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번 프라이스 [게으르다는 착각 : 우리는 왜 게으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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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번 프라이스 [게으르다는 착각 : 우리는 왜 게으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3. 9. 28.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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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북클럽을 3달 이용할 수 있는 아이디를 공짜로 받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유익해보이는 책들은 다 읽고 있는데 이것도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서 읽어봤다

이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어떤 부분은 넘겨도 되고 어떤 부분이 재밌는지 감이 오기 때문에 이 책도 내용의 50% 이상을 후루룩 넘기면서 한 시간 만에 다 읽은 것 같다  (메모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2시간)

최근에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 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너무 어려워서 두 달 동안 다 못 읽고 있었는데 그 책을 멈추고 이런 책 읽으니까 쉽고 가볍게 읽혀서 좋았다

가볍게 읽었지만 안에 내용들은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참 많았다

현대 사회에서 늘 토론 주제로 삼고 있는 것들, 세상에서 가장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끼리 논쟁해도 명쾌한 답이 안 나오는 흥미로운 문제들로 가득했다

 

 

자기개발 책을 읽다보면 한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이런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관점이 작가마다 크게 2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항상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면서 주어진 일을 하는, 일에 미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관점.

두 번째는 미래를 위한 희생보다는 현재의 행복과 건강을 중요시하고 오히려 그것이 더 나은 미래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사회의 요구보다는 자신의 욕구와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바탕으로 방황하고 있거나 지쳐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관점

 

 

나는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을 나누면서 마치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걸(자신이 현재 부자이거나 성공했다고 해서 자신의 방식이 맞다고 하는, 마치 부모님이 자식에게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 같은 방식) 싫어하고 기본적으로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두 번째 관점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히 내 취향에 가까운 책이었고 읽으면서 참 많은 공감을 했던 책이었다

물론 언제나 책을 읽을 때는 책의 내용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떠올려보고 작가의 생각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장에서 '이 부분에서는 분명히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여기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라고 느끼면 내가 그 반대 되는 의견과 작가의 보충 설명을 대신 해보기도 하면서 가상의 숙론을 하며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나도 이거 메모한 문장들 쓰면서 오랜 시간 더 생각해봐야겠다

암튼 개인적으로 이 책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추천@

아래부터는 메모한 글들

 

 

 

 


 

 

 

 

게으름은

죄악이 아니다





최근에 트위터에서 한 대학 신입생과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다툼은 아니었다. 그냥 긴장감이 감도는 긴 대화였다. 그는 게으름이 죄악이 아니며, 우리는 모두 게으름을 죄악으로 보라고 오랫동안 배워왔을 뿐이라는 나의 믿음에 대해 발끈했다. 몇 년 전 온라인에 올린 에세이에서 나는 겉보기에 ‘게으른’ 사람들이 에너지나 동기가 없는 데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면, 심지어 가장 자기 파괴적인 게으른 행동조차 이해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청년(제임스라고 부르자)은 내가 잘못된 종류의 ‘게으름’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처럼 제임스는 자신의 무기력과 ‘게으름’이 대부분 사람의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게으름이 우울증을 앓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정신 질환이 자신의 ‘나쁜’ 행동에 대한 타당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임스는 때로 며칠 동안 꼼짝하지 않고 방에 처박혀 있다고 했다. 그는 토론을 통해 그런 행동이 분명히 용인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또 제임스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 몇몇이 게으름을 자랑스러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학교에 대한 ‘반항심’에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고 했다. 어떤 학생은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에 숙제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사람은 변명의 여지 없이 게으른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제임스는 대학교에서 삶을 잘 사는 데 정말 무관심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열심히 하지 않는 타당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제임스는 나의 믿음으로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지 알고 싶어 했다. 어떠한 개인적인 문제도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제임스는 우리 사회에서 ‘게으르다’고 분류되는 전형적인 세 부류를 제시했다. 우울한 사람, 늑장 부리는 사람, 일이나 학교에 대해 신경 쓸 ‘이유’를 찾지 못하는 무관심한 사람이다. 회사와 학교는 이런 사람들을 경시한다. 친구들과 가족은 그들의 무기력에 당혹스럽다. 사회 분위기 역시 그들이 세상에 충분히 ‘기여’하지 않는다고 분개하는 경향이 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가 그들의 동기 결여를 개인의 실패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쁜 행동으로 보게끔 종용하지만, 이 세 부류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우울한 사람들


제임스가 처음으로 내게 묻고자 한 게으른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다. 그는 내게 자신이 주요우울장애를 앓는다고 대놓고 말했다. 제임스는 우울한 상태가 진행되는 동안 세상의 눈에 자신은 심각하게 ‘게으르게’ 보인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말은 제 상황을 표현하기에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있죠”라고 그가 트윗을 보냈다. “하지만 정확하기도 해요. 우울이 시작되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잠자는 것뿐이에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제임스는 우울할 때 방을 청소하거나 과제를 할 에너지가 없다. 수업도 가지 않는다. 온종일 잠만 잔다. 그가 삶의 이런 모든 부분에서 잘 해내지 못하는 게 ‘게을러서’인가? 더 중요하게는 그런 게으름이 나쁜가?
걱정스럽게도 우울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은 흔하다. 정신 건강 활동가들이 정신 질환이 가진 오명을 없애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대한 부정적이고 무지에서 비롯된 인식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예컨대 교수들은 아직도 우울이 제때 과제를 제출할 에너지가 없는 학생이 내세우는 타당하지 못한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직원이 우울증을 앓는다고 관리자에게 털어놓으면, 그는 병가를 낼 때마다 다른 직원들보다 더 많은 눈치를 봐야 한다. 그들이 한 일의 질이 같을 때조차 우울증을 앓는 직원이 해고될 가능성이 더 높다. 우울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대신 비난으로 증상을 대한다.
우울은 눈에 띄는 방식으로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이 일을 처리할 에너지가 없는 이유를 생각하지 못한다. 2018년 실시한 대규모 조사에서 응답자의 30퍼센트가 우울증이 ‘유약한 성격’ 때문이라는 문장에 동의했다. 우리 문화에는 ‘게으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경향이 여전히 깊게 남아 있으니 제임스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울한 사람은 왜 그렇게 게으른가? 우선 우울과 싸우는 것은 온종일 매달려야 하는 근무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울한 사람은 뇌가 종일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에 대항해 싸우기 때문에 쉽게 피로해지고 잠을 많이 잔다. 수면의 질이 낮기 때문에 8시간의 휴식에서 얻는 에너지가 우울하지 않은 사람보다 적다. 중증 우울을 앓고 있을 때, 특히 자살 충동을 느낀다면 수면은 절망에서 벗어날 유일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우울한 사람의 게으름은 실제로 몸과 마음이 그를 보호하며 치유하고 있다는 신호다.
게다가 우울은 뇌가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앗아간다. 우울하지 않은 사람에게 간단한 일, 예컨대 빨래조차 우울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뇌가 제 기능을 하기 힘들 때는 큰일을 작은 단계로 나누어 처리하는 게 어렵다. 우울할 때는 주의 집중력과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이 약화되고 기억력도 나빠진다. 지친 사람이 맡은 일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아니다. 삶의 어떤 부분에서 제대로 해내기 위해 에너지를 가지려면 다른 부분에서 ‘게으른’ 게 꼭 필요하다.

