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베코프 [개와 사람의 행복한 동행] 책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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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베코프 [개와 사람의 행복한 동행] 책 메모

일상/아무거나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2. 8. 7.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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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북클럽에서 ebook으로 이 책 봤다

전자책은 스마트폰으로 보니까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책은 어려운 내용은 없어서 비교적 금방 읽었다

내가 전혀 몰랐던 수많은 과학적 지식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섭취할 수 있게 해준 책은 아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막 두근두근 거리거나 세상의 진실에 눈이 뜨여지는 것만 같은 어떤 희열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치만 연구와 관찰을 바탕으로 강아지가 얼마나 똑똑한 생물인지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강아지의 모습들도 알게 됐고, 우리가 강아지를 잘 기르는 방법, 사회에 만연해있는 강아지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들, 강아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주장하는 작가의 생각이 따뜻하고 난 좋았다

이 책을 본다면 (책의 내용이 모두 과학적 사실은 아니고 아직 연구가 필요한 내용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강아지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고 배려심 있고 감정을 느끼는 부분에 있어서 인간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강아지 훈련사들이나 강아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아래는 메모한 것들

 

 


 

 

‘초심자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미리 가정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이 개별적 개와 관계를 맺고 그 개에 대해 알아간다는 뜻이다. 잘못된 믿음은 개들에 해를 끼치고, 개와 인간의 관계에도 해를 끼친다. 개에 대해, 또 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아는 바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모두에게 이롭다.

 

 

 

 

그런데 개 산책 공원 방문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가축화와 사회화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하다. 개는 늑대에서 진화한 새로운 가축 종이다. 그러니 모든 개는 개로 태어난다. 가끔 집에서 늑대를 기르는 사람이 “우리 집에는 길들인 늑대가 살아요”라고들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길들여지다’는 말은 ‘사회화되다’라는 뜻인데, 이 ‘길들인 늑대’가 낳은 새끼는 늑대, 즉 야생동물이지 가축화된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들인 늑대는 가축화된 늑대가 아니라 사회화가 된 늑대일 뿐이다. 개가 바로 ‘가축화된 늑대’이다.

 

 

 

 

개가 생각 없는 기계도, 내장된 행동 패턴에만 의존하는 ‘본능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은 진화론, 상세한 과학 자료, 상식으로 확인된다. 개는 다양한 상황을 판단하고, 인간과 유사하게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똑똑하고 생각하고(지적이고sapient) 느끼는(감응하는sentient) 존재다. 개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상시적으로 결정해서 하지 ‘아무 이유 없이’ 하지 않는다. 실제로 오늘날 성공적 개 훈련(교육) 방법들은 모두 개의 풍부하고 깊은 머리와 가슴을 바탕으로 한다. 개는 우리 인간처럼 포유동물이며, 이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할일은 이 매혹적 동물을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이미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피도에겐 통해도 애니에겐 통하지 않을 수 있고, 애니에게 옳다고 해서 플루토에게도 옳다는 보장이 없다. 집에서 함께 지내는 많은 개들을 보면 꼬리 하나에 귀 둘,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 탐욕스러운 식성 말고 개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다.

그러니 ‘개에 대한 신화’를 조심하라.

 

 

 

이 책에서 시종일관 반복하는 주요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는, 개 일반에 대한 언급은 오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극도로 높다는 점이다. 개는 놀라우리만치 변동성이 크다. 같은 품종은 물론 한배에서 태어난 동기들 간에도 서로 전혀 다른 개성이 있다. 또한 ‘좋은 개’와 ‘나쁜 개’의 구별도 피할 참이다. 대개 그런 식의 딱지 붙이기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맥락에 따른 문제일 때가 많다. 그런 구별은 인간의 판단에 따르며, 기준 또한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동일한 개가 전형적인 ‘좋은’ 행동과 전형적인 ‘나쁜’ 행동을 모두 다 하는 것도 자주 본다. 그러므로 그런 식의 딱지 붙이기는 나에게도, 개에게도 무의미하다.

  개들이 인간에게 애착을 보이는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모든 개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도 아니고 인간에게 무조건 사랑을 주지도 않는다. 물론 개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놀고,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다. 그러려면 개의 관점에서 필요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건 꽤 어려운 과제일지도 모른다. 개 훈련 산업이 성장하는 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개들도 우리 인간들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날이 있다. 채기라는 이름의 개가 기억난다. 잘 아는 개인데 그날따라 그답지 않게 행동했다. 평소처럼 활기차게 뛰어다니지 않았고 축 처지고 지쳐 보였다. 알고 보니 떨어지는 다리미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했다. 머리가 아프거나 경미한 뇌진탕을 입은 것 같다고 반려자가 말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채기는 야단스럽고 활기찬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개에게 생긴 문제들에 발 빠른 처방을 원한다. 그러나 개체마다 처방도 다를 수밖에 없어서 그때마다 즉각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럴 때 나는 자신이 돌보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개에게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처방이라고 말한다.

 

 

 

내가 만난 수많은 개들 중에는 ‘너무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핏불 테리어도 있다. 알다시피 핏불 테리어는 대표적 투견이다. 그의 반려자 역시 투견으로 키울 생각으로 녀석을 샀는데, 기대와 달리 녀석은 완전 겁쟁이였다. 투견으로 돈을 벌겠다는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개가 싸우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개도, 반려자도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개들을 개성을 가진 존재로 보고, 다시는 투견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맹세했다.

  핏불이나 특정 품종의 장점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의도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오히려 무분별한 품종주의, 그러니까 어떤 품종의 개는 어떻다 하는 주장이 대단히 그릇될 수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통설에 따라 생각하면 편리하다. 그러나 그릇된 정보에 바탕을 둔 행동은 이런 편견의 희생자들에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 언젠가 동네 개 산책 공원에서 내 친구 마티는 이런 말을 했다.

  “개에 관해서라면 정설이 없더라고.”

  개 행동의 일반화에는 신중해야 한다. 여기엔 실질적으로 중요한 측면도 있다. 플로리다대학교에서 법수의학 석사학위를 받고 경찰 부서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동물 행동 컨설턴트 제임스 크로스비는 개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을 연구하니 각 사례들과 개들을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고 말한다. 이런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손쉬운 대답은 없는 것이다.

 

 

 

나는 코요테, 늑대, 울새, 금붕어에 대한 일반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동물들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과학자들이 ‘종 내 변이’라고 부르는, 동일한 종 내에서의 변이가 어류, 곤충, 거미를 포함한 다양한 동물 종들에게 매우 큰 폭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와이오밍주 잭슨 북쪽의 그랜드티턴국립공원에서 8년 반 동안 야생 코요테를 연구했다. 그 결과 코요테의 행동에 대한 일반적 서술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타당하며, 특히 사회적 행동이나 상호작용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태어난 지 3주밖에 안 된 코요테도 안전한 굴에서 처음 밖에 나올 때 뚜렷한 기질 차이를 보인다. 매우 조심스러운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매우 용감한 녀석들도 있다. 집에서 기르는 개와 마찬가지로 야생동물들도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종을 포괄하는 일반화된 설명을 들이대는 것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개와 우리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 개라고 부르는 개별적 존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개 산책 공원을 포함해 여러 배경 속에서 개들을 연구하면서 개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는 개의 행동과 개의 행동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도 지레짐작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나는 항상 스스로 개별적 개의 앞발과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열광적 기쁨에서 숨막히는 슬픔까지 그들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고 깊이 공감하려고 애썼다. 개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많은 부분을 기꺼이 우리와 나눈다.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릴 만큼 세심해지기만 하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항상 개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하며, 이 책에서의 주제들을 늘상 생각한다. 어느 날 아침 자전거를 타고 볼더 시내를 가다가 비비언 팔머가 자그마한 반려견 바틀비, 거대한 반려견 블루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바틀비와 블루가 동일한 종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비비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허락했다. 개 일반에 대해 말한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를 똑똑히 보여준 개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시민과학자가 되어 자신의 반려견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그 지식을 이용해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라고 권한다. 때로는 이런 일상적 관찰이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더욱 체계적 연구로 이어지는 촉매 역할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8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개 산책 공원은 동물의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 동물행동학(cognitive ethology)과 인간과 동물의 상호 행동을 연구하는 동물유대학(anthrozoology)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 citizen scientist. 저자는 전문 훈련을 받고 엄밀하게 정립된 방법론을 따르는 과학자들에 대비해 일상에서 탐구 활동을 시도하는 평범한 시민들을 시민과학자라 부르며, 책 전체에서 이들의 활동을 격려하고 북돋운다.


  개 산책 공원과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시민과학은 과학자 탄생의 모태가 될 수도 있다. 세계적 영장류 학자이자 환경보호 운동가 제인 구달은 자신이 키우던 개 러스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러스티 덕분에 동물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구달은 말한다.

  “어린 시절 내내 동물행동학 분야의 멋진 스승이 있었다. 바로 나의 개 러스티였다.”

  《개들과 약자들Dogs and Underdogs》의 저자 엘리자베스 애보트는 구달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러스티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설명한다.

 

  러스티는 어린 제인에게 개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사물, 이를테면 이층 창문 밖에 던진 공을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러스티는 공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공을 찾아내 물고 왔는데, 이는 집 안에서 바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전략적 움직임을 구상해야만 가능했다. 또 러스티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있어서 자신이 뭔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는 수긍하는 반면 가끔 제인이 화를 벌컥 내거나 부당하게 대할 때는 수긍하지 않았다. 장난을 칠 때는 영리했고, 파자마를 입히면 좋아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꼴을 보고 소리 내어 웃으면 낑낑거리며 끝내 파자마를 벗어 질질 끌고 갔다.

  러스티가 제인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동물 저마다의 개성과 감정, 지능을 부정하는 현대 과학자들을 무시하라는 것이다. 그들과 달리 제인은 자신의 연구 대상인 침팬지들을 피피, 플로, 피건,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등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들의 행동과 활동을 기록하고 해석함으로써 마침내 과학이 동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녀의 비전과 방법은 한때 비과학적 의인화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점차 과학 연구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에는 확고한 표준이 되었다.

 

 

 

나는 자신이 기르는 개를 문신으로 새긴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다. 도표와 그래프까지 동원해 갖가지 상황에서 자신의 개가 보이는 행동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즐기며, 이러한 세심한 관찰은 틀림없이 그 개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로한이나 이런 초보 동물행동학자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여러분이 개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자신의 개든, 아니든 상관없다. 개들이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행동학자처럼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책 뒤에 부록으로 기본 지침들을 실었으니 참고 바란다.

  ‘개 행동학’을 하려면 개가 무엇을 알고, 느끼고, 행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개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또 가능하면 최대한 ‘개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개처럼 행동하라는 말은 아니다. 코를 킁킁대거나 개의 행동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개를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그들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고, 그들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개 행동에 대한 연구 결과와 특정한 맥락에서 실제로 우리가 본 개의 행동을 결부하라. 그런 다음 상식을 더해야 한다. 특정한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면 이 모든 관점을 조합해야 한다. 배워야 할 것은 늘 차고 넘친다.

 

 

 

동물을 자신의 집과 가슴에 받아들이기로 하는 결심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우리를 사랑해줄 동반자를 갈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런 관계와 우리의 의무는 금세 복잡한 국면에 빠진다.

  동료 제시카 피어스는 자신의 책 《달리고 찾아내고 달리다: 반려동물 기르기의 윤리Run, Spot, Run: The Ethics of Keeping Pets》에서 이를 “다른 동물에게 최고의 삶을 선사할 준비가 됐는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압축했다. 예를 들어 집의 환경은 동물에게 적합한가? 생활 방식은 동물에게 적합한가? 평생 들어가는 경비를 계산했는가? 삶을 마감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까다로운 현실적·윤리적 문제들이 기다린다. 사람들은 뒤늦게 다른 존재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한다.

 

 

열한 살 된 손자가 몇 년 전에 개를 입양했어요. 그들은 뉴욕시에 살고 나는 뉴저지주에 삽니다. 대개 내가 개를 산책시키죠. 녀석을 주로 두 군데 데려가는데 하나는 개 놀이터, 다른 하나는 센트럴 파크입니다.

  개 놀이터에서 녀석은 다른 개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여기저기 마구 달립니다. 때로는 상당히 거칠게 굴죠. 킁킁거리며 다른 개의 냄새를 맡고, 때로는 올라타려고도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거의 모든 개 주인은 행동을 저지합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그저 나와 함께 산책을 합니다. 대개 다른 개들을 쳐다보고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그치죠. 아주 가끔 그들과 몸싸움을 하려는 시도도 합니다.

  최근에 이렇게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기르는 방식, 특히 도시에서 기르는 방식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개는 어떤 과정을 거쳐 필요한 지식을 알까? 아무리 가축화된 동물이라고 해도 인간에게서 모든 걸 다 배울 수 있을까? 사회적 동물은 아니라지만 다른 개들에게 뭔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지성과 지식은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축적됩니다. 내 손자는 지금의 나보다 틀림없이 더 많은 것을 배울 겁니다. 하지만 내 손자의 개는 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짧은 시간을 빼면 대부분 다른 개들과 떨어져서 지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뭔가를 보고 배울 다른 개들이 없는 상태에서 개들은 어떻게 필요한 지식을 얻을까? 결국에는 항상 옆에 있는 반려자, 그러니까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진 않을까? 개는 모든 걸 스스로 알아낼 뿐 다른 개들의 지식을 전혀 활용할 수 없을까?

  다른 개들에게 배울 수 없다는 건 개에게 가장 큰 비극이 아닐까요?

 

 

개가 냄새로 시간을 파악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개들이 식사 시간을 알고 주인의 귀가 시간을 예측하는 것으로 보아 개들에게도 틀림없이 시간관념이 있다. 그러나 개들이 어떻게 시간을 파악하는지, 어떻게 시간을 이해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개가 증발 과정에 있는 냄새를 맡고서 이를 통해 시간을 추적한다는 가설을 제기했다(이로써 개가 반려자의 귀가 시간을 어떻게 알아내는지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지 확인할 순 없지만 특정한 상황에선 그렇지 않을까? 내가 여러 사람과 관찰한 바로는 개들은 누가 오줌을 눴는지, 또 얼마나 오래전에 눴는지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내는 듯하다. 물론 아직 입증되진 않은 사실로 만만치 않은 연구겠지만 이 흥미로운 가능성을 더 탐색할 필요가 있다.

  개들이 무엇을 알아내는지 확실히는 몰라도 어쨌든 그들은 쉴 새 없이 냄새를 맡는다. 어쩌면 잠을 자면서도 냄새를 맡는지 모른다. 그들은 덜 친한 개나 낯선 개뿐 아니라 이미 친한 친구가 된 개에게도 맹렬히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린다. 불과 몇 분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럴 때가 있다. 제시카 피어스가 키우는 개 벨라는 같은 집에 사는 마야가 병원에 갔다 오기만 하면 코를 킁킁댄다고 했다. 제스로가 겨우 1분 정도 떨어졌던 제크에게 맹렬히 코를 갖다 대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제크는 제스로가 코로 자신의 온몸을 더듬도록 참을성 있게 허락한다. 가끔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봐, 좀 전에 길 저편에서 오줌을 누다가 우리 친구 롤로를 만났지 뭐야.”

  개들은 코로 킁킁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 것이다. 어쩌면 방금 헤어진 사람에게 곧바로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사람의 행동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아직 뭔가 할말이 더 남았을까? 가끔은 그저 확인하려는 것뿐일 수도 있다.

  개들이 무엇을 알아내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개들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통해 탐구한다. 냄새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때로는 주변 상황이 어떤지, 자신이 뭘 하는지 깜박하기도 한다. 킁킁거리고 숨을 들이마시는 데 정신이 팔려 바로 뒤에 있는 내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다.

 

 

 

개의 코는 예술작품과 매한가지

  냄새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인간은 모든 냄새를 감지할 수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만 개는 사정이 다르다. 냄새는 개에게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개의 코는 냄새를 찾아내는 데 선수다. 개 연구자이자 저술가인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박사는 《개로 산다는 것Being a Dog》이라는 책에서 개를 ‘코의 동물’, ‘몸이 부착된 코’라고 부르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개가 살아가는 데 냄새가 너무도 중요하고 필수적이어서 개를 ‘후각 민감 포유동물macrosmatic mammal’로 분류한다. 나는 코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에게는 제2의 코로 기능하는 서골비 기관(야콥슨 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보조 후각계의 일부로, 휘발성 기체보다 액상 자극에 반응한다.

  개는 아무 데나 코를 들이대며, 그 순간 또는 그 직후에 자주 숨을 들이마신다. 개의 코가 극도로 민감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일단 냄새를 맡은 뒤 질문하기’로 요약해도 될 정도다. 개의 코가 왜 그토록 민감하게 진화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개들이 냄새를 통해 온갖 중요한 정보를 모은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정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때로 불명확하다. 수컷 개가 냄새를 통해 암컷의 짝짓기 의향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냄새를 통해 다른 개들을 식별하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또한 자신의 냄새와 다른 개의 냄새를 구별하고, 다른 개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기분은 어떤지도 파악하는 듯하다. 개들이 열정적으로 다른 개나 인간의 신체 부위에 코를 들이대거나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땅바닥과 무생물 대상을 훑어대는 것을 지켜보며 많은 사람들이 당황스러워하고 때로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게 거의 없다. 확실히 이 분야에서는 시민과학이 정식 연구에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할지 모른다.

 

 

 

 

개의 코가 가진 능력은 냄새의 이동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개의 코는 인간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세밀하게 냄새를 구별해낸다. 개는 우리에게 다 똑같이 느껴지는 냄새를 세세하게 구별한다. 알다시피 개를 훈련해 폭탄이나 마약, 금지 식품을 탐지하는 일에 동원하기도 한다. 개는 그저 탐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특정 종류의 식품만을 찾아낸다. 훈련받은 개는 섬세한 후각을 동원해 의사의 질병 진단을 돕기도 한다. 이들은 범죄 현장이나 실종자 수색 등 다양한 상황에서 냄새의 흔적을 찾아내거나 추적하는데, 이럴 때 냄새가 날아오는 방향, 냄새가 희석되는 정도까지 탐지한다.

