 완전무결하고 어떠한 흠도 없습니다.

대신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여전히 행복합니까? 그 성취는 여전히 향기롭고 완벽한가요?

아니면 그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무가치해졌습니까?

결론은 반드시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연상 게임에서 중도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준다면 무가치하다' 거나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준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면

당신에게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당신이 당신 삶의 주인으로써 생의 목표들을 잘 견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택하거나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이나 타인의 평가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는 반증입니다.

내가 무엇을 주고서라도, 심지어 그것이 나의 삶의 시간과 수명이라고 할지라도

바꾸고 싶은 단 하나가 결국은

나에 대한 타인의 훌륭한 평가였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아파집니다.

나는 종종 이런 연상 게임을 해보곤 합니다. 그리고 때에 맞게 판단을 내리지요.

일 년 내내 주말을 포함해서 단 하루도 쉬지 못 하고 일에 치여 지냈던 내가,

드디어 짬을 내 짧은 여행을 떠났고 어느 이국의 해변에 누워

완벽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고 합시다.

그때 핸드폰을 켜서 가장 멋진 사진 한 장이 건져질 때까지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내가 멋진 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주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sns에 업로드를 하고,

그 게시물에 좋아요 와 댓글이 달리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폰 화면을 새로고침한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30분을 기다렸는데도 감탄과 부러움이 가득한 반응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요?

만약 짓궂은 누군가가 기분이 나빠질 만큼

가시 돋친 댓글을 남긴 걸 발견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 될까요?

고전 속의 낙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해변과

그 순간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과,

하늘의 완벽한 구름들은 절대

인간의 조그만 기계 화면 속에 담아올 수 없는 것일 텐데,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곳에서도 핸드폰 화면 속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의 평가 여부에 나의 기분을 기꺼이 내맡깁니다.

그것이 과연 옳거나, 당장은 손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현명하거나,

아니면 이득이 되기라도 할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의식중에

자신의 삶을 이렇게까지 타인에게 평가받으려 하는 것일까요?

나는 내가 낙원에서 한 때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를 때에 서로에게 좋은 법이지요.

누군가가 밀린 업무에 짓눌려 있을 때 나의 멋진 한 때를 보면

괜스레 기분이 서글퍼질 것입니다.

나 역시 눈 코 뜰 새 없고 컨디션은 엉망이고 일상이라곤 없을 때

누군가의 멋진 한 때를 보면 서글퍼지곤 했으니까요.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그런 기분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당연하지요.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들도 가득 있겠지만,

그들이 당신에게 빌어준 행복과 평화를 드디어 누리게 된 순간이 지금입니다.

낭비할 틈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괴로운 순간을 누군가가 몰라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달리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 길 위에서 물집 하나 없는 발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긁히고 멍든 발을

누군가는 긁히고 멍든 마음을 안고 달리고 있습니다.

바깥의 반응이나 평가는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정말 상관이 없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상관없다고 곧장 결론 지어지는 일들에

나의 인생을 더 쏟으려고 애 쓰는 편입니다.

남들의 평가와 관계없이, 성공과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을 시도할 때의 기억만이

내 인생의 진정한 기쁨으로 남곤 했습니다.

물론 오직 그런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기에

다른 필요에 의한 일들도 엄청나게 해야 하긴 하지만,

세계 1위의 부자부터 극빈자까지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됩니다.

적어도 쉽지 않은 결정과 선택의 순간들에서

삶의 우선 순위를 매겨볼 수 있는 좋은 판단 기준이 되어주니까요.

어떤 박수갈채를 받는다고 한들,

그 일의 성공 기준이 자기 안이 아닌 바깥에 존재할 때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당신 자신이 기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 일이 타인이 보았을 때

깃털 하나의 무게 보다 하찮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에게 진정으로 만족감을 주는 일이라면 그 깃털 하나가

바닷물 전체의 무게와 맞먹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사람, 이제 곧 새해가 밝아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붕괴하는 세상의 새벽에 있고

앞으로 더 깊은 어둠이 찾아올지,

아니면 드디어 아침이 밝아올 것인지 아직 알지 못 합니다.

