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 『자유로울 것』 책 메모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임경선 『자유로울 것』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4. 4. 17. 00:41

본문

반응형

 

 

 

 

이번에 메모한 책은 내가 애정하는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 책이다.

임경선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님이고, 이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작가님의 책 내용을 썼다.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나 가치관이 무척 공감돼서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작가님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 왔다.

그럼 나라는 인간도 조금 더 잘 알아줄 것 같아서.

 

책의 이름은 『자유로울 것』이다.

책을 메모하면서 가장 행복하면서 또 가장 괴로운 경우가 이런 책을 메모할 때인 것 같다.

책의 모든 문장을 고스란히 메모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그 어떤 때보다 충만감과 뿌듯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에 푹 빠져버린 채 책 내용을 메모하다가, 너무 많이 옮겨 적는 것 같아서 소중한 글들을 지우는 걸 반복한다.

한 줄이라도 더 적고 싶은 마음과 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씨름했다.

지금도 적었던 것들을 최대한 지웠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길어져서, 책 내용을 너무 많이 쓴 거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된다.

 

난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한 번 읽고 끝낼 게 아니라 구매해서 소장을 하고 싶은데, 내가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작가님의 필체를 '임경선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닮고 싶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아 넣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에 꺼내서 보고, 말을 잘하고 싶거나 글을 잘 쓰고 싶을 때 다시  보고, 두고두고 보고 싶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데, 만약 나처럼 글을 더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더 추천하고 싶다.

작가님이 쓰신 단어들, 글을 쓰는 방식을 따라해보거나 살펴보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에세이 책을 한 권 읽고 싶을 때 이 책부터 읽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에 적은 메모글을 읽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마음이 촉촉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무시해도 되는 팁을 하나 주면 내가 이 책을 읽은 방식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해서 한 번에 읽으려고 하지 말고 책을 펼 때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는 글을 1~2개씩만 읽어 나가면 훨씬 더 산뜻하고 편안하게, 문장들을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다.

 

아래부터는 메모다.

임경선 작가님이 평생 자유롭게 살아가셨으면 좋겠고, 나도 그러고 싶다

우주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가 그랬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사랑만 하면서.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단 하나

 

 

 

 

 자유란 무엇일까.

 내 마음과 영혼이 시키는 일을 내 몸이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가장 편안한 상태일 것이다. 나와 내 인생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기에 명료하고 맑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내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일이 자유가 안겨주는 기쁨일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기에 그만큼 쉽게 가질 수도 없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책임과 통제, 자기 규율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험한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자유로운 사람으로 남고자 계속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실감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누가 문득 내게 물었다.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로 큰 성취를 이룬다거나 돈을 많이 번다거나, 그런 차원의 행복이라기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 말이다. 웬만해서는 막힘없이 생각을 말해왔지만 당시의 나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오랫동안 행복이라는 개념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낯간지럽게 여겼고 세상에 가득한 행복 담론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약한 위로라고 치부했다. 항상 조금은 비관적으로, 조금은 권태롭게 세상만사를 바라보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내가 행복해지기 어려운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얼마 전 우울감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행복이란 얼마큼 행복한 일들이 내게 일어날까, 라는 객관적인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큼 내가 그것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로 결정된다는 것을.

 이제는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안일한 위로를 향한 도피가 아닌 엄청난 재능임을 안다. 그것은 사실 이것이 있어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이것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충족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비슷한 듯 엄연히 다른 성질을 지녔다. 특정 조건들을 갖추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질은 별도의 독립적 성질이다. 행복과 욕망은 옆에서 각자 따로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축의 문제이기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욕망을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해야 한다'라는 흔히 듣는 겸손한 말은 맞지 않다.

 행복과 욕망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기에 둘을 혼동하거나 섞지 말고, 갈라놓은 뒤 저마다의 방식으로 충족하면 된다.

 

 "지금의 일상에 만족하는 건 아니에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고, 그래서 일은 지루하고 하루하루 지쳐가요. 하지만 몸은 건강하고 나름 다정한 애인과 좋은 친구들도 있으니 이만하면 전 충분히 행복한 거겠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만한 행복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제가 문제겠죠?"

 누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그녀는 지금 정도의 현실에 불만을 늘어놓으면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고, 그러면 벌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게 해석한다면 운명에 겸손한 것이겠다. 그녀는 아마도 '그래, 그냥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 그게 행복해지는 길이야' 같은,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게끔 도와주는 대답을 기대할 것이다. '넌 괜찮아'라는 말을 위안 삼아 또 다른 그렇고 그런 하루를 인내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나라면 그렇게 장단 맞춰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욕망을 욕심, 탐욕과 혼동하고 무기력, 나태를 착함, 초연함으로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뜨뜻미지근한 물속에 머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일이나 일상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일이나 지루한 하루하루를 바꾸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려는 의지도 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행복이 아니냐고 합리화하려 한다. 동시에 욕망을 품으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을 위해 주위 사람들과 환경에 폐를 끼치면서까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는 것은 탐욕이지만, 정당한 노력을 실천하고 위험 요소를 감수하고서라도 발전해나가려는 것은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이다. 왜 꿈을 포기하는 것이 욕망의 이름으로 부정당하고 행복의 이름으로 납득되는 것일까.

 

 마음속을 정직하게 들여다봤을 때 현재의 일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만족할 수 있는 일상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 별거 있어?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라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면서 아무 변화나 행동도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깝다.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나름 행복한 것 아닌가' 같은 마음가짐으로 얼마간 평온을 되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삶의 질의 가장 큰 부분을 결정짓는 일과 직업의 문제에서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데 바꾸려는 시도도 없이 눈감아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사전 봉쇄하는 것이다. 하물며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만족스럽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실은 무척 행복감을 주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욕망과 행복은 둘 다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욕망은 욕망대로 최대한 노력해서 추구하는 근력도 필요하고 행복은 행복대로 너그럽게 감지하는 촉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욕망을 위해 행복을 포기할 필요도, 행복해지기 위해 욕망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솔직함이란 감정에 따라 일어난 생각을 숨기지 않고,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성향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평소 좋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고 그로 인한 자신의 선한 의지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솔직함을 사람과 사람을 보다 깊은 곳에서 연결해준다.

 '아, 나만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구나.'

 상대로부터 제대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드는 안도감과 충족감, 그런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는 서로에게 싶은 친밀감을 가진다.

