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코 -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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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코 - 사랑이었다

가요/슬픈 거 듣고 싶을 때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0. 11. 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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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추천해주니까 친구가 계속 좋다고 찬양했던 곡

3분 16초부터 감정이 쌓이다가 3분 57초부터 소름 돋았었다
남자 버전도 있다
난 근데 여자 버전만 듣는다

 

 

 

 

 

알 수 없다
눈 뜨고 꿈꾸는 기분일까
괜히 가슴이 소란스러워지고
그리움도 경험해본다
내게 짓던 웃음이 참 예뻤지만
네 맘은 항상 표정을 짓지 않아
상처 난 것들을 보여주면서
치유받길 거절하는 널 보며
내가 할 게 못 되는구나 힘들다
시간 지나면 다 없었던 일
잠시 미쳤다 생각했는데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이제 와 보니 사랑한 거였다
나답지 않던 말과 행동이
멋대로 굴고 있는 심장이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언제쯤 넌 내 이름 불러줄까
널 꺾는다고 그 향기가 내 게 될까
넌 쓸쓸함에 대해 얘기하면서
안아주려는 내 손을 밀쳤어
체념할 자격도 없는 나 괴롭다
시간 지나면 다 없었던 일
잠시 미쳤다 생각했는데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이제 와 보니 사랑한 거였다
나답지 않던 말과 행동이
멋대로 굴고 있는 심장이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특별함을 찾지 않아
널 쫓느라 두고 간 원래의 나를 찾아
혼자 한 사랑은 스스로 이별해야 되네
시간 지나면 다 없었던 일
잠시 미쳤다 생각했는데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이제 와 보니 사랑한 거였다
나답지 않던 말과 행동이
멋대로 굴고 있는 심장이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에이치코드 - 그 날 (Feat. 헤이즐)

 

노래방가서 친구랑 자주 불렀던 노래

듣지는 않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에이치코드는 작곡가, 프로듀서 이고 노래 부르시는 분은 헤이즐 님

 

 

 

 

 

그대 떠난 내 맘속엔
그리운 그대 모습만이 남아 있는데
함께였던 그 날이
되돌릴 수 없는 그 날이
아직 내 맘속에 남아
영원할 줄 알았던 그대와의 사랑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걸까
행복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때 그 날들을 그 때 그 순간을
떠나 보내지 못해
그 날 그대와 함께한 그 날
그대와 손 잡던 그 날
이젠 내게 잊기 힘든 그 날인데
Tonight 그대가 보고픈 이 밤
눈물만 흐르는 이 밤
흩어져간 이젠 잊을 수 없는
그 때 그 날
후회로만 남았던 그대와의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순 없는 걸까
눈물만 흘리던 그대 모습 보면서
그 때 그 날들을 그 때
그 순간을 떠나 보내지 못해
그 날 그대와 함께한 그 날
그대와 손 잡던 그 날
이젠 내게 잊기 힘든 그 날인데
Tonight 그대가 보고픈 이 밤
눈물만 흐르는 이 밤
흩어져간 이젠 잊을 수 없는
그 때 그 날
언제나 그대 곁에 머물고 싶은데
더 이상 사랑해선 안 되는 건지
언젠가 그대가 돌아올 거란
미련한 생각에
자꾸 내 마음은 타들어 가는걸
그 날 그대와 함께한 그 날
그대와 손 잡던 그 날
이젠 내게 잊기 힘든 그 날인데
Tonight 그대가 보고픈 이 밤
눈물만 흐르는 이 밤
흩어져간 이젠 잊을 수 없는
그 때 그 날

 

 

 

 

 


 

 

 

 

에이치코드 - 나의 밤

이건 신곡인 듯

 

 

 