 


늑장부리는 사람들


제임스는 이 점에 대한 나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으른 것은 전혀 이해할 만하거나 괜찮은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방향을 좀 바꾸어 고등학교에서 자신과 친구들이 어떻게 ‘게으름’과 늑장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는지 말했다.
“우리는 자칭 늑장꾸러기였고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어요. 학교의 엄격함에 대한 일종의 저항 문화였죠. 한 친구는 수업 한 시간 전까지 기다렸다가 과제를 시작했어요.”
분명 늑장은 용인할 수 없는 형태의 게으름이다. 그렇지 않은가? 늑장 부리는 사람은 집중력과 야심이 없으며 일을 막판에 대충한다. 늑장에서 비롯된 잘못은 조금만 미리 해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늑장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행태로,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잘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누군가 늑장을 부릴 때, 그것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손발이 묶이기’ 때문이다. 주로 불안이나 크고 복잡한 과제를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는 혼란에서 비롯되며, 둘 다일 수도 있다. 나는 대부분 사람이 살면서 한두 번은 이런 종류의 마비를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구인 공고를 봤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이 꿈꾸던 일로, 드문 기회다. 당신은 제때 훌륭한 지원서를 써서 제출해 채용 담당자의 마음에 들어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 하지만 노력해도 지원서 작성은 좀처럼 잘되지 않는다. 자기소개서에 뭐라고 써야 할지 막막하고 지원에 필요한 추천서를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모른다. 이력서의 업데이트가 너무 안 되어서 쳐다보기만 해도 걱정스럽다.
곧 지원서에 대해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고 불안해진다. 그래서 불안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디오 게임을 한다. 그러면 지원서 작성을 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또다시 불안해진다. 그래서 낮잠을 자거나 부엌을 청소한다. 부지불식간에 일주일이 지나가 버렸지만 당신은 지원서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대충 작성해 막판에 보내거나 이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해 아예 지원을 포기할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게을러서 일을 망쳤다고 느낀다.
늑장을 부리는 사람은 완벽주의, 불안, 주의 분산, 실패의 주기에 갇힌다. 잘하는 것에 마음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준에 매달린다. ‘완벽하게’ 하기를 원하지만 초기의 시도가 결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곧 좌절하고 불안해진다. 시간이 지나고 기한이 다가오면 더 불안해지고 실패할까 봐 걱정한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집중해 진도를 나가기가 더욱 어렵다. 불안감에 대처하려고 어떤 식으로든 딴짓을 한다. 그러고 나면 마감일이 되어 대충 급하게 해서 제출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제임스는 자신과 친구들이 타당한 이유 없이 늑장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생각에 자신들은 그냥 장난삼아 나쁜 학생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늑장 부리는 대부분의 사람과 같다면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동정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늑장을 부리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사실 잘하는 것에 무척 많이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연구를 통해 주어진 과제가 당사자에게 정말 중요할 때 더 많이 늑장 부린다고 반복해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감과 명료함이 부족해 생산적인 방식으로 꾸준히 하기가 힘들 뿐이다.
반가운 소식이 있다. 만성적으로 늑장을 부리는 사람도 이 주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움과 격려가 있으면 늑장 부리는 사람은 큰 책임을 작은 과제들로 나누고, 가까운 기한을 설정하는 법을 배운다. ‘쪽짜리 보고서 작성’과 같은 큰일은 손발을 묶을 수 있지만, ‘하루에 두 단락씩 쓰기’는 해볼 만하다. 불안 치료와 병행하면 늑장 부리는 사람은 생산성과 신뢰도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무관심한 사람들


정말로 동기 부여가 안 되는 사람은 어떠한가? 그저 관심이 없어서 일을 미루는 사람은 어떠한가? 제임스는 친구들이 지나치게 엄격한 학교에 대한 반항심에서 숙제를 미뤘다고 말했다. 이 친구들은 불안과 우울 때문에 혹은 잘하는 법을 잘 몰라서 게을러진 경우가 아닌 것 같다. 일부는 정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관심한 게 정말 그토록 잘못된 일인가? 그런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설파하는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옳은가?
믿든 말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정말 무관심해 보일 때, 나는 그들을 실패자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어떤 면에서 방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수학이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으리고 생각해 대수학 수업에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를 예로 들어보자. 나도 수학을 그렇게 생각했다. 대학 시절 나는 통계학에서 C 학점을 받았다. 수업이 어렵고 (지루했으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내 삶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과목이 전공인 심리학에 어떻게 중요한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통계학 수업 시간에서조차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학원에서 연구생으로 훈련받고 나서야 통계학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실험이 제대로 되었는지 판단하려면 통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법을 모르면 내 커리어는 실패할 게 뻔했다. 그래서 노력했다. 조금씩 나는 통계를 잘하기 시작했다. 요즘 통계학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며, 조직들의 데이터 분석을 지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지루하고 어려운 과목이 인생에서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경지에 도달했다. 이제 통계를 가르칠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과목에 왜 관심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이해시키려고 애쓴다. 학생들에게 통계가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할 과목 중 하나인 이유를 보여준다. 내 설명이 통하면 학생들은 열심히 한다.
그래서 누군가 특정 목표에 무심한 것을 보면, 그것이 경제적 독립이든 학위 과정을 마치는 일이든 간에 나는 ‘이 일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제임스와 친구들은 학교가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에 과제를 대충했다.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통제하는 환경에 갇혀 있다고 느끼면, 사람은 당연히 그것에 저항하려 든다. 부모가 삶의 모든 면에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때 십 대들이 스스로 동기 부여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학교가 제임스와 친구들에게 자유와 자율성을 더 많이 부여했다면, 손을 놓기보다 적극적으로 과제에 임했을지 모른다.
때때로 사람들은 우울증이나 트라우마 때문에 무심해진다. 반복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한 후 관심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이 현상을 학대 피해자, 감금된 사람, 대대로 가난과 인종 차별을 겪은 가정에서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영향력을 잃으면 에너지를 얻거나 동기가 부여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손을 떼고 포기해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예컨대 직장에서 관리자가 무능하면 직원들은 열심히 해봤자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게 된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낮은 투표율에서도 볼 수 있다. 투표하지 않는 사람의 대다수는 유색 인종이며 가난하다. 그들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지들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력을 덜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좋다고 볼 수 없지만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게으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과제에 대처할 때 자신의 욕구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한계에 몰리면 우리가 게으르다고 여기는 감정과 행동이 나타난다. 무관심, 낮은 동기, 집중력 저하,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욕구 등 이 모든 것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경고 신호다. 이 신호들은 우리의 한계와 욕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고도로 진화되고 역동적인 경고 시스템의 혜택을 입으려면,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일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게으름은

경고다

 



생산성과 소진과 같은 주제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당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극단적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꽤 타당하고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주 40시간 근무는 대부분 사람에게 너무 길고 힘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루에 8시간 이상 반복적이거나 정신적 에너지가 소요되는 일을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더 열심히 더 오랫동안 일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실제로 타당하거나 지속 가능한 것 이상으로 우리가 더 큰 생산성을 낼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계속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 한계점은 드라마틱하다. 줄리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나서야 일과 생활 사이에서 타당한 경계를 설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나도 수개월 동안 병과 싸우고 나서야 비로소 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몸과 뇌는 한계에 다다르면 브레이크를 밟고 생산성보다 건강을 우선시하라고 말해주는 미묘하고 점진적인 신호를 보낸다. 안타깝게도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그러한 신호들을 최대한 무시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레오는 전략 게임을 매우 좋아하고, 역사와 철학 서적을 탐독한다. 단기적인 충동과 욕구보다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이 바로 레오가 자신의 욕구와 한계를 때때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오는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자신이 피곤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때문에 레오는 게으르다는 느낌이 위협이 아니라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게으르다는 느낌은 일상의 요구를 최적의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지 못하다는 신호다. 몸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도록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이끈다. 배가 고프면, 우리의 정신은 음식에 집착하게 되고, 위는 꾸르륵거리며 소화를 촉진하는 산으로 가득 차고, 하는 일을 멈추고 먹을 때까지 점점 짜증이 나고 기력이 없어진다. 충분히 자지 못하면, 몸은 점점 더 피곤함을 느끼게 하여 낮잠을 자도록 유도한다. 잠자기를 거부하면, 뇌는 종일 1000분의 1초 단위로 ‘마이크로 수면microsleep’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충분히 쉬지 않으면, 집중력을 잃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일상 전반에 스며든다.

