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에 현재의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
20세기 초반의 아들러 이론을 21세기를 사는 독자들이 알아서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의 공저자 중 철학자인 기시미 이치로의 탁월한 해석 덕택에 아들러의 이론을 오늘날 살아 있는 일상의 언어로 되살아난다. 우선 기시미 이치로는 "심리학의 전성시대"에 만연해 있는 프로이트식 '원인론'을 아들러식 '목적론'으로 설득력 있게 뒤집는다.
특히 오늘날 상식처럼 되어버린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에 대한 비판은 거의 돌직구 수준이다. 트라우마와 같은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특정 한 사건만을 선택해 현재 자신의 복잡한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아주 '저렴한 시도' 라는 것이다. 어떻게 과거의 트라우마적 경험이 현재의 내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둘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아들러 심리학을 기초로 던지는 저자의 주장 또한 명확하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다가 만약 미래의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도 던진다. 설사 미래의 꿈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 꿈을 위해 희생한 그 숱한 '오늘'은 내 인생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직선이나 곡선처럼, 인생이 하나의 선(線)으로 쭉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착각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點)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욕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 자신의 행복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나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 이목 때문에 내 삶을 희생하는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는 저자의 주장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트위터의 'RT(리트윗)'를 죽어라 누르며 '싸구려 인정'에 목매어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귀담아 들을 만하다.
책을 읽다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저자의 주장에 설득당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도 많다. 책을 덮고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여타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과거 1000년의 도읍으로 번성을 누리던 옛 도시 외곽에 철학자가 한 명 살았다. 그 철학자는 세계는 아주 단순하며, 인간은 오늘이라도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납득이 가지 않은 청년은 철학자를 찾아가 진의를 따져 묻기로 했다. 번뇌로 가득한 그의 눈에는,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행복이라니?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입니까?
그렇네. 세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단순한 곳이고, 인생 역시 그러하다네.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로서 그런 주장을 펼치시는 겁니까? 다시 말해 제 인생이나 선생님 인생 앞에 놓인 모든 문제가 단순하다고요?
물론일세.
좋습니다.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번 방문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곳에 온 첫 번째 이유는 선생님과 충분히, 납득이 될 때까지 의견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선생님이 그 지론을 철회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허허.
바람결에 선생님에 대한 평판이 들려오더군요. 이곳에 괴짜 철학자가 살고 있는데, 간과하기 힘든 이상론을 떠들고 다닌다고요. 자고로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로서는 어느 하나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 눈으로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그 잘못을 바로잡아드리려고요. ·····불편하십니까?
아니, 대환영이야. 나도 마침 자네와 같은 젊은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많이 배우고 싶던 참이니까.
고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의견을 덮어놓고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선생님의 지론이 옳다는 전제 하에 그 가능성부터 생각해봤습니다.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 역시 단순하다." 만약 이 태제에 얼마간의 진리가 포함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나 해당되겠지요. 아이에게는 근로나 납세와 같은 눈에 보이는 의무가 없습니다. 부모나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미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니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냉혹한 현실은 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세계는 그 본성을 드러냅니다.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라는 현실을 매정하게 보여주고, 인생 앞에 기다리고 있던 온갖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반전됩니다. 행복한 낭만주의의 계절은 막을 내리고 잔혹한 리얼리즘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죠.
그래, 재미있군.
그뿐 아닙니다. 어른이 되면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고 수많은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일, 가정, 사회적 역할 등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차별과 전쟁, 빈부격차 같은 사회의 온갖 문제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아닙니까?
그렇지. 계속해보게.
그나마 종교가 힘을 가졌던 시대라면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신의 가르침이야말로 진리이며 세계이며 전부였으니까요. 그 가르침에 따르기만 하면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종교는 힘을 잃고 신에 대한 믿음도 빈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의지할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누구나 불안에 떨고 시기와 질투심만 가득하게 되죠. 하나같이 자기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선생님, 말씀해주세요. 이런 현실을 보면서도 세계가 단순하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내 대답은 같네.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도 그러하지.
어째서요? 누가, 어떻게 봐도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 아닙니까!
그것은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일세.
제가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도 저도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 자네,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우물물을 마셔본 적이 있나?
우물물이요? 아,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이 우물물을 끌어다 써서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철에 할머니 댁에서 마시는 차가운 우물물은 참 꿀맛이었죠.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객관적인 수치지.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요컨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착각하게 된다?
아니, 착각이 아닐세. 그때 '자네'가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거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주관에 지배받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지금 자네의 눈에는 세계가 복잡기괴한 혼돈처럼 비춰질걸세. 하지만 자네가 변한다면 세계는 단순하게 바뀔 걸세.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라네.
내가 어떠한가?
그렇지. 어쩌면 자네는 선글라스 너머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용기요?
그래. 이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음, 좋습니다. 반론할 말이 산더미 같지만 나중에 하기로 하고 다시 묻겠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은 변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변한다면 세계도 단순하게 변할 것이라고요.
물론이지. 인간은 별할 수 있어. 그뿐 아니라 행복해질 수도 있지.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금 이 순간부터.
하하, 세게 나오시는군요! 아주 흥미진진한데요, 선생님. 당장 논박해드리지요!
나는 피하지도 숨지도 않을 걸세. 천천히 의견을 나눠보도록 하지. 자네는 '인간은 별할 수 없다'라는 입장인가?
변할 수 없고말고요. 실제로 저 자신이 변하지 못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걸요.
하지만 동시에, 자네는 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물론입니다. 만약 변할 수 있다면, 지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선생님께 무릎을 꿇겠습니다. 반대로 선생님이 제게 무릎을 꿇을 수도 있겠지만요.
첫 번 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 나누었던 논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은 변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행복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먼저 '변하는 것'에 대해 묻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변하기를 원합니다. 저도 그렇고, 길 가는 사람 중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왜 모두가 변하고 싶어 할까요? 답은 하나, 그 누구도 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단히 변할 수 있다면 굳이 '변하고 싶다'고 바라지는 않겠죠. 인간은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변하게 해주겠다고 꾀는 신흥 종교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자기계발 세미나에 속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 겁니다. 아닙니까?
그러면 반대로 묻겠네. 자네는 왜 그토록 완고하게 사람은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지?
왜냐하면, 음,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제 친구 중에 벌써 몇 년째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애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일도 갖길 원합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방에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면 숨이 가빠지고 손발이 떨린다고 해요. 일종의 신경증이죠. 달라지고 싶은데 달라지지 못하는 겁니다.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가 없는 거죠.
자네는 그 친구가 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어쩌면 반대로 응석받이로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고요. 뭐 그 친구의 과거사나 집안 사정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친구의 '과거'에 트라우마인지 뭔지 '원인'이 될 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 결과 그 친구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말이군?
물론이지요.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그럼 자네 말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원인이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에 있다고 하세.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라서 애정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려워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거라고 말일세. 있을 법한 얘기 아닌가?
흔히 있는 일이죠. 모르긴 몰라도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릴 겁니다.
그리고 자네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라고 말했네. 즉 과거의 사건(원인)이 현재의 나(결과)를 규정한다고 말일세.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자네가 말한 대로 '과거'의 사건이 인간의 '현재'를 규정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모두 자네의 친구와 같은 결과, 즉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앞뒤가 맞지 않겠나?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 원인이 결과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과거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 즉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지. 아닌가?
그러면 과거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이네.
일찌감치 대립점이 명확해졌구요. 하지만 선생님, 지금 말씀대로라면 제 친구는 아무런 이유 없이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선생님은 과거의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셨으니까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 친구가 집 안에 틀어박히게 된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된다고요!
그렇지. 분명히 설명이 안 되지.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네.
현재의 목적이라고요?
그 친구는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세. 거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네?
다시 말해 그 친구에게는 '바깥에 나갈 수 없다'라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을 지어내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목적론'이라고 한다네.
그런 농담이 어디 있습니까! 불안과 공포를 지어내다니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 친구가 꾀병을 부린다는 말씀입니까?
꾀병이 아닐세. 그 친구가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진짜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두통을 겪거나 심한 복통에 시달리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증상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어낸 거라네.
말도 안 돼요!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저더러 믿으란 겁니까?
혼동하지 말게. '원인론'과 '목적론'은 다르네. 자네는 모든 것을 원인론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어.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씀하시니 설명을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대체 '원인론'과 '목적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령 자네가 감기로 심한 열이 나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고 하지. 의사는 "환자 분이 감기에 걸린 것은 어제 옷을 얇게 입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고 진단을 내렸네. 그렇다면 자네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나?
그럴 리가요. 옷을 얇게 입어서 감기에 걸렸든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렸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지금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과 증상입니다. 의사라면 약을 처방하든 주사를 놓든 뭔가 전문적인 처치를 하고 치료를 해야죠.
그런데 원인론에 입각한 사람들, 이를테면 일반적인 카운슬러나 정신과 의사는 그저 "당신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의 그 일에 원인이 있다"라고 지적할 뿐이야. 나아가 "그러니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위로하는 걸로 그치지. 쉽게 말해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일세.
잠시만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트라우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가요?
단연코 부정하네.
세상에! 선생님은, 아니, 아들러는 심리학의 대가라면서요?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ㅡ즉 트라우마ㅡ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그러면 선생님은 제 친구가 좋아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겁니까? 스스로 틀어박혀 지내는 것을 선택했다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던 겁니다. 지금의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아니지. 가령 그 친구가 '나는 부모에게 학대받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네.
어떤 목적이요
가장 근접한 것으로는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이지.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불안이나 공포를 만들어낸 걸세.
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걸까요? 문제는 그거라고요!
자, 자네가 부모라고 가정해보세나. 만약 자네 아이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면 자네는 어떨 것 같나?
그야 물론 걱정하겠죠. 어떻게 해야 사회에 복귀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활기찬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이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게끔 온갖 노력을 다할 겁니다.
문제는 그 점이라네.
네?
밖에 나가지 않고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주지. 부모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네. 마치 상처 난 부위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대해주지. 하지만 집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외 다수'가 돼.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눈에 띄지 않는 '나', 남보다 못한 '나'가 되는 거지. 그리고 아무도 나를 귀하게 대해주지 않아. ·····이런 일들은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에게 자주 발생하네.
그럼 선생님의 논리에 따르면, 제 친구는 '목적'을 성취했고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야 불만도 있을 테고 행복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가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그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그것이 목적론이지.
아니아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제 친구는·····,
뭐 이대로 그 친구에 관해 계속 얘기해봤자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걸세.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왈가왈부해봐야 소용없지. 다른 사례를 생각해보자고.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마침 제가 어제 겪었던 일인데요.
그래? 말해보게.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어제 오후,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웨이터가 제 상의에 커피를 쏟았어요. 산 지 얼마 안 된, 그것도 단 한 벌뿐인 새 옷이었지요. 발끈한 저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평소 저는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어제는 커피숍이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화를 냈어요. 분노로 이성을 잃고 만 거죠. 어떻습니까? 여기에도 '목적'인가가 개입할 여지가 있습니까? 어제 일은 어떻게 봐도 '원인'에서 비롯된 행동이죠?
즉 자네는 분노의 감정을 주체 못하고 큰소리를 냈다는 말이군.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인데 분노의 감정에 저항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말인가?
네. 매우 돌발적인 사건이었으니까요. 생각보다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어제 자네가 우연히 흉기를 소지했는데 화가 나서 상대를 찔렀다고 해보지. 그런 경우에도 "나로서는 어쩧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 그건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극단적이지 않네. 자네 논리대로라면 화가 나서 저지른 범행은 전부 '화' 때문이지. 당사자의 책임이 아닐세. 어찌되었든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제 제가 한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실 셈이죠?
간단해. 자네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뭐라고요?
자네에게는 큰소리를 내고자 하는 목적이 먼저였네. 즉 소리를 질러서 실수를 저지른 웨이터를 굴복시키고, 자신이 하는 말을 듣게 하고 싶었던 거지. 그 수단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꾸며낸 거야.
꾸며냈다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그러면 왜 소리를 질렀나?
그야 화가 났기 때문이죠.
아니지. 일부러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로 설명하면 웨이터는 정중하게 사과했을 테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는 등 조치를 취했을 것이네. 아니면 세탁소에 옷을 맡겼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자네는 그가 그렇게 하리란 것을 마음속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큰소리로 화를 냈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일세. 그 도구로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한 것이고.
