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은 비교급이었어야
반갑다. 드디어 이런 책이 나와줘서. 사실 나는 거의 10년 전인 2012년 1월에 출간한 다윈 지능에 소개한, 곰에 쫓기는 두 친구 이야기를 통해 자연 선택은 최상급을 선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남보다 조금만 나으면 제거되지 않을 수 있는 과정을 설명하는 비교급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한 친구가 홀연 걸음을 멈추고 신발 끈을 고쳐 매기 시작하자 곁에 있던 친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다 쓸데없는 일일세. 우린 결코 저 곰보다 빨리 달릴 수 없네." 그러자 그는 "내가 저 곰보다 빨리 달릴 필요는 없네. 그저 자네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대답했다. 자연 선택은 최고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훌륭한(good enough) 개체들도 "그럭저럭 버텨나갈 만큼" 생존을 허용한다.
나는 다윈 지능에서 이 주장 외에도 "진화가 만일 바람직한 변이의 출현을 기다리며 돌연변이에만 목을 맸다면 지금과 같이 현란한 생물 다양성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돌연변이 맹신 경향의 무모함을 지적했다. 이 책의 저자, 다니엘 밀로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유전적 부동이나 창시자 효과처럼 운에 좌우되는 생태진화적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보다 새로운 변이를 만들어내는 데 실제로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적이 걱정했다. 다윈을 추종하는 선택주의자들로부터 뭇매를 맞을까 두려웠다. 다행히 나는 몇 차례 비판을 받았을 뿐 집단 테러 수준의 공격은 받지 않았다. 이 책은 내게 가뭄에 단비 같은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반갑다.
밀로와 내가 그려내는 자연의 진화는 2011~2012년에 방영된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마치 실제처럼 펼쳐졌다. 매주 7명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경연을 하면 일반인 500명으로 구성된 평가단의 심사를 거쳐 1명이 탈락하고 다음 주에는 또 한 명의 가수가 충원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평가단으로부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가수 1명만 살아남고 매주 6명씩 충원되는 방식을 채택했다면 경연이 끝난 다음 탈락한 동료 가수 곁에 모두 모여들어 마치 본인이 탈락한 것처럼 슬퍼하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연이 모두 끝나던 맨 마지막 날에는 사회자가 홀연 "오늘은 탈락자를 발표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이 종료되서 아무도 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모두를 안심시켰다. 밀로와 내가 관찰하는 자연은 이런 곳이다. 가장 잘 적응한 개체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 모두가 제거되는 게 아니라 가장 적응하지 못한 자 혹은 가장 운이 나쁜 자가 도태되고 '충분히 훌륭한' 대부분은 살아남는다. '나는 가수다' 마지막 회처럼 모두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자원이 풍족하면 '특별히 나쁘지 않은(not bad) 개체라면 모두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 책은 자연과 사회가 언제나 특출남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범함을 폭넓게 관용한다는 사실을 포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밀로의 모든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의 "굿 이너프 이론은 다윈주의가 누락한 것은 설명함으로써 다윈주의를 보완한다"고 사뭇 은근히 시작하더니 이내 이 책은 "우상 파괴를 지향하는 책"이라고 선언하며 급기야 "자연 선택은 지구에서 인류의 독특한 위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밀로와 나의 동행은 여기서 멈춘다. 그는 "자연 선택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다윈주의가 상정하는 자연 선택이 개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나는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을 부정하지도 않거니와 개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밀로가 "문제는 자연 선택이 인위 선택의 상대적 개념으로 잘못 유추되어 탄생한 데 있다"고 지적했지만, 다윈은 자연 선택을 인위 선택의 상대적 개념으로 제시한 게 아니라 인위 선택의 연장으로 간주했다. 다윈에 관한 강의 할 때 나는 종종 다윈이 한 일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인위 선택의 '인위(artificial)'를 '자연(natural)'으로 바꾼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자연'은 '자연에서(in nature)'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윈은 우리 인간이 조작해서 벌어지는 인위적 과정과 자연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대비하려던 게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들이 자연에서도 '스스로 그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2019년 종의 기원을 새롭게 변역해낸 서울대 장대익 교수가 지적했듯이, 다윈이 "사육과 재배 하에서 발생하는 동물과 식물의 변이"를 책의 첫 장에서 다룬 이유는 당시 품종 개량을 위한 인위 선택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호프스테터와 에마뉘엘 상데가 집필한 사고의 본질에 따르면 유추는 인간이 하는 모든 사고의 중추에 자리한다. 그러니 인위 선택에서 자연 선택을 유추해낸 다윈의 시도는 충분히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잘못된 유추는 특수한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확대하는 더 넓은 종류의 잘못된 추론에 속한다"는 밀로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밀로와 나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심지어는 2016년 거품예찬이라는 책에서 자연은 낭비를 선택해 자연 선택의 손에 맡겼다는 나의 궤변에 가까운 논리가 이 책에서 거품과 폴리퀸티즘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나는 애써 분류하자면 밀로가 지칭하는 선택주의자이자 영원한 다윈 맹종자이다. 다윈의 이론은 적용 범위와 해석 방식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으나 개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밀로가 지적하는 것의 대부분은 월리스의 종용으로 다윈이 스펜서의 '적자생존' 메커니즘을 수용할 때 최상급(the fittest)이 아니라 비교급(the fitter)으로 수정 보완했더라면 애당초 일어나지조차 않았을 오해라고 생각한다. 다윈의 논리는 절대적 평가가 아니라 상대성 원리를 기반으로 세워져 있다. 밀로 역시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이 여러 이슈에서 애써 눈을 감았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자연 선택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며 지적설계론자들의 섣부른 편승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 책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흥미진진한 책이다. 기존의 다윈진화론 책들과 함께 읽으며 밤새도록 토론해볼 만한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진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모두 반드시 읽게 될 책이라고 확신한다.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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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사회다윈주의의 아버지인 허버트 스펜서도 바로 이 견해애 영감을 얻어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진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연이 혹독하며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일부만 옳다. 자연은 가끔 혹독하고, 강자가 자주 살아남지만, 약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
전문가와 일반 대중 모두 자연 선택을 지나치게 강조한 주장에 동조하고 나서는 태도는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자연 선택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왜곡시킨다. 자연 선택은 일어나지만, 유전적 부동이나 지리적 격리, 창시자 효과 같은 비적응적 변화 메커니즘도 존재한다. 이 경로들 중 어떤 것도 가장 강한 경쟁자나 최선의 표본에게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을 좌우하는 것은 우수한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이 메커니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전적 부동은 한 개체군 내에서 어떤 유전자 변이 또는 대립 유전자의 상대 빈도에 일어나는 무작위적 변화이다. 유전적 부동의 결과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운 좋은 개체의 생존이다. 그 예로 북방코끼리물법을 들 수 있다. 북방코끼리물범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병목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경험했다. 병목은 환경 충격으로 인해 개체군 크기가 갑자기 크게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19세기 후반에 북방코끼리물범은 지방에서 기름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남획당하는 바람에 멸종 위기에 내몰렸다. 지금은 100여마리만 살아남아 바하칼리포르니아주 앞바다에 있는 과달루페섬에서 멕시코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개체군에 북방코끼리물범의 대립 유전자들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선택을 받아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다.
