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하나 더 읽었다. 이전 글에서 주저리 주저리 썼다 싶이 yes24 북클럽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전자책으로 읽었다.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 건 고등학생 때 판타지 소설 읽은 이후 처음인데 난 엄청 좋았다. 전자책만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찾는 책 대부분이 없었다는 건 아쉬웠지만,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볼 수 있어서 짱 좋았다 아무튼 이번에도 메모하고 싶은 문장이 잔뜩 있어서 블로그에 기록해둘 거다. 알랭 드 보통과 리처드 도킨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다.
이 책은 ‘섹스’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사색을 펼쳐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제 이 책의 우선적인 과제가 확실해진 듯하다. 더 격정적으로, 혹은 더 자주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요령은, 아쉽게도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성욕이 지나친 문제, 혹은 섹스를 회피하는 문제 때문에 스스로를 비정상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섹스에 관해 우리가 어떤 식의 거북함을 느끼건 간에, 그 거북함을 배가시키는 관념 중에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자유의 시대이며, 그러므로 ‘이제는 개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의문이다. 인류가 성적 억압의 족쇄로부터 풀려나 지금과 같은 자유에 이른 과정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따른다.
전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은 섹스에 관해 쓸데없는 당혹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그러한 감정들은 종교적 편견과 현학적 사회관습의 사악한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가령 자위를 하면 손이 떨어져 나가지나 않을까 벌벌 떨었고, 누군가의 발목에 음흉한 시선을 보내기라도 하면 불붙은 기름통에 던져지는 줄 알았다. 발기라든가 클리토리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어리석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 사이의 어느 무렵부터 상황이 차츰 개선되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비키니를 입게 되었고, 자위행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또 ‘쿤닐링구스cunnilingus’ 같은 말을 입 밖에 꺼내도 될 만큼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포르노 영화도 보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까지는 대다수의 인류사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신경증적 욕구좌절의 근원이었던 섹스가, 이제는 아주 편안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성관계 자체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섹스를 하려고 할 때 큰 혼란과 죄책감을 느꼈다면,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오히려 기대감과 자신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섹스가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고 신체적으로도 활력을 주는 유익한 유희로서, 이를테면 테니스와 비슷한 정도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삶에서 유발되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누구나 가능한 한 자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계몽과 진보의 스토리는, 어쩌면 논리력과 쾌락주의적 감성에 대한 일종의 ‘아부’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변천사는 부동의 사실 한 가지를 홀가분히 외면하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섹스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섹스로 인해 그토록 혼란스러워 했던 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종교적 억압이라든가 사회적 규율들, 금기들이 ‘본능’을 억누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으니 당연히 그랬을 수밖에. 어쨌거나 그 ‘본능’이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으로 사라지길 바란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과거에 우리가 섹스 때문에 괴로워했던 이유는, 섹스가 본질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저항하기 힘들고, 이성을 잃게 하는 ‘충동’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섹스는 대체로 우리의 야심이나 성취욕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으며, 문명사회에 속한 다른 것들과 온건하게 통합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성적 기벽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섹스는 결코 기대만큼 단순해지거나, 유쾌해지지 않는다. 섹스는 근본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친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잔학성이라든가, 위반, 정복하고 모욕을 주려는 욕망 같은 것들과 관련이 깊다.
섹스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랑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길 거부한다. 아무리 길들이려고 애써도 평생토록 자꾸자꾸 말썽을 일으키곤 한다.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거나, 생산성 향상에 지장을 주기도 하고, 야한 옷차림의 이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에서 노닥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비록 그 이성의 옷차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을 비벼보고 싶을 정도로 섹시하다면 말이다.
또한 섹스는 때때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나 가치관에 모순되며, 심한 경우 서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정면충돌을 하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개의 경우에 우리는 성욕을 억제하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성적 충동에 좀 더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보다는, 섹스가 본래부터 다소 이상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섹스에 대해 좀 더 현명해지기를 기대한다는 게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섹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난관들을 완벽하게 이겨내길 기대할 수 없을 뿐이다. 제멋대로이고 무분별한 그 열정을 정중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다.
고대 인도의 힌두 성전 《카마수트라》부터 오늘날의 《섹스의 즐거움The Joy of Sex》까지, 동서고금의 여러 성 지침서는 하나같이 육체적인 영역에서의 성행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부좌 체위에 통달하거나, 얼음조각을 창의적으로 활용하거나, 두 사람이 동시에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섹스 기교라고 증명된 것을 응용해본다거나 등등, 이처럼 더 나은 섹스를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때때로 그런 지침서들에 신경이 바짝 곤두설 때가 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어쩌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치밀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야기들과 유용한 삽화들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책들에서 우리는 종종 모욕감을 느낄까? 그런 지침서들은, 우리가 항문 마스터베이션을 시도해본 적이 없거나 카레짜Karezza를 터득하지 못한 탓에 그렇게 섹스에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성생활의 짜릿한 측면만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줄 뿐,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다소 지루한) 난관들은 무시하고 있다.
대다수가 위로받고 싶어 하는 진짜 걱정거리는 따로 있다. 재스민향이 풍기고 벌새들의 노래가 흐르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새로운 체위를 시도하며 몇 시간씩 소파에서 함께 뒹굴고 싶어 안달하는 연인과 어떻게 하면 훨씬 더 즐거운 섹스를 나누는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육아와 금전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부부가 잠자리에서도 틀어져버려 서로 말도 못하고 애를 태운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인터넷 ‘야동’에 중독된 게 아닌가 싶어 괴롭다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성욕이 치솟는다거나, 직장 동료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배우자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 등이 진짜 걱정거리다.
성문제에 관한 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론이 하나 있다. 진화생물학에서 뻗어 나온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성욕과 섹스에 대해 설명할 때 다른 무엇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 이론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종족을 번식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리고 섹스의 쾌감은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쏟아붓는 뼈 빠지는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종족을 발전시킬 특정 요소의 상징에 불과하다. 가령 어떤 사람의 지성에 마음이 끌린다면 후손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그것이 중요한 자질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보고 좋아하는 것도, 그의 활력과 에너지가 다음 세대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암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화생물학적 주장을 전적으로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실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성경험과 단절되어 있는 데다, 그다지 예리하지 못하고 재미있지도 않다. 진화생물학은 섹스의 존재 이유는 잘 설명하고 있지만,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에 대한 전반적 동기는 설명해줄 수 있지만, 왜 누군가를 저녁식사 시간에 집으로 초대해서 어찌어찌하다가 소파에서 서로 청바지의 단추를 풀게 되는지, 그 사이에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은 전혀 풀어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우리 인간에게 섹스가 정말로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그럴듯한 해명을 내놓지도 못한다.
첫 키스의 순간은 상대적으로 낯설었던 사람을 친밀한 이성으로 바꾸어놓는 결정적인 계기다. 또한 첫 키스는 곧 '외로움의 극복'을 상징하는 일대사건인 만큼 짜릿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짜릿한 쾌감은 순전히 신경말단의 자극과 생물학적 충동의 충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짧은 찰나일지라도, 차가운 익명의 세상에서 우리를 둘러싸던 고독으로부터 벗어난 기쁨 때문이다.
이 고독은 유년기가 끝난 이후부터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운이 좋은 경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첫 출발을 한다. 헌신적인 어머니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어머니의 살을 파고들며 심장박동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는 우리가 침으로 방울을 만드는 일에도, 다시 말해 우리가 단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숟가락으로 식탁을 탕탕 두드려대기만 해도 어머니는 깔깔 웃음을 터뜨려준다. 또 어머니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손가락을 간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코를 가까이 갖다 대 냄새를 맡고, 뽀뽀도 쪽쪽 해준다. 그 시절의 우리는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가 옆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세심하게 챙겨주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 가슴을 대주니까.
그러다 차츰 변화가 닥친다. 이제 더 이상은 젖꼭지를 물지 못하게 되고, 대신 섭섭하게도 밥과 익힌 채소, 텁텁한 닭고기 같은 것을 먹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이제 더 이상 남을 기쁘게 해주지도 않거니와, 함부로 내보여서도 안 된다. 신체의 특정한 부위에 대한 부끄러움도 생겨나, 신체 중에 끝없이 성장하는 영역들은 남들이 만지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알게 된다. 처음에는 성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배, 목덜미, 귀, 겨드랑이까지 점점 늘다가 나중엔 이따금씩 누군가를 안아주거나 악수를 하거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주고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위의 신체접촉을 꺼리게 된다.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점차 우리의 존재 자체에 흐뭇해하는 마음이 시들해지고 우리가 뭔가를 잘해야 열광해준다. 이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셈이다. 예전의 선생님들은 뭘 그린 건지 알아보기도 힘든 무당벌레 그림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겨놓은 만국기 그림을 보고도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줬지만, 이제는 시험성적이 잘 나와야만 칭찬해준다.
그뿐인가? 주위 사람들에게 모진 조언도 듣게 된다. 물론 그 사람들 딴에는 우리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겠지만, 스스로 돈을 벌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며, 우리가 경제적인 자립을 얼마나 잘해내느냐에 따라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입 밖으로 꺼내는 말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도 신경 써야 한다. 우리의 겉모습 중에 남들에게 반감을 사거나 겁을 먹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면 감춰야 하고, 옷과 헤어스타일에 돈을 써가며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부족하고 어설픈 존재, 부끄러움과 불안감을 가득 담고 있는 존재로 성장해간다. 어른이 되면서 천국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자아는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원초적인 욕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뭔가를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몸을 매개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 자신의 살 냄새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다. 이 모든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인해 이상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싱크대 옆에서 또 한 번 키스를 나눈다. 단둘이 되자 대범해진 남자가 여자의 베이지색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여자도 남자의 푸른색 와이셔츠 단추를 끄른다. 두 사람의 몸짓이 점점 조급해진다. 남자가 여자의 등 뒤로 팔을 감으며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려고 하지만 잘 안 되어서 애를 먹는다. 여자는 서툰 남자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등 뒤로 돌려 남자를 도와준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알몸을 보게 되고 서로의 허벅지, 엉덩이, 어깨, 배, 젖꼭지를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한다.
