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도서관에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데 거기에 이 책이 꽂혀있길래 빌려서 읽어봤다
어린이 자료실을 가보니까 정말 어린 아이들(부모님이랑 같이 온)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화책같은 것만 있을 줄 알았는데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와서 '어' 이러면서 바로 책을 집었다
책은 제목답게 생물학 분야 도서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요약한 책이었다
블로그에서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난 이기적 유전자가 내가 살면서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이 책도 당연히 좋았고 재밌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도킨스가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게 썼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술술 읽히는 쉬운 책은 아니다
나도 처음에 읽을 때 문장을 한 번 읽고서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데에 한 달이 넘게 걸린 것 같고 다 읽고 나서도 3번인가 4번을 다시 봤다
그래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이해하기 조금 어렵다고 느끼거나 아직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이 책을 읽으면 이기적 유전자의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니까 내가 읽었던 글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고, 기억은 나는데 명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 부분들이 많다는 걸 느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고
아무튼 책도 얇아서 금방 읽기 때문에 추천@
(그치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이건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이해하기 힘들다' 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의 책은 절대 절대 아니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원래 책을 읽어보는 걸 추천하구 밑에는 메모)
최재천 교수님 말씀 "너무 쉬운 책만 붙들고 계시면 영원히 그런 책밖에 못 읽으세요."
"저는 책은 씨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일로 생각하고, 어려운 책 붙들고 씨름하고... 그러는 게 독서입니다"
"독서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논할 때 심리적인 면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봅니다. 전통 윤리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행위의 '동기' 보다는 '결과' 를 중시한다는 것을 뜻해요. 이에 반해 철학자 칸트처럼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내 전공 분야가 동물 행동학인만큼, 나는 어떤 행동의 결과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일 때 그 행동을 '이기적' 행동이라 부르고, 타자를 이롭게 하는 것일 때 그 행동을 '이타적' 행동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동기주의와 결과주의|누군가가 불쌍한 사람에게 돈을 주었을 경우, 돈을 준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돈을 주었다면 그것은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 행위는 자신을 위한 행위이며 이기적 행위이지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을 주는 것이 도덕적인 행위가 되는 때는, 주는 사람이 그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도덕적 판단에 입각해 주었을 때뿐이다. 이처럼 동기주의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가 과연 도덕률에 입각해 있는가'를 기준으로 도덕적인 행위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도킨스가 제시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규준은 이런 칸트적 규준과는 전적으로 다른 결과주의의 규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나는 행복이라든가 성공 같은 개념들도 철저하게 동물 행동학적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행복이나 성공은 곧 생존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 자체가 '성공' 이라는 개념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곧 살아남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 역시 이런 용어법을 씁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한 정의는 주관적인(심리학적인)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behavior)에 입각한 정의라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행동의 동기에 관한 심리학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정말로' 은폐된 무의식적인 동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로서는 결국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책은 그런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그 행동의 결과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낮추고 수익자로 보이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준다면 나는 그것을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잘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은폐된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근원적인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에 행동이 끼치는 효과가 얼핏 보이는 바와는 반대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생명이 어떻게 탄생됐는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제시되고는 있으나 많은 부분들이 상상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서 과거를 추론해야 합니다. 이는 정당한 추론은 아니지만 알기 힘든 과거를 추측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방법이지요.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무언가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개체가 우주 탄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때 살아남았다는 것은 A라는 사물이 계속 A로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정의합시다. 어떤 것이 변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것이 자체의 안정성을 그만큼 잘 유지했다는 것들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그 사물이 자체의 동일성(identity)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물이 동일성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여러 가지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생명이 동일성을 유지해 온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자기 복제자' 의 출현이었습니다. A가 다시 A를 낳고 이 A가 다시 또 다른 A를 낳을 때 우리는 A를 자기 복제자라 부릅니다. 자기 복제자가 없는 세계는 어떤 동일성도 존재하지 않는 흐름의 세계일 것입니다. 자기 복제자의 출현으로 인해서 이 세계에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반복이란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정교한 형태로 자기를 복제해 가는 어떤 물질이 생겨나면서 생명 탄생의 서곡이 울려 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그 어떤 동일성도 그대로 유지될 수만은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개체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론적 세계에서라면 몰라도 실제 세계에서 완벽한 동일성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세계는 항상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안정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체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개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서로 다름을 소화하고 변화를 수용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변경시켜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A가 오로지 A 자체로서 지속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A는 항상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고, 그 관계 맺음 자체가 A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완벽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해체되지 않고 스스로를 변형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사실과, 복제가 충실하게 일어날 때 자연도태가 유리하게 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요? 충실하게 자신을 복제해야 자기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생각과, 오류가 생기고 차이가 발생해야 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오류' 란 복제자가 자신의 동일성을 완벽하게 복제하지 못하고 항상 어떤 차이를 동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차이가 이 우주를 살아 있게 만들고 진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복제 오류는 긴 시간에 걸쳐 반복되고 계속해서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오류와 차이를 생성해 내는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고등 생명체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이와 차이 생성 | '차이의 생성(differentiation)' 이란 차이들(differences)이 계속 발생하는 운동을 뜻한다. 생물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해 간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이 자라고 세포가 죽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혈액이 혈관을 타고 돌고 호흡을 하는 등 우리 몸은 한시도 쉬지 않고 어떤 차이들을 낳는 것이다. 'differentiation' 이라는 말은 또한 분화를 뜻하기도 한다. 수정란은 분화해서 점점 복잡한 존재가 되고 마침내 하나의 개체가 된다. 즉 하나의 수정란에서 출발한 세포들은 분화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 달라져,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많은 차이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과정이 differentitian이라 불리는 것이다. '상상(imagination)' 이 상(이미지)의 운동을 뜻하고, '개념화(conception)' 가 개념의 운동을 뜻하고, '의미 작용(significaion)' 이 의미의 작용을 뜻하듯이, 'differentition(차이 생성, 분화)' 은 차이의 운동을 뜻한다.
