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 키스 앤 텔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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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 키스 앤 텔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1. 8. 27.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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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메모 (알랭 드 보통 - 키스 앤 텔)

전에 알랭 드 보통의 책 2개(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를 너무 감명 깊게 봐서 하나 더 빌려왔는데 이건 그 두 책보다는 재미없었다

그치만 역시 메모하고 싶은 문장은 많았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추천@

 

 


 

 

  이 지구와 그 거주자들을 겪어본 경험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판단이 아무리 공정하고 아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지금까지 만나본 가장 매혹적인 사람, 사랑과 문학, 종교와 오락, 지저분한 농담과 가정 위생에 대한 취향이 모두 전혀 흠잡을데 없는 사람, 그 좌절하는 모습에 한없는 걱정과 동정이 밀려오는 사람, 새벽의 구취에도 조용히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인간관이 잔인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사람, 이런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고, 건방짐과는 전혀 관계없는 태도로 넌지시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인 기질이 강한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무척 우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똑같이 우울하다 해도, 오렌지를 짜거나 심야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조심스럽게 보글보글 흘러나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경우와 격분하여 나를 비난하는, 그것도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려고 꽃병도 두어 개 바닥에 메치면서 비난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생각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는 엄연히 다르다.

  스스로 자신을 모욕하는 것의 매력은 칼을 얼마나 깊이 찔러야 하는지 알고, 외과 의사처럼 정확하게 가장 예민한 신경은 피해가는 데 있다. 그것은 자신을 간질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해로울 것이 없는 장난이다. 엘튼 존은 가수와 눈이 촉촉한 시인들의 진부한 전통에 따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예술이 자신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잠시라도 자신의 재능을 의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비하하는 것은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오만한 믿음, 즉 사실 자기가 보석 같은 노래를 썼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 스스로 자행하는 이런 모욕에 관해 존슨 박사가 말했듯이, 이것은 유쾌한 장난이다. 그런 장난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적 자신감이 조금도 없다는 내용을 곡조에 담아 노래로 부르려면 얼마나 큰 음악적 자신감이 필요할까? 여유 있는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자기중심적인 야비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존슨 박사가 말하는 자기 비하는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보세오, 엄마, 나 손 놓고 타요"하고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자존심이라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을 필요에서 일시적으로 놓여날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편없는 가수야" 또는 "아, 나는 정말 버릇없는 놈이야" 하고 즐겁게 소리치며 자전거의 타성에 몸을 맡기고 언덕을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귀엽기만 하던 비하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그 비하엔 날카로운 발톱이 돋는다.

 

 

 

 

  그러나 적당한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전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의 윤리적 가치를 고려할 때, 전기 작가들이 이 행성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수십억의 영혼들 가운데서 목표물을 고르는 방식이 전통적으로 아주 편협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워홀의 말을 실행에 옮겨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려 할 경우 1711세기의 교통체증이 일어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일부 인사들이 전기의 영역을 자기 몫 이상으로 집요하게 게걸스럽게 탐내는 데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었다. 히틀러, 버디 홀리, 나폴레옹, 베르디, 예수, 스탈린, 스탕달, 처칠, 발자크, 괴테, 메릴린먼로, 카이사르, W. H. 오든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인물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예술적이든 정치적이든 유익하든 아니든,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그냥 흔히 하는 말대로 전설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보여주었다. 아침에 통근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거나 전율을 느낄 만한 삶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전기 작가들은 위대한 인물과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할 운명인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담당한 인물이 (러시아를 정복하고, 인디언을 물리치고, <라 트라비아타>를 쓰고, 증기기관을 발명하기는 했지만) 당신이나 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느라 열심이었다. 실제로 전기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더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인간에게서 살과 피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그 인물의 개성, 역사가 그 엄숙한 초상화에서 지워버렸지만 효과적인 세부 묘사에서는 오롯이 살아나는 인간성이다.

  나폴레옹이(금박을 입힌 앵발리드의 3미터 높이의 대리석 아래 영광에 싸여 누워 있는 무적의 보나파르트가) 구운 닭고기와 껍질째 삶은 감자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율이 인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우리가 주중 저녁에 슈퍼마켓에서 고를 수도 있는 수수한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실체를 가진 인간,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는 일상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만큼 살아난다. 울거나 지저분하게 바람을 피우고, 손톱을 물어뜯거나 친구들을 질투하고, 꿀은 좋아하지만 마멀레이드는 욕하는 만큼. 공식 조각상의 돌로 이루어진 영웅주의를 녹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역설적으로 전기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의 당당한 이력은 타인의 활동에 관한 더 일반적이고 저열한 관심을 감추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기를 읽는 것에는 인생의 온갖 일을 헤쳐 나가는 어떤 사람 곁에 슬쩍 다가가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을 수도 있는데, 전기의 관음증은 그 대상의 명성 때문에 용서가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성적 취향을 아는 것이 매혹적인 일이 되는 것은 이 사람이 유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ㅡ 심지어 그것이 주된 이유도 아니다 ㅡ 침실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직 위인만이 전기의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200년 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 곤혹스러운 만장일치를 잠깐 흔들었지만,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의 무덤 위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전기 사이에서 그 목소리는 이내 무시되고 말았다. 이 목소리의 소유자는 존슨 박사였으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적절하고 충실한 이야기에 담아낼 가치가 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과 똑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 회피와 임기응변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란 장식과 위장을 떼어내고 생각하면 매우 균일하여, 인류에게 공통된 것을 제외할 경우 좋든 나쁘든 다른 가능성의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이 분야에서는 중요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인 듯하다. 보통 전기는 흔치 않은 삶에 관심을 가진다는 구실로 어느 삶에나 있는 특별함을 덮어버린다. 그러나 존슨은 이 개별적인 특수성 때문에 심지어 빗자루의 삶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도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유년기를 선형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전기를 시작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내 전기가 철저하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과거만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또 현재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방식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사건으로 끝이 나는 선형적인 전기 배치 방법은 물론 객관적 역사의 요구에는 충실한 것일 수 있다. 달력에서는 유치원이 물론 파상풍 예방접종 전에 온다. 따라서 연대기적인 목걸이에서 그 구슬을 올바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건들이 역사의 축에 새길 수 있는 순서로 일어난다 해도, 그 주체는 그렇게 명료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드물며, 또 사실 클랩햄의 어느 바에 있는 외부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제시되지도 않는다.

  웨일스에서 휴가를 보낸 것이 할머니의 수술 전인지 후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 비스킷 만들기를 배운 것은 전학을 가기 훨씬 전의 일임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런데 왜 앞의 일은 어제 일어난 일처럼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뒤의 일은 12월의 햇빛처럼 침침한 빛을 발산할까?

  인생을 A에서 시작하여 Z로 끝나는 알파벳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은 절대 그렇게 문법적인 속박을 받는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런 혼란을 안정시키고, 최대한 배치를 잘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상황이 약간은 눈에 보이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다. 이사벨과 나는 클랩햄에 있는 바에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를 몇 주 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관해 제대로 쓰려면 몇 달에 걸쳐 펼쳐지는 여남은 번의 대화를 기초로 삼아,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 몇 달의 기간 동안 현재는 또 현재대로 계속 전진하며 과거에 늘 변화하는 빛을 던져주게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우리의 첫 대화들은 훌륭한 전기 작가의 대화와는 달리 초기의, 유년의 순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도 않았다.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삶만 있다면, 전기 작가들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에고와 미뢰의 쓸데없는 간섭에서 멀리 떨어져, 그 삶이 조심스럽게 편견 없이 재구축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어떤 이야기는 하고 어떤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경찰관들하고 함께 있으면 이런 기분이 되고, 극단적인 종교를 신봉하는 집단 구성원들과 함께 있으면 저런 기분이 된다. 이런 상대성을 보면 관찰자가 지켜보는 동시에 보는 대상에게 영향을 주는 상황을 설명할 때 끌어들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떠오른다. 하이젠베르크는 현미경으로 어떤 원자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들이 자의식을 느껴 혼자 있을 때는 하지 않던 일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망원경으로 이웃을 살피면 그들이 거실 바닥에서 뜨겁게 끌어안을 계획을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다.