지리적 격리는 한 개체군이 같은 종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완전히 불리될 때 일어난다. 지리적 격리는 좁은 유전자 풀 내에서 근친 교배를 강요함으로써 종 분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격리된 개체군은 변이의 수가 제한돼있으며, 오직 이것들만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재조합될 수 있다. 그 결과로 이 개체군은 원래 개체군으로부터 분기하게 되는데, 이제 각각의 개체군이 서로 다른 대립 유전자들의 집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새로운 종의 기원은 자연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다.
이와 비슷하게 창시자 효과는 개체군 중 일부 구성원이 서식지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일어난다. 그런데 이 창시자들은 지속되는 계통을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이들이 반드시 같은 종 중에서 적자는 아니며, 유리한 돌연변이 상태가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해서 꼭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예로는 오래전에 모리셔스섬에 도착한 비둘기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이 섬에서 살아가다가 나는 능력을 잃고 몸무게가 20kg까지 증가해 도도로 진화했다. 이 종을 탄생시킨 원인은 우연이다.
전문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적자생존'이란 용어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자연 선택이 최선의 돌연변이만 보존하고 쓸모없거나 지나치고 비효율적인 돌연변이를 모두 도태시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2007년에 리처드 도킨스는 "푼돈을 아까워하고, 시계를 주시하면서 아주 작은 낭비도 '용서치 않는' 수전노 같은 회계사. 무자비하고 멈출 줄 모르는" 자연의 이미지를 옹호했다. 사실 진화과학자들은 대중이 알고 있는 다윈의 개념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자연 선택의 레이더망을 피해 그 아래로 지나간다고 알려진 현상들의 명단은 길고, 또 점점 더 길어지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자연 선택을 마치 자연 법칙인 양 대한다. 이들은 도킨스만큼 공개적으로 그러진 않지만, 적응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데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태도는 이들의 편향을 드러낸다. 저널리스트들은 대중의 선택 편향을 반영하고 강화하면서, 진화가 실제로 작용하는 더 복잡한 이야기 대신에 적응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최신 증거를 찾으려고 《사이언스》와 《네이처》를 샅샅이 뒤진다.
실제 진화 이야기에서는 미천한 개체들도 살아남아 번식한다.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것은 분명히 적자(우리말로는 흔히 '적자'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은 '최적자'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버텨나갈 만큼 충분히 훌륭하다(good enough). 자연 선택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빚어냈지만, 평범한 것도 많이 허용한다. 심지어 1859년에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다윈과 월리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3년 전에 다윈은 자연을 "서툴고 낭비적이고 끔찍하게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푼돈을 아까워하고 효율성에 집착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이다. 같은 해에 월리스는 자연은 무용을 너그럽게 용인한다고 단언했다. "독자중에는 분개하면서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동물 혹은 어떤 동물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동물에게 물질적 또는 물리적 목적이 전혀 없는 기관과 부속 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적자생존은 여전히 정치적 원리를 뒷받침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다윈의 경쟁 개념이 무자비한 능력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사례를 자주 본다. 승자는 생존/성공의 원인을 탁월성에서 찾고, 채자는 멸종/실패의 원인을 탁월성의 결핍에서 찾는다. 승자는 자신을 칭찬하고, 패자는 자신을 탓한다.
경제를 다루는 언론 매체들은 "경기 순환은 다윈주의적이어서 약한 기업을 솎아내고 살아남은 기업을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또한 투자 회사들은 '기업 다윈주의'를 설파한다.
사회적 모형을 찾기 위해 먼저 자연을 살펴보아야 하는가는 중요하고도 복잡한 질문이지만,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자연자본주의 윤리에 대한 지지를 자연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자연은 변화와 창의성보다는 관성과 복제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DNA의 복제 기구는 매번 새로운 세대를 이전 세대와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서 100%성공률을 목표로 삼는다. 생물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만 이동하며, 그렇지 않으면 살던 곳에 계속 머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선조를 모방하는 것보다 더 좋은 전술은 없는데, 선조는 이미 생존과 생식 기술에서 그 능력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변화는 돌연변이의 경우처럼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이거나 이동의 경우처럼 마지막 수단이다. 변화 자체가 목적인 경우는 절대로 없다. 다윈주의의 진리를 기반으로 한 인간 사회에서 변화는 여전히 우연한 사고나 필요에 의해 일어날 수 있지만, 변화 자체를 위한 변화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정체는 자본주의와 그 문화가 요구하는 것의 정반대에 해당하며, 성장 신의 신전에서 추방된 이단이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새로운 제품과 예술 작품, 연구를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거의 다 과잉이다. 우리의 필요는 대개 우리의 생존과 무관하다. 수술용 도구와 다양한 품종의 개, 갖가지 시리얼 제품, '경이로운 것'에 해당하는 온갖 물건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이 지금보다 훨씬 적게 있더라도, 우리는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생존을 위해 힘들게 노력할 때도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대부분의 나날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굳이 힘들게 경쟁할 필요 없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인간 사회는 무자비하게 경쟁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둘 다 과잉과 관성, 오류, 평범성, 실패한 실험을 너그럽게 용인한다. 사회와 자연에서 큰 성공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능력보다 운이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연과 인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능력(때로는 적합도, 때로는 장점으로 표현되기도 하는)이며, 그 모든 것은 다윈주의의 법칙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이 도그마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렇게 진화라는 이름 아래에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두 가지 진화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진화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첫 번째 진화는 종 분화나 종간 변이성을 설명한다. 다윈과 그 후계자들이 이해한 진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두 번째 진화는 기원부터 멸종까지 종의 존재 자체를 다룬다. 원한다면 그 종의 정상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종의 평균 수명은 100만~1000만 년이다. 다윈식 진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간은 별 의미가 없는데, 아무 변화없이 흘러가는 정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비록 그 적응적 영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변이성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축적된다. '굿 이너프 이론(good enough는 직역하면 '충분히 훌륭한'이지만, 적자가 아닌 평범한 생물도 살아남고 번성하기에 충분히 훌륭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의 목표는 종 내 다양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요점은 생물은 자연 선택에 의해 방해를 받거나 개선되지 않는 정체 기간에도 자유롭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사에서 특정 폭발적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생물들은 환경의 격변과 강제 이동으로 인해 새 생태적 지위ㅡ새로운 경쟁자들과 변화한 서식기ㅡ에 적응해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이것이 첫 번째 진화이다. 적응하는 생물은 멸종 요인에 영향을 덜 받는 형질을 후손에게 전달한다. 그 후손은 생애 중 대부분을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며, 따라서 중성 변이(즉,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는 변이)가 축적될 수 있다. 자원이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하고, 기본 생활 조건도 충분히 건강한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것만 아니라면 어떤 변이(우수한 것이건 평범한 것이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1960년대에 집단유전학자 기무라 모토가 도입한 중성 돌연변이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유전자형에만 적용된다. 표현형(유전자가 발현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 발현이나 행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는 표현형 중성은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어법이다. 개체에 이롭지 않는 표현형은 정의상 해로운 것인데,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그 대신에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물학자는 겉보기에 아무 쓸모가 없거나 해로운 형질에 맞닥뜨리면, 그것이 이롭지만 아직 그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가정하거나 결국은 자연 선택이 그것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표현형 수준에서 중성을 허용하는 것은 패러다임 전환에 해당한다. 다윈은 그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건부로만 그것을 인정했다.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나는 이전에 현재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구조의 존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내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큰 실수 중 하나라고 믿는다."라고 썼다. 이 문장에서는 '현재'에 큰 방점이 찍혀 있는데, 우리는 아직 특정 형질의 이득을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어떤 것의 무용을 증명하는 것은 당신에게 여동생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대신에 나는 무용에 가까운 사촌을 통해 무용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는데, 그 사촌은 바로 과잉이다. 그런데 과잉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덜 쓰고도 같은 일을 하거나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과잉이다. 무용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없더라도 아무 지장이 없다면, 그것이 무용이다.