 

 

 

 

 

 

 

 

 

삶의 가치를

재설정하는 법

 



삶은 생산적이거나 남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목표에 집착하고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애쓰기만 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사실, 그렇게 살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인식하는 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 대신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가치를 재고하고,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든 못 하든 상관없이 삶에 내재된 가치가 있다고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고방식을 이런 식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특히 오랜 세월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세뇌된 뒤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바꾸기 위해 따를 수 있는, 연구에 근거한 전략들이 있다. 이러한 전략들 가운데는 음미하는 법을 배우고, 경외심을 느낄 시간을 내고, 우리가 정말 못하는 무언가를 주기적으로 시도해 보는 일이 포함된다.

 


음미하는 법을 배워라


우리는 앞서 이미 사람의 행복 수준을 낮추는 사고 습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그 반대를 볼 차례다. 즉, 우리가 기쁨이라는 감정을 인식하고 극대화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는 사고 방법이다.
이러한 사고 습관은 모두 ‘가라앉게’ 하는 습관의 거울상이다. 우선 행동으로 나타내기는 행복하길 원하고 삶을 제대로 인식하길 원한다면 기쁨을 느꼈을 때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신이 나면 손을 마구 펄럭이고 강아지를 볼 때마다 요란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이것은 큰 희소식이다.

행복감을 높여주는 또 다른 방법은 삶의 즐거운 순간에 오롯이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를 분산시키는 요소들을 물리치고,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한다는 뜻이다. 이 방법을 삶에 통합하기 위해 나는 매일 진정한 점심 휴식 시간을 갖고 있다. 항상 점심시간을 ‘생산적으로’ 쓰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리토를 입에 쑤셔 넣으며 메일의 답장을 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만 받고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보고 놀라기만 한다. 그래서 컴퓨터를 멀리하고, 야외에서 좋은 장소를 찾아 느리게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미시간호 근처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을 만끽하려고 노력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좋은 경험을 소통의 기회로 활용함으로써 삶에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벌어진 좋은 일들에 대해 말하고 공개적으로 축하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계속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그와 반대로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강조할 때 얻는 여러 이점이 있다. 운이 좋으면, 우리는 좋은 소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끌어올릴 수 있다.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이 이룩한 업적에 따른 영광을 함께 누리길 좋아하며, 친구가 성공하고 행복할 때 자신도 뿌듯함을 느낀다는 게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연습해야 할 건강한 사고 습관 가운데 마지막은 긍정적인 시간 여행이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거나 과거의 슬픈 순간을 곱씹는 것과 반대되는 사고다. 음미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좋은 경험을 되새기는 법을 안다. 또한 미래에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 많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행복과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프레드 브라이언트 박사는 심리학 연구를 하지 않을 때 등산을 즐겨한다. 긍정적인 시간 여행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친구 두 명과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는 것이다.
“등산을 함께 가는 한 녀석은 항상 과거에 했던 등산에 대해 얘기합니다. 내게 전화를 해서 ‘2년 전 오늘 우리가 레이니어산 정상에 올랐던 것 기억해?’라고 말하죠. 그 바람에 나는 그날 우리가 했던 모든 즐거운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함께 등산하는 또 다른 친구는 계획에 능합니다. 그는 항상 다음 등산을 미리 계획하고, ‘여기가 바로 다음에 우리가 가볼 곳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친구 덕분에 다음 등산을 기대하게 되죠.”
평생 성취에 집착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라고 배웠다면, 처음에는 이러한 사고 습관들을 채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프레드가 나를 계속 안심시켜 주었다시피, 이런 식의 사고를 원래 잘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음미를 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긍정적인 것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런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이건 음악적 재능과 유사합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타고나길 좋은 귀를 가졌지만, 모든 악기 연주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음미도 마찬가지죠. 공들여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더 잘하게 됩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2020년 1월, 노아와 나는 기후 변화를 완화하기 위해 개인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관해 이메일로 설전을 벌였다. 노아는 친구들과 동료들이 환경을 위해 삶을 변화시킬 의향이 별로 없다는 데 몹시 실망했다.
“커뮤니티에 환경과 관련해 개인 차원의 선택이 의미를 갖기에 너무 늦었다는 말이 도배되어 있는 걸 보고 굉장히 좌절했어요. 저는 그 사실이 우리가 무엇을 달리 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할 책임까지 없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노아가 한 말이다.
나는 노아에게 기후 변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사람들이 낙담하고 무력하게 느끼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환경친화적 선택을 하는 건 너무 어렵고, 시간과 돈이 많이 들며, 평생을 ‘친환경’ 행동만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해도 한 명의 억만장자가 단 하루 만에 환경에 가하는 피해로 인해 개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후 변화에 대한 뉴스는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돌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노아와 나는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는 사회가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뉴스가 기후 변화를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추상적인 공포로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동을 바꾸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메일 주고받기가 다소 과열되자 우리는 결국 중단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확신하며 이 대화에서 발을 뺐다.
그러고 나서 미국에 코로나바이러스가 닥쳤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빠르고 이타적으로 대응하는지 보고 놀랐다. 법으로 요구하기 훨씬 전부터 친구들과 이웃들은 알아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동네 극장과 바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공연을 취소했다. 식당들은 노인과 코로나로 인한 실직자에게 무료로 음식을 배달해 줬다.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다정하면서도 확고한 압박을 가했다. 이 빠르면서도 광범위한 반응은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졌고, 주와 지방 정부가 격리를 요구하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기후 변화와 마찬가지로 코로나바이러스는 추상적인 공포로 시작되었다. 뉴스에서는 기후 변화에 대해 그랬듯이 코로나 재난이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 종말론적 예측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하지만 개개인은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해 책임감 있고 이타적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수년간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사람들은 의미 있는 선택을 할 힘이 있다고 느꼈다. 바이러스가 확산됨에 따라 공포도 커졌지만, 어떤 선제적인 대처 방법이 이 재앙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지에 관한 지식이 퍼졌다. 너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이탈리아와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루는 뉴스 보도는 공포심을 주었지만, 한국과 대만같은 국가들의 대응은 이겨낼 동기를 갖게 하는 매우 중요한 예시를 제공했다. 팬데믹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국가들은 수천 명의 목숨을 살렸다. 우리는 절망의 메시지만 받은 게 아니라 희망도 받았다.
모두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해 계속되는 나쁜 뉴스에 겁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대응법에 관한 조언을 어디서 찾으면 되는지 알았다.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분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다른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내에 머물러라. 마스크를 써라. 주변 노인들에게 식료품을 가져다줘라. 최소 2미터 거리두기를 지켜라. 이런 조언은 뉴스 매체에 의해 종말론적인 예측만큼이나 널리 퍼졌다. 뉴스는 불안으로 우리를 마비시키는 대신,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우리 대부분은 그 촉구에 기꺼이 응답하고, 이 거대한 문제에 우리가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팬데믹이 시작된 후 2주가 지난 시점에 나는 노아에게 메일을 보내어 기후 변화에 대응해 싸우는 게 얼마나 희망이 없어 보이는지에 대해 내가 한 모든 말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개인들이 힘을 합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런 선택을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고 믿기만 하면 돼요.”
정보는 동기를 부여하거나 영감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지식은 편견과 공포가 아닌 비판적 사고와 신중한 의사 결정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공유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저질 정보에 중독되었지만, 그것에 압도당해 수동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할 수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정보의 양과 종류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게으른’ 게 아니라 공익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행동이다.