·····아뇨, 속지 않겠습니다. 속지 않겠다고요!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분노의 감정을 자아냈다? 단언컨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1초도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을 하고 나서 화를 낸 게 아니에요. 분노는 더 돌발적인 감정이라고요!
그래, 분노는 한순간의 감정이지. 이런 이야기가 있네. 어느 날,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말다툼을 벌였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지. "여보세요?" 엄마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들었는데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의 담임선생이었네. 그걸 안 순간 엄마의 목소리를 정중한 톤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그대로 격식을 차린 채 5분가량 담소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 놓았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음, 흔한 이야기로군요.
모르겠나? 요컨대 분노란 언제든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었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큰소리로 딸을 위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걸세.
분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목적론이란 그런 걸세.
·····와 선생님. 온화한 얼굴을 하고서 어쩌면 그렇게 허무주의자(nihilist)처럼 말씀하시나요. 분노에 관해 설명할 때나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제 친구에 대해 설명할 때나, 모든 통찰이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 삶
어디가 허무주의자 같다는 거지?
생각해보세요. 요컨대 선생님은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감정 따위는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요. 하지만 보세요, 선생님. 감정을 부정하는 것, 그것은 인간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론이에요! 우리는 감정이 있기에, 희로애락에 흔들리기에 인간이란 말입니다! 만약 감정을 부정한다면 인간은 불완전한 기계에 불과해요. 이것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한단 말입니까!
나는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세. 누구나 감정은 있어. 당연하지. 하지만 만약 '인간은 감정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말하면, 그 의견은 결코 수용할 수 없네. 우리는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닐세. 그리고 인간은 '감정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또한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들러 심리학은 허무주의와 대치되는 사상이자 철학이라네.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가령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세. 이는 사계절 내내 18도를 유지하는 우물물과 같이 객관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을 차갑게 느끼느냐 뜨겁게 느끼느냐는 '지금'의, 그리고 주관적인 사실이라네.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태가 정해지는 거지.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요?
그렇지.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네. 시계 침을 되돌릴 수 없어. 만약 자네가 원인론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과거에 얽매인 채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걸세.
그렇죠!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괴로운 거라고요!
괴로운 데서 끝나지 않네.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 결과 어떻게 될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되겠지.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자네는 그런 가치관을 인정할 셈인가?
그야 저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의 힘은 그만큼 세다구요!
가능성을 생각하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원인론에 근거한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목적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일세.
어디까지나 '인간은 변할 수 있다'를 전제로 생각하자는 말씀입니까?
물론일세. 우리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바라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임을 이해하기 바라네.
청년은 철학자의 서재를 빙 둘러보았다. (생략)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이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철학자가 제기한 '목적론'은 정통적인 심리학의 인과법칙을 근본부터 뒤집는 개념이었기에 청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논박해나가야 할까.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들러
왜 그리 서두르나?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남이 던져준 답은 어차피 대중요법에 불과해. 아무런 가치도 없지.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책은 한 권도 남기지 않았지. 아테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였을 뿐. 그의 철학을 저작이라는 형태로 후세에 남긴 사람은 제자인 플라톤이었어. 마찬가지로 아들러도 저술활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네. 대신 빈의 카페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작은 토론모임에서 의견 나누기를 즐기던 인물이었지. 결코 팔걸이의자에 붙어 앉아 책만 파던 지식인은 아니었단 말일세.
소크라테스도 아들러도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자네가 안고 있는 여러 의문은 모두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해소될 걸세. 그리고 자네는 변하게 될 거야. 내가 한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네 스스로 말이지. 나는 대화를 통해 답을 찾는 그 귀중한 과정을 자네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네.
당신은 '이대로' 좋습니까?
그러면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자네는 Y처럼 더 밝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로군?
하지만 선생님은 어려운 소원이라고 일축하셨죠. 뭐 그건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물어본 것뿐이고,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압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간단합니다. 성격의 차이, 더 자세히 말하면 기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허ㅡ.
예를 들어, 선생님은 이렇게 많은 책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책을 읽고서 새로운 지식을 얻습니다. 이른바 지식을 쌓는거죠. 읽으면 읽을수록 지식의 양은 늘어납니다. 그렇게 새로운 가치관을 얻으면 자신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에 빠집니다. 하지만 선생님, 안타깝게도 아무리 지식을 쌓은들 그 토대가 되는 기질이나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토대가 비스듬히 기울어 있으면 어떤 지식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쌓인 지식은 단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묻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다고요! 아들러의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들러에 관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제 성격까지 바꿀 수는 없어요. 쌓이다가 결국엔 무너질 테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묻지. 자네는 왜 Y처럼 되고 싶은 거지? Y든 혹은 다른 누군가든, 자네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목적'은 뭘까?
또 '목적'에 관한 얘깁니까?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Y를 좋아한다고요. 그 친구처럼 된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 친구처럼 되면 행복할 것 같다. 그 말은, 자네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거로군?
무슨요·····!
자네는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네. 왜냐하면 자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지. Y처럼 되고 싶어서 지금의 자신을 버리려고 하네. 아닌가?
·····네, 맞아요! 인정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싫어요! 지금 이렇게, 선생님의 시대에 뒤떨어진 철학 강의를 들으며 실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제 자신이 못 견디게 싫습니다!
상관없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으니까.
선생님은 어떤데요? 자신을 좋아하십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이런 나'임을 받아들이고 있네.
'이런 나'라는 것을요?
아무리 Y처럼 되고 싶어도 Y로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네. 알겠나? 자네는 Y가 아니야. 자네는 '자네'로 살면 되는 걸세. 하지만 '이대로의 자네'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네.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대로' 괜찮을 리가 없지. 그 자리에 있지 말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가야 하네.
뼈아픈 말이지만 확실히 그래요. 이대로의 제가 좋을 리 없어요.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
아뇨아뇨, 그것은 무리예요.
왜 무리인가?
유복하고 마음씨 고운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성격이 포악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도 있어요. 그것이 세상입니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이 세계는 평등하지않으며 지금도 인종이나 국적, 민족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니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해요.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은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자네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나? 우리는 교환이 가능한 기계가 아닐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
저한테는 교환이나 고쳐나가는 것이나 똑같아요! 선생님은 핵심이 되는 부분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행은 존재합니다. 먼저 그것부터 인정하세요.
인정할 수 없네.
어째서요!
자네는 지금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네. 삶이 힘들게 느껴지고, 심지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하지만 지금 자네가 불행한 것은 자네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불행한 상태를, 제 손으로 선택했다고요? 그 말을 저더러 믿으라고요?
그리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던 말이지. 자네는 "누구 하나 악을 원하는 자는 없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일반인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역설로 잘 알려진 명제네만.
악을 원하는 사람이야 산처럼 많지 않나요? 강도와 살인범은 물론, 부정을 일삼는 정치가와 공무원도 그렇거요. 오히려 악을 원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선인을 찾는 편인 어려울 것 같은데요.
분명히 행위로서의 악은 숱하게 존재하네. 하지만 어떤 범죄자든지 순수하게 나쁜 짓을 하려는 의도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네. 모든 범죄자에게는 범행을 저지를 만한 내적인 '마땅한 이유'가 있지. 가렴 금전에 얽힌 원한 문제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세. 이것도 당사자에게는 '마땅한 이유'이자 '선(善)'의 수행이라네. 물론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선이지만.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요?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agathon)'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네. 반면 '악(惡)을 뜻하는 '카콘(kakon)'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고.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해 있지.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자네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선가 '불행한 상태'를 택했어.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도, 불행한 상황에 처해서 그런 것도 아닐세. '불행한 상태'를 자신에게 '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왜요? 무엇을 위해서요!
자네에게 그래야 할 '마땅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스스로 '불행한 상태'를 택한 것일까? 그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나는 모르네. 아마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밝혀지겠지.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인정할 것 같습니까, 그따위 철학을! 저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요!
청년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철학자를 노려보았다. 이토록 불행한 삶을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그것이 내게 '선'이었다고? 뭐 이런 황당한 논리가 다 있나! 왜 이렇게까지 나를 우롱하는 걸까?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반드시 논파해주리라. 내 발밑에 무릎 꿇게 하겠어. 청년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앉게. 이대로라면 대화가 어긋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여기서 간단히 논의의 기본이 되는 부분, 즉 아들러 심리학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해 설명하고 넘어가겠네.
간단하게요!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좀 전에 자네는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을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런 성격이나 기질을 '생활양식(life style)'이라는 말로 설명하네.
생활양식이요?
그래. 삶에 대한 사고나 행동의 경향을 가리키지.
사고나 행동의 경향이라고요?
그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게.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포함하는 말일세.
세계관이라면?
가령 "나는 비관적인 성격이야"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네. 그것을 "나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자는 걸세. 문제가 자신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 있다고 보는 거지. 성격이란 말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세계관이라면 변용시키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일세.
음, 어려운데요. 생활양식이란 '삶의 태도'와 비슷한 말인가요?
그런 표현도 가능하겠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을 사는 방식'이라고 할까. 자네는 기질이나 성격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본다네.
스스로 선택한다고요?
그래. 자네는 자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한 걸세.
요컨데, 제가 '불행한 상태'뿐 아니라 이런 꼬인 성격까지도 직접 택했다고요?
물론이지.
하, 아무리 그래도 그 의견에는 무리가 있어요. 제가 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이런 성격이 형성된 상태였어요. 고른 기억이 전혀 없다고요.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자신의 성격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니, 인간이 로봇도 아니고!
물론 의식적으로 '이런 나'를 선택한 것은 아닐세. 맨 처음 선택은 무의식적이었을지도 몰라. 게다가 선택하는 데에는 자네가 여러 번 말한 외적 요인, 즉 인종과 국적, 문화, 가정환경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치니까. 그럼에도 '이런 나'를 선택한 것은 자네일세.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언제 선택했다는 건가요?
대략 열 살 전후라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이지.
그럼 100보 양보해서, 아니 200보 양보해서 열 살이던 내가 무의식중에 그 생활양식인지를 뭔지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대체 그게 어떻다는 거죠? 성격이든 기질이나 생활양식이든, 저는 이미 '이런 나'가 되었습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네. 만약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
다시 선택한다고요?
자네는 지금까지 자네의 생활양식이 뭔지 몰랐을 거야. 어쩌면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조차 몰랐을 테고. 물론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 전부 내가 택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것들은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불만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을 보고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되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자네는 지금 여기에서 생활양식을 알게 됐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네 책임이야.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모두 자네 판단에 달렸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선택할 수 있나요? "네가 그 생활양식을 택했으니 당장 다시 선택해!"라고 한들 그 자리에서 바꿀 수는 없잖아요!
아니, 자네는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야.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도대체 왜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양식을 선택한다네. 지금, 이렇게 무릎을 맞대고 의견을 나누는 이 순간에도 선택을 하지. 자네는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어. 지금 당장 변하고 싶다고, 심지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소연했네. 그럼에도 왜 변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네가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결심해왔기 때문이지.
아니,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네요. 저는 변하고 싶어요. 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입니다. 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겠어요?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비유하자면 오래 탄 차를 운전하는 상태인 거네. 댜소 덜거덕거려고 차의 상태를 고려해가며 몰면 되지.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방금 또 '용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행복해질 용기라·····.
설명이 더 필요한가?
아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습니다. 선생님은, 세계는 단순한 곳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세계가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나'의 주관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요. 인생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프로이트의 원인론이 아닌 목적론에 입각해서 살아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과거에서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 트라우마를 부정해라,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떠밀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 라고요.
그랬지.
나아가 목적론의 대전제로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늘 스스로 생활양식을 선택한다면서.
그래.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말한 것 중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습니까?
없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생활양식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방안이 되겠군요. 이 부분은 아직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아, 그랬지. 자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뭘까?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걸세. 이를테면 방금 전에 자네는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네. 그런 식으로 "만약 ~였더라면"이라고 하는 가능성 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절대 변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자네는 변하지 않을 핑계로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한 거니까.
변하지 않을 핑계라고요?
내가 아는 젊은 친구 중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느라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졸작을 써서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있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
·····저는 그 친구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떨어지면 좀 어떤가? 그걸 계기로 더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런 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
꿈이 깨질지도 모르잖아요!
뭐 어떤가. 단순한 과제ㅡ해야 할 일ㅡ를 앞두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리저리 찾는 게 더 고달픈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소설가를 꿈꾸는 내 친구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일세.
잔인해요·····. 선생님의 철학은 너무 잔인합니다!