  나는 조금 전 바에 서 있을 때 탁자를 돌아보았다가 이사벨이 얼른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작은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나의 관심을 끌지 않았던 많은 동작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호기심 많은 눈이 지켜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통근 열차에 탄 사람이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의 관광객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 몸짓은 그녀를 모르는 세상 안에서 이사벨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었고, 그녀가 혼자 있다고 믿을 때 어떤 모습인지 말해주었다. 이런 깨달음에는 관음증이라는 말에 따르는 선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사벨은 스타킹을 말아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카락 한 올을 쓸어 올렸을 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남이 보지 않는 상태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믿음이 가져온 미세한 변화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도 그들이 이런저런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판단을 유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는 습관, 읽고 있는 신문, 입이나 두개골의 모양, 이런 것들의 그 존재 전체의 모습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알아가는 과정은 책을 펼치자마자 바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좋은 독자의 자격을 갖추려면 성급하고 순진하게 동일시나 희화화를 하는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저자가 상황을 정연하게 제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실 나는 그런 인내심에는 문제가 좀 있어서 소설을 끝까지 다 읽는 경우가 드물다. 소설을 집어 들고 몇 페이지를 읽다 보면 텔레비전에서 더 적당한 즐길 거리가 눈에 띄곤 한다. 이런 저주는 나와 엠마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는 이 책을 들고 대서양을 건너고, 글래스고와 스페인에도 갔지만, 아직까지도 정독을 한 부분은 앞의 20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했다. 이렇게 형편없는 독자이기는 하지만, 엠마라는 인물, 그녀의 미래 그리고 파티에서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나의 능력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신감을 과시했다. 실제로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나는 분명한 선입관을 형성해나갔다.

 

 

 

 

 

  해머스미스에서 이사벨과 헤어지면서 주말에 함께 수영을 하러 갈 약속을 잡을 때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의 인물 묘사의 명료함을 망치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축적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수록 우리의 도식이 흐릿해져, 우리가 25년 동안 알았던 남자나 여자를 하나의 깔끔한 전체로 응집시켜 표현하지 못하겠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우리만큼이나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대개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인내심, (또는 더 친절하게 말하자면) 에너지가 없다.

  아직은, 너무 많이 안다. 고로 다시 한 번 아무것도 이해 못하겠다, 하는 역설에 빠지지 않았던 나는 나의 심리적 연장통이라는 한계 내에서 움직였다. 이 연장통은 "금발은 착한가?" "흡연자를 신뢰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자기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믿어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특정한 경험에 기초한 일련의 일반적 답변을 제공했다. 나는 미지의 인물을 내가 아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 안에 일단 끼워 넣고, 그 집단과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나타날 경우 그림을 고칠 권리를 확보해놓았다.

 

 

 

 

 

  이런 세세한 내용을 전기에 포함시키려 하다가는 과장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과연 전기에 샌드위치의 묘사라든가 간식을 먹으며 두 사람이 나눈 가벼운 농담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

  보즈웰은 존슨 박사의 뒤를 쫓으면서 그런 비난을 받는다고 느꼈던 듯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경우에 따라 존슨의 대화를 조목조목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에 관해 이의 제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피상적인 이해력과 우스운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기쁘게 그것을 편협한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세세하게 특수한 것들도 저명한 남자와 관련이 될 때는 종종 그 남자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늘 재미있다는 나의 의견은 여전히 확고하며 이 점에서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

 

 

  병이 이사벨을 하룻밤 새에 평소의 기질과는 상당히 다른, 말없이 괴로워하는 갑각류 같은 존재로 바꾸어놓은 것을 보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인격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대체로 물리적 입자들의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세워진 착각이며, 우리가 낙관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건강한 자아는 우리 신체 기관의 변덕에 좌우되는 다양한 괴물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인격일 뿐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병은 잔인하게도 우리를 선택된 자아의 무능한 대리인으로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움직여달라고 요구해도 팔은 오만하게 축 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드러움은 끔찍한 날카로움으로 바뀐다. 정신의 예리함은 견딜 수 없는 무감각 상태로 바뀐다. 병은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것과는 별도로, 마치 눈멀게 하는 사랑처럼, '내가 다시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기운을 빼놓는 힘이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정신적 기능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우리 자신의 의견이라고 자신했던 것들이 열대초원에서 위험한 삶을 살고자 가정의 안락을 떠나는 꿈처럼 낯설어 보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몸의 강요에 못 이겨 우리가 위태롭게 자아라고 부르는 것과 단절된 어스름의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야 하는 시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하찮은 행동이나 경향, 전에는 상징적이라고 여기지 않아 잊어도 좋다고 여기던 영역, 예를 들어 캔 음료를 마시는 방식이나 봉투에 든 초콜릿 건포도를 꺼내먹는 방식에도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다. 사랑을 하던 사람이 뜨거운 감정의 소멸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의 본질을 공적으로는 사소하다고 치부하지만 그럼에도 속으로는 핵심적이라도 여기는 것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사랑이 식은 사람은 차버린 사람의 종교, 직업, 문학에 대한 취향을 헤어진 이유로 들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부스러기 정보들, 즉 그 사람이 또 입안 가득 뭘 넣은 채로 음료까지 꿀꺽꿀꺽 마셨다든가, 나이프와 포크를 대칭적으로 다시 놓지 않고 육즙을 빵 조각으로 닦아냈다든가 하는 것만 한 설명의 힘이 없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런 자잘한 것들이 그 전에 설명한 그 어떤 것보다도 관계가 끝나는 이유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성격을 드러내는 것과는 관계없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었던 식욕도 성격의 비밀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그냥 어린애처럼 어머니한테 짜증이 났을 뿐이야."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식사가 끝날 무렵 로저스 부인은 오래전 이사벨이 테디 베어의 침대로 쓰던 "악취가 나는 낡은 담요"를 버렸을 때 이사벨이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모른다고 놀렸다.

  "그걸 가지고 속상해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데?"

  이사벨이 묻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 글쎄, 우스꽝스럽다는 거지 뭐. 그걸 가지고 몇 주나 계속되는 드라마를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나를 용서해주기는 했는지 궁금하구나."

  이사벨은 그 사건을 이야기해주고 나서 심술궂은 웃음을 터뜨리며 덧붗였다.

  "사실 웃기는 일이지만, 어떤 수준에서 보자면 나는 아직 그 늙은 마녀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스물다섯 살의 '나'가 아직 있는 거지. 이 어린 '나'는 어머니가 한 일 때문에 여전히 분개하고 있는 거야."

  어른들이 서로에게 일상적으로 가하는 학대의 잣대로 보자면 이사벨이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은 동정보다는 조롱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극적인 사건으로,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품위 없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나이가 되어도 흥분과 슬픔을 자아낼 수 있다. 예순 살에 그런 담요를 잃어버린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겠지만 여섯 살짜리에게 그런 대범한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계속해서 이사벨은 유치원에서 집을 그려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준 일을 회고했다. 어머니는 놀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여 그녀를 울렸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문을 그리는 걸 잊었잖아. 사람들이 집에서 어떻게 나올까?"

   그런 사소한 비판을 두고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사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그녀가 에너지를 투자하는 일에 대한 어머니의 계속되는 조롱을 상징하는 사건일 수도 있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이사벨은 자신의 감수성을 겹겹의 방어막으로 덮어왔다. 그 결과 이제 그녀는 어머니의 신랄한 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런던 거리에서 택시 기사와 격렬한 말다툼을 벌일 수도 있다. 기사한테서 매춘부라는 욕을 들으면 똑같은 힘이 담긴 말로 기사를 모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내 기분 상한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상처 입지 않은 어른스러운 상태 밑에는 오래전 받은 상처의 망이 깔려 있다. 이것은 멀리서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하찮은 것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죽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코끼리 가죽을 가진 어른이 아니라 피부가 얇은 아이가 입은 상처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사벨이 부모에게 어떤 감사의 마음을 느끼건, 자신의 과거를 과장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건, 오만해지는 경향으로 악명 높은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결국 하나의 목록을 가득 채울 만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안 할 일들

1) "내 자식들한테는 절대 푹 삶은 브로콜리를 억지로 먹이지 않겠어."

 

2) 이사벨은 아버지가 세계 경제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지 못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3) "나는 또 섹스에 관해 그렇게 자유주의적이지 않을 거야. 우리 부모는 현대적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부자연스럽게 개방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어. 열여섯 살 때 두사람에게 오럴 섹스가 멋지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 어머니는 그냥 이렇게 대꾸했어. '그래, 너도 그렇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건 잘 하기가 무척 어렵단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나한테 피임약을 먹였어."

 

4) "그리고 나는 가족 가운데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 같아. 나는 아버지가 여동생보다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아. 그건 즐거운 일일 수도 있지. 하지만 사실은 아주 복잡한 거야. 나는 루시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에게 더 다정하다는 걸 알고 기분이 안 좋았어. 내가 그 애하고 가끔 잘 지내지 못했던 건 대부분 죄책감 때문이었어."

 

5) "나는 또 죄책감을 무기로 내 자식들에게서 뭘 끄집어내지 않을 거야. 뭘 원하면 그냥 그걸 얘기하면 돼.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걸 강제로 뽑아내려 하지 않고 말이야. 나는 어머니가 자기비판 뒤에 숨는 걸 싫어해.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말해. '내가 널 따분하게 만들고 있구나.' 하지만 그건 그냥 본인이 실망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야. 어머니는 자신을 희화화하고, 또 그걸 은근히 즐겨요. 마치 다이어트를 하는 대신 '위험, 뚱뚱한 사람 있음'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사는 뚱뚱한 사람들 같아."

 

6) "나는 또 나와 내 아이들 사이의 경계를 더 존중하려고 노력할 거야. 어머니는 자기가 내 연애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겨."