사랑을 표현 못 하니까
어쩌면 차가웠었던 나를
환히 웃게 해놓고 돌아서던 그날
그대는 어떤 표정으로 떠나간 걸까요
내가 담지 못한 그대일까요
얼마나 더 멀어졌나요
부를 수도 없는 그댈 그리며
한숨을 내어요
추억들을 달빛에 걸어두면
혹시 그대가 볼까 봐
밤새 잠도 못 이루죠
나의 밤들이 얼마나 어두운지
그대는 모르겠죠
그댈 억지로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시간이 내게 말해요
그대를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대 가득한 밤이기에
눈을 감을 수 없죠
별들마저 잠이 들 때면
설레이던 기억 속에
그대와 새벽을 걸어요
그리움을 달래다 잠들 때면
꿈속에서도 그대를
찾아 헤매이고 있죠
나의 밤들이 얼마나 어두운지
그대는 모르겠죠
그댈 억지로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시간이 내게 말해요
그대를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대 가득한 밤이기에
눈을 감을 수 없죠
그대와 함께 보던 밤하늘을 잊으려면
얼마나 많은 밤을 보내야 할까요
나의 밤들이 얼마나 어두운지
그대는 모르겠죠
그댈 억지로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시간이 내게 말해요
그대를 잊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대 가득한 밤이기에
눈을 감을 수 없죠

 

 

 

 


 

 

 

 

임세준 - 잊어볼게

임세준님 노래 대부분 좋은 듯

 

 

 

 

 

텅 빈 방에 혼자 눈을 뜨면
어제처럼 힘든 오늘이
다시 나를 찾아와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면
네가 나의 곁에 있었던
그날들이 떠올라
날 바라보던 너의 눈빛과
따스한 손길 아직은 너무 그리워도
아프지만 널 잊어볼게
다른 사람 품에 널 그리며
힘들지만 이젠 잊어볼게
아름다웠던 날과 우리 약속도
습관처럼 내게 말했었던
네 말 들어 주지 못해서
지켜 주지 못해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후회로 남은 지난 일들이 떠올라도
아프지만 널 잊어볼게
다른 사람 품에 널 그리며
힘들지만 이젠 잊어볼게
아름다웠던 날과 우리 약속도
네가 없이 텅 빈 내 하루가
아직 너무 힘겨워도
이제 그만 널 잊어볼게
널 웃게 할 사람과 함께 하길
사랑했던 우린 다 잊어볼게
아름다웠던 날과
우리 약속도 잊어볼게

 

 

 

 


 

 

 

 

책 내용 마지막 메모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오늘 다 읽었는데 짱 재밌게 읽었다
오랜만에 책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무릎을 탁 치게하는 표현으로 가득한 책을 읽은 것 같다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거라도 그걸 정리해서 말(또는 글)로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직접 설명을 해보기 전까지는 내 지식이 아니라고 해도 될 만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절실하게 느끼고 생각해왔던 것들인데, 직접 표현을 해보면 정리가 1도 안 되고 내 마음이 전달이 안 되는 그 답답한 기분을 대부분 한 번쯤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이 책은 내가 항상 설명하기 힘들고 답답하다고 느끼던 것들을 작가님이 완벽한 문장으로 풀어서 설명해주시니까 '그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표현했을까' 하면서 되게 많이 공감하고 또 감탄하면서 읽었다
아무튼 난 이 책 왕추천
다음 글부터는 새로운 책 메모해야지

 

 

 

 

 

101.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훨씬 불쾌하지만)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유혹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차피 드러난 답에 따라서 행동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 답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답은 인과론적으로 유효한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사실 뒤에 오며, 물밑에서 일어난 변화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며, 인과관계를 혼동한 피상적인 분석일 뿐이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사랑을 거부당하느나?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102. 어떤 결정도 내리기 어려울 때에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클로이는 얼버무렸다. 나도 합세했다. (그 상황에서 나에게 어떤 결정이 유쾌했을까?) 우리는 계속 만났고, 계속 함께 잤고, 크리스마스에는 파리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클로이는 묘하게 그 과정에 거리를 두었다. (생략)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녀 대신 결정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행동은 하지 않고 자신의 우유부단과 좌절을 보여주기만 하면 내가 결국 그녀에게 필요한(그러나 너무 겁이 나서 본인은 하지 못하는) 행동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103. 우리는 낭만적 테러리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무슨 문제 있어?"

 

"아니, ? 무슨 문제가 있어야 돼?