 

 속마음을 드러내는 대신, 예의 바름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의 바름은 '방어적'이기도 하다. 그들은 인간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솔직한 감정이란 비틀어진 질투와 욕망, 애증, 꼬인 자의식 등의 불편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내면의 생각이 악의적이고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고 여기는 만큼 남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솔직하기보다는 심리적 가면을 쓰고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관계의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렸을 적, 부모나 교사 등 가까이 있던 어른들이 자신의 불안감이나 불만을 제대로 받아주거나 이해해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 표현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궁금하면 궁금하다고,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내 생각은 이렇다고, 자연스럽게 솔직하기란 어떤 사람들에겐 거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난제인 것이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면 그것은 인생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분노가 몸 안에 쌓여 아프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우울해진다. 감정을 억압해온 만큼, 그것들은 어느 날 불쑥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터질 수 있다. 그렇게 터져 나온 강렬한 감정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상처 입힌다.

 그러나 자신이 소수자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졌을 때 소신을 솔직하게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다수 의견에 대치되는 소수 의견을 솔직히 말했다가는 소통하거나 설득하기는커녕 견디기 힘든 다수의 비난이나 비판을 마주하게 되니까. 그런 일을 겪으면 '내 생각이 과연 맞는 걸까, 어쩌면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과 자책감을 품게 된다. 소외당할까 두려워 솔직함을 포기하고 입 꾹 다물고 안전하기를 택하기도 한다.

 

 솔직해짐으로써 타인의 비난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면서 스스로를 미워할 것인가.

 가급적이면 전자였으면 좋겠다. 독립된 개개인이 솔직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지리를 바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들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심플하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언하고 마는 건 좀 곤란하다. 그 말은 '이게 나야, 어쩔래?'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함을 오만함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난 원래 이렇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리는 솔직함은 궁극의 자기 합리화이자 정신승리 혹은 변명이 될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없고 객관적이지 못하고 머리가 굳어서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러한 솔직함은 생각이 유연하지 못한 자기 고집에 불과하다.

 자연스럽게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있는 그대로의 나'는 과연 선의를 가진, 하루하루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좋은 사람일까? 혹여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냉혹한 질문을 던져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 라고 하는 것은 실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안 되겠다며 노력하는 나',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나'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시작했다면 어떤 형태로든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엉성하고 밀도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어떻게든 처음부터 끝가지 써내고 마침표를 찍어보는 일이 중요했다.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쓸 때면 나는 사랑에 관한 소설들을 필요로 한다. 그 소설들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고 농후해서 감정이 퍽퍽하게 건조해지는 것을 막아준다.

 

 알랭 드 보통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남성 작가들의 연애소설(가령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도 읽지만 이들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담백하고 분석적인 편이다. 연애 감정의 결을 짙게 느끼기 위해서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더 적절하다.

 책의 아무 페이지나 무심코 펼쳐서 읽는다. 연애 감도를 올리기 위해 읽는 소설은 보통 에쿠니 가오리의 『잡동사니』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격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다. 사랑 앞에서 몸을 사리는 일이 없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흠뻑 빠져 집착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소설 『단순한 열정』에서 가장 강하게 사랑의 감정을 통감하는 글귀는 다음의 구절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연애소설을 쓰는 여자들은 위험하다.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더 나아가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면, 사랑이 주는 생생한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현실에서 누군가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적어도 플라토닉 사랑이라도 소중히 품고 있어야 한다. 혹은 과거에 느꼈던 열정의 불꽃이 아직까지 꺼지지 않아 지금도 그 느낌을 세밀하게 복기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녀들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기록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에 그에 관한 글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터질것 같은 감정을 글로 적절히 소화시켜주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 피곤한 일이지만 인생이 주는 저주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도 어쩌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연애소설을 쓰기 가장 좋은 때는 연애가 막 끝났을 때인 것 같다. 열정의 기운도 여전히 남아 있고, 이별 상처로 감각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다. 직업 작가라면, 격한 슬픔의 감정이 글을 저절로 쓰게 만들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설을 쓰는 일은 유일하게 연애를 하는 일만큼의 자극과 충족감을 주는 행위다. 연애소설을 쓰는 것만이 실제로 연애하는 상태를 대신한다. 그러니 결국엔 나를 포함한. 사랑에 탐욕적인 여자들이 끝까지 연애소설을 써나가게 될 것이다. 위험하든 아니든 일단 살아야 하니까.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언제 놓을 것인가'의 문제는 어찌 보면 우리가 어른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다.

 언제 이 꿈을 놓고 체념할까, 아니면 포기하지 않는 게 답일까.

 버티는 것 자체도 재능일까.

 된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을 때 언제까지 꿈을 향해 노력해야만 할까.

 노력해도 결과가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언제까지 꿈을 꾸고 언제부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은 많지만 여전히 시원하게 대답하진 못하겠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변치 않고 확실한 것은, 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직접 부딪혀보고 발을 깊이 담가보는 것 말고는 다른 샛길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딱 그만큼의 고통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어린 나이에 불가항력의 고난을 혼자 겪으며 이미 불가피하게 철학자가 되어버린 소년 파이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추'인 것이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찾아내 최선을 다해 하기로 한다. 어차피 긴 시간에 걸친 승부다.

 

 

 

 

 

 

 

 

 

 

 

 에세이와 소설의 우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에세이와 소설을 몇 권씩 써본 경험으로 느끼기에 현재로선 이 정도 결론에 도달해 있다.

 

1. 에세이와 소설 중에는 소설이 일반적으로 더 쓰기 어렵다.

2. 소설이 에세이보다 쓰기 어렵다고 해서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 에세이를 반드시 잘 쓰는 것은 아니다.

3. 잘 쓴 에세이와 보통인 소설을 비교하면 잘 쓴 에세이가 더 가치 있다.

4. 에세이를 잘 쓰는 일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훨씬 재밌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다.

 

 이것을 더 단순하게 도식화해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할 수 있겠다.

 

잘 쓴 소설 > 잘 쓴 에세이

별로인 소설 < 잘 쓴 에세이

별로인 소설 = 별로인 에세이

 

 내 감각으로는 소설은 '머리'로 쓰고 에세이는 '마음'으로 쓰는 것 같다. 그래서 에세이를 쓸 때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유연하고 너그러운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 일부러 소재를 찾으려고 애쓰거나 엉덩이 힘으로 버티기보다, 에세이는 쓰고 싶은 주제가 자연 발생적으로 떠올랐을 때 바로 써야 글에 생기고 돌고 재미있다.