확실히 극약 처방일지 모르지.
극약 처방이고말고요!
하지만 세계와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생활양식)에 따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 그리고 행동도 변할 수밖에 없지. 여기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길 바라네. 자네는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잔인할지는 모르지만 간단하지.
그게 아닙니다. 제가 잔인하다고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아, 환경도 관계없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고, 네가 불행한 것도 다 네 탓이야" 하는 것 같아서 단죄당하는 느낌이라고요!
아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내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그래.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좋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지론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아요. 납득되지 않는 부분, 반론하고 싶은 부분이 아직도 잔뜩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번쯤 생각해볼 가치는 있다고 여깁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더 배우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요. 오늘 밤은 이쯤에서 물러나고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뵈어도 될까요? 안 그러면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요.
좋네. 혼자서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나는 늘 이방에 있으니 자네만 괜찮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덕분에 즐거웠네. 고마우이. 다시 의견을 나눠보세.
마지막으로 하나 더요. 오늘 토론이 격해지면서 다소 말을 함부로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말게.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보길 바라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격의 없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다네. 본디 그것이 대화의 참 모습인지도 몰라.
두 번 째 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청년은 약속한 대로 정확히 일주일 후에 철학자의 서재를 방문했다. 사실은 2~3일 후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에 청년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즉 목적론은 궤변이고 트라우마는 확실히 존재한다. 인간은 과거를 잊을 수 없거니와 과거에서 해방될 수도 없다. 오늘이야말로 괴짜 철학자의 지론을 깨뜨리고 모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선생님, 그날 이후 머리를 식히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선생님의 지론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허, 어디에 의문을 느꼈는가?
이를테면, 저는 며칠 전에 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단점밖에 보이지 않고, 좋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저도 저 자신을 좋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목적'으로 설명하시려고 하지만, 대체 어떤 목적이 있어서, 다시 말해 어떤 이익이 있어서 저 자신을 싫어한단 말입니까? 스스로를 싫어해봤자 얻을 게 없는데요.
과연 그렇군. 자네는 스스로 장점 따위는 없다고 느끼는 군. 단점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어. 사실이 어떻든 간에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거지. 요컨데 자기평가가 현저히 낮네. 문제는 왜 그렇게 비굴하게 느끼고 있느냐, 왜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걸세.
실제로 제게 장점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네.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네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라고 결심했기 때문이야. 자신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에만 주목하는 걸세. 먼저 그 점을 이해해야 하네.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고 결심했다고요?
그래.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자네에게는 '선'인 셈이지.
대체 왜요? 무엇을 위해서요?
그 부분은 스스로 생각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자네는 자신에게 어떤 단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선생님도 벌써 눈치 채셨을 거예요. 먼저 성격을 꼽을 수 있지요. 자신감이 없고 매사에 비관적입니다. 게다가 자의식 과잉이라서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어딘가 연극조로 말하고 행동하죠. 성격뿐 아니라 얼굴과 체격도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네요.
그렇게 단점을 말하고 나면 기분이 어떤가?
정말 잔인한 분이로군요! 그야 기분이 좋지는 않죠. 뭐 저처럼 성격이 꼬인 남자하고 사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제 주변에 이렇게 비굴하고 성가신 남자가 있다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슬슬 결론이 보이는군.
무슨 말씀인가요?
자신의 얘기라서 이해하기 어렵다면 다른 사람의 예를 들어보지. 나는 이 서재에서 간단한 상담도 하고 있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한 여학생이 찾아왔었지. 아, 마침 자네가 앉은 그 의자에 앉았다네. 그 여학생의 고민은 적면공포증이었네. 사람들 앞에 나서면 얼굴이 빨개진다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면공포증을 고치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물었네. "만약 적면공포증이 나으면 무엇을 하고 싶지?" 그러자 여학생은 사귀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털어놓았네. 남몰래 짝사랑 중인 남자가 있는데 아직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적면공포증이 나으면 바로 그에게 고백하고 사귀고 싶다고 했네.
유후! 좋은데요. 지극히 여학생다운 상담이지 않습니까. 마음에 둔 남자에게 고백하려고 적면공포증을 고친다니.
정말로 그럴까? 내 견해는 다르다네. 그 여학생은 왜 적면공포증에 걸린 것일까? 왜 적면공포증이 낫지 않는 걸까? 그것은 여학생이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세.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여학생은 고치고 싶다고 말했다면서요.
그 여학생에게 가장 두려운 것,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 남자에게 차이는 걸세. 실연으로 인해 '나'의 존재와 가능성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 사춘기의 실연에는 그런 측면이 강하게 있으니까. 그런데 적면공포증을 앓는 한 그 여학생은 "내가 그 남자와 사귀지 못하는 것은 적면공포증 때문이야"라고 할 수 있어. 고백할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고, 설령 차인다고 해도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지. 마침내는 "만약 적면공포증이 나으면 나도·····"라는 가능성 속에서 살 수 있다네.
그러면 고백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핑계로, 혹은 그 남자에게 차였을 때의 보험으로 적면공포증에 걸렸다는 건가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재미있군요. 흥미로운 해석이에요. 하지만 말이죠, 설령 그렇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여학생은 적면공포증을 필요로 하고, 실제로도 적면공포증으로 고생하고 있잖아요? 그 고민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여학생과 이런 얘기를 나눴네. "적면공포증쯤이야 간단히 고칠 수 있지." "정말이요?" "하지만 나는 고쳐주지 않을 거란다." "왜요?" "넌 적면공포증 덕분에 너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납득할 수 있어. 모든 걸 적면공포증 탓으로 돌리면서." "설마요·····." "만약 내가 적면공포증을 고쳐주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할까? 아마 너는 이곳에 다시 찾아와 '적면공포증에 도로 걸리게 해주세요'라고 떼를 쓰겠지.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담이야."
음.
이건 그 여학생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세. 수험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회사원은 '직업을 바꾸면 만사가 술술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지. 하지만 막상 바라던 것이 이루어져도 상황이 뭐 하나 달라지지 않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네.
그렇죠.
적면공포증을 고치고 싶다는 환자가 나타났을 때, 카운슬러는 그 증상을 고쳐서는 안 되네. 그러면 스스로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어지거든.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본다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고민을 듣고도 그대로 방치하라는 겁니까?
그 여학생은 자신감이 없었네. 이대로 고백했다가는 차일 게 틀림없어, 그러면 점점 자신을 잃고 상처받게 될 거야, 하는 공포심이 있었어. 그래서 적면공포증이라는 증상을 만들어낸 걸세. 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단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라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용기 부여요?
그래. 그 핵심 내용에 관해서는 논의가 좀 더 진행되고 나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도록 하지.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닐세.
설명만 제대로 해주신다면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용기 부여'라는 말,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남자와도 놀러갈 기회가 생겼고, 나중에 그 남자로부터 사귀고 싶다는 고백을 받았다고 하더군. 물론 그 여학생이 다시 이 서재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네. 그 후로 적면공포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 다만, 아마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겠지.
어디까지나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렇다면 그 여학생에 관한 일화를 바탕으로 자네의 문제를 생각해보세. 자네는 단점만 보여서 좀체 자신을 좋아할 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이렇게 성격이 꼬인 남자하고 사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라고. 이제는 알았겠지. 왜 자네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단점에만 집중하며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은 자네가 남에게 미움을 사고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기 때문일세.
무슨 뜻인가요?
적면공포증에 걸린 여학생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차이는 것을 두려워하듯 나네는 남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하지. 그런 상황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세. 즉 자네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되네.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도 이유를 댈 수 있지. 나는 이런 단점이 있어 거절당했다고, 이런 단점만 없으면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하, 보기 좋게 간파당했군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되네. 단점으로 똘똘 뭉친 '이런 나'로 사는 것은 자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 즉 득이 되는 셈이지.
에이, 이런 새디스트! 선생님은 정말 악마 같은 분이세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말씀대로입니다!
인정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일세. 하지만 잊지 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잠깐만요! 그건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인데요?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라니, 무슨 뜻입니까? 혼자 살아간다면 세찬 고독에 마주하게 될 텐데요?
고독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혼자라서가 아닐세. 자네를 둘러싼 타인·사회·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거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소로 '개인'이 되는 걸세.
(생략)
몇 번이고 말해주지. "인간의 고민은 죄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만약 이 세계에 인간관계가 사라진다면 그야말로 우주 공간에는 단 한 사람만 존재하고, 다른 사람이 사라진다면 온갖 고민도 사라질 걸세.
(생략)
개인에 국한되는 고민, 이를테면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생략)
철학자는 말했다. 자네는 대인관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된 것이라고. 자신을 싫어함으로써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친 것이라고. (생략)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생략)
내 키는 155센티미터일세. 아들러도 나와 비슷했다고 하더군. 예전에ㅡ나는 내 나이가 자네만 했을 때ㅡ키가 작은 것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네. 남들만큼만 키가 크면, 딱 20센티미터만, 아니 10센티미터만 더 커도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더 즐거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했지. 이런 생각을 친구한테 털어놓았더니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 해버리더군.
·····너무하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뒤이어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네. "키는 커서 뭐 하려고? 너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더군.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는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지. 하지만 나처럼 체구가 작으면 상대방도 경계심을 풀지. 그렇구나, 과연 체구가 작다는 것은 내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괜찮은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지. 즉 가치전환을 하게 된 걸세. 이후로는 키에 관해서 더는 고민하지 않았네.
음, 하지만 그건·····.
끝까지 듣게. 여기서 중요한 것은 155센티미터라는 내 키가 열등하지 않았다는 점일세.
열등하지 않았다고요?
실제로 뭔가가 결여되었거나 뒤처진 것이 아니었다는 뜻일세. 분명히 155센티미터라는 키는 평균보다 작아. 게다가 객관적으로 측정된 숫자라서 언뜻 보면 열등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문제는 그 키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점이지.
무슨 뜻이죠?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ㅡ다시 말해 인간관계ㅡ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요컨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그렇지. 나는 "너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네. 내 키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된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해석일세.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을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는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생활양식을 다시 선택하라던 논의가 생각나는데요?
그래.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해.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가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네. 이에 관해서는 첫날에 말했을 거야.
(생략)
변명으로서의 열등 콤플렉스
(생략)
아들러도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인정했네. 열등감 자체는 조금도 나쁜 게 아닐세.
그러고 보면, 인간은 왜 열등감을 느끼는 걸까요?
그건 순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우선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네.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지. 아들러는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했네.
우월성 추구요?
(생략)
아들러는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라고 말했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열등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단 거군요?
그렇지. 인간은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진하려고 하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하네. 열등감이 이런 방향으로 나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한 발 내디딜 용기도 내지 못하고 '상황은 현실적인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나 같은 건",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라며 포기하는 사람들 말이야.
(생략)
그건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 콤플렉스야.
(생략)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네. 구체적으로는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걸세. 그건 열등 콤플렉스지.
아니아니, 방금 선생님이 든 사례들은 확실히 인과관계가 있어요! (생략)
자네가 말한 인과관계에 관해 아들러는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고 말이야. (생략)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나아가 학력에 열등 콤플렉스가 있어서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거꾸로 말해 '학력만 높으면 나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하는 논리가 되기도 하네.
음, 그렇죠.
그것이 열등 콤플렉스가 지닌 또 다른 측면이라네. 자신의 열등 콤플렉스를 말이나 태도로 밝히는 사람,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A만 아니면 나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셈이지.
(생략)
열등감이 있는 상태, 그것은 현재 상황의 '나'에게 어떤 모자람을 느끼는 상태라네. 그렇다면 문제는 ·····.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점이겠지요.
그렇지.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하는 점. 가장 건전한 형태는 노력과 성장을 통해 채우려는 걸세. 예를 들어 학문에 힘쓰거나, 연습에 매진하거나, 일에 열정을 쏟는 식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 콤플렉스에 빠지게 돼. 좀 전의 예를 다시 들어볼까?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학력만 높으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라는 뜻이 되기도 하지. 자신의 유능함을 암시하는 거야. 지금은 학력이라는 덮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나'는 우월하다고 말일세.
아니아니, 뒤에 하신 말씀은 이미 열등감이 아니에요. 외려 허세를 부리고 있는데요?
그렇지. 열등 콤플렉스는 또 다른 특수한 심리 상태로 발전하기도 한다네.
뭔가요, 그게?