복제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수명, 다산성, 그리고 복제의 정확성입니다. 자기 복제자인 유전자는 이런 기준과 목적에 충실한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 를 만들어 냈습니다. 생존 기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생존해 온 것이 바로 유전자입니다. 그러니까 개체들은 유전자가 자신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 낸 운반자인 셈이지요. 유전자는 '리모트 컨트롤에 의해서 외계를 조절'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든 것도 유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체의 최종 목표이지요.
자기 복제자가 세계에서 안정성을 유지해 나가는 데 사용한 기술이나 전략의 점진적 개량으로 인해 언젠가는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량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은 충분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자기 보존을 위한 어떤 기관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40억 년이 지난 지금 태고에 있었던 자기 복제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금도 바다 속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며, 기사 같은 자유를 일찍이 포기했다. 오늘날 그것들은 거대하고 꼴사나운 로봇 속에 들어앉아 외계와 차단되어 있지만, 구불구불한 간접적인 통로를 통해서 외계와 연락한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을 통해 외계를 관리하고 있다. 그것들은 당신 안에도 또 내 안에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것들을 보존하는 데 있다. 그것들은 자기 복제자들로서 긴 시간을 견뎌 왔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 라는 이름으로 이전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유전자들을 위한 생존 기계인 것이다.
대체 유전자란 어떤 존재이고 또 생명체에게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유전자는 '불멸의 코일'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전자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DNA이고, DNA는 이중 나선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두 가닥의 나선이 서로 교차하면서 꼬인 형태의 DNA는 코일과도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불멸의' 코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통해 후대에서도 계속해서 살아남고자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복제는 생명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가 생명체의 모든 특징들을 갖추었어도 자기 복제를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생명체라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복제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구성하는 어떤 정보를 복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정보는 어디에 담겨 있을까요?
생명의 정보는 염색체에 담겨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염색체와 유전자, DNA, 뉴클레오티드를 구분해야 합니다. 염색체는 요리책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리책에 어떤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듯이, 염색체에는 언제 어떻게 자기 복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염색체보다는 유전자입니다. 염색체가 한 권의 책이라면(인간의 경우 사실상 23쌍의 염색체, 즉 46개의 염색체를 가지지만) 그 책을 구성하는 각 챕터들은 유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유전자의 실체는 DNA입니다. 각 챕터들은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저마다 고유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유전자를 논의의 단위로 삼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책에서 하나의 챕터는 다시 단어들로 구성됩니다. 이때 단어들에 해당하는 것이 뉴클레오티드입니다. 뉴클레오티드는 DNA를 구성하는 분자로, 염기와 당, 인산기가 만나서 조립된 결과 생성됩니다. 장차 DNA가 될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성분들 중 염기에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의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염기들 중 어떤 것으로 구성된 뉴클레오티드냐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집니다. 즉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티드에는 총 네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 분자는 다양한 조합을 이루면서 DNA를 수놓습니다. DNA는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들이 어떤 순서로 배열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게 됩니다.
책에서는 단어들이 모여 하나의 문장이 만들어져야 의미 있는 정보가 형성됩니다. 마찬가지로 뉴클레오티드들이 모여서 DNA를 구성할 때, 비로소 뉴클레오티드 하나하나에는 없었던 정보가 생성됩니다. 때문에 염색체나 뉴클레오티드가 아닌 유전자와 DNA가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정보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에는 염색체는 너무 큰 단위이고 뉴클레오티드는 너무 작은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방식으로 정보가 존재할 때 정보의 이전을 통해서 기존의 생명체가 새로 탄생하는 생명체에서 반복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불멸의 코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런 역할을 하는 유전자가 변형을 겪으면서도 수억 년의 세월을 지속해 왔기 때문입니다.
유전자들은 때때로 섞이고, 그 결과 변형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예로 들어 볼까요. 사람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받은 23개의 염색체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23개의 염색체를 받는 과정에서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들은 서로 섞이곤 합니다. 이때 책의 한 페이지가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는 것에 반해 유전자의 시작과 끝은 명확히 분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복잡한 섞임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조합이 생명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때 그 생명체는 자연선택을 받게 되고 도태를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멸의 코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전자는 후대까지 계속해서 살아남는 단위입니다. A와 B로 구성된 사물이 해체될 경우 그 사물 자체는 없어지지만 A와 B는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체들은 해체되어도 유전자는 지속되는 것이지요.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적어도 유전자는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정의된다. 개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는 평균 수십 년을 살 뿐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수명은 십 년 단위가 아니라 만 년 또는 100만 년 단위로 측정되어야 할 것이다. (···) 개체군은 장기간 지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섞이고 그로써 자체의 동일성을 상실한다. 게다가 개체군은 내부로부터의 변화도 겪는다. 따라서 개체군을 자연도태의 단위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 하나의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보다 더 안정되지도 또 단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개체의 몸은, 살아있는 한 충분히 독립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살 것인가? 각 개체는 유일하지만, 실체(개체)의 사본이 하나씩만 존재할 때 이 실체들 사이에서 섞임이 일어나 진화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유성 생식은 복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에 의해 오염되듯이 한 개체의 자손은 그 성적 배우자에 의해 오염된다. (···) 개체는 안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 염색체 또한 카드놀이의 카드들처럼 혼합되어 그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카드 자체는 섞여도 살아남는다. 이 카드가 바로 유전자이다. (···) 유전자들이야말로 자기 복제자들이고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보호하는 데 쓰인 후 버려진다.