  개들은 또 자연을 보호하는 생물학자 역할도 한다. 희귀종을 찾을 때, 동물의 먹이, 약물이나 중금속, 독소의 부존 여부를 파악하려고 동물의 배설물을 찾을 때, 상아나 뿔을 얻기 위한 코끼리와 코뿔소의 무자비한 밀렵과 밀거래를 막고자 할 때 개를 활용하면 함정이나 올가미를 사용하지 않고도 관심 대상인 동물 개체들을 추적할 수 있다. 자연보호 활동에 활용되는 개들과 관련해 흥미진진한 사실이 있다. 그중 많은 개들이 유기견 보호소 출신이며, 자연보호 활동가와 야생동물 보호요원들을 도우면서 흥미롭고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콜로라도주 볼더 외곽 산악지대에서 나와 함께 살던 개들은 흑곰과 퓨마가 근처에 있는지 여부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나는 녀석들을 따라 그들 코가 이끄는 곳으로 갔고, 배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았으며, 곰과 퓨마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실하면 집으로 돌아갔다. 한 녀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짧은꼬리살쾡이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참으로 대단하다.

  훈련받은 개들 덕분에 개들이 냄새로 사람에 대해 무엇을 배우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개들은 우리의 감정을 파악하고 몇 가지 질병을 판별한다. 사실 개들은 자력으로 의학적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제야 그들을 그렇게 훈련할 생각을 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질병은 반드시 똑같은 식으로 감지되지는 않는다.

  2016년 노바스코샤예술대학교 매슈 라이허츠 교수는 ‘개 산책 공원’이라는 테마로 전시회를 열고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다양한 냄새들을 개의 관점에서 표현한 일련의 그림을 소개했다. 라이허츠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냄새가 어떻게 울퉁불퉁한 땅 위로 퍼지는지, 개의 코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개가 냄새를 추적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연구했습니다. 개의 후각을 이해할수록 개의 후각 경험은 그들이 기거하고 돌아다니는 일종의 건축물에 대한 탐색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들의 수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늘 궁금했다. 개들이 잠을 잘 때, 그러니까 실제로 잠을 자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렇게 보일 때, 천천히 코가 양옆으로 움직이고 가끔은 숨을 들이마시거나 소리를 내거나 눈이 움직이는 것을 숱하게 보았다. 코로 들이마시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면 마치 개가 평화롭게 잠든 동안 방 안 곳곳을 코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맛있게 먹은 음식이나 친구들과의 즐거운 하루에 대한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이미 인간의 후각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어서 개와 비교해보면 도움이 된다. 후각은 개에게서 가장 진화한 감각이다. 뇌의 일부를 이루는 개의 후각 피질은 인간보다 40배 크다. 개는 뇌의 대략 35퍼센트를 냄새 처리에 쓴다(인간은 뇌의 5퍼센트만이 냄새에 관여한다). 개는 양쪽 콧구멍을 따로 움직여 후각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개의 코 내부에서의 공기 흐름을 연구한 학자들은 개가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코 옆에 난 좁고 기다란 구멍으로 숨을 내쉰다는 것을 알아냈다. 덕분에 냄새는 코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또한 개들은 한 번 콧김을 내뿜을 때 모든 냄새 분자를 밀어내진 않는다. 인간의 코는 4,000~1만 가지 냄새를 구별하지만 개는 3만~10만 가지 냄새를 감지한다. 그로 인해 개는 인간보다 10만~100만 배나 더 후각이 민감하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개의 코에 있는 상피조직을 펼치면 그들의 신체 전체를 덮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경우 기껏 어깨에 있는 반점 하나를 덮는 정도에 그친다. 개들은 초당 5회 냄새를 들이마시며,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하루 3분의 1을 냄새를 맡는 데 쓴다. 개들은 킁킁거릴 때 숨을 내쉬지 않으므로 희미한 냄새까지 감지할 수 있다. 양쪽 콧구멍을 따로 움직여 사용할 수도 있다. 개에게 단백질을 줄이고 지방을 더 먹이면 후각 능력이 향상된다.

 

 

 

개는 지나치게 냄새를 많이 맡으면 후각 피로 증상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후각 과부하를 염려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강아지용 향수, 샴푸, 비누는 개가 생물학적으로 더 중요한 냄새를 지각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개들이 애초에 이런 비누를 좋아하기는 할까? 혹시 이러한 것들은 인간을 위한 물건이 아닐까? 이렇게 인간이 선택한 냄새에 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노르웨이의 연구자로 개 후각 전문가인 프랭크 로젤에 따르면 개의 콧구멍은 흡입하여 폐로 들어가는 공기의 조절과 여과를 돕고 공기를 축축하게 만든다. 모든 생명체의 콧구멍이 숨쉬기 기능과 냄새 맡기 기능을 겸하지만, 개의 콧구멍은 인간의 콧구멍보다 훨씬 잘 조직되고 발달했다.

  다음은 로젤 박사의 말이다.

   

  개가 코로 숨을 쉴 때는 개의 기다란 코에 있는 호흡 부위를 거쳐 공기가 곧장 폐에 들어간다. 반면 개가 냄새를 맡을 때는 공기가 측면 통로를 따라 후각 함요olfactory recess라고 부르는 곳에 들어간다. 후각 함요는 후각 상피조직으로 덮여 있는데, 여기엔 후각 수용체(하나하나가 특정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단백질이다)를 만들기 위한 유전자들과 냄새 분자를 흡수하는 후각 수용체 세포들이 들어 있다. 인간과 영장류처럼 후각 둔감 포유동물microsmatic mammal은 개들과 구조가 달라서 이런 후각 함요가 없다. 개가 냄새를 맡을 때는 재빨리 콧구멍이 펼쳐지는데, 이때 위쪽 통로가 열리면서 공기가 곧장 후각 함요 맨 뒤쪽에 보내진다. 또한 확장된 후각 함요는 날숨과 들숨 때 공기 흐름을 증가시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공기는 감각기관을 통해 천천히 여과되어 폐에 들어간다.

 

 

 

 

후각 점막은 품종에 따라 다르고, 같은 품종 내에서도 나이에 따라 다르다. 저먼 셰퍼드는 후각 점막 부위가 가장 넓어서 96~200cm2에 이르고 코커 스패니얼은 67cm2쯤 된다. 반면에 어린 폭스테리어는 11cm2밖에 되지 않는다. 후각 점막의 표면적이 클수록 희미한 냄새 신호도 잘 흡수할 가능성이 크다.

   

  연구자들은 표면적을 측정하면서 품종별 후각 수용체 세포 수를 확인했는데, 공식 기록을 보면 블러드하운드가 거의 3억 개로 가장 많다. 블러드하운드는 최고의 후각을 가진 개로 인간보다 무려 1천만~1억 배 더 민감하다. 참고로 저먼 셰퍼드는 2억 2,000만 개, 폭스테리어는 1억 4,700만 개, 닥스훈트는 1억 2,500개의 후각 수용체 세포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인간의 코와 개의 코 비교

     

    인간 코의 중요성에 비하면 개의 코는 개에게 얼마나 중요할까? 다음 비교를 참고하기 바란다.

     

    • 개의 후뇌는 인간에 비해 거의 일곱 배가량 크다.

    • 개들은 후각 점막의 표면적이 67~200cm^2에 이르고, 인간의 후각 점막은 3~10cm^2에 불과하다.

    • 개는 후각세포가 1억 2,500만~3억 개, 인간은 500만 개다.

    • 개는 후각세포당 섬모가 100~150개, 인간은 6~8개다.

    • 개는 1조 분의 1 농도ppb의 화합물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인간은 10억 분의 1 농도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개가 숨을 들이마실 때 콧구멍에서 가까운 공기가 흡입되며, 개는 흡입된 공기가 어느 쪽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안다. 개의 콧구멍은 그저 한 쌍의 구멍 이상으로 복잡하다. 각각의 콧구멍에는 코에 들어가는 공기 흐름 조절을 위해 여닫는 날개 같은 덮개가 있어서 코로 드나드는 공기 방향을 결정한다. 개가 숨을 들이마시면 덮개 위와 옆이 열린다. 숨을 내쉬면 구멍이 닫히고 공기가 덮개 아래와 옆으로 나와 다른 구멍에 들어간다. 그 결과 안에서 내쉬는 따뜻한 공기는 뒤로 흘러 흡입된 냄새와 섞이지 않고 덕분에 개는 계속 다른 냄새들을 수집한다. 들이마신 냄새와 밖으로 내쉬는 공기가 분리되는 것이다. 냄새 분자는 안에서 데워지고 난 다음 더 쉽게 기체 형태로 바뀌며, 덕분에 냄새 수집 능력은 더욱 강화된다. 개는 코를 바닥 가까이 대고 재빨리 킁킁거림으로써 무거운 비휘발성 냄새 분자까지 띄워 올려 콧구멍 안에 빨아들인다.14

   

  종합하면 개의 코는 예술작품이라고 할 만큼 절묘한 적응과 최고의 진화가 낳은 산물이다. 그러는 동안 아무런 계획이나 목표도 없었다. 간혹 개처럼 민감한 코를 가지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잘 생각하라고 말해준다. 이토록 놀라운 적응에 대해 알게 되어 기쁘지만 그런 나도 개들이 수집하고 명백히 즐기는 그 많은 냄새들을 모두 경험하고 싶단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개들은 시각적으로 잡식성이어서 다양한 수준의 밝기에서 볼 수 있다. 개들은 2색형 색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녹색과 회색, 노란색과 오렌지색을 구별하지 못하고, 빨간색을 검은색으로 볼 것이다. 색깔이 시각적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개의 시각 능력은 종마다 다르다. 그레이 하운드는 최고의 시력을 가진 품종으로 홍보되었지만, 완전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인간은 개보다 근접 시력이 뛰어나다. 개는 근접한 자극을 판별하려고 냄새와 소리를 함께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개들은 정지된 자극보다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확실히 이런 능력은 (7장에서 살펴볼) 꼬리 흔들기 같은 사회적 신호를 읽어내는 데 중요하다. 우리는 또 개들이 머리의 시각적 생김새를 바탕으로 종을 구별한다는 것도 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가 멀리서도 다른 개를 ‘읽을’ 수 있으며, 그 개가 친절한지, 놀고 싶어 하는지, 물러나려고 하는지 제대로 판단하는 것 같다는 말을 꾸준히 했다. 그런데 개는 시력의 정확성이 20/75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75피트(약 23미터) 떨어져서 보는 정도를 개는 20피트(약 6미터) 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안경을 써야 할 수준이다! 그러니 개가 다른 개를 먼 거리에서 어떻게 알아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클레이본 레이는 도미니크 오티에-데리앙 연구팀이 쓴 논문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그마한 몰티즈에서 거대한 세인트 버나드까지 체구도 다르고 털·주둥이·귀·꼬리·골격 모양도 천차만별인 개들은 하나의 종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개들은 냄새나 움직임, 발성 같은 단서가 없을 때조차 쉽게 서로를 알아본다.”

  자신의 개가 다른 개와 처음 만날 때 같은 품종끼리는 호감을 보이고 품종이 같지 않은 개체들에게는 다르게 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설치류가 친족을 알아보듯 이 또한 냄새에 바탕을 둔 것일까? 자신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알아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개들이 반드시 아는 건 아닐 테니. 1960년대의 조류 연구에서는 새들이 물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깃털 색깔을 안다고 했다.

  개가 색맹은 아닐지라도 지각할 수 있는 색의 범위는 인간에 비해 제한적이며, 대체로 적록색맹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색을 구분한다. 또한 개들은 밤에는 인간보다 더 잘 볼 수 있어서 인간보다 다섯 배 흐릿한 밝기에서도 볼 수 있을 걸로 추정된다.

 

 

 

 

개에게는 촉각도 중요하지만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어떤 개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껴안으면 좋아한다. 또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면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는데 초조하거나 짜증이 날 때 그렇게 하면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접촉을 썩 좋아하지 않는 개들도 있다. 그럴 때는 접촉을 기피하는 개의 성향을 존중해야 한다.

  개들끼리의 접촉은 근접 거리에서 맞닥뜨렸을 때 이뤄진다. 이때 접촉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강화할 수도, 손상시킬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트레스를 받은 개에게 천천히 다가가 마치 “괜찮아질 거야” 하고 말하듯이 옆에 엎드리고 상대방 등에 앞발을 올리는 개를 본 적이 있다. 개들도 가끔 서로서로 털 고르기를 하며, 배와 등을 붙이고 잠을 자기도 한다. 하지만 접촉을 좋아하는 개도 있고, 그렇지 않은 개도 있다는 것 말고는 개의 촉각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제스로는 껑충껑충 달려가 제크 바로 앞에 멈췄다. 그러고는 앞발을 쭉 편 채 쭈그리고 앉아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제크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고는 그의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고, 뒤쪽으로 돌아 그의 위에 올라탔다가 다시 내려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 후 옆으로 돌아가 그의 엉덩이를 툭 치고 뛰어올라 그의 목을 문 뒤 달아난다.

  제크는 맹렬히 제스로를 쫓아가 뒤에서 올라타고는 잇달아 그의 코와 목덜미를 물고 양옆으로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수키도 합세해 제스로와 제크를 뒤쫓아가더니 세 녀석이 한꺼번에 엉켜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몇 분 동안 서로 떨어져서 여기저기 코를 킁킁거리며 쉬는가 싶더니 제스로가 천천히 제크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 쪽으로 앞발을 내밀고 귀를 꼬집는다. 그러자 제크가 일어나서 제스로 뒤쪽에 가서 올라타고는 물면서 허리를 움켜잡는다. 둘은 바닥에 넘어져 뒹군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로의 뒤를 쫓고 몸을 굴리며 논다. 수키까지 합세해 세 녀석은 지칠 때까지 신나게 뛰어논다. 놀이가 끝난 후 다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롤로가 다가오자 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내가 기록한 현장일지의 일부다. 개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한 수많은 사례들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몇십 년 동안 개들이 노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한 번도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개들은 그저 즐기고 싶을 뿐이다. 왜 아니겠는가?

 

 

나는 혼자 공원에 나가서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개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많다. 사람들이 자신의 개에게 마음껏 뛰어놀고 킁킁거리도록, 말하자면 개가 개답게 놀도록 허용할 때는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개에게 놀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를 선사한다. 개들은 30초마다 제지당하고, 불려가고, 지적당하지 않으면서 냄새를 맡고, 뛰어다니고, 오줌을 싸고, 놀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개 산책 공원이라도 개들에게 무한정 자유를 허용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시계로 측정하지 않는 ‘개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사람들이 간혹 자신의 개에게 “2분간 시간을 줄게” 하고 말하는 걸 들으면 웃음이 난다. 개의 몸속에 시계라도 들어 있는가? 사람들은 “좋아. 5분 동안 여기 있을 테니 얼른 오줌도 싸고 친구들이랑 놀다 오렴” 하고 말하고는 잠시 후 개를 부른다. 그래 놓고 곧바로 오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왜 이렇게 꾸물거려? 10분 동안이나 불렀잖아.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그럴 때 개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음, 10분이 얼마나 긴 시간이지? ‘이제’는 무얼 말하는 거지?”

  개들이 실제로 ‘시간을 냄새 맡을’ 수 있다 해도, 즉 냄새가 희미해지는 정도를 파악해 얼마나 오래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낸다 해도, 인간의 용어로 시간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놀이는 개가 최고로 좋아하는 활동이며, 본래 놀이를 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법이다. 개들은 대부분 놀 시간이 부족한 상태다.

 

 

 

 

 

놀이에는 자유에 더해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즐거움과 친구다. 놀이는 개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므로 그 자체로 풍요로운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는 그야말로 절친인 새디와 록시라는 개를 안다. 새디는 여러 계통이 뒤섞인 털북숭이에 몸집이 작은 잡종견이고, 록시는 몸집이 호리호리한 복서 품종의 잡종견이다. 새디는 개 산책 공원에 도착한 즉시 킁킁거리고, 오줌을 싸고, 고개를 바싹 들어 눈과 냄새로 누가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곧바로 다시 공원 입구에 달려가 록시를 기다린다. 록시가 이미 공원에 와 있을 때는 100에 95번은 곧장 새디에게 달려간다. 그러고는 둘은 마치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일은 록시가 나타나지 않은 날에 벌어진다. 새디는 다른 개들이 와서 인사하고 같이 놀자고 해도 천천히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한다. 록시의 행방을 찾는 게 틀림없다. 새디는 보통 20초 정도 걷는다. 그 정도면 록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다음에야 새디는 단념하고 어울려 놀 다른 상대를 찾는다.

 

새디는 록시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토록 빨리 알아낼까? 새디가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어울려 놀 친구를 찾았다면 록시가 오지 않을 확률은 99퍼센트로 정확하다. 그렇다면 새디와 록시가 단짝친구고, 특별히 둘이서 어울려 놀기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까? 물론이다. 둘의 반려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새디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어쩌면 시간 감각까지 사용해서 록시가 올지 말지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만약 록시가 없으면 새디가 개 산책 공원에서의 자유를 허비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떤 개가 그러겠는가?

   


   

  개들은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재미 삼아 논다. 지금 이 순간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신나게 논다. 개들은 다른 개들이 노는 걸 보면 따라서 놀려고 한다. 놀이는 사회적으로 전염성이 있어서 유행병처럼 급속도로 번지곤 한다. 개들을 관찰하면 불쑥불쑥 나도 함께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하진 않는다. 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테니. 나는 개가 함께 노는 무리에 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짖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고, 합세해 같이 놀기도 하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놀이는 틀림없이 재미있지만, 때로는 진지한 일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에서 “강아지, 새끼 고양이, 새끼 양 같은 어린 동물들이 아이들처럼 함께 어울려 놀 때보다 더 행복한 모습은 없다” 라고 썼다. 또 같은 책에서 “중요한 점은 자연학자들이 특정 동물의 습성을 연구할수록 이성의 결과로 보이는 것이 많아지고 타고난 본능으로 보이는 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라고 썼다.