아마 들어본 적 없는 말일 거야. '우월 콤플렉스'라고 하지.
우월 콤플렉스요?
심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노력과 성장 같은 건전한 수단을 이용해서 보완할 용기가 없어. 그렇다고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열등 콤플렉스도 더는 견뎌낼 수 없지. '못난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그러면 인간은 더 값싼 수단으로 보상하려고 한다네.
어떻게요?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걸세.
거짓 우월성?
가까운 예로 '권위 부여'를 들 수 있지.
뭡니까, 그게?
예를 들어 자신이 권력자ㅡ학급 반장에서부터 저명인사까지 광범위하지ㅡ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하는 걸세. 그를 통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지.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일부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존재가 우월하다거나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거지. 즉 거짓 우월성일세.
그 밑바닥에 강렬한 열등감이 있다는 말이군요?
(생략)
단 권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되지.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네.
(생략)
아니지. 일부러 말로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은 외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네. 아들러도 분명히 지적했지. "만약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자랑은 열등감의 발로다?
그렇지.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그러니까 열등 콤플렉스와 우월 콤플렉스가 의미는 달라도 실상 뿌리는 같다는 말씀인가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자랑에 관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라네. 구체적으로는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불행 자랑이요?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뭐 그런 사람이 있기야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하지. 가령 내 키가 작은 것. 이에 대해 마음씨 고운 누군가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인간의 가치는 그런 걸로 정해지지 않아"라고 위로했다고 치세. 하지만 여기서 내가 "네가 키 작은 사람의 고민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받아친다면 이제 누구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걸세. 주변 사람들은 마치 상처 난 부위를 어루만지듯 나를 조심스럽게ㅡ아니, 신중하게ㅡ대하겠지.
그렇겠죠.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고 '특별'해지는 거지. 병에 걸렸을 때, 다쳤을 때, 실연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며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네.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놓고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는 거군요?
그렇지.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ㅡ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ㅡ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첫날 말했던, 집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들은 곧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지네.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라고 지적했을 정도야.
연약함이 권력이다?
아들러는 말했지. "오늘날 누가 가장 강한지 자문해보라. 갓난아기가 논리적인 답이 될 것이다. 갓난아기는 지배하지만 지배받지 않는다." 갓난아기는 연약한 존재라서 어른들을 지배할 수 있네. 그리고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지.
·····그런 관점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상처를 입은 사람이 "너는 내 마음을 이해 못해"라고 하는 말에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겠지. 당사자의 기분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네.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게. '우월성 추구'라고 하면 남보다 우월하려는 욕구, 다른 사람을 넘어트려서까지 위로 올라가려는 욕구를 떠올리기 쉽네. 남을 밀어내고 계단을 오르는 이미지랄까. 물론 아들러는 그런 태도를 긍정하진 않았어. 그렇게 하지 않고 평평한 땅에 앞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뒤를 걷는 사람도 있지. 그런 장면을 상상해보게. 걸어온 거리와 걷는 속도는 다르지만 다 같이 평평한 길을 걷는 장면을.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디디려는 의지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려는 의사가 아닐세.
인생은 경쟁이 아니란 건가요?
그렇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그저 앞을 보고 걸으면 되는 거지. 물론 다른 사람과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네. 아뇨, 그것은 무리예요. 우리는 어찌되었든 남과 비교해요. 열등감이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하지만·····
알겠나, 우리는 저마다 달라. 성별, 연령, 지식, 경험, 외모까지 같은 사람은 없다네.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나도 순순히 인정해. 하지만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존재일세.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달라. 그 '차이'를 선악이나 우열과 엮으면 안 된다는 걸세. 어떤 차이가 있든 우리는 대등하니까.
인간에게는 상하 구별이 없다. 뭐 이론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선생님, 여기서 우리는 현실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닌가요? 가령 어른인 저와 덧셈과 뺄셈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정말로 대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지식이나 경험의 양, 그로부터 주어지는 책임의 양에는 차이가 있겠지. 신발 끈을 잘 매지 못하고, 복잡한 방정식도 못 풀지 몰라. 문제를 일으켰을 때 어른만큼 책임을 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걸로 인간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어. 내 대답은 한결같네.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네.
그러면 선생님은 어린아이를 어엿한 어른으로 대하라는 겁니까?
아니.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도, 아이로 대하라는 것도 아닐세. 쉽게 '인간 대우'를 하라는 거지.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진지하게 대하라는 걸세.
그러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등하다, 같은 길을 걷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차이'가 있죠? 앞서 걷는 사람은 뛰어나고, 뒤에서 쫓아가는 사람은 뒤떨어지는. 결국은 우열의 문제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선생님은 모든 경쟁에서 자유로우십니까?
물론일세. 지위와 명예를 좇지 않고 재야의 철학자로서 세속의 경쟁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것은 경쟁에서 내려왔음을, 즉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아니. 승부를 다투는 장소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선생님, 그건 삶에 지친 노인네들이나 할 법한 얘기잖아요! 저처럼 젊은 사람은 말이죠, 경쟁이라는 긴 장감 속에서 자기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돼요. 곁에서 달리는 라이벌이 있기 때문에 나도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거라고요. 대체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보는 것이 왜 나쁘다는 거죠?
만약 그 라이벌이 자네에게 '친구'라고 불리는 존재라면 자신을 연마할 기회가 되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쟁 상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네.
무슨 뜻이죠?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 뿐이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정리해보지. 처음에 자네는 아들러가 말한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는 정의에 불만을 제기했지? 그리고 그것이 열등감을 둘러싼 논쟁으로 번졌고.
아, 맞다. 열등감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깜빡 잊고 말았네요. 도대체 열등감에 관한 이야기는 왜 하신 건가요?
경쟁과 연결된 얘기니까. 기억하게.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째서요?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이 남으니까.
승자와 패자라,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구체적으로 자네의 일이라고 생각해보자고. 자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하세. 그런데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어. 이런 관계에서는 승패를 의식할 수밖에 없지. "A는 이 명문대학교에 들어갔고, B는 저 대기업에 취직했고, C는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사귀고 있어. 그에 비하면 나는 요 모양이네." 이런 식으로 말이야.
하핫, 상당히 구체적이네요.
경쟁이나 승패를 의식하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야. 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이 사람에게는 이겼어, 저 사람에게는 졌어,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네. 열등 콤플렉스나 우월 콤플렉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지. 그렇다면 이때 자네에게 타인은 어떤 존재가 될까?
글쎄요, 라이벌인가?
아니, 단순한 라이벌이 아닐세. 언제부터인가 자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적이요?
즉 사람들은 늘 자네를 무시하고, 비웃고, 틈만 나면 공격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방심할 수 없는 적이고, 이 세계는 무서운 장소라고 말일세.
방심할 수 없는 적과의····· 경쟁이라고요?
경쟁의 무서움이 그걸세. 설사 패자가 되지 않아도, 경쟁에서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새가 없어.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늘 이겨야 하지. 남을 믿을 수도 없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그들이 늘 경쟁 속에서 살기 때문이지. 그들에게는 세계가 적으로 넘쳐나는 위험한 장소니까.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자네'를 주시하고 있을까? 자네를 24시간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까? 아마 아닐걸. 내가 아는 젊은 친구는 소년 시절에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빗는 습관이 있었다는군.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삶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더군.
(생략)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 그러면 형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경쟁'에 관해 생각해보자고. 만약 자네가 형이나 그 외 다른 인간관계를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글쎄요, 형은 형이고 남은 남이겠죠.
아니,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을 걸세.
친구요?
자네가 전에 말했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이야.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하지만 일단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네.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되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네.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어줄, 믿을 수 있는 타인. 그것이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으음.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더는 세계를 위험한 장소로 보지도 않고, 불필요한 시기심이나 의심에 눈이 멀지도 않을 걸세. 대신에 세계가 안전하고 쾌적한 장소로 보이게 되겠지.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도 눈에 띄게 줄어들 걸세.
권력투쟁에서 복수로
알겠습니까, 선생님? 목적론은 궤변이고 트라우마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어요! 선생님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과거가 과거로 존재하는 하느 우리는 과거와 연결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과거를 없던 것으로 친다면,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요! 선생님은 그런 무책임한 삶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타임머신을 탈 수도 없고 시계 침을 되돌릴 수도 없지. 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그것이 '지금의 자네'에게 주어진 과제일세.
그러면 '지금'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지난번에 선생님은 "인간은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다"라고 말씀하셨죠? 목적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고요. 저는 지금도 그 말이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에 대해, 정치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실는지요? 이것도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지어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 사회적인 문제에 분노를 느낄 때가 있지. 하지만 그것은 돌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논리가 뒷받침된 분노지 않은가? 사적인 분노와 사회의 모순 및 부정에 대한 분노는 종류가 다르네. 사적인 분노는 금세 식지. 반면 공적인 분노는 오래가네. 사적인 분노는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도구에 불과하네.
사적인 분노와 공적인 분노는 다르다?
전혀 다르지. 공적인 분노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니까.
그러면 사적인 분노에 대해 묻겠습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매도를 당하면 화가 나시겠죠?
나지 않네.
거짓말하지 마세요!
만약 면전에서 욕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숨겨놓은 '목적'이 뭔지 생각할 걸세. 면전에서 욕을 먹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언동으로 진짜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권력투쟁이요?
예를 들어, 아이가 어른에게 짓궂은 장난을 칠 때가 있네. 대개 그런 장난은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들려는 심산이라서 어른이 진짜로 화를 내기 직전에 그친다네. 하지만 만약 이쪽이 정말로 화를 낼 때까지 그만 두지 않는다면, 그 목적은 '싸우는 것' 자체에 있네.
싸우려고 하다니, 원하는 게 뭐죠?
이기고 싶은 거지. 이겨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은 걸세.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겠어요?
가령 자네가 친구와 요즘 정치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하세. 머지않아 논쟁이 가열되면서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언쟁이 계속되고, 결국 상대방이 인신공격을 하기에 이르렀네. 그러니까 네가 멍청한 거야,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변하지 않는 거야 등.
그런 말을 들으면 이쪽에서도 더는 참을 수가 없지요.
이런 경우 상대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순수하게 정치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싶었던 걸까? 아니지. 상대방은 그저 자네를 비난하고 도발하고 권력투쟁을 함으로써 평소 못마땅했던 자네를 굴복시키고 싶은 걸세. 여기서 자네가 화를 내면 상대가 의도한 대로 두 사람은 권력투쟁에 돌입하지. 그러니 어떠한 도발에도 응해서는 안 돼.
아니, 도망칠 필요 없어요. 싸움을 걸어왔으면 받아주면 되죠. 어차피 질문은 상대방에게 있잖아요. 그런 인간은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 돼요. 말이라면 저도 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그러면 자네가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하세. 그리고 패배를 인정한 상대가 깨끗이 물러났다고 치자고. 하지만 권력투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싸움에서 진 상대는 바로 다음 단계에 돌입할 걸세.
다음 단계요?
그래. '복수' 단계일세. 일단은 물러나지만, 상대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로 뭔가 복수를 계획하고 보복에 나선다네.
이를테면요?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아이가 비행청소년이 된다거나, 등교를 거부하고 집 안에 틀어박힌다거나, 리스트컷증후군 같은 자해행위를 하는 경우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서는 이를 '부모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 이렇게 됐다'라고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설명하네. 화초에 물을 주지 않아서 시들어 말랐다는 식이지. 이해하기 쉬운 해석임에는 분명해.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은 아이가 밝히지 않은 목적, 즉 '부모에 대한 복수'라는 진짜 원인을 놓치지 않네. 비행을 저지르고, 등교를 거부하고, 스스로 손목을 그으면 부모는 곤혹스러워 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위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네. 아이는 그것을 알고 문제 행동을 하는 걸세. 과거의 원인(가정환경)에 등 떠밀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부모에 대한 복수)을 달성하기 위해서.
엄마아빠를 난처하게 하려고 문제 행동을 한다는 겁니까?
그래. 스스로 손목을 긋는 아이를 보고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하면서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을걸세. 하지만 손목을 긋는 행위를 했을 때 주변 사람ㅡ예를 들어 부모ㅡ이 어떤 마음일지 헤아려보게. 그러면 저절로 행위의 배후에 있는 '목적'이 보일 걸세.
·····목적은 복수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인간관계가 복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걸어왔을 때는 절대 응해서는 안 되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러면 면전에서 인신공격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저 참기만 합니까?