뉴클레오티드|뉴클레오티드는 DNA나 RNA를 구성하는 단위체 분자이다. 뉴클레오티드는 크게 세 부분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뉴클레오티드를 형성하는 세 부분을 우리는 당, 염기, 인산기라고 부른다. 이때 뉴클레오티드를 형성하는 당의 종류에 따라 그 뉴클레오티드는 DNA를 구성하거나 RNA를 구성하게 된다. RNA를 만드는 뉴클레오티드에는 DNA를 만드는 뉴클레오티드와 비교할 때 당에 수소(-H) 대신 수산화기(-OH기)가 붙어 있다.
한편,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염기에는 총 다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리는 각각을 아데닌(Adenine), 구아닌(Guanine), 시토신(Cytosine), 티민(Thymine), 우라실(Uracil)이라 부른다. DNA를 구성하게 될 뉴클레오티드에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중 하나의 염기가 존재하며, RNA를 구성하게 될 뉴클레오티드에는 티민 대신 우라실 염기가 붙는다.
유전자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요? 또 유전자와 세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세포는 유전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운 방어벽입니다. 또 개체는 세포들의 군집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핵심적인 존재가 개체들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개체 이하의 물질들이나 개체 이상의 보편자들(가족, 지역, 국가 등)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개체들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상 유전자가 세계의 핵심이며 세포는 그 방어벽이고 개체는 세포들이 모여 형성하는 군집일 뿐입니다.
나는 다른 존재 단위들이 결국 유전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세포를 비롯한 생명의 다른 측면들은 결국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해 작동시키는 보조적인 장치들인 셈입니다.
유전자는 어떻게 이 보조 장치들을 작동시킬까요? 컴퓨터가 사람과 장기를 둘 때 프로그래머가 직접 조작하지는 않는 대신 미리 짜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컴퓨터가 작동하듯이, 또는 공상 과학 소설 <안드로메다의 A>에서처럼 안드로메다 인들이 200여 년 전에 짜 놓은 프로그램이 지구에 도착해 지구를 파멸로 몰고 가듯이, 유전자는 생명체의 기본 삶을 프로그래밍해 놓고서 자신은 보조 장치 안에 조용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어떤 개체가 일정한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 개체를 조정하는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이미 유전자에 의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개체는 유전자가 심어 넣어 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응용하는 것이지요.
의식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철학적 문제가 생기든 간에, 의식이란 실행상의 결정권을 가진 생존 기계가 그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경우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진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뇌는 생존 기계의 작동을 계속해서 제어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견하고 그에 따라 행위 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또한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가능한 한 많은 아이를 낳으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은 이런 점에 있어 그저 예외적인 존재일 뿐이다. (···) 나는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동물의 행동이 오로지 간접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강한 의미에서 유전자의 제어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생존 기계와 신경계를 조립하는 방법을 고안해 냄으로써 유전자는 행동을 제어한다. 그러나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그때마다 결정하는 것은 신경계이다. 유전자는 프로그래머이고 뇌는 실행자이다.
유전자 자체만으로는 그때그때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개체를 조정할 수 없습니다. 고등 동물은 유전자와 보조 장치들 사이에 핵심적인 매개 장치를 마련해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뇌입니다. 유전자는 극히 느리게 작동하지만 뇌는 극히 빠르게 작동합니다. 모기가 달려들어서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 할 때, 기본 프로그램(적에 대한 방어 본능)은 유전자가 제공하지만 실제로 상황을 판단해서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뇌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전자가 이런 상황들까지 예측해서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시뮬레이션이 필요합니다. 유전자는 적들이나 상황들을 일일이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적, 자기 보호, 신체의 작동 등등을 미리 예측해서 프로그램화 해야 합니다. 이런 예측이 실제 삶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바로 학습입니다. 나는 시뮬레이션과 학습이라는 고도의 작업 처리 과정이 의식을 낳지 않았나 하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뇌가 유전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는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뇌가 그것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뇌의 반란은 다른 생명체들에게서도 일정 정도 발견되지만 인간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인과 방향의 역전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인과 방향의 역전은 우리가 이미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해서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문화로 나아갈 뿐 문화에서 자연으로 나아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나는 유전자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합니다. 나는 심리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유전자의 이기주의-이타주의를 논의할 때에는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밝혀 둬야겠군요. 나는 철저하게 행동의 결과만을 놓고 볼 것입니다. 나는 이기주의나 이타주의 같은 말들을 생명체 전반에 대해 씁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개념과 주장들은 철저하게 생물학적 맥락에서 제시되는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문제는 내 주장의 핵심에 위치합니다. 우리는 인간 유전자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생명체 전반에 걸쳐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이때 '공격성' 이란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는 개체를 '자기의 유전자 전체에 적합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분별하게 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이기적 기계'로 봅니다. 개체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로봇이자 유전자의 운반 기계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의 세계가 자신의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이기적 기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동물들 사이의 싸움이란 글러브를 낀 주먹으로 하는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동물들은 싸움 자체를 위한 싸움이나 잔혹한 싸움을 하지는 않으며, 생존에 꼭 필요한 싸움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만이 카인의 후예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왜 다른 동물들은 사생결단으로 싸우거나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생태계의 문제와도 관련되며 이기주의-이타주의 논쟁과도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ESS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라는 개념을 활용하겠습니다. ESS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진화론적으로 안정된 전략' 정도가 되겠군요.
