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작가님의 "최선의 삶" 읽고 작가님의 팬이 돼서 작가님의 책 한 권을 더 빌려왔다
책 이름은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직 조금밖에 안 읽었는데 필사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서 블로그에 옮겨 적으려고 글 썼다
임솔아 - 눈과 사람과 눈사람
"줄 게 있어."
기열의 목소리는 가뿐했다.
"거기서 기다려."
콘크리트 바닥에 신발로 빗금을 그어가며 나는 기열을 기다렸다. 아파트 창문들이 일제히 노을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단지 입구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들도 있었고 집업 점퍼에 두 손을 넣은 아저씨도 있었고 노부부도 있었지만,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금세 거대한 행렬이 되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나는 상가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뽑아 만지작거렸다. 몇몇 창문에 불이 켜졌다. 앙금이 가라앉은 채 식어버린 율무차를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마시고 있는데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들렸다. 하늘에서 새빨간 불꽃이 사방으로 떨어져내렸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이었구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었다. 화면 가득 불꽃이 보이도록 줌을 하면서 불꽃을 향해 한 발씩 걸어갔다. 인파에 섞여 횡단보도를 건넜고 언덕을 내려갔다. 한강으로 진입하는 굴다리까지 통과하고서야 기열이 떠올랐다. 한강으로 와. 기열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강 산책로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강둑 끄트머리에 서서 목을 꺾고 불꽃축제를 구경했다. 불꽃축제가 끝나도록 기열은 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머리맡을 더듬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일이 없는 친구였다. 누구라고? 눈을 감은 채 되물었다. 기열이가 죽었어, 입안 가득 빵을 욱여넣은 듯한 목소리로 친구가 말했다. 캄캄한 방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네모난 테두리가 빛나고 있었다. 테두리를 밀자 빛이 쏟아졌다. 꽁지머리를 한 아버지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돋보기를 코에 걸친 채 나를 돌아보았다.
"아빠, 기열이가 죽었대요."
아버지는 눈앞으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았다.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웠다. 천천히 책을 덮고 돋보기를 벗으며 아버지는 싱긋 웃었다. 한쪽 볼에 동그랗게 보조개가 파였다.
"악몽을 꾸었나보구나."
어렸을 때, 자주 새벽에 깨어 지금처럼 서재 문을 열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안고서 내 방에 다시 나를 뉘어 주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앉아 이마를 쓸어주었다. 꿈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내 입술과 혀로 기열의 죽음을 확언할 마음의 준비가 나는 되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내 방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기열의 친구들도, 기열의 이름만 아는 아이들도, 기열의 이름을 모르던 아이들도, 종일 기열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몇 아이들은 점심을 먹지 않았고, 몇몇 선생들은 수업 도중 눈물을 흘렸다. 몇몇 아이들은 이 반 저 반을 돌아다니며 기열을 잃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기열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기열, 불꽃축제, 강둑, 개쑥갓, 영후, 그래서 그랬대······ 비슷한 낱말들이 저마다의 입에서 반복되었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들은 학생들과 행렬을 이루어 병원으로 향했다. 불꽃축제를 보러 가던 행렬과 이 행렬이 자꾸 겹쳐 보였다. 나는 행렬에서 조금씩 뒤처져갔다. 멀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버스 정류장에는 여전히 서울불꽃축제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내 핸드폰 앨범에는 어제저녁에 찍은 불꽃축제 동영상이 있었다. 문자메시지 목록을 거슬러올라가, 기열과 나누었던 메시지를 차례대로 열어보았다. 기열이 주려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경고음이 복도에 퍼졌다. 현관 비밀번호를 틀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랫입술을 쥐어뜯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나를 소파에 앉힌 후 내 무릎 위에 책을 펼쳤다. 식물도감이었다. 아버지는 목록을 손가락으로 훑어내렸다. '잡초' 목록에 개쑥갓이 있었다. 개쑥갓의 이파리는 생선 가시를 닮아 있었다. 노란 꽃잎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닮아 있었다. 꽃 같지도 않은 꽃이었다. 개쑥갓같이 생긴 개쑥갓이었다.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네. 길가에 흔히 자란대."