(생략)

 

"나도 잘 모르겠어. 9월 중순쯤부터 느껴오던 거야. 우리는 말이 잘 안 통하고 있어. 우리 사이에 벽이 있는데, 너는 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벽이 어디 있는데?"

 

"내 말이 그 말이야. 너는 이것말고도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

 

"이건 뭔데?"

 

 

 

 

 

 

 

 

 

104.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구애와 마찬가지로 떠나는 일도 과묵이라는 담요 밑에서 고통을 겪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 ㅡ 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생략) 이렇게 되면 연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적법절차에 따라서 가동되던 대화의 매력과 유혹은 사라져버리고 이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킬 뿐이다. 연인이 적법하게(다정하게) 행동해도 아이러니가 담긴 행동이 되어버린다. 사랑을 소생시키려다가 오히려 질식시키고 마는 행동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꾀(삐치기, 질투, 죄책감 자극)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울음을 터뜨리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등).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연애에서나 정치에서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105. 정치적 대화를 통해서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면 피해를 입은 쪽은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 행동에 의존하게 된다. 상대로부터 평화적인 수단으로 유혹해내지 못했던 양보를 힘으로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정치적 테러리즘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황에서 태어난다. 자신의 행동이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 ㅡ 오히려 상대를 더 멀어지게 하기 쉽다는 것 ㅡ 을 알면서도(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나오는 것이다. 테러리즘의 부정적 측면은 아이의 분노와 공통점이 많다. 좀더 강력한 적을 만나 자신의 무능을 알게 될 때 드러내는 분노.

 

 

 

 

 

 

 

106. 나는 도시로 들어가는 길에 그 여자와 시시덕거렸다. 클로이가 대화에 끼어들려고 해도, 배타적으로 (그리고 유혹적으로) 그 여자에게만 하는 말로 클로이의 말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질투심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하려면 중요한 요인이 필요하다. 목표로 삼는 사람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테러리즘의 한 방편으로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은 늘 도박이다. 클로이의 질투심을 자극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어디일까? 클로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텔레비전에 나와서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정치가처럼)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질투심을 감추는 것인지,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클로이는 나에게 질투하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내가 기쁨을 느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뤼자코브의 한 작은 호텔 방에 들어갔을 때는 오랜만에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107. 테러리스트적인 삐침이 구조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아무리 사소하다고 하더라도 삐치게 만든 쪽에 어떤 잘못된 행동이 있어야 한다. 다만 문제는 가해진 모욕과 유발된 삐침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화를 내게 만든 일에 비해서 벌이 지나치게 세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는 화가 잘 풀리지도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클로이에게 삐칠 기회를 노려왔다. 그러나 분명한 잘못도 없는데 삐치는 것은 부작용을 낳는다. 상대가 삐친 것을 모를 수 있고, 그렇다면 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8. 테러리즘의 핵심은 그것이 일차적으로 주의를 끌고자 계획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생략) 군사적 기술과는 관련이 없는 목표를 앞세운 심리전의 한 형태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삐치는 것 역시 삐치게 된 사건과는 별 관련이 없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용된다. 내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 때문에 너에게 화가 났다는 나는 네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는 더 폭넓은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메시지를 상징한다.

 

 

 

 

 

 

 

109.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클로이는 자기를 용서해줄 수 있겠느냐고, 말다툼을 미해결로 놓아둔 채 지내기는 싫다고, 즐겁게 1주년을 기념하며 저녁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분노(열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노)를 전부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것은 내 진짜 불만을 말했을 때 생길 위험 때문이었다. 클로이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내 상처는 표현하기가 무척 힘든 것이었다. 열쇠하고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그 문제를 꺼내면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따라서 나의 분노는 지하로 밀어넣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의미를 상징화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 상징이 해독되는 것을 반은 기대하고 반은 두려워하면서.

 

 

 

 

 

 

 

110. 나는 샤워 뒤에 마침내 열쇠 사건을 마무리짓고 일 드 라 시테의 한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리 둘 다 매끈한 행동만 했다. 긴장을 피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 영화, 수도 등과 같은 중립적 영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웨이터의 관점에서는) 행복한 한 쌍으로 보였을 것이다. 낭만적 테러리즘이 중대한 승리를 기록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생략) 나는 우리가 그 날 저녁 파리에서 즐기는 행복은 환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클로이가 보여주는 사랑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상대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 의리는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자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나의 저녁은 행복하지 않았다. 삐친 것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성공은 공허했다.