여기서 전략이란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는 행동 방침을 뜻합니다. 예컨대 '상대를 공격하라' , '그가 도망치면 쫓아라' ,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 같은 프로그램 말입니다. 환경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이기적 기계로서의 개체들은 이런 식의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환경에서 많은 변화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생태계는 일단 진화론적으로 안정된 이 전략에 도달하게 되면 매우 큰 변화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동물들은 특별히 변덕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며 일정한 '법칙' 에 따라서 싸우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각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합의나 협정을 맺는 것은 그것이 ESS의 의미에서 안정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개인이 의식적으로 장래를 예견하고 협정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장기적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누군가 협정을 깸으로써 단기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그래서 협정을 깨고 싶은 유혹이 늘 잠재해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아마 가격 협정이 될 것이다. 가솔린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이면 업자들 전원이 당분간은 이익을 보게 된다. 이런 협정은 일정 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자기만 가격을 내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이익을 내려는 유혹에 말려든 업자가 나타난다. 그러면 다른 업자들도 당장 가격을 내리게 되고, 이어서 가격 인하 파동이 순식간에 전국을 강타한다. (···) 유전자에 의해 지배되는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는 집단의 이익이나 합의의 전력이 거의 진화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화론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는 방식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새들을 보면 대개 한 번에 낳아 키우는 새끼들의 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가 한 둥지의 알의 수를 조절하는 데에는 어떤 이타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개체들이 산아 제한을 실시하는 것은 집단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새기를 더 낳을 경우 결과적으로 오히려 자식들의 생존에 위협기 되기 때문입니다. 어미 새는 이 상한선을 파악하기에 더 이상 알을 낳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식을 3마리까지 키울 수 있는 새가 6마리의 자식을 낳는다면 어미 새는 늘어난 자식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원래의 3마리까지도 죽게 될 것입니다.
개체들은 결코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본성에 따라, 즉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바깥에서 볼 때는 마치 이타적인 행동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해들이 한 둥지 안에서 키우는 알의 수는 종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북양가마우지와 바다오리는 한 번에 한 개의 알을 품는데, 제비는 3개, 박새는 6개 이상의 알을 품는다. (···) 새끼를 많이 낳을수록 그 새끼들을 보호하는 능력은 감소한다. 특정 환경조건 하의 어떤 종에 있어 한 둥지의 알의 수는 정해져 있을 것이라는 것이 데이비드 랙이 제시한 이론의 요점이다. (···) 각각의 이기적인 개체는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들의 수를 최대로 할 수 있는 한 둥지의 알 수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랙은 주장한다. (···) 개체가 한 둥지의 알 수를 조절하는 이유에서 이타적인 점이란 없다. 그것들이 산아 제한을 행하는 것은 집단을 위한 자원을 남용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새들은 자기 새끼들의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산아 제한을 실시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보통 우리들이 산아 제한에 결부시키고 있는 이유와는 정반대의 목표인 것이다.
인간 사회는 이러한 이기적 차원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를 발명했으며, 따라서 국가 형태들 중 최고 형태는 복지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기적인 개체들은 복지 개념을 악용하기도 하지만요.
어미가 자식들 중 어떤 자식(들)을 편애하는 것은 왜일까요? 편애에 유전적 근거는 없습니다. 어떤 자식을 편애하는 유전자는 없는 것이지요. 어미는 다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서 편애할 뿐입니다. 단 이때의 '편애'란 말도 철저하게 생물학적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미와 자식들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는 'PI(Parental Investment)' 라는 개념이 유용합니다. 한국어로는 '부모의 투자' 정도로 설명하면 좋겠네요. 이것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투자하는 경우 이미 출생했거나 앞으로 출생할 다른 아이들의 남은 수명 감소도 평균을 통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어미 새가 어떤 새끼에게 모이를 몰아주었다면 다른 새끼들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이때 PI는 이 피해의 정도를 측정합니다. 나는 동물들이 PI에 입각헤(물론 의식적으로 입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그런 메커니즘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자식들을 향한 '애정'을 조절한다고 봅니다.
불일치가 발생하는 지점은 새끼 키우는 수고를 누가 떠맡느냐의 문제를 마주했을 때이다. 어느 개체든 새끼들의 수를 가능한 한 늘리려 한다. 어떤 새끼에 대한 투자량을 줄일 수만 있다면 그만큼 보호할 수 있는 새끼들의 수는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되는 수법은 배우자가 자식들에게 할당량 이상의 노력을 투자하게 만들고 그 사이 자신은 다른 배우자와 새로운 자식을 얻는 수법이다. (···) 암컷이 새끼를 수컷에게 맡기고 다른 수컷을 찾아 도망치는 전술을 구사하면 수컷 역시 새끼를 버림으로써 보복한다. (···) 암컷은 새끼를 낳은 직후만이 아니라 사실상 평생 동안 수컷보다 많은 정성을 새끼에게 쏟는다. (···)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고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사실이 이런 착취를 낳은 일차적인 진화론적 근거가 된다.