창세기를 보면, 조물주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큰 벌을 내렸는데, 그 벌 가운데 하나가 육체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 여호와는 두 사람을 괘씸하게 여겨 영원히 벌거벗은 몸을 창피해하며 사는 운명을 주었다. 이런 식의 성서적 기원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은 단지 비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맨살을 내보였다가 남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어쩌면 후자가 더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몸이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생 중에 외모가 가장 매력적이고, 건강의 절정을 누리는 젊은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몸에서 바꾸고 싶은 점들을 줄줄이 늘어 놓는다. 하지만 이런 불만은, ‘외모적 혐오’보다는 ‘존재적 혐오’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 큰 성인이 어떤 식으로든 알몸을(말하자면, 섹스를 열망하고 섹스를 할 수 있는 몸을) 보이게 되면, 보는 사람으로서는 근본적으로 어쩐지 당혹스러운 측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수치심은 사춘기부터 생겨난다. 몸이 성숙해져서 육체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게 되면, 아무한테나 함부로 몸을 노출시켰다간 음탕한 사람으로 취급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된다. 사람들 앞에 보이는 평범한 모습의 자아와, 성욕을 품고 있는 내밀한 모습의 자아로 분열되는 것이다. 성적 판타지에서부터 다리 사이의 그곳에 이르기까지, 성인이 되면서 갖게 되는 본성과 관련된 것 대부분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좀처럼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남들의 눈에 좋게 비칠 모범적인 모습과 비교해보면 남자의 욕망은 스스로도 용납하기 힘들었다. 시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싶어 하거나, 심지어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까지는 묵인되었다. 하지만 남자가 날마다 상상 속에서 펼치는 탈선과 비행은 그런 순진한 행위들과 비교하면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런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준이 더욱 심각해졌다. 남자는 난교파티와 항문섹스를 상상하는가 하면, 눈에 불을 켜고 포르노 영화를 구해 봤고, 수학 선생님과 성관계를 하는 음탕한 공상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으로 지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자의 수치심이 남자의 내면에 누구에게도 절대 소개시켜주기 두려운 자아를 키워냈기 때문이다.
지금 남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여자도 비슷한 경험을 치렀다. 열세 살 때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뜨개질과 승마를 즐기고, 엄마와 바나나빵 만들기를 좋아했던 여자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단 한 가지 오락거리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욕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누워 바지를 내리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자위를 하는 것. 여자는 생각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이러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내 이런 모습까지 다 용납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르가슴에 달한 후에 기운이 빠지고 죄책감에 휩싸인 여자는, 신에게 벌을 받은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날 때 느꼈을 법한 고통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따라서 지금 침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각자가 내밀하게 간직해온 성적 자아들이 마침내 죄스러운 고독에서 벗어나,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위인 셈이다.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한다. 각자의 신체형상과 육체적 열망이 놀랍도록 별나더라도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그리고 한때 너무나도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수치심 없이 받아들이기로.
두 사람은 애무를 통해, 별나긴 하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순순히 나아간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문명세계로부터 기대되는 행동과는 뚜렷하게 대립된다. 가령 할머니 세대의 사람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애무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망측하거나 괴상한 짓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마침내 커플은 몸이 바라는 여러 가지 놀랍고도 미친 듯한 일들에 자신들을 온전히 내맡기게 된다.
커플은 이제 침대에 누워 서로를 더 격정적으로 애무한다. 이윽고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살며시 올라타며 여자의 다리 사이로 삽입을 한다. 남자는 여자가 축축이 젖어 있는 것에 격한 환희를 느낀다. 바로 그 순간, 남자에게 팔을 두르고 있던 여자도 남자의 딱딱해진 페니스에 똑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와 같은 생리적 반응들에 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 다시 말해 만족스러운 동시에 아주 에로틱하기도 한 이유는 뭘까? 그러한 생리적 반응들은 논리나 이성의 조종능력이 손톱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승낙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발기와 애액은 의지력과는 전혀 무관하며, 따라서 흥미의 지침으로서 그 무엇보다 진실하고 솔직한 신호다. 거짓 열정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를 진짜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의무감 때문에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런 세상 속에서, 애액으로 젖은 질과 뻣뻣하게 선 페니스는 진심을 모호하지 않게, 아주 확실히 전해주는 매개물인 셈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반응들이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우리의 커플은 사랑을 나눈 후에 아까 카페에서 특정한 신체적인 반응이 없었는지 서로를 떠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이다.
남자가 조금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슬쩍 묻는다. 언니와 바르셀로나에 여행 갔던 얘기를 하는 동안 거기가 축축하게 젖지 않았느냐고.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랬다고 대답한다. 정말로 카페에 있던 내내, 심지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던 순간에도 그랬다고. 그 말에 남자도 실토한다. 자기도 바지 안에서 페니스가 뻣뻣해져 있었다고. 카페에서 두 사람은 겉으로는 분별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마음속으로는 서로 다음 단계의 흥분으로 나아갔다. 표면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앞질러 몸은 이미 격정적으로 욕망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섹스가 우리의 이성적 자아를 압도하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 꿈꿔온 성적 판타지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제복에 대한 성적 판타지는, 제복이 상징하는 이성의 통제, 그리고 잠시 동안 환상 속에서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억제되지 않는 성욕 사이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의사나 간호사부터 투자상담사나 세무사에 이르기까지)은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곳이 젖거나 딱딱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에게 별 관심도 없거니와, 우리를 위해 일부러 진료를 중단하거나 회의를 취소할 만큼 신경을 써줄 턱도 없다. 이런 사무적인 무관심 앞에서 우리는 간혹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모욕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환상이라는 특별한 힘에 기대면, 일상을 뒤집고 삶의 우선 순위를 바꿀 수 있다. 환상 속의 섹스 게임을 통해 대본을 다시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간호사가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몸이 달아 자기가 혈액샘플을 채취하러 온 것도 잊어버린다거나, 투자상담사가 이번만은 돈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며 책상 위의 서류들과 컴퓨터를 밀어내고는 다짜고짜 키스를 하며 달려든다는 둥, 얼마든지 대본을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상상 속의 병원 화장실이나 회계사 사무실 벽장 바닥에서 격정적인 섹스를 하는 사이에, 적어도 상징적으로나마 친밀감이 지위나 격식, 책임감을 이긴다.
현실에는 격식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 많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격식들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뜻밖의 성적 판타지를 싹틔울 여지를 허락한다. 규칙을 깨는 연상작용에 의해 제복이 성욕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잘 안 띄는 도서관 구석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화장실, 또는 열차의 객실 안에서 섹스하는 상상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고도 1만 600미터 상공의 기내는 사무실처럼 숨 막히는 공간이지만, 그런 성냥갑 같은 곳에서 위계가 아니라 친밀감이 승리했으므로, 그 승리는 더 달콤하고 그만큼 쾌감도 더 짜릿하다. 이와 같은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의 시나리오에 대해 흔히 ‘섹시하다’고들 말하지만, 그 표현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비행기 안에서 느낀 위압적인 소외감을 극복한 것에 대한 흥분이다.
성적 판타지나 동경은 격식과 친밀감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 관습에 대해 각성해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새로운 누군가와 첫날밤을 보낸 기억은 그런 대조가 가장 생생할 때 호소력이 있다. 또한, 슬픈 얘기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누드 해변에서는 성적 자극이 떨어진다. 미친듯이 좋아할 때는 언제고, 그새 배은망덕하게 식상해져버릴 위험이 다분한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알몸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보통은 공격성, 무분별함, 탐욕, 경멸 등 우리의 내면에 도사린, 의심의 여지없이 ‘악한’ 본성을 꾹 참고 억누르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관심이나 애정을 얻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거리낌 없이 모조리 드러내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런 까닭에 섹스를 통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내 보이고 또 인정받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성적 흥분(정확히 말하면 감정적 만족)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선량한 본성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누군가와 있을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창피해서 보여줄 수 없는 모습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욕하기 딱 좋을 듯한 말이나 몸짓도 과감히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가령 침대에서 파트너의 뺨을 세게 때리거나, 두 손으로 목을 살짝 조르는 것을 애정표현으로 여기는 일면까지 내보일 수 있다. 그러면 파트너는 그에 대해 확실한 의사표시를 해준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선량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에게 어두운 일면들이 있다는 것이 파트너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상적인 부모가 그러하듯, 우리의 전체적인 모습을 균형 있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선하다는 것을 알아봐준다. 그리고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관대한 연인으로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을 말하거나 행동하도록 유인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각별한 기회를 선물로 받는다.
한편, 이런 식의 과격함과 무례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어떨까? 그렇더라도 상대에 못지않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무례함, 상처, 굴욕을 어느 정도, 혹은 어떤 수준으로 당할 것인지를 스스로가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칼자루를 쥔 것과 같은 우쭐한 감정까지도 누릴 수 있다.
살다 보면 일상에서 남들에게 냉대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상사의 악의적인 결정을 억지로 따라야 할 때도 숱하게 많다. 그런데 무례함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통해 힘의 역학을 드라마틱하게 바꿔본다면 어떻게 될까?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설계한 환경에서, 그것도 마침 본질적으로 착하고 선량한 누군가의 앞에서,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복종시킴으로써 진정한 해방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따귀를 맞고 모욕을 당함으로써 자신이 나약하다는 생각을 떨치게 되며,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무례함에 맞섬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견뎌냄으로써, 자신이 강인한 사람이 된 듯한 뿌듯함도 누리게 된다.
연인 사이의 충성스러운 애착은, 무례함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거대하고 비판적인 사회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 무례함이 더 놀랍고 경악스럽게 여겨질수록, 연인들끼리는 두 사람만이 승인한 낙원을 짓는 듯한 기분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무례함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의 프레임을 통해 들여다봐야만, 따귀를 맞고, 숨이 반쯤 넘어가도록 목이 졸리고, 침대에 묶여 강간당하다시피 다루어지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승낙의 증거라는 사실이 차츰 이해된다.