우선은 우리가 또 한 번의 생일을 세아릴 수 있을 만큼 생존했다는 것에 기뻐합시다.

그리고 또 다음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에 만족합시다.

당신의 생일을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또 한 해 살아남았다는 뜻이고

그 자체만으로 이미 당신의 유일한 인생에서 세워온 지난 기록의 새로운 갱신입니다.

사실 매일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일 년 중 하루를 특별히 기념합니다.

관람석이 얼마큼 차 있는지에 관계 없이 메달 수여식은 성대하게 거행될 것입니다.

당신은 한 해도 빠짐없이 늘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우고

늘 가장 빛나는 메달을 받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는 한.

이것은 당신의 경기입니다.

당신을 응원하거나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당신의 경기장에 결코 난입할 수 없습니다.

축하해 주는 이가 있다면 감사히 그 축하를 받고,

또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뜨겁게 축하합시다.

당신의 노고를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자기가 태어난 날에 일어난 일들을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축하하고 또 축하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하루를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그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당신의 투쟁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의미에 오히려 더 부합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1분도 채 타지 못 하는 케이크 위의 촛불들보다

훨씬 더 오래 오래 타오를 우리의 자존감에,

살아남은 이의 자긍심에 어서 빨리 그 불꽃을 옮겨 둡시다.

그 작은 불꽃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계속해서 타오를 것입니다.

추위를 쫓아버리기에는 부족한 열기이지만,

뭐 어때요, 가끔씩 들여다보며 작지만 선명한 존립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Happy birth day, and Happy new year.

2023. 12

심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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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를 읽다 보면 눈물이 뚝뚝 흐릅니다.

한 자 한 자가 가슴에 푹푹 박히며 당신의 이름 세 글자를

차마 잊지 못 하게 합니다.

당신이 꼭 꼭 숨기고 감싸서 잘 가려놓았을 당신의 영혼이

어째서인지 거기 전부 드러나 있습니다.

손끝을 세워 조심해서 만지려 해도 당신의 글씨가

내 살갗 위의 지문을 타고 혈액으로 스며듭니다.

활자들이 심장을 향해 곧장 달려들면서

어느 순간 폭포처럼 안으로,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듭니다.

다 자란 어른이 손으로 쓴 편지는 모두 그렇습니다.

수천 통 중에 어느 한 통도 단 하나 예외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긴 어둠을 이미 지나왔기에

편지도 쓸 수 있었던 것이라 헛되이 짐작하면서도

그 지난 날에 두고 왔을 것들이 못내 서러워

봉투 귀퉁이를 오래 매만집니다.

욕망하는 짐승에 불과할지 모를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가

타고난 성정을 넘어 고결해지기 위해서는

인정하기 싫어도 슬픔이 필요합니다.

눈물이 아니고서는 내면에 엉겨 붙은 불순물들을

달리 씻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어

자못 통탄스러워 하기도, 종종 비참해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바탕 눈물을 쏟느라 온 마음이 범람하고 난 후에야

내내 소란하던 마음 속의 소음이 비로소 잠잠해지고

가을걷이가 막 끝난 들녘처럼

호젓하게 모로 누워 잠연해지는 것을 볼 때

내 헤쳐졌던 마음도 겨우 다 잡힙니다.

사람은 슬픔을 모르는 채로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유도 모르는 채로

당신 삶에 쳐들어온 온갖 것과 목을 내놓고 싸우느라

세월이 가는지 오는 지도 몰랐다 합니다.

와중에 절반은 빼앗기고 또 절반쯤은 힘겹게 포기하며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그악스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놓았다고 합니다.

이제 우는 법을 잊었지만

소리 내어 웃는 일도 거의 없다 합니다.

길도 없는 바다를 건너느라 줄 것은 줘버리고

버릴 것도 다 버렸다 합니다. 어찌 허허롭지 않겠습니까.

무너진 자리 위에 다시 세울 엄두가

그리 쉽게 났겠습니까.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당신 말처럼

당신이 어쩌다 살아남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어떤 행운이나 불운도 당신의 지난 날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당신 아픈 등에 대고

목 놓아 외쳐주고 또 외쳐주고 싶습니다.