생명체들이 무리를 이루면 여러 가지 이점들이 따릅니다. 하이에나는 무리 지어 포식함으로써 사냥을 쉽게 하고 거미들은 서로 협력해 거대한 망을 칩니다. 또 황제펭귄들은 서로 몸을 비벼 열을 보존하고 새들은 V자형으로 날아감으로써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합니다. 해밀턴은 이런 식의 여러 가지 무리 짓기 현상을 유지하는 일차적인 이유를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우선 '위험 영역 최소화'의 메커니즘에서 발견됩니다. 위험 영역이란 '포식자로부터 개체까지의 거리가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 사이의 거리보다 짧은 영역'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가능하면 무리의 중간에 위치하려고 합니다. 즉 가장자리를 형성하는 개체들은 그만큼 포식자들의 먹이가 될 확률이 크므로 어떻게든 무리의 중간에 들어가려 애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 때문에 무리나 사회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기적인 무리의 모델에 협력적인 상호 관계가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타주의가 없으며 개개의 개체가 다른 모든 개체를 이기적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얼핏 보면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론으로는 새가 경계음을 내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새가 경계음을 낼 경우 다른 새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만 경계음을 내는 새 자신을 포식자의 표적이 됩니다. 하지만 새가 경계음을 냄으로써 자신의 일족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개체가 희생함으로써 유전자를 지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전자 풀 내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증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론이 적용되는 또 다른 설명은 '대열을 이탈하지 말라' 론입니다. 매를 먼저 본 어떤 새가 매를 피해서 혼자 숨을 수는 있지만 그런 고립 행위는 결국 자신의 생명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새는 동료들에게 알려 함께 숨기를 권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결국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경우는 톰슨가젤의 경우입니다. 새의 경우는 경계음을 조절해 매의 주의를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허풍스럽게 높이 뛰는 톰슨가젤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톰슨가젤이 포식자를 알리는 표시로 높이 뛰는 행위는 마치 고의로 포식자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 경우는 포식자의 포식 행동 경향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포식자가 쉽게 잡힐 먹이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톰슨가젤은 높이 뜀으로써 '자, 봐라. 나는 이렇게 튼튼해서 잡아먹기에 만만치 않다'고 과시하는 셈입니다. 이때 도약 행동은 자신이 아닌 다른 개체를 먹으라고 하는 신호와도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에게는 기억 능력과 개체 식별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호혜적 이타주의는 인간의 진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트라이버스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능력, 사기꾼을 알아보는 능력, 사기꾼이라는 것을 간파당하지 않는 능력 등이 진화 과정에서 점차 강화되었으며, 이런 자연도태 과정을 거쳐 질투,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 동정 같은 각종 심리적 특성들이 형성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교활한 사기꾼'의 존재이다. 이런 생명체는 언뜻 보기에 (도움을 받은 다른 생명체에게) 보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늘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적은 것을 보답한다. 인간은 큰 뇌와 사고의 소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바로 그 능력을 통해서 남에게 사기를 치고 또 남이 사기 치는 것을 간파하는 능력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입각할 때 돈이란 호혜적 이타주의의 공식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문화적 돌연변이(cultural mutation)'에 대한 젠킨스의 이론을 더 발전시켜서 인간의 문화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젠킨스에 따르면 안장새는 울음소리를 새롭게 '발명'하는 문화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유전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화적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조류와 원숭이의 무리에서도 이런 특성들은 가끔씩 발견되곤 합니다.
물론 문화적 진화의 위력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일 것입니다. 문화는 마치 유전자가 극히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합니다. 나는 이런 문화적 진화가 유전적 진화와는 다른 종류의 진화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는 것은 진화에서 유전자가 유일한 원리라는 입장이지 다위니즘이 아닙니다.
생명체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나는 '자기 복제'로 생명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화는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들 간 생존율의 차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화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유전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바로 모방입니다. 이렇게 모방을 통해서 하나의 뇌에서 다른 뇌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존재를 유전자에 대해 유비적으로 '밈(meme)'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밈은 우리가 보통 개념, 생각, 관념, 사상, 이념, 문화의 구조, 코드, 생활양식 등으로 부르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유비 추리와 밈을 통해 생명의 논리로부터 문화의 논리를 다시 표현한 셈이지요.
밈의 전형적인 예는 신이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문화 풀에서 '돌연변이'를 통해 생겨나 수많은 뇌들로 옮겨 다니는 전형적인 밈입니다. 그것은 높은 생존율을 가집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정을 치료해 주기 때문입니다.