 

 

 

 

 

 

 

 

지치게 하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법

 

많은 사람이 균형이 깨진 관계로 고생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기대하는 누군가에게 싫다고 말하는 법을 모른다. 다른 사람이 화가 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애쓴다. 애인과 룸메이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으라고 요구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모든 집안일을 떠맡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밀린 일을 처리하라고 요구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건강한 경계와 동의에 대한 감각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삶에서 유일한 ‘선good’이라고 믿을 때, 그리고 사랑받을 권리를 노력해서 얻어야만 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조차 선을 긋는 법을 알기 어려워진다. 부당하게 요구되는 일을 줄이지 못해 힘들어하듯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회적 기대에서 물러나는 것도 힘들어한다. 경계를 설정할 권리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대부분 주중 내내 휴식과 한가로움이 필요하다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 채 보낸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그런 느낌은 나약함의 원천이니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성은 사적인 삶으로도 확산되어, 우리는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욕구를 너무도 잘 무시해서 관계가 우리에게 해를 끼쳐도 알아채지 못한다. 결국 관계로부터 힘과 지지를 얻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착취당하고 조종당한다.

 

 

 

 

캐시 라브리올라Kathy Labriola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카운슬러다. 수십 년 동안 그는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아등바등거리는 내담자들을 치료했다.
“많은 사람이 인정에 중독되어 있어요. 대부분의 여성이 그렇죠. 하지만 여성만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고픈 욕구를 채워줄 상황을 본능적으로 찾습니다.”
1980년대부터 캐시는 내담자들에게 자기주장을 가르치고 균형이 깨진 관계를 재설정하도록 지원해 왔다. 그가 주는 조언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헌신의 수준을 점진적으로 줄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비교적 작은 행동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극적이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그들을 비난해 온 친구들과 가족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과 같은 큰 반목의 순간도 없다. 캐시가 권하는 행동들은 모두 오래된 비효과적인 패턴을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는 일이다. 샤론 글라스번도 비슷한 견해를 보이는데, 그 역시 내담자들이 관계의 역동을 점진적인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권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큰 갈등이 있는 극적인 순간들이 있을 거라 예상하죠. 하지만 보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계를 세우는 일은 보다 평범한 조치들로 구성되며 시간이 걸립니다.”
정리하자면, 샤론과 캐시가 내담자들에게 주는 조언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우선 상대가 당신에게 갖는 기대에 도전하고, 상대를 실망시키는 것을 연습하고, 반복해서 싫다고 말하는 것이다. 설령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느껴진다 해도 말이다.

 


기대를 없애라


요구가 과도하게 많은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가정한다. 샤론은 내담자가 그런 종류의 관계에 빠져 있을 때, 상대방과 함께 앉아서 그의 기대를 명시적으로 살펴볼 것을 권한다.
“우리는 자주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관계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큰 차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의 경우 관계 개선을 위한 첫번째 단계는 부모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직접 말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에게 모든 사람이 주말을 보낼 때마다 부모님을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해야 했어요. 그렇게 말해도 부모님이 제게 원하는 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자주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교우 관계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를 위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명시적으로 대화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샤론은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낱낱이 말할 때 많은 갈등을 없앤다고 말한다.
“때로는 함께 앉아서 ‘너는 나한테 뭘 기대하니?’, ‘나는 네가 어떻게 해주길 원할까?’에 대해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의 기대나 요구가 지나치게 크거나 당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그것에 부응하려는 마음을 줄여나가야 한다.

 

 


상대에게 발을 뺄 거라고 경고하라

 

캐시 라브리올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황이 변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라고 한다. 이런 경고가 꼭 양쪽이 대립하는 모양새를 띨 필요는 없다. 사실 솔직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변명이 충격을 완화해 더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저는 가족들에게 어떤 일을 겪고 있어서 만나기(혹은 연락하기) 힘들어질 거라고 말하라고 권합니다. 그런 식으로 개인적인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예전만큼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사전 경고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바쁘다는 건 발을 빼는 것에 대한 효과적인 변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 일을 이유로 한계를 설정할 때만 전적으로 이해해 준다. 그러니 당신의 정서적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누군가를 상대한다면, 요구에 덜 부응하면서도 갈등을 겪지 않기 위해 실제로 바쁘다는 말을 이용할 수 있다. 이 전술은 브라이언에게 통했다. 부모는 아들과 스테파니의 욕구는 존중하지 않았지만, 압박이 심한 아들의 일은 존중했다. 그래서 그는 이 점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님과 통화할 기력이 없는 날은 밤늦게까지 야근 중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연락이나 방문을 못 하는 것이 일 때문이면, 부모님은 화를 내지 않아요.”

 

 


작은 일들에 대해 싫다고 말하라


사람을 훈련시켜 기대치를 조정하게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또한 반사적인 ‘예스맨’이 되기를 멈추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캐시는 이를 해결하려면 큰 갈등으로 번질 일이 거의 없는 작은 거절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소소한 것들부터 싫다고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세요. 그렇게 하는 게 더 쉽고 그 여파도 적기 때문입니다. 요구가 많은 사람이 작은 걸 요구할 때, 예컨대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때를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싫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됩니다.”
이 방법을 앞서 다룬 조언과 결합하면 아주 좋다. 요구가 많은 사람에게 당신이 너무 바빠서 예전만큼 시간이 없다고 이미 경고했다면, 그가 화를 내더라도 당신은 발을 빼는 것에 대해 해명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점점 더 늘릴 수 있다. 이것은 훌륭한 자기 옹호 연습이다.
그레이스는 어머니의 조종에 저항하기 위해 자기 옹호 연습이 절실히 필요했다. 심리치료사는 매주 적어도 한 번씩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켜 보라고 권했다. 그레이스는 즉시 실천했다. 작은 것에서 시작했지만 누가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지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제가 공짜로 차를 태워주기를 그만하고 그들을 위하는 걸 그만두자마자 제게 등을 돌렸어요. 하지만 스스로 알아서 나아지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친구 필에게 함께 외출을 원할 때마다 데리러 갈 수는 없다고 말했더니 바로 택시를 타고 우리 집에 왔어요. 별일 아니라는 듯이요.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제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지 않을 때조차 그가 진심으로 저와 어울리길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변화가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들에서 그레이스는 마음을 다잡고 견디며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욕구와 한계를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고장 난 레코드판이 될까 봐 두려워하지 마라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면, 상대는 반발하는 경향이 있다. 굳게 버티려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자주 쓰는 변명을 계속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
“저는 그걸 고장 난 레코드판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해요. 결국 그들은 알아듣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려요. 평생 해온 방식과 다르게 행동하는데 갑자기 적응할 거라고 기대할 순 없죠.” 캐시가 한 말이다.
캐시는 이 과정을 몸소 겪었다. 여동생은 캐시가 자신을 아이처럼 돌볼 것이라고 기대했다. 수십 년 동안 동생을 돕기 위해 달려가고 필요한 모든 것을 해준 끝에 캐시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20년 전에 저는 그 관계를 바꾸기 시작했어요. 수년이 걸렸어요. 40년 동안 동생의 조종에 끌려다녔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싫다고 말했을 때 동생이 그냥 넘어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죠. 동생은 제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왜 그러지 않겠어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렇죠.”
이제 캐시의 동생은 더 이상 캐시를 조종하지도, 과거와 같은 식으로 지나친 도움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브라이언은 이 과정의 초기 단계에 있다. 그는 올해 부모의 요구를 조금씩 거절했고, 점진적인 발전도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어머니가 저희 부부의 크리스마스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어요. 고향 집에 언제 도착하느냐 물은 게 아니라요. 선생님에겐 대단한 일로 들리지 않겠지만, 제겐 대단한 일이에요. 부모님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고 우리의 의견을 물어본 거예요.”
물론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브라이언의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부모는 여전히 그와 정기적으로 장시간 통화하길 원하거나 많은 것을 공유하길 원한다. 그럴 때면 그는 고장 난 레코드판 기법을 사용한다. “저는 계속해서 ‘죄송해요, 바빠요. 하지만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양육 죄책감 다루기