여자의 로퍼에는 남자가 데이트 파트너에게서 찾고 싶어 하는 특징이 모두 응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길이가 정확히 22센티미터인 갸름하게 잘 빠진 가죽 구두 한 켤레를 통해 남자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발견한 것이다. 분별력, 자제심, 단정함, 겸손함, 그리고 자신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차분함과 어느 정도의 수줍음을 갖춘 여성상 말이다. 남자는 그 구두의 주인과 사랑을 나눌 수도 있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예를 들어, 여자가 출장을 떠나고 남자 혼자 여자의 집을 봐주게 된다면) 남자는 그 구두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다.
다시 고무 밴드 얘기로 돌아가보자. 남자가 고무 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손목에 차고 있는 고무 밴드가 발랄하고 격의 없으며 중성적이고 힘차 보이기 때문이다. 손목에 그런 고무 밴드를 찬 사람이라면, 최신 유행 스타일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남들이 시시하게 여기는 낡고 소박한 것에도 깊은 관심을 보일 만큼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을 것 같다. 이번에도 남자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해방시켜주는 무언가에 성적 흥분을 느낀 셈이다. 남자의 어머니는 명품 숍에서 산 보석만 하고 다녔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남자의 아버지가 아닌 불륜 관계의 남자들이 사준 것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만찬 자리에서 벌인, 사랑에 대한 유명한 토론이 나온다. 의도치 않게 불쑥 나온 말인 듯싶긴하지만, 어쨌든 그 토론에서도 페티시에 대한 흥미롭고도 돌발적인 설명이 나온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자신의 대변자로 삼고 훗날 ‘사랑의 사다리Ladder of Love’라고 일컬어지는 이론을 설파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시각을 통해 마음이 끌리는 것은(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단순한 시각의 차원이나 물질의 차원을 넘어서, 플라톤이 말하는 이른바 ‘선Good’이라는 더 폭넓고 긍정적인 범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이제까지 언급한 우리의 커플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며 즐기는 오르가슴은 단순히 육체적인 감각만은 아니다. 단지 종의 번식을 명하는 생물학적 명령에 따라 두 성기가 서로 마찰하고 누름으로써 일어나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섹스를 통해 얻는 쾌감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행복한 삶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확실히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적 흥분이란,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느끼게 되는 흥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자신에게 ‘섹시하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주의 깊게 분석할수록 더 확실하게 이해된다.
오르가슴 자체는 고독과 소외가 극복되는 짧은 순간에 최고조에 이른다. 연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든, 그러니까 그것이 연인의 말이든, 연인이 신고 있는 신발이든, 연인의 눈이나 눈썹에서 풍기는 분위기이든 간에, 모두 다 쾌감의 정수distillation 속에 함께 녹아들면서 상대에게 마음이 사르르 녹아 퐁당 빠져버리는 것이다. 매번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새롭게.
물론, 상대방과 함께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방법으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섹스의 진정한 목적을 배반하는 셈이다.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자위를 한 뒤에 대개 공허하고 외로운 느낌이 뒤따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아주 극단적인 사례라면 수간, 강간, 아동 성폭행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격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같이 한 쪽이 상대에게 취하는 쾌감에서 상호성이 지독히 결여되어 있으므로, 격분할 수밖에 없다.
섹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다른 것들에 비해 비교적 덜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아주아주 길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조차 가톨릭 미사시간과 얼추 비슷한 2시간 정도로, 이 정도면 꽤 길게 하는 편이고 그나마도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문 편이다.
한편, 관계가 끝난 후에는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다.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 곯아떨어지거나, 신문을 읽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쉽다.
대체로 이럴 때 문제는 섹스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측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섹스는 곧잘 우리가 처해 있는 난관들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부각시켜 놓는다. 게다가 성욕이 수그러들고 나면, 방금 전까지 황홀해했던 자신이 어쩔 줄 모를 만큼 부끄럽고 낯설어진다. 그와 동시에 평상시 자신의 모습이나 일상적인 관심사와 단절된 듯해서 매우 당혹스럽다. 가령 평상시처럼 점잖아지려고, 혹은 고상해지려고 애써보지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연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도 내가 정말 그랬나 싶을 정도다. 대체로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방금 전까지는 지하감옥에 처녀를 가둬놓은 중세시대의 사디스트 귀족이 되고 싶은 욕망을 행동으로 옮겼을 수도 있고 말이다.
우리의 시대적인 분위기는 우리가 성행위 중에 갖게 되는 통상적인 모습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부추긴다. 섹스는 단순히 육체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측면을 간과한 얘기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 열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행위는 서로의 성기를 마찰시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흥분은 천박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엑스터시ecstasy다. 그 특별한 누군가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줌은 물론이요, 공통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삶을 나누는 것까지도 함께 꿈꿀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라는 게 고작 이것뿐인가? 이와 같은 진화생물학적 설명은 결론이 좀 허탈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성적 관심을 단 하나의 기준, 그러니까 ‘얼마나 건강한가(얼마나 건강한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만 국한시키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기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얘기는아니다. 다만 아주 원만하게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필요조건이 있고, 그런 점을 감안할 때 배우자가 될 사람의 외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은 단순히 그 사람의 신체적 건강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연관성을 가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이와 같은 과학적 궁지를 풀어줄 기막힌 명언을 남겼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이 정의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는 것은, 단순히 건강함의 차원을 넘어서서, 얼굴을 통해 그 사람과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데 유익할 만한 내면적 특징을 직관적으로 탐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사람의 용모에서 결단력, 지성, 신뢰성, 겸손함, 다소 독설적인 유머감각 같은 덕목을 눈치 챌 수 있을지 모른다. 솔직히 우리가 잠재의식을 통해 코의 모양을 보고 질병에 대한 강한 저항력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입술 모양에서 끈기에 대한 암시를 알아채거나, 눈썹의 모양에서 삶의 불합리에 대해 웃어넘기는 카타르시스적 성향을 발견해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섹시함’을 느끼는 심리는 옷, 특히 여성들의 최신 유행 패션과도 확연한 연관성이 있다. 다시 한 번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돌아가보자.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 발표회를 열대 조류들의 짝짓기 구애 쇼와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열대 조류들의 경우, 깃털의 상태는 흡혈기생충의 존재 유무를 암시하기 때문에 짝이 될지 모를 상대에게 깃털로 건강에 대한 메시지를 단박에 전해준다. 패션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멀리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지만, 어쨌거나 패션도 더러 생물학적 건강상태를 부각시켜주는 특정 신호에 초점을 맞추게 해준다. 특히 다리, 엉덩이, 가슴, 어깨를 강조하거나 과장하는 패션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패션의 역할을 단지 건강상태에 대한 신호를 전달해주는 것으로만 한정해버린다면, 패션이란 것이 다소 시시해지고 말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도나 카란Donna Karan, 셀린느Celine, 마르니, 막스 마라Max Mara, 미우 미우Miu Miu 같은 유명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의 의상들도 다 그 옷이 그 옷처럼 별로 흥미롭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건강상태를 부각시켜 보여주는 것이 패션의 임무 중 한 가지가 될 수도 있겠지만, 패션은 예술의 한 형태로서 좀 더 야심찬 임무도 맡고 있다. 여자들에게 다양한 의상을 제공해줌으로써, 흥미나 호감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지원해준다는 것이다. 무한한 변신이 가능하다는 패션의 특성을 통해, 의상은 그 혹은 그녀 나름의 가치관, 윤리관, 심리적 성향 등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상이 주는 메시지에 대해 호감을 느끼느냐 거부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아름답다’거나 ‘보기 싫다’고 판단한다. 어떤 옷차림을 ‘섹시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건강한 자손을 많이 낳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옷이 대변하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에 흥미가 끌린다고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정 시즌에 어느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보면서 그 컬렉션이 어떤 가치를 생각해보도록 유도하는지 음미해볼 수도 있다. 예를들어, 디올Dior의 컬렉션을 보고 장인匠人, 산업화 이전의 사회, 여성스러움 같은 요소의 중요성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또한 도나 카란이 자립정신, 전문가로서의 능력, 도시생활의 흥분에 대한 욕구를 자극해줄 수도 있고, 마르니가 기발함, 의도된 미숙함, 좌파 성향의 정치의식 등의 당위성을 일깨워줄지도 모른다. 이처럼 패션은 시대의 미적 가치관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거나 ‘섹시하다’고 느끼는 특성들은, 우리 스스로의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절실히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해준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희망의 승리다. 섹스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까지 우리는 섹스가 주는 여러 가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군중 속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첫 키스, 내밀하게 간직해온 성적 자아를 드디어 파트너와 공유하는 순간, 인간 본성의 바람직한 측면을 부각시켜주는 페티시와 성적 판타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또한 우리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게 성적으로 매료당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섹시함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우리 시대의 남녀들 중에는 이들과 비슷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엄청 많다. 그들이 좀 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첫째, 두 사람 중 누구에게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섹스보다 사랑을 더 원한다고 해서(혹은 섹스를 배제한 사랑 을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훌륭하거나 더 나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주면 된다. 각자의 감정과 욕망으로 엮어내는 레퍼토리 속에서, 두 사람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은 도덕적인 잣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단하려고 하면 안 된다.
둘째, 한 사회집단으로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남들의 시선이나 도덕적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바람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원하는 성관계를 갖기 위해 사랑에 빠진 척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거짓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도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랜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실상 잘 모르는 사람과 모텔에서 아무 조건 없이 관계를 갖는 무모한 모험에 자신을 맡기는 것뿐이라면, 다음 날 아침에 버림받은 상처로 마음 아파할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이제는 섹스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이 평등한 지위를 갖고, 도덕적 허식을 걷어치울 때다. 사랑과 섹스는 누구나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욕망이며, 동등한 가치와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랑이든 섹스든, 상대 이성에게 그 욕망을 갈구하기 위해 억지로 거짓을 꾸미는 일은 없어야 한다.