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밈(meme)'의 풀(pool) 속에서 생겨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그것은 불연속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이라는 밈)은 어떻게 자기를 복제하는 것일까? 무수한 글들과 말들, 소리들, 그림들이 이 밈의 생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도대체 이 밈은 왜 이렇게 높은 생존치를 보여 주는가? 내가 말하는 '생존치'란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로서의 생존치가 아니라 밈 풀 속의 밈으로서의 생존치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방금 제시한 물음은 다소 과장되게, '신이라는 관념이, 문화라는 환경 안에서 안정성과 침투력을 가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성질을 통해서인가?' 하는 질문으로 표현해 볼 수 있다. 밈 풀에서 신이라는 밈은 강력한 심리적 매력 때문에 높은 생존치를 보여 주게 되었다. 그것이 실존을 둘러싼 심오하고 고뇌 어린 여러 의문에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해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세에서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보상 받는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불완전성을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의사가 처방하는 약처럼 공상적인 사람에게는 분명 효력이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신의 관념은 사람들의 뇌에서 뇌로 건너가면서 복제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낸 환경 안에서 신(이라는 밈)은 높은 생존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유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밈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의 수명과 다산성, 복제에서의 정확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방은 밈의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하는 수단입니다. 어떤 밈은 밈 풀 속에서 다른 밈들보다 성공적일 수 있으며 이것은 자연도태와 흡사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수명과 다산성, 그리고 복제의 정확성에 달려 있지요.
밈들은 서로 경쟁합니다. 유전자들이 자연도태에서 도태되듯이 밈들도 도태됩니다. 예컨대 어떤 밈이 한 사람의 뇌리를 독차지한다면 다른 밈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밈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이나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도서관의 책장 공간 등과도 경쟁해야 합니다. 때때로 밈들은 복합체를 이룸으로써 더 잘 살아남는데 이것 또한 유전자와 유사한 특성입니다. 또 밈 자체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성공하는 유전자가 지니는 것과 같은 이기성을 가짐으로써 생존할 수 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밈은 적절히 짝을 이루는 다수의 염색체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의 유전자보다 오히려 태고의 원시 수프 속을 무질서하게 떠다니던 초기의 자기 복제자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밈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대립하는 밈이 없는데도 밈이 '이기적'이라든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컴퓨터의 연산 속도와 기억 용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대규모 계산기의 중앙에서는 이러한 성능을 기초로 요금을 매기거나 사용자에게 초 단위의 사용 기간과 '문자'의 수로 표시된 기억 용량을 각각에게 할당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이다. 이 컴퓨터에서는 아마도 시간이 저장 용량보다 중요한 제한 요인으로 설정돼 있을 것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 아래에 있는 몸이 동시에 하나 이상을 일을 담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밈이 한 뇌의 처리 요구를 독점하고 있다면 '라이벌 밈'이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신도 일종의 밈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신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현상입니다. 그러나 밈의 관점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독신자들이 어떤 일에 열중해서 나름의 밈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유포될 경우 문화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상상하는 능력과 예측하는 능력이라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존재입니다. 즉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현실성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잠재성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밈은 마치 유전자처럼 맹목적인 성질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밈의 테두리를 넘어 다시 새로운 방식의 삶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의식적인 예측 능력, 즉 상상력을 구사해 장래의 사태를 시뮬레이션해 보고 그로써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이 일으키는 최악의 이기적 폭거에서 스스로를 구출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정도의 지적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서 다행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낳은 유전자와 밈에 대항해서, 즉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과 문화적 조건에 대항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충분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씨 좋은 놈은 정말 일등이 될까? - 죄수의 딜레마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를 착안한 정치학자 액셀로드의 실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두 죄수가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두 죄수의 운명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경우란 10년 복역, 2년 복역, 6개월 복역, 그리고 풀려남입니다.
두 죄수는 서로 차단되어 있지만, 둘이 서로 협력해서 아무도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 복역하게 됩니다.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쪽은 즉시 풀어 주고 자백하지 않은 쪽은 10년을 복역하게 됩니다. 만약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다 2년 복역하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A와 B는 협력해서 상대방의 죄를 부인하고 싶지만 서로 차단되어 있기에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두 죄수 모두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둘 다 자백하지 않고 둘 다 6개월만 복역하는 길이지만, 자신이 협력해 상대방의 죄를 부인하고 싶어도 상대방이 '나'에게 죄가 있다고 증언하면 '내가' 죄를 다 뒤집어써야 하므로 죄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죄수의 딜레마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어 보면, 유사한 상황이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사회에서는 신용이나 불신을 쌓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호의를 베푼 상대방에게 보답하거나 내게 불리한 선택을 내릴 것 같은 상대방을 회유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르겠지요. 또한 우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내린 상대방을 용서할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복수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에서는 단 한 번의 선택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선택들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지요.
이처럼 길고 긴 게임에서 간파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서로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당국에게 손해를 주어 쌍방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들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길은 우리가 서로 부분적으로 상대를 신용하며 협력과 배신도 약간 섞어서 결정을 내리고, 최종적으로는 타협하는 길입니다.