 

 

 

 

 

 

 

 

 

 

 에세이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솔직함, 둘째는 작가 고유의 문체.

 에세이는 저자의 연한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비 없는 장르의 글이다. 솔직함을 가장한 자기 포장인지,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했는지는 글의 행간에서 모두 고스란히 드러나 독자에게 전달된다. 솔직하지 못한 글에 감정 이입할 독자들은 별로 없고, 솔직한 글이 지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솔직함은 글쓰기를 장기적으로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글을 통해 나를 치장하고 포장하거나 가면을 쓰기 시작하면 거짓말은 점점 더 부풀 수밖에 없기에 어느덧 스스로도 자아와 글 사이의 괴리를 느껴 글쓰기는 고통이 되어간다. 그리고 사람은 고통을 받아가면서까지 글을 쓸 이유는 없다.

 간절히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자기 검열이나 자의식을 떨쳐내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만으로 써야 한다. 내가 혹시 어떤 내용을 얼버무리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내용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게 아닌지 돌아보며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나답게'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일이다.

 

 

 

 

 

 

 

 

 

 앞서 말한, 에세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두 번째 요소인 작가 고유의 문체는 이 솔직함의 미덕을 기본 전제로 한다. 작가 고유의 문체는 글만 읽어도 '아, 그 작가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한다.

 똑같이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해도 모두가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유한 문체를 체득했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글을 유려하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나간 작가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는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작가 자체에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작가의 에세이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는 공개적으로 타인의 작품을 평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비판'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호불호는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인 잣대로 재미없다, 별로다, 라고 말하기가 싫다. 그 작품이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면 공개적으로 예찬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내가 성격이 온건하거나, 나 스스로가 비판을 받아 상처 입은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생긴 습성이 아니다. 나는 성격이 '까탈스러운' 사람이고 남 흉보기 같은 것은 내키면 얼마든지 찰지게 할 수 있다. 내 글이나 책이 비판받는 것에도 그다지 상처 받지 않는다.

 한 가지 특성을 두고도 칭찬과 비판이 엇갈리는 게 작품이 감당해야 할 속성이기도 하거니와 만약 그 작품에 절대적인 단점이나 잘못이 있다면 사람들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그것을 만든 장본인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판 자체가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모든 작품은 다양한 평가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못 하겠다. 남들은 다 하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못 하겠다. 타인의 작품에 대해서 적어도 악담만큼은 하지 말아야지, 라고 굳게 다짐하게 되는 이유는 나 역시도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면서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고생하는지를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창작자가 바보처럼 보인다고 해도(실제 바보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힘든 작업임을 알기에 '저 작품은 쓰레기다'라고 한마디로 정리해버릴 수는 없다. 또한 타인의 작품을 비판하는 데에 한번 맛 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너무나 쉽게 중독성 습관이 되고, 그러한 부정적인 방향의 판관 노릇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갉아먹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대중의 외면과 비판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안고 간다. 외면 하나로도 충분히 힘든데 비판까지 감당하려면 정신적으로 웬만큼 단단하지 않으면 참 못할 짓이다. 싫은 소리 듣는 것을 못 견딘다면 애초에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아예 자신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보지 않던지. 그래도 완벽하게 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잡아보는 수밖에 없다.

 

타인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은 쉽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어려운 것이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고 비판할 바에는

뭔가를 만들어내고 비판받는 편이 차라리 낫다.

 

 작금의 사회에서 소리 높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똑똑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나 창작자보다는 평론가나 논객이 목소리가 더 크고 자신만만해 보인다.

 그럼에도 만드는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택할 것이다. 만드는 사람 없이는, 평가하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평가하는 사람은 자기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만드는 사람의 작품을 보거나 읽어야 하지만, 만드는 사람은 평가하는 사람의 결과물을 얼마든지 무시해버려도 그만인 것이다.

 

 

 

 

 

 

 

 

 

 '자,이제 이쯤에서 끝내야지'라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것, 의식해서 그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안혹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일에 몰두하거나 새롭게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 등 스스로에게 과제를 주면서 이번 사랑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이것을 '연애의 뒤처리'라고 말한다. 어른이 된 이상 스스로 연애의 뒤처리를 제대로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게 간단하게 될 리가 없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도 이해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했던 시절의 모습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황홀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어쩌면 그 마음의 일부가 여전히 그 사람 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몹시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고 추스르고 다시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말처럼 그건 쉽지가 않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절박한 심정일 때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 아직까지도 가끔 메일함에 개인 상담 편지가 온다. 열에 아홉은 이별한 상대에 대한 미련을 토로하며 그 사람에게 다시 연락을 해봐도 괜찮을지, 심리적 지지를 바라는 상담이다. 자기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통제해야 하는 고통이 행간에서 고스란히 전해져서 더 안쓰럽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대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망가졌는데도 그 이상으로 초라해지고 고통 받을 것이다. 그걸 알고도 한번 호되게 바닥을 쳐서 그것으로 미련을 끊어내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면야 멈추게 할 방도는 없다. 최선을 다해 슬럼프를 겪고 '그래, 어디까지 내가 바닥을 칠 수 있나 한번 보자'라고 각오를 다져볼 수도 있다. 그건 그것대로 결기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별의 파장을 구태여 더 크게 만들지 않더라도 온당히 겪어야 할 최소한의 고통스러운 고비를 참아내면 괴로운 감정과 도저히 참지 못할 것 같던 충동은 어느덧 지나갈 것이다. 끝난 관계에 대한 희망 고문에서도 해방되고, 현재 놓인 상황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기억은 조금씩 옅어져가고 고통은 이윽고 지나간다. 그 고통을 통해 적지 않는 것들을 체득하게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 더 인내심이 강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세상에는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혹은, 세상에는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긴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싫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이 이별의 고통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몸을 움직여보는 것.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 평소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행동들은 나를 추스르고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이별의 고통을 서서히 극복할 수 있게 돕는다.

 시간을 아군 삼아 버티는 일이 상처 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이다. 그러는 동안 비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친다.

 

 

 

 

 

 

 

 

 

 

 

손을 처음 잡은 것은 수줍은 첫 접촉이기에 두 사람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시선을 앞에 두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모른 척 시치미를 뗀다.