거절의 이유는
훨씬 더 단순하고 덜 우울하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남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외모(즉, 겉으로 드러난 성적 매력)는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평가의 신호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제는 그런 낙담과 좌절감을 훌훌 털고, 무너진 정신과 자존감을 추슬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태의 맥락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성으로서 거절당하더라도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안된다. 상대방이 우리의 영혼까지 들여다보고 우리의 모든 면에 대해 혐오스러워한다고 여기지는 말라는 얘기다.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런 못난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덜 우울하다. 거절의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는 단지 우리의 몸에 흥분을 느끼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런 거절은 이성의 힘이 닿지 않는 무의식과 억압된 잠재의식에 따른 판단이므로 이성적으로(혹은 의지력을 발휘해서) 바꿀 수 없다. 이런 점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으면 된다.
거절하는 사람은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달리 어쩔 수 없어서 거절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흥분을 느낄 것인지는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맛의 아이스크림, 혹은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좋아할지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는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반대의 경우 말이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나를 좋아해주었으며, 당시에 나는 만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욕망을 품어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내 마음에 흥분을 일으키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라는 말이다. 그때 당신은 어떠한 기분이었는가? 그 사람들과 안타깝게 어긋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들과 자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성적 영역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은 그것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을 뿐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너무 확고했으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No는 그냥 No일 뿐이다
이성에게 거절당할 때 생기는 고통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곳엔 그 거절을 ‘도덕적 판단’으로 해석해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우연’에 불과할 수 있는 일(거절당한 일)을 두고 괜한 고문을 하는 셈이다. 이런 자기 고문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잘 풀리지 않았던 그 밤의 일을 사소한 불운의 하나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날씨의 역사를 살펴보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을 수 있다. 거의 모든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폭우를 하늘이 내리는 천벌로 받아들였다. 폭우가 쏟아지면 농작물이 망가지고 주거지가 침수되므로, 신이 노하여 인간을 벌하는 계시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다 기상학의 발달 덕택에 인류는 그런 터무니없고 악의에 찬 미신으로부터 점차 벗어났다. 알다시피,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우는 우리 탓이 아니다. 해양 상공이나 산악지대 너머의 대기 상태가 임의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그 혹은 그녀에게 거절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불운 때문에 연애의 들판에 홍수가 나고, 불어난 흙탕물에 사랑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성냥개비처럼 휩쓸려 가버린 것이다. 폭우를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봐야 불운에 망상증까지 더해지는 결과 밖에는 안 된다.
날씨를 통해 배운 것처럼, ‘오늘은 그냥 일찍 자고 싶다’고 말하는 연인도(역시 매우 달콤한 목소리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현대 과학과 정신분석학이 확실히 밝혀냈다시피, 우리의 의식이나 이성이 발언권을 갖기 훨씬 전부터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숨겨진 힘들이 있었다.
고통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믿기 힘들겠지만, ‘No’가 그냥 ‘No’일 뿐일 때도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오랜 연인이나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는 상대방과 성관계를 가지려고 시도할 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오해와 걱정거리 따위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섹스가 언제나 가능하며 합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쪽만 원하는 성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어떠한 경우든 성생활이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평생 성관계가 보장된다는 고무적인 가능성의 이면에는 반대로 어두운 측면도 있다. 상대방에게 잠자리를 거부당할 때 그 충격과 당혹감은 다른 어떤 관계에서 거부당하는 경우보다 근본적으로 더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바bar에서 방금 만난 상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해봐야 그렇게 크게 당혹스럽거나 마음 아프지는 않다. 그런 퇴짜는 어떻게든 씁쓸함을 털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 성관계를 거부당하면 훨씬 더 묘하게 치욕스럽다.
창녀와 나쁜 남자의
공통점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소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장 순수한 관점에서 볼 때, 일상과 성애의 영역 사이를 원만하게 이동하지 못해 애를 먹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할 때 요구되는 자질은, 대다수의 일상적인 활동들을 행할 때 필요한 자질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결혼 직후부터는 아니더라도 수년 내에)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 관리하기,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자제하기, 말 안 듣는 자녀들에게 권위를 세우고 규율을 부과하기 등등, 가끔은 작은 기업체라도 운영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관료적이고 절차적인 기술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섹스는 정반대의 덕목들, 즉 자유로움, 상상력, 유희, 통제력 상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통제와 자기억제를 특징으로 하는 일상생활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일단 욕망이 자연스레 발산되고 나면 야무지게 살림을 꾸린다거나 아이를 키우는 등의 가정생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당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다시 그런 임무를 재개할 생각이 들지 않을 우려가 있다.
우리가 섹스를 회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섹스가 주는 쾌락이, 그 이후에 부과될 가정생활과 일상의 까다로운 요구들을 견뎌낼 인내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비유가 적당할 것 같다. 등반가가 산에 오르기 직전에, 혹은 마라토너가 마라톤을 시작하기 직전에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나 테니슨Alfred Tennyson 같은 시인들의 위대한 시를 읊조리며 그 최면적인 서정미에 빠져들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 말이다. 섹스를 거부하는 정서 상태도 그와 비슷하다.
한편, 섹스는 가계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거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면도 가지고 있다. 섹스를 시작하려면 더러 한쪽 파트너가 치욕스럽게 보일 만한 성적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약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일들을 논의하다가(가령, 세탁기를 어떤 것으로 바꿀지, 내년 휴가는 어디로 떠날지 등을 상의하다가), 다소 색다르고 난해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배우자에게 순종적인 간호사 역할을 해달라거나, 가죽부츠를 신고 욕을 해달라고 하는 등의 요구 말이다. 이런 것들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굉장히 어이없고 경멸받아 마땅한 요구들이다. 그래서 섹스를 제외하고 번듯한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누군가에게는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요구들은 어쩔 수 없이 배우자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헌신적인 관계’야말로 자신의 성적인 측면까지도 솔직하게 내보이기에 이상적인 관계일 것이라고 대체로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다. 200명의 하객들 앞에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사람에게라면 다소 파격적인 욕구를 내보이더라도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독한 오해다. 침대 위에서 고무 마스크를 뒤집어쓴다든지 악한이나 근친상간자 행세를 하며 관계를 가질 상대라면, 앞으로 30년간 아침마다 밥을 함께 먹을 필요가 없는, 즉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더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궁금해했을 법한 오래된 질문 하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저 하룻밤 즐길 사람을 따로 두고 싶어 하는 욕망은, 과연 남성들만 가진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여성들도 결코 결백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자들이 여성을 성모 마리아(사랑하는 사람)와 창녀(하룻밤 즐길 사람)로 나누는 것은, 여자들이 남자를 ‘착한 남자’와 ‘나쁜 남자’로 나누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쁜 남자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들은, 겉으로는 따뜻하고 자상하며 대화가 통하는 ‘착한 남자’에게 끌린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성관계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대륙으로 떠날 궁리에 바쁜 무정한 ‘나쁜 남자’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창녀’와 ‘나쁜 남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감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진지하게 교제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 그리고 둘째는 그 덕분에 우리의 성적 기벽이나 부끄럽고 나약한 부분에 대해 평생의 목격자나 환기자로 남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후자는 매우 그럴듯한 장점이기도 한데, 섹스는 너무 개인적인 행위라서 항상 봐야 하는 친밀한 사람과는 하기가 곤란한 경우도 종종 있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에게서 너무 자주 목격한 가슴 아픈 딜레마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들은 사랑하면 욕망이 없어졌고, 욕망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의 추정에 따르면, 우리의 성생활은 성장환경과 관련된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는다. 피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의 성생활은 점차 피폐해지게 마련이다.
첫째는, 유년기에 성관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성인이 되면 특정한 부분에 대해 어린 시절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과 닮은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한데 섞이면서 수수께끼 같은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다. 즉, 가족 이외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될수록 유년기에 느꼈던 가족 간의 친밀감이 더 강하게 상기되며, 그로 인해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에 대해 구속을 받게 된다. 원래 근친상간의 금기는 근친번식의 유전적 위험성을 제한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과 섹스를 즐기지 못하도록 막고, 종국엔 관계를 완전히 파탄 낼 수도 있다.
특히 근친상간의 금기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다시 등장하게 될 가능성은 자식을 몇 명쯤 낳은 후부터 급격히 증가한다. 그 전까지는 젊음, 감각적인 패션, 나이트클럽, 해외여행, 알코올 같은 천연 최음제들 덕분에, 연인을 선택하는 무의식적인 기준인 부모의 원형이 상기되지 않도록 잘 방어해왔다. 하지만 이런 방어막들은 집 안에 유모차가 놓이는 순간,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여전히 내가 아내(혹은 남편)의 부모가 아님을 의식하지만, 이런 의식은 날마다 하루의 대부분을 ‘엄마’나 ‘아빠’의 역할을 하면서 보내다 보면 양쪽 배우자 모두의 무의식 속에서 점점 허물어지기 십상이다.
부부가 일부러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며 부모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로의 그런 모습(엄마나 아빠 역할을 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 한쪽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나 ‘아빠’로 부르게 될 수도 있다(프로이트가 즐겨 거론했던 ‘의미의 착오’의 한 경우다). 그것도 하루 종일 아이들을 말 잘 듣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던, 화난 톤으로 말하면 상대방은 더 심한 혼동에 빠지기도 한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두 사람은 사실 서로 동등한 배우자 관계라는 것. 그리고 부모와 성관계를 갖는 듯한 생각 때문에 당혹스러울지라도, 두 사람이 직면한 진짜 심각한 위험은 따로 있다는 것 말이다. 이는 명확하지만 잘 인식하지 못해서 양쪽 모두가 포착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지루한 카펫과 거실 의자
탓일 수도 있다
남자든 여자든, 오래된 관계를 저버리고 더 젊은 애인을 새로 사귀게 될 경우,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사람들은 그런 행동의 동기에 대해 단순히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으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으로 여기기 일쑤다. 그러나 잠재의식의 영역까지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훨씬 더 복잡하고 가슴 아픈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자신과 한패라고 생각하고 배우자와의 성관계를 방해하는 부모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바람을 피우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랜 파트너와의 섹스가 근친상간의 금기라는 곤경에 빠지게 될 때, 다른 파트너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 과연 그 탈출구가 되어줄까? 당연히 아니다. 새로운 파트너 역시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뿌리 내리게 되면 결국에는 서서히 부모로 변하게 될 테니까. 고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상대가 아니다. 친밀한 상대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 인식의 초점은, 배우자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배우자의 ‘있는 그대로’의 실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의 변환을 시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뭘까? 특정한 종류의 성행위가 그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 흥미를 가진 성행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오래된 관계에 적용시켜볼 수 있는 근원적인 교훈이 담겨 있음은 분명하다.