이런 모델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여러 유형들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당하면 갚는다'형이라든가, '항상 배신'이라든가 하는 식의 몇 가지 행동 유형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항상 배신'형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한편 '당하면 갚는다'형은 마음씨 좋은 전략이며, 무조건 관용을 베푸는 길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배신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충분히 길게, 아마도 수천 년 정도를 기다리면 그 집단은 '당하면 갚는다'형이 우세해져 결국에는 집단 전체가 '당하면 갚는다'형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대 경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항상 배신'형은 집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으므로 고도의 안정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델을 통해 우리는 결국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는 결론은 낼 수 있으며 호혜적 이타주의의 장점을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나는 이타주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기적 유전자의 조정일 뿐이라는 생각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의 호혜적 이타주의에 대해서는 이처럼 조금 다른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호혜적 이타주의를 논할 때 우리는 우선 제로섬 게임과 비제로섬 게임을 구분해야 합니다. 제로섬 게임이란 한 선수가 이기면 자동으로 다른 선수가 지는 게임을 말하고, 비제로섬 게임이란 윈-윈(win-win) 게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부부가 이혼할 때 서로 변호사를 선임하면 어느 한 사람은 승소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패소할 것입니다. 이는 부부에게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변호사들에게는 비제로섬 게임이 될 것입니다. 물론 패소한 변호사는 그만큼 돈을 덜 받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호혜적 이타주의란 비제로섬 게임을 듀오해 내는 요령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구 리그에서는 종종 일부러 비기는 경우가 있지요. 월드컵 경기에서 가끔씩 나타나듯이 같은 조에 속한 A와 B, 두 팀이 경기하는 도중 리그의 다른 게임들의 결과라 미리 알려졌을 때 그 두팀이 비기면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이 게임은 제로섬 게임에서 갑자기 비제로섬 게임으로 변합니다. 비길 경우 양 팀이 모두 상위 리그로 올라가므로 남은 몇 분 동안 서로 사력을 다해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은 그저 공을 빙빙 돌립니다. 그런데 축구 경기에서는 이런 경우가 자주 나오면 곤란합니다. 관중들은 비제로섬 경기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제로섬 경기를 보러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축구 경기가 아니므로 많은 경우에 이런 비제로섬 경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도 살리고 남도 살리자'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화과나무와 벌레의 예를 들어 볼까요. 무화과나무에 알을 낳는 벌레가 열매에 너무 많은 알을 낳으면 무화과나무는 발육을 멈추어 벌레의 알들을 죽게 만들 것입니다. 이때 상호 호혜 관계는 깨지고 배신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자연과 문화에서 상호적 호혜주의가 성공하는 경우와 실패하는 경우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이기성과 이타성이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전자는 왜 근본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앞선 장들에서 이기적인 유전자 이론을 여러 경우에 적용해 자연 현상을 설명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전자와 개체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개체와 유전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체란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말 생존 기계'에 불과합니다. 나는 앞에서 이러한 생각을 진리처럼 다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생물의 몸은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주체인 것처럼 보이며 또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우리는 생물 개체를 자신이 지닌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최대한 성공적으로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운반자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러한 설명이 역설적이라고 느껴지나요? 이러한 역설은 개체와 유전자의 동행이란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유전자는 개체의 주행 속도를 개선함으로써 개체의 생존과 유전자 자신의 번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돌연변이 유전자가 포식자를 더 빨리 달리게 만들 수 있다면 이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포식자는 더 성공적으로 먹이를 사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유전자들이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돕지만, 이익이 상충하는 유전자들은 서로 대립합니다. 이것은 '감수 분열 구동(meiotic drive)' 이라는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깐, 감수 분열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갈까요. 감수 분열이란 세포가 분열한 후에 염색체의 수가 반으로 줄어드는 세포 분열로, 암수가 있는 생물, 즉 유성 생식을 하는 생물체가 생식 세포를 만드는 방법이랍니다. 사람의 경우 여성의 생식 세포인 난자와 남성의 생식 세포인 정자가 감수 분열을 통해서 만들어지지요. 생식 세포가 아닌 세포는 체세포라고 하는데, 역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체세포 한 개에는 염색체가 2개씩 한 쌍을 이뤄서 23쌍, 즉 46개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식 세포에는 체세포와는 달리 염색체가 '쌍'을 이루지 않고 23개만 들어 있지요.
이처럼 생식 세포에, 체세포의 절반 개수에 해당하는 염색체가 들어 있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바로 유성 생식 과정에서 생식 세포 두 개가 만나 하나의 세포를 만들기 때문이지요. 각각 체세포의 절반만큼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수정란은 당연히 일반 체세포처럼 46개(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겠지요. 이제 수정란은 분열(이땐 염색체의 수가 반감되지 않습니다.)과 분화를 거듭해서 완전한 개체가 되기에 충분한 수의 세포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감수 분열과 생식 세포|유성 생식을 하는 생물들의 세포는 크게 체세포와 생식 세포로 분류된다. 이 경우 하나의 개체는 체세포와 생식 세포를 모두 가지는데 체세포 내에서 염색체는 쌍을 이루며 존재한다. 사람의 경우 한 세포 내에 46개의 염색체를 가지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가 둘씩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23쌍의 염색체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생식 세포에서는 염색체가 쌍을 이루지 않으며 한 벌씩만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의 경우 한 개의 생식 세포 내에는 23개의 염색체가 들어 있게 된다. 이러한 생식 세포는 감수 분열이라는 세포 분열 과정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에 감수 분열을 다른 말로 생식 세포 분열이라고도 한다. 한 번의 감수 분열 과정은 총 두 단계에 걸쳐 이뤄지는데, 첫 단계에서는 쌍을 이루던 염색체가 분리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한 벌의 염색체가 두 개의 염색 분체로 갈라진다. 감수 분열 결과 생성된 생식 세포는 여성의 경우 난자(와 극체)가 되고 남성의 경우 정자가 된다. 한 벌의 염색체만을 가지던 생식 세포들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통해 다시 한 쌍을 염색체를 가진 세포가 된다.