 

 

 

 

 

 

 

 

 

 손과 손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욕망은 서로의 다섯 손가락에 하나하나 깍지를 껴서 빈틈없이 두 손을 하나로 포개는 행위다. 그 행위는 마치 두 알몸을 포개어 꼭 끼워 맞춘 것처럼 저릿저릿하다.

 손을 잡은 그때가, 미래의 연인에게 있어서 어쩌면 가장 흥분되는 시점일지도 모른다. 손을 깍지 끼고 맞잡은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미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얼굴 표정은 평온하지만 마음속은 터질 것만 같다.

 

 

 

 

 

 

 

 

 

 팔이 한 번씩 스칠 때마다 몸의 솜털들이 바짝 선다.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은 상대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이다 보니 자신의 한쪽 어깨와 다리는 비에 흠뻑 젖는다. 하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비에 젖어도 춥지 않다. 그저 이대로 계속 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리하자면 이런 구도다. 능력과 스펙을 볼 것인가, 아니면 착하고 다정한 성격을 볼 것인가.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가 낫나, 아니면 내가 더 사랑하는 남자가 낫나. 이런 상반된 장단점을 가진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상태가 괴로워서 어서 빨리 한쪽으로 결정짓고 싶다.

 이때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나 자신이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가치를 더 중시하는지,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가치를 더 중시하는지를 알면 되는데, 문제는 이것조차 뭐가 더 중요한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대부분 사람들의 속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은 뭐 두루 잘났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이럴 때는 다음을 고려해 보기로 한다.

 

1.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상황은 바꿔 말하면 두 남자 중 누구에게도 푹 빠지지 않았다는 것. 두 사람 다 중요한 부분이 결핍되어 있다는 뜻이니 어차피 한쪽을 택해도 만족할 수 없다. 이참에 두 사람 다 깨끗하게 정리해버린다.

2. 영화 <최악의 하루>처럼 길에서 남자 A와 함께 걸어가다가 우연히 남자 B를 마주친다면, 이때 A와 B 중 누구에게 먼저 변명을 할지 상상해본다.

3. A와 B, 두 남자에게 동시에 '나 지금 당신 외에 다른 남자도 만나고 있다'고 고백해버리고 반응을 본다.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상대를 받아들인다.

4. 마음이 한쪽으로 제대로 더 기울 때까지 능력이 닿는 한 계속 두 사람을 만난다.

5. 더 좋아하는 남자의 단점이 덜 좋아하는 남자의 장점을 돋보이게 해주는 측면을 감안한다. 냉정한 남자 B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없으니 충직하고 자상한 남자 A를 안전판 삼아 기대려는 건 아닌지. 남자 A의 자상함이라는 특장점은 남자 B의 냉정함 덕분에 비로소 부각되는 장점이다. 남자 B가 사라지면 남자 A의 특장점은 의미를 상실해버리기도 한다.

6. 어떤 유형의 남자를 선택해야 행복할지에 대한 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선택도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나마 유일하게 의미를 가지는 진실은 지금 내가 누구를 더 감정적으로 좋아하는가다. 어쩌면 그것만이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은 실제로 경험해보는 것 말고는 결코 그 적성도를 알 방법이 없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무리를 해야 기회가 열린다. 추진 동력을 가지려면 그 일을 해보고 싶다는 간절함 이상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것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느껴야 한다. 기회와 타이밍도 제한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야 겨우 일 B를 꿈꿔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냉혹한 현실의 모습이다.

 

 

 

 

 

 

 

 

 

 

 

 

 더불어 그는 나의 어설픔과 치부가 드러난 날것의 초고를 있는 그대로 보여줘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원고를 보여주면 '평가하는' 편집자보다 '질문하는' 편집자가 고맙다.

 

왜 이 부분을 이런 형식으로 쓰셧어요?

이 등장인물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이건 대체 무슨 의미죠?

 

 

 

 

 

 

 

 

 

 

 

 이메일 한 통은 상상 외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단순히 편집자의 작문 실력이나 일에 대한 능력뿐 아니라 편집자의 성격과 업무 방식은 물론이고 수신자인 나에 대한 솔직한 마음과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내용이 장황하고 핵심 메시지가 모호하고 진부한 칭찬 혹은 아부가 섞여 있다면, 대개 '나'라는 개인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나'라는 특정 저자에 대해 이미 충분히 파악해서 진심으로 내가 그 책의 적임자임을 확신했다면 이메일은 지극히 간결하고 명료할 것이다. '나는 당신에 대해 충분히 파악했기에 긴 말이 필요 없고,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핵심만을 짚어 전달한다'라는 산뜻한 태도가 읽히면서 기분 좋은 흥분을 느낀다. 아, 이 사람하고라면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겠다!

 

 

 

 

 

 

 

 

 

 

 

 하나의 특성에 대해 여러 상반된 평가들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블로그를 검색하면서 깨달았다. 특히 소설의 경우가 그랬다. 간결하고 심플한 문체를 어떤 독자들은 담백해서 좋아했고, 어떤 독자들은 평이해서 별로라고 평가했다.

 

 

 

 

 

 

 

어쩔 수 없다. 글의 본질이 그렇다.

 하나의 특성을 두고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한다. 이토록 다채로운 개성의 작가들이 공존하며 저마다의 독자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그러니까 어떤 독자로부터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 말에 필요 이상으로 상처 입거나 휘둘릴 필요가 없다. '아 그런 관점도 있구나'라고 참고하면 그만이다.

 

 

 

 

 

 

 

 

 

 그녀가 나의 가까운 지인을 우연히 만나면서 내 연락처를 알게 되어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나도 반갑게 그간의 안부와 근황을 물었다. 몇 차례 흥겨운 문자메시지가 오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 옛 멤버끼리 한번 뭉치자!

 이 대목에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거나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명함을 주고받으며 '언제 한번 제대로 보자' '다음에 한번 뭉쳐야지'라는 말, 참 많이들 하지만 정말 그러고 싶은 것일까?