제삼자, 즉 잘 모르는 사람을 한 명 골라 한쪽 배우자는 그 사람과 성관계를 갖고 다른 배우자는 그것을 지켜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부부들이 더러 있다. 이때 관음자 입장의 배우자는 자신의 정당한 지위를 제삼자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그가 배우자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거기에서 성적 즐거움을 찾는다.
이것은 이타적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즉 관음자에게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흥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행위다. 일상이라는 안개에 가려져 오랫동안 모호해졌던 욕망으로 다시 되짚어 돌아갈 지도로서 그 제삼자의 욕망을 이용하는 셈이다. 관음자는 그 낯선 사람을 매개로 20여 년을 함께한 배우자에게 첫날밤과 똑같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접근법이 좀 거북하다면, 이것을 약간 변형한 방법도 있다. 한쪽 파트너가 상대방의 누드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전용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한 후에 전 세계의 네티즌에게 솔직한 의견을 구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행위가 상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서 인기를 끌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관습, 질투심, 두려움이라는 장벽이 워낙 두터우니까 말이다. 인기는 어림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의 모든 관계에 적용시켜도 좋을 만한 유익한 인식의 메커니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려준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의 침체된 성생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해결책은 파트너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전환의 방법들 가운데는 그나마 덜 꺼림칙하고 무난한 편이어서 선뜻 실천해볼 만한 것도 있긴 하다. 바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다. 파트너에게서 에로틱한 면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매일 변함없는 일상의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경우가 많다. 성관계 횟수가 뜸해지는 것이,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카펫이나 거실 의자 탓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식구를 인식할 때, 집 안에서 그가 일상적으로 보이는 태도에 따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배경은 그러한 인식의 축을 이루어지는 활동들(즉, 청소기 돌리기, 분유 타 먹이기, 빨래 널기, 세금신고서 작성하기 등)에 의해 항구적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경향을 다시 우리에게 투영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발전을 미묘하게 방해한다. 마치 집 안의 가구들이 ‘내가 변하지 않는 한 너희도 변할 수 없어!’하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여기에서 호텔이라는 공간의 추상적 중요성이 부각된다. 호텔의 벽, 침대, 푹신푹신한 의자, 룸서비스 메뉴, 텔레비전, 꼼꼼하게 포장된 작은 비누 등은 단지 호사로움을 향유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선사해준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소원했던 성적 자아와 재회하도록 북돋워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색다른 분위기의 욕조 안에 같이 몸을 담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 순간에 얻게 될지 모를 효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맨 처음 서로를 끌어당겼던 성적 정체성, 그러니까 가정생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맡고 있는 역할 뒤에 감추어져 있던 그 성적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된 덕분에 다시 황홀함 속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런 식의 심미적 인식의 행위는, 목욕 가운, 서비스로 제공된 과일 바구니, 창밖에 펼쳐진 낯선 항구의 광경에 의해 그 효과가 배가되기 마련이다.
무심함과 권태로부터
오래된 관계 구제하기
배우자를 재평가하고 다시 성적 욕망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화가들이 화폭에 세계를 담아내는 과업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를 살펴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인들과 화가들은 집중하는 일이 완전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어느 순간 비슷한 약점에 직면한다. 두 부류 모두 쉽게 익숙 해지고, 쉽게 싫증을 내는 경향이 있고, 무엇이든, 혹은 누구든 잘 알려진 것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색다른 것, 먼 나라를 향한 감상적 낭만, 드라마틱한 사건과 관능에 대한 갈망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작 위대한 예술작품의 힘은 다른 데 있다. 위대한 작품들은 우리가 이미 이해한다고 여기던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어 익숙한 겉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매력, 혹은 간과해왔던 매력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그런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평범하게 여겼던 일상의 요소들을 어느새 다시 평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화가는 화가 고유의 방법으로, 자신이 본 어느 광경에서 가장 통렬하고 인상적이며 흥미를 끄는 일면을 부각시켜, 우리가 그쪽에 흥미를 갖고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이전까지의 무심함을 버리고, 컨스터블John Constable,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베르메르Johannes Jan Vermeer, 호퍼Edward Hopper 같은 화가들이 작품 속에서 찾아낸 것을 우리 자신의 환경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관계를 무심함과 권태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는, 마네가 아스파라거스를 독창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듯 배우자에게도 그와 같은 시선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판에 박힌 습관과 일상이라는 거대한 덮개 아래에 감추어진 좋은 점과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그러면 배우자가 유모차를 밀 때,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와 씨름할 때, 화가 나서 전기회사 직원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질 때,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기진맥진한 채 귀가할 때…, 그런 순간순간마다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배우자의 섹시한 단면이 자주 포착될 것이다. 아직 배우자에게 모험적이고 격정적이고 도도하고 지적인 단면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기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섹스와 결혼의
평화로운 공존
하지만 이 방법대로 해봤는데도 효과가 없다면, 그래서 오래된 파트너와의 성관계가 여전히 뜸하고 시들하다면, 당황스럽고 화나고 씁쓸한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사회는 이런 좌절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결코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강요한다. 말하자면 오래된 파트너와 자주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정상이며, 그러지 못하는 경우를 비정상으로 치는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후반기에 주로 미국에서 발달했던 성적 장애 치료 산업도, 지속적인 욕망으로 결혼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쪽으로 지금까지 부단히 노력해왔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결혼식장에서부터 무덤까지 배우자와 만족스러운 섹스를 즐길 지속적인 권리를 가져야만 하는 걸까? 누구든 무조건?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발전이 아닌가. 이런 내용이 책에 버젓이 실리고, 두 성인이 아이들을 재운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문제를 상의할 수 있다니.
하지만 관계를 자주 갖지 못하는 것을 자꾸만 비정상으로 여기는 생각은, 어쩐지 좀 기이하고 심하게 말하면 약간 변태적인 듯하다. 180도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부부 사이의 성관계 횟수와 강도가 점차 시들해지는 것이,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암시가 아니라 단지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현상은 오히려 지극히 정상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런 현상에 반항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평생에 걸쳐 만족스러운 성관계가 몇 번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성관계를 무조건 자주 갖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생각이 과연 옳을까? 섹스와 결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장 좋겠지만, 바란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헛된 기대를 고쳐먹고, 비현실적 환상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소위 ‘무능’이라는 오명을 털어버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침대에서 그 누구의 원망도 없이 금욕주의적 평온으로 돌아누우며, 오래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타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 더 지혜로운 것 아닐까?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다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발기불능은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파트너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파트너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발기부전 치료제가 잘 팔리는 시대적 현상은 현대사회 남성들의 집단적 갈망을 대변해준다. 즉, 상대를 실망 시키거나 기분 상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 미묘하고 민감하며 예의 바르고 문명화된 걱정을 무마시켜줄 확실한 메커니즘을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다.
약물에 의존하지 않는 좀 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대형 광고판이나 패션잡지의 전면광고를 통해 남성과 여성 모두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공공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남자에게 종종 ‘신경과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더라도 그것은 결코 문제 삼을 일이 아니며, 오히려 친절함의 진화된 모습으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줘야 할 좋은 자질이라고. 이런 개념을 널리 알리고 독려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상대방에게 혐오스럽거나 몰상식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아니면 실망감을 줄까 봐 걱정하는 그런 면모는, 그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신호이자, 유머감각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물론 후자는 의도를 적절히 전달할 줄 아는 요령을 갖춘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발기불능은 윤리적 상상의 소산인 만큼, 앞으로 미래의 남자들은 자신의 깊이 있는 정신 수준과 온화한 성품을 내비치는 수단의 하나로서 잠자리에서도 조건적으로 행동하게 될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남자들이 자신의 강한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욕실에서 몰래 비아그라를 삼키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흔히 ‘분노’라고 하면 얼굴이 벌게지거나 언성을 높이면서 방문을 세게 꽝 닫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분노를 알아차리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는 그냥 멍해지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흥분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우리는 파트너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곧잘 멍하고 우울해져서 잠자리를 피할 때가 많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 화가 치밀어 오른 구체적 사건들이 너무 정신없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다. 화가 났는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할 때라든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와중에, 혹은 점심시간에 시끄러운 쇼핑몰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화살이 날아와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그 화살이 갑옷의 어느 위치를 어떻게 뚫었는지 정확히 눈치 챌 경황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다.
둘째, 분노를 알아차린 경우 더라도 그 화난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말하자면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들이 너무 사소한 일이라면 입 밖에 꺼내어 따져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대부분은 내가 너무 까다롭거나 별나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고, 상대방은 어처구니없어한다. 따지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봐도 무안하고 머쓱해지는 그런 경우다.
이를테면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파트너가 눈치 채지 못하거나,바게트를 자를 때 빵 전용 도마를 쓰지 않아서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트릴 때, 혹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별일 없었는지 묻지도 않고 곧장 텔레비전 앞으로 갈 때 정말 속상하다. 하지만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건건이 불평하기에는 어쩐지 좀 민망하다.
“바게트도 제대로 못 자르고…, 내가 당신 때문에 정말이지 화가 나서 못살겠어!”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유치하고 실없는, 혹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다. 이런 문제를 따지는 것이 정말로 유치하고 실없는 짓일 수도 있겠지만, 유치함과 실없음이 전반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한 부분인 점을 감안하면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그로 인한 불리함도 기꺼이 감수한다면 말이다. 가급적 좀 더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낙관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커플은 객관적으로 보기엔 매우 사소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놓고 비슷비슷한 말다툼을 벌이곤 한다. 어떠한 남녀관계든 예외가 없다. 그러다 나중엔 원망이 생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견지에서 본 그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문제(자녀 교육이나 주택 구입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하찮은 문제(소파를 놓는 방향이나, 화요일 저녁의 데이트 계획 같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상대방을 ‘완벽함의 화신’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여러 이상들 중 하나가 배신당하는 고통이나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 더 이상 사소한 일 같은 것은 없어지니까.