아니. '참는다'는 발상은 자네가 아직 권력투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일세.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리고 그것이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네.
하지만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까요? 대체 분노를 어떻게 제어하라는 겁니까?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나? 그러지 말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음, 어렵군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네.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의 감정도 나오지 않을 걸세.
하지만 분명 오해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어오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데도 화를 내서는 안 됩니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지.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우리에게는 말이 있지 않나.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말의 힘을, 논리적인 말을 믿는 걸세.
·····확실히 그걸 믿지 않으면 이 대화도 성립하지 않겠죠.
구너력투쟁에 관해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왜죠?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
옳다고 생각만 했는데도요? 아니, 과장이 너무 심하십니다!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으음.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맞아요. 그런 측면이 있죠.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인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승패에 연연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그래. 흐릿한 안경을 쓰면 눈앞의 승패밖에 보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게 되지. 경쟁이나 승패의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자신을 바로 보게 되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걸세.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들러는 인간관계를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라는 세 가지로 나누고 이를 합쳐 '인생의 과제'라고 불렀네.
이 경우 과제란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란 뜻인가요? 이를 테면 노동과 납세 같은 거요.
아니. 오로지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해주게. 인간관계의 거리와 깊이에 관해서. 그것을 강조하려고 아들러는 '세 가지 유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네.
인간관계의 거리와 깊이요?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네.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말 그대로 '과제'인 셈이지.
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어요?
먼저 '일의 과제'부터 생각해보세. 어떤 일이든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는 없네. 예를 들어, 평소에 나는 책을 내기 위해 이 서재에서 원고를 집필하며 하루를 보내지. 집필은 누구에게 맡길 수 없는 자기 완결적인 작업이야. 하지만 책을 내고 파는 일은 편집자와 북 디자이너, 인쇄업자, 그리고 유통업자와 서점 직원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네. 타인과 협력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어.
붉은 실과 단단한 쇠사슬
그러면 '교우의 관제'란 뭐죠?
일을 벗어난, 더 넓은 의미에서의 친구관계일세. 일처럼 강제성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것도,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어려운 관계지.
(생략)
나도 전에는 그랬네. 고교 시절에 나는 친구를 사귀려고 하지도 않고 그리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며 말없이 철학책만 파고들며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런 나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하러 갔네. 선생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아이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했다더군. 그 말을 듣고 어머니도 나도 크게 용기를 얻었지.
(생략)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 친구와 지인의 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네. 이는 사랑의 과제와도 연결되는 내용인데,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라네.
저도 앞으로 진정한 벗을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자네가 변하면 주변도 달라지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아들러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일세. 타인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닐세. 자네가 첫발을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지.
(생략)
마지막으로 '사랑의 과제'란 무엇입니까?
사랑의 과제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네. 하나는 흔히 말하는 연애관계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족관계, 특히 부모자식 관계라네. 일, 교우에 이은 세 가지 과제 중 사랑의 과제가 가장 어렵지. 예를 들어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을 때, 친구 사이에서는 허용되는 말이나 행동이 연인이 된 순간 허용되지 않기도 하네. 구체적으로는 다른 이성친구와 노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인 누군가와 통화만 해도 상대가 질투를 하지. 그만큼 거리도 가깝고 관계도 깊은 걸세.
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하지만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
아니아니, 그건 부정을 인정하는 이론이잖아요! 상대가 바람을 피워서 행복해한다면, 그 모습까지도 축복하란 말인가요!
적극적으로 바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을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게 사이 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으음.
단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서는 '헤어진다'는 선택지가 있네. 오랜 세월 함께 산 부부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면 헤어질 수도 있어. 그런데 부모 자식 관계는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해. 연인이 붉은 실로 연결된 사이라고 한다면, 부모자식은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된 관계일세. 게다가 손에는 작은 가위밖에 없지. 부모자식 관계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지금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피하지 말라는 걸세.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설령 끝내 가위로 끊어내더라도 일단은 마주 볼 것.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인생의 거짓말'을 외면하지 말라
아, 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요. 선생님은 말씀하셨죠. 제가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고 '친구'로 여기지 않는 것은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치기 때문이라고요. 그것은 결국 무슨 뜻인가요?
가령 자네가 A라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세. 왜냐하면 A에게는 용서하기 힘든 결점이 있으니까.
후훗,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A의 결점을 용서 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A를 싫어한다'는 목적이 앞서고, 그 목적에 맞는 결점을 나중에 찾아낸 거니까.
말도 안 돼! 무엇 때문에요?
A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있을 수 없어요! 어떻게 봐도 순서가 뒤바뀌었다고요.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니까 싫어진 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사귀던 사람과 헤어질 때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 있어서 어느 시기가 지나면 상대가 하는 행동에 사사건건 화가 날 때가 있어. 밥을 먹는 모습이 얄밉게 느껴진다거나, 방 안에서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낀다거나, 숨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다거나. 수개월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건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알겠나?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상대가 성인군자와 같은 사람일지라도 싫어해야 할 이유 같은 건 간단히 찾아낼 수 있지. 그렇기에 세계는 언제든 위험한 곳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볼 수 있는 거라네.
그러면 제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고작 그런 걸 위해 남의 결점을 꾸며냈다고요? 그리고 타인을 '적'으로 보고 회피하는 거다?
그렇다네. 아들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어.
·····
잔인한 말이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한다. 남 탓으로 돌리고, 환경 탓으로 돌리고, 인생의 과제에서 도망친다. 지난번에 말했던 적면공포증에 걸린 여학생도 마찬가지라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의 거짓말'은 잔인한 말이라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죠? 제가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맞아. 나는 자네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네. 부모님에 대한 것도, 형에 대한 것도. 다만 한 가지는 알고 있지.
뭘요?
자네의 생활양식, 인생을 사는 방식을 결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자신이라는 사실.
이야·····.
만약 자네의 생활양식이 타인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하네. 책임 소재는 명확하지.
저를 규탄하실 작정이군요! 사람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비겁자 취급까지! 전부 제 책임이라고요?
화가 난다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 되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일세. 아들러는 인생의 과제나 인생의 거짓말을 선악으로 구분해 말하지 않았네. 지금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선악도 도덕도 아닌 '용기'의 문제일세.
또 용기입니까!
그래. 설사 자네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고 인생의 거짓말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네가 '악'에 물들어서가 아닐세.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걸세.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결국 마지막은 '용기'에 관한 얘기입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라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소유의 심리학'이고 결국엔 결정론으로 귀결돼. 반면 아들러 심리학은 '사용의 심리학'이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걸세.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며 동시에 '사용의 심리학'이다·····.
우리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손으로 고르는 걸세.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있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열등 콤플렉스를 극복할 자신이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해도, 저는 앞으로도 열등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지도 몰라요. 아니, 제게 부족한 것은 용기가 분명합니다. 인생의 거짓말에 대해서도 인정합니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워요. 인간관계로 상처받고 싶지도 않거니와 인생의 과제도 뒤로 미룬 채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거고요. 네, 다 맞습니다. 하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씀은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거잖아요! 너는 용기가 부족하니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태도는 조언을 한답시고 "힘내라" 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어리석은 윗사람의 행동과 다를 바 없어요. 그렇잖아요? 이쪽은 힘이 나지 않아서 고민인데!
요컨대 자네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달라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저는 인간이에요. 기계가 아니라고요. 용기가 없다고 해서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용기를 보충할 수는 없다고요!
알겠네. 하지만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하기로 하세.
도망치시는 건 아니지요?
물론이지. 아마 다음에는 자유에 관해 논하게 될 걸세.
용기가 아니라요?
그래. 용기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유에 관한 논의지. 자네도 일단 집에 가서 자유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자유란 무엇인가·····. 좋습니다. 그럼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세 번 째 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는다.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다. 아들러는 이런 상벌에 의한 교육을 맹렬히 비판했네. 상벌교육의 결과롤 생기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등과 같은 잘못된 생활양식일세. 칭찬받고 싶은 목적이 있어서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못하면 분개하거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딱 봐도 이상한 얘기지.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감을 잃는다. 그러한 삶이 과연 건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신이 보고 있으므로 선행을 쌓는다"라는 생각. 그러나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악행이 허용된다"라는 허무주의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사상이라네. 우리는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신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네. 오히려 신이 없는 허무주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을 수단으로 삼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받는다는 상벌교육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지. 하지만, 가령 업무의 목표 자체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그 일을 하기가 괴로울 걸세. 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억누를 테니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 중에 성격이 제멋대로인 사람은 별로 없네. 오히려 타인의 기대, 부모와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괴로워하지. 쉽게 말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세.
그러면 결국 자기 멋대로 하라는 겁니까?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닐세. 이를 이해하려면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네.
'과제를 분리'하라
예를 들어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세. 수업시간에는 딴청을 부리고, 숙제도 하지 않고, 툭하면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오지. 만약 자네가 부모라면 어떻게 할 텐가?
물론 온갖 수단을 써서 공부를 시키겠죠.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붙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귀를 잡아끌어서라도 책상에 앉혀야죠. 그것이 부모의 책무니까. 실제로 저도 그렇게 컸어요. 그날 숙제를 마칠 때까지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 더 묻지. 그런 강압에 못 이겨 공부를 하게 된 결과, 자네는 공부를 좋아하게 됐나?
안타깝게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공부하라고 하니까, 대학에 가려면 시험을 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죠.
알겠네. 그러면 아들러 심리학의 기본적인 입장부터 설명하겠네. 예를 들어 눈앞에 '공부한다'라는 과제가 있을 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네.
아이가 공부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혹은 친구와 놀러 가는가, 가지 않는가. 원래 이것은 '아이의 과제'이지 부모의 과제가 아닐세.
아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겁니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아이 대신 부모가 공부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나?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세.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분리해서, 어떻게 한다는 거죠?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뿐일세.
·····그것뿐, 이라고요?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ㅡ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ㅡ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
음. 잘 모르겠네요. 대체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어떻게 구분하죠? 솔직히 제 관점에서 보자면,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는 아이는 거의 없는데다, 누가 뭐래도 부모는 보호자니까요.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가하게.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ㅡ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ㅡ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아이란 말이지.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일세.
아뇨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인생의 선배이자 보호자이기도 한 부모에게는 아이에게 "공부해"라고 타이를 책임이 있어요. 이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지 과제를 침범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일지 모르지만,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은 부모의 과제예요.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ㅡ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ㅡ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그러면 아이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아이의 과제니까 방치하라는 겁니까?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부모자식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죠?
물론이지. 이를테면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상담 시에 내담자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는 카운슬러의 과제가 아니라고 여기네.
(생략)
상담을 받은 결과, 내담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생활양식을 바꿨는가, 바꾸지 않았는가. 이는 내담자 본인의 과제고 카운슬러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아니아니,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허용된다니요!
물론 곁에서 최선을 다해 돕기는 하지. 하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아. 어느 나라에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네.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나중에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그럼,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의 경우는 어떤가요? 다시 말해 제 친구와 같은 경우요. 그래도 과제를 분리해라, 함부로 개입하지 마라, 부모는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실 겁니까?
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빠져나오지 않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이는 원칙적으로 본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일세. 부모가 개입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생판 남도 아니니 어느 정도 지원은 필요하겠지.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순순히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평소에 그런 신뢰관계를 쌓아 놓았는가 하는 점이 되겠지.
그러면, 가령 선생님의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철학자로서가 아닌 한 아이의 부모로서 대답해주세요.
일단 나는 '이것은 아이의 과제'라고 생각하네.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 대해 개입하려 들지 않고,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그만둘 걸세. 그런 다음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모의 변화를 눈치 챈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도움을 구하거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할 걸세.
실제로 아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도 그렇게 단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개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요컨대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 걸세.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ㅣ. 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이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진학할 학교나 직장, 결혼 상대, 일상의 사소한 언행마저도 부모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네. 당연히 걱정도 되고 개입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 않나.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가족끼리도 선을 그으란 말씀입니까?
오히려 거리가 가까운 가족이야말로 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선생님은 한쪽에서는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을 부정하고 있어요! 그렇게 타인과 선을 그어버리면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고요!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알겠나?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그 선을 긋지 않는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말로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의 과제'에는 그런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다네.
어려워요. 어렵다고요, 그것은!
물론이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과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ㅡ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ㅡ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게.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게. 그것이 인생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만드는 첫걸음일세.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네의 직장에 관해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하는 장면을 가정해보지. 실제로도 반대를 하셨지?