 사실 진심으로 반가운 건 첫 재회의 순간뿐이다. 막상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재미없을 것 같다. 현재보다 과거를 공유해야 하는데 거기엔 대화의 한계가 있다. 과거 시절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하나둘 끄집어내고, 그 시절에 알고 지낸 공통 지인들에 대한 근황을 공유한다. 대화 소재는 머지않아 바닥나기 쉽다. 그렇다고 현재의 생활을 공유하기엔 그만큼 서로에게 이젠 관심이 없거나 공통분모가 없다. 자기 상황을 얘기하다 보면 자칫 사랑이나 자기 연민으로 들리기도 한다. 혹시 '한번 뭉치자'라는 건 전화 끊을 때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빈말 인사인데 나만 몰랐던 것일까.

 

 어쨌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 뭘 또 번거롭게 뭉쳐. 과거는 그냥 아름다운 과거로 남겨.

 문자 회신이 곧바로 왔다.

 - 나쁜 것,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의리상, 도리상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것이 싫었다. 의리나 도리는 대개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명분을 주고, 타인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내가 무리하는 것이니까.

 - 때 되면 만나겠지. 볼 사람은 어떻게든 보게 되잖아.

 야박하고 매정한 것일까.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행여 진심으로 십여 년 전의 멤버들을 이제 와 굳이 다 모아서 만나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현재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피곤한 것이 싫기도 하다. 인간관계만큼은 영혼 없이 관리하고 싶지 않다. 형식적으로 부피만 커져가는 친분과 인맥은 삶을 성가시고 산만하게 할 뿐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족스럽지 못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느니 그 시간에 혼자 책을 읽는 게 낫다.

 

 

 

 

 

 

 

 

 

 

 

 

 

 

 

·           친구가 별로 없어서 좋다

 

 

 

 

 

 과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우정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내게 현재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내 인생 속으로 들어왔다가 또 나간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아끼고 좋아하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라고는 나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 정도다. 번지수 틀린 곳에서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까지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

 

 한편, 어른이 되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 단순히 친하거나 자주 시간을 같이 보내거나 재미있게 어울리는 관계와는 다르다.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어떤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한다. 상대가 충분히 이해를 해줄지 불확실하고, 말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되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한테 상처 받거나, 내게 이질감을 느끼거나, 나를 경멸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나의 취약점을 나중에 역으로 이용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된다. 반면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지는 못해도 숨김없이 믿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신의를 바탕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보니 애초에 편안하고 무리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성별은 상관없다.

 왜 신뢰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심이 깊고, 포용력이 있고, 입이 무겁고, 편견에서 자유로우며, 인생 경험이 많다.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어른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나본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개인이었고, 자신의 소신이 있는 만큼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유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들과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양보다 질. 피상적이고 공허한 수다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신뢰감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분명 행운이다. 그런 소중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회피하던 중, 그는 두 정거장 지나 이태원 전철역에서 훌쩍 내려버리고 말았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을까. 그래서 어디든 빨리 내려버린 것일까.

 어쩌면 그 모든 과거의 인연은, 차라리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한 명의 작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는 일은 어떤 것일까. 단순히 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생경했던 세상을 알게 되고 생각의 폭이 커지는 기쁨이나 손에서 책을 못 내려놓을 정도의 재미를 뛰어넘는다.

 그 작가는 내 마음과 생각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다.

 작품에 스며든 작가 개인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의 모든 작품을 읽었기에 신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 작가의 특정 작품이 나와 안 맞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바로 그를 외면하거나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작품이 균일하게 마음에 들 수 있나. 판관이 되기보다 과묵하게 그의 향후 작업들을 응원하기로 한다.

 그렇게 오래오래 좋아한다.

 정이 들면 그의 생김새조차 좋아하게 된다.

 내겐 몇 안 되는 그런 작가들 중 하나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다.

 

 

 

 

 

 

 경계에 혼자 서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예민하게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게 된다. 외부자로서의 고독과 고통을 경험했지만 다행히 냉소적이고 가혹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타인의 마음을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느꼈고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관점과 내면의 복잡성과 모순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계인의 태도가 줌파 라히리 특유의 차분하고 절제된 문체를 빚어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선선하지만 서늘하지는 않고, 통찰은 냉철하되 표현은 담백하다. 담담하고 잔잔한 문체로 등장인물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룰 때면 작가의 속 깊은 이해심과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종種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읽힌다.

 

 

 

 

 

 

 

 작가가 자신이 알고 이해하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에는 위선이 없다. 줌파 라히리에게 있어서 그들은 하나의 균일한 특성을 가진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개별적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개개인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며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노력으로 차근차근 인생을 쌓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굴절 없는, 정직한 인정과 존중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과 고통을 가지고 있고, 최선의 노력으로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줌파 라히리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야기를 가장 사랑한다.

 슬픈 이야기들은 자칫 칙칙하거나 부담스럽기 쉬운데 줌파 라히리가 그려내는 슬픔은 투명하면서도 우아하다. 그것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터트리는 대신 속으로 숨을 참아내는 등장인물들의 속 깊음 때문인 것 같다. 쉽게 드러내지도 항복하지도 않으리라는 차분한 절제가 역으로 읽는 이의 심장을 슬픔으로 저릿저릿하게 만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써내려간 잔잔한 문체가 감정을 더 격렬하게 뒤흔든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그녀는 마지막까지 내가 듣기 좋아하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갔다. 세상은 보기보다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자의 마음속 막막함과 고독함, 절망감의 표현 방식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지난해 병원 정기검진 때 트위터에 남긴 글귀를 보관해놓고 가끔씩 읽는다.

건강하다는 게, 병원 밖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잊지 말자고 다짐했고, 또 그렇게 행복하게 일 년을 살아가겠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 나와의 다짐.














 희한하다. 고통에 관한 글은 직접 겪어본 사람이 써야만 설득력과 공감을 준다. 아무리 정황 묘사가 사실적이고 그럴싸해도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마치 아이가 없는 여성이 육아의 힘겨움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기분이다.

 창작자는 자신이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쓰고 그릴 자유가 있지만 어떤 일들은 그것을 실제로 겪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고통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이미 겪어본 사람들이 무언가 읽을 때는 그 간극이 클 수밖에 없다.















 삼 년 전쯤에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여성 암환우를 대상으로 주최한 '그래, 나 아프다' 토크쇼 행사에 패널로 참석한 적이 있다. 다섯 명의 여성 패널은 모두 각자의 암 투병 이력이 있었다. 행사에 관객으로 참석한 사십여 명의 여성들도 모두 암 투병 중이거나 투병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행사는 그동안 참석해본 숱하게 많은 행사들중에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그 공간에 감도는 뜨거운 집중력과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서로에게 보이는 절대적인 지지와 공감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일반 사회에 나가서는 쉬쉬 숨기고 살아야 하는 감정들을 그곳에서는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었기에 형식적인 위로는 필요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있다고 실감했다.