깨끗한 집을 포기한 내담자는 어린 자녀들의 엄마였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모들은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한다는 사회 압박을 가장 많이 받는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눈으로 볼 때 양육은 많은 방식으로 ‘잘못’될 수 있다. 즉, 부모가 비난받고 무시당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너무 많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피곤하고 힘든 책임을 훨씬 더 불안하고 혹독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문제의 원천은 바로 게으름이라는 거짓이다.

‘올바른’ 양육법에 관한 다양하면서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견해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인기를 끈다. 모든 세대의 부모들은 기분이 나빠지는 새로운 정보를 발견한다. 1920년 즈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존 B. 왓슨John B. Watson과 같은 심리학자들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껴안거나 뽀뽀하지 말고 신체 접촉을 손잡기와 머리 쓰다듬기 정도로 제한하라고 경고했다. 왓슨은 너무 많은 애정을 주면 아이가 나약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유행한 양육법은 왓슨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애착 육아법이었다. 충분히 안아주지 않은 아이들은 낮은 자존감과 우울 등 여러 문제를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1990년대에 이르자 다시 역전되어 ‘헬리콥터 양육법(극성 육아)’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났고, 부모들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주면 자립심에 손상을 줄까 봐 염려하기 시작했다. “자녀를 망치지 않는 방법은 없어요.” 전업주부로 세 아들을 키우는 아빠 에이든이 한 말이다.
에이든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그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깨달은 날부터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최고의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말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소개하는 모든 책을 읽고 걱정하느라 골머리를 썩여요. 임신했을 때조차 여기저기서 다 다른 조언을 듣게 됩니다. ‘이거 먹지 마라’, ‘운동하지 마라’, ‘아니다, 운동해야 한다’ 등등. 이 가운데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 절대로 알 수 없죠.”
오늘날의 부모들은 서로 상충되는 조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엄마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와 양육을 다루는 소셜 미디어 계정들은 수유, 수면 교육, 용돈, 어린이집과 같은 문제에 대해 끝없이 의견을 제시한다. 어린이집 선택부터 성별이 구분되지 않은 옷과 장난감 구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선택이 정치적 논쟁거리가 된다. 많은 부모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고 자녀를 완벽하게 키우지 못해 사회적으로 거부당할까 봐 걱정한다. 또한 자녀의 성공을 충분히 지원해 주지 못할까 봐 염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게으르다고 느낀다.
에이든은 이러한 모든 상반되는 관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에 걱정과 자기 회의감에 빠져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시어머니는 에이든이 부모로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비판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니까 완전히 남자답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트랜스젠더로서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시어머니가 에이든의 가족이 어떻게 사는지 늘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 되었다. 그 바람에 시어머니는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에이든을 비판할 수 있었다. 에이든이 아이들에 대한 글이나 사진을 올리면, 때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댓글을 받는다.
양육 불안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소셜 미디어 사용이라고 시사한다. 또다시 디지털 도구들 때문에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우리를 쫓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이 거짓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으며, 수없이 많은 면에서 우리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에이든은 이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거부하기로 했다.
“둘째가 생길 즈음이면 망했다는 생각이 천 번쯤 들고, 그 후로도 그런 생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번 그럴 때마다 두려움은 점점 줄어들어요. 망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아요.”
완벽한 아빠가 되려는 대신, 에이든은 그저 ‘충분히 좋은’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다.

 

 

‘충분히 좋은 것’으로 충분하다


1980년대에 발달심리학자들은 ‘충분히 좋은 부모good-enough parent’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수세대에 걸쳐 부모(대개 엄마)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 엄격한 규칙들이 전해 내려왔지만, 연구자들은 완벽한 양육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모든 부모는 결함이 있으며, 그런 결함을 없애려는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완벽해지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릴 때 오히려 더 잘 대처했다.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충분히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 안식처, 충분한 음식을 제공한다. 실수도 하지만 그 일이 자녀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부모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와 자녀의 고유한 특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에이든의 경우, 충분히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은 원칙을 어느 정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집에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치킨텐더를 많이 먹어요. 저는 때때로 아이들을 씻기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합니다.”

 


실수를 받아들여라


충분히 좋은 부모의 핵심적인 특징은 실수했을 때 자신을 너무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실수를 정정하고 그 경험에서 배우려고 노력한다. 충분히 좋은 부모가 편안하게 자신의 불완전함을 수용할 때 자녀가 삶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후퇴와 실망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내가 대화를 나눈 또 다른 부모인 에밀리는 딸을 키우며 저지른 실수를 가감 없이 말했다.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물리적 체벌을 가한 것이었다. “저는 아이를 때리는 게 좋은 훈육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자랐거든요. 하지만 나중에 저는 물리적 체벌이 나쁘고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 딸은 지금 열두 살인데, 우리는 체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이에게 과거에는 체벌이 널 잘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런 이유에서 체벌을 그만뒀어라고 말했죠.”
부모가 자녀와 자신의 실수에 대해 대화할 때, 관계의 회복탄력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열린 소통을 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실수에 대해 편안한 부모들이 자녀의 결함과 실패도 더 잘 수용하는 것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라


유명한 커플 카운슬러인 에스터 페렐Esther Perel은 부모들이 정신 건강과 정체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녀와 무관한 취미와 사교 활동을 할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글을 자주 썼다. 이것은 자녀에게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로울 수 있다. 부모가 양육하는 역할에서 다소 벗어나면, 아이들은 스스로 즐겁게 지내고 자신만의 열정을 찾을 수 있는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에이든은 몇 년 전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직후 이 원칙을 실천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전보다 훨씬 바빴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암벽 등반을 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할애했다. 
“남편에게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주립 공원에 가서 암벽에 오르고 싶어’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남편은 ‘좋아, 그럼 나는 친구들과 던전앤드래곤 게임을 할 거야’라고 했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에이든과 남편 둘 다 취미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을 빼놓는다. 둘의 계획이 겹치면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고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어쩌다 아이가 아프면, 우리 중 하나가 개인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애를 봐야겠다고 말해요. 그럴 때는 다른 하나가 상대의 말을 바로 잡고 이렇게 말하죠. ‘여보, 우리한테 좋은 걸 하는 게 가족을 위해서도 좋은 거야.’ 그런 말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근본적으로 경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믿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를 돕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실 타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좌절하고 지치고, 우리와 타협할 수 없는(혹은 하지 않을) 누군가를 돕느라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음을 깨닫는다. 캐시 라브리올라는 이 문제로 고생하는 많은 내담자와 작업을 했다.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건 훌륭한 충동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지 혹은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묻지도 않은 채 항상 달려가 도움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해요.”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죄책감을 느끼게 하여 우리의 것이 아닌 책임을 떠맡게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구하려는’ 극적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에 빠지기 전에 그 사람의 문제가 정말 우리가 개입할 만한 것인지,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개입을 해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도우려고 많은 시간을 쏟는 불안정한 인정 추구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이 타인을 도와야 하는지 판단하라


정서적으로 과도하게 타인에게 관여하는 내담자를 다룰 때, 캐시는 관여가 그들의 책임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설계된 질문들을 제시한다. 이런 질문은 상황을 ‘교정’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인 방법들로 연결할 수 있다.