흔히 자란다는데 본 적이 없었다. 흔한 길가도 흔한 개쑥갓도 흔히 바라보게 되진 않았다.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다. 이게 기열이 교복 안주머니에서 발견됐다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배경은 흐릿하고 개쑥갓만 초점이 맞아 선명한 그 사진을 손끝으로 더듬다가 나는 기열과의 통화 내용을 아버지에게 말해주었다.
"이 개쑥갓을 주려고 했을까."
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묵직하게 힘을 주었다. 울퉁불퉁한 손가락 관절 때문에 어깨뼈가 아파왔지만 왠지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오래 그러고 있다가 불쑥 일어나 집밖으로 나갔다.
바짓단에 흙이 묻은 채로 아버지는 돌아왔다. 한 손에는 모종삽이, 다른 한 손에는 화분이 들려 있었다. 내 방 창가에 그 화분을 놓아두었다.
"우리가 이 개쑥갓을 잘 키워보자."
손을 탁탁 털며 아버지는 웃었다. 한쪽 볼에만 생기는 보조개가 검고 동그란 그림자를 드러냈다. 그걸 보자 내 한쪽 볼에도 똑같은 그림자가 피어났다. 아버지는 잔머리가 여기저기 삐져나온 꽁지머리를 풀고 손으로 빗질을 해가며 다시 묶었다. 나는 밥그릇에다 물을 받아왔다. 조심스럽게 화분에 부어주었다. 밑동에 난 털마다 물방울이 맺혔다. 비가 오는 날처럼 젖은 흙냄새가 퍼졌다.
소파에 앉아 쇼 프로를 보다가, 쓰레기통 옆에 앉아 발톱을 깎다가,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하다가, 나는 자주 창가로 걸어가 개쑥갓을 보았다. 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가는지를, 밤에는 어떤 모양으로 펄쳐지는지를 보았다. 꽃잎은 만지면 부서졌다. 만지지 않고 바라보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나가게 되었다. 바라보는 일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과 비슷했다. 기다리는 일은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일과 비슷했다.
"잘 크고 있네."
아버지도 매일 화분을 지켜봐주었다.
시든 꽃잎들은 실밥 같았다. 창문을 열어놓은 날이면 노란 실밥들이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반대로 나에게로, 내 침대맡까지 굴러오는 실밥도 있었다. 발치에 흘어져 있는 꽃잎들을 주워 창문 밖으로 날려보냈다. 고개를 쭉 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실밥이 허공을 부유하는 걸 지켜보았다. 실밥은 빙글빙글 돌면서 멀리 보이는 한강을 향해 사라져갔다. 사라진 자취를 더듬거리며 나는 창턱에 엉덩이를 걸쳤다. 한 손으로 창틀을 쥐고 창밖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순간, 무언가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두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조여서 '컥' 소리와 함께 기침이 나왔다.
"괜찮아. 이제 괜찮대도."
나를 방바닥에 내려놓으며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배를 쥐어잡고 남아 있는 잔기침을 뱉어내며 나는 물었다. 아버지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나를 왈칵 끌어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물컹한 생선처럼 '잘못'이라는 말의 의미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도와주겠다고 했고, 맹세한다고 했고, 영후도 맹세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내 몸을 놓아주고 열려 있는 창문을 닫을 때에야 미끄러졌던 의미들이 바닥에서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화분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같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영후야. 네 잘못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한쪽 볼에 보조개가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멍해졌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어둠 속에서 불꽃 한 점이 긴 꼬리를 흔들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솟아오르던 불꽃은 한순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입을 벌린 채 불꽃을 바라보던 때처럼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버지의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생각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그 점이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손바닥이 후끈거렸다.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첫 장 시작되는 부분이고, 이 뒤부터가 영후가 본격적으로 혼란을 겪고 완벽히 책에 빠져드는 내용이 나온다
임솔아님 소설은 내가 정말 완벽히 책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원래 있는 세상을 잊게 만들 정도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다
호기심이 생겼으면 읽어보는 거 추천@
그치만 난 단편 소설을 여러개 넣은 책보다는 장편 소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최선의 삶이 훨씬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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