 비슷한 취향이나 취미를 가지면 말이 잘 통하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가졌다면 신뢰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대상이 같다면 서로에게 친근함을 느낀다.

 미워하는 대상이 같다면 강한 동질 의식을 느낀다.

 하지만 그 무엇도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간의 유대감에 비견할 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아이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경험하는 각별한 감정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쁨과 슬픔, 자식의 성장을 통해 나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보고 스스로의 결핍에 대해 알게 되는 일, 한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뻐근한 감각. "자식이 있어야 철이 든다"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다채로운 파장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맞다.

 아이는 어쩌면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할 도리는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첫 삼 년 아가 시절의 사랑스러움으로 이미 평생 할 효도는 다 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아이는 존재 자체가 기쁨이고, 순수한 행복이라는 감정을 가장 자주 느끼게 해준다.

 가령, 아침에 딸아이가 등교할 때 같이 손잡고 초등학교까지 걸어가는 그 십오 분이 하루 중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 하루를 시작하는 설렘, 어린이들이 만들어내는 흥겨운 소음, 희망을 약속해줄 것만 같은 환한 햇살 그리고 꼬옥 잡은 두 손···.













 아이들은 하물며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쉽게 행복해지는 재능을 타고난다. 그게 또 전염성이 강하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덤으로 행복해진다.












 아이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사랑스러운존재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각설하고,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산문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에 나왔던 이 문장이 가장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오직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성숙한 기쁨과 만족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독약을 먹겠다.







 










·         편애하는 영어 단어들






 그러고 보면 한 언어의 가장 매력적인 단어들이란 '쉽게 다른 언어로 번역되기 힘든' 단어들인 것 같다. 그 언어만이 가진 개성과 고유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는 단어들이다. 나는 그러한 단어들을 몹시 편애한다.

 

 

vulnerable

(~에) 취약한, 연약한(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상처 받기 쉬움을 나타냄)

 

 사전에는 위와 같이 적혀 있다. 유사한 단어로는 weak, fragile, delicate, susceptible이 있다. 유의어 중엔 helpless도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이라는 뜻이다.

 나는 인간이 내면에 저마다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취약성vulnerable을 몹시 애틋하게 생각한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vulnerable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함도 좋다.

 vulnerable이라는 단어는 강자의 억압에 의해 약자가 수동적으로 약해진다기보다, 본인이 스스로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는 자발적 태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속수무책이라 하여도 어쩐히 행복해하는 느낌이 스며 있다. 인간의 '약함'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져서, 다가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게끔 만드는 단어다. 또한 무언가에 취약하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복잡한 마음이 들어가 있음을 의미하기에, 마음속에 겹겹이 쌓인 진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유도하기도 한다.

 

nonchalant

무심한, 차분한, 태연한(침착하게 행동하고, 관심이나 걱정이 없어 보이는)

 

 이것은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보다는 내가 타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 보인다'라고 할 때 주로 쓰는 단어다.

 그의 무심해 보이는 태도, 태연해 보이는 모습.

유사한 영어 단어로는 calm, cool, composed가 있다. 자기 소신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어떤 자유로운 공기가 이 단어에서 느껴진다.

 나는 사람의 성격도, 노래하는 목소리도, 글의 문체도, 건조한 것을 사랑한다. 건조하고 차가운데 그 수면 아래로는 따스함이 스민 느낌. 넘치기보다 절제하는 그 무엇. '별거 아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무심하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 티 내지 않고 혼자 조용히 많은 것들을 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의연하고 은은한 태도다.

 

 

adore
흠모하다, 사모하다, 아주 좋아하다

 

 like(좋아하다)나 love(사랑하다)처럼 호감의 강도를 정량적quantitative으로 판단하는 단어가 아닌,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의 호감을 정성적qualitative으로 표현하는 단어다. 이때 호감의 느낌은 '반해 있다' '흠뻑 빠졌다'처럼 상대에 대해 느끼는 경이로움과 감탄 그리고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나의 기쁨과 축복이 동반된 감정이다.

 admire(감탄하다, 탄복하다, 동경하다)라는 단어와 뉘앙스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기도 한다. 'I Love You(사랑합니다)'가 애정의 보편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adore가 멋진 이유는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 상대가 반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객관적으로 인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dore 는 cherish(소중히 하다, 품다, 고이 간직하다)라는 단어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한 설렘을 공유한다.

 cherish는 그 동사의 대상 자체가 인생에 주어진 축복이기에 adore하는 상대와의 관계를 cherish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최고로 아름다운 인생일 것이다.

 

 

 

 

 

 

 

 

 

 

 

 

 

 

 손님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목수들은 원목을 치수에 맞게 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업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나갈까 하던 찰나 눈치를 챘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내 친구를 응대했다. 과도하게 친절하지도, 억지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시간을 들여 나무 테이블을 관찰하고 만져볼 기회를 주었다.

 우리 제품이 최고라거나 우리 제품이 왜 다른 제품들에 비해 더 좋은지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무'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종류의 나무로 테이블을 만들고 각 나무마다 테이블을 만들었을 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단순히 눈으로 보기엔 예쁜 나무 테이블만 염두에 두고 온 나로서는 무척 도움이 되는 지식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이것저것 캐물어도 귀찮아하기는 커녕 더 신이 나서 알려주었다.

 "손님, 공부 많이 하고 오셨네요."

 그는 질문을 많이 하는 모범적인 소비자라며 우리를 기특해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객이 자신에게 맞는 물건을 잘 고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단순히 물건을 고르는 게 아닌, 제대로 된 인연을 만나길 바랐다. 오랜 기간, 매일매일 곁에 두고 보면서 같이 살아야 하기에 가구는 인연이라고 할 만했다.

 

 직접적인 장사와는 별 관련 없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그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이 조금은 신기하기도 해서, 음흉한 나는 슬그머니 말을 흘렸다.

 "오늘 몇 군데 다른 가구점에도 발품을 팔고 왔어요."

 그런 말을 들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그들이었다. 경쟁심을 느끼며 조급해하거나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해맑에 미소 지었다.