커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화살을 서로에게 쏘아댄다. 일주일이면 수십 발도 넘을 것이다. 이런 작은 상처들은 표면적으로 큰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약간의 냉랭함이 감도는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그 냉랭함 때문에 한쪽, 혹은 양쪽 모두 상대와의 잠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섹스란 일단 화가 나면 건네주기 쉽지 않은 선물이며, 자신이 화가 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점점 더 처절한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간다. 부지중에 상처를 준 사람은 성적으로 벌을 받게 되고, 그러면 상대방은 더 은밀한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그들 자신도 그런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은밀한 공격과 앙갚음을 되풀이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아래의 대화처럼 폭발하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너그럽고 이성적인 동료이자, 믿음직스럽고 다정한 친구, 책임감 있는 사회구성원이었던 파트너가 매우 치졸하게 돌변한다. 침실 밖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어도 다르지 않다.
짐 이제 나랑은 하기도 싫다 이거야?
데이지 아니야. 그냥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그래.
짐 당신은 맨날 그 소리잖아.
데이지 아니야. 그냥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짐 내가 언제 억지로 하려고 했다고!
데이지 지금 그러고 있잖아. 이렇게 들볶고 있으면서 뭐가 아니야.
짐 당신이 불감증인 건 아니고?
데이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짐 나 옆방에 가서 잘 거야.
데이지 그러시든가. 누가 붙잡는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커플 사이에서 이와 비슷한 입씨름이 오간다. 전쟁이나 절망적인 경제상황도 개의치 않고 물건을 그득그득 진열해놓은 상점들과 값비싼 고등교육 시설들이 갖추어진, 그 어느 곳보다 축복받은 지역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감정대립이 야기하는 시간과 에너지, 감정의 낭비를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그 수백, 수천 커플은 아무리 티격태격하며 싸우고 서로에게 심한 말을 내뱉더라도,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왜 화가 난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차근차근 이해하기만 해도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보는 누구나 읽을 수는 있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기만적인 특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조언을 구할 객관적인 관찰자와 우리의 머릿속에 바람직한 생각을 새겨줄 만트라mantra가 더 절실하다. 지식은 지식일 뿐이며, 지식을 그대로 실제에 반영할 수는 없다.
우리는 화가 나면 순식간에 이성을 잃거나 실망에 빠지고 만다. 잠깐 숨을 돌리면서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남녀심리에 관한 지식을 꺼내볼 틈이 없다. 또한 입씨름에 휘말리지 않고, 서로의 비난 속에 숨은 상처와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을 차근차근 밝혀낼 여유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질서가 잡힌 곳이라면, 자꾸만 서로에 대해 조목조목 트집을 잡고 치부를 들추지 못해 안달인 짐과 데이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제럴드 윅스와 스티븐 트릿 같은 심리치료사들이 두 사람을 조용한 방에 함께 앉혀놓고 각자를 지옥으로 끌고 간 대화의 매 단계를 되짚어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스스로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말이다. 이 부부는 서로를 향한 적의의 근원을 차츰 알아가게 될 것이다. 각자 특별한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에 왜곡된 감정의 골을 흐르며 형성된 성격 때문일 수도 있음을 말이다.
세상의 모든 커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치료사를 무료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대인들의 금요일 저녁식사처럼 일상생활 중에 시간을 정해 즐겁고 오붓한 분위기에서 상담할 수 있다면 정말 완벽할 것이다. 그 시간은 유대인들의 금요일 의식과 마찬가지로 감정 정화의 촉진제 역할도 해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리치료를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심리치료사의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정신이상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런 걱정과 거부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심리치료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상적인 문제해결사 역할을 해줄 것이다. 우선 그동안의 관계와 현재의 갈등을 세심히 짚어본 다음, 그 커플이 너무 서툴거나 바쁘거나 혼란스러운 탓에 스스로 유도하지 못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의 방향을 알려주고 변화하도록 독려해준다.
예컨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말다툼에는 나름의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잠자리를 갖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만드는 훼방꾼, 즉 맞비난과 원망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서로에게 세심한 관심을 가져주는 관계로 정착시키기 위해, 난감한 문제를 어떻게 하면 쉽게 풀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또한 심리치료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지난 일주일 동안 있었던 다툼거리들을 적어오게 한다. 말다툼의 첫 단추가 된 사건목록을 함께 검토한 후에, 두 사람이 서로의 불만에 연민을 갖고 귀 기울이도록 도와준다. 물론 이때 두 사람은 발끈해서 자기변명을 하거나 기분이 몹시 상한 채로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적절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과도하게 축적된 성욕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어 두 사람의 관계에 필연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른다고.
심리치료사는 커플 각자의 심리적 내력을 짚어주고, 과거의 특별한 사건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면들을 지적해 인식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언쟁이 고조될 때는 상대를 ‘악의적이고 못된 사람’이 아니라 ‘상처받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으로 봐주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
이런 치유 서비스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본주의가 그런 서비스의 필요성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미숙한 탓이다. 우리는 현재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 나는 과일을 바로 집 앞까지 싱싱하게 배달시킬 수 있고 초소형 전도체도 만들 수 있지만, 인간관계의 문제를 점검하고 해결해줄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일에 대해서는 쩔쩔매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요령에 관해서라면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뭘 더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란, 혼자 힘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요령이나 뇌 수술법을 직관으로 알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대다수의 직장에서는 직원들 간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반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와 절차 들을 마련해놓 았다. 반면 현대의 연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관계에 모범적인 실천 방법을 응용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감정’이 피어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그리고 끊임없이 하는 것만이 서로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지켜줄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은 이미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우리 시대의 남녀관계를 지배하는 통념은, ‘이상적인 사람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가 사랑을 유지하는 데 애쓰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유년기의 감정적인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에게 맨 처음으로 사랑을 준 사람들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지 말해준 적이 없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면서도 우리가 그대로 되갚아주길 요구하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약점, 걱정, 욕구를 드러내는 일도 드물었다.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행동보다는 부모로서의 행동을 더 훌륭히 해냈다.
그분들의 의도야 더없이 자애로운 것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훗날 우리에게 복잡한 영향을 미치게 될 환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꽤 잘 맞고 무난한 남녀관계에서조차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럴 마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성인기의 사랑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어린 시절에 사랑 받던 느낌을 기억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무엇을 감수했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에 맞먹는 노력을 쏟아야만, 파트너가 은밀하게 불만의 화살을 쏠 때 그것을 감지하고 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더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더 자주 성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여기에 덤으로 따라오는 행운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특별하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할 때면, 우리는 주저 없이 자유를 꼽는다. 자유의 이상에 대한 이런 무의식적 옹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에 따른다.
첫째는 경계심리의 발동이다. 우리는 어떠한 식으로든 국가가 개인의 삶을 간섭할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은 그로부터 얻게 될 잠재적 이득보다 그 자체에 내재한 위험이 훨씬 크다고 여긴다. 쉽게 말해 남의 삶에 간섭하거나 내 삶을 간섭당하는 것은 불행을 초래할 위험이 크므로, 그런 위험을 무릅쓰느니 자신의 구제는 각자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근거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들러붙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히틀러나 스탈린의 망령을 심심찮게 거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최선책을 안다고 판단할 경우에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두 번째 근거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숙하고 이성적인 동물이므로 지나친 보호가 없어도 자신의 욕구를 무난히 가늠하고 자신의 이익을 보살피면서 혼자 힘으로 아주 잘 지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무엇을 보든 읽든 듣든, 그것에 지나친 영향을 받을 염려가 별로 없으므로 어떤 것에 노출되는지 감시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인간은 책이나 그림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일도 없고, 피 튀기는 장면이 계속되는 잔인한 소설을 읽고 잔인하게 변할 리도 없으며, 고작 영화나 사진 때문에 도덕감각을 잃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 평정심이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강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인간은 압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는 않으므로, 자유언론이나 민주주의적 이상과 더불어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는
‘구속 없는 자유’
이런 세속주의는 대다수의 종교적 신념들과는 속속들이 모순된다. 현대의 자유주의 철학이 발전하게 된 주된 계기가 종교 교리에 대한 반발이었으니, 어쩌면 모순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신앙이 초지일관 주장해온 것은, 자신들이 옳고 그름에 대한 아주 확실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강요할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강경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강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다. 인간이 도처에 산재된 메시지들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 가당치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오히려 읽거나 보는 내용에 크게 영향을 받으니,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감시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감시’라는 단어에 질색한다. 그 말을 들으면 소련이나 나치의 실험은 물론이고 종교적 전횡으로 우를 범했던 중세의 종교재판을 떠올리기 일쑤다. 하지만 감시라는 개념을 무조건 거부하기 전에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바닥에 오싹한 시나리오가 펼쳐져 있는 위험한 비탈길 위에 서 있다면, 감시가 유익하고 필수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대다수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정말로 읽고 보는 것에 취약해서 책이나 시각 자료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격정적이거나 무분별할 때가 많고, 파멸적 호르몬과 욕망에 시달리다 금세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한다. 이런 취약성은 인본주의적 자아상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릇된 상황에 노출되면 치명적인 길로 내몰릴지 모른다. 해로운 독서로 인해 도덕적 나침반의 바늘이 구부러질 수도 있고, 번드르르한 잡지의 악의적 광고들로 인해 (광고주들도 익히 잘 알고 있듯이) 가치관에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약간의 검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물론 독단적이고 압제적인 권위에 모든 자유를 양도하지 않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가끔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권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조치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역량 신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다.