 

 

 

실제로 많은 동물들이 놀이를 한다. 쥐도 간질이면 웃는다. 간지럼에는 진정 효과가 있다! 놀이를 하면 뇌에 도파민(어쩌면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화학물질이 분비되어 놀이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놀이 자체를 조절하는 것을 돕는다. 놀이 기회를 예감하는 쥐들한테서는 도파민 분비가 늘어나는데 그들은 장난스럽게 간질이는 것을 즐긴다.

  개들은 무모하리만치 제멋대로 놀 때가 많다. 사람들은 내게 묻곤 한다. 저렇게 정신없이 빠르게 뛰고 구르고 달려들고 물고 도망치는 와중에 개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놀이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지를, 또 어떻게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지를. 개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신체적 허용치, 즉 상대방, 오가는 사람들,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몸이 어떤 위치인지 아는 듯하다. 나로파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틴 콜드웰의 말처럼 개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마음을 의식하고 “몸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개가 ‘지나치게’ 놀아도 문제없을까?

   

  이따금 개들이 지나치게 많이 놀기도 하는지 사람들이 묻는다. 보통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물론 개는 놀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기진맥진해지거나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가끔은 개가 자신의 행동과 주변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할 때도 있다.

  다행히 이 주제에 대해 준 그루버 박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인간의 ‘과도한 행복’이 지닌 부정적 측면에 대한 전문가로, 우리가 나눈 논의는 〈긍정적 감정의 폐해에 대한 종들 간의 비교 접근 A Cross-Species Comparative Approach to Positive Emotion Disturbance〉이라는 연구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대체로 개들은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피로한 상황에서도 포식자나 다른 동물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반면 파키스탄의 쿤저럽국립공원에 사는 노란배마멋을 현장 관찰한 연구를 보면 마멋은 놀이에 열중한 동안 포식자에게 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또 남방물개는 바다에서 놀이를 하는 동안 경계심이 낮아져 남방바다사자에게 희생될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나는 중간 크기의 잡종견 로키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놀이에 푹 빠져서’ 자기만큼 거칠게 놀고 싶어 하진 않는 낯선 개들과 노는 모습을 두 번 정도 보았다. 로키가 다른 개들의 메시지를 명확히 이해했다는 사실은 나를 매료했다. 들릴락 말락 한 짤막한 그르렁거림을 포함해 단 두 차례의 가벼운 질책만으로 로키는 수위를 낮춰 모두가 원하는 수준으로 함께 즐겼다. 10분 뒤에 내가 공원을 떠날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놀고 있었다. 개들은 그르렁거림으로 자신의 말을 표현한다는 연구가 있다.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개와 여타 동물들이 놀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놀이를 연구하려면 허리를 숙이고, 흙을 묻히고, 개와 함께 놀아야 한다. 그래야 개가 무엇을 놀이로 여기는지, 누구랑 놀고 싶어 하며, 좋아하는 놀이 상대가 아닌 사람은 누군지 따위를 알아낼 수 있다. 아주 쉽다. 여러분의 개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와 어울리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지 살펴보라.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너무도 단순해 보이는 질문은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골칫거리였다. 사회적 놀이에 대한 다음 정의는 동물행동학자 존 바이어스와 함께한 놀이 연구에서 얻은 결론이다. 존은 멧돼지의 일종인 페커리를 연구했고, 나는 가축화된 개·늑대·코요테·자칼·여우 등 다양한 개과 동물들을 연구했다. 우리 둘은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 포유동물의 놀이에서 많은 공통된 특징을 찾아냈고 놀이를 정의할 수 있었다. 사회적 놀이란 놀이가 아닌 맥락에서 사용되는 행동을 수정된 형식과 변형된 순서로 가져와 다른 개체들을 향해 행하는 활동이다. 동물들이 놀이를 할 때는 놀이가 아닐 때 하는 것만큼 오래 하지 않는 행동들도 있다.

 

 

 

 

 

여기서 보듯이 동물들은 놀이를 할 때 포식(사냥)이나 생식(짝짓기), 공격 등 놀이가 아닌 맥락의 활동에서 사용되는 행동을 차용하거나 흉내낸다. 놀이에서는 전면적 위협과 굴복이 매우 드물다. 포식자에 대한 대항 행동에 사용되는 행동 패턴 역시 놀이에서 관찰된다. 사슴, 말코손바닥사슴, 가젤 등 흔히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는 유제동물들이 놀이 도중 종잡을 수 없는 지그재그 패턴으로 달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동물들이 놀이를 할 때는 이런 행동들의 형식과 강도가 달라지고, 예상할 수 없는 다양한 순서로 조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컹크, 코요테, 미국흑곰의 경우, 실제 상황에서 싸울 때는 이빨로 물지만 놀이로 싸울 때는 상당 부분 억제된다. 곰의 경우 발톱으로 할퀴는 일을 자제하며 덜 격렬하게 한다. 또 곰은 놀이에서는 대체로 으르렁거리지 않으며, 물기와 할퀴기도 실제 공격에 비해 상대방의 다양한 부위를 겨냥한다. 놀이 순서도 한층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놀이를 할 때 개들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맹렬히 몸싸움을 하고, 짖고, 물고, 뒤쫓고, 구른다. 놀이가 아닌 맥락에서 차용한 행동들을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놀이를 자세히 관찰하면 짝짓기나 실제 싸움, 사냥을 할 때 나타나는 행동들과는 순서가 다르다. 놀이 전문가이자 《동물의 놀이 행동Animal Play Behavior》이라는 고전적 책을 쓴 로버트 페이건은 오래전, 내가 학생들과 함께 어린 강아지, 코요테, 늑대의 놀이와 공격에서 보이는 행동 순서에 대해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한 적이 있다. 그는 놀이를 할 때의 행동 순서가 공격성을 보일 때보다 확연히 더 가변적임을 확인했다.

  놀이를 할 때의 행동 순서가 실제 상황에서보다 한층 가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은 여러 맥락에서의 행동들을 뒤섞어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개가 놀이에서 활용하는 행동은 평소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 따라서 놀이에서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란 그야말로 어렵다. 정말로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짝짓기를 할 때의 행동 순서는 그보다 훨씬 더 구조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이런 행동에는 특정한 목표가 있다.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개는 차츰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공통된 순서를 따른다. 일단 위협하고, 뒤쫓고, 달려들고, 공격하고, 물고, 이어서 한쪽이 굴복할 때까지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개, 코요테, 늑대가 놀이를 할 때 보이는 순서는 훨씬 다양하다. 예컨대 물기·뒤쫓기·몸싸움·몸 부딪히기·다시 몸싸움·짖기·뒤쫓기·달려들기·다시 물기·몸싸움 등의 순서로 이어지곤 한다.

 

 

 

 

짐작컨대 놀이는 다양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게 한다. 상세히 연구한 결과, 놀이는 사회성 발달, 신체 발달(관절·근육·힘줄·뼈 발달·유산소 훈련·무산소 훈련 등), 인지 발달, 돌발 상황 대처 훈련에 중요하다. 게다가 신경생물학적 연구는 놀이를 할 때 재미가 있으며, 동물들은 그저 기분이 좋아져서 놀이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재미에는 놀람이라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놀이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으로 진화했다는 견해와 연결된다.

  놀이는 만화경 같고 가변적 순서를 보인다는 점이 이러한 이론의 바탕이 된다. 또한 놀이는 어색함을 누그러뜨리고, 긴장된 상황에서 불안을 가라앉힘으로써 공격으로의 비화를 차단하는 항불안 효과도 있다. 개가 다른 개나 인간에게 천천히,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무엇을 기대할지 모른 채 다가가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다가가던 개가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하면 곧바로 놀이가 시작된다.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에게서는 어른이 되기 전에 사회적 놀이가 증가하며, 사람도 긴장 완화를 위해 놀이를 이용한다.

 

 

 

 

개들은 놀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동작들을 사용한다. 바로 인사하기, 얼굴 긁기, 다가갔다가 재빠르게 물러나기, 한 방향으로 가는 척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입으로 물기, 놀아줄 상대를 향해 달려가기 등이다. 놀이 신호는 동물행동학자들이 말하는 ‘정직한 신호’를 보여준다. 사회적 놀이가 조작 행동으로서 진화한 증거는 어떤 종의 동물에게서도 찾을 수 없다. 놀이 신호는 개과 동물에서든 다른 종에서든 상대를 기만하려고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흔히 시각적 놀이 신호, 특히 놀이 요청 인사에 주목하지만, 개 연구자 존 브래드쇼와 니콜라 루니가 지적했듯이 모든 놀이 신호가 시각적인 것은 아니다. 개들은 놀고 싶을 때 장난으로 헐떡이고, 짖거나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개가 인사하는 모습은 누구나 본 적 있을 것이다. 앞발을 쭉 뻗고 납작 엎드리는 동작인데, 그 자세로 꼬리를 흔들거나 짖을 때도 많다. 촬영과 연구가 용이한 이 동작은 이미 꽤 많이 알려져 있다.

  인사하기는 본질적으로 놀이를 위한 계약이며, 놀이를 청하고 이어가기 위해 사용되는 대단히 정형화되고 알아보기 쉬운 신호다. 또 인사하기는 진정시키는 신호calming signal로도 쓰인다. 놀이 신호로 쓰일 때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여러 연구들을 통해 다른 기능들도 밝혀졌다. 인사는 어린 개들끼리, 좀 더 나이든 개들끼리, 그리고 어린 개들과 나이든 개들끼리 다르게 쓰기도 한다. 개 전문가 패트리샤 맥코넬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과학은 가정하고 검증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개들이 공평하게 놀이하는 비결은?

   

  개 산책 공원에서 생김새, 크기, 속도, 힘이 너무도 다른 개들이 갈등을 겪거나 부상을 입지 않고 성공적으로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개와 여러 동물들은 놀이가 이루어지려면 그 놀이가 공평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크고 힘이 세고 우세한 개는 역할 바꾸기 또는 자기 불구화를 통해 힘 빼기를 한다. 이러한 절충이 놀이의 공평한 지속을 돕는다. 역할 바꾸기란 우세한 동물이 일반적으로 진짜 공격할 때는 하지 않는 행동을 놀이 중에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세하거나 서열이 높은 개, 코요테, 늑대는 진짜 싸울 때는 절대 바닥에 등을 대고 몸을 뒤집지 않지만 놀이에서는 그렇게 한다. 에리카 바우어와 바버라 스뮈츠는 역할 바꾸기가 놀이를 이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진 않아도 놀이를 용이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뒤쫓기와 넘어뜨리기에서는 역할 바꾸기가 일어나지만 올라타기, 주둥이 물기, 주둥이 핥기에서는 결코 역할 바꾸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후자가 집에서 기르는 개들의 놀이에서 상호 간에 우위를 인정하는 불변의 지표임을 말해준다.”

 

 

 

 

 

자기 불구화 역시 놀이의 지속성과 공평함을 위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많은 종의 개체들이 놀이를 할 때는 살살 무는 것으로 규칙을 지키고 놀이 분위기를 이어간다. 연구마다 다소 결과가 다르지만, 몸 뒤집기는 역할 바꾸기인 동시에 자기 불구화일 수 있다. 몸 뒤집기는 단순 명료한 동작이 아니다. 사실 어떤 행동에서도 단순한 일대일 대응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더군다나 놀이처럼 변화무쌍한 행동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케리 노먼 연구팀은 몸 뒤집기 같은 드러누운 자세가 개들의 놀이를 촉진했으며, 그 자세들 중 어느 것도 굴복의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썼다. 몸집이 작은 개도 큰 개보다 자주 몸을 뒤집진 않았으며, “몸을 뒤집는 개들은 대부분 방어(목덜미를 물리지 않기)나 공격(공격 개시)에 목적이 있었다. 굴복으로 볼 만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 연구에서는 등을 대고 누운 자세를 복종의 의미로 보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버라 스뮈츠 연구팀은 “개들이 몸 뒤집기를 하며 놀 때 결국 나이들고 몸집이 큰 개들이 위에 올라타는 것으로 끝나거나 몸을 뒤집은 쪽이 방어적인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개 연구자 줄리 헥트의 몸 뒤집기에 대한 의견이다.

 

⑴ 개 두 마리의 놀이에서 몸 뒤집기는 대부분 놀이를 촉진한다. 예를 들어 바닥에 누운 개는 다른 개와 장난으로 싸우며 목을 물거나 물리는 것을 피하고 입을 벌린 채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경우가 많다. 연구자들은…… 놀이 도중의 몸 뒤집기는 대부분이 장난 싸움(진짜 싸움이 아니라 놀이로 하는 싸움)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놀이 중에 하는 몸 뒤집기는 놀이일 뿐 ‘공격성’과 관련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⑵ 놀이 도중의 몸 뒤집기를 자기 불구화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몸집이나 사회성이 다른 개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 불구화는 놀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개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행동을 완화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개들은 놀이를 할 때 세게 물지 않으며, 큰 개가 바닥에 드러누워 작은 개로 하여금 올라타거나 물게도 한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개의 사생활: 개가 보고, 냄새 맡고, 아는 Inside of a Dog: What Dogs See, Smell, and Know》에서 그러한 행동을 이렇게 기술했다.

  “몸집이 큰 개들은 수시로 바닥에 드러누워 자기보다 작은 상대에게 배를 보이고 잠깐 동안 멋대로 하도록 허용한다. 나는 이러한 행동을 자발적 굴종self-takedown이라고 부른다.”

  자발적 굴종은 놀이를 촉진하는 일종의 자기 불구화 행동일 수 있다.

 

 

 

 

 

 

인사하기, 역할 바꾸기, 자기 불구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 책의 초기 독자는 몸 뒤집기가 항상 우호적 놀이 신호만은 아님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냈다.

   

  예전에 몸무게가 13킬로그램쯤 되는 개를 키운 적이 있어요. 녀석은 노란색 래브라도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그들을 찾으러 공원 곳곳을 누비고 다녔죠. 그 녀석은 래브라도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내 개는 희한하게도 로트바일러 품종이라면 넌더리를 쳤어요. 녀석은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배를 드러내고는 그들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다른 개들을 유인했어요. 그러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 아무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자기보다 20킬로그램도 더 나가는 개들을 공격했습니다. 이게 무슨 꿍꿍이속인가요? 흔한 행동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 책이 던지는 주요 메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개에 대한 신화를 조심하라는 메시지다. 모든 개가 공평하게 놀지는 않으며, 모든 상황에서 공평하게 놀지도 않는다. 개들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관행적 이론들을 무산시켜버리기 일쑤다.

 

 

 

 

 

 

 

놀이를 지배하려고 하면 심각한 싸움으로 번지거나 놀이 상대로 외면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습니다(어린이들·붉은털원숭이·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이는 놀이의 분위기를 좋게 하면서 놀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규칙이 있고, 동물들이 이런 규칙을 준수한다는 뜻이죠. 내 생각에는 이것이 놀이의 보편 원칙일 가능성이 큽니다.

  개들의 경우 상황이 복잡하다는 당신 말도 옳습니다. 우리는 놀이 시합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개별 개들의 마음을 전혀 파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에서 만든 단순한 이론적 예측은 빗나가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여러 종의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최근 확인한 바로는, 싸움 전략에서는 종들 간의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지만 역할 바꾸기 비율은 30퍼센트로 거의 일정했습니다. 행동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지만 오해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행동은 당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올바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 수치를 통한 불균등성의 평가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놀이가 불균등하다고 하려면) 인간 관찰자가 아니라 개가 놀이를 불균등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저런 연구들에서 가볍게 언급된 적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내가 관찰한바, 덜 친한 개들끼리는 친한 개들끼리 하는 것보다 서로에게 더 많이 인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는 패트리샤 맥코넬의 연구가 그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 개를 이용해 볼더의 동네 개 산책 공원에서 연구를 실시했다. 그중 팅커벨은 어떤 개와도 잘 어울려 노는 사회성이 좋은 개였고, 허긴스는 놀이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친한 개들끼리 놀 때는 놀이가 난투 양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개들은 아는 상대와는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곧바로 놀이에 돌입했다. 관찰 대상이던 모든 개들이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또 개들은 자신들이 아는 개들, 모르는 개들 모두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개들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서로 아는 개들은 더 거칠게 놀았고, 냄새 맡거나 인사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서로 모르는 개들끼리는 형식과 예를 갖추었고, 냄새 맡거나 코를 비비는 등의 행동으로 놀이 상대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개들의 공평한 놀이 규칙은 무엇일까?

   

  집에서 기르는 개들에 대한 연구는 공평함과 정의의 진화 과정을 탐구하기 위한 독특한 접근법을 제공한다. 개는 대단히 사회적인 개과 동물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협력하도록 길러진 동물이다. 개들은 사회적 놀이에서 협력해 행동하며, 여러 가지 사회적 인지 과제들을 능숙하게 해낸다. 따라서 개들이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영장류와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타당하다. 과연 개들은 불공평함과 부당함을 인식하고 반응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과의 장기적 제휴와 인간에 의한 선택에서 비롯된 특징일 것이다.

  놀이가 진짜 공격으로 비화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환경과도 무관하다. 우리는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동물의 공평한 놀이에는 네 가지 기본적 측면이 있음을 확인했다. 먼저 의사를 묻고, 정직하게 하고, 규칙을 지키고, 잘못했을 때 인정한다. 개와 그 밖의 동물들은 이런 놀이 규범을 공유한다. 놀이 규칙을 어기는 바람에 공평함이 무너지면 놀이도 무너진다. 그들은 놀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놓치지 않고 추적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한눈팔아서는 안 된다.