 

 

  이 목록이 아무리 길고 또 그녀가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이사벨은 아이러니이지만 자신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자기 자식들에게서 새롭고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원한을 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식을 기르는 일에는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불가피한 실패의 가혹함을 최대한 줄여보려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과거를 기억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총을 들이대고 재채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기억은 재채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기억으로 통용되는 것이 있다. 누가 나한테 고등학교를 어떤 성적으로 졸업했냐고 물어보았을 때 내가 머릿속의 캐비닛을 뒤져 말해주는 경우와 같은 기계적 반사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문제 삼는 현상의 지질한 사촌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의 단편과 진정으로 충돌하는 상황은 매우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시간적 거리가 무색해진다. 전혀 기억 같지 않고, 외려 시간 외부의 어떤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 같다. 진정한 기억은 그 자체와 현재 사이에 놓인 모든 것을 해체해버린다. 서른 살에 우리는 갑자기 숲으로 돌아가, 캠핑 여행을 나와서 도톰한 분홍색 햄이 가득 든 샌드위치를 먹는 열두 살짜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밀고 들어온 다른 사람이 질문으로 강요한 기억이 아니라, 30년 뒤 기차역 카페에서 비슷하게 만든 샌드위치 냄새와 우연히 만나면서 촉발되는 기억이다.

 

  반면 질문 없이 나오는 무의식적 기억에서는 현재의 무작위적인 조각에 의해서, 그 유명한 마들렌이나 덜 유명한 펠트 쿠션에 의해서, 현재만큼이나 현실적일 뿐 아니라 모든 감각에 존재하는 과거의 품에 덥석 안기게 된다. 이런 빛이 언제 비출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잃어버린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따라서 그 세계를 부활시킬 수 있는 자극은 그냥 우연히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삶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일반적인, 어쩌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는, 선입견을 갖고 전기를 읽는다. 그러나 그 전기가 어떤 면에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건, 불공평한 부모처럼 어떤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편애하지 않는 한, 우리는 끝까지 애만 태우다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전기는 책이 은근히 암시하는 듯한 것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비눗방울을 불었다거나, 처칠이 얄타에서 스탈린과 시가를 나누어 피웠다거나, 버트런드 러셀이 트리니티에 다닐 때 스틸턴 치즈에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거나 하는 사실을 알고 잠시 즐거워한다. 그러나 전기가 그 이상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로피트롤(아이스크림 따위를 채운 소형 슈크림)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마지막 남은 것이 막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좌절감을 느끼며 전기를 덮을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생활이며, 어떤 삶에 남들이 알아도 좋을 만한 것만 담겨 있을 때는 뭔가 남은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자신의 결함을 동정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746년, 프랑스의 금언 작가 보브나르그는 그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금언 작가의 전기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기 작가의 호기심은 그 매끈한 금언이 불꽃처럼 떠올랐던, 그 드러나지 않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생활을 무너뜨려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런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공적인 측면의 독특함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고, 위대한 사람도 일반적인 어리석은 행위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유혹일 수도 있다. 보브나르그는 금언이라는 면에서는 천재였을지 모르지만, 그런 금언이 나올 수 있도록 영감을 준 그의 삶은 논란의 여지없이 인간적이었다. 우리가 우리 종에서 발견하는 모든 약점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를 그런 생각으로 이끌었던 상황에만 집중하면 그 생각 자체의 힘에 짓눌리던 상황에서 벗어나 마음이 좀 편해질 수 있다. 남들에 대한 호기심은 자기 성찰을 피해가고자 할 때 애용하는 방법이다. 내적인 투쟁을 덮어버리고 인용을 할 권리나 편지 내용을 사용할 허가를 얻기 위한 싸움을 앞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역효과가 난다는 거야. 그 애는 상대가 자기 이름을 알기도 전에 일단 같이 자고 나서 시작하려고 한다니까."

  이사벨은 점심으로 먹을 코티지치즈 통의 뚜껑을 열면서 직장 동료인 브라질 아가씨 그라지엘라에 관해 그렇게 설명하여, 암묵적으로 그런 행동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남자가 자기 짝으로 적당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혹은 상대가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으면, 그제야 놀라는 거야."

  "하지만 가브리엘라는 그냥 욕정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말했다.

  "가브리엘라가 아니라 그라지엘라야."

  "솔직히 이름이 좀 까다롭잖아. 나는 그녀와 자지도 않았으니 이름이 벌써 가물가물한 거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라지엘라는 일요일 저녁에 기분 좋게 끌어안을 사람만 원하지, 제대로 친밀해지는 방법은 모른다는 게 문제야. 침대가 딜레마에서 달아나는 손쉬운 방법처럼 보이는 거지."

  이사벨은 사적인 자아를 드러내고 싶다는 그라지엘라의 욕망에는 공감했을지 모르지만, 선택한 수단은 거부했다. 섹스가 친밀성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친밀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징은 오히려 자신이 상징하는 상태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더 힘든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상대와 잘 수도 있으니까. 마치 책을 읽는 일을 면하기 위해 책을 사는 것처럼.

  "그럼 그라지엘라가 행복해지려면 뭘 해야 한다는 거야?"

  나는 마치 대부라도 되는 것처럼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이사벨이 코티지치즈를 냉장고에 갖다 넣으며 대답했다.

  "나도 전문가는 아니야. 그냥 상대와 미리 친밀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 같이 자버리는 게 반드시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얘기일 뿐이야."

  "예를 들어 어떤 경험?"

  "있잖아, 질투를 하고, 욕을 하고, 교활한 면을 보여주고, 토하고, 코를 풀고, 발톱을 깎고."

  내가 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발가락에 무슨...?"

  "아냐,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뭐, 발톱을 깎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건 좀 사적인 거니까.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불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은근하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이사벨은 사적인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다시 규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록은 현대 전기의 적나라한 기준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초로 삶의 어떤 영역에 사적인 구역이라는 경계선을 쳐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면을 얼마나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톱 깎기는 그 아름답지 못한 면이 보는 사람의 관대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적이다. 몸단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으러 나타나려면 신뢰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생활은 친절한 마음 또는 동정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면이 담겨 있다. 사생활은 우리의 노출된 순간의 기록이다.

  따라서 친밀해지는 과정에는 유혹과 대립되는 면이 있다. 비우호적인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측면을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유혹이 가장 훌륭한 자질과 야회복의 과시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친밀성은 상처받기 쉬운 면과 발톱을 모두 드러내는 간단치 않은 과정을 수반한다.

  이사벨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녀의 사적인 자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분명하게 눈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욕과 관련된 어휘를 사용할 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했으며, 교활한 면을 약간 보여주기도 했고, 심지어 자신이 수전 손택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어, 우리가 사진 이야기를 했을 때 말이야. 내가 그 늙은 마녀 이야기를 꺼냈잖아. 하지만 사실 그 여자가 쓴 것은 전혀 읽어보지 않았어."

  "하나도?"

  "하나도. 아마 그때는 네 열등감을 자극하고 싶었나봐. 그래서....."

  그런 전술을 고백함으로써 이사벨은 침실에서처럼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놓일 수도 있었다. 침실에서 일을 끝낸 뒤에 "이제 내가 전보다 훨씬 못하게 느껴져?" 하고 묻게 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삶의 사적인 부분은 사람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시하려고 한다. 이사벨이 수전 손택과 관련된 속임수를 드러내기를 꺼렸던 것은 그것이 그녀의 독서만이 아니라 그녀의 전체적인 지적 능력, 심지어 도덕적 능력에 관한 나의 관점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남들에 관해 어떤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그들을 두 번 다시 원숙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사소한 것 한 가지, 예를 들어 신체적 기형이나 고약한 습관, 즉 젖꼭지가 하나 더 있다거나 자기성애적 질식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해버리곤 한다.

  그래서 사람이 앞에 있을 때 코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려면 요령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안해, 별로 위생적이지는 않지, 나도 알아."

  소파에서 신문을 읽다가 마침 그런 행동을 하던 도중에 예상치 못하게 목격을 당한 이사벨이 사과를 했다.

  "괜찮아."

  나는 그것이 젖꼭지 세 개의 수준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었기에 그렇게 대꾸했다.