정통 견해에 따르면, 양적 과잉은 대사에 부담을 초래하기 때문에 도태되어야 한다. 어떤 것을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생물은 여분의 칼로리를 얻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써야 하는데, 이것은 맬서스식 경쟁 조건에서는 적응 면에서 불리하다. 따라서 자연에 과잉 형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과잉을 바로잡고 확산시키는 자연 선택의 역할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과잉은 인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서도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제6장와 제7장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자연에는 과잉이 넘쳐난다.
질적 과잉과 양적 과잉의 구분이 아주 중요하다. 설마 모든 형질이 선택되거나 한때 선택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크기와 양까지 반드시 선택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기린은 다리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다리가 더 짧은 편이 유리한 측면이 적어도 한 가지 있다. 기린은 서서 새끼를 낳는데, 몸무게가 70kg이나 나가는 새끼가 태어날 때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땅으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혹은 아보카도를 생각해보라. 아보카도나무는 평균적으로 꽃이 약 100만 개나 피지만, 열매는 겨우 100개만 열린다. 아보카도나무는 지나친 낭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파리스 자포니카의 유전체 과잉을 자연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큰 애를 먹는다. 이 작은 꽃의 유전체를 이루는 DNA 염기쌍의 수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50배나 많다.
만약 자연에 양적 과잉이 이렇게 넘쳐나는 현상만으로는 자연 선택의 한계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넓은 표현형 범위를 생각해보라. 명백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대부분의 형질은 살아남을 수 있는 양과 크기의 범위가 넓다. 세 대륙에서 다섯 인종 집단을 대상으로 콩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콩팥단위(콩팥을 이루는 기본 단위)의 수가 콩팥 하나당 적게는 21만 332개부터 많게는 270만 2079개까지 분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콩팥단위는 50만 개만 있어도 충분한데 굳이 자연 선택이 약 300만 개를 '선택했을' 리 없다. 넓은 범위(wide range)와 최적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제6장에서 주제로 다루는 넓은 범위는 자연 선택의 상습적 오류성을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넓은 범위는 내가 존재론적 중성이라 부르는 개념을 뒷받침한다. 어떤 사람의 콩팥단위가 50만 개이든 200만 개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제 5장에 나오듯이, 중성은 그저 현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형법의 무죄 추정 원칙에는 방법론적 중성이 내재한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죄이며, 증명의 책임은 고소인에게 있다. 과학에서는 방법론적 중성이 귀무가설(설정한 가설이 진실할 확률이 극히 적어, 처음부터 버릴 것이 예상되는 가설)로 표현된다. 즉, 현상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기본적으로 우연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반증의 책임은 연구자에게 있다. 여러분은 무죄를 증명하거나 우연을 정당화하려고 얘쓸 필요가 없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원칙을 뒤집는다. 선택되는 것이 기본값 상태이며, 우연한 결과는 이상치이다. 자연에서는 당연히 선택이 일어난다고 상정하며, 따라서 생물학자는 그것을 증명해야 할 책임을 면제받는다. 대신에 증명의 책임을 어떤 형질이나 크기가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떠넘긴다. 이제 생물학자들이 동료 과학자들의 방법을 포용하고 귀무가설(우연, 즉 중성)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반드시 자연 선택을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닌데, 자연 선택을 무조건 부정하는 견해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대신에 자연 선택을 자연의 기본값 상태로 상정하는 것을 부정하라고 한다.
자연을 행동을 취하는 주체로 간주하는 보편적 오해의 원인은 바로 가축화 오류에 있다. 자연은 무엇을 선택하거나 조작하거나 야기하거나 면밀히 검사하거나 정제하지 않는다. 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연은 늘 변화하는 조건들의 집합으로, 이 조건들은 서로 다른 형질들이 생물의 생존과 생식 확률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기여하게 만든다. 적응 능력이 떨어지는 생물은 거의 틀림없이 도태되고 마는데, 이들의 생존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깝다. 적응 능력이 더 뛰어난 생물은 생존과 생식 확률이 더 높다. 넓은 범위와 과잉이 입증하듯이, 이들의 형질이 반드시 이들을 우수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종이나 개체가 잘 적응하건 않건, 아무도 그 형질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그 종이나 개체가 도태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훌륭하다는 것뿐이다.
비록 모든 생물학자들은 자연을 주체로 묘사하는 언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지만, 사실상 모든 생물학자들과 그 뒤를 따라 일반 대중도 품종 개량가처럼 최적화를 추구하는 자연 선택이 자연의 기본값 상태라는 견해를 여전히 충성스럽게 받아들인다. 상대적으로 낮은 빈도에도 불구하고 자연 선택이 진화 사상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의 편향된 뇌가 그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뇌는 예외적인 것을 매우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연 선택은 희귀할 뿐만 아니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바로 그런 예외적인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예컨대 적응적 선택의 작용에는 큰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제3장에 나오는 갈라파고스핀치가 유명한 사례이다. 이 종들은 모두 300만 년 전에 남아메이카에서 이주해온 한 종에서 진화했다. 이 종들은 하나의 일반종에서 유래했지만, 자원이 부족한 섬들에 정착한 뒤에는 각자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능력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선인장핀치는 선인장 꽃에서 꿀과 꽃가루를 파내기에 편리하도록 끝이 뾰족한 긴 부리를 갖고 있다. 흡혈핀치는 날카로운 부리로 바닷새의 몸에 상처를 낸 뒤 피를 빨아먹는다. 큰땅핀치는 아주 깊고 넓적한 부리를 펜치처럼 사용해 단단한 씨를 깬다. 자연 선택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베이츠 의태(다른 종의 모습이나 행동을 흉내내어 적을 착각에 빠뜨리는 의태)이다. 점박이베짱이는 여치과 곤충의 한 종인데, 짝짓기 준비가 된 암컷 여치를 흉내내 수컷 여치를 유인한 다음 잡아먹는다. 이 공격적이고 정교한 모방은 음향학적으로는 찌르륵거리는 소리로, 그리고 시각적으로는 일사불란하게 움찔거리는 몸동작을 통해 일어난다. 마지막 예로 신호 원리를 살펴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서식하는 영양의 한 종류인 스프링복은 가끔 프롱킹이라는 독특한 행동을 보인다. 포식 동물을 만나면,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엉덩이의 흰 부분을 추켜올리면서 네 다리를 죽 뻗은 자세로 풀쩍 점프를 한다. 이런 식으로 스프링복은 자신이 젋고 건강하며 쫓아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이 사례들에서 자연 선택이 아주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새는 주로 일반종이고, 대부분의 여치는 단세포적이며, 대부분의 영양은 책략이 모자라고, 스프링복은 포식 동물이 없는 상태에서도 프롱킹을 한다. 종과 개체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견해에 따르면, 종과 개체는 아무런 매력도 우아함도 없다. 이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으며, 세상은 큰 의미가 없다. 살아남은 생물은 대부분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저 도태될 만큼 충분히 나쁘지 않아서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생명의 원칙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연 선택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자연 선택은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업적이고, 당연히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모두는 자연 법칙에 경외감을 느끼지만, 우연은 오직 도박사들의 관심만 끌 뿐이다.