  물론 개들도 가끔 규칙을 어긴다. 속임수를 쓴 개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는 것이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다른 개들이 속임수를 쓴 개와는 놀지 않으려고 하니 놀이 상대로 선택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놀이를 하는 것처럼 속여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 어린 야생 코요테는 다른 코요테들과 어울려 노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실질적 결과로 이어진다. ‘속임수를 쓰는’ 개체는 같이 자라는 무리에서 따돌림을 받아 사망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평하게 놀지 않거나 게임 규칙을 지키지 않는 개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건 아마도 자손을 남길 확률과 부정적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정보가 많진 않지만 실제로 이 관계가 얼마나 확고한지 알아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개들 사이에서 놀이가 자주 싸움으로 번지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들은 놀 때마다 공격적으로 돌변해요”라고 즉각 단언한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놀이가 심각한 공격으로 번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주변의 이목을 끈다. 드물지만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개 놀이 공원과, 원인 제공을 한 개의 반려자를 싸잡아 비난한다. 또 사람들은 놀이가 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신호를 어떻게 포착하는지 묻곤 하는데, 워낙 개체마다 다르니 딱 잘라서 답하기 어렵다. 예컨대 개들이 서로를 얼마나 잘 아는지, 전에 얼마나 같이 놀았는지, 상대적 크기가 어떤지에 따라 신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 개만의 특징과 평소 놀이 방식을 면밀하게 관찰해두라고 강조하고 싶다. 사실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워낙 드물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을 위한 자료 자체가 부족하다.

  학생들과 나는 아직 개가 하는 놀이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갖추지 못했지만, 몇천 번이 넘게 놀이를 관찰해도 심각한 싸움으로 번진 경우는 기껏해야 2퍼센트 정도라는 데 다들 동의한다. 현재 콜로라도주 볼더의 개 산책 공원에서 관찰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드러난 사실도 이런 결론을 뒷받침한다. 한편 학생들과 나는 주로 어린 야생 코요테들의 놀이를 1,000번 정도 관찰했는데, 그 가운데 심각한 싸움으로 번진 경우는 딱 5회뿐이었다. 멜리사 쉬얀 연구팀도 개의 놀이가 갈등으로 확장된 사례는 0.5퍼센트 이하이며, 그중 절반만이 확연한 공격적 양상을 나타냈음을 보고했다.

 

 

물론 가끔은 놀이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과하게 흥분해 놀이 상대를 지나치게 꽉 물거나 세게 쳐서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나도 흥분한 나머지 난폭해져서 ‘다른 개의 얼굴에 돌진한’ 자신의 개에게 놀란 반려자가 “그렇게 거칠게 놀지 마!” 하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개입하기 전에는 모든 게 공평하고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일 뿐이다. 놀이는 공평함에 입각해 참가자들에게 상당한 협조를 요구한다. 놀이가 유지되려면 지속적 협상을 통해 주고받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규칙이 준수되는 한 놀이가 진짜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개들의 세계에 지배 행동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왜 논쟁거리가 되는가. 솔직히 참으로 의아하다. 야생 개과 동물을 포함해 내가 아는 모든 종의 동물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 지배 행동을 보이지 않는 동물을 본 적이 없다. 개라고 해서 다른 동물과 다를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지배 행동’이 개들의 세계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가혹한 훈련 방법을 정당화하고 원치 않는 행동에 벌을 줄 때 지배 행동을 구실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종종 고집스럽거나 흥분되거나 공격적인 행동, 가령 무절제하게 교미를 하거나, 사람에게 올라타거나, 목줄을 잡아끌거나, 장난감을 달라고 으르렁거리는 행동에서 ‘지배 행동’을 본다.

  개 훈련사이자 저널리스트인 트레이시 크룰릭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개들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을 지배 행동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린 다음 관찰을 중단하며, 개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개들에게 ‘지배 행동’이란 혐의를 씌워 처벌한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한마디로 개가 자신들 위에 올라서려고 했다, 자신에게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요점을 말하면, 앞서 언급한 여러 종들의 상세한 비교연구와 갈수록 늘어나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배 행동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존 브래드쇼 박사 연구팀은 지배 행동이 순전히 관계에 관한 것임을 정확히 지적한다. 바로 이 책에서 온갖 종류의 사회적 상호 행동과 관련해 일관되게 강조하는 점이다.

  특히 개들과 그 야생 친척들은 지배-복종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지위의 서열을 뚜렷이 보여준다. 동물행동학에서는 “지붕에서 뛰어내리면 바닥에 떨어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그릇된 신화를 몰아내기로 하자.

  첫 번째는 지배적 개체가 종속적 개체보다 항상 더 많은 자손을 낳는다는 신화다. 그렇지 않다.

  두 번째는 개들은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는 속설이다. 그러나 개들은 무리를 이룬다. 직접 보기도 했고, 이탈리아 로마 외곽의 떠돌이 개들에 대한 로베르토 보나니 연구팀의 상세한 연구와 그 밖의 여러 학자들이 해온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명한 동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고전적 저작 《사회생물학: 새로운 합성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에서 각기 다른 세 가지 유형의 서열을 확인했다. 그 세 가지는 폭정, 선형적 서열, 비선형적 서열이다. 폭정에서는 한 개체가 집단의 나머지 모든 성원을 지배하며 다른 성원들끼리는 위계의 차이가 없다. 이를 A ›B=C=D=E로 표시할 수 있다.

  선형적 서열에서는 각각의 개체가 사다리처럼 위의 개체에 종속되고 아래 있는 개체를 지배한다. 이는 A ›B ›C ›D ›E로 표시되며, B ›D, C ›E의 관계가 보존된다.

  마지막으로, 비선형적 서열에서는 다른 모두를 지배하는 하나의 개체가 반드시 존재하지 않아도 되며, 개체들의 관계가 선형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는 A ›B, B ›C, C ›D, D ›E이면서 E ›A, D ›B일 수 있다.

  지배 서열과 비슷한 ‘종속 서열’이 존재할 수도 있다. 상세한 연구를 통해 개들은 선형적 서열을 이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개의 사회적 서열 이해하기Understanding Canine Social Hierarchies〉라는 논문에서 제시카 헤크만은 네덜란드에서의 개 집단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집단은 특별히 평등하지 않았다. 거의 항상 지위 구분이 엄격해서 개들은 자기보다 한 단계라도 지위가 높은 개체에게는 자세를 낮추는 등 공손한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앞서 언급한 로베르토 보나니의 연구에 동의했다.

 

실제로 이 집단의 사회적 서열은 사다리를 닮았다. 어떤 종은 지위 서열이 완전히 비선형적인 어지러운 서열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개 집단의 서열은 엄격하게 선형적이었다. A가 B보다 서열이 높고 B가 C보다 높으면, A는 항상 틀림없이 C보다 서열이 높았다. 예컨대 C가 뜻밖에도 A를 지배하는 식의 혼란스러운 관계는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연구자들처럼 나는 포획된 개들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들에게서 온갖 유형의 서열관계를 보았다. 이런 관계는 안정적으로 이어지지만 이따금 조정되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거의 항상 선형적 서열을 회복했다.

  산악지대에서 나와 함께 살던 개 두 마리는 길에서 사는 다른 개들을 지배하기를 좋아했다. 그들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자신들의(나의) 구역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런 대립은 결코 전면적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고(딱 한 번 그럴 뻔한 적이 있다), 어떤 개가 다른 개를 두려워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웃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마리 모두가 돌아다닐 때는 선형적 서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른 동물들도 그렇듯이 이런 서열은 개체의 행동을 규정한다. 그 결과 집단에서 각자의 지위를 계속 다시 정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어울려서 놀고 돌아다닐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서열 순서가 바뀌었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위치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집단은 훌륭하게 유지되었다. 집에 걸어갈 힘도 없을 때까지 마음껏 킁킁거리며 놀 수 있는데 왜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어떤 개 훈련사는 최소한 몇 마리 정도 되면 선형적 서열을 이루는지 묻기도 했다. 자신은 최소한 여섯 마리는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나도 여러 번 그런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단 세 마리만으로도 쉽게 안정적인 선형적 서열을 이룬다. 일례로 모드, 맬컴, 매디는 개 산책 공원에서 석 달 동안 선형적 서열을 이루었으며, 나뿐 아니라 남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 기간 동안 갈등이 빚어진 것은 딱 한 번, 리더인 모드가 매디에게 으르렁거리며 물려고 든 것이 전부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이 개들이 싸움 없이 선형적 서열을 이루었으며, 모두 어느 정도 그 관계에 만족스러워한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모드가 우두머리임을 특별히 드러내지 않은 채 거칠고 과도하다 싶을 만큼 어울려 놀았다. 그들의 관계는 매디의 반려자가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끝났다. 모드와 맬컴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해서 어울려 놀았다.

  나는 개 두 마리가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자기 몫의 서열을 받아들이고는 어느 쪽도 방금 일어난 상황에 불편한 기색 없이 공평하게 놀이를 시작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한 여성은 이렇게 물었다.

  “제시는 항상 마틸다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다가도 금세 바닥에 엎드려 놀이 인사를 하고는 함께 신나고 공평하게 어울려 놀아요.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나는 놀이를 청하는 인사를 비롯한 놀이 신호들이 어떻게 놀이를 시작하게 하고 유지해주는지를 설명했다. 자발적 행위인 놀이가 이루어지려면 협력과 동의가 필요하며, 놀이에서는 경우에 따라 위협으로 여겨질 만한 동작과 행동도 허용된다. 간단히 말하면 제시와 마틸다는 둘 다 놀고 싶어서 놀았고, 서로의 행동이 정해진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서로 공평하게 대했다.

 

 

 

 

지배적 지위에 있는 개는 과도하게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위협하거나 군림하는 일이 드물다. 이것이 사람들이 개들의 지배 행동을 오해하거나 또는 아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유 아닐까. 지배관계는 싸움을 일으키고 해를 입히는 행동이 아니라 대개 그보다 훨씬 미묘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윌리엄과 밀리, 존슨, 제시와 마틸다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개들은 선형적 서열을 편안하게 여긴다. 함께 지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늑대의 지배 행동

   

  과학자들과 대중들 간에 늑대가 지배 행동을 하는지, 사회적 서열이 늑대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두고 똑같은 논란이 빚어지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늑대도 지배 행동을 한다. 늑대와 개 모두 지배-복종관계를 수립하지만, 반드시 동일한 이유와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고 서열을 정하지는 않는다. 늑대는 야생동물인 데 반해 개는 가축화된 동물이므로 함께 사는 인간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늑대 전문가 데이비드 메크는 걸핏하면 늑대의 지배 행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못 인용되는 바람에 늑대에게는 지배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그는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이런 오해와 완전한 곡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지배 행동의 개념을 부정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늑대가 지배 행동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개들도 지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메크 박사는 늑대의 사회적 지배관계가 몇몇 사람이 주장하는 것만큼 항상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썼다.

 

 

 

(어린) 강아지들은 부모와 (서열이 더 위인) 손위 형제자매에게 복종하지만 부모와 손위 형제자매들은 어린 강아지들을 먼저 먹인다. 한편 부모는 제일 큰 자식보다도 서열이 높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큰 자식들의 먹는 양을 줄이고 어린 새끼들을 먹인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배의 가장 실질적 효과는 누구에게 먹을 것을 배당할지에 대한 결정권을 지배적 개체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개 전문가 제임스 서펠 역시 개와 늑대의 지배-복종관계는 일반 대중이 상상하는 것만큼 적대적이지 않다고 설명한다.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개와 늑대는 사회적 서열을 이루고 유지하는데, 그런 집단에서 서열 순서는 ‘알파’ 동물이 위에서 물리적으로 강압하여 유지되기보다 주로 어린 개체가 나이든 개체에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요약하면 개와 수많은 동물들이 지배관계를 드러낸다. 다양한 동물을 상세하게 비교연구한 자료는 명백히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며,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엄정한 연구에서 나온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지배의 실질적 의미

   

  ‘지배’라는 단어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개에 대한 논의에서 지배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과학자들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지배와 비슷한 말로 ‘통제’, ‘영향’, ‘관리’, ‘다른 개체들 감시하기’ 등이 있다. 연구자들은 가장 기본적 의미에서 어떤 개가 다른 개들에 대해 선형적 서열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지배’라는 말이 반드시 개의 특정한 행동을 규정하거나 가리키지는 않는다. 지배적 지위에 있는 개라고 해서 서열이 낮은 개에게 상해를 가하거나 부상당하게 할 싸움을 걸진 않는다. 많은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전략이 부상당하게 할 싸움을 기피하는 쪽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개 산책 공원에 가면 개들이 신체적 충돌 없이 어떻게 서로를 지배하는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개는 신체 접촉이나 상해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때로는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다른 개의 행동을 제어하거나 영향을 미친다. 종속적 지위에 있는 개라고 해서 ‘낮은’ 사회적 서열 때문에 반드시 불편하거나 고립되거나 박탈되거나 학대를 당하진 않는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적 지배’라는 현상이다. 일례로 서열이 낮은 개체는 어떤 맥락에서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배하는 다른 개체의 도전을 받는 와중에도 먹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나는 야생 코요테와 개, 그 밖의 포유동물들, 여러 조류에게서 이런 현상을 보았다. 여기서는 손에 넣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제한된 시간 동안 기존 질서가 특정한 방식으로 뒤집히는 상황적 지배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승자’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얻지 못하거나 최소한 자신이 원할 때 얻지 못한다면 지배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핵심을 말하면, 지배의 실질적 뜻이 상대를 짓밟고 승리하는 것이라는 추정은 몇몇 사람이 개들에 대해 최초로 저지르는 실수다.

 

 

 

 

 

 

개들의 줄다리기에 대한 오해

   

  많은 개들이 참여하는 줄다리기를 들여다보면 지배에 대한 오해를 불식할 듯하다. 줄다리기를 순전히 경쟁이나 지배와 관련짓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개들의 줄다리기는 꼭 다른 개들과의 경쟁이나 지배를 위한 것은 아니다.

  개들의 줄다리기는 실제로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그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개들과 야생 코요테들이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예를 들어 몰리는 친구 샬럿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줄을 꽉 문 채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한 녀석이 줄을 놓고 상대에게 장난을 거는가 싶더니 다시금 둘이 동시에 줄을 물고 뛰어다닌다. 게임은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여기서 경쟁, 목표, 승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몰리와 샬럿은 몇 분 동안 상대방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줄을 갖고 놀기도 한다. 친구인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즐기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개들이 줄다리기를 통해 실제로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개 산책 공원의 단골손님들에게 부탁해 줄다리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공원에서 관찰한 수많은 줄다리기 사례 가운데 무작위로 백 가지 사례를 골랐는데, 그중 경쟁으로 보이는 경우는 딱 하나였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항상 공정하게 인식하는지 크로스체크하려고 다른 한 사람과 함께 관찰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일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개에 관한 동물행동학 수업을 듣는 느낌이라며 좋아했으며, 이참에 자기네 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했다. 나와 파트너의 의견이 엇갈린 건 딱 네 번이었다.

 

 

우리는 백 가지 줄다리기 사례 가운데 7개에서 경쟁 요소를 확인했다. 이 가운데 6개에서는 으르렁거림과 한 녀석이 줄을 독차지하려는 분명한 징후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으르렁거림으로 그쳤다. 딱 한 차례, 한 녀석이 끝까지 줄을 포기하지 않으면 싸움으로 번질 법한 순간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이를 일종의 ‘자원 방어’● 행위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줄은 훌륭한 놀이 촉진제였고, 그들은 정말로 신나게 그걸 가지고 놀았다.

 
  ● resource guarding. 동물들이 먹이를 비롯해 생존에 긴요한 자원을 수호하려는 행위.

   

  우리는 이 예비 조사를 수행하면서 개의 상대적 크기, 사회적 관계와 친밀도, 성별, 맥락(직전에 한 일 등), 나이, 품종 등 여러 변수를 감안했으며, 그런 변수들에 대한 상당한 사전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면, 성별이나 품종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사실 개들은 대부분 잡종견이었다.

  우리는 몸집이 저마다 다른 개들이 줄다리기를 하며 3장에서 설명한 자기 불구화를 시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게임이 지속되려면 덩치 큰 개가 줄을 당기는 힘을 자제해야 했다. 작은 개가 놀 수 없을 만큼 세게 잡아당기는 순간 대체로 게임이 끝났다. 한번은 큰 개가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작은 개가 공중에 번쩍 들릴 뻔했다. 그러자 바로 상황을 파악한 큰 개는 줄을 놓고 재빨리 작은 개에게 달려가 놀이 인사를 했다. 계속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놀이를 지속했다. 크기와 힘에서 확연하게 차이 나는 개들은 타협 없이는 줄다리기 놀이를 하지 못했다.

 

 

친밀도도 중요했다. 몰리와 샬럿처럼 친구끼리 줄다리기를 할 때는 더 많은 상호 행동이 일어났고, 상대방에게 더 많이 줄을 양보했다. 같이 지켜본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 상황을 경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전 상황, 그러니까 놀고 있었는지, 그냥 돌아다녔는지, 다른 개를 만나 신경이 곤두선 상태인지 등이 줄다리기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는 더 까다롭다. 어쨌든 놀이를 계속하는 동안에, 혹은 놀고 난 다음에 한 녀석이 줄을 잡으면 그 줄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그때그때 주고받으면서 놀이가 계속 이어진다는 인상을 다시 한번 받았다.

  덧붙이면 사람과 개의 줄다리기도 지배관계와는 별 상관이 없다. 개와 그런 놀이를 하면 재미있고, 유대감이 조성되며, 긍정적·우호적 관계를 만들고, 개와 함께하는 경험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개 훈련사 팻 밀러는 《개와 함께 놀기Play With Your Dog》라는 책에서 “마음껏 잡아당기라”고 쓴다. 그는 혹시 개가 으르렁거릴까 봐 걱정하지 마라며, 모두 ‘게임의 일부’이니 다른 행동들이 적절하다면 “마음껏 으르렁거리도록 내버려두라!”고 조언한다. 자세를 낮추고 흙바닥에서 함께 뒹굴며 놀면 더없이 좋다. 놀이 인사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여러분과 개의 관계를 더욱 활기차고 돈독하게 만들기 바란다.

  줄다리기 연구는 개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기 전에 개의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줄다리기는 익히 아는 게임처럼 보이지만, 개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개들이 인간이 게임을 하듯 줄다리기를 한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하다.