 "아, 그래요? 정말 잘하시는 거예요. 가구는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진짜 이것저것 많이 본 다음에 신중하게 골라야 해요. 그래야 자기한테 딱 맞는 짝을 찾을 수 있어요."

 당장 살 것도 아니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행동을 나무라기는 커녕 칭찬을 받았다. 나는 한층 더 사악해졌다.

 "인터넷으로 여러 군데 검색하다 보니 여기 가구 디자인 톤과 비슷한 곳도 있더라구요. 이제 마지막으로 거기에 가보려구요."

 이쯤 말했으면 붙잡아줄 만도 한데, '우리 것이 이래서 낫다' '거기까지 갈 필요 없다'며 경쟁심과 조바심을 느껴줄 만도 한데, 목수는 이번에도 태연하고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 거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개인적으로 그 집 제품을 굉장히 좋아해요. 음··· 제 느낌으로는 손님도 분명히 그 집 가구가 마음에 드실 거예요. 거기는 정말 꼭 한번 가보고 나서 결정하셔야 해요."

 이거야 원 장사를 할 마음이 있긴 한지, 아예 다른 집의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꼴이었다. 뭐랄까 등 떠밀리듯이 그 마지막 가구점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목수분들의 인간적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웬만하면 그곳 나무 테이블을 팔아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막상 그들이 추천했던 마지막 가구점에 다다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목수의 예언대로 더없이 마음에 꼭 드는 나무 테이블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한눈에 반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기로 결정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와서야 아까 전의 목수가 생각이 났다.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대한 편안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사람들의 느낌이 참 좋아서 웬만하면 그 집 물건을 사주고 싶다던 나의 마음도 돈을 내는 사람의 불순한 오만함일 뿐이었다.

 

 

 

 

 

 

 

 

 

 

 

 

 

 일상적으로 편하게 끼고 다니려고 남편과 맞춘 커플 금반지도 결혼 후 한동안 끼고 다니다가 삼 년이 채 되지 않아 너나 할 것 없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둘 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하지도 못했고, 서운해하거나 서로 뭐라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맞추지도 않았다. 없이 살아도 된다면 없이 사는 게 편했다. 오래 살아보니 다이아몬드 결혼반지의 존재 유무와 원만한 결혼 생활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초대받아 불려온 나도, 동원된 군인들도 어떤 명분을 위해 다들 한편이 되어 함께 역할극을 수행하는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겉보기와는 달리 타고나길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것이 여전히 긴장되고 떨린다. 그런 나의 이야기에도 미소 지어주고 집중해주는 친절한 청중에겐 그저 감사한 마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기는커녕 내가 쓴 글을 한 줄도 읽어본 적 없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현실을 피하고 싶지가 않다. 냉수 벼락 맞고 정신 차리는 체감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을 마주하노라면 새삼 아무도 나를 모르고, 따라서 좋아할 수도 없었던,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의 나로 돌아가 가파른 언덕 위에서 뺨에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기분이다. 나는 이렇게 정기적으로 스스로를 낯선 장소로 몰아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세상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현실을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만약 운이 좋다면 그 불편한 첫 만남을 계기로 몇몇 사람들은 나와 나의 글에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그것대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들 앞에서 말을 더 잘하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실제로 남들 앞에서 자꾸자꾸 말을 더 많이 해보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다.

 

 

 

 

 

 

 

 

 

 

 

 

 

 

 몇 번인가 '나는 결코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게 있어서 이상적인 상태는 텔레비전 방송 출연 같은 걸 해서 얼굴을 알리지 않고도, 글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상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는 지키되, 내가 쓴 책들만은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것. 참 욕심도 야무지다.

 생각해보면 그게 조금 말이 안 되는 게,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라는 이상, 유명해지는 일과 완전히 등지고 살지 못한다. 정말 유명해지기 싫으면 아예 책을 내지 않으면 된다.

 글을 쓰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 이것은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고, 내가 쓴 글을 읽고 내가 가진 생각들을 알게 되어, 뚜렷한 이유 없이 사랑을 받기도 하고 미움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의미다. 그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글을 써서 표현하는 일은 즐거웠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재미있어 하면 기분이 무척 좋았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며 부탁하지도 않은 훈시를 시작한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주변에서 듣기 좋은 말만 해주잖아. 오랜 친구라야 쓴소리도 해줄 수 있지."

 그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서(난 아무래도 관심 없다) 나에 대한 통제 욕구를 합리화하려는 말이 아닌가, 라고 내가 도리어 쓴소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기본적으로 독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심리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저자를 심적으로 무척 힘들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바라는 관계의 기대치에 내가 부응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았고, 상처 받은 만큼 손바닥을 뒤집어 나를 비난하는 '안티'로 돌변하기도 했다.

 

 

 

 

 

 

 

마치 나의 초심이나 인격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언제나 계속 나였다. 유명하든 아니든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기 위해 일부러 날을 잡아 만나러 갈 만큼 너그러운 스타일도 아니었고, 만나서 맥락 없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상담은 어디까지나 매체를 통해서만 했지, 사적으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은 가급적 피해왔다.

 

 

 

 

 

 

 

 그 문장을 읽는데 뭐랄까,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어쩌면 길거리에 서 있는 전봇대의 팔자를 떠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무심결에 전봇대를 툭 치고 지나간다. 간혹 지나가던 개들은 전봇대에 한 발 들고 오줌을 싸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버린다. 하지만 전봇대는 가만히 서서 그것들을 모두 감당해야만 한다. 오로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빠도 별수 없이 여느 나약한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그날 밤 통감했다. 그 깨달음에 좌절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 홀가분하기도 했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가는 나이였으니 생각이 복잡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간 나를 따돌려왔던 사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갑게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소문을 퍼트린 그 나이 많은 남자 사원을, 정확히 나에게 했던 것처럼 집중적으로 따돌리기 시작했다.

 집단은 언제나 그토록 잔인했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친구와 나는 비관했고 비장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그 나이를 넘기면 사랑할 남자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타고 가서 그 시절의 스물다섯 살 임경선에게 말해주고 싶다.

 초조해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인생은 이제 겨우 막 시작한 거라고

 앞으로도 너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뭐라구요? 이 지겨운 연애를 또 해야 된다구요?"