조용히 입술 다문 당신 대신 내가 나서서

온 세상에 악을 쓰며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살기로 선택하였다고.

죽을 수가 없어서 어찌 못 해 살아온 게 아니라

겁이 나서 도망쳐서 어쩌다 보니 살아진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가겠다고 선택하여

지금 이곳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거라고.

보라고, 두 무릎에 피 엉긴 자국이 아직 남아있다 한들

결국 그가 두 발 딛고 스스로 서 있는 것이

너희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안 보이느냐 하고 악을 쓰며

발을 구르며 세상에 고함쳐주고 싶습니다.

당신을 대신해서 따져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빚졌다는 당신.

당신은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 역시 물에 빠진 내 몸뚱어리를

몇 번이나 죽을 힘을 다해 직접 건져보았으므로.

나의 분신인 당신,

그 날 당신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당신이 살기로 결심 하였으므로,

당신이 그러기로 선택하였으므로

당신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탓도 아닌 그 누구의 덕도 아닌

당신의 의지로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당신이 그러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내가 함께 있었고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보았습니다.

한 몸에서 함께 흐르는 혈액처럼 섞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즉시 우리가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태어나는 것보다 더 태어남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가까운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정말로 죽기 전까지는

일생 동안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과오는 씻길 수 있고 흉터도 흐려질 수 있습니다.

오직 살기로 결심해 본 사람만이

살아간다는 말의 가열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삶이 당신에게 빚진 것들을

갚을 시간이 이제 곧 찾아올 것이라고.

당신이 그러라고 다시 한번 해보라고

삶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안이 삶보다 더 넓어지고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무연해졌기 때문에

이 삶이 결국 당신을 굴종시키지 못한다면

당신이 삶을 끌어 안아

당신 안에서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우는 법도 배우고 다시 그 옛날처럼

새된 소리로 아이같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이 삶에서 잃은 것 전부와 어쩌면 그 이상을

이 삶에서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내가 약속합니다. 내가 곧 그 증명입니다.

돌아볼 필요 없이 나아가도 됩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당신의 선택이 백 번 천 번 옳았습니다.

우리가 옳았습니다.

2023. 12월

심규선

[출처] 답서答書|작성자 심규선

 