네, 대놓고 극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말끝마다 싫은 기색을 내비치셨습니다.
그러면 알기 쉽게 그 이상으로 심하게 반대를 했다고 치세.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네. 도서관 사서라니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형과 함께 가업을 잇지 않으면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자, 라고 압박했지. 하지만 여기서 '인정할 수 없다'는 감정과 어떻게 타협할 것이냐는 자네의 과제가 아니라 부모님의 과제네. 자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아니, 잠깐만요! 다시 말해 선생님은 "부모가 얼마나 슬퍼하든 관계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관계없네.
농담하지 마세요! 그따위 불효를 권장하는 철학이 어디 있답니까!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상대의 과제이지 내 과제가 아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략)
만약 자네가 과제를 분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즉 상사가 아무리 부당하게 화를 내도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닐세. 상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지. 자네가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고,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자네가 할 일은, 내 인생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이를테면 부모님과 형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내 제안은 이렇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생략)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책을 읽을 때, 책에 얼굴을 너무 가까이 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 마찬가지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상대와 마주보고 얘기조차 할 수 없네. 그렇다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안 돼. 부모가 아이를 계속 야단만 치면 마음이 멀어지지. 그러면 아이는 고민이 있어도 부모에게 털어놓기 않고, 부모도 도움을 줄 수가 없어.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되 상대의 영역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거리. 그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생략)
그러면 자기중심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씀입니까?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진로와 배우자감까지 간섭한다, 이게 자기중심적인 게 아니면 뭔가?
그러면 자식이 되어가지고 부모의 의향이 뭐든 개의치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허, 참! 선생님은 허무주의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이고, 동시에 향락주의자로군요. 이제 질리다 못해 헛웃음이 나옵니다!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한 어른은, 지금 이 순간을 자유롭게 사는 젊은이를 보고 향락적이라고 비판하지. 물론 이는 자신의 부자유스러운 삶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인생의 거짓말일세.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택한 어른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응원하겠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네.
(생략)
하지만 '그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일세. 아들러가 주창한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역전되네. 즉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네.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아버지 탓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었으니까. 그게 내게는 '선'이었네. 어쩌면 봉건적인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는 측면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자기분석을 해봤자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집니까? 어차피 어린 시절에 맞은 사실은 그대로가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맞아서 아버지와 사이가 나쁘다'라는 원인론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아버지와 잘 지내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냈다'라고 생각하면 관계를 회복할 카드를 내가 쥐게 되지. 내가 '목적'을 바꾸면 그걸로 문제가 간단해진다는 뜻일세.
그래서 과제를 분리하라는 걸세. 자네 말대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골이 깊었네. 실제로 아버지는 완고한 사람이라서 아버지의 마음이 달라질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러기는커녕 내게 손을 댔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가능성이 높았지. 하지만 내가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생활양식은 무엇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다가서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조금도 관계가 없었네. 상대방이 나와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어도 상관없었지. 문제는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 하는 거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일세.
사람들은 대개 인간관계의 카드는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산다네. 하지만 과제의 분리를 배우고 나면 모든 카드를 내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나는 아버지를 달라지게 하려고 변한 것이 아닐세. 그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야. 내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어. 그 결과,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것도 과제의 분리라네. 물론 내가 변화하면서ㅡ나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ㅡ상대가 변하기도 하네. 대개는 변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네.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어쨌든 타인을 조종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언컨대 잘못된 발상일세.
타인을 조종해서는 안 되고, 조종할 수도 없다. 이 말씀이죠?
인간관계라고 하면 보통 '두 사람의 관계' 혹은 '다수와의 관계'를 떠올리지. 그런데 자기 자신이 먼저라네. 인정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밖에 없어. 인생의 카드를 남에게 맡길 것인가, 내가 쥘 것인가의 문제라네.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
'공동체'의 개념을 받아들일 때, 곧이곧대로 실제 우주와 무생물을 상상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일단 공동체의 범위를 '무한대'라고 생각해보게.
이를테면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생기를 잃는 사람이 있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위도 명함도 이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 즉 '보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식간에 늙는 거지. 하지만 이는 단순히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불과해. 보다 큰 공동체에 여전히 속해 있지. 지구라는, 우주라는 공동체에 말이야.
가령 자네가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자네가 있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세. 즉 학교야말로 전부고 나는 학교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 이외의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문제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집단 괴롭힘을 당하거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거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애초에 학교라는 시스템에 맞지 않거나 등. 다시 말하면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그럴 때 학교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자네는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작은 공동체, 이를테면 가정으로 도치해 그곳에 틀어박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집 안에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어. 그렇게 해서라도 소속감을 얻으려고 할 걸세. 그런데 이때 '다른 공동체가 있다', 무엇보다 '더 큰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떨 것 같나?
학교 바깥에 더 큰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그 세계의 일원이다. 만약 학교에 내가 있을 곳이 없다면 학교 '바깥'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으면 된다. 전학을 가도 되고, 자퇴를 해도 상관없다. 자퇴서 한 장으로 인연이 끊기는 공동체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만약 더 큰 세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학교에서 느꼈던 고통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찾잔 밖으로 나오면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실바람으로 변할 테니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찻잔 안에 머문 채 비좁은 피난처로 대피하는 것이네. 잠시 비를 피할 수는 있지만 태풍은 가라앉지 않지.
아니, 논리상으로야 그렇죠.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워요. 자퇴라는 결단도 그리 쉽게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래, 자네 말대로 간단하지는 않지. 그럴 때 염두에 둬야 할 행동원칙이 있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네.
학교라고 해서 학교라는 공동체의 상식으로 사리판단을 하지 말고, 더 큰 공동체의 상식을 따르라는 거지. 가령 자네 학교에서는 교사가 절대적인 권력자라고 하세나. 그런데 그런 권력이나 권위는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에 불과하지. '인간 사회'라는 공동체로 생각하면 자네도 교사도 대등한 '인간'일 뿐이야. 교사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해도 상관없네.
하지만 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는 '나와 너'의 관계에도 해당되는데, 만약 자네가 이의를 제기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없느니만 못하네. 이쪽에서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하라?
물론이지.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게. 보다 다른 '나와 너',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하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그래, 중요한 건 그거지. 과제를 분리하면서 어떻게 원만한 관계를 만들까, 즉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시킬까 하는 점.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수평관계'라는 개념일세.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아이를 기르거나 부하직원을 가르칠 때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네. 야단치는 방법과 칭찬하는 방법.
과연. 동물의 훈련을 예로 들다니 재미있군. 그러면 아들러 심리학의 입장에서 설명핮.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양육을 비롯한 타인과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칭찬은 금물이다'라는 입장을 취한다네.
물론 체벌은 당연히 금지고, 야단치는 것도 인정하지 않네. 칭찬도 금물이고, 야단도 금물이네.
칭찬한다는 행위의 속내를 따져보세. 예를 들어, 내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잘했어"라고 칭찬을 했네. 그 말은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나?
맞아.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지. 저녁식사 준비를 돕는 아이에게 엄마가 "엄마를 도와주는 거야? 착하기도 해라"하고 칭찬을 했네. 하지만 남편이 같은 행동을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즉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걸세. 방금 전에 자네가 말한 동물 훈련 사례는 그야말로 '칭찬'의 배후에 있는 상하관계, 즉 수직관계를 보여주는 거지.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없지.
그래. 우리가 남을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것은 '당근을 쓰느냐, 채찍을 쓰느냐' 하는 차이에 불과해. 배후에 자리한 목적은 조종에 있지. 아들러 심리학이 상벌교육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아이를 조종하려는 측면 때문일세.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지.
그건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지. 대등은 곧 '수평'이네. 여기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한 푼도 못 버는 주제에!"라고 하거나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 알아!"라며 걸핏하면 큰소리치는 남자가 있네. "돈 걱정을 해봤어, 뭘 해봤어? 그만하면 호강이지 뭐가 불만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 참 한심하지 않은가? 경제 사정은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하네. 회사원과 전업주부는 일하는 장소와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그야말로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관계라네.
아마 그런 사람들은 여성이 똑똑해지는 것, 자기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당당히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두려울걸. 전반적인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보고, 여자들이 자기를 아래로 볼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즉 강한 열등감을 숨기고 있는 거라네.
어떤 의미로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우월 콤플렉스에 빠졌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열등감이란 원래 수직관계에서 생기는 걸세.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다면 열등 콤플렉스가 생길 여지가 없지.
음, 선생님 말씀대로 저도 누군가를 칭찬할 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종'하려는 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부를 해서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조종이죠. 저 역시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음으로써 조종당한다는 거고요. 후훗, 저는 그 정도의 인간이었던 거네요!
수직관계에서 벗어자니 못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겠지.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과제의 분리에 대해 설명할 때 '개입'이라는 말을 쓴다네.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드는 행위를 뜻하지. 그러면 왜 인간은 개입을 하는 걸까? 그 배경에는 사실상 수직관계가 있지.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하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고 있지. 물론 여기서 개입은 조종이나 다름없네. 어린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부모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본인은 선의로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도, 결국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의 일에 불쑥 끼어들어서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고 하는 거지.
수평관계를 맺으면 개입도 사라진다는 건가요?
사라지지.
공부에 관해서라면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마저도 '여기서 손을 내미는 것은 개입이니까' 하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럴 때에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개입과 지원이라, 둘의 차이가 뭔데요?
과제의 분리에 대해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게. 아이가 공부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지, 부모와 교사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네. 개입이란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들어 "공부해"라고 하거나 "그 대학에 가야 해"하고 지시하는 걸 뜻하네.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하지.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거라네.
돕는 것은 강제가 아니란 말이군요?
그래.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야. 그야말로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일이지. 과제를 하는 것도 본인이고, 과제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도 본인이지.
그래.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하지.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아, 또 그 소리! 결국 그 말은 칭찬하라는 거잖아요! 인간은 남들의 칭찬을 들으면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용기를 되찾습니다. 제발 고집 좀 그만 부리시고 칭찬의 필요성을 인정하세요!
인정 못하네.
왜요!
답은 분명하니까. 인간은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네.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답니까? 그 반대겠죠! 칭찬받음으로써 스스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틀렸네. 만약 자네가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이기 때문이지.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돼. 자네는 지금까지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 사는 인생에 넌더리가 난 게 아니었나?
먼저 과제를 분리할 것. 그리고 서로가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을 것. '용기 부여'란 그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네.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칭찬하는 것도 안 되고, 야단치는 것도 안 된다면서요. 그 밖에 어떤 말, 어떤 선택지가 있단 겁니까?
아이가 아니라 대등한 파트너가 자네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해보게. 그러면 답은 저절로 나올 테니. 예를 들어, 친구가 방 청소를 도와주면 자네는 뭐라고 할 텐가?
글쎄요, "고맙다"라고 하겠죠.
그래. 일을 도와준 파트너에게 "고맙다"라고 인사하겠지. 아니면 "기쁘다", "도움이 됐다"라고 솔직한 심정을 전하거나. 이것이 수평관계에 근거해서 용기를 부여하는 방법일세.
그뿐입니까?
그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일세.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음, 평가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지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과연 '고맙다'는 인사가 잃어버린 용기를 되살릴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을까요?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걸세.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어.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남에게 '좋다'는 평가를 받아도 공헌했다고 느끼지 않나요?
자네 말대로야. 이는 앞으로 우리가 할 논의와도 관계가 있는 내용인데, 아들러 심리학에서 '공헌'이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일세.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아들러의 견해는 다음과 같지.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열등감에 관해 설명할 때,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의 문제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가치가 있다'고 느끼느냐, '나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느냐. 만약 '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될 걸세.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하는 점이라네.
매우 간단하네.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지금 논의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네. 잘 따라오시게.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 수평관계를 맺고 용기 부여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는 모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고, 돌고 돌아 인생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복돋아준다네.
칭찬하지도 마라. 야단쳐서도 안 된다. 남을 평가하는 말은 전부 '수직관계'로부터 비롯되니 삼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누군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딘가 큰 구멍이 있다. 청년은 그렇게 느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데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반대로 말하면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가치가 없다, 그런 뜻 아닙니까? 더 깊게 따지고 들면 갓 태어난 아기, 그리고 자리보전하고 있는 노인과 환자들은 인생을 살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고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우리 할아버지는 현재 요양시설에서 하루종일 누운 채 생활하고 계세요. 치매에 걸리셔서 아들이나 손자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지요. 아시겠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지론은 우리 할아버지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요!