구속 없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이 점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인터넷 포르노물에 관한 한, 선의를 가진 감시의 주체에게 기꺼이 자신의 특권을 약간만 양도해준다면, 그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호의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인터넷 전체가 포르노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러한 자극에 저항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없는데, 인터넷은 끊임없이 그런 자극을 보낸다. 대체로 인생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자극들을 말이다. 게다가 휴대전화나 태블릿PC 등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포르노에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된 탓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권태’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고, 권태에 대한 인내심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목욕할 때나 장거리 기차여행을 할 때 즐길 수 있는 창의적인 권태야말로 좋은 아이디어를 낳는 데 꼭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거의 저항하기 힘든 열망이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으로 들어가 중요한 뭔가가 있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생각이 잉태되는 결정적 순간에, 인터넷 포르노가 맹렬한 흡인력을 발휘해 의식으로 들어간 우리를 도로 끄집어낸다.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퇴출되어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기 가장 쉬운 상태가 된다.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신도들에게 ‘섹스’ 대신 ‘생각’을 바라는 것에 대해서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종교가 섹스를 검열하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종교계의 주장을 확실히 인정해도 될듯싶다(포르노 사이트에서 몇 시간이나 죽치고 난 후에야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바로 성과 성적 이미지가 우리의 고결한 이성적 능력을 쉽게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울적해질 정도로 너무 쉽게 말이다.
세속 사회는 비키니나 성적 도발을 거북해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성적 관심과 매력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들은 요염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온라인상에서나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지만, 그런 후엔 금세 별일 없었던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한다.
종교계는 때때로 고상한 체한다는 조롱을 받지만, 성에 대한 경고는 고상한 체하는 게 아니다. 욕망의 마력을 적극적으로 의식했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이다. 성이 꽤 경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성을 그렇게 나쁜 것으로 비난할 리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이 경이로운 성이 우리의 다른 중요하고 숭고한 관심사, 즉 신이나 삶 같은 것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예 못 보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인터넷 검열제도를 이해하고 광케이블로 아무 때나 제한 없이 포르노를 다운받지 못하게 제한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 이 시대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나 질서와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억압은 필요하다는 것, 이 점만은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성적 충동은 어느 정도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 억제란 기독교 신자나, 이슬람교도, 꽉 막힌 도덕군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평생토록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하고, 자식을 키워야 하고, 자기탐구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성적 충동을 거침없이 드러내서는 곤란하다. 충동을 억제하지 않고 내버려두다간 자폭하기 딱 좋으니까.
한편, 사람들은 흔히 포르노가 전 세계 곳곳에 확산되어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하지만 어쩌면 포르노의 진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본질과 속성이 진짜 문제인지도 모른다. 분별력 있고 도덕적이며 선량하고 야심이 있는 사람에게 포르노는 그다지 큰 문젯거리가 아니다. 포르노에 푹 빠져 그가 평소에 가진 다른 관심사들(섹스를 포함해서)로부터 완전히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포르노물은, 분별없는 욕망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느라 윤리, 미의식, 지성을 뒷전으로 내팽개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따지고 보면 포르노는 스토리는 황당하고, 대사는 엉터리이며, 배우는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착취당하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배경도 엉성하고 촬영도 거의 관음증 환자 수준이라서, 다 보고나면 혐오감만 남게 마련이다.
하지만 욕망과 지성 사이에서 냉혹하게도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그런 포르노가 아닌, 새로운 유형의 포르노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말하자면 성적 욕망으로 우리의 고결한 가치관을 손상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지하도록 도와주는 포르노 말이다.
이제까지의 포르노가 논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황당한 대사에 판에 박힌 캐릭터와 동물적인 행위로 장면을 가득 채웠다면, 미래의 포르노는 지성(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서가 사이를 거니는 장면), 친절함(거기에서 서로 다정하고 호의적인 분위기로 오럴섹스를 하는 장면), 겸손(그 모습을 들켜 당혹스러워하거나 수줍어하며 부끄럼 타는 장면) 같은 수준 높은 이미지와 시나리오로 꾸며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고매한 인간이 되느냐, 섹스만 밝히는 동물적인 존재가 되느냐의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필요가 없다.
이 악명 높은 주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외도가 얼마나 유혹적이고 짜릿한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한 지 수년이 지나 자식을 두어 명 둔 부부라면 특히 그렇다. ‘잘못된’행동이라고 욕부터 하기 전에, 외도가 적어도 한동안은 굉장한 짜릿함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짐이 레이첼을 보고 왜 흥분했는지에 관한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가 어떤 매력을 가진 섹스 상대에게 끌리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짐의 경우는 섹스의 고대 영어 동의어를 대입하면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상황이다. 사실 레이첼은 짐에게 그녀를 ‘알고know’ 싶어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허벅지와 발목, 목의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은 것은 말하나마나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 외에도 짐은 그녀가 즐겨 입는 옷, 독서 취향, 샤워 후에 머리에서 나는 냄새, 어릴 적 성격, 친구들과의 우정 등도 궁금하다.
아무리 초범이어도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시체를 그냥 물속에 던지지는 않는다. 부대에 넣고 최대한 많은 돌멩이들을 함께 담은 후에 버린다. 그래야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지식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짐은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데이지에게 굳이 이메일을 보내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비즈니스 때문에 밤늦은 시간에는 통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해둔다. 길고 긴 밤이 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살인자의 돌멩이처럼.
그날 밤 자정 무렵, 짐과 레이첼은 사람이 별로 없는 바에서 함께 와인을 마신다. 이런 식의 유혹은 그 나이 또래의 남성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그런데 중년의 기혼남이 다른 여자를 유혹할 때 내보이는 대범함을 자신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나이가 되어 가끔씩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내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까?’하는 초조함 때문에 대범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짐도, 젊은 독신 남자였을 때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삶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을 것 같아서 수줍음과 부끄러움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낭만적인 사랑과 섹스, 가족은 각각 독립된 것으로 여겨졌고, 덕분에 보편적인 현실은 그다지 골치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비교적 부유한 유럽 국가들의 특정 사회계층 사이에서 아주 새로운 이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부부는 자식들을 위해 서로를 참아주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과거 프랑스 서정시인들의 낭만과 자유사상가들의 성적 열정을 조화시킨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후 결과적으로 우리의 가장 간절한 욕구들이 단 한 사람의 도움만으로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개념이 세상 사람들에게 강요되기에 이르렀다.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이라는 환상이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능하긴 하지만 아주, 아주 드물어서 우리의 애간장을 녹인다. 어째서 결혼이 우리의 모든 희망을 충족시켜주면 안 되는 걸까? 형이상학적으로도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단지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할 뿐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진실을 냉정하게 마주봐야 한다. 삶이 특유의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고 언제 어느 때고 자기 멋대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전에.
궁극의 오류는
결혼과 외도에 대한 이상주의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소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외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궁극적인 ‘오류’는, 결혼에 대한 특정 관념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다. 언뜻 생각하기에 외도는 비뚤어지고 절망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밀스러운 모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결혼생활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다. 외도를 하면 그 상대방이 자신의 결핍이나 과잉을 마법처럼 조절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조건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혼외’의 누군가와 성관계를 가지면서 ‘결혼생활 내부’의 소중한 것들에 타격을 입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결혼생활을 충실히 지키는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절박한 감각적 쾌락의 기회를 거머쥐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
불안한 결혼생활에 대한 해답은 없다. 그 ‘해답’이라는 것이, 양쪽 모두가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는 그런 해결책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또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긍정적 요소들이 서로를 다치게 하거나 상처받지 않은 채, 다른 요소들과 공존할 수 있는 해결책을 의미한다면, 세상에 그런 해결책은 없다.
결혼생활에서 우리가 원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사랑, 섹스, 가족은 서로에게 잔인한 영향력과 피해를 입히는 관계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원만한 성관계를 방해하기도 한다. 사랑하지 않지만 육체적으로 끌리는 누군가와 몰래 만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 이상 흥분이 느껴지지 않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식을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양쪽 모두에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부부관계나 성적 스릴에 몰입하기 위해 아이들을 방치한다면 가족이 위태로워지고 다음 세대의 건강과 정신안정 역시 크나큰 위협을 받게 된다.
이런 혼란을 해소할 이상적 해법은 정말 없는 걸까? 이러한 절망감이 주기적으로 고개를 들 때마다, 우리는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자유결혼open marriage이 좋은 방법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혹은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비밀을 철저히 지키거나, 1년 단위로 결혼계약을 재협상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온전히 육아에만 ‘올인’하거나.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모두 실패로 끝나게 마련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그런 상황에는 손실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가령, 바람을 피우고 다니면 배우자의 사랑과 아이들의 정신건강이 위태로워질 우려가 따른다. 그렇다고 한눈팔 줄도 모르고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삶의 활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흥분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들키지 않고 몰래 외도를 하면 스스로의 내면은 점점 피폐해지고,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능력이 위축 되기 쉽다. 게다가 뒤늦게라도 외도 사실을 고백한다면 배우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고(당신의 외도가 별 의미 없는 단순한 성적 모험이 었을 뿐이라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인생을 다 바친다면 어떻게 될까? 나중에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떠나버릴 때 남는 것은 비참함과 외로움뿐이다. 그렇다고 부부의 로맨스만을 위해 아이들을 방치한다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평생 원망을 듣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결혼생활은 침대 시트와 비슷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 귀퉁이가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 한쪽을 제대로 펴놓으면, 다른 쪽이 더 구겨지거나 흐트러지고 만다. 그러므로 완벽을 추구하면 곤란하다.
좀 더 엄중하고 비관적인 결혼서약
그렇다면 결혼생활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태도는 무엇일까? 서로정절을 지키려면 어떤 결혼서약을 주고받아야 될까? 확실한 것은, 흔히 쓰는 상투적인 결혼서약보다 훨씬 더 엄중하고, 비관적인 경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실망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로 인한 불만도 당신에게만 털어놓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바람을 피우며 돈 후안 같은 호색한으로 살면서 여기저기 그 불만을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선택을 검토했고 내 일생을 바칠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커플이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하는 서약 치고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약을 한 뒤라면, 외도를 저지르더라도 실망에 대해 서로 서약한 부분만을 배반하는 것이지 비현실적인 희망을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배반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나와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정곡을 찌르는 공정한 지적으로 이렇게 큰소리를 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실망을 느끼더라도 의리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어.”