• 그들이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 그들이 도움을 원하는가?
• 그들이 나의 도움을 원하는가?
• 내가 지금 당장 도움을 줄 사람이 맞는가?
• 전문가나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인도할 수 있는가?
• 도우려는 나의 동기는 무엇인가?
• 도와주면 내게 어떤 피해가 생기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많은 사람이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심하게 침해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시도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냥 아는 지인을 위해 이런 보살피는 역할을 모두 떠맡는 내담자들이 있어요. 갑자기 그들은 사실상 모르는 사람의 삶에서 주된 지지자가 됩니다. ‘당신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군요!’ 하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만일 내가 이선을 떠올리며 이 질문들에 답을 했다면, 나는 그의 우울증과 트라우마 이력은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며 그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일이 정말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선은 준비가 되었을 때 스스로 치료를 찾아야 했다. 나는 그가 원치도 않는 심리치료사들의 명단을 작성하느라 몇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이선은 내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24시간 대기조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과도한 기대에 굴복하기를 거절했다면 나나 이선 모두 좌절을 덜 겪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런 종류의 경계를 그어야 한다는 생각이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데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왜 도우려고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라


몇 달 후 나는 〈디어 프루던스Dear Prudence〉라는 상담 팟캐스트의 한 에피소드를 듣다가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에피소드에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옆집에 사는 이웃과 심하게 일방적인 교우 관계에 빠져 있었다. 이 사람은 이웃의 아이를 무료로 돌봐주고, 식료품을 사주고, 많은 정서적 지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웃은 그런 베풂에 대해 별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사연을 보낸 사람은 분노하고, 소진되고, 이용당했다고 느꼈다. 그는 대니 M. 레이버리Danny M. Lavery인 ‘프루던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물었다.
우선 대니는 이웃의 도움 요청을 피하는 법에 관한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곧 더 깊숙이 들어가 사연을 보낸 사람에게 친구라고 부르기도 뭐한 누군가를 위해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불필요한 일을 해줘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대니는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충분히 많은 사람을 돌봐주면 언젠가 결국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채고 당신을 돌봐줄 거라 믿는 게 아닌가?’ 
나는 게으름이라는 거짓에 심하게 세뇌당해 모든 약점과 부족함을 숨기고 나의 가치를 타인에게 증명하는 데 집착했다. 내가 정서적 지지나 보살핌을 청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외롭거나 슬프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다른 누군가를 도와 내 기분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누군가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눈치채고 갑자기 내게 와서 ‘이런, 딱해라.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걸 했어요. 이제 내가 당신을 돌봐줄게요’라고 말해주길 항상 마음속으로 바랐다. 캐시 라브리올라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길 원하는 이유와 도와줌으로써 무엇을 얻길 기대하는지 스스로 물을 것을 권한다.
“우리 모두 뭔가를 할 때 건강한 동기와 건강하지 못한 동기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비율이 어떤지는 알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타인을 돕는 일에 다소 이기적인 동기가 있는 건 정상이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이타적이지 않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해 타인을 강박적으로 돕고 있다면, 이제 그런 헌신은 접을 때가 되었다. 특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이용당했다고 느껴지는 복잡하고 불공정한 관계로부터 발을 빼야 한다.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말라


심리학자 앨버트 J. 번스타인Albert J. Bernstein은 저서 《How to Deal with Emotionally Explosive People(정서적으로 폭발하는 사람들에 대처하는 법)》에서 요구가 많은 친구의 정신 건강을 위해 수많은 지지를 제공하는 일이 어떻게 자기 파괴적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친구들의 기분이 나쁠 때 항상 당신이 나서서 기분이 나아지도록 돕는다면, 당신은 기분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당신에게 의지하도록 본의 아니게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자원과 능력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 그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기 시작한다. 번스타인은 이렇게 적었다. “기분을 가장 빨리 좋아지게 하는 것들이 대개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이선과 내게 벌어진 일이다. 이선은 자살하고 싶고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심리치료사나 그와 정말로 가까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항상 곁에서 몇 시간이고 불평불만을 기꺼이 들어주었기 때문에 이선은 모든 걱정을 털어놓을 곳이 나라고 여긴 것이다. 의도치 않게 나는 삶을 개선하기 위해 취해야 할 긍정적인 조치들 대신 내게 의지하게끔 이선을 훈련시켜 버렸다.
괴로워하는 사람과 마주치면, 사람들은 돕기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주, 우리가 돕기 위해 하는 최선의 시도가 상대에게 해만 끼칠 수 있다. 도움을 주는 것과 누군가의 유일한 지팡이나 비공식적인 심리치료사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것이 아닌 책임을 떠맡기를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불쾌해하겠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훨씬 더 좋다.
번스타인은 저서에서 강박적으로 ‘돕는 사람’이 그들에게 익숙하고 강력한 밀착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도움을 제시했다. 내가 이선에 대해 ‘왼쪽’이 아닌 ‘오른쪽’의 대응을 했다면, 우리의 교우 관계는 그렇게 유해하고 기생충 같은 관계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선의 자살 사고를 내가 막아야 할 것으로 여겼다. 특정 치료사에게 전화를 걸어라 혹은 특정 일자리에 지원해 봐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더 많은 자율성을 앗아간 것이다.

 

 

내가 한없는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기를 그만둔 후, 이선은 자신의 문제를 혼자힘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연락을 중단한 지 몇 달 후, 우리 둘을 아는 친구가 내게 이선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고 친밀한 룸메이트들이 생겼다고 전했다. 이선의 비현실적인 요구에서 내가 자유로워짐으로써 의도치 않게 우리 둘 다를 해방시킨 셈이다. 이선과의 관계에서 발 빼기는 ‘게으른’ 것도 무심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둘 다 그럴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중단할 때,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개개인이 우리에게 부가하는 요구에 도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가하는 거대하고 광범위한 요구를 더 잘 떨쳐버린다. 