결코 그렇지 않네. 자네는 지금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고 있네. 즉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말이지.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만 있는 노인은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지.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걸세.
존재의 차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네.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야.
예를 들어, 자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세. 의식불명의 중태라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말이야. 이때 자네는 어머니가 '무엇을 했는가'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을 걸세.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오늘도 생명을 연장한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느낄 걸세.
존재의 차원에서 감사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네.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자네나 가족에게 큰 위안이 될 걸세. 더 이해하기 쉽게 자네 자신을 예로 들어보지. 만일 자네가 생명이 위태로워서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은 '자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기쁨을 느낄 걸세. 직접적인 행위가 없어도, 그저 무사히, 지금 이곳에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거라고.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는 없지. 자신을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먼저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네. 예를 들면 부모님 말에 일절 말대꾸를 하지 않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큰 회사에 취직한다. 그런ㅡ있을 수도 없는ㅡ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놓고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지.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네. 이거야말로 '평가'라는 발상이지. 그러지 말고 아이를 누구와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네. 이상적인 100점에서 감점하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는 거지. 그러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걸세.
흠, 그건 이상론에 불과해요. 그러면 선생님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고, 침울하게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아이에게도 "고맙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겁니까?
물론이지. 예를 들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가 밥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도와줬다고 하세. 이때 "그런 건 안 해도 되니까 학교에나 가"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정해놓고 점수를 깎는 부모나 할 법한 행동이지. 그런 말은 아이의 용기를 꺾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야. 하지만 순순하게 "고맙다"라고 표현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디딜지도 몰라.
에이, 위선이에요 위선! 그런 건 위선자의 빈말에 불과하다고요! 공동체 감각이라느니, 수평관계라느니, 존재에 감사하라느니,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침 공동체 감각에 대해 아들러에게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있었지. 그때 아들러의 대답은 이러했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나의 조언도 전적으로 그러하네.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내놓는 답은 간단하네. 일단 다른 사람과, 한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걸세.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와는 확실히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고요.
대신 부모와 상사, 후배나 기타의 사람들과는 수직 관계를 맺고 있지.
물론이지요. 그래도 잘 구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잖아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네. 수직관계를 맺느냐, 수평관계를 맺느냐. 그것은 생활양식의 문제이고, 인간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상황에 따라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할 만큼 임기응변에 능한 존재가 아닐세. 요컨데 '이 사람과는 대등하게', '이 사람과는 상하관계로'라는 식이 안 된다는 거지.
수직 관계인지 수평관계이지, 어느 한쪽만 고를 수밖에 없다고요?
그래. 만약 자네가 한 사람이라도 수직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고 있는 걸세.
그럼 저는 친구조차도 수직관계로 파악하고 있다고요?
틀림없네. 상사나 부하직원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A는 나보다 위지만 B는 나보다 아래다", "A의 의견에는 따르지만 B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C와의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해도 괜찮다"라는 식이지.
반대로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자네의 생활양식에 대전환이 일어나겠지.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모든 인간관계는 '수평'이 될 걸세.
분명히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은 중요하지. 회사 조직이라면 직책의 차이가 있는 것도 당연해. 누구와도 친구처럼 지내라,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게 하닐세.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의견을 내다니 저로서는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사회생활에 대한 상식을 의심받을 겁니다.
윗사람이란 뭐지? 뭐가 버릇없는 의견이란 말인가? 그 자리의 분위기를 보고 수직관계에 종속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행동이네.
어디가 무책임하다는 겁니까?
만약 자네가 상사의 지시에 따른 결과, 그 일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보세. 그건 누구 책임인가?
그야 상사의 책임이죠. 저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결정을 내린 사람을 상사니까요.
그렇지 않네. 그것은 인생의 거짓말이야. 자네에게는 거절할 여지가 있었고,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할 여지도 있었지. 자네는 그거 거기에 얽힌 인간관계의 알력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고 둘러대며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거라네.
그러면 상사에게 반항이라도 할까요? 아니, 논리로는 그렇지요. 논리상으로는 그게 맞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무리라고요.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자네는 지금 나와 수평관계를 맺고 있네. 자네의 생각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지. 이런 저런 어려운 점은 생각 말고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라네.
이제부터요?
그래. 이 작은 서재에서부터.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내게 소중한 벗이라고.
내 생각이 틀렸나?
저는 선생님과 같은 연장자와 친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이 차가 나는 친구관계가 가능한지, 아니면 사제관계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다고요!
사랑에서도,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도 나이는 관계없네. 교우의 과제에 일정한 용기아 필요한 것은 사실일세. 나와의 관계에서는 조금씩 거리를 좁히면 된다네. 밀착될 정도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고, 손을 뻗으면 서로의 얼굴에 닿는 정도의 거리면 되겠지.
다 섯 번 째 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청년은 생각했다. 아들러 심리학은 철저히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는 공동체 감각에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도 좋은 걸까? 우리는 차원이 더 높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 나는 어디로 향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청년은 스스로가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과도한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건다
자네는 어떤 때에 자신이 자의식 과잉이라고 느끼나?
회의할 때요. 손을 들고 발언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겠지', '주제를 벗어난 의견이라고 바보 취급을 당할지 몰라'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손 드는 것을 망설이게 돼요. 아니, 그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가벼운 농담을 나리는 것도 주저하고요. 늘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얽어맵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제 자의식이 허락하지 않는 거죠. 선생님의 답은 들을 필요도 없어요. 언제나 그렇듯 "용기를 가져라"하고 말씀하시겠죠. 하지만 그런 말은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건 용기 이전의 문제니까요.
알겠네. 지난번에 공동체 감각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은 설명했으니, 오늘은 보다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지.
그러면 우리의 대화는 어디에 다다르게 될까요?
아마도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까지 이르겠지.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먼저 방금 전에 자네가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한다"라고 했던 말. 이거야말로 많은 사람이 실감하는 고민인지도 모르네. 그러면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자네의 '목적'을 생각해보자고. 자네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얼뜨기 같은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겠지요.
즉 자네는 자연스러운 나,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말이로군?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인 채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하고 있지. 자네도 방 안에 혼자 있으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기세 좋은 말을 내뱉을 텐데 말이야.
혼자 있으면 누구나 왕처럼 행동할 수 있다네. 요컨대 이 또한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문제이지. '자연스러운 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결국 공동체 감각이 필요하지. 구체적으로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이에 필요한 것이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네.
일단은 '자기수용'부터 설명하지. 처음 만났던 밤, 나는 자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라고 했던 아들러의 말을 소개했내. 기억나나?
우리는 '나'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릇을 버릴 수도, 교환할 수도 없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지. '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 쉽게 말해 사용 용도를 바꾸라는 거네.
그건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긍정하는 마음을 갖고, 어떤 일도 진취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입니까?
일부러 적극적으로 자신을 긍정할 필요는 없네.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수용을 해야 하네.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지.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지. 한편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의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지. 더 쉽게 설명하자면,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라네. 반면에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일세.
60점이라고 해서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요?
물론이지. 결점이 없는 인간은 없어. 우월성 추구에 관해 설명할 때 말하지 않았나? 인간은 누구나 '향상되기를 바라는 상태'에 있다고 말이야. 뒤집어 말자하면, 100점 만점인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일세.
그러한 것을 나는 '긍정적 포기'라고 말한다네.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그래.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라네.
신용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가
하지만 그 '긍정적 포기'에는 왠지 모르게 비관적인 뉘앙스가 느껴져요. 이렇게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결과가 '포기'라니 너무 허무합니다.
그런가? 포기라는 말에는 원래 '명확하게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네. 만물의 진리를 단단히 확인하는 것. 그것이 '포기'라네. 비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
신뢰란 뭔가요?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의 과제지. 자네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몇 번이고 속여도 계속 믿어라, 어수룩한 멍청이로 계속 살아라, 그런 말씀이군요? 그런 건 철학도 심리학도 아니에요. 종교인의 설교일 뿐이죠!
그런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두겠네. 아들러 심리학은 도덕적 가치관에 기초해서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닐세. 조건 없는 신뢰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만약 자네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단칼에 끊어버려도 상관없네. 끊느냐 마느냐는 자네의 과제니까.
가령 자네가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바람을 피우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고 하세나. 그리고 상대가 바람을 피운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결과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나?
글쎼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아니, 어떠한 경우라도 바람 피운 증거를 산더미같이 찾아낼 걸세.
상대방의 아무렇지 않은 말과 행동, 누군가와 통화했을 때의 어조,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 이런 것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모두 '바람을 피운 증거'로 비칠 걸세. 설사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얕은 관계라면 깨졌을 때의 고통이 작겠지. 하지만 그런 관계에서는 맛볼 수 있는 일상의 행복 또한 작을 걸세.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 또한 늘어나게 되는 거지.
자기 수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걸세.
배신을 할지 말지는 타인의 과제니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건가요? 긍정적으로 포기하라? 선생님의 주장은 늘 감정을 배제하고 있어요! 배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분노와 슬픔은 어쩌라는 겁니까?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게.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니까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우리는 남을 신뢰할 수 있네. 의심할 수도 있지. 또한 우리는 타인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네.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선택은 명백하지 않은가.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자기수용'을 했다고 쳐요. 그리고 '타자신뢰'도 했습니다. 그때 제게 어떤 변화가 생긴다는 겁니까?
먼저 교환 불가능한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것이 자기수용이라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이 타자신뢰고.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자네에게 타인은 어떤 존재일까?
·····친구, 인가요?
그렇지. 타인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타인을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네. 친구라서 신뢰할 수 있는 거지. 친구가 아니라면 신뢰까지 가지도 않아. 그리고 만약 타인이 친구가 되면, 자네는 자네가 속한 공동체에서 있을 곳을 찾을 수 있게 될 걸세.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얻게 되는 거지.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타인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수용도 하지 못하고, 타자신뢰도 하지 못한다네.
물론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세 번째 키워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네.
타자공헌이요?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일세.
공헌이라면, 그러니까 자기희생 정신을 발휘하고 주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걸 말하나요?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떠올려보게.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었네. 기억이 나나?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라고요?
그래. 자기를 희생할 필요가 없네.
그러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타자공헌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세요.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또는 집안일을 하는 것.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야.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젊은 사람은 어른보다 앞서나간다
일에 타자공헌의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공공연하게 타인에게 공헌한다고 해놓고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선적입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실는지요?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해보게. 어느 가정에서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식탁 위에 그릇이 고대로 놓여있네.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어. 아내(나)가 뒷정리를 시작했지. 그런데 가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아. 그러면 보통은 "왜 도와주지 않는 걸까?", "왜 나만 일해야 하는 거지?"라고 불만을 갖게 되지. 그럴 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걸세. 설령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거야. 사실 그 순간 짜증을 내면서 설거지를 해봤자 본인도 마음이 불편하고 가족들도 선뜻 다가오지 못할 거야. 반대로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즐겁게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팔을 걷어붙일지도 몰라. 적어도 돕기 쉬운 분위기는 만들어지겠지.
그러면 왜 그 순간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가족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그렇지 않으면 "왜 나만?", "어째서 다들 돕지 않는 거야?"라는 억울함만 생기겠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한 채로 하는 공헌은 어쩌면 위선일지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라네. 자네가 자꾸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공동체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편의상 지금까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 →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자네, 며칠 전에 적은 메모를 가지고 있나?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일이 전부라는 인생의 거짓말
알았습니다. 저한테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를 할 '용기'가 없다는 건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저'만의 문제일까요? 저를 부당하게 몰아붙이고 공격한 타인에게도 문제가 있진 않을까요?
확실히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 있지는 않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 때도 적지 않지. 하지만 이때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란 사실일세. 신경증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은 걸핏하면 '모두', '늘', '전부'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네. "모두 나를 싫어해", "늘 나만 손해를 봐", "전부 틀렸어"라는 식으로. 만약 자네가 이런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면 주의해야 하네.
유대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주목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야.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하지.
예를 들어보지. 며칠 전 나는 말 더듬는 사람과 그의 가족이 참여하는 워크숍에 간 적이 있네. 자네 주변에도 말을 더듬는 사람이 있나?
아, 중학교 다닐 때에 한 명 있었습니다. 말 더듬는 것 때문에 본인도 가족도 힘들었겠죠.
어째서 말 더듬는 게 힘들다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말을 더듬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열등감과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네. 덕분에 자의식이 과잉되어 점점 더 말을 더듬게 된다고 말이야.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요?