 

 

 

 

 

 

  비밀이 우리 관심을 촉발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로 놀랍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은 비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비밀이라는 딱지를 붙인,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비밀을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격 가운데 인류에게 완전히 속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측면들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비밀은 우리 존재의 유일무이한 특성 가운데 음울하고 당혹스러운 측면이며, 천재성이나 영웅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비난할 것이라고, 또는 잘해야 조롱하는 표정으로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가치를 위해 사회의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이다. 예를 들어 실금이라거나 누이를 사랑한다거나 동성에게 이끌린다는 비밀. 아이들이 가장 큰 비밀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은 경험 부족으로 인해 자기들이 하거나 느낀 것의 생소함과 프라이버시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삶을 마감할 무렵에는 비밀의 재고가 줄어든다고 상상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전에는 정도를 벗어났거나 수치스러운 행위로 보였던 것들을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누설하는 경향은 잔인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들이 사적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 정상적인 것의 영역 ㅡ 비밀을 가진 사람이 상상하는 좁은 영역보다 훨씬 넓다 ㅡ 에 속한다는 사실을 외부자로서 쉽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 말이 옳았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는 사람을 사로잡았다. 육체적 욕망의 이야기는 외적인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든 관심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일단 이야기가 궤도에 오르면 우리는 석기시대 사람들로 돌아가, 모닥불 옆에서 털이 부슬부슬한 매머드 갈빗대를 우적우적 십으며, 교육받은 문학평론가라면 아주 천박하게 여길 질문, 즉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 에 대한 답을 알아내려고 갈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에 관하여 뭘 알기를 바라는가? 왜 이 문제가 우리가 사적이라고 여기는, 삶의 신비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택한 연인은 우리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해온 사랑은 우리 욕구의 진화 과정을 드러낸다. 이사벨의 경우에는 치과 의사의 편안한 키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잠들지 않으면 이사벨이 이제 곧 밝힐지도 모르는 인물의 특질들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추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 공허와 연애의 후보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연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며, 이런 의미에서 내적 요구를 단순하게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사벨이 고른 많은 남자는 그녀가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의 손이라도 잡는 것이 적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엄청나게 작은 선택의 공간에서 우리의 연인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러브스토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왜 그들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려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보기는 했는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정적인 문제 외에도 잡다한 심리적 명령들이 있어, 겉으로는 이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곤혹스러울 정도로 유혹적인 사람에게 끌리기도 한다. 이런 특이한 선택에서 애정을 주고받는 과정, 다들 직선적인 과정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곡절이 많은 이 과정에 우리가 부여하는 뉘앙스가 드러난다. 우리는 우연의 일치로 사랑에 빠질 수는 없기 때문에, 늘 기준들에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다. 이 기준은 마음을 밝게 해주는 눈, 이마가 넓은 수학자, 발목이 가는 사교계 아가씨에 대한 선호처럼 온화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은 것들, 예를 들어 귀족, 알코올중독자, 히스테리 환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사람들과 결혼하려는 강박감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택하는 아름다운 점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결정된, 종종 무의식적인 심리적 요구를 채우느라, 사디즘 - 마조히즘 눈금판의 양 극단을 조화시키느라, 오페라나 겨울 스포츠에 대한 공통된 취향보다는 공통된 신경증을 처리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무시하는 것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마음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사랑하는 나쁜 놈들, 나를 사랑하지만 결국 나를 경멸하게 되는 좋은 남자들, 그리고 최근으로 올수록, 내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함께 있고자 노력하는 괜찮은 남자들."

 

  "있잖아, 보통 나는 상황을 통제하고 책임을 지고 싶어해. 하지만 나한테는 안정되고 견실한 남자의 발치에 나 자신을 던지고 싶은 면도 있어. 솔 벨로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응석받이가 되도록 나를 돌봐줄 사람을 원하기도 한단 말이야. 나도 이게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어떤 수준에서는 돈, 먹을 것, 살 곳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사람이 필요해." 

 

 

 

  감정생활에서만큼 사람을 터무니없이 오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만큼 상대의 성향에 몰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며, 그때만큼 상대의 불편한 악습들을 그렇게 열심히 잊으려 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상태란 사람을 잘못 아는 것이 무엇인지, 엉터리 전기를 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교묘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들의 관계가 시들해지도록 내버려두기 시작했다. 연애 초기에는 적절하게 해법을 찾아나가던 말다툼도 이제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거나 침대에서 함께 뒹구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해버렸다.

  이사벨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앤드루가 한번은 나한테 그러더라고. '어쩌면 너는 그냥 네 감정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몰라.' 그때 이렇게 대꾸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내 감정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너한테 어떤 감정도 갖고 싶지 않을 뿐이야."

  이사벨이 그런 감정을 원치 않았던 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의 달라진 환경과 성격의 결과이기도 했다. 대학 생활은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며, 그녀가 사귀게 된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앤드루는 짜증이 날 정도로 착실해 보였다. 그녀는 이제 밤이면 밖에 나가고 싶어한 반면, 앤드루는 그때까지 편안하게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집 안에 있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러 클럽에 간다고 핑계를 대곤 했는데, 앤드루는 집에서 자기한테 그 음악을 더 틀어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만일 이사벨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문제는 생기지도 않았고, 앤드루는 그녀에게 계속 만족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고요한 휴양지에서 목가적인 로맨스가 생겼지만 그곳을 떠나자마자 관계가 엉클어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가 심리학을 동원하여 설명하곤 하는 두 사람의 화합 가능성은 결국 환경을 끌어들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장소가 안정된 느낌을 준다는 것은 거기 있는 사람의 몇 가지 면만 드러난다는 뜻이다. 드러나는 면이 너무 적어 상대는 그에게 다른 면들은 없다는 그릇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도시에서는 아주 친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서 저녁을 먹던 두 친구가 휴가 때 캠핑을 갔다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불쾌한 면들을 잔뜩 보게 되어, 결국 다시 만나 저녁을 먹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서로 날 때부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런 느낌은 특정한 환경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모두 자기에게 미소 짓는 것에 익숙하여 마침내 미소와 돈 사이의 관련을 잊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존재 자체를 보고 미소 짓는다고 믿고 있다가, 파산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타인의 상대적인 반응을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다.

  이사벨이 앤드루에게 솔직해지지 못했던 것은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한 수치스러운 공포 때문이었다. 이 공포 때문에 그녀를 그의 사랑스러운 면들에 매달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앤드루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전기를 다 읽고 나서 "흠, 마운트배튼은 내가 상상하던 영웅이 아니었네" 하고 치워버리는 산뜻한 태도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이사벨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자신의 마운트배튼을 포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가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벨의 죄책감은 앤드루와 좋은 친구 사이로 남고 싶다는 욕망으로 표현되었다. 그렇게 하면 앤드루가 그녀의 침대에 없고, 그녀의 침대 옆 탁자에 그의 다이버용 시계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 관계의 그나마 가장 좋은 면, 즉 그와 나누는 대화는 계속 누릴 수 있고, 하나의 관계를 끝내는 모진 충격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동안, 내 머릿속 다른 곳에서는 스코틀랜드로 함께 기차 여행을 하면서 앤드루 오설리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건들이 얼마나 다르게 들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와 처형자를 가르는 선을 넘어가 건너편에서 들으면 이 이야기가 과연 같은 이야기인지 헛갈릴지도 모른다. 다이버용 시계를 차고 다니며 짜증이 날 정도로 다정한 어릿광대 대신,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남자를 속이고 지조를 지키지도 않으며, 다이버용 시계에 해당하는 그녀 나름의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세세한 내용은 말을 하는 사람이 그녀이기 때문에 검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남들은 금방 찾아내 우리가 등을 돌리자마자 비난하는 결함도 우리 자신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사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떠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쫓겨난 사람이 반드시 차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 짐을 싸기를 바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대신 상대에게 짐을 쌀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사벨은 앤드루에게 짜증이 나자 당황했다. 그런 짜증이 그녀의 은밀한 불만을 반영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당뇨병에 걸린 손님이 설탕이 조금 들어간 수프를 어쩔 수 없이 사양하면서 그런 병이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것은 앤드루 자신도 그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임을 간과한 것이다. 그가 이사벨에게 짜증스러운 존재가 된 이유는 그 자신도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출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 대한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사벨의 자신에 대한 반감을 이해하려고 애썼을지 모르지만, 그의 진짜 갈등은(외적인 갈등은 이 진짜 갈등의 흐릿한 반영이었다) 그 자신이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는 면을 이해할 필요에서 생겼던 것일 수도 있다. 그들 사이에는 헤어짐을 처리하기 위한 복잡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즉, 둘 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다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고 공모한 것이다. 앤드루는 이사벨에게. "내가 피해자가 되는 방식으로 너를 떠날게." 이사벨은 앤드루에게. "네가 떠나야 한다면, 내가 처형자라고 믿게 해줘."

  앤드루가 이사벨의 수동성 환상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면, 가이는 다른 감정적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었다.

 

 

 

 

 

 

 

  사람들은 전기 작가나 소설가가 특별한 이야기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인다고, 사실 우리 삶은 대체로 난투나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간다고 비판하지만, 이 비판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현실성이나 타당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통 표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아니면 느리게 또는 뚜렷하지 않은 방식으로만 표현되는) 갈등의 외적 표현일 뿐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정글의 빈터에서 사자가 포효하며 우리에게 달려들기 전에 우리에게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오이디푸스가 다른 사람을 보았더라면,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와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엠마 보바리의 남편이 복권에 당첨되었더라면, 물론 그들의 삶은 한결 조용했겠지만, 그들의 특질이 우리 눈앞에 쫙 펼쳐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아가씨가 지금 너무 강하게 부인을 하는 게 아닐까?"
  "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사벨이 대꾸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분노는 부당하게 모욕을 당한 사람에게 더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그녀가 되풀이해 물었다.