 곧 스물여섯 살이 될 임경선은 아마도 뒷목 잡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 같지만.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쓸쓸함과 슬픔을 최대한 막아주는 것은 안티에이징 시술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의지도 아니다. 그것은 '가급적 오래오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치심과 생각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면 가능한 한 오래도록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다음으로는 자기 일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소일거리가 아니라 본격적인 일로서 말이죠. 일이 있으면 노여움이 없어집니다. 결국은 자기중심이 있어야 남들한테 무시받거나 소외당한다는 생각을 덜 하게 되거든요. 제 경우는 다행히 번역과 주석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게 추하게 늙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아직 사회에 있다는 자신감과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일을 통해 성장한다.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든, 자아실현을 위해서든, 어쨌든 움직이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춰 있는 상태다. 그렇게 멈춰 서서 남의 인생을 구경하고 품평하면서 나이 들어가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 은퇴를 꿈꾸지만 나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가급적 오래오래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뼘 더 저 멀리 도약하느냐 혹은 지금 서 있는 그곳에 남느냐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는다는 것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자연도태를 의미한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머무는 게 아니라, 퇴보한다. 여러 가지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현상 유지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흔을 넘겨도 멋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멋있는 사람이다. 젊었을 때 멋진 것은 어느 정도 젊음이 뒷받침해주어서 가능하지만 젊음이라는 도움 없이도 멋지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의 가치 있는 성취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불평하거나 투덜대거나 까탈스럽게 굴지 않고

   무의미한 말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고 나대지 않으면서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가능한 한 계속하는 것.

   현재로선 이것이 내가 나이 듦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다.

 

 

 

 

 

 

 

 

 

 

 연애는 하고 있는데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커플을 보면 그것 또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런 관계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대로 놔두면 감정이 자연적으로 소멸하기에 너무나 놓치기 싫은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반영구적이라도 박제해놓고 싶은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벌인 일이니 결혼 생활은 내내 불완전한 상태로 유지되지만, 그나마 결혼이 불완전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와 연애는 하지만 결혼만은 하기 싫다는 상대는, 어떤 이유를 댄다 한들 그냥 '나'와 결혼하기 싫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기 싫다는 말이 달갑지가 않다.

 '결혼은 하지 말고 평생 사랑만 하자.'

 결혼하지 않고 평생 사랑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해서도 평생을 변함없이 상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저 말을 하는 사람은 결혼은 하지 않고 평생 '여러'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서로의 생각이 엇갈리면 상처가 되지만 두 사람 다 그러한 사랑과 이별의 자유를 원한다면, 그 역시도 하등의 문제가 없는 라이프스타일이다.

 

 결혼에 대해서는 '절대 안 한다'도 '어떻게든 해야 한다'도 아닌, 보다 자연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결혼은 이렇다, 라고 결론 내리고 그래서 안 하겠다는 결심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타인의 결혼을 온전히 내 결혼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중요한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에게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대로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아이, 내 가족이 없으면 노후가 외로울까 봐, 혼자 죽어갈까 봐 두렵다. 하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노후엔 결혼 여부, 자식 유무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안하고 외롭고 서럽고 혼자 죽어간다. 가족으로 보장받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는 삶. 결혼해도 아이를 가지지 않는 삶.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자유롭게 하는 삶. 결혼하지 않고 혼자를 누리는 삶. 현재로서는 그 어떤 방식도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삶의 방식이 올곧고 건실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고 예술을 영위해나가는 방식에 맞고 틀리고의 기준은 없다. 그거 각자의 욕망의 무게를 감당할 뿐이다.

 

 

 

 

 

 

 

 

 예술가들의 삶은 치열한 인생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각자의 선택과 감당이 그 뒤를 따를 뿐, 정답은 없다.

 

 

 

 

 

 

 

 

 

 

 

 

 

 

 노력은 단순히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영역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내 글을 최대한 전달하려는 지적인 창의성에도 필요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도 내가 좋아서 쓰는 거니까 그거면 충분해'라고 자위한다면 그것은 아마추어의 셰게다. 물론 글은 자기만족을 위해 쓰는 측면이 있고 우선은 내가 스스로의 글에 만족해야겠지만, 글을 쓰는 데에만 의미를 둘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내 글은 가급적 저 밖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책임이 있다. 독자가 없으면 작가도 없다. 또한 글쓰기에서 노력이란,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하는 데에 몸을 사리지 않는 것도 의미한다. 호기심과 용기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시도나 경험을 통해 상처 받는 것들 우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서 아름다운 것만 보거나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모순이나 고통, 슬픔 등을 겪으면서 그것들을 감당해나갈 때, 다양한 감정의 결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본질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긴다.

 

 

 

 

 

 

 

 

 

 

 

 

 보통 사람들은 일에 있어서 '운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함구하기 마련이다. 꿈을 이루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라는 업을 지속하는 것에는 우연한 '운'이 좌우하는 비중이 재능과 노력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한다.

 운은 '우주의 기운'처럼 막연하게 느껴져도 나타날 때는 실질적으로 그 형태를 드러낸다. 예로,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나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기회가 주어지거나 하는 것들이다.

 운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독립적인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재능과 노력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행운이 내게 찾아와도 그걸 잡을 힘이 없거나, 그것이 행운의 기회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재능과 노력이 서로를 최대치로 상승시키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에게 강력한 기운이 생기며, 사람들은 그 긍정적인 기운에 저절로 이끌려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행운이 있으면 불운도 있기 마련이다. 어디로든 나아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불운도 틈새에 끼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설사 불운이 나를 움츠러들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털어내고 다시 걸어 나갈 수만 있다면 다음에는 행운이 슬그머니 뒤에서 나타나 등을 힘차게 밀어줄 것이다. 여러 종류의 운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일은 글쓰기를 포함한 예술적 작업의 숙명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다른 일도 마찬가지 아닌가.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넘어 조금씩이라도 새로 도전하거나 무리하지 않는다면 현상 유지는 될지 몰라도 실력이 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라고 단정 짓던 그 수준을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굽신거리지 않는 특유의 당당한 태도는 자아가 단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해낼 수가 없다. 고집불통에 까탈스러워 보이는데 이토록 매력적이라니.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곧잘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계기들은 흥미진진했고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 같았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는 흔히 다른 작가들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는 문학소녀의 꿈도, 숱하게 시도했던 등단을 위한 습작도, 어느 날 불현듯 다가온 섬광 같은 계시도 없었다. 그저 몸이 많이 아파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잡은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인생은 그토록 한 치 앞을 모른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