다윈주의의 자연 선택 편향이 일반 대중이 이해하는 진화 개념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진실만, 그러니까 오로지 진실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전체' 진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생물학자들은 중성 형질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현상에 대해 선택주의자의 설명을 상정하고 추구하는 대신에, 설사 예외적인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더라도 중성 형질이 도처에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분대수와 유기화학, 광물리학은 우리의 세계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진화론은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다른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 자신들이 여태까지 근거가 박약한 추정을 바탕으로 활동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이 '내부'에 국한돼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분야는 해체되고 재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별로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자생존, 최적화, 적응, 맬서스식 경쟁 같은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의 개념들은 우리가 현실과 사회화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 개념들이 자연을 잘못 나타낸다면, 우리의 자기 표상까지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적 설계 문제
나는 중요한 사실을 단호하게 강조하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주장 중 어느 것도, 확고하게 입증된 자연 법칙인 '변화를 동반한 대물림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내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자연 선택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단지 자연 선택이 널리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이 책의 어떤 주장도 종의 창조와 형태를 결정하는, 자연을 초월한 힘이 존재한다고 상정하지 않는다.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여전히 내 견해가 자신들의 그릇된 개념을 지지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실, 내 주장은 그들의 주장에 불리한데, 중성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개념과 지적 설계가 틀렸다는 개념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지적 설계가 자연 선택 이론에 기생해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 지적 설계는 자연 선택 이론이 제공하는, 종이 최적화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지적 설계는 다윈의 가축화 유추를 단순한 비유 대신에 아주 진지한 개념으로 받아들여, 위대한 우주적 품종 개량가나 조각가에 해당하는 지적인 힘의 개입과 관리가 없이 어떻게 자연ㅡ혹은 월리스의 경우에는 특히 인간ㅡ이 완성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자연 선택 이론과 지적 설계와는 대조적으로 굿 이너프 이론은 자연의 많은 결함에 주목한다. 자연은 최적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초자연적 지성을 가진 전지전능한 존재가 만든 작품에 넘쳐나는 낭비와 평범성을 지적하는 셈이다. 그렇게 게으르고 서투른 신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숭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연 선택 이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면, 지적 설계의 불합리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방법에 관한 주석 : 자연철학을 위한 장소
프랑수아 자코브는 "과학자는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문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문제에 몰두한다. 즉, 옳은 생각이건 틀린 생각이건, 자신이 풀 수 있다고 믿는 문제에 몰두한다."라고 썼다. 노벨상을 수상한 또 다른 생물학자 피터 메더워는 과학을 "해결 가능한 것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부터 베이컨과 다윈에 이르기까지 자연철학자들은 그러한 제약을 느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경이감에서 시작되며, 경이감을 주는 것이면 어떤 것이건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혹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자는 모두가 합의한 증명과 반증의 지침에 따라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다. 철학자는 그런 지침이 없더라도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을 탐구할 수 있다.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답만 과학 학술지에 실리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인데, '물을 가치가 있는' 질문은 패러다임을 만들고 다시 고치는 종류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다윈은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단단함 차이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추론했다. 철은 물보다 단단하므로, 둘은 서로 다른 구성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유추와 아 포르티오리 논증(만약 전에 인정한 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현재 주장하는 것은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진실일 수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논증), 연역, 상식, 개인적 경험에 의존했다.특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현재는 과거의 열쇠라는 금언으로, 자신의 스승이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 금언은 현재 자연을 지배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들이 과거에도 항상 자연을 지배했다는 원리를 가리킨다. 데모크리토스의 추론은 사이언스의 어떤 호에도 실리지 못했다. 다윈의 내집단이 다윈의 개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 1869년에 창간한 네이처도 다윈의 논문들을 싣지 못했는데, 그 논문들은 임의적 관찰과 간접 정보와 원시적인 실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다윈의 연구는 원시 과학적이긴 하지만, 과학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기여를 "단일 연구로는 지금까지 나온 것 중 가장 훌륭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만약 과학이 자연철학에 적절한 생태적 지위를 할당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나는 다윈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지만, 다윈과는 다른 측면 시야 가리개를 두르고 있다. 다윈의 측면 시야 가리개는 선택된 형질들의 빛을 통과시키지만 나머지는 모두 차단한다. 내 측면 시야 가리개는 자연 선택의 잔재를 차단하도록 설계돼 있다.
비록 나는 다윈의 연장 세트를 사용하지만, 과학자들은 내 방법을 부주의한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과학과 철학은 연구 방식이 서로 다르다. 과학자는 가설을 제안하고 나서 그 가설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철학자는 먼저 가설을 주장하고 나서 그 가설을 급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책에서 나는 사변(철학에서는 경험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 또는 사물을 인식하려는 노력을 가리킴)에 많이 빠지는데, 불과 6만~7만 년 전(지질학적 시계에서는 초침이 한 번 재깍거리는 순간에 불과한)에 멸종의 벼랑에 내몰렸던 호모 사피엔스의 부활과 번성을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특히 그렇다. 나의 일부 주장에 사변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선택주의자의 설명 자체도 사변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나의 모든 사변이 결국 실험을 통해 입증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으며, 일부는 절대로 입증될 수 없다. 나는 그저 굿 이너프 이론이 생물학에서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다.
문화에서 자연까지
제2장에서는 다윈이 인위 선택으로부터 자연 선택을 유추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이것은 다윈의 원죄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변이들이 크고 작은 생존과 생식의 이득을 제공하는 조건들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최선의 개체를 선택하는 행위자로 간주하는 이유는 바로 이 유추 때문이다.
제4장에서는 자연 선택의 가장 밝은 불빛인 사람의 뇌를 다룬다. 인류가 진화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가 우리 뇌 덕분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지성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지구에서 지배적인 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뇌가 자연선택이 빚어낸 위대한 작품이라면, 자연 선택을 변호하기 위해 너무 지나친 주장을 펼치는 셈이다. 뇌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불명예스러운 기관으로, 조금만 더 크다면 죽음의 원인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도구와 불, 초보적인 언어만으로는 모든 기관 중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이 기관의 유지에 드는 비용을 상쇄하기에 역부족이다. 영장류보다 훨씬 큰 뇌를 가진 사람속(Homo)의 나머지 종들은 모두 멸종했다. 그들이 멸종했다는 사실은 그들과 우리의 뇌가 선택되었다는 가설과 양립할 수 없다.