설명이 길어졌네요. 다시 감수 분열 구동으로 돌아와 봅시다. 감수 분열 구동이란 감수 분열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돌연변이가 생기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러한 돌연변이 유전자는 실제로 발견되었는데, 분리 왜곡 인자(segregation distorter)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분리 왜곡 인자는 대립 유전자들을 희생시키고 이기성을 충분히 발휘하며 유전자 풀 내에서 거침없이 퍼져 나갑니다. 개체 자체나 체내의 다른 모든 유전자들의 번영에는 비참한 효과를 미치더라도 분리 왜곡 인자는 열심히 퍼져 나갈 것입니다.
크로는 이런 유전자를 '시스템 파괴 유전자'라 부릅니다. 이러한 유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생쥐의 t-유전자를 들 수 있습니다. t-유전자가 폭주하게 되면 개체는 죽거나 불임이 되기 때문에 개체군 전체가 절멸하게 됩니다. 이처럼 돌연변이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개체에게는 불리하고 유전자에게만 유리하겠지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가진 개체 중심의 사고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생물 개체는 로봇과 같습니다. 우리는 개체를 보다 작은 차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생명의 주체는 개체 자체가 아니라, 그보다 하위 단위인 유전자인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개체들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생물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물질들이 모여서 생물체를 구성하게 되는지 왜 묻지 않나요? 왜 태고의 복제자들은 모여서 묵직하게 작동하는 로봇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인간을 포함하여 이같은 로봇들은 왜 이처럼 크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요?
나는 우리가 보기 위해서 눈을 사용하는 것처럼, 생물 개체가 번식을 위해 DNA를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이런 견해로는 개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 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표현형이라는 개념을 개체 자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개체가 맺는 관계들에까지 확장해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표현형 효과란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스스로를 더 많이 번식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그 영향은 생물 개체의 몸 바깥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속하는 생물체 바깥 세계에까지 유전자가 표현형 효과를 미친다는 것이 확장된 표현형 개념의 핵심입니다.
유전자는 세포핵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실제로는 확장된 표현형의 논리를 통해 세계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개체란, 직접적으로 세계에서 작용할 수 없는 유전자가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고안해 낸 로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유전자는 완벽한 주체가 됩니다.
날도래 유충의 집 같은 건축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날도래 유충은 제법 그럴 듯하게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유충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유전학자가 다리 모양을 위한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바로 그런 집을 만들기 '위한'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날도래 집의 변이를 통제하는 유전자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도태는 도태의 기준이 되는 유전적인 차이를 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아마 날도래가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돌의 크기나 모양 등도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개체들의 행동과 그 행동이 함축하는 관계들이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달팽이에게 기생하는 흡충은 어떤 숨겨진 화학적 영향을 달팽이에게 끼쳐 달팽이가 스스로 '알맞은' 껍질의 두께를 변화시키도록 강요합니다. 이러한 작용은 달팽이 개체의 수명을 연장할지는 몰라도 달팽이의 유전자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결국 흡충의 유전자는 달팽이의 몸(개체)에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가 자신의 몸 바깥에까지 도달하여 외계를 조작한다고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지 손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경우 달팽이 개체는 로봇이고 흡충의 유전자는 그 로봇 안에 들어 있으면서 로봇을 조종하는 또 다른 개체의 주체가 되겠지요.
나는 숙주와 기생자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긴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숙주와 기생자는 아예 하나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쳐진 역사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유전자들이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유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그것들이 미래로의 출구(난자나 정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난자나 정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번식 방법이 고안된다면 유전자들은 다른 루트로 자기 복제를 꾀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자유로이 떠다니는 DNA 절편들(바이로이드 또는 플라스미드)을 통해 DNA 반란 분자들이 번성하면 개체들이 더 이상 자기 DNA만 운반하지 않고 '남의' DNA를 운반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이로이드(viroid)|바이로이드란 여러 겹으로 접혀서 선 모양이나 원 모양을 띠고 있는 짧은 RNA 조각을 일컫는 말이다. 바이로이드는 바이러스보다 훨씬 작으며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세포를 감염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이로이드는 매우 빡빡하게 접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성질 때문에 감염 대상 세포가 뿜어내는 효소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플라스미드(plasmid)|플라스미드란 박테리아가 가지고 있는 여분의 DNA로, 나선형인 일반적인 DNA와는 달리 원형이다. 플라스미드에는 매우 적은 수의 유전자만이 들어 있다. 플라스미드는 박테리아 세포가 분열할 때 박테리아 내에 함께 존재하는 다른 염색체들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복제된다. 유전 공학에서는 유전자를 재조합할 때 플라스미드의 원래 유전자들을 빼내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전자를 대신 삽입하여, 플라스미드를 유전자 운반체로써 사용한다.
앞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유전자가 꼭 특정한 개체에 갇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전자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작용할 수 있지요. 결국 동물의 행동은 그것들의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 그 행동을 지시하는 유전자의 생존율을 최대로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 를 구분해야 합니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개체는 그 운반자입니다. 개체는 결코 자기 복제자가 아닙니다.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인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개체도 자기 복제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네요. 유전자가 복제를 통해 이전의 개체와 유사한 개체를 만들어 낸다면 결국 그 개체가 자기를 복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아무튼 일단은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하고 개체는 그것을 운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유전자와 개체는 다윈의 드라마에서 같은 주역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양자는 서로 다른 배역을 맡고 있으며 많은 점에서 똑같이 중요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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