  "무슨 뜻이야?"

  "아, 모르겠어. 그냥 네가 말이 많아졌다고."

  "그래서?"

  상대가 그 자신에게도 감추고 있는 특징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는 생각(이런 생각이라는 것이 늘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또는 얼마나 쓸모가 없는 것인지)이 드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치명적인 주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X에 대한 네 감정 말이야, 아마 네가 너 자신을 아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미안해. 내가 틀렸어."

  나는 대신 그렇게 대꾸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상상력이 다른 사람의 말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정말 생각도 못했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했다. 나는 마이클을 이해할 때 이사벨의 묘사에 의지했는데, 이제 말로만 들었던 사람의 이미지가 그 입체적 재현물과 일치하지 않을 때 거쳐야 하는 교정 과정을 겪고 있었다. 전기 속에 포함된 사진을 보았을 때, 마치 전화 목소리의 음색으로만 상상하던 사람을 실제로 보았을 때처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사벨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더 까다로워진다.

 

 

 

 

 

 

  이런 엉뚱한 희비극적 결합을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의 잔혹한 불확실성이 떠오른다. 공견에 처한 친구에게 성급하게 진부한 조언을 한마디 해주었는데, 그 친구는 그것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든가 하는 일에서 그런 불확실성은 분명히 드러난다.

  "네가 그 말을 하던 모습을 절대 잊을 수가 없어. '뭘 할 때는 늘 느긋하게 해라."

  그런 식으로 20년 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내뱉은 진술, 지겨운 전화에서 풀려나기 위해 지껄인 뻔한 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불행하지 않은 것인지, 우리가 그 친구에게 하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말, 우리가 딱 한 번 진지하게 확신을 품고 하는 말은 거꾸로 그의 마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왜 다른 소리를 해서 혼란에 빠뜨리는지 모르겠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의 특질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마음 상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뭘 할 때는 늘 느긋하게 해라"라는 말은 마침 그런 말을 듣고 싶었을 때는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 있다. 반대로 약혼자와 행복하게 지내는 남자는 매혹적인 미소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이사벨은 잘 모르는 사람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조숙한 자신감을 보이다가도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면 몸이 마비될 정도로 수줍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처음 두 주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들이 나서서 다른 아이들한테 소개를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일단 소개를 하고 나자 그녀는 반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로 변신을 하여, 어리벙벙해진 후견인들을 괴롭히는 반항적인 책략을 꾸며내곤 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수줍음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어느 정도 계속되었지만,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직후 한 회의에서 화장실 테스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와 상사는 한 은행의 관리자와 새로운 창고 부지를 구하기 위한 대출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사벨은 머리 위에서 비추는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회사의 전략을 설명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그녀는 악명이 높을 정도로 숫자에 자신이 없었지만,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관련 대차대조표를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그 일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 차례가 다가오기 직전, 뚱뚱한 은행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가 화장실에서 돌아올 때까지 회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돌아와서 10분이 안 지나 어젯밤에 먹은 조개가 안 좋아졌다면서 다시 자리를 비웠다. 이사벨은 그의 곤경 때문에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묘한 자신감을 얻었다. 갑자기 은행 관리자가 약점 많은 인간, 예민한 위와 창자가 있는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가는 세로 줄무늬 양복도 전처럼 그녀의 기를 죽이지 않았다. 회사 화장실 칸의 타일을 바른 감방 같은 곳에서 발목까지 바지를 내리는 바람에 줄무늬가 혼란스러운 물결무늬로 흩어지고, 내장이 비틀리는 바람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나는 사람들한테는 이 화장실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어. 알잖아, 경찰관, 웨이터, 학자, 택시 기사, 가스 검침원....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도 나와 같은 행성 출신인 것처럼 보이는 거야. 그게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지."

  그러나 이사벨이 아무리 열심히 자신의 다양한 자아와 다양한 삶을 구분하려고 노력해도, 그 경계선은 무력하게 붕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직장에서 바쁜 하루를 마친 뒤 그녀는 앞으로는 회사의 운명에 감정적으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템스 강변의 풀밭에 누워 제트기가 하늘을 가로질러 깃털 구름을 남기며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주 유쾌한 생각을 했어. 모두들 소리를 지르고 납품은 이루어지지 않고 전화는 울려대는 상황이었지. 나는 모든 것에 결국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고 물어볼 수 있는 면이 약간씩은 있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끝내지 않았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내 차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아.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음이 아주 편해져. 이게 내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이 될 거야."

  그러나 그런 선언을 하자마자 다시 회사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고, 그 불교적인 지혜는 찾아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늘 유동적이며, 이전 자아의 유물이 나중에 온 자아의 질서정연한 가정들을 방해한다. 자기 연민을 버리겠다는 이사벨의 결정은 침대에서 "시칠리아의 과부처럼 흐느끼게" 만드는 말다툼 뒤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오래전에 유아용 놀이 울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못하는 것뿐이지, 사실 성마른 아기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망이 자주 생긴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구애하는 사람을 거부할 때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로 결심했지만, 소티리스라는 이름의 그리스 회계사가 쫓아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과거의 술책으로 돌아가 전화가 와도 절대 전화를 해주지 않고 편지도 받지 못한 척했다.

  이사벨이 "감정적으로 억눌린 남자하고는 다시 얽히지 않겠다"거나, 앞으로는 "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남을 탓하지 않겠다"거나, "점심때는 건강에 좋은 것만 먹고 저녁 식사 때는 절대 화이트 와인을 마시지 않겠다"는 취지의 대담한 선언을 할 때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성격의 변화는 사실 점진적이다.

  지금 그녀가 부모와 더 어른스러운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더 지혜로워졌다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독립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산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내전과 같은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듯한 공손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크리스마스 주말에 이사벨은 깊은 곳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고전적인 사춘기의 대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나운 태도로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고, 마치 초등학생처럼 남동생과 셀로테이프를 놓고 언쟁을 하고, 아버지는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며 생색을 내는 태도로 설교를 했던 것이다.

  역사가들이 이런 것의 쇠퇴나 저런 것의 발흥을 1850년, 1500년, 1066년이라는 연도에서 찾아내는 것처럼, 나에게도 어떤 날짜를 전환점으로 선언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후퇴나 진전은 훨씬 혼란스럽다. 늘 이른바 근대까지 살아남은 산업화 이전의 마을이 있고, 50년 전에 다른 제국에게 길을 내주고 결정적으로 죽었다고 말하면 편리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목할 만한 탄력을 보여주는 제국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가 미용업에 종사하여 특별한 유인을 제공받지 않는 한, 타인의 외모에 대한 감수성은 우리 자신의 외모에 대한 감수성에 비하여 늘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우리 이마를 덮은 모습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똑같은 이마를 덮었음에도 불가사의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외적 자아와 맺는 관계를 관장하는, 비슷하게 복잡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감수성의 경로는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핵심적인 것들만 유지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그 불행한 사람들을 강렬한 자기혐오로 몰아갈 수도 있는, 부어오른 뺨, 주름진 이마, 튀어나온 배 같은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과해버린다.

 

 

 

 

 

 

  이사벨이 멍청하게 구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가 속으로 그 여드름이 거대한 화산이라고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그런 엄격한 자기 인식 앞에서 다른 사람의 판단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불일치는 전기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만일 이사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잔뜩 모인 화산학자들이 무슨말을 하건, 그 여드름이 베수비오 산만 하다는 그녀 자신의 느낌을 정말로 당치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는 우스꽝스럽지만, 그럼에도 주관적으로는 진정성이 있는 믿음이라고 받아들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 인식과 외부의 판단 사이의 긴장 가운데 다수는 그런 불일치가 요구하는 교정이 우호적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유쾌하다. 예를 들어 라자냐는 요리사 자신은 끔찍하다고 생각해도 훌륭할 수 있고, 식후 연설은 연설한 사람 자신은 물에 젖은 불발탄이라고 판단하더라도 익살스러운 성공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릇된 인식 가운데는 그렇게 무해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전기 작가들이 전기 주인공의 자기 이미지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조정하는 바람에 친척이나 숭배자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잦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사벨한테 그녀가 스스로 상상하는 것만큼 춤을 잘 추지는 못한다거나, 그녀의 프랑스어 억양이 그녀가 말한 것만큼 유창하지는 않다거나, 컴퓨터 사용 능력에 관해 조금 더 겸손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당연히 얼굴을 찌푸릴 것 아닌가.