제10장은 인류의 안전망이 윤리에 미치는 의미를 탐구하면서 끝을 맺는데, 사회 내 경쟁이 헛수고라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탁월성을 개발하려고 애쓰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적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애쓰지 않아도 충분한 탁월성을 갖고 있는데(그러는 것이 필요하거나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유용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멸종에서 구해준 최상 수준의 신경세포들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을뿐더러 필요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탁월성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다. 탁월성에 크게 집착하며 살아가는 나는 그것을 추구하는 노력의 무용성과 마조히즘적 성격을 잘 안다. 비록 자본주의 제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사실 생존과 생식 외에는 아무 보상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최적 상태보다 훨씬 못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안전망이 생존과 생식을 보장해준다. 우리 모두가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
1장 기린: 과학은 경이로움에서 시작한다
첫째, 기린의 긴 목이 먹이를 구할 때 유리하다는 주장은 야생에서 기린을 본 적이 없는 진화론자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개념으로 드러났다. 건기에 기린은 주로 덤불이나 어깨 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잎을 뜯어먹고 높은 곳의 잎은 별로 뜯어먹지 않는다. 전체 시간 중 절반은 2m 혹은 그 아래의 잎을 뜯어먹으며 보내는데, 게레눅과 쿠두와 큰쿠두같은 큰 초식 동물과 먹이를 구하는 공간이 겹친다. 마치 다윈주의자들에게 앙심이라도 품은 것처럼 기린은 오히려 먹이가 풍부한 우기에 높은 곳의 잎을 뜯어먹는 경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둘째, 기린과 가까운 친척인 오카피의 목과 다리 길이 비를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기린이 2.1배 더 크다. 즉, 목의 길이가 기대한 값보다 2.1배 더 길다. 이렇게 높은 목으로 혈액을 펌프질해야 하기 때문에 기린은 알려진 동물 중에서 혈압이 가장 높으며, 그래서 심장이 아주 큰 대신에 다른 주요 기관의 능력은 줄어들었는데, 뇌의 크기가 불균형적으로 작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2010년에 기린의 개체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뭄 시기에 어른 기린 중에서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수컷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이들은 칼로리가 더 많이 필요한데, 어떤 높이의 나무에서도 충분한 잎을 섭취할 수 없었다.
기린은 경쟁에서 다른 초식 동물을 물리치기 위해 긴 목이 진화했을 수 있지만, 가장 키 큰 경쟁자인 아프리카코끼리보다 무려 2m가 넘을 정도로 긴 목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키가 2.3m로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키 큰 동물인 타조는 경쟁자가 아닌데, 씨와 관목, 풀, 열매, 꽃처럼 다른 먹이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른 초식 동물과의 경쟁 가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프리카 사바나가 코끼리와 기린에게 필요한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서 두 종이 높이를 놓고 폭주 경쟁을 벌인 끝에 한 종이 다른 종을 필요 이상 아주 큰 차이로 따돌리게 되었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자연 선택은 1mm의 부리 크기 차이가 다윈핀치들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정밀도에서 이렇게 큰 차이를 용인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높이가 기린을 코끼리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준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훨씬 부담이 적으면서 동일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예컨대 50cm 차이 대신에 굳이 2m 차이를 유지하는 부담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굴드는 "목은 처음에 다른 용도의 맥락에서 길어진 뒤, 기린이 탁 트인 평원으로 옮겨갔을 때 더 나은 식사를 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또다시 적응 가정이 등장한다. 굴드는 월리스를 팡글로스처럼 지나치게 낙천적이라고 낙인찍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동일한 사고방식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형질의 유용성과 적응성을 상정하는 사고방식)
도킨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생물학자들 사이에 금기시되는 대진화 개념을 내놓았다. "기린의 목은 단 한 번의 돌연변이 단계롤 통해 나타났을 수 있다(비록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도킨스는 이것이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진화적 변화는 많은 세대에 걸친 돌연변이를 포함한다. 하지만 비록 가능성은 낮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린의 목과 그 조상의 목 사이의 차이는 "적어도 눈이 전혀 없는 상태와 현대적인 눈 사이의 차이와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린은 가장 가까운 친척들보다 목이 훨씬 긴 반면 질적으로는 더 복잡하기 않기 때문에, 적은 수의 돌연변이로, 어쩌면 단 한 번의 돌연변이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킨스와 굴드는 월리스와 다윈과 다소 비슷해 보인다. 선호하는 이론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데이터를 가장 단순하게 해석한 결과는 그것이 틀렸음을 시사하는데도, 그것이 옳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다소 극단적인 추측을 한다.
"지금으로서는 '기린은 어떻게 목이 길어졌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직 모른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글이 자연 선택이라는 품종 개량가가 세대가 거듭될수록, 더 섬세한 생물을 만들어내는 농장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미친 듯이 번진 이 유추는 선택주의자들이 믿는 도그마의 기초가 되었고, 이 도그마는 지금까지도 진화와 그 윤리적 결과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4장 뇌: 우리 조상의 가장 큰 적
오래전에 비둘기과의 한 종이 모리셔스섬 해안으로 흘러들었다가 그곳에서 초시 동물의 에덴동산을 발견했다. 포식 동물의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된 채 풍부하게 널린 도도나무 열매를 배불리 먹으면서 이 새와 그 자손은 섬에 정착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자 이 새는 몸무게가 크게 불어났고, 날기를 그만두었으며, 경쟁이 없는 안락한 환경에 맞춰 경계심을 품지 않는 성향이 발전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운 삶은 인간이 이 섬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끝나고 말았다. 1598년에 네덜란드 해군 제독 비브란트 판 바르비크가 이끄는 함대가 모리셔스섬에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도도는 멸종하고 말았다. 인간 정착민과 그들이 데려온 동물들이 도도를 멸종으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도도는 1662년에 배가 난파되어 이 섬으로 흘러온 네덜란드인 선원이 목격했다.
인간 침입자에 대한 무심한 반응 때문에 도도의 이름은 순진함과 멍청함과 동의어가 되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도도의 성향을 좋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윈주의의 틀에 따르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다윈주의는 멸종의 원인을 멸종한 종에게서 찾는다. 즉, 도도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도는 생존 경쟁을 계속 해나가며 오늘날 우리와 함께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 선택의 본질이다. 경쟁을 이겨낼 능력을 갖든가 아니면 도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만약 열등성이 멸종을 낳는다는 게 도도의 교훈이라면, 그 반대도 똑같이 성립한다. 즉, 승리는 우월성의 결과이다. 도도 이야기에서 승리자는 섬을 정복한 종인 사람이다ㅡ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펼쳐진 더 큰 생명의 이야기에서도. 인류과 진화사에서 보여준 우월성은 너무나도 명백하고 압도적이어서 우리 종은 나머지 모든 종을 정복하는 지배자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류는 다윈주의의 진화 도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그 도식에 포함된 자신의 존재를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자신의 이론에서 인류가 예외적인 존재임을 암시했다. "현재와 같은 가장 무례한 상태의 인간은 지금까지 지구에 나타났던 동물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고도로 조직된 형태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퍼졌고, 나머지 모든 동물은 인간 앞에 굴복했다. 이 엄청난 우월성은 동료를 돕고 보호하게 해주는 지적 능력과 사회적 습성, 그리고 신체적 구조에서 나온게 분명하다. 이러한 특성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생존이 걸린 전투의 최종 중재 판정을 통해 증명되었다.