보수주의자들이 삼가 ‘좋게 말해주기’라고 일컬었던 것이 이제는 ‘거짓말’로 인식하게 되었는가 하면, 사람들은 ‘예의상 하는’ 겉치레 대신 ‘본마음을 드러내는’ 좀 더 감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합치를 중시한 것으로서, 그에 따라 온당한 결혼생활에 수반되어야 할 까다롭고 엄격한 조건들이 새롭게 생겨나기도 했다.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 어쩌다 한 번씩만 생기는 것, 1년에 여섯 번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부부관계, 자식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참고 사는 것 등은 온전한 인간이 될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풋풋한 젊은 시절엔 거의 대부분이 사랑에 바탕을 둔 결혼관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직관적 경의를 느낀다. 그런 결혼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적 편견을 감안하면 그러지 않기란 여간해선 힘들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의혹이 생겨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수백 년 전에 젊은 청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가들이나 시인들이 꾸며낸 공상에 불과한 건 아닐까? 역사상 그 전까지 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류에게 그런대로 유익했던, 제도 기반의 구시대적 결혼 체제 아래에서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의문은 흔히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게 될 때 생겨난다.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이를테면 길을 건너가다 매력적인 얼굴이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싶을 만한 충동이 일어날 때도 그런 의문을 갖는다. 또한 인터넷 채팅으로 에로틱한 대화를 주고받는데, 마음이 끌리던 대화 상대가 공항 호텔에서 만나자고 은근히 유혹해온다. 그러면 고작 몇 시간의 쾌락을 위해 인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싶어진다.
그 외에도 많다. 배우자에게 정말 미치도록 화가 나서 ‘차에 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앙심을 품었다가, 10분쯤 지나선 그 사람 없이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 때, 길고 지루한 주말을 보내다 아이들이 어서 컸으면 좋겠다고, 이젠 트램펄린 같은 것은 재미없어 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어딘가로 영영 가버려서 한 시간이라도 잡지를 제대로 읽고 잘 정돈된 거실에서 여유를 즐기면 정말 좋겠다고 바랄 때도 그렇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회의가 늦게 끝날 것 같으면 아이들을 못 재워주겠다는 아쉬움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진다.
감정 기반의 결혼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심과 진정성을 내세워 감정을 경외하지만, 그것은 한 가지를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끊임없이 변하는 감정 속에서 순간순간 스치는 진짜 마음 말이다. 우리는 모순에 빠지거나 감상에 치우쳐서, 또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서 어쩌다 간혹 발광하듯 무분별한 방향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고 만다. 그런 감정까지 일일이 존중한다면 일관된 삶을 이끌어갈 희망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종종, 아니 어쩌면 더 자주 진정성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싶거나, 배우자를 독살하고 싶거나, 전구를 가는 일 때문에 일어난 다툼으로 확 이혼해버리고 싶어지는 마음이 순간순간 스칠 때마다, 그 마음을 감추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히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낭만주의는 비진정성의 위험을 강조했지만, 매순간 외면의 삶을 내면의 삶과 일치시키려 하다가는 적지 않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오로지 감정만을 중요한 인생과제의 지침으로 삼았다가는, 감정에 과도한 압박을 가하게 될 뿐이다. 우리의 감정은 복잡한 작용으로 혼란스러워진 상태이므로, 오히려 잠깐잠깐 찾아오는 이성적인 시간 동안에 고수할 만한 기본원칙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우리의 외부 상황이 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그 점에 고마워하고 안심해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다고 여길 만한 신호니까.
기적과도 같은 일
결혼은 그 당사자들이 순간순간의 감정을 과도하게 내색하지 않고 살아갈 때 환영할 만한 제도일 수도 있다. 그런 자애로운 무관심은, 사실 끊임없이 감정의 맥을 짚어 그에 맞추는 식의 결혼제도보다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바를 더 잘 대변해주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괜찮은 제도다. 부모가 조금 다투어도 아이들은 걱정을 덜할 수 있다. 심지어 매일같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싸우는 부모라도, 아이들은 확신할 수 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아이들 자신이 밖에서 친구들과 놀 때 그러는 것처럼 곧 화해하고 잘 지내게 될 거라고.
적절하고 올바른 결혼생활을 하려면, 어쩌다 벌어진 외도 사건을 놓고 서로를 탓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서로를 탓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대체로 힘써 왔다는 것에 뿌듯해 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 쪽에게 도덕적 책임을 집요하게 따지고, ‘탈선의 충동을 느낀다니 역겹고 기막히다’며 독선적인 조롱을 쏟아낸다. 사실, 그런 충동은 경이로우면서도 존중할 만한 애정 유지 능력인데도, 덮어놓고 전형적인 불륜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부부가 자신들의 삶이 결혼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외도의 충동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도 두 사람 모두가 날마다 감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이다.
서로에게 여전히 충실한 배우자들은, 부부애와 아이들을 위해 감수하는 희생을 서로 인정해주고 그 용기를 자랑스럽게 여겨주어야 한다. 금욕생활은 보통 일이 아닐뿐더러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절은 하나의 위업으로 칭송받기에 충분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받아 마땅하다(욕심 같아서는, 메달도 주고 상도주어서 대중에게 널리 알리면 더 좋겠다). 아무튼 ‘정절’이라는 말은 바람 피운 배우자에게 분노가 치밀 때 들먹거리는, 그런 하찮은 말로 취급 받기엔 너무 고귀한 단어다.
충실하게 결혼생활을 지켜가는 배우자들에게는 이런 얘길 해주고 싶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굉장한 자제심과 관대함을 베풀며 바람을 피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그리고 잠자리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하게 되지 않도록 둘 다 엄청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항상 잊지 말고 가슴에 새기라고.
그러므로 한쪽이 어쩌다 실수한다면 다른 쪽은 분노를 터뜨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두 사람이 성실함과 평온함을 잘 지켜온 것에 대해(그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므로) 어정쩡하게 놀라는 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성욕이란 게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동안 거의 평생을 성욕 때문에 골치를 썩고 괴로워해야 하니까 말이다. 성욕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그것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혐오감과 죄책감뿐이다.
또한 못생겼다거나 자기 타입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를 걷어차고, 정말 괜찮은 사람들은 어김없이 현재 사귀는 애인이 있으며, 그러다 보면 갓 성인이 된 시절의 삶은 대부분 거절, 슬픈 노래, 형편없는 포르노로 점철된다. 그러다 누군가가 딱한마음에 우리에게 기회를 주면(구제해주는 셈 치고) 우리는 마침내 기적을 얻은 듯 들뜨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곧 다른 이성의 다리나 머릿결에 한눈을 팔기 시작한다.
우리는 정말 섹스 문제만 아니었으면 꽤 즐겁게 살았을지 모른다. 원숭이나 사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일곱 살짜리 소년소녀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우리 앞에는 엄중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잘 못해서 주눅이 들거나 치욕감에 빠지는 일, 우리가 대학생일 때 아직 아기였을 법한 어리디어린 누군가의 손목과 발목에 음탕한 시선을 보내는 일, 한때 탱탱하고 탄력 있던 몸이 서서히 늘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 등등. 유난히 일이 꼬여 엉망진창인 날엔, 이 모든 상황이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해 합동작전을 펴는 것 같아 신경질이 나기도 한다.
물론 섹스 문제에는 또 다른 면도 있어서, 황홀경과 새로운 발견의세계를 열어주기도 한다.
성욕이란 게 없었다면 우리가 할 일은 훨씬 적어질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굳이 보석점을 열거나, 레이스를 짜거나, 은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오거나, 열대의 석호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수상호텔을 지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추동력이나 조직이념으로 작용해줄 성욕이 없다면, 우리 경제의 상당 부분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증권거래소의 열광적인 에너지, 본드 가Bond Street 디올 매장의 탈의실(푹신한 패드가 깔려 있고 벽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몰리는 관람객, 스카이라운지 일식 레스토랑의 은대구 요리…. 창문 밖으로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갈 때, 두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욕이란 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너무 안전해서 탈이었을 것이다. 가령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거절과 치욕에 대해 절절히 깨우쳐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고상하게 나이 들며 평온한 삶에 길들여져서 세상사를 훤히 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숫자와 단어에 매몰된 메마른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성욕은 힘, 지위, 돈, 지력에 따른 통상적 위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야기한다. 반드시 필요한 혼란이 생겨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농장 일꾼에게 여자 교수가 무릎을 꿇고 채찍질을 해달라고 사정하게 만든다.
또한 굴지의 기업 CEO가 어느 여자 인턴사원 때문에 이성을 잃기도 한다. 그 CEO는 수백만 달러를 가졌고 여자는 지하 단칸방에 살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줄 쾌감뿐일 테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위해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돌그룹의 이름들을 외우고, 백화점에 들어가 그녀에게 잘 어울리지도 않는 레몬색 원피스를 사준다. 이제껏 줄곧 경멸해왔던 것들에 대해서도 관대해지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인간다움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엔 자신의 값비싼 독일제 차 안에 앉아, 창밖으로 번드르르한 자기 집을 바라보면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욕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쩌면 성욕이 없으면 예술과 음악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욕이 없었다면 슈베르트의 가곡이나 나탈리 머천트Natalie Merchant의 앨범 ‘오필리아Ophelia’, 잉마르베리만Ernst Ingmar Bergman 감독의 영화 ‘결혼의 풍경Scenes from a Marriage’이나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의 소설 《롤리타》 같은 작품도 별로 주목을 못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훨씬 더 둔감해졌을 테고, 스스로를 비웃는 일에 서툴렀을 것이며, 그래서 인간에 대해 훨씬 더 잔인해졌을 것이다.
지독한 성적 욕망을 겨냥해 경멸적인(하지만 온당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 욕망을 칭송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우리가 실체적인 인간으로서 호르몬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을 며칠 씩이나 잊고 지내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성적 욕망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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