 

 

 

 

 

 

 

  전기는 전통적으로 나이, 계급, 직업, 성의 경계선을 망설임 없이 가로지른다. 도시의 귀족이 시골 빈민의 삶을 포착하기도 하고, 쉰 살 먹은 사람이 젊은 랭보의 경험을 따라가기도 하고, 소심한 학자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제휴하기도 한다. 이런 기획 뒤에는 부러운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표면적인 차이라는 잔물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슨 박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모두 똑같은 동기에 자극을 받고, 똑같은 오류에 속고, 희망에 힘을 얻고, 위험에 막히고, 욕망에 휩쓸리고,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베개 밑에서 비슷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경험을 발견하여 당신의 경험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사랑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안다. 나 또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저녁을 견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질투를 인정한다. 나 또한 나의 부족한 면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베개를 이용한 이해 방식에는 더 어두운 암시가 깔려 있다. 베개 밑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쩔 것인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전에 한 번도 고문을 당해보지 않았다면 어쩔 것인가? 그런 경험도 없으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로운 운명에 처한 형제를 어떻게 동정한단 말인가? 지난번에 혼잡한 지하철을 탔을 때를 상상하며, 그 경험을 백 배 확대해볼까? 거기에 이를 뽑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종기를 째던 경험의 기억을 섞으면 될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경험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한 경험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늘 원래의 경험을 유추해볼 만한 근접 경험이 있으며, 이미지가 바닥나버리면 비유로 가면 된다. 나는 상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지만, 이사벨이 반은 대구 맛이고 반은 참치 맛이라고 알려주었고, 나는 그 두가지는 종종 사먹기 때문에 상어에 대한 신비가 많이 사라졌다. 어떤 책이 우리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데려다준다고 말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책이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서로 연결시켜본 적이 없는 곳들을 연결시켜보도록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구도 참치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우리가 그들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가정 때문에 자기 경험의 본질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삐치기 잘하는 사람은 말을 하거나 비유를 들거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 이전은 더 친밀한 수준의 소통이 좌절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직관이 고장이 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외로움을 일깨울 위험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능한 남성 전기 작가가 여성의 경험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작가의 내부에 이성의 옷을 입는 성도착자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누구나 감추는 것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 면을 알면 그 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알려지면 우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래서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이따금씩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또 거리에서 벌거벗고 있거나, 혼잡한 공항의 짐 찾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옷가방이 열려버리는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밤의 공포 가운데 어떤 면 때문에 우리는 어린 시절 벌거벗은 느낌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은 비밀을 감추는 능력이 부족하고 어른은 비밀을 캐내는 데 능숙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게 되면 부모 앞에 선 아이처럼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투명성에 대한 공포, 다른 사람이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라는 공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공개를 좌우하는 주인이라는 생각, 우리가 남들보다 우리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 때문에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심리학자 앞에서는 그런 가정이 무너질 수 있고, 내가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느낌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우리는 물론 심리학자가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우리의 사랑받을 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가장 위험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심리학자가 아는 것 자체라기보다는 그 뒤에 따라올 판단인데, 우리 모두 어딘가에서 원죄라는 관념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은 좋은 것일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몰래 좋아하는 과자를 훔쳤다가 복도에서 어머니와 마주치는 순간 어머니는 내가 저지른 잘못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아이의 시나리오를 다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사벨이 일기를 쓰는 것을 보는 순간 내가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심리학자와 상징적 지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며, 그들이 아는 것은 비밀이라고 분류해도 좋을 만큼 위험한 것이다.

 

 

 

 

 

 

  자의식이 섞이지 않은 대화는 상대가 대화의 여백에 메모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헐뜯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속이 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진짜 화가 나는 것은 실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그래, 알아, 우리는 머리숱이 없고, 성질이 더럽고, 너무 밀어붙이고, 너무 수줍고, 너무 부유하고, 너무 가난하고...), 그저 사무실 소식을 주고받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 과정에서 나중에 다른 사람과 공유할 판단들을 쟁여두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등골이 오싹할 수도 있고, 결혼 피로연에서 럼 펀치를 마시려고 줄을 서서 온화하게 이야기를 하는 심리학자가 사실은 다락방 단열에 관한 우리의 정중한 수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타이를 매만지는 척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우리의 심리에 엑스레이를 쏘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를 제거하고 본다면, 심리학은 그저 인간 정신의 기묘한 면들에 관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무수한 이론들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남들의 행동을 해석하고, 무엇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비정상적인 면을 설명할 수 있을지 판단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심리학자다.

  이사벨에게는 제롬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법률가 일을 그만두고 이혼을 한 다음, 요크셔의 한 마을로 가서 빵집에 취직을 했다. 대화중에 그의 이름이 나오면 모두들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말을 한마디씩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친밀함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아버지 콤플렉스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사벨은 동성애가 잠복하고 있다고, 새러는 조울증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한다.

  어떤 분석에서나 심리학의 상투적 용어가 튀어나왔으며, 다들 임상적인 정확성이나 명예훼손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말을 휘둘러댔다. 뚱뚱한 것과 웃기는 것, 아버지가 없는 걱과 야망이 큰 것, 영리한 것과 불행한 것, 신경이 예민한 것과 암이 생기는 것을 연결시키는 느슨한 이론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이사벨과 친구들은 자신들은 비록 제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의 문제에 대한 더 세련된 설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심리 과학 시대가 전에는 다들 한마디씩 하던 영역에 위계를 세워, 정신적 과정에 관한 지식에도 전문가용이 있고 비전문가용이 있다고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필체를 보고 어떤 사람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 정신이 매우 복잡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책이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고 놀랄 수도 있다. 그녀의 갈겨쓴 글자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려 하기보다는 이사벨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일단 찾아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주전자, 유람선, 남편을 고르는 우리의 동기를 남들과 공유해보자고 권하는 심리학적 검사나 설문이 사방에서 눈에 띈다.

 

 

 

 

 

 

 

  좋은 전기를 쓰는 기술은 언제 멈출지 아는 것으로 규정될지도 모른다.

  "전기는 보즈웰의 것처럼 길거나 오브리의 것처럼 짧아야 한다."

  (생략)

  이런 팽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째서 오브리의 짧고 반짝거리는 인물 묘사는 유행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을까? 길이로 남자다움을 자랑하는 태도, 많을수록 좋다는 믿음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어쩌면 불확실성으로 인한 위기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알려고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불확실성, 이렇게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 선별이라는 오만한 특권을 버리고 나니(어떻게 전기 작가가 신처럼 무엇은 넣고 무엇은 뺀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포함시켜야만 했다. 누가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쓰고 있는 사람의 삶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삶의 일부였다면, 당연히 삶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앉는 자세를 비롯한 작은 것들이 주는 매력은 보즈웰 식의 대형 전기의 중심을 이루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복잡한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생활에서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위대한 인물이 개입되면 매혹적으로 바뀌며, 따라서 (기분이 상한 비평가라면 장광설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공을 들여 꼼꼼하게 기록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의자에 앉는 법은 보통 별 흥미가 없으며, 사실 아주 하찮아 보이는 주제다. 하지만 서양 문학의 걸작 몇 편을 쓰는 과정과 벨루어 천으로 덮인 벤치에 축 늘어져 쓰는 습관에 대한 보고가 결합되면 정말 환상적으로 바뀐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중요할수록 그 사람의 하찮은 것들도 흥미를 자아낸다. 내가 하수구를 청소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내가 몇 시에 자든 아무도 코딱지만큼도 관심을 안 갖겠지만, <위대한 유산>을 쓰고 11시에 자는 것을 좋아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하수구를 청소하면서 동시에 아내도 죽인다면, 틀림없이 내 얼굴이 신문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반면 하수구를 청소하는 동시에 일요일 아침마다 차에 광택을 내면 사람들은 분명 잊을 것이다. 이 결합에는 필수적인 조건인 지위와 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기 작가들은 아이들이나 거짓말쟁이나 소설가들이 사용하는 연장인 상상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상(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전기가 묘사하는 인생만큼 긴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축척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사벨이 점퍼 여섯 벌 가운데 아테네 출장에 가지고 갈 것을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듯이, 전기 작가들도 알베르 카뮈와 되 마고의 웨이터에 관한 서른세 개의 일화 가운데 카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줄 만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엉뚱한 것을 고르거나 충분한 양을 고르지 못하면, 희화화했다거나 때 이르게 결말을 지었다는 반갑지 않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너는 늘 나한테 이러더라."

  함께 프랑스로 휴가를 갈 계획을 짤 때 이사벨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그녀의 짐을 실을 페리를 따로 빌려야겠다고 농담을 한 것에 대한 대꾸였다.

  "너를 희화화하는 게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는 나를 비행기도 못 타고 가방도 못 싸는 신경과민의 여행자로 만들고 있잖아. 네가 보기에는 내가 정말 그렇게 정신이 산만하고 특이한 인간이야? 놀려먹기 좋은 사람이고, 이상한 부모를 둔 사람이고, 정리도 못하는 사람이야?"

  "아니, 그렇지 않아. 단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뭐. 따라서 약간 더 복잡한 맥락에서 날 봐주면 고맙겠어."

  "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어."

  "말다툼할 생각 없어. 너는 그러지 않아, 알았어? 그러니까 닥치든가 다른 얘기를 하든가 해줘."