다윈이 인류를 특별한 존재로 성별한 것은 옳았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생존이 걸린 전투의 최종 중재 판정"은 그의 이론에서 모순 어법에 해당한다. 생존 경쟁이 궁극적인 승자를 낳는다는 개념은 자연 선택의 두 가지 근본 원리와 모순된다. 그 두 가지 원리는 생물의 변이성과 자원 부족이다. 변이성은 동일한 두 개체가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100% 똑같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개체가 아니다. 부족은 맬서스가 설명했듯이 개체수와 자원 사이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차이이다. 부족은 선택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변이는 선택을 가능케 한다. 만약 개체들이 동일하다면 진화가 일어날 수 없는데, 새로 생기는 매 세대는 이전 세대와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원이 부족하고 개체들이 서로 달라야만 선택이 다윈이 기술한 합리적 과정이 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선택된 개체는 무작위로 로또에 당첨된 자가 아니라, 지금 이곳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종 중재 판정'이 존재할 수 없다. 경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그런 경쟁에서는 항상 특정 변이가 다른 것보다 선호될 것이다. 도도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승리는 일시적이고 국지적이다.
월리스도 인류의 특별한 뇌가 낳은 산물에서 예외를 보았지만, 다윈은 뇌가 자연 선택에 제기한 문제를 무시한 반면, 월리스는 야수를 정면으로 직시해 굴복시켰다. 그는 인간의 뇌가 다윈주의에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월리스는 "야만인의 뇌가 필요 이상으로 컸다는" 자신의 믿음을 밝혔고, 이 과잉으로부터 "인간에게 적용하는 자연 선택의 한계"를 추론했다.
우리 앞에 있는 증거에 따르면, 고릴라보다 조금 더 큰 뇌만으로도 야만인의 제한된 정신 발달에는 완전히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야만인이 실제로 소유한 큰 뇌는 순전히 그러한 진화 법칙들 중 어떤 것을 통해 발달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요한 수준 이상을 넘어서는 일이 절대 없이 각 종의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수준의 조직을 낳는다는 것이 이 법칙들의 핵심이다.
제한된 정신 발달이 '야만인'에게만 일어났다는 월리스의 가정을 좀 매정한 것이었는데, 사실 그 추론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환상적인 정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뇌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런 뇌가 필요 없다. 이 때문에 인간의 뇌는 "필요한 수준 이상을 넘어서는 일이 절대 없이 각 종의 필요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수준의 조직을 낳는 것"을 요구하는 다윈의 법칙들에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월리스는 자연 선택은 "소유자에게 조금이라도 해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힘이 없으며, "다윈은 이런 종류의 사례가 단 하나만 나오더라도 자신의 이론은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는 강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라고 지적했다. 뇌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많은 증거는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Homo)속의 뇌가 모든 소유자에게 해롭다고 시사한다. 뇌는 생식ㅡ출산과 출생 후 성장 모두에서ㅡ을 엄청나게 어렵게 만든다. 큰 머리뼈는 산모의 산도를 위협하여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린다. 뇌의 느린 성숙은 아기를 무력한 의존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어른의 생식 잠재력을 추가로 감소시킨다. 뇌는 에너지 요구량이 막대해 가용 자원에 큰 부담을 준다.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가 전체 역사 중 상당 기간을 멸종의 한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고, 호모 계통의 나머지 모든 종들이 오래전에 멸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우리보다 덜 똑똑한 사촌인 침팬지는 우리와 공존한 대부분의 시기에 공유 환경에서 호모 사피엔스보다 개체수가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멸종한 호미닌들이 호모 사피엔스와 거의 동일한 기술과 지적 능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만약 뇌가 진화의 킬러 앱이라면, 왜 그들은 멸종하고 우리는 살아남았을까?
그렇다고 훌륭한 뇌가 인류의 생존에 중요한 자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제 8장에서 나는 오늘과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의 출현이 우리가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서 뇌가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 선택의 모순적인 논리를 드러낼 뿐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람속의 뇌는 최종 중재 판정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성택된 것이 틀림없다. 한편, 그 뇌를 소유한 종들은 대부분 멸종한 반면, 소유하지 않은 종들은 동일한 생태적 지위에서 살아남았으므로, 그 뇌는 선택된 것일 리가 없다. 이 두 가지 주장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은 호미니드의 뇌에 적용되지 않는다. 월리스는 이 주장 때문에 하마터면 파문당할 뻔했다.
다윈주의의 관용적 표현 중에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라는 게 있다. 라이엘의 동일 과정설은 다윈에게 모든 생명에 동일한 물리학 법칙이 적용된다고 가르쳐주었다. 자연 선택은 보편 법칙으로, 그 결과는 적합도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 있는 개선이다. 자연은 경쟁력 있는 종이 나머지 종들을 밀어냄애 따라 개선된 종을 점진적으로 축적한다. 그 결과로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달까지 간 대형 유인원에 관한 서사시가 탄생했다.
다윈이 우리 계통의 직선적 진화를 믿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데, 불운한 최후를 맞이한 호미니드 조상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유인원이 살아남은 반면 이들 조상이 멸종했다는 사실은 진화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견해에 의문을 던진다. 다윈 시대에 네안데르탈인의 골격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윈을 비롯해 그 당시 사람들은 그 골격이 사람속의 다른 종에 속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화석은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골격이 나폴레옹 전쟁 때 죽은 러시아군 병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네안데르탈인과 그 밖의 멸종한 사람들 종들에 대해,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의 선사 시대에 대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이 발견들에서 호미니드는 뇌가 더 작은 영장류들과 같은 장소에서 살아갔지만, 개체군의 크기는 영장류에 비해 작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인구학적 관점(즉,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계통은 전체 역사 중 대부분을 패자 쪽에서 보냈다. 상대적으로 뇌가 빈약한 종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다윈주의에 어긋나는 이단으로, 지나치게 발달한 우리 뇌가 선택된 특성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큰 뇌가 선택적으로 실패작이라는 사실은 세계 인구가 80억 명에 육박하는 반면 침팬지는 그 수가 수십만 마리에 불과해 멸종 위기종이 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를 통해 호미니드 종들은 다른 유인원들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었다. 채드 허프는 유전학 연구를 통해 약 120만 년 전(사람속이 침팬지속에서 갈라져나오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의 유효 개체군 크기가 1만 8500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발견은 하나의 종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작은 개체군이 여러 대륙에 퍼져 살았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한 대륙의 한 지역에만 각각 살았던 침팬지(2만 1000마리)와 고릴라(2만 5000마리)의 유효 개체군 크기와 비교하면 그 수는 더욱 적어 보인다. 그런데 겉모습으로 지례짐작하는 것은 금물이다. 현생 침팬지의 유전자 풀은 사람의 유전자 풀보다 훨씬 크다. 집단유전학자들은 이 발견으로부터 전체 역사를 놓고 볼 때 침팬지의 개체군 크기가 훨씬 크다고 추론한다. 추가 연구는 약 6만 년 전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할 때까지 두 계통의 요람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침팬지가 호미닌보다 더 많았다고 확인해주었다.