 

 

 

 

 

 

동물 연구자들이나 동물행동학자들이 개들의 ‘지배’를 매우 전문적·기술적 의미로 정의한다는 걸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배’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일상에서 “경쟁자들을 지배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다른 모두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한다는 뜻이다. 지배하는 자는 ‘승리’하고 나머지는 패배한다. 종속적이거나 굴복적인 지위를 차지하면 패자가 되고, 상처받거나 나약해지고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니 사람들이 행여 자신의 개에게 ‘지배’당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사람들은 지배의 이런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해 엉뚱하게도 개와 권력 싸움을 벌인다. 반려동물을 통제하려면 지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개 훈련사들은 노골적으로 이를 부추긴다. 필요하면 완력을 쓰더라도 못된 행동을 하는 개에게서 의지를 관철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레이시 크룰릭이 〈개, 권세, 교배, 법안: 혼란스러운 뒤범 Dogs, Dominance, Breeding, and Legislation: A Mixed Bag〉이라는 나의 에세이를 읽고 보낸 메일을 일부 인용한다.

   

  개와 관련하여 지배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하니 이건 ‘훈련’을 넘어서는 개념 같아요. 자신의 개가 ‘지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개와 힘겨루기를 합니다. 그들은 “개를 지배해서 잘 가르쳐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개는 고집이 세서 나에게 도전하는 거야. 본때를 보여주겠어!”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배’라는 단어는 “개의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지는 행동들”을 가리키는 두루뭉술한 용어가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개를 ‘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개가 그저 물어뜯기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개가 베개를 물어뜯는 행동을 하면 제멋대로 단정합니다.

  ‘저 녀석이 혼자 두었다고 나한테 화가 났군.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겠어.’

 

 

 

 

 

덧붙이면 개가 먼저 문을 나서는 것은 지배 행동이 아니다. 소파에 앉거나 올라타거나 분리불안을 보이거나, 혹은 여러분에게 배를 문질러달라고 치대는 것도 지배 행동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지배와 싸움을 동일시하는데 근거 없는 생각이다. 수많은 동물들이 “다가오거나 화나게 하면 싸우겠다”라는 상당히 분명한 위협 신호를 진화시켰다. 반대로 다른 개체에게 보내는 “네가 나보다 위란 걸 인정해”라는 메시지를 담은 행동들도 진화시켰다. 사실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혜택을 받는 종들이 있으므로 종속적 개체는 기꺼이 자기 위치를 받아들인다. 서열이 높은 동물은 집단의 견실함이 모두가 잘 지내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앞서 말한 존슨의 경우,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개들을 ‘통제’하는 건 다른 개들이 그를 주시하기 때문이다. 존슨은 그들의 관심을 지배할 뿐 다른 특정한 목적은 없다. 영장류학자들은 인간 외의 일부 영장류에서도 특정 개체가 다른 개체의 관심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목 구조attention structure● 지배 이론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붙였다.

  
  ● 집단 내에서 어떤 개체가 어떤 개체를 쳐다보는지 살펴봄으로써, 즉 시선이 어떤 개체로 향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지배관계 구조를 설명하려는 이론.

 

 

 

 

 

내가 받은 또 다른 메일은 지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어떻게 오해를 일으키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불거지게 하는지 예리하게 보여준다. 개와 함께 살기로 한 사람이라면 개의 행동, 특히 원치 않는 행동이 일어나는 맥락과 사회적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부터 설명할 상황은 드물거나 이례적이지 않다. 오랫동안 여러 차례 비슷한 메일을 받은 것으로 보아 불행히도 상당히 흔한 일인 듯하다.

   

  금요일에 지인과의 흥미로운 (그러나 가슴 아픈) 만남이 있었습니다. 친구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칸막이 뒤편에서 저먼 셰퍼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펄쩍 뛰어오르더군요. 친구가 손을 내저으며 “안 돼! 안 돼! 못되게 굴지 마!” 하고 소리를 지르자 개는 얌전해졌습니다. 개가 몇 살인지 물었습니다.

  “아마 여덟 살쯤 됐을 거야. 내가 본 유기구조견 가운데 가장 신경질적이야.”

  자세히 보니 셰퍼드 목에 핀치칼라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하도 못되게 굴어서 말이야. 들어올 때 녀석이 짖는 거 봤지? 항상 자기가 지배하려고 든다니까.”

 

  친구의 말에 나는 안 그래도 ‘신경질적’인 개에게 핀치칼라가 오히려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물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 핀치칼라를 했는데도 꼭 붙들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마구 달려들거든…….”

  구조 전 그 개는 불법 시설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녀석이 항상 대장 노릇을 하려는 건 아마 그 시설에서 대장이었기 때문일 거야. 그렇게 살아남고 먹이를 챙겼던 거지.”

  친구의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다릅니다.

  개는 사람이 오면 인사를 하고 싶어 합니다. 긴장을 풀고, 꼬리를 흔들고, 깡충깡충 뛰죠. 모두 친사회적 행동입니다. ‘대장 노릇’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려 한 겁니다! 그런데 칸막이 때문에 못하니 틀림없이 좌절하고 그렇게 짖어댔던 겁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녀석이 사람을 향해 뛰어오르는 대신 자리에 앉도록 가르칠 수 있고, 신호를 해서 특정 장소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 개가 목줄을 한 채 다른 개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목으로 파고드는 돌기가 다른 개들에 대한 부정적 연상을 불러왔다고 해도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 다른 개를 만나면 인사하고 킁킁거리고 싶어서 그 개 쪽으로 다가갑니다. 그때 목줄이 당겨지고 돌기가 목을 압박하면서 “윽!” 하는 순간 고통이 몰려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다른 개’와 고통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협적으로 다른 개들을 노려보고 그에 따라 반응합니다.

  그 개에게 만약 근원적 불안이 있다면, 이처럼 핀치칼라에 대한 반응이나 칸막이로 인한 좌절로 설명하는 편이 훨씬 그럴싸합니다.

  친구는 5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려 대여섯 차례나 ‘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녀가 사는 동네에서는 90퍼센트나 되는 개가 고통과 두려움을 이용하는 학교에서 훈련받습니다. 거기서는 지배를 모든 ‘못된’ 행동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 개들을 처벌합니다. 

 

 

 

 

 

 

 

2016년 《수의학 행동 저널Journal of Veterinary Behavior》에서는 지배 논쟁을 주제로 특집호를 발행했는데 카렌 오버올이 권두 에세이를 썼다. 나는 오버올 박사의 다음과 같은 결론에 십분 동의한다.

  “행동 병리가 있는 개들의 반려자에게 개를 ‘지배’하고, ‘문제’의 개에게 ‘누가 우두머리인지’를 보여주라고 파괴적 조언을 하는데 전혀 타당하지 않다.”

  오버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배’라는 개념은 반려자와 반려견의 관계에서 타당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 그런 발상은 개와 인간 모두에게 병적이고 치명적인 행동을 조장한다.”

  스웨덴의 개 훈련사 안데르스 할그렌은 개를 제압할 필요가 없다는 데 오버올 박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과 견해를 같이한다. 그는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이 우두머리임을 개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없고, 친절과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개 훈련사 린다 마이클스는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서술한 인간의 욕구 충족 순서를 참고하여 개의 욕구 충족 순서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강압적이지 않은 훈련, 온화한 보살핌, 개에게 친절하게 대하기가 개와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개가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개 산책 공원에 있으면 사람들이 개에게 “하지 마”, “그만해”, “안 돼” 하고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반면 “옳지, 착하지”, “잘했어”, “고마워” 하는 말을 듣는 건 매우 드물다. 사람들은 가끔 가만있는 개에게 다가가 “잘했어”, “착하구나” 하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의아해한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들도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면 좋아한다. 그러므로 별 이유 없이 그저 친해지려고 긍정적 상호 행동을 시도한다고 문제가 될 건 전혀 없다.

   

   



  서열 가르치기는 나쁜 훈련법

   

  지배가 왜 그토록 논쟁의 주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이 개념이 개 훈련에 적용되는 방식 때문이다. 개 훈련과 관련해 사람들은 과학보다는 이데올로기, 정치, 동물복지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어떤 훈련사는 (용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개가 지배적 지위를 드러내므로 사람들이 개를 지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반대로 개들에게는 지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며(우리는 이미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완력을 쓰지 않는 훈련법을 옹호하고, 지배에 근거한 끔찍한 방법을 비난하는 훈련사도 있다.

 

둘 다 옳지 않아 보인다. 개들의 세계에는 분명 지배관계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지배적 지위를 개에게 심어주려는 강압적 방법을 개 훈련에 포함할 필요가 없음을 동물행동학은 분명히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반려견 훈련은 평생에 걸친 반려자와 반려견의 관계에서 토대가 되므로 지배가 아닌 인내와 이해,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개들의 세계에서 지배가 가지는 의미를 오해하면 개를 학대하게 된다. 사람들은 개가 서로를 지배하므로 인간이 개를 지배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드는 강압적 훈련법이 성행한다. 이 방법은 실패할 때가 많고 ‘서로에게 공평하고 유익한 관계’를 만들지도 않는다.

  ‘누가 우두머리인지 보여주는’ 식의 방법이 인간과 개의 관계를 어떻게 증진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지배관계 확립이 훈련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개들도 복종, 회유, 불확실성이란 행동 패턴을 드러내며, 우리는 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살피고 존중해야 한다. 개가 싫어하는 것을 강제해선 안 되며, 일부러 ‘못되게’ 행동한다거나 의도적으로 반항한다고 여기면 안 된다.

 

 

일랴나 라이스너는 말한다.

  “인간-개 상호 행동의 기초가 ‘지배 이론’이라고 잘못 이해한 결과, 개를 훈련하고 다루는 데 규율이 필요하며 수시로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고, 그로 인해 개 훈련사들과 행동주의자들에게 이런 훈련 방법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전파, 실행되었다.”

  개들의 세계에서 지배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했다면 초크 체인●, 핀치칼라, 전기충격 목줄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존 브래드쇼와 니콜라 루니도 비슷한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반려자와 반려견의 관계가 훈련 중에 지속적으로 지배관계를 강제함으로써 확립된다는 생각은 아무런 근거도 없을뿐더러 주인의 안전과 개의 복지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점차 우세해진다.”20

  존 브래드쇼는 이 문제에 대한 영향력 있는 필자로, 오해와 윤리를 중요한 사안으로 보고 과학자들이 주도적으로 나서기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 줄을 당기면 조여지는 체인형 목줄.

   

  내가 볼 때 진짜 중요한 건 윤리적 문제입니다. ‘지배’의 개념이 개 훈련사들과 그들의 조언에 따라 개 주인들이 개를 다루는 방식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훈련사들이 개에게 일상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훈련을 정당화하고자 모든 것을 ‘지배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는 이론’을 들고 나옵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책임 있는 동물행동학자들이 기술적인 (그리고 잘 정립된) ‘지배’의 의미와 일상적 ‘지배’의 의미를 구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상호 행동을 기술하기 위한 ‘지배’라는 용어와, 공격적이고 위협적이고 통제하려 드는 성향을 가리키는 ‘지배’라는 단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많은 개 훈련사들이 둘을 뒤섞어 씁니다. 만약 학자들마저 둘을 구별해서 쓰지 않으면 좋아할 사람은 바로 이들이겠지요. 그리고 그 직접적 결과는 개들의 고통입니다.

 

 

 

아직도 설명이 부족하다면 미국동물행동수의사협회(AVSAB)가 내놓은 〈동물의 행동 수정에서 지배 이론 사용The Use of Dominance Theory in Behavior Modification of Animals〉이라는 발표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 일부를 인용한다.

   

  AVSAB는 행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의사들에게 ‘지배 이론이 행동 수정을 위한 일반 지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돌봄의 기준임을 강조한다. 그 대신 AVSAB가 강조하는바, 행동 수정과 훈련은 바람직한 행동을 강화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의 조장을 피하며 의료적·유전적 요인을 포함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의 근본 원인이 되는 감정 상태와 동기를 처리하도록 노력하는 데 집중하도록 한다.

   

  이 발표문에는 이런 구절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지배 이론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행동 문제를 예방하고 교정하는 수단으로 개들과 여타 동물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는 데 우려를 나타낸다.

 

사람들은 개들을 포함해 많은 동물들이 지배관계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십분 이해한다. 그들은 지배적 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배관계를 훈련에 적용하는 데는 반대한다. 훈련사를 포함해 선의를 가진 일부는 개들의 지배관계를 글로 쓸 때 매우 신중하라고 주문한다. 자칫 그런 글들이 개의 복지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해서다. 그들은 진정으로 개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

  일례로 심리학자 제임스 오히어는 《지배 이론과 개Dominance Theory and Dogs》라는 책에서 개들의 지배관계를 매우 탁월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는 자신의 책을 “사회적 지배라는 개념으로 인해 학대받은 모든 개”에게 바쳤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궁극적으로 적용 지점에서는 사회적 지배라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배라는 개념이 지금까지도 잘못 사용되고 그로 인해 개들이 고통받는다는 점에 백번 동의한다. 그러나 개들에게 사회적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 척 눈을 감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적 지배를 존중하되, 개를 훈련하거나 가르치는 데 적용되지 않도록 충분히 잘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행동학자들과 연구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개의 사회적 지배에 관해 연구할 텐데, 그렇다면 개들이 지배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자료 활용 문제와 관련해 여러 가지 해법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타당하고 제대로 된 연구 결과라면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식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윤리적 질문이 따른다. 만약 연구 결과가 개를 해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을 왜곡해서 해로운 사용을 막아야 할까? 이는 도덕적·정치적으로 우려되는 점이며, 인간 행동의 문제, 개의 복지에 대한 우리의 의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개와 모든 비인간 동물들의 복지를 위해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인간적 방식으로 행동하고 서서히 논쟁을 바꿔나갈 수 있다. 지배에 초점을 맞춘 혐오스러운 훈련법은 결코 과학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그러한 방식은 과학을 오해한 것이다. 물론 개들의 세계에는 지배관계가 존재하며, 지배적 개체도 존재한다. 그러나 개들의 세계에서 지배와 공격성은 별개다. 더구나 우리 인간이 이해하는 지배 개념, 그러니까 고통을 주고 조종하고 벌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지배 개념은 개와 다른 동물들에게 해로울 게 자명하다. 우리는 과학을 존중하면서 아울러 개도 존중할 수 있다. 상처를 주는 식으로 개를 지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조화롭고 건강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개들이 냄새 맡도록 목줄을 풀기

   

  여러분도 “가자, 이제 일하러 가야 해” 혹은 “이리 와, 거긴 아무것도 없어” 따위의 말을 하며 개를 질질 끌고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야 아무 냄새를 못 맡았을지라도 개들이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는 것은 분명 뭔가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개의 흔적을 알리는, 어쩌면 그 개의 감정에 대해 뭔가를 말해주는 고약한 냄새일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개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저 고약한 냄새로만 여기겠지만, 개들에게는 그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흥미진진한 것이다. 나는 개들이 두 다리를 브레이크 삼아 고약한 냄새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개의 코가 앞장서서 길을 이끄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많은 개들이 너무도 오랜 시간 목줄에 매인 채 보내며, 그 맨 앞에 코가 있다. 다음 장에 나오겠지만 내 〈노란색 눈yellow snow〉 연구의 주요 등장인물이었던 제스로는 추정컨대 99.9퍼센트의 시간을 목줄 없이 지냈다. 25~30퍼센트의 시간은 코를 킁킁거리고 오줌을 누었다. 소피아 잉은 목줄에 묶인 개의 경우 33퍼센트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고 추정했는데 대충 비슷하다. 목줄은 대부분의 산책에서 갈등이나 긴장 유발의 주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개의 코가 땅으로 이끌 때마다 줄을 잡아당겨 개를 제지하지만, 냄새를 흡입하고 자신의 냄새를 남기는 것은 개에게 중요한 사안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한다.

  문자메시지와 비교해보자. 개는 코를 킁킁거림으로써 다른 개들이 앞서 남긴 메시지를 읽으며, 오줌을 누는 것은 일종의 답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가 문자를 보낼 때 강제로 끌어당긴다면 십대 자녀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나와 함께 산악도로 근처에서 살던 개들은 틀림없이 하루 종일 문자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냄새 표시는 개들의 대화 수단

   

  개들도 당연히 생리적 필요에 따라 오줌을 눈다. 하지만 때로 소변은 동물행동학자들이 냄새 표시라고 부르는 것에 활용되며, 이런 목적으로 오줌을 눌 때는 특정한 대상이나 영역에 의도적으로 한두 줄기씩 오줌을 눈다. 이런 행태는 다른 수많은 동물들에게서도 폭넓게 발견된다. 배변 역시 표시의 한 형식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의도와 통제가 덜하다. 아무래도 개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동물은 배변 횟수가 적고 또 한 번에 다 누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오줌은 찔끔 누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표시 남기기는 소통의 형식이다. 여러 동물들이 남긴 수많은 표시가 쌓이면 일종의 대화가 된다. 개들은 냄새 표시를 통해 이렇게 대화하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내 구역이니까 얼씬거리지 않는 게 좋을걸.”

  “나 지금 열받았거든.”

  심지어는 이런 대화까지도.

  “냄새를 맡아보니 조금 전 여기 있었군. 나도 아직 근처에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이 책에서 논의하겠지만 사실 개들이 어느 정도까지 표시를 통해 소통하고 이해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라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또 하나 당혹스러운 것은 개와 여타 동물들이 오줌이나 똥을 누고 나서 가끔 땅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는 냄새를 멀리 확산시키거나 땅에 시각적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혹은 그저 흥분해서일 수도 있다. 개들이 대소변을 보고 나서 마구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오줌 묻은 모래와 풀, 심지어 가끔은 똥 부스러기가 사람한테까지 날리는 것을 보았다. 개들이 언제,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면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될 것이다.

 

 

 

 

 

 

 

개들은 냄새 표시로 무엇을 전할까?