  이사벨은 짐을 싸는 데 문제가 있었다. 짐 싸기 힘든 사람의 스펙트럼 가운데 그녀는 트렁크 여섯 개에 짐꾼 추가라는 맨 끝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기분이 안 좋은 날 그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그 점을 지적한 야비한 인간에서 버럭 성질을 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그것이 그녀의 일련의 속성들의 상징, 그녀의 성격의 비유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짐 꾸리는 데 신경과민인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옷가방을 싸는 문제만이 아니라, 쇼핑 목록에 적혀 있던 재료의 반은 빠뜨리고, 카운터에 지갑을 두고 오고, 버스 정류장에 있는 아이들을 잊어버리고, 좁은 공간에서 주차할 때 여섯 번 시도를 해야 한다는 문제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듯이, 너무 적게 말하는 것도 위험해질 수 있다. 정보 부족은 우리의 상상력을 수많은 꾸불꾸불한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사벨이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능숙하게 운전을 했으며, 좁은 공간에도 한 번에 들어갈 수 있고, 3단에서 4단으로 기어를 바꾸는 솜씨는 인상적이다)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면, 당신 또한 그녀의 짐 싸는 문제가 주차 문제까지 암시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여러 가지 특징을 전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배적인 특질이나 습관 뒤로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그냥 이혼녀나 신경성 무식욕증 환자나 어부나 말더듬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배리 매닐로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특징으로 포착하면, 다음과 같은 환원적인 연상들이 일어날 것이다.

 

1. 이 배리 매닐로 팬은 여자다.

2. 그녀의 장에는 굽이 아주 높은 하얀 하이힐이 있다.

3. 책꽂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없다.

4. 작은 종이 파라솔을 꽂은 딸기 다이커리를 아주 좋아한다.

 

  영국 언론과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을 <가디언> 구독자라고 묘사하면 이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점을 경멸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1. 롤스로이스 소유자에 대한 시샘.

2. 거시경제학에 대한 오해.

3. 유행하는 생태학에 대한 옹호.

4. 짜증나는 진지함.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사실일까? 물론 이런 도식적인 형태로는 사실이 아니며, 이것 때문에 희화화는 약간 위험한 놀이가 된다. 이 점은 집단 전체가 이 놀이를 하기로 결정하고 골드베르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총살해야 한다거나, 달라이 라마의 숭배자들을 산 채로 콘크리트에 묻어야 한다고 선언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게임에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모르면 모를수록 더 분명하고 알기 쉬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생략)

  따라서 가장 예민하고 지적인 전기는 종종 가장 약한 전기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집어넣거나 아니면 미흡하게 집어넣는 두 전기의 위험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상황에서는 분명한 그림을 제공하려는 욕심에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과 너무 적게 말해 상투적인 모습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너라면 애인 구함 광고를 어떻게 쓸 것 같아?"

  내가 이사벨에게 물었다.

  "맙소사, 그래야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

  "그래야 한다면."

  "사실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기는 해. 가이와 헤어지고 나서 아주 외로웠거든."

  "그래, 어떻게 쓸 것 같아?"

  "아, 됐어."

  "말해봐."

  "모르겠어. 이런 식이겠지 뭐. '즐거운 대화, 섹스, 일요일 오후를 위한 똑똑하고 재미있고 잘생긴 남자를 구함. 제발 여자와 미래를 약속하는 데 아무 문제없는 남자만. 사진과 음경 크기를 보내주세요."

  "진심으로."

  "진심이야."

  "아닌 것 같은데."

  "왜,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특히."

  "그건 많은 여자들한테 정말 중요한 문제야. 물론 남자들을 위로해주려고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 능력이라고 떠들어대기는 하지만. 좋아, 네가 한번 내 걸 써보는 게 어때? 한번 도전해봐."

  "좋아, 잠깐 시간을 줘."

  이사벨은 십자말풀이로 돌아갔고 나는 연필을 잡고 문제를 마주했다. 쉽지 않았다.  우선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뻔한 사실이 있었다. 여자다. 런던에 산다. 20대다. 하지만 성격은 어떻게 손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미지가 떠올랐다. 슈퍼마켓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당근을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짜증, 솔직함, 어쩌면 유머. 취미도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남자에 대한 태도는? 이런 광고를 쓰는 것 자체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점은?

  위대한 전기 작가들은 이 게임을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프루스트 학자들은 어떻게 광고를 할까?

 

 

 

 

 

  "왜 그래?"

  내가 이사벨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을 원하면 나가서 찾아봐."

  "얼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얼굴의 표정을 말하는 거지."

  나는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

  "얼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얼굴의 표정을 말하는 거지."

  이사벨이 질식 상태의 학자 같은 억양으로 되풀이했다.

  "왜 그런 기분이야?"

  "나는 어떤 기분도 아니야.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뭔가 문제가 있군."

  "아무 문제 없어"

  "그러니까 너는 늘 이렇다는 거야?"
  "응."

  "그러니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고?"
  "응."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이 일요일 오후에 어떤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고, 인류가 지겨워진 것이고, 그녀의 별자리가 엉뚱한 위상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화학적인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더 핵심에 가까운 이유들도 있었다. 아침 햇빛부터 오후의 어스름에 이르는 과정 어딘가에서 내가 뭔가 불쾌한 말을 한 것이다. 그것도 등산화로 개미들을 밟아 살해하고도 자신들이 교회에 들어가 명예를 얻을 자격이 있는 흠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하이킹족처럼 부주의하게 그렇게 한 것이다.

  내 마음은 그날 아침의 역사로 빠르게 돌아갔다. 우리는 일어났고, 신물을 사러 갔고, 이사벨이 각 섹션을 먼저 읽었고 내가 좋아하는 부록을 건네달라는 요구에도 차분하게 반응했다. 욕실을 먼저 쓴 사람도 이사벨이었으며, 나는 욕실에도 부엌에도 지저분한 것을 남기지 않았고, 침대를 정리했고, 또 잊지 않고 쿠션을 제 순서대로 정돈했고(그녀는 페이즐리 무늬의 큰 쿠션을 뒤쪽에, 파란색 작은 쿠션을 앞에 놓기를 바랐다.), 그녀는 세 사람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그들은 몇 번 그녀에게서 진담처럼 들리는 "그거 정말 재미있네"를 끌어냈다.

  "너는 늘 너 자신만 생각해."

  이사벨은 자기 기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쏘아붙였다.

  나는 술집에서 누가 총을 쏘았을 때 바로 총을 뽑아드는 사람에 비길 만한 속도로 그날 아침에만 해도 8억 4000만 명의 운명이 나의 관심사였다고 대꾸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물론 인도 아대륙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화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그랬다는 이야기였다. (생략)

  "나는 늘 내 생각만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즉시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나는 자신하지 않았다. 그냥 사격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네 생각도 해."

  나는 감상적으로 대답했다.

  "아, 집어치워."

  그녀가 대꾸했다. 나는 그것이 예전에 이사벨이 생리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눈치 챈 체육 교사의 말투라고 상상했다.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왜 사람이 하는 말의 의미를 한 번도 추측해보지 않는 거야? 왜 내가 일일이 다 이야기를 해야 돼?"

  "내가 별로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가보지 뭐."

  "귀여운 척하려고 하지 마. 역겨워지려고 그래."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별일 아니야. 그래서 네가 처음에 물어봤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거야. 그냥 짜증이 날 뿐이야."

  나는 그녀에게 불쾌감을 준 뇌관을 찾아 과거를 다 뒤질 용의가 있었지만, 사실 10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긴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산책하러 가고 싶어?"

  이사벨은 조금 전에 그렇게 물었다. 그것이 우리 둘 다 사용한다고 주장하는 언어로 그녀가 건넨 마지막 질문이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목에 걸린 것을 치우려고 헛기침을 했다.

  정적이 흘렀다. 정원에서는 새가 계속 지저귀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지하철이 몸을 떨며 해머스미스 역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서풍이 채찍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움츠러든 정박지에서 흔들리다 풀려난 잎 몇 개(집을 둘러싼 나무 다섯 그루에서 떨어진 열 내지 스무 개)가 땅으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 후에는? 그 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이것이 대화의 한 문장의 끝일 뿐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앞으로 몇 분 또는 몇 주가 지나 급박한 무언가가 우리 둘 가운데 한 사람의 의식으로 흘러들면 우리는 다시 전과 다름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 용의자의 시체를 지나치는 실수를 저지를 경찰관처럼, 그녀가 앤드루 오설리번과 관계를 끝낸 방식에서, 또는 포르투갈 레스토랑에서 그녀의 잔에 좌초한 바퀴벌레를 보았을 때 그녀가 보여준 태도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마땅히 인식했어야 할 이사벨의 심리의 한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이사벨은 나에게 산책을 하고 싶은지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자고 요청한 것이었다.

  어떻게 "산책하러 가고 싶어?" 같은 간결한 문장 속에 그런 뜻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상대의 의도에 대한 질문으로 그녀 자신의 요구를 위장하는 작전을 통해서.