인류의 개체수가 최저점에 이른 시기는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으로부터 사람과 유인원이 갈라지고 나서 수백만 년 뒤에 찾아왔는데, 따라서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인원은 사람과 우리의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살아온 대부분의 시기 동안 더 강한 경쟁자였다. 비교적 최근인 7만 년 전에 병목 현상 때문에 인류 개체군의 크기는 2000~1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석기 시대에 자연보존연맹이 있었더라면, 호모 사피엔스를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한 종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7만 년 전에 인류의 뇌가 갑자기 선택되면서 우리 종을 도도의 운명으로부터 구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진화론의 점진 진화 개념에 따르면 그런 주장은 기괴한 것이다.
인구학 데이터는 이렇게 인류의 최종 승리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라고 충고하는 한편으로, 또한 인간의 지능이 가져다주는 적합도 이득에 관한 핵심 가정이 틀릴지 모른다고 시사한다. 멸종한 조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성공적인 종이었던 호모 에렉투스는 19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살았다. 그동안 에렉투스의 뇌용량은 750cc에서 침팬지보다 약 3배나 큰 1250cc로 증가했다. 하지만 뇌가 이렇게 커지는 동안 에렉투스의 기술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고생물학자들은 케냐의 올로르게사일리에에서 에렉투스가 만든 양날주먹도끼를 수천 점 발견했는데, 이 주먹도끼는 78만 년이 지나는 동안 설계상 변화가 사실상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최초의 아이폰이 수천 년 동안 같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현생 인류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뇌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에렉투스는 기술적으로 정체돼 있었고, 적합도 면에서 실패했다.
뇌가 훨씬 작은 호미닌들이 에렉투스만큼 유능했다는 사실도 생각해보라. 2003년에 인도네시아 폴로레스섬에서 발견된 거의 온전한 상태의 골격이 이를 알려준다. 이 골격은 키가 1m 정도였고, 뇌의 크기는 갓난아기의 것과 비슷했다. 연구자들은 이 뼈의 주인이 현생 인류의 난쟁이나 작은머리증(소두증) 환자일 가능성을 일축했다. 작은 몸 크기 때문에 키가 약 1.5m였던 에렉투스와의 연관성도 배제되었다. 그래서 흔히 호빗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계속 늘어나는 인류의 가족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그리고 문제가 많은 가지)로 받아들여졌다. 뇌의 크기를 몸 크기와 비교해 나타내는 대뇌화 지수는 호빗이 약 400만 년 전에 살았다고 시사하지만, 연대 측정 기술을 사용해 측정한 결과는 이 표본이 불과 6만 년 전에 살았다고 시사한다. 같은 동굴에서 발견된 같은 종의 구성원 8명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생존 시기가 6만 년 전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플로레시엔시스는 뇌 크기가 침팬지와 비슷하지만, 불을 다룰줄 알았고 석기를 만들었다. 플로레시엔시스는 방향성 가정과 최적화 가정 모두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이것은 다른 호미닌이 작은 뇌로도 옛날의 호모 사피엔스에 못지않은 지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들은 대뇌화(뇌가 크기와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와 기술 발전과 개체군 크기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오랫동안 당연시해온 가정에 의문을 던진다. 이 가정은 대뇌화는 기술 발전을 낳고, 기술 발전은 개체군 크기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고인류학자 필립 토비아스는 이 추측을 마치 사실인 양 설명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뇌의 크기와 복잡성 증가는 아마도 약 200만 년 동안 지속된 문화의 정교화와 '복잡화'로 나란히 일어났다. 두 사건 사이의 피드백 관계는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각각의 기술적 발전 원인을 뇌 크기 증가에서 찾는 것보다 더 이치에 닿는 설명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계통의 진화 기간 중 대부분을 지배한 것은 비상식이었다. 석기가 나타난 시기는 플라이오세 후기와 플라이스토세 전기(170만~330만 년 전)에 대뇌화가 정점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동안이었던 반면, 뇌 크기가 급속히 증가한 시기는 다음번의 중요한 기술적 발전인 불이 나타나기 약 100만 년 전이었다
농업과 산업화가 인구 증가를 촉진하긴 했지만, 도구는 그렇지 않았다. 최근에 집단유전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개체수는 도구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한참 후인 약 6만 년 전까지 대체로 1만 명 수준에 정체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의 대뇌화 지수는 최초의 인구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적어도 10만 년 동안 안정 상태를 유지했는데, 이 사실은 뇌 크기와 복잡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적합도와 아무 관계가 없음을 시사한다.
마지막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이래 침팬지와 사람이 살아온 경로도 뇌가 사람속의 생존 기회를 높이지 않았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500~400만 년 전에 서로 갈라진 이후 침팬지속 계통은 표현형으로 볼 때 비교적 안정 상태를 유지했다. 반면에 사람속 나무는 여러 차례 가지를 쳐나갔다. 침팬지속의 정체는 그 성공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승리하는 종은 진화하지 않는다. 사람속과 갈라진 이후 침팬지는 평화로운 평형을 누린 반면, 호모속 계통은 일련의 위기와 파국을 겪었다. 하나씩 차례로 적합도 경쟁에 뛰어들었고, 우리 종을 제외한 나머지 종들은 모두 멸종하고 말았다.
침팬지속이 안정을 누린 것은 운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침팬지속 개체군들은 동아프리카 지구대 서쪽의 비옥한 지역에서 살아간 반면, 사람속 개체군들은 동쪽의 메마른 지역에서 살았다. 이 주장은 두 가지 허점이 있다. 첫째, 사람속의 종들은 이 지역 박에서도 살아갔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중동과 유럽, 아시아에도 살았다. 비옥한 지역에서 살았고 대뇌화 지수도 높았던 호모 에렉투스조차 멸종하고 말았다. 둘째, 2005년에 발견된 화석들은 침팬지가 실제로는 플라이스토세 중기에 동아프리카 지구대 양편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침팬지속은 우리 계통보다 사람속이 살던 환경에 훨씬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500세대에 이르는 우리 조상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뇌를 갖고 있었는데도 멸종의 벼랑으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개체군 크기가 아주 작았고, 이 중에서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은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가 적합도를 보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불과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었던 이들은 파리 떼처럼 맥없이 죽어가고 말았지만, 이마가 좁은 사촌은 돌로 코코넛을 깨는 것이 첨단 기술이나 다름없었는데도 토끼처럼 크게 불어났다. 약 6만 년 전까지 아프리카와 그 밖의 지역에서 호미닌이 아주 드물었다는 사실은 지능이 승리를 가져다주었다는 통설과는 너무나도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종의 진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핵심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생물학 문헌에서는 그런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머리말밖에 안 읽었는데 벌써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
책의 초반부를 읽어보면 이 책이 내 인생에,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 느낌이 오는 것 같다
이 책은 아직 본문을 읽지도 않았는데 벌써 느낌이 강하게 왔다
최재천 교수님의 서평과 밀로의 머리말을 읽어보니 '이 책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시간을 낭비시키는 책이 아닐까?' 하는 의심없이 책 속으로 풍덩 빠져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왠지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꽤 많이 소비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자기계발서나 소설처럼 쭉쭉 읽히는 느낌은 아니고 문단을 몇 번 다시 보고 넘어가야 하는, 조금 집중을 해야하는 책인 것 같다
이 밑에부터는 다른 블로그에서 퍼온 거
이타주의 또는 이타성의 영어 표현인 altruism은 1851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귀스트 꽁뜨(Auguste Comte)가 처음으로 제안한 용어이다. 꽁뜨의 이타주의는 남을 위해 사는 삶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이야말로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인류 전체를 위한 희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종교 행위라는, 이를테면 윤리와 종교를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리의 수준에서 의식적으로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히 살아남기 위한 자기 파괴 생물학에서는 이타성을 자신에게는 해가 될 수 있고 남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종의 자기파괴적 행위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손익계산은 번식적응도(reproductive fitness) 즉 생산 가능한 자식의 수로 가늠한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체는 남을 도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게 하고 자신은 원래 낳아 기를 수 있는 자식의 수보다 적게 낳게 된다. 생물이란 모름지기 번식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생각하면 스스로 자신의 번식을 줄이며 남의 번식적응도를 올려주는 행동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었다. 기본적으로 개체중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대단히 어려웠던 현상이었다. 