   

  개들이 흔적 표시로 전하려는 정확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소변은 그것을 남긴 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가끔은 한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전하려는 의도적 메시지가 존재하지 않을까? 연구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개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알리고 영역을 설정하며, 암컷은 번식 상태를 알린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제멋대로는 아니다. 냄새 표시는 누가 표시를 하는지, 앞서 누가 표시를 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리스버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위가 높은 떠돌이 개와 꼬리를 높게 든 반려견은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지위가 높은 수컷과 암컷은 지위가 낮거나 꼬리가 낮은 개보다 흔적과 맞대응 흔적을 더 많이 표시하고, 특히 수컷은 낯선 오줌 위에 자신의 흔적을 표시합니다. 이런 기본적 패턴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들에게서도 관찰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달라지는 행동이 관계 변화를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개들이 대면하기 전에 표시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정립한다면 공격적 만남의 발생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

  계속해서 리스버그 박사의 말이다.

   

  소변 표시에는 냄새 이상의 것이 있어요! 지위가 높은 개들은 더 자주 흔적을 남기므로 신호를 자주(혹은 맨 먼저) 접하는 것만으로도 지위의 효력을 강제하는 효과가 생깁니다. 지위가 낮은 개들로선 성공적으로 공간을 방어하거나 다른 표시를 지우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나의 미발표 데이터는 이것(표시 빈도나 순서)을 신호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맨 위에 놓이는 표시(다른 오줌 위에 더한 오줌)는 높은 지위의 신호라는 효력을 강화합니다(여기서도 특히 지위가 높은 수컷이 흔적 위에 표시를 남기기 좋아합니다). 표시를 남기는 위치(위냐 아래냐)의 효과는 몇몇 설치류 종에서 멋지게 연구된 바 있습니다. 나는 현재 위에 더하는 표시가 a) 앞선 표시를 가리는지, b) 앞선 표시와 뒤섞이는지, c) 일종의 ‘게시판’처럼 각각의 표시가 비슷하지만 별개로 인식되는지, d) 앞선 표시보다 더 선호되고 주목받는지 알아보기 위한 습관성 검사●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마쳤습니다.

  

  ● habituation test. 개가 코를 킁킁거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전에 접해서 익숙하게 아는 냄새인지, 생소하게 접하는 냄새인지 살펴보는 검사.

 

 

 

 

소변 표시는 실로 복잡한 신호이며, 개들이 무엇을 냄새 맡을지(그리고 얼마나 오래 맡을지), 어떤 표시를 남길지(옆에 남길지, 위에 더할지) 결정하는 문제라면 반려자들 대부분의 생각보다 훨씬 이해가 깊어 보입니다. 개와 산책할 때 우리는 큰 반응에만 주목합니다. 그들이 무시하거나 회피할 수도 있는 수많은 신호들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대개의 경우 개들은 (보이는 것과 달리) 제멋대로 뛰어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죄다 냄새 맡고 오줌을 찔끔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표시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지, 반응할지 말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세심하게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맞대응 흔적 표시는 개들의 영역 주장일까?

   

  개들도 야생 친척들처럼 영역 표시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개들의 오줌 누기 경쟁이 “여기는 내 구역이야!”라는 선언인지 궁금해한다. 개는 영역 표시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정하기는 이르다. 실제로 나는 내가 살던 산악도로 근처에서 떠돌이 개들이 마치 야생 코요테와 늑대처럼 영역 표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오줌을 누고, 땅을 파헤치고, 근처에 다른 개들이 있는지 둘러보고, 다시 오줌을 누었다. 가끔은 다리를 쳐들 뿐 오줌은 누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몇 걸음 더 가서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눴다. 시모나 카파초 연구팀은 이탈리아의 떠돌이 개들도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존 브래드쇼와 니콜라 루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로운 떠돌이 개들의 경우 수컷은 영역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오줌을 누고, 암컷은 거처 주위에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리스버그 박사는 말한다.

   

  ‘영역 경계 표시’나 ‘영역 방어’를 가리키는 오줌 흔적을 영역 경계에서 찾아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영역 경계에 ‘처음’ 표시한 흔적과 맞대응 흔적을 구별하지 않습니다(구별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영역 경계에서는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 남긴 표시와 마주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 경계가 어디인지 보여주는 ‘표지판’을 세우려고 표시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신의 영역에서 마주치는 낯선 오줌에 그저 맞대응하여 흔적을 표시하는 걸까요? 물론 이 두 가지가 기능상 완전히 별개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연구에서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개 산책 공원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더 많은 표시와 맞대응 표시를 합니다. 표시하는 수컷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죠. 대체로 암컷은 한두 차례 오줌을 누면 끝이지만 수컷은 두세 차례 혹은 그 이상 오줌을 누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소변 표시에선 전체적으로 수컷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다른 연구들에서처럼 수컷 우위죠. 성별로 보면 꼬리가 높은 암컷이 꼬리가 낮은 암컷보다 더 자주 흔적을 남기고, 수컷도 마찬가지입니다. 꼬리가 가장 낮은 수컷과 암컷은 맞대응 표시를 전혀 하지 않으며, 꼬리가 가장 낮은 암컷은 통로에 전혀 오줌을 누지 않습니다.

 

 

 

 

 

 

개들은 왜 가끔 다리를 들고서도 오줌을 누지 않을까?

   

  상당히 자주 이런 질문이 거론된다. 대체로 수컷이 이렇게 한다. 시모나 카파초 연구팀은 오줌을 누든 누지 않든 개가 다리를 드는 것은 필요하면 싸울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나와 학생들은 ‘마른 표시’라고 부르는 이 행동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 캠퍼스와 콜로라도주 볼더 인근 작은 산악 마을인 네덜란드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개 집단의 배뇨 패턴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흥분 상태가 아닌 수컷 스물일곱 마리와 암컷 스물네 마리를 관찰했고, 모두 개별적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표시하기는 단순한 오줌 누기와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오줌이 특정한 대상이나 장소를 향했고(동물행동학자들은 이를 지향적 특징이라고 부른다), 배출되는 오줌의 양이 대체로 적었다. 우리는 다리만 들고 오줌은 누지 않는 ‘다리 들기 과시’의 횟수도 기록했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 수컷은 암컷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표시했다(수컷은 배뇨의 71.1퍼센트가 표시하기였고, 암컷은 18퍼센트였다).

  • 수컷은 표시한 뒤 땅을 파헤치는 행동을 암컷보다 확연히 많이 했고, 다른 개들이 근처에서 자기를 볼 수 있을 때는 이런 행동을 더 자주 했다.

  • 수컷과 암컷 모두 자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는 아주 드물게만 표시했다.

  • 다른 수컷 개의 오줌을 보는 것은 수컷의 소변 표시 욕구를 강하게 자극했다.

  • 수컷이든 암컷이든 표시하기 전에 반드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지는 않았다.

  • 다리 들기 과시는 시각적 과시 기능으로 보인다.

  • 수컷은 다른 수컷이 보일 때 다리 들기 과시를 확연히 자주 했다.

 

 

 

 

 

 

 

 

개의 몸집 크기가 중요할까?

   

  몸집 크기가 중요할까 싶지만, 적어도 보호소 개들의 경우 몸집 크기와 배뇨는 상관관계가 있었다. 베티 맥과이어와 캐서린 버니스는 〈보호소 개의 냄새 표시: 몸집 크기의 효과Scent Marking in Shelter Dogs: Effects of Body Size〉라는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작은 개가 큰 개에 비해 냄새 표시를 하는 비율이 높고, 더 자주 오줌을 특정한 쪽으로 겨냥”해서 누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작은 개는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했다가는 위험이 따르므로 행동보다 소변을 통한 냄새 표시를 선호한다.”

  사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리스버그 박사는 개들이 냄새 맡기와 흔적 표시로 갈등을 피한다고 생각한다. 개 산책 공원에서 일반 개들을 대상으로 이런 결과를 검증하면 연구에 유용할 것이다. 오줌 냄새를 더 잘 맡으려면 고개를 들어야만 하는 개들은 자기보다 몸집이 큰 개가 그 오줌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몸집의 크기는 중요해 보인다.

 

 

 

 

 

 

 

 

개들은 왜 악취 나는 배설물에서 뒹굴까?

   

  개 산책 공원에서는 누군가의 이런 고함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맙소사! 브루터스가 다른 개의 똥에 뒹굴었어요. 조심해요! 녀석은 자신이 한 짓을 여기저기 자랑하니까요.”

  개들은 배설물은 물론 온갖 ‘역겹고 구역질나는’ 것들에 거리낌없이 몸을 비벼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애원하다시피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러죠?”

  불행히도 우리는 개가 악취 나는 것 위에서 뒹구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필생의 과제로 삼아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에는 개가 더 고약하고 우세한 냄새로 자신의 냄새를 가리려 한다는 사람, 자신의 냄새를 널리 퍼뜨리려 한다는 사람도 있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개들은 대체로 자신보다 훨씬 강한 냄새를 풍기는 것 위에서 뒹굴며, 브루터스처럼 모두에게 자신이 한 짓을 광고할 때가 많다. 어떤 연구는 이런 행동이 자신의 냄새를 가리려는 것이라는 이론에 힘을 싣는다. 바로 관심을 피하고 포식자를 헷갈리게 하려고 퓨마의 배설물에 몸을 뒹굴어 자신의 냄새를 가리는 것으로 보이는 붉은여우에 대한 연구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보면 내가 키우는 로디지안 리즈백 품종의 소피아가 즐겨 뒹구는 흥미로운 대상들이 많습니다. 녀석이 어찌나 자주 뒹구는지 결국 가장 깔끔한 대상과 역겨운 대상을 분류하는 단순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새는 바랄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대상입니다. 살짝 퀴퀴한 냄새가 나지만 구역질까지는 아니죠. 물고기는 그저 비립니다. 육상 포유동물이 그다음인데 뭐라 말할 수 없이 야릇합니다. 맞아요, 빠르게 부패합니다. 최악은 단연 죽은 바다 포유동물입니다. 맛있는 지방유가 듬뿍 담긴 고약한 지방 덩어리지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아마도 냄새 표시와는 무관하리라. 그러나 냄새를 향한 개의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인간 이외의 동물들에게 무신경할 때가 많다. 세심한 인지 동물행동학 연구들을 통해 그들의 수준이 드러났는데도 그들을 똑똑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은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개들에게는 좀처럼 이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들에게 특별한 인지 능력과 감정 능력을 부여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부풀리곤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심한 경험적 연구는 그들이 실제로 똑똑하고 몹시 감정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모든 동물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똑똑하며, 충분히 마음을 써서 지켜보기만 하면 항상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보여준다.

  프레드 융클라우스가 자신의 개 스모키에 대해 쓴 글은 이를 제대로 간파하고 있다.

  “나는 스모키를 볼 때마다 ‘네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하고, 녀석은 마치 ‘당신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내가 아예 그럴 필요조차 없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사람들이 개의 마음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는 건 뭘까요?”

  “세상에 ‘똑똑한’ 개와 ‘멍청한’ 개가 있다는 생각이지요.”

  헤어 박사의 대답이다.

  “아직도 지능을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한 가지 유형의 지능밖에 없어서 지능이 높거나 낮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헤어 박사는 정곡을 찔렀다. 개와 여타 동물들에게는 다양한 지능이 있고, 저마다 다른 차이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차이는 예외라기보다 규칙이다. 수많은 변수들이 실험실에서 개의 수행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나는 통제된 실험에서 수집된 자료가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하다. 개들은 개 산책 공원과 여러 공간을 돌아다니며 계속 바뀌는 사회적 맥락과 물리적 환경에 대처하는데 이는 통제된 실험실과는 다를 테니까.

  ‘지능’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개체가 지식을 획득해서 다양한 상황에 맞게 활용하고, 여러 과제를 수행하고,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해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한 친구는 멕시코 작은 마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들을 보았다. 이들은 길거리 사정에 훤해서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사람들 말은 그다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먹이 차지하기나 개 사냥꾼, 다른 비우호적 개, 사람들을 피하는 일에 뛰어난 개들이 있다. 인간을 ‘조종해’ 먹이를 얻어내는 일에 능한 개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개들도 있다. 나는 똑똑하고 교활하고 적응력이 뛰어나지만 길거리 사정에는 어두워 길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법한 개들을 안다. 내가 집에서 함께 지낸 몇몇 개들은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내 음식과 다른 개들의 먹이를 훔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개들이 ‘더 똑똑하고’ 어떤 개들이 ‘더 멍청할까?’ 물론 더 똑똑하거나 더 멍청한 개는 없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다들 동등하게 영리하며, 상황에 맞게 자신의 영리함을 이용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면 상당히 ‘멍청하게’ 보일 만한 개들도 있다. 나는 충분히 많은 개들과 살았고 많은 개들을 만났으므로 누가 누구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이 개체로서 지닌 진정한 모습에 대한 잘못된 설명이란 사실을 안다.

 

 

 

 

 

 

 

 

 

놀이 신호는 거의 앞쪽을 보고 있는 동종(같은 종의 일원, 이 경우에는 다른 개들)에게만 전해졌다. 관심을 끄는 행동은 놀이 파트너가 얼굴을 돌리고 있을 때, 그리고 놀고 싶다는 관심을 드러내기 전에 가장 자주 일어났다. 또한 관심을 끄는 방식은 놀이 파트너의 무신경함 정도와 상관관계가 있었다. 파트너가 다른 데를 보거나 놀이에 시큰둥하면 더욱 강력한 관심 끌기를 시도했고, 파트너가 앞이나 옆을 보면 덜 강력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이런 개들은 다른 개의 반응 능력을 중재하는 특성, 인간들 간의 상호 행동에서 ‘관심’이라 불리는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개들은 유머감각이 있을까?

   

  개를 비롯한 여타 동물들에게 유머감각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동물들에게 유머감각이 있는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지만 적어도 개들은 유머감각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스탠리 코렌은 기본적으로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 개체와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의 유머감각에 대해 숙고하다 보면 그들이 무엇을 아는지 많은 것을 밝힐 수 있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 이렇게 썼다.

   

  개들은 단순한 놀이와 구별되는, 마땅히 유머감각이라고 불릴 만한 행동을 보여준다. 개에게 막대기 같은 물건을 던지면 개는 그걸 물고 오다가 자기 앞에 내려놓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주인이 물건을 집으러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주인이 다가오면 도로 물고는 홱 돌아서서 의기양양하게 달아나며, 똑같은 술책을 되풀이한다. 장난을 즐기는 게 분명하다.

   

  유머감각이 있다는 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을 즐기겠지만 그런 행동의 주된 목적은 인간(어쩌면 그 외의 다른 동물들) 관찰자의 반응 유발이다. 유머감각은 또한 동물에게 마음 이론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개를 비롯한 동물들의 유머감각에 대한 공식적 동물행동학 연구가 불충분한 탓에 나는 개들에게 유머감각이 있는지, 개들이 장난을 즐기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고 항상 조심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일상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일례로 나와 함께 살았던 제스로는 음식을 훔치는 데 선수일 뿐만 아니라 장난꾸러기이기도 했다. 제스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입에 물고 집 안을 뛰어다니며 양옆으로 흔들어댔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반응을 살폈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면 그 행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으면 제스로는 걸음을 멈추거나 짖었고, 보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본 뒤 다시 인형을 물고 뛰어다녔다.

 

 

 

 

 

 

개들이 음식을 훔치며 속임수를 쓰는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들이 먹이를 차지하려고 도둑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의 이런 속임수는 유머의 기술일 수 있다. 개들은 음식을 훔칠 때 의식적으로 속임수를 부리는 걸까, 아니면 그저 배가 고프고 탐욕스러운 걸까? 사실 음식을 훔치기 위한 개들의 전략을 관찰함으로써 개들의 인지 능력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음식을 빼돌리는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고, 많은 영악한 개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생후 9개월에 동물보호소에서 데려온 제스로는 ‘먹이를 밝혔다.’ 함께 지내는 사샤가 먹이를 받으면 제스로는 마치 누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현관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사샤가 무슨 일인지 보려고 문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면 제스로는 잽싸게 사샤의 접시로 달려가 그 안에 든 먹이를 꿀꺽했다. 내 눈에는 항상 의식적 속임수로 보였다.

  이렇게 다른 개의 먹이를 잘 훔치는 개도 있지만 친구들(낯선 개와 반대되는)과 먹이를 나누어 먹기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덧붙인다. 이들은 다른 개가 옆에 있기만 해도 그렇지 않을 때보다 너그럽게 행동한다.

 

나는 제스로가 먹이를 밝히는 것이 길거리 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스로는 나와 만나기 전 줄곧 길거리에서 먹이 훔치는 기술을 연마하며 보냈다. 집에 온 후 제스로는 사샤와 함께 지냈는데, 둘은 아주 사이가 좋았다. 제스로는 비록 사샤를 속여 먹이를 가로채기는 했어도 도가 지나치진 않았다. 제스로는 그 음식이 사샤 것임을 알았고, 사샤를 문 쪽으로 유인하면서도 화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다. 제스로는 사샤가 먹는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다가 사샤가 조금이라도 접시에서 다른 곳으로 가면 조용히 그러나 기민하게 몇 조각을 꿀꺽했다. 그런 다음 사샤 주둥이를 핥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사샤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제스로는 사실 나의 음식도 잘 훔쳐 먹었다.

 

나는 동네 개 산책 공원에서 이와 비슷한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있다. 헨리에타와 로지는 한창 놀이에 빠져 있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되고 헨리에타의 반려자는 헨리에타에게 간식을 주었다. 헨리에타 바로 뒤에 로지가 있었는데, 헨리에타의 반려자가 헨리에타 코앞에 간식을 내려놓는 순간 로지는 마치 다른 개가 놀이를 청한 것처럼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인사를 했다. 물론 거긴 아무도 없었다. 헨리에타는 로지의 시선을 따라갔고, 그 순간 로지는 간식을 낚아채 달아났다. 그러고는 잠시 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둘은 다시 놀이에 빠졌다. 헨리에타의 반려자가 몹시 화가 났음은 당연하다. 간식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들의 먹이 습득에 이용되는 걸까?