  이사벨은 종종 압축된 산문으로 이야기를 했으며, 그럴 때는 그것을 펼치고 풍선처럼 부풀려야 뜻이 나타났다. 그녀는 어떤 것을 직접 요청하는 것을 묘하게 수줍어했으며(상대적으로 더 부담스러운 주장은 거침없이 펼쳤기 때문에 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요청하고 싶은 것을 다양한 질문, 당면한 화제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즉, "걷는 것이 기분 전환에 좋다던데") 밑에 은근슬쩍 감추었다. 두 번째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을 세 번째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즉, "새러, 오늘 오후에 산책하러 갈 거야?").

  다음 주말에는 일이 너무 많아 그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널 주말 내내 못 보겠네."

  그녀는 내가 토요일 점심 때 못 만나겠다고 하자 그렇게 대꾸했다.

  내가 전에 학습한 것이 없었다면 아마 "무슨 소리야, 볼 수 있어. 지금 바로 다른 시간을 잡으면 되지"라고 말해달라는 감추어진 요청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냥 "그래, 그럼"하고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 그것은 애인이 다른 남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을 밝혔을 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멍청한 태도였다.

  "맬컴하고 자고 싶다고? 맬컴이 그 정도로 잘생긴 것도 아닌데."

  나는 이사벨의 계획을 듣고 놀라서 물었다.

  "상관없어. 어쨌든 그러고 싶어. 맬컴의 부인이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냐, 아마 만족시켜줄걸."

  나는 사려 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어떤 이미지가 마음에 떠올랐다.

  이사벨은 한숨을 쉬었는데, 나는 이제 그것이 인간적 이해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표시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메시지를 번역하지 못했다. 그녀는 간통의 대상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질투 섞인 내 욕망의 고백을 끌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해석할 것이 많았다. 이사벨이 하는 말은 반드시 그녀가 느끼거나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누가 경솔하게 자기 발을 밟아도 먼저 "미안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고, 옆에 있는 남자가 팔꿈치로 그녀의 갈빛대를 찌르면 "테이블에 사람이 좀 많지 않아?" 하고 말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면, 그것이 꾹꾹 쌓이다가 갑자기 폭발할 수 있었다. 이사벨을 앞에 두고 10분 동안 휘파람으로 어떤 곡조('아베 마리아'였다)를 불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읽던 책을 쾅 덮더니 소리쳤다.

  "좀 그만할 수 없어? 그 빌어먹을, 염병할, 멍청한..."

  격분한 나머지 말의 격류가 그녀의 입천장에 걸려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응?"하고 물었다.

  "휘파람 좀."

  "미안해. 신경 쓰였어?"

  이사벨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감추어진 철사 덮을 계속 만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여, 내 말이 이끌어낼 반응 같은 것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무심코 빠져드는 쟁점 위에 팽팽한 철사가 걸려 있곤 했다. 하지만 잔과 식기세척기에 철사 덫이 걸려 있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곘는가?

  나는 식기세척기라고 하면 인류를 식기 닦는 잡일에서 해방시켜준 기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도구가 이사벨에게는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아파트엔 식기세척기가 한 대 있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바닥에 볼트로 고정시켜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왠지 자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거기에 내포된 게으름, 전기의 과다한 소모와 시골의 강이나 호수를 오염시키는 부작용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이 기계는 규칙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는 했지만, 거기에 얽힌 심리는 복잡했다.

  나는 부엌에서 뭘 마실 때마다 쓴 잔을 다시 씻어서 쓰지 않고 새 잔을 쓴 다음, 식기세척기 위칸에 놓는 버릇이 있었다. 몇 달 동안 그러고 나자(잎들이 나무에서 떨어질 만큼 긴 시간이었다) 이사벨이 말했다.

  "너는 내가 남긴 힌트를 하나도 이해 못했지, 그렇지?"

  "무엇에 관한 힌트?"

  "잔. 네가 뭘 마실 때마다 새 잔을 꺼내는 통에 미치겠거든. 그런 낭비가 어디 있어?"

  "하지만 어차피 기계를 사용할 거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불필요해 보이잖아."

  "곧 기계를 돌릴 건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유는 없어. 그냥 그러지 마. 내 문제야. 미안해. 하지만 다시 보니, 여긴 내 부엌이기도 해."

  이사벨의 정신 기능 가운데는 공감이라는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우리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슬픈 결정으로 만족해야 하는 영역들이 있었다. 왜 슬프냐고? 차이를 존중한다고 으스대며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솔직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심리적으로 이해 못하는 것 외에도, 사실의 수준에서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 이사벨은 일기에 무엇을 쓸까, '스케이트'라는 그녀의 별명은 어디서 왔을까, 왜 그녀는 화요일마다 기분이 나쁠까, 그녀 여동생의 남자친구 이름은 무엇일까, (생략) 기차에서 섹스를 해보았을까, (생략) 매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생략) 그 밖에도 몇 가지가 있었다.

  이런 무지는 안타까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학습 곡선을 따른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친밀함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결혼 25년이 된 부부가 함께하는 점심시간은 양고기의 씹히는 맛, 날씨의 변화, 찬장 위 꽃병에 꽂힌 튤립의 상태, 시트를 오늘 갈 것이냐 내일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대화로 활기가 넘친다. 이 부부도 삶의 출발점에서는 의욕이 넘쳐, 서로 그림, 책, 음악, 복지국가의 역할에 관한 예리한 문답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 말할 기회가 많아질수록, 실제로는 말을 덜하게 된다는 역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시간이 무제한이라면, 사과 크럼블이나 물이 완전히 안 잠기는 수도꼭지 이야기를 다 하기도 전에 굳이 거창한 화제로 나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공유하고 있다면, 거창한 질문으로 인한 격변은 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생략)

  더욱이 어떤 사람을 오래 알수록 그 사람에 관한 어떤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일정한 기간만 지나고 나면, 서로의 개의 이름, 또는 아이나 아버지나 직업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이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이질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에 대한 나의 이해에 빈 구멍들이 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 구멍들이 얼마나 큰지는 사실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그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배움의 지혜와 공감의 미덕에 관한 소중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디비나의 주장에 따라 성실하게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더니 이해 받는 것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한 번도 머리를 올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안 그래. 나도 이유를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빗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 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는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더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그럴 만큼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정적이 흘렀다.

  "사실 우리도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더 오랜 정적이 흘렀다. 옆집 부엌의 싱크대가 트림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도 자신할 수가 없어. 나도 그 이상은 모르겠어, 됐어? 맙소사, 완전히 지각이다. 내 외투 어디 있어?"

 

  나는 겸허해진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옮기고 나서

 

 

  사람을 안다, 이해한다, 공감한다, 사랑한다. 세상에서 사람을 향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동사들을 고르라고 했을 때 이 동사들은 다들 아마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그만큼 사람에게 근본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동사들끼리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뭔가 뿌듯하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 동사들 사이의 관계나 선후를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사람마다 미묘하게 의견이 엇갈릴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람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아는 만큼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 관계를 떠나, 이 가정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들에 관해 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 가운데 알랭 드 보통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영어 제목인 <Kiss & Tell> 자체가 위에서 던진 질문 속의 관계를 암시한다)에서 알랭 드 보통의 페르소나인 '나'는 애인에게 차이면서 "공감할 줄 모른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받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길에 나선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이해를 하고, 이해를 해야 공감한다는 전제를 갖고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우선 사람을 알고자 하는데, 그가 나 아닌 타인을 알기 위해 택하는 방식은 타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고 여겨지는 전기를 쓰는 것이다. 물론 그는 다름 아닌 알랭 드 보통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에 타인의 전기를 써나가는 동시에, 기존의 전기적 관습을 회의하고 뒤집는다. 전기의 주인공을 택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 기존의 전기가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면, 그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한다. 다만, 그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 그가 새로 만나게 된 여자라는 점이 약간 특별할 뿐이다. 결국 이렇게 해서 사람을 '아는' 문제와 '사랑하는' 문제가 하나로 맞물리게 된다. 전기를 써나가는 그의 작업은 이 문제를 파헤치는 모험이 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모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형식 또한 전기(또는 반전기)이자, 전기와 친족관계라 할 수 있는 소설이자, 사람을 알고 사랑한다는 문제에 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에세이가 된 것이다.

  앎과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알랭 드 보통의 초기 작품이다.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번역을 하신 분과 출판사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이번에 다시 내놓게 되었다. 옮긴이로서는 오랜만에 알랭 드 보통의 시퍼렇게 날이 선 젊은 시절 글을 마주하니, 마치 애 아버지가 되고 머리도 벗겨진 나이 든 친구의 청춘 시절 일기와 사진을 마주한 듯 짜릿하게 반갑기도 하고, 함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과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친구 그때는 참 까칠했지..... 그래도 남들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붙들고 늘어지는 면에서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는데..... 게다가 사유의 깊이는 어떻고.....  누구나 인정하는 재치와 독특한 유머 감각도 빼놓을 수 없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이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글을 썼다는 거야..... "내 글은 모두 일종의 자서전이죠. 나는 늘 독자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련을 맺는 것, 내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아시아나 기내지 2010년 4월 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정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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