실제로 다윈은 훗날 만일 그의 이론이 무너진다면 바로 이타성의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부터 무려 한 세기가 지난 1960년대 초반까지도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 또는 수준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 식의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 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지나친 경쟁에 따른 자원고갈로 인해 멸종했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만화 한 컷으로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다. 설치류의 동물 레밍(lemming)은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한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적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레밍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의 만화에서 보듯이 그 숭고한 레밍들 중 어느 날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가 나타났다고 가정하자.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레밍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레밍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이 일어나기 어려운 지극히 간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튼(William Hamilton)이었다. 두 편의 연속 논문으로 발표된 그의 이론이 나온 1964년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으로부터 무려 100년이 넘게 흐른 뒤였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튼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해밀튼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어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몇 년 전 출간한 내 에세이집의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인 바 있다. 같은 뜻을 보다 간략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도킨스(Richard Dawkins, 1976)에 의하면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타적 처벌로 협동 더 잘 유지 해밀튼의 포괄적응도 이론은 혈연관계에 있는 개체들 간에 이타성이 진화하기 쉽다는 걸 설명한 이론이지만 그 설명의 범주가 혈연관계 내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혈연관계도 없고 심지어는 종도 다른 개체들 간에 벌어지는 이타적인 행동의 진화를 설명하는 보완적인 이론이 있다. 바로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이다. 호혜주의에 입각한 이타성이 진화하려면 혈연관계에 상관없이 평생 한 번 이상 만나는 관계이며 그 만남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자주 만나며 과거에 이타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얌체’ 또는 ‘배신자’를 색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고 있으면 호혜성 이타주의가 진화할 수 있다. 이 같은 진화는 비교적 소규모의 집단을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에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물론 우리 인간도 그 존재의 역사 대부분을 서로 자주 부딪히고 서로가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소규모의 집단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혈연선택과 호혜주의에 의해 진화한 이타성이 ‘진정한’ 이타성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혈연선택과 호혜주의에 의한 이타주의는 해밀튼의 포괄적응도 이론에 따르면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개체 수준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유전자 수준에서 다시 보면 홀연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분명히 이 두 이론들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의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다. 입양·헌혈·장기기증 등이 좋은 예들이다. 자신의 자식을 낳기보다 남의 자식을 입양하여 길러주는 행동은 번식성공도의 척도로 가늠하면 진정한 이타적 행동이다. 누구의 생명을 구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몸의 일부를 기꺼이 기증하는 일 역시 진정한 이타주의의 표현이다. 이 같은 ‘진정한’ 이타주의를 ‘생물학적 이타주의’에 대비하여 ‘심리적 이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 이타성의 독특한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최근 ‘강한 호혜성(strong reciprocity)’ 이론이 등장했다. 미국 산타페 연구소의 긴티스(H. Gintis),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페어(E. Fehr),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의 보울즈(S. Bowles) 등의 경제학자들이 주축을 이뤄 연구하고 있는 이 이론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좋은 사회적 평판의 이득이 거의 없는 큰 집단 내에서 또 다시 만날 확률이 지극히 낮은, 그리고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과도 협동을 하며 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강한 호혜성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이타적 보상 외에도 이타적 처벌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거나 혹은 약간의 손해가 되더라도 기꺼이 배신자나 얌체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경향이 인간만의 독특한 협동을 진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 경제학자는 또 ‘공익(public goods)’ 게임, ‘최후통첩(ultimat-um)’ 게임 등을 통해 이타적 처벌이 매우 흔히 벌어지며 처벌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보다 허용되는 상황에서 협동이 더 잘 유지 또는 향상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이타성 이 같은 이타적 처벌의 진화적 메커니즘으로 이들은 이른바 ‘문화적 집단선택 이론’을 내세운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것으로 판명된 기존의 집단선택 이론(이름하여 유전적 집단선택 이론)과 달리 유전자와 문화 간의 공진화에 의해 사회적 규범이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한 사회 속에 이타적 처벌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배신자나 얌체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을 확률이 높아져 협동이 배신보다 더 큰 이득을 주게 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각종 시민운동을 비롯하여 신문에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글을 투고하는 일, 그리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면서도 남의 비행에 끊임없이 정의감에 가득 찬 비판을 퍼붓는 일 등이 넓은 의미의 이타적 처벌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라 고도의 지능과 의식 수준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개미나 일벌들의 사회적 감시 행동(worker policing)도 이 이론에 비춰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이론으로 다윈의 성선택론(theory of sexual selection)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메이팅 마인드》의 저자 밀러(G. Miller)는 인간의 이타성 및 도덕성이 성선택의 직접적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역설한다. 성선택론은 다윈이 무수히 많은 생물에서 나타나는 성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더 잘 알려진 자연선택에 덧붙여 제안한 이론이다. 성선택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번식에 관한 한 궁극적인 결정권이 암컷에게 있다는 ‘암컷선택(female choice)’과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수컷들은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수컷경쟁(male-male compe-tition)’이 그것이다. 세계 37개 문화권에서 성적 선호도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남녀 모두 상대의 미·지능, 또는 지위보다도 ‘착한 마음씨’를 더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러는 이 결과를 두고 “우리 조상들이 상대를 고를 때 마음씨 착하고, 인정이 많고, 이타적이고, 공명정대한 사람을 선호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도덕적 행동 능력과 판단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자선행위는 이를테면 공작새의 꼬리깃털이다. 헌혈을 한 사람들은 은연중에 헌혈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려 한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익명의 기부자들도 있다. 하지만 익명의 기부자들은 비록 그들의 이름이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는 않지만 사회 지도층들이 모이는 사교계에는 대체로 잘 알려진 비밀이라고 한다. 기부행위는 일종의 구애행위다. 성선택 과정을 거치는 모든 동물에서 인간의 이타성과 같은 수준의 이타적 행동이 진화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성선택 이론과 사회성 진화를 한데 묶어 분석해야 할 것이다. 더 많은 섹스를 하려고 기부금을 내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1997년 테드 터너가 유엔에 10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의 아내 제인 폰다가 감동의 눈물을 터뜨리며 한 말은 한번쯤 곱씹을 만하다. “당신의 아내가 된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내 생애에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이에요.” 반찬 값은 100원이라도 악착같이 깎으면서 사나흘이면 시들어 버릴 100송이의 장미를 남편으로부터 받고 싶어하는 다분히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아내들의 마음과 혈연선택이나 호혜성 이타주의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 특유의 이타성 간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 |
출처 : https://blog.naver.com/bellhyjg/22221721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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