   

  훈련이나 교육에 먹이를 강력한 보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오로지 먹이를 얻기 위해서냐고 자주 묻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 개 훈련사이자 저널리스트인 트레이시 크룰릭은 〈기쁘게 하고 싶어요?Eager to Please〉라는 에세이에서 먹이를 보상으로 활용한다고 해서 개가 여러분을 덜 사랑하거나 긍정적 감정 없이 여러분을 이용하는 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콜로라도주 볼더 외곽 산악지대에 살면서 많은 개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했고, 개 산책 공원과 다양한 산책로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많은 개들을 보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반려자들은 목줄을 푼 개를 먹이로 통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가 반려자에게 특별한 애착, 쉬운 말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스로는 내 손이 오른쪽 호주머니에 있으면 곧 간식을 준다는 걸 알았고, 그 방향으로 살짝만 움직여도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의도적으로 제스로가 이런 연상을 하게 했다. 간단한 몸짓으로 개를 부르는 방법에 관해 말할 때 이를 간략히 ‘손-호주머니 학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방법은 효과가 있다. 내가 살던 산악지대에는 퓨마, 미국흑곰, 코요테도 살았기에 말이나 소리로 제스로를 불러서는 안 될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다른 동물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나나 제스로에게 접근할 수도 있어서다. 제스로는 나를 사랑했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간식을 좋아했을까? 물론이다. 그저 먹이를 얻으려고 나를 사랑하는 척했을까? 그렇지 않다. 내가 “이리 와!” 혹은 “제스로!” 하고 불러도 되는 상황이면 제스로는 간식이 없어도 쪼르르 달려왔다.

 

 

언젠가 한 이웃이 먹이로 개를 훈련하는 내 모습을 보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게 하면 제스로는 당신을 이용할 뿐 진심으로 사랑하진 않게 될 거예요.”

  그녀의 반려견 마야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사람 말을 좀처럼 듣지 않는 개로 유명했다. 그런데 먹이를 주자 내게 와서 안겼다. 마야는 내 오른손이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위험한 환경에 사는 우리에겐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음식은 동기를 부여하는 도구로 제법 잘 통했다. 제스로처럼 마야도 그냥 불러도 왔고, 먹이를 주지 않아도 멋지고 사랑스럽게 굴었다. 개들은 꼭 먹이를 주지 않아도 애정을 드러내며, 먹이를 훈련 도구로 활용한다고 상황이 바뀌진 않는다.

  뇌영상 연구는 여기에 힘을 싣는다. 피터 쿡과 동료들은 개가 먹이보다 칭찬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데이터는 “개를 훈련할 때 사회적 상호 행동이 분명한 효력이 있음을 납득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먹이 또한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실제로 개가 쓰다듬기보다 먹이를 더 좋아한다고 보여주는 듯한 연구가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결과는 개와 인간의 친밀도, 사회적 상호 행동의 결핍 정도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트레이시 크룰릭의 말처럼 먹이 관련 문제는 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더 가깝다. 개는 항상 먹이를 얻으려고 우리를 이용할 뿐 실은 우리에게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견해는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개 훈련에 효과적이라면 먹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 대한 개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개의 지능지수를 측정할 수 있을까?

   

  모든 개가 똑같은 능력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개의 지능지수 측정은 항상 사람들 궁금증을 자아내는 문제였다. 사람의 지능을 측정할 수 있다면 개라고 못 하겠는가? 그래서 연구자들은 개의 지능을 파악할 방법을 찾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개체 차이에 초점을 맞춘 개의 인지 연구는 극히 드물다. 최근 연구들을 두루 조사한 2016년 기사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문은 세 편밖에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로잘린드 아덴과 마크 애덤스는 개의 지능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2016년 2월 〈개의 일반 지능 요인A General Intelligence Factor in Dogs〉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멘사 개? 개의 지능검사가 개의 ‘일반 지능’을 밝히다Mensa Mutts? Dog IQ Tests Reveal Canine ‘General Intelligence’〉라는 논문에서 그 결과를 훌륭하게 요약했다.

  먼저 연구자들은 길 찾기, 제한 시간 내에 퍼즐 맞추기, 장벽 넘기, 시선 따라가기, 음식의 양 평가하기 등을 포함해 기초적 개 지능지수 테스트를 마련했다. 그런 다음 보더콜리 예순여덟 마리를 테스트했다. 그 결과 일정한 항목에서 우수한 개가 대다수 항목에서도 우수했고, 빨리 검사를 마친 개가 느린 개보다 정확했다.

 

 

 

이렇듯 개들은 사람의 지능지수 검사 결과가 저마다 다르듯 다양한 결과를 보였다. (여담이지만 사람들의 지능 차이는 수명과 연관될 수 있어서 똑똑한 사람들이 더욱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연구 목적은 각각의 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의 ‘일반 지능’ 수준을 수량화하여 지능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이 연구에서 밝혀진 핵심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 개의 인지 능력 구조는 사람에게서 발견된 것과 비슷하다.

  • 문제를 더 빨리 푼 개들은 더 정확하기도 했다.

  • 개의 인지 능력은 사람들처럼 신속하게 검사할 수 있다.

  • 개의 인지와 관련한 개체 차이 연구를 통해 인지 역학에 기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정리했다.

 

 

 

동물 지능의 개체 간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인지 능력이 어떻게 개체가 살아가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는지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다. 이는 지능과 건강·노화·죽음의 관계에 관한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에게 얻은 데이터는 우리가 동물 왕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형질 가운데 하나인 지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필요하다.

   

  스탠리 코렌은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지능에 일반 요인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다. 똑똑한 개는 대체로 모든 것을 잘하고,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개는 대부분의 검사에서 대체로 서툰 결과를 보인다.”

 

 

 

 

 

 

때론 서로 다른 종들을 비교하며 예컨대 “개는 정말로 고양이보다 영리할까?” 따위 질문을 던지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실제로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난 항상 그런 식의 비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설명한다. 개체는 자신이 속한 종의 당당한 일원답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므로 실상 그런 질문들은 오류투성이다. 개는 개로서, 고양이는 고양이로서 필요한 일을 한다. 생쥐는 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개미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종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이 다른 종보다 똑똑하다고 순위를 매긴다면 사과와 도토리의 비교와 매한가지다.

  개가 고양이보다 똑똑할까, 고양이가 개보다 똑똑할까 따위 질문을 해봤자 아무 이득도 없다. 지능은 진화적 적응이며, 그 발현 양상은 종마다 다르다. 물론 같은 종 내의 개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니 어떤 개가 더 똑똑하고 적응을 잘하는지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신중해야 한다. 다른 동물들처럼 개에게도 다양한 지능이 있다. 예컨대 거리 사정에 밝은 개는 음식을 훔치고 혼자서 살아가는 일을 잘하며, 인간과의 관계에 영리한 개는 사람을 이해하고 가정에 잘 적응한다.

  배경과 품종이 같은 개들이라면 상대적 지능 차이가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더콜리는 대단히 영리한 품종으로 여겨지지만 앞의 연구에서 보듯 모든 개체가 똑같이 영리하지는 않다. 허먼이라는 개가 브루터스보다 영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맥락이 있는가 하면 브루터스가 허먼보다 영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맥락도 있다. 나는 지능의 관점에서 개의 품종을 비교하거나 순위를 매기는 일도 하지 않는다. 개체는 자신이 속한 품종의 필요에 맞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이 개에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개는 미래를 계획하기도 한다. 학대받은 개를 입양한 사람은 과거가 개의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잘 안다. 수많은 상세한 연구들은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정신적 ‘시간여행’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개들은 인간이 사물을 대하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유추하고, 나중에 이렇게 얻은 지식을 불러내 활용하기도 한다. 한 연구에서 개들에게 무게가 다른 두 여닫이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니 그들은 스스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먼저 각각의 문을 스스로 열어보고 어느 쪽이 더 가벼운지 유추하여 그 정보에 따라 행동했다.

 

 

 

개의 영리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개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지 궁금해한다. 몇 년 전에 나는 그렌델이라는 개가 등긁이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고, 개가 의자를 옮긴 뒤 그 위에 올라가 카운터에서 음식을 가져오는 장면을 비디오로 보기도 했다. 딩고도 도구를 이용한다.

 

  다음은 그렌델의 인간 친구 레니 프릴링이 해준 이야기다.

   
  그렌델이 처음 도구를 만든 건 1973년쯤이었을 겁니다. 그렌델은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길어서 등 중앙을 긁으려면 다리가 닿지 않았어요. 한번은 그렌델에게 뼈를 주었습니다. 양의 다리뼈였던 것 같은데, 제법 딱딱했고 양쪽이 평평한 원통형 모양이었지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보니 녀석이 뼈를 물어뜯어 한쪽은 여전히 평평하고 다른 쪽은 봉우리가 두 개 솟은 것처럼 되었더군요(옆에서 보면 테두리가 마치 사인 곡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렌델은 평평한 쪽을 바닥에 놓이게 두고는 봉우리 두 개에 등을 대고 긁었습니다. 녀석이 도구를 만들었다고 확신했지만, 과학적으로 의미 있게 입증되려면 그런 행동이 반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기억에 그렌델은 첫 번째 뼈를 한참 동안, 아마도 1년 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뼈가 사라진 후 우리는 다른 뼈를 주었고, 며칠 혹은 일주일 만에 그렌델은 두 번째 뼈도 거의 지난번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같은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도구 제작을 반복한 겁니다.

 

 

 

 

 

 

 

개들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까?

   

  사람과 특별한 관계인 개가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과의 소통을 더 잘 이해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개들이 “앉아!”, “기다려!”, “이리 와!” 같은 단어의 말뜻을 알아듣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 장 맨 앞에 소개한 미카의 이야기는 개들이 우리가 하는 말을 제법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연구에 따르면 개들은 단어를 몇백 개 혹은 1,000개까지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개가 우리의 표정을 읽는다는 것도 안다. 개들은 심적 표상을 이용해 감정 상태를 알아내고, 주인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을 모욕하고, 심지어 그들이 먹이를 줘도 거부한다. 개들은 행복한 표정과 화난 표정을 구별하고, 인간의 감정을 알아본다. 또 누군가가 화를 내면 개들은 그 사람을 믿지 않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는다. 이렇듯 개들은 비록 말을 하진 못하지만 우리 마음을 상당히 잘 읽을 줄 안다.

 

 

 

 

 

 

 

 

 

집단에서 최소한 한 마리라도 적에게 공격적으로 다가갈 확률은 전반적으로 상대편 숫자가 적을수록 높았다. 반면 집단에서 절반 이상이 갈등 상황에서 뒤로 물러날 확률은 상대편 숫자가 많을수록 높았다. 개가 집단의 상대적 크기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능력은 한 집단이 최소한 네 마리 이상으로 구성되고 집단 크기가 차이가 많이 날수록 좋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개들이 소수의 숫자만을 비교해야 할 때는 집단 크기의 차이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이런 결과는 집단과 집단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편을 평가할 때 ‘정신적 소음의 크기’에 근거한 양에 대한 표상의 개입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며, 적은 수와 관련해서는 또 다른 더욱 정확한 기제가 작동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바꿔 말하면 개들은 아마도 수학을 못하겠지만, 중요할 때는 양을 구별할 수 있다. 학계 표현으론 개에게는 수량 감각이 있다.

 

 

 

 

 

 

 

 

개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볼까?

   

  반려견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쳐다보는 광경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이 또한 시민과학자가 되어볼 좋은 기회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개의 자기 인식을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다. 2017년 1월, 나와 동료 제시카 피어스의 토론 수업에 참여했던 아리아나 슐룸봄이 자신이 키우는 하니라는 개에 대한 사연을 보내왔다.

   

  몇 년 전, 하니는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나는 보풀이 많은 끔찍한 자주색 양말을 신었고, 녀석 이마에 보풀이 묻었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웠죠. 잠시 후 하니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앞발로 어찌어찌 이마의 보풀을 떼어내더니 이번에는 나의 배에 올라와 앞발에 옮겨 붙은 보풀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더군요. 제가 떼어줄 때까지 말이죠. 그러고 나서 하니는 몇 시간 동안이나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토록 화가 났다가 보풀이 없어진 걸 확인하고 얌전해진 거죠. 나는 항상 이 일을 그저 깜찍하고 바보 같은 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어요. 혹시라도 당신의 연구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리아나의 이야기는 내가 들었던, 개가 거울에서 자기 이마에 묻은 뭔가에 주목했다는 이야기 가운데 최고다. 하니는 그전까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문득 인간 이외의 영장류, 돌고래, 범고래, 코끼리, 조류를 대상으로 한 〈붉은 점〉 연구가 생각난다. 동물 모르게 이마나 몸 등 거울 없이는 보지 못하는 부위에 붉은 점을 찍고는 동물 앞에 거울을 갖다 놓는다. 그러고는 붉은 점에 반응해서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하면 자기 인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거울 테스트라고 부르는 이런 실험은 거울에 누가 있는지 평가하려고 후각이나 청각 신호보다 시각적 신호를 사용하는 동물들을 대상으로 할 때 유용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자기 인지에 대한 연구 결과는 뒤죽박죽이다. 일부만, 때로는 한 마리만 점을 건드렸으며, 연구에 참여한 모든 개체가 반응을 보인 적은 없다

 

 

 

 

 

 

 

동물에게 감정을 부여한다면 의인화일까?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동물들에게 감정과 지능을 부여할 때마다 의인화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오늘날에도 내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비판은 인간 이외 동물들의 감정적 삶에 대한 주장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간편한 방법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의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의인화를 터부시하는 사람들이 틀렸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들은 감정을 비롯한 많은 형질들을 공유한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에게서 감정을 확인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인간에게만 있는 뭔가를 그들에게 투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관찰하고 이해한 것을 가지고 소통을 위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신경생물학 연구는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물론 잘못된 이해를 동물에게 투여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언어로 다른 동물을 설명하는 의인화는 결코 피할 수가 없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동물의 인지와 감정을 한층 더 이해하도록 돕는 대안으로 무엇이 있을까?

  내 동료 과학자 빌처럼 여기에도 이중 잣대가 있는 듯하다. 동물원의 좁은 우리에 갇힌 코끼리더러 행복하다고 하면서 그 코끼리가 불행하다고 말하면 의인화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이 행복할 수는 있지만 불행할 수는 없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는 생명 중심적 의인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고든 버거드는 비판적 의인화에 대해 글을 썼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 다른 동물이 느끼는 바를 설명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어떤 동물인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감정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이 느껴지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근육 수축과 신경세포 발화를 설명하는 데 머문다.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와 나는 과학의 영역 내에서는 얼마든지 ‘의인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상세한 과학 연구들을 종합하면 많은 동물들이 풍부하고 심오한 감정을 경험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감정이 먼 선조들, 그러니까 인간 이외의 동물 친척들이 준 선물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감정이 있다면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나는 ‘모른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은 다른 동물들의 인지적·감정적·도덕적 능력에 관해 문을 열어두기 위해서다. 우리는 계속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어류는 몸짓이나 미리 약속한 신호로 다른 어류에게 먹이의 위치를 알려주고, 프레리도그는 유인원을 능가하는 소통 체계를 갖추었으며, 쥐는 후회를 표현하고, 생쥐, 쥐, 닭은 공감을 표현한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실은 애초에 다른 동물들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필요한 연구가 행해지기 전에 일단 부정적으로 가정하는 습성이 있다.

 

 

 

 

 

 

 

위켓이라는 개가 부분 부분 얼어붙은 강을 건너도록 도와준 루비라는 개의 이야기다. 위켓은 두려움 때문에 혼자서 강을 건너지 못했고, 이미 강을 건넌 루비가 다시 돌아와 위켓에게 가서 열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자신을 따라 얼음을 건너도록 설득했다. 심리학자 스탠리 코렌은 개처럼 사회적이고 똑똑한 동물이 공감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기본적 감정과 관련하여 개들 역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안, 강박충동 장애를 포함한 다양한 심리적 질환에 시달린다. 개의 감정이 지닌 이러한 측면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니콜라스 도드먼의 《반려동물 상담 치료: 신경증에 걸린 개들, 강박적 고양이들, 불안한 새들 그리고 동물 정신의 Pets on the Couch: Neurotic Dogs, Compulsive Cats, Anxious Birds, and the New Science of Animal Psychiatry》는 이 분야를 멋지게 개괄한다. 인간이 갈수록 바빠지는 세상에서 반려자가 겪는 스트레스에 대한 개들(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반응에 세심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

   

  앞서 언급한 ‘기본적 감정’ 말고도 개들이 질투·죄책감·수치심·당혹감·자부심·연민 등의 복잡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을까? 개들이 이른바 고차원적 감정을 경험할 만큼 인지 수준이 높은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현재의 자료들을 보면 개들도 이러한 감정들 가운데 몇몇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공감과 일부 도덕적 자각, 즉 공평함·정의·옮고 그름에 대해서는 이 책(3장과 7장)에서 논의한 바 있고, 죄책감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살펴볼 예정이다. 몇몇 복잡한 감정들이나 영성 같은 것은 개들이 경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를 확정 지을 만한 증거가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므로 개들이 이런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거나 경험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건 시기상조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판명 날 수도 있다.

  이른바 고차원적 감정들은 자각과 마음 이론이 있어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 감정과 구별된다. 이런 감정들 모두를 면밀히 살펴보기란 불가능하므로 잘못된 믿음을 깨부순다는 취지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질투와 죄책감이라는 두 가지 감정만 살펴보기로 하자. 지배처럼 죄책감도 개들에게 나쁘게 사용될까 봐 개들의 죄책감을 아예 부정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엄격한 데이터를 중시하지만 특정 주제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구실로 삼는 데는 반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속셈을 가지고 개가 질투와 죄책감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개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특정한 감정이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이러저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 개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지는 앞으로 계속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개들이 특정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개들도 질투를 느낄까?

   

  내 친구 크리스티 오리스가 자신이 키우는 개 애나와 이웃에 사는 데이지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는 질투라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다.