 

 

 

 

 

 

 

 

 

 

사회가 부과한 당위를 떨쳐버려라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이 우리가 불만을 접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기를 원한다. 튀어나온 모든 모서리를 갈아 매끄럽게 만들어 누군가를 최대한 무난하고 특징이 없고 ‘정상적으로 보이게’ 할수록, 그와 주변의 모든 사람은 제도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생산성에만 더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하는 모든 다른 거짓된 약속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자기 패배적인 덫이다.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뿌리 깊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문화 속에서 소외 계층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억압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흑인 여성들은 타고난 곱슬머리가 백인들의 눈에 거슬리고 ‘프로’답지 못해 보이기 때문에 머리를 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인디언들은 전통적인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이 너무 거하고 ‘현란해’ 보이기 때문에 일터에서 착용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와 같은 트랜스젠더들은 일터에서 대놓고 자기를 드러내면 처벌받는다. 나의 성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일과 같은 단순한 문제조차 비난이나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른 직원들에게 ‘눈엣가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일중독 문화에 절은 주류의 직장에서 백인 주류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없다. ‘프로다운’ 행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 통제에 대한 욕구에서 기인했다. 제3의 성을 가진 작가이자 성우이자 활동가인 제이컵 토비아Jacob Tobia는 〈제3의 성을 가졌지만 내가 프로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라는 에세이에서 이 점에 대한 글을 남겼다.
“프로다움은 나의 성 정체성을 완전히 지우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나의 적이었다. 용기를 내어 나는 다르다고 표현하면, 동료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승진을 놓치거나 심지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제이컵은 맞춤 제작된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액세서리를 걸치고, 세련되지만 일하기에 적합한 힐을 신는다. 시스젠더 여성이라면, 사무실의 그 누구도 그의 모습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수염과 체모가 있는 눈에 띠는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의 경우, 귀엽고 유행에 따른 복장은 일터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 문화에서 많은 사람은 자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살이 찐 사람들은 날씬한 사람들을 위한 세상에 순응하기 위해 몸매를 교정하거나 굶어야 한다. 장애인들이 편의시설 설치를 요청하면 ‘나약해’ 보이거나 ‘게을러’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완벽을 매우 엄격하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날씬한 몸매, 깔끔하고 그럴듯한 생활, 사회에 이로운 ‘생산적’이고 훌륭한 활동들로 꽉 찬 하루를 요구한다. 즉, 반발이나 불만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삶이다. 이러한 항목들에 모두 해당되지 않으면, 마치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당연히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제시하는 이러한 이상들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해버리고, 바쁘고 정신없이 살게 하며, 욕구를 가진 것이 잘못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평가할 필요가 없다. 한발 물러서서 사회가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사실 우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의 마음에 들도록, 이해받도록 작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당위’에 저항할 때, 우리는 게을러지는 게 아니라 강해진다.
나 역시 타고난 성별에 딱 맞는 성 정체성을 갖고, 예의 바르고, 아름다운 여성이 되려고 애쓸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기로 했다. 예전에 비영리단체장이었던 줄리는 ‘슈퍼우먼’이라는 완벽한 이미지를 투사하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가족의 건강을 최우선에 두기로 결심했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단체에 머무를 수 있었으나 대신 자신을 위해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고 쉽게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 각자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교의에 저항하고 진정으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스스로 물을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사회가 부가한 가장 유해한 ‘당위’들 가운데 일부를 내려놓고 거부해야 한다. 그러한 규칙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에게 해가 되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제약들에 순응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치부될 수 있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다.

 

 

 

 

 

 

 

 

 

우리 몸은

이미 완벽하다




당신의 생산성이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평생 들어왔다면, 몸으로부터 소외당할 가능성이 높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자신의 몸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일부로 보지 않고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본다. 즉 신체를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자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살찐 여성이 이런 담론에 넘어가기 쉽다. 살찐 여성은 자신의 몸을 날씬한 아름다움에 최대한 맞추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듣는다.
“아름다움으로 평가받는 건 정말 지겹고 지치는 일이야. 아무도 원치 않는데 말이지.” 내 친구 제시 올리버Jessie Oliver가 한 말이다.
제시 올리버는 발성 지도자이자 뛰어난 오페라 가수이며, 살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유포하는 활동가다. 팟캐스트 〈살에 대한 수다Fat Outta Hell〉에서 제시와 동료 진행자는 특대 사이즈 비키니를 찾는즐거움부터 체격이 큰 사람도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갖춘 식당 찾기의 어려움 등 살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제시는 오랫동안 살에 대한 부정적 관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터와 진료실과 공연예술계에서 살찐 사람들이 맞닥뜨린 비난과 배척에 대해 비판했다. 자신이 살 공포증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회의 살에 대한 혐오가 ‘게으름이라는 거짓’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제시는 몸소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내 생각에 다이어트 산업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똑같이 돈을 버는 유일한 산업이야. 체중을 감량하지 못하면 계속 노력해야 하지. 감량에 성공한 사람에겐 빠진 체중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온갖 제품들을 팔아. 신이 다시 살찌는 걸 용납하지 않거든.”
살에 대한 혐오는 기업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019년 다이어트 산업은 미국에서만 그 가치가 72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산업은 2018년에서 2019년 사이 4퍼센트 성장했고, 대부분의 분석가는 이 산업이 향후 몇 년 동안 계속 성장할 것이라 예측한다. 다이어트 사업은 매우 광범위하고 거대해서 다이어트 알약부터 ‘폭풍 감량’ 운동 강좌, 성형수술, 복부 압박 벨트까지 팔지 않는 게 없다. 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쏟아부을 대상은 많다. 많은 기업이 살을 빼는 데 돈을 계속 쓰도록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다.
사회의 살에 대한 혐오는 사람들이 ‘완벽’이라는 임의적인 기준을 좇으며 열심히 운동하도록 몰아붙인다. 이 혐오 때문에 우리는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 상관없이 헬스장과 피트니스 강좌에서 몸을 날씬하고 ‘탄탄’하게 만들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살에 대한 혐오는 누구나 미의 기준이 되어버린 부유한 백인 유럽인들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이 보내는 배고프다는 신호는 믿을 게 못 되며, 알약이나 식사 대용 셰이크로 억눌러야 한다고 믿게 한다. 그런 방법들이 거의 효과가 없다고 통계상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몸만들기’를 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 연간 수천 달러를 쓰게 한다.
“오래전부터 살에 관한 많은 연구와 과학의 돈줄은 다이어트 산업이었어. 그래서 모든 연구 결과가 다이어트 제품 기업들이 ‘당신을 고칠 수 있는 제품이 여기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제시돼. 우리는 고쳐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게 되지.” 제시가 한 설명이다.
체중 감량을 통해 몸을 ‘고쳐야’ 한다는 이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을 빼려는 시도는 십중팔구 실패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식단 조절, 운동, 수술, 보조제 모두 장기적으로 신체를 변화시키는 데 효과가 없다. 연구에 따르면 체중 감량을 시도한 사람들의 95퍼센트에서 97퍼센트가 5년 내에 요요현상을 겪었다. 게다가 우리 모두 살찐 것을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배웠지만, 많은 연구를 통해 살을 빼고 찌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정한 과체중을 유지하는 것보다 건강에 훨씬 해롭다고 밝혀졌다.
이 모든 증거에도 사람들은 살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게으름’의 신호로 보도록 배웠기 때문에 살과의 전쟁을 계속한다. ‘살’과 ‘게으름’은 주로 함께 쓰이는 단어들이다. 둘 다 사람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역겨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더 열심히만 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라고 주장하며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가난한 사람들의 불운에 대해 그들을 탓하는 것처럼, 덜 먹고 더 운동만 하면 살을 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살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인 신체 이미지를 덧씌운다.

십 대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나는 꽤 심각한 섭식 장애를 앓았다. 가능한 한 먹기를 거부하고, 아무리 바쁘거나 피곤해도 매일 한 시간 이상 운동했다. 2014년에 심각하게 아팠을 때, 영양실조가 과로와 함께 주된 원인이었다. 나에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강박적인 과로와 섭식장애 둘 다 게으름에 대한 두려움과 나는 ‘충분히’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건강해지기 위해 육체 고통이 미덕의 표시라는 믿음을 버려야 했다. 또 살이 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해야 했다. 그때까지 평생 나는 살찐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 없이 ‘게으르며’, 그들이 맞닥뜨린 배척과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섭식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찐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에 도전해야 했다.