그래. 말을 좀 더듬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웃거나 바보 취급을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방금 전에 한 말에 비유하자면 '열 명 중 한 명' 꼴일걸? 게다가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면 이쪽에서 관계를 끊어도 상관없지. 그런데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그 한 사람에게만 주목하고 '모두 나를 비웃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나는 정기적으로 독서회를 열고 있는데, 거기 참가자 중에도 말을 더듬는 사람이 있어. 낭독할 때마다 더듬거리곤 한다네. 하지만 그걸 이유로 비웃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네. 조용히, 그저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을 낭독하길 기다리지. 비단 우리 독서회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닐 거야.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은 말을 더듬어서도 적면공포증에 걸려서도 아니네. 실제로는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지. 아무래도 좋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세계 전체를 평가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잘못된 생활양식인가.
음, 분명히 그 논의는 흥미롭습니다. 그래도 말을 더듬는 사람은 좀 특수한 예인 것 같아요. 뭔가 다른 사례는 없습니까?
예를 들면 일중독자? 일에 빠진 사람들도 확실히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들이지.
말 더듬는 사람들은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이에 비해 일중독자는 인생의 특정한 측면에만 주목한다네. 아마 그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라고 변명할 것이네. 그런데 이는 인생의 거짓말이지.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거든. 원래는 집안일에도, 아이 양육에도, 혹은 친구와 교류하는 것이나 취미에도, 전부 관심을 가져야 하네. 어느 한 가지만 돌출되는 삶의 방식을 아들러는 인정하지 않네.
하지만 부양을 받는 가족 입장에서는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누구 덕에 밥 먹고 사는지 알아!" 하며 폭력에 가깝게 소리쳐도 반론할 수가 없다고요.
아마도 그런 사람은 '행위의 차원'에서밖에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러는 걸 거야. 나는 이만큼 시간을 들여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돈을 번다,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내가 가족 중에 제일 가치가 높다. 하지만 누구나 은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네. 이를테면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이나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하는 때가 오지. 혹은 젊더라도 다치거나 병에 걸려서 일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겠지. 이럴 때 '행위의 차원'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치명타를 입게 될 걸세.
나를 '행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행복해질 용기'와 관련된 문제일세.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경우의 타자공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점이지.
자네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네. 그건 타인의 과제이지 자네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짜로 공헌을 했는지 아닌지는 원칙적으로 알 수도 없고. 즉 타인에게 공헌할 때 우리는, 설사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한 걸세.
이미 자네도 눈치 채지 않았나? 바로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
모든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인간은 행복하다'라는 뜻은 아니라네. 그걸 알아야 하네. 행위의 차원에서든 존재의 차원에서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즉 공헌감이 필요하지.
그럼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제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공헌감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겠네요?
틀림없이.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사람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많은 아이가 첫 단계부터 '특별히 잘한다'네. 구체적으로 부모의 지시를 잘 따르고, 사회성 있게 행동하고, 공부와 운동을 열심히 하고, 학원도 부지런히 다니지. 그렇게 해서 부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경우ㅡ예를 들면 공부나 운동을 잘 못하는 경우ㅡ에는 태도를 180도 바꿔서 '특별히 못되게 군다'네.
어째서요?
특별히 잘하는 것도, 특별히 못되게 구는 것도 목적은 같아.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목적이네.
평범해질 용기
"누구 하나 악을 원하는 자는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이 딱 맞는 경우지.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폭행이나 도둑질조차 '선'을 수행하는 셈이니까.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는 걸세. 그런데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지 않나?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네.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겠지.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네.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야.
'평범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태한 나를 그렇다고 인정하는 꼴이잖아요! 어차피 나는 여기까지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고요. 저는 그런 나태한 삶을 부정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아인슈타인,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선생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평범함'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뭔가 원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일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겁니다! 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은 한 사람도 탄생하지 못했을 거예요. 선생님은 천재를 말살시킬 작정이시라고요!
즉 인생에는 고매한 목표가 필요하다, 이 말이군?
당연하죠!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알았네. 자네가 말한 고매한 목표한 마치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는 거라고 보면 되겠나?
그런데 만일 인생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등산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게 되네. 즉 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가짜인 나'가 지나온 '가짜 인생'이 되는 거라네.0
그러면, 가령 자네가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면 자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사고나 병이 나서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등산 자체가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 않나? '길 위'에 있는 채로, '가짜인 나'인 채로, 그리고 '가짜 인생'인 채로 인생이 중단되는 거지. 그러면 그 삶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그건 자업자득이죠! 제게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산을 오를 만한 체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운이 나빠서일 수도 있고, 실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점이 아닌 선으로 파악하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인생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일세.
그러면 인생이 어떤 모습이라는 겁니까?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찰나의 연속이라고요?
그래.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
인생 설계도, 커리어 설계 등도 필요 없다고요?
만약 인생이 선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우리 인생은 점의 연속이라네.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일세.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춤을 추듯 살라
뭐가 문제인 거지?
선생님의 지론은 계획성 있는 인생을 부정할 뿐 아니라 노력까지도 부정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고 맹연습해 마침내 동경하던 악단에 들어가 활약하는 인생이요. 아니면 열심히 공부한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인생이라든지. 모두 목표와 계획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인생이라고요!
즉 그 사람들은 산 정상을 목표로 묵묵히 전진했다는 말인가?
물론이지요!
과연 그럴까?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았던 건 아닐까/ 즉 길 위에 있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를 살았던 거지. 이를테면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꾼 사람은 늘, 당장 연습해야 할 악보를 보면서 한 곡, 한 소절, 한 음에만 집중했을지 모르지.
그렇게 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보게.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 하고 깨닫게 될 걸세. 바이올린이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전문 연주자가 된 사람이 있을 거야. 사법고시라는 춤을 춘 사람 중에는 그대로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을 테고. 집필이라는 춤을 추고 작가가 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 어쨌든 저마다 다른 장소에 다다를 거야. 단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의 삶도 '길 위'에서 끝났다고 볼 수는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지금을 즐기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은 하겠지. 춤추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아.
여행을 하는 목적이 뭐지? 예를 들어 자네가 이집트로 여행을 갔네. 그때 자네는 되도록 효율적으로, 되도록 빨리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드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텐가?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 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르는 것'에 있다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5분가량 머무르고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도 상관없지.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산 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없다네.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선생님은 계획성을 부정하고, 결국엔 나의 의지로 미래를 바꾸는 것조차 부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되돌아보는 것을 부정하면서 앞을 내다보는 것까지 부정하고 있어요. 그건 마치 길도 없는 곳을 눈을 가린 채 걸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도 같다고요!
뒤도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아요!
당연한 것 아닌가.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그래.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된다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지. 그래봤자 그 이야기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하지.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걸세.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걸세.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 놓여 있네. 쭉 뻗은 레일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야기는 없어.
하지만 그건 찰나주의(순간주의), 아니 보다 더 나쁜 향락주의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한다네.
인생 최대의 거짓말
진지하고 빈틈없이 살아간다?
예를 들어 대학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가 아닐세. 물론 대학 입시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몰라.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귀찮기도 하지. 하지만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 즉 춤을 추는 거지.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 거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아버지도 날마다 일이라고 하는 춤을 진지하게 춰왔을 걸세. 큰 목표가 있다거나 그 목표를 달성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 거지.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은 행복했을 걸세.
제게 그런 삶을 인정하라고요? 일에 쫓기기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인정하라고·····?
억지로 인정할 필요는 없네. 단지 어디에 도달했는가만 보지 말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찰나를 보라는 걸세.
·····찰나를.
그건 자네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네.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런데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지금, 여기'도 이미 내 삶의 일부라네.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그래. 인생은 언제나 단순하지. 심각한 게 아니라네.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두게. 인생은 언제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사 자네나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
만약 제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찰나는 늘 완결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거지. 나는 지금까지 인생의 거짓말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네. 이제 마지막으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거짓말이 뭔지 말해주지.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네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 거야.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금에 대해 얘기하세나. 결정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네. '지금, 여기'지.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
인생이 찰나의 연속이라고 할 때, 인생이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고 할 때, 대체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을 위해 태어나서 이런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견디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했네.
예를 들어 전화(전쟁으로 입은 재앙과 피해)나 천재지변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네. 전와(전쟁으로 야기된 혼란)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같은 걸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인생에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그와 같은 부조리한 비극을 앞에 두고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하네. 칸트가 말한 경향성을 직시해야만 해.
그런 뜻에서, 가령 엄청난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원인론에 입각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라고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는 곤경에 처했을 때야말로 앞을 보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네.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우리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포탄을 맞고 얼굴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네. 정말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었지. 따라서 그때 "세계는 가혹하다", "사람들은 나의 적이다"라는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네. 그런데 통원치료를 받던 할아버지가 전차를 탈 때마다 다른 승객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고 하더군. 나는 어머니를 통해 이 얘기를 들어서 실제로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나는 믿네. 할아버지는 "사람들은 친구고, 세계는 멋진 곳이다"라는 생활양식을 선택했다고 말일세.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아들러의 말은 결국 이런 뜻이지.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자네는 헤매고 있네. 왜 헤매는 것일까? 그건 자네가 '자유'를 택하고자 하기 때문일세. 즉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인의 인생을 살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아쥬를 선택하려고 할 때 인간이 헤매는 것은 당연하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이라는 것을 제시했지.
여행객들이 북극성에 의지해 길을 나서듯 우리 인생에도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사고방식이지. 그 별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지침이자, 이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절대적인 이상향이라네.
그 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타자공헌에 있네.
자네가 어떠한 찰나를 보내더라도, 설령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내 하늘 위에 타자공헌이라는 별을 걸면, 늘 행복이 함께하고 친구도 함께한다!
그리고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걸세. 과거도 보지 말고, 미래도 보지 말고,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거야.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 없네. 춤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아무리 돌이켜봐도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그리스철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아들러 심리학을 병행하여 배우고, 이렇게 자네라는 소중한 벗과 대화른 나누고 있네. 찰나를 춤춰온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자네한테 인생의 의미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췄을 때에만 명확해질 걸세.
나는 오랜 세월 아들러의 사상과 함께 지내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네.
한 사람의 힘은 크다. 아니 '내 힘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라는 점일세.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 아들러 심리학을 배우고 나면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제 과거의 세계가 아니라네.
·····아, 아까워 죽겠어요! 10년, 아니 5년만이라도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만약 5년 전, 아니 취직하기 전에 제가 아들러의 사상을 알았더라면·····.
아니, 그건 아니지. 자네가 "10년 전에 알았더라면"하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자네'가 아들러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야. 10년 전의 자네가 어떻게 느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네.
한 번 더 아들러가 했던 말을 들려주겠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청년은 천천히 신발 끈을 매고 철학자의 집을 나섰다. 언제 내렸는지 문 너머는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부옇게 빛을 발하며 발치에 쌓인 눈을 비추고 있다. 어쩌면 공기가 이렇게 맑을까. 달빛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나는 이 새로운 눈을 밟고 힘차게 한 걸음 내디딜 것이다. 청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밤새 듬성듬성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라고.
메모는 여기까지다
책이 참 재밌었다
술술 읽힌다
나한테는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알게 되고 읽게 된 건 나에게는 행운이었던 것 같다
많은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책이 그렇듯이 이 책도 진화생물학을 바탕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설명(유전자 관점에서의 설명)이 빠져있었다
아들러의 심리학으로만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려고 해서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들도 있었는데, 내가 인생책이라고 했던 책들(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또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의 내용으로 보완이 되는 것 같다
세부적인 생물학 지식이 빠져있다고 해도 큰 틀에서는 내가 참 좋다고 생각했던 책들과 비슷한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설명을 한다고 느꼈다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는 이 책이 훨씬 더 쉽고 명확하게 답을 내려주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 어쩌면 과학조차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인문학이 한 차원 높은 해답, 아니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성숙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학이 밑바탕으로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철학(또는 심리학)은 언제나 논리가 부족하고 추상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뿌리는 과학적 이해라고 생각하고, 모든 분야는 결국 공통성이 있으니 서로 융합하고 합쳐져야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최재천 교수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아무튼, 이런 책은 어떤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무작정 받아들이기 보다는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보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혼자 생각할 만한 것들, 그리고 공감되고 받아들일만한 것들이 짱 많았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인 것 같다
짱 짱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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