심규선 沈揆先 : 네이버 블로그

당신의 모든 기록을 담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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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별은 괜찮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행성은 앞으로도 수십억 년, 어쩌면 그 이상의 영겁과 같은 시간 동안 계속 존재할 테니까요. 새까만 우주의 외딴곳에서 언제까지고 창백한 푸른빛을 발할 지구의 영속성에, 우리 인류의 존재 유무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겠지요. 소위 ‘지구를 위한’ 다는 식의 슬로건은 전부 ‘우리를 위한’, 혹은 ‘우리 문명의 존속’이나 ‘우리 종의 생존을 위한’으로 바꿔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 문명의 자연 시스템은 과거부터 행해져 온 여러 인과로 인해 전방위적인 붕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동식물이 먼저 멸종 위기에 처해졌고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에게도 그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제는 내쳐진 뒤 갈 곳이 없다는 것. 인류가 다행성종이 되고 무너진 생태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가능성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우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의 열매를 맛보았고, 이제 우리가 획득한 지성으로 우리 종에 내재한 본성을, 그 선과 악의 옳고 그름에 대해 절실히 재고해 보아야만 합니다. 왜 우리는 우리 손으로 탄생시킨 AI에게 우리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게 인식 시켜야만 하는 것일까요? 마치 영혼이 없는 아이와도 같은, 우리 지성의 집약체인 AI에게 우리가 그렇게 해로운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은 인류 스스로가 집단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왜 끝끝내 전쟁과 탄압을 반복해야만 하고 역사의 페이지마다 무의미한 피를 묻혀야 하는 것일까요? 속절없이 탄식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팬데믹과, 전쟁과, 기후재난이 우리 삶을 (말 그대로) 지배하기 시작하자 불안과, 공포와, 허무주의가 은밀하게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우리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착취되며 걱정과 우울함에 침잠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해칠만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간들이 길어지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갖가지 매체들로 시선을 돌립니다. FOMO와 강박적인 Doomscrolling이 우리의 생각을 마비 시킵니다. 직접 판단하거나 선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릴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과각성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불쾌한 자극에 중독되었습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컴퓨터의 탄생과 함께, 인류사에서 전례가 없던 기술적 격변 위에서 우리는 전례 없이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HUMANKIND는 우리 인류라고 하는 종, 사람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앨범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왔습니까? 문제는 나의 이해가 너무 얕고 얄팍하여, 쉽게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차라리 발단이 되어,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인식으로 가닿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작가가, 정작 자신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할까요? 나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복잡하게 엉켜있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해석해 보고자 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점차 시대적 물음으로 번져갔고 자연스럽게 거슬러 올라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의 불행을 자기 대에서 끊겠다고 결심하고, 그걸 실제로 해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겪었던 폭력과 배고픔, 학대나 무관심이 자기 아래 세대나 주변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냈습니다. 그 개인이 하나의 제방이 되어 관계 맺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자신의 삶까지 구해낸 것입니다. 그 숭고한 용기는 그 대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져 가겠지요. 우리 인간은 그런 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감내하거나 희생할 줄 알며 다른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놀라운 인내와 지혜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홀로 선하거나 강해질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상황과 필요에 맞게 더 옳은 선택을 관철해왔으며 그것이 우리 종의 번영에 핵심적인 축이 되었다고 보아집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세대에서, 더 이상의 파괴를 끊겠다고 다 함께 선언하고 실행해나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음에 올 인류 전체에 대한 거대한 제방이 되어, 우리 문명에 덮쳐올 붕괴와 재난을 막아낸 첫 세대가 된다면 어떨지 말이에요. 어떤 과학자들은 이대로라면 지금의 우리 세대가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붕괴되고 있는 자연 체계와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회 제도에 대한 반향으로, 우리의 가장 어린 세대들은 자기 포기적인 태도를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눈에 띄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중심 축에 서서, 번영에서 붕괴로 치닫는 이 현실을 비틀거리며 겨우 통과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아 주어야 해요. 우리가 개인으로 행동할 때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체로써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나 또한 일개 음악가 일뿐 환경 운동가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목소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것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초를 다투기 때문에요.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게 묻고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모두 이것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을 때 변화는 가장 빠르게 번져 갈 것이라고. 우리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있는 허무와 비관은 우리가 외면하기를 그만둘 때 자연히 사그라져 갈 것이라고 말이에요. 이 음반은 시와 음악을 자기 목소리로 삼은 한 표현가가 조금 더 거대하고 넓은 의미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려와 자기 의심이 뒤따랐지만,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에 끝내 입을 다문다면 자기 목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보통의 일개 음악가일 뿐이지만, 나의 확장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확장과 같은 뜻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표현 세계에는 대중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온 마음으로 음악에 존재를 부딪혀오는 한 사람, 단 한 사람의 경청자만이 존재합니다. 흔히들 예술가에게는 뮤즈가 필요하고, 창작을 지속하려면 그러한 존재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그 뮤즈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기웃거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뮤즈이자 경청자인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아 준 덕분이지요. 당신의 실존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창작 이유입니다. 우리 공동의 실존이 있었기 때문에 작가적 치기나 이상에 가까운 아집 또한 부려볼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노래들이 나의 혼란과 두려움을 식히는데 역할을 했다면 당신에게도 반드시 똑같이 그러할 것입니다. 삶을 온통 점령해버린 무의미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당신의 분투, 넘어질 걸 알고 있어도 다시 내딛는 그 걸음의 자취들에서 내가 쓰고 부르는데 필요한 의지를 구했습니다. 부디 나의 노래들이 이 격변하는 역사적 경첩의 시대에서 매일 생존하기로 결심하는, 우리의 용기에 부합할 만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심찮게 과학적 반전이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믿어온 사실조차 새롭게 의심하는 시대.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지성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인류세의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위대한 세계에서, 끝없는 우주에서. 나는 무엇이고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이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 사람의 본성은 선과 악 어느 쪽에 더욱 근거합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

 

#HUMANKIND.

 

 

심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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