 

 

 

당신의 몸은 대상이 아니라 당신임을 기억하라


심리학자들이 부정적인 신체 이미지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연구했을 때, 문제의 핵심은 바로 ‘자기 대상화’였다. 우리의 몸을 대상 혹은 정신과 별개의 것으로 보면 자기 대상화에 빠진다. 자기 대상화의 폐해가 특히 심각한 경우, 자신의 몸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전체가 아닌 구분된 ‘부분들’의 집합으로 인식하며, 부분마다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에 따르면 습관적으로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존감이 훨씬 낮으며 섭식 장애 행동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한 연구에서 많은 시간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하는 여성은 자기 대상화가 야기한 주의 분산과 괴로움 때문에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수학 문제를 잘 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마른 몸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매체의 이미지에 노출이 많이 될수록 이런 파괴적이고 자기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만약 자기 대상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자기 대상화를 하고 싶은 충동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 자기 몸의 모습이 아닌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좋다. 운동은 일종의 처벌이 아닌 몸이 할 수 있는 일을 축하하는 과정이며, 적당한 달리기나 힘든 웨이트 운동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친절해지는 것도 중요하다. 몸이 통증, 불편함, 배고픔의 신호를 보낼 때 경청하면 자신의 욕구에 더 잘 대처하며, 무리해서 자신을 처벌하려는 경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한가로이 있거나 체중이 느는 것이 ‘게으르다’는 신호라는 두려움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의 몸에 귀 기울이고 휴식과 한가로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면 치유 효과가 좋다. 몸이 보내는 아프거나 지쳤다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는 일은 혁명적이며 깊은 치유의 효과가 있다. 평생 배워온 살에 대한 혐오와 외모지상주의를 버리는 것은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당신의 몸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자마자 탈학습이 시작될 수 있다. 바뀌어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 대해 사회가 지닌 엄격한 기대와 살 공포증이다. 

 

 

 

 

 

 

 

 

 

 

연민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없앤다





나는 노숙자는 게으르며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자녀에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며 이 책을 시작했다. 이런 예시로 시작한 것은 신중하게 의도된 선택이었다. 많은 사람이 노숙자를 게으름의 상징으로 보고, 게으름이 바로 노숙자가 겪는 고통의 근원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산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오롯이 그들의 탓으로 돌리는 이러한 경향성은 왜곡된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즉, 그렇게 믿으면 우리는 마음을 닫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할 수 있다. 또한 바로 이 경향성 때문에 과잉 생산성의 쳇바퀴 위에서 끝없이 뛴다.
노숙자, 실업자, 가난한 사람을 ‘게으름’의 희생자로 볼 때, 뼈 빠지게 일해야 할 동기는 한층 더 강해진다. 노숙자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한계를 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끝없는 고투로 삶을 전락시킨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친절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게으름이라는 거짓과의 싸움은 온종일 일하는 사람에게 힘을 빼고 더 많이 쉬라고 장려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로하려는 강박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의 핵심 요소이므로 그런 충동에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들을 혐오하는 문화는 인간관계, 자녀 양육, 신체 치수, 투표를 막는 요인 등등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 거짓은 우리에게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불안과 비판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료법은 한없는 연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해체하고 해방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사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게으름’에 대한 모든 비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탈학습하기 매우 어려운 것도 있다. 당신이 휴식과 불안전함과 게으름과 나태함의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면, 노숙자도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알코올 중독자도 그럴 자격이 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생산성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면, 다른 모든 인간의 삶도 가치가 있다.

 

 

 

 

연민 어린 호기심을 실천하라


우리는 사람들이 타성에 젖거나 무기력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게으르다’고 치부한다. 누군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게 느껴진다. ‘입사 지원도 하지 않고 종일 소파에서 뭉개고, 몇 주 째 설거지도 안 해. 게으른 게 틀림없어.’ 누군가를 ‘게으르다’고 분류하면 복잡하고 힘든 상황을 매우 뻔한 경우로 축소해 버린다. 
타인을 서둘러 게으르다고 치부하는 대신, 호기심을 갖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다. 타인의 무기력이 몹시 자기 패배적이고 의미 없어 보여도, 삶의 맥락 속에서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니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다음 질문을 통해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 그들이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충족시키려는 욕구는 무엇일까?
• 바뀌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문제나 장애물은 무엇일까?
•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설명할 수 있는 고통(예컨대 신체장애, 정신 질환, 트라우마, 억압)은 무엇일까? 
• 그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누가 영향을 주었을까?
•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그러한 선택지들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도움이 필요할까?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편견과 편향을 탈학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타인의 상황에 대해 알면 알수록 타인과 눈에 보이는 단점에 대해 더 많은 연민을 갖게 된다. 

나는 이 원칙을 학생을 대상으로 수없이 많이 실천했다. 어떤 학생이 과제물을 제출하지 않고, 지각을 하고, 내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으면 나의 첫 반응은 그를 게으르거나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치부하는 것일 수 있다. 그 학생을 바로 포기할 수 있지만, 그 대신 호기심을 가지면 항상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학생이 잘 지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면, 십중팔구 겉으로 보이는 ‘게으름’이 사실 삶에서 겪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다. 학생이 나를 믿고 이런 정보를 공유할 때, 그를 도울 기회가 생긴다. 이러한 교감과 협력에 기초한 문제 해결의 순간들은 교육자로서 내가 갖는 가장 의미 있는 경험 가운데 하나다. 만일 내가 비판적이고 게으름이라는 거짓을 따른다면, 그런 순간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중독으로 고생하는 친한 친구가 있다. 나는 그의 상황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적용한다. 친구는 심각한 수면 장애를 겪고 있으며, 성인이 된 후 내내 자살 사고와 충동을 경험했다. 때때로 친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밤에 잠이 들고 자해를 하지 않도록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해법은 아니지만, 나는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친구에게 술을 줄이라고 하고 중독 상담을 받는 데 격려해 주었지만, 친구가 삶을 끝내는 대신 술을 택했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하루를 더 살아 이 싸움을 계속하는 것에 기뻐하며, 그의 의사결정 과정을 존중한다.

 

 

 

생산성을 선량함과 연결시키기를 중단하라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습관을 들이고 나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어떤 행동들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한 뿌리 깊은 가정에 도전하라. 호기심은 누군가의 행동이 비효율적이거나 나쁘게 보일 때 이해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낙인찍는 것을 멈추는 게 훨씬 더 큰 연민을 베푸는 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자본주의와 특히 극단적인 형태의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열심히 일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이 신념 체계는 생산성, 노력, 성취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한가한 시간을 낭비로 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도록 채근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는 게 더 큰 미덕이라고 가정한다. 그 ‘무엇’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를 많은 위험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일하는 게 실업 상태보다 항상 더 좋다면, 부패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에서 직원을 괴롭히는 상사와 함께 일하는 게 그만두는 것보다 더 낫다. 항상 바쁜 게 미덕의 신호라면, 혼자 집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전 세계를 돌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거창하고 돈이 많이 드는 여행을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메모한 내용이다

읽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이 아니니까 기회가 되면 읽어보는 거 추천하구 이거 말고도 지금 가벼운 책 많이 읽고 있으니까 또 좋은 책 있으면 메모글 올림

 

 

 

 

+) 돈이 많은 거 아니면 책을 돈 주고 사서 읽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는 편이라서 (추천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내가 선호하지 않아서) 될 수 있으면 나처럼 어플 무료 이용이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거 추천!
부자가 돼서 책같은 것도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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