   

  애나와 데이지는 강아지 때부터 아주 친해서 온 동네를 활기차게 뛰어다녔어. 애나는 성격 좋은 골든 리트리버, 데이지는 바로 옆집에 사는 개야. 활달하고 중간 크기 몸집에 성격이 우직한 데이지가 내 마음에 쏙 들어!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니까. 이게 무슨 문제냐고? 분명 문제가 있어. 애나는 내가 옆에 있으면 데이지에게 마구 질투를 느껴. 평소처럼 장난치며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행동을 보이고, 바닥에 등을 대게 해서 데이지를 눕힌 뒤 옆에 서서 내려다봐. 그래서 이제 난 데이지와 눈 마주치는 걸 피하지. 행여 애나가 질투를 느끼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못되게 굴까 싶어서야. 데이지의 반려자에게 내가 없을 때도 애나가 공격적으로 굴 때가 있는지 물었는데, 한 번도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대.

   

  다른 개나 인간에게 관심을 줄 때 자신의 개가 질투심을 드러낸다는 말은 개 산책 공원에서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듣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다.

  “조시는 항상 잭과 나 사이로 밀고 들어와요.”

 

  “머빈에게 눈길을 주면 플루토는 머빈을 옆으로 밀쳐내고 나한테 기대죠.”

  “내가 스무치의 배를 문지르면 디아블로도 문질러달라고 슬쩍 옆으로 다가옵니다.”

  개와 함께 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질투라고 부르는 감정을 목격한다.

  이런 일화들이 확고한 과학적 자료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여러 사람이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체계적 연구로 이어질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스탠리 코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행동과학자들이 그토록 흔하게 목격되는 현상을 무시할 때가 많다니 이상하다. 개들이 폭넓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개들은 사회적 동물인 것이 사실이며, 질투와 시기는 사회적 상호 행동의 소산이다. 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사랑과 질투의 표현에 관여한다고 밝혀진 옥시토신 호르몬은 개들에게도 있다.

   

  빅토리아 스틸웰은 《개들의 은밀한 언어The Secret Language of Dogs》라는 책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개가 질투를 표현하는 것은 인간과 똑같다. 자기 식대로 밀어붙이는 개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개 전문가 패트리샤 맥코넬 역시 이 장 앞부분에서 인용했듯이 개가 질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세심하고 공식적이며 중요한 과학 연구가 있다. 개들이 무시당했을 때 그 사실을 알고 매우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크리스틴 해리스와 캐롤라인 프로보스트는 2014년 〈개들의 질투Jealousy in Dogs〉라는 연구에서 개들이 인간이 정의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다른 개체의 성공, 이익, 행동, 소유 등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방식으로 질투를 경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연구 초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질투는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복잡한 인지들이 이 감정에 자주 연루됨으로써 이런 인식에 한몫했다. 하지만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침입자에게서 사회적 유대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감정은 다른 사회적 종들에게도 존재할 수 있고, 개처럼 복잡한 인지 능력을 갖춘 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 연구는 집에서 기르는 개들을 대상으로 질투 감정을 조사하고자 인간 유아 연구에서 사용한 패러다임을 가져왔다. 우리는 주인이 비사회적 대상이 아닌 다른 개로 보이는 존재에게 애정 어린 행동을 보일 때 개들이 확연히 질투하는 행동(예컨대 달려들거나, 주인과 개 사이에 끼어들거나, 주인이나 개를 밀치고 건드리는 등)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리스와 프로보스트는 인간 유아에 대한 질투 연구와 동일한 실험을 통해 서른여섯 마리 개를 조사했다. 주인이 개를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비디오로 개의 반응을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주인은 짖거나 꼬리를 흔들게 작동시킨 장난감 개와 놀거나, 색다른 대상(핼러윈 축제 때 사탕을 담는 통)을 만지거나, 유아용 책을 큰 소리로 읽었다. 개 주인은 연구의 목적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연구 초록에서 설명하듯이 개들은 주인이 장난감 개에게 애정을 보이면 질투로 보이는 여러 가지 행동을 나타냈지만, 주인이 무생물 대상에 관심을 보일 때는 훨씬 덜했다.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질투가 인간 아닌 사회적 종들에게서도 일어난다고 추정할 수 있으므로 개들에게 질투의 감정을 찾아내고 확인한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야생 코요테와 늑대에게서도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았는데, 그 밖의 야생동물들에게서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본 연구자들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덧붙이면 나는 연구자들이 언어 사용 이전 단계에 있는 유아들에게 적용한 실험 디자인을 그대로 활용한 점이 마음에 든다. 인간 아기들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추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인간 이외의 동물들과 언어 사용 이전 단계의 유아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추론할 수 있으며, 비슷한 행동 패턴이 발견되면 그 근저에 있는 공통된 감정을 추론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의도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꼬리를 흔든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꼬리는 매혹적 부속물이다. 개가 다양한 맥락에서 꼬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다른 개의 꼬리의 움직임을 어떻게 읽는지, 이렇게 모은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스탠리 코렌은 꼬리 흔들기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를 다음과 같이 유용하게 정리했다.

 

 

아주 좁은 너비로 살짝 꼬리를 흔드는 건 주로 인사에서 목격되는데 머뭇거리듯 “안녕”이라고 하거나 자신을 봐달라는 듯 “나 여기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꼬리를 크게 흔드는 건 “난 너에게 도전하거나 널 위협하지 않아” 하는 친밀감의 표현이다. 혹은 “나는 좋아”란 뜻일 수도 있다. 이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흔든다고 생각할 때의 꼬리 흔들기에 가장 가깝다. 특히 꼬리가 엉덩이를 훑으면 아주 행복하다는 뜻이다.

  꼬리를 조기弔旗처럼 세우고 천천히 흔드는 건 다른 신호들처럼 사회적 용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히 높지도 낮지도 않은 높이로 꼬리를 들고 천천히 흔들면 불안하다는 신호다.

  마치 진동하듯 짧게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를 흔들면 뭔가를 하려는 신호다. 일반적으로 도망치거나 싸우기 전에 이렇게 한다. 꼬리를 흔들면서 높게 치켜드는 건 적극적 위협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개들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모두 알아차린다. 익히 알려졌듯이 개들은 인간의 많은 단어들을 배우지만, 설령 단어의 의미를 몰라도 목소리의 억양을 통해 우리가 전하려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개들이 과연 모순되는 메시지를 알아듣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듣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개들은 사람들마다 지닌 독특한 개성도 포착할 줄 안다.

  흔히 개와 인간의 성격이 서로 닮는다고 말하는데, 정말로 그럴 수 있다. 상당한 시간을 두고 관찰한 특정한 개와 사람의 성격이 서로 닮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많다. 신경질적이고 음울한 사람의 개는 신경질적이고 음울하며, 차분한 사람의 개는 차분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차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 저 녀석은 나랑 똑같아!” 하면서 놀라움을 드러낸다. 이처럼 개들이 우리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도 이런 현상에 대한 연구가 아직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다.

  하지만 2017년에 이뤄진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의 수치를 측정함으로써 “개들이 인간의 감정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특정한 개성 요소를 채택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주인이 음울하고 걸핏하면 불안해하면 개들도 그런 특징을 나타낸다.” 연구에 따르면 주인이 불안 성향이 있을 때 개들도 위협과 스트레스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은 개가 반려자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보다 반려자가 개의 성격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아냈는데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인간과 개의 상호 행동도 연구하는데 이를 통해서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개가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다른 개들과 어울리도록 허락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드러내곤 한다. 사람들은 개 산책 공원 나들이가 개들에게 마냥 좋으리라 생각하지만 개 산책 공원은 사람들 생각만큼 개들에게 항상 자유롭고 편안한 곳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개의 자유를 침해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불러대고,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지나치게 거칠어 보이면 놀이와 상호 행동을 중단시킨다. 이런데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독자들이 개 산책 공원에서 동물 행동을 잘 살펴보고 공원에서 개들이 자신의 선의대로 경험하는지 잘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 산책 공원은 도시에서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공원 공간이다. 2010년 미국 100대 도시에는 목줄을 풀고 개를 산책시킬 수 있는 공원이 569개 있었다. 이는 5년 사이에 34퍼센트 증가한 수치로 전체 공원 면적이 3퍼센트 늘어난 데 비하면 엄청난 비율이다.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개들을 위해 따로 시설을 마련해놓은 개 산책 공원이 있는가 하면 주택 지구와 공원 사이에 개와 인간의 교류 장소를 제공하는 도시도 있다.

 

개 산책 공원이 이렇게 인기 있었던 적이 없고, 여러분은 앞으로도 더 좋아지리라 생각할 것이다. 볼더 근처 공원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가볍게 물어본 결과, 95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능히 짐작되는 이유로 개 산책 공원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개들은 목줄을 풀고 안전하게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놀고, 그동안 사람들은 마음놓고 잡담을 나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 산책 공원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나는 개 산책 공원에서 훈련사들을 보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 그들은 훈련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개들을 관찰하곤 한다. 앞서 말했듯이 개 산책 공원은 동물행동학과 진화생물학의 기본 원칙들을 공부할 수 있는 훌륭한 교실이다. 실전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개들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그럼에도 나는 개 산책 공원의 몇 가지 부정적 면들을 말하려 한다. 먼저, 내가 아는 개들은 대부분 개 산책 공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개도 있으므로 함께 놀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먼저 개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공원 환경이 그들에게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젠가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개가 이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아요. 잔뜩 긴장해서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버티는데, 내가 워낙 좋아하니 마지못해 따라오는 겁니다.”

  좋은 의도가 퇴색되어버린 전형적 사례다. 개가 개 산책 공원을 싫어한다면 왜 그곳에 가는가?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이 개 산책 공원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그중 한 가지 이유는 안전 문제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개들끼리의 갈등이 싸움으로 번지고, 그러면 개와 사람이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개 산책 공원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반대하지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경험적 연구는 아직 없다. 개 산책 공원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그보다 흔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공원 내에서의 에티켓과 사회적 환경이라는 문제 때문에 개 산책 공원을 외면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 다른 개들이 공원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개 산책 공원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에 대해서는 온라인 정보들이 많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문제가 사람들의 문제일 때가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들이 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 실제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대개 목줄을 잡고 있는 반려자다.

 

 

 

 

일반 산책로를 걸으면서 개에게 테니스공이나 프리스비를 던지고 주워오게 할 때도 똑같은 문제가 일어난다. 개와 인간이 같은 공간을 사용할 때는 모든 사람이 개를 좋아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몇 년 전쯤 덩치가 크고 살짝 비대해 보이는 맬러뮤트를 목줄에 느슨하게 묶은 채 걷고 있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던 한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급하게 길을 건너려고 했다. 무서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괜찮아요. 물지 않아요.”

  그는 이때다 싶었는지 물었다.

  “먹이는 어떻게 하나요?”

  좋은 질문이라고 대답한 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경험 때문에 개를 무서워한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도 어려서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었고, 그 때문에 어린 시절 나는 개가 아닌 금붕어와 대화하며 자라야 했다. 모든 사람이 개를 사랑하거나 좋아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개 산책 공원에는 더 흔하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특정한 개를 다루는 방식에 사람들이 불만을 갖는다는 점이다. 엘리즈 가티는 내게 보낸 메일에서 많은 갈등이 서로 다른 ‘개 양육’ 방식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통제하고 보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수수방관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문제는 조금 후 더 살펴보겠다.

 

 

 

 

 

 

 

개가 다른 개에 올라타는 것은 개 산책 공원에서 사람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흔한 이유이며, 보호자들에게 자유냐 통제냐 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개 산책 공원의 개들은 일부 사람들의 주장만큼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개한테 오라고 불러대고, 나쁜 행동이다 싶으면 “그만해!” 하고 소리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개에게 달려가 목줄을 잡아당기는 사람도 있다.

  자유는 자동차, 목줄, 산책로, 집에서만 복잡한 머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다. 개 산책 공원에서도 자유는 까다로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언제 눈을 부릅뜨고 개를 감시해야 할지, 여차하면 좌절감을 안길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또 어느 순간 개를 하고 싶은 대로 풀어놓아 버릇없는 개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 자주 묻는다. 솔직히 이런 논쟁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모든 것이 당사자인 사람과 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들이 얼마나 자유로워야 하는지, 혹은 실제로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관한 문제는 생각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하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로 골치를 썩는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와 다른 개들의 관계를 다룬다. 개들의 관계는 인간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마다 무엇이 용인되고 용인될 수 없는지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아웃사이드Outside》지에 웨스 실러가 기고한 〈개들은 왜 야외에서 목줄을 푸는 것이 옳은가Why Dogs Belong Off-Leash in the Outdoors〉라는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고,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여러 측면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러는 “주인들이 책임감이 있다면 목줄을 푼 개의 존재로 인해 야외는 한결 좋은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썼다.

 

 

 

 

우리가 개 산책 공원에서 일어나는 통제와 자유의 역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잭슨 박사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는 사려 깊은 에세이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연구는 개 산책 공원이 개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간의, 인간과 인간 간의 상호 행동을 이해하는 데도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 산책 공원은 개들을 위한 도시 속 놀이터로 보이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상호 행동에는 경계선이 되는 담장 너머의 훨씬 많은 것을 포괄하는 함의가 있다.

 

 

 

 

여러 번 말했듯이 나는 개를 ‘훈련’한다는 말보다 ‘교육’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훈련’보다 ‘교육’이 개를 훈련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일의 실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개 관계의 규칙을 정하고 신호 체계를 만든다. 덕분에 인간과 개는 그때그때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다. 개들은 우리의 신호 체계를 배우지만 그렇다고 항상 규칙을 따르거나 우리 요구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개들의 소통에 능숙해지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롭다.

  어찌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모는 아이에게 가정에서의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고, 이런 규칙과 기대는 아이가 자라서 독립할 때까지 계속 협상을 통해 조정된다.

  가르치는 방식도 가르치는 내용의 일부가 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아이들의 경우 확실히 그러하고, 개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으로 가르치게 되며, 교육 방법이 배려와 존중을 담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배려와 존중을 가르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저마다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질 수 없을 때도 배려받는다고 느끼는 환경을 만든다.

  이와는 달리 훈련은 복종을 강조한다. 개나 아이가 복종하지 않을 땐 일반적으로 처벌이 따른다. 협상의 여지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며, 대체로 갈등과 긴장이 상존한다. 의식 있는 존재는 언제나 모든 규칙을 100퍼센트 준수하지 않는다. 개들도 당연히 의식 있는 존재다.

  따라서 개를 훈련할 때는 처벌, 혐오, 지배보다는 긍정적 강화와 보상이 중심이 되는 방법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지지한다.

 

 

 

 

 

 

킴벌리는 사람마다 기대하는 바가 다르고, 개마다 희망과 필요가 제각각인데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훈련이라고 내게 말했다. 이런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간극이 완전히 메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려면 인간과 개 모두 상당한 수준의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킴벌리는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계속적인 리더십 이동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끔은 사람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끔은 개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계의 양쪽 끝에는 ‘타협 불가능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개는 허락 없이 사람에게 올라타서는 안 되며, 우리는 개가 차도에 뛰어드는 것을 막고 야생 포식자에게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다.

  물론 무엇이 타협 불가능한가는 관계 당사자에 따라 다르다.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개의 행동을 허용하는 사람도 있고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람도 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방법들이 있지만, 가변성 또한 커서 우리의 지식, 마음, 인내심을 시험하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관용과 신뢰, 인내심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자신을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개가 알수록, 강압적 방식 대신 긍정적 방식으로 세심하게 제어할수록,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개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달리 표현하면, 교육의 목표는 개가 본성에서 벗어나는 훈련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개에게 보여주는 과정이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떠돌이 개에게 알아낸 것이 반려견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물었다.

   

  아시다시피 상당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나는 떠돌이 개가 반려견과 (개체발생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를 비롯해 여러 이유에서 모든 비교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튼 내가 현장 경험에서 배운 것을 당신께 말씀드리죠.

  간략히 말하면 개들은 감정의 동물이며 안정적 사회집단을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 동료의 지지를 잃으면 곧바로 다른 누군가(개든 인간이든)와 연결되려고 합니다. 또한 개들은 자신들의 안정적 사회 단위에 속하지 않는 개체(개든 인간이든)와 느슨한 친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 산책 공원에 가는 개들은 친숙한 개체와 노는 것을 선호하겠지만 덜 친숙한 개들과 상호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친밀한 경험이 됩니다.

  인간 가족과 함께 사는 개들은 보통 떠돌이 개들은 겪지 않는 이런저런 제약과 한계에 시달립니다. 개 집단에는 지배 서열이 존재하고 이것이 사회적 삶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주지만, 집단의 리더는 대체로 인간 리더보다 훨씬 덜 독재적입니다. 종속적 지위를 가진 개체도 가끔 집단적 행동을 이끌 때가 있고, 누구도 리더를 따르도록 강요받지 않습니다. 언제든 어디든 완전히 자유롭게 가고, 목줄에 묶이지 않고 원하는 것의 냄새를 맡습니다. 종속적 개체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짝짓기가 허락됩니다. 오줌으로 흔적을 표시하는 것도 자주 허락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종속적 개체가 리더 가까이에 머물며 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리더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긍정적이고 친화적인 관계를 개발함으로써 협력과 조직력이 촉진됩니다.

 

또 하나, 이런 집단 내 지배 서열은 주로 나이의 영향을 받습니다. 나이는 몸 크기보다 훨씬 중요해 보이는 변수이며(알려지지 않은 정보입니다), 그래서 공격적 도전보다 나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정리하면 개들은 협력하는 육식동물이고, 뭔가를 함께, 특히 조직된 방식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무리에서 공격성은 (특히 작은 집단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며, 심한 공격성은 대단히 드뭅니다. 개들이 먹이와 암컷을 두고 경쟁할 때 공격성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집단의 일원이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서로서로 먹이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겁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예를 들면) 개 집단에서 리더와 종속적 개체의 사회적 거리는 대체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여러분의 개와 함께 침대나 잔디밭에서 자는 것은 아무 문제 없는 훌륭한 생각입니다! 또한 함께 뭔가를 하면 (예컨대 걷거나 달리거나 놀거나 자연환경을 탐험하거나 함께 쉬거나 흔적 표시를 하면) 개와 인간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틀림없이 도움이 됩니다. 개 앞에서 먹이를 주는 것, 산책할 때 항상 여러분 뒤에서 걷도록 하는 것은 독재적 행동이니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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