 

 

 

 

 

 

 

111.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이나 초등학생들을 폭탄으로 날려보냄으로써 이따금씩 정부로부터 양보를 강요할 수 있지만,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접근방법이 근본적으로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은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112. 나는 내켜하지 않는 수용자에게 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113. "난 윌을 만나고 있었으니까."

 

"뭘 했다고?"

 

"윌을 만나고 있었다고, 됐어?"

 

"?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윌을 만난다는 게?"

 

"참 나, 윌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거야."

 

(생략)

 

클로이는 울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난.....나는.....미안해."

클로이는 울음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콧물도 쏟아졌다. 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숨을 못 쉬고 입을 벌린 채 헐떡거리기만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잠시 그녀가 한 말의 의미도 잊은 채 그녀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이, 제발 울지 마. 괜찮아. 이야기를 하면 돼. 티지, 제발, 자 이 손수건 받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 약속해."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너는 이런 꼴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너는 정말 이런 꼴을 당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클로이는 비참한 상황으로 빠져들면서 잠시 배신의 짐을 덜었다. 그녀의 눈물 때문에 내 짐도 잠시 유예를 받았다. 나는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배반함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놓고 배반당한 남자가 배반한 여자를 위로하고 있다니.

 

 

 

 

 

 

 

114. 클로이와 내가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관계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 있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기로, 울지 않기로, 피해자나 처형자가 된 것처럼 느끼지 않기로 했다.

 

 

 

 

 

 

 

115.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 이런 도덕적 태도가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클로이가 그냥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116.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함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117. 내가 클로이를 부도덕하다고 말한 것은 그녀가 매일 그녀에게 위로, 격려, 지원, 애정을 주는 사람의 관심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것에 퇴짜를 놓는다고 해서 도덕적인 의미에서 무슨 비난을 할 수 있을까? 큰 비용을 들이고 희생을 하여 선물을 줄 때 그것을 물리친다면 틀림없이 비난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면, 이것이 과연 도덕적인 언어를 사용할 문제일까? 사랑이 일차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즉 상대의 유익을 위한 마음에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적어도 칸트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도덕적인 선물이 아니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고 해서 내가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나는 순교를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경향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118.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해서 도덕적 판단을 했다.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란 그 기질이 서로 다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일반적 구별에서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가톤 하플로스, 즉 그냥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19. 나는 클로이가 나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에 클로이를 악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악한 존재로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가치 시스템은 절대적 기준에 따라서 클로이의 범법을 설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전적인 도덕주의자의 잘못을 범한 셈인데, 니체는 이 점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동기와 관계없기 오로지 그 유용하거나 해로운 결과때문에 개별적 행동들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된 계기를 잊어버리고, 선과 악이 결과에 관계없이 행동 자체에 내재된 특질이라고 믿게 된다.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붙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나는 세계와 그녀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의무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도학자였다.

 

 

 

 

 

 

120. 사람들에게 어떻게 의무감에 따른 사랑을 강요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낭만적 테러리즘, 낭만적 파시즘이 아닐까? 도덕성에도 경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고등법원이 다룰 문제이지, 잘 먹고, 좋은 집에 살고, 책을 너무 많이 읽고, 너무 익어버린 감상주의자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이별 때문에 한밤중에 흘리는 짠 눈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나는 공리주의자처럼 이기적으로, 자발적으로 사랑을 했을 뿐이다. 만일 공리주의에서 어떤 행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들어낼 때에만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데에서 생기는 고통과 그녀가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은 우리의 관계가 단지 도덕과는 관계없는 것일 뿐 아니라, 부도덕해지기까지 했다는 가장 분명한 표시였다.

 

 

 

 

 

121. 나는 원시적이고 비극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믿음 때문에 나의 분노가 다른 사람을 비난할 자격을 준다고 느꼈지만, 결국 비난은 선택과 연결될 수 밖에 없으며, 선택이 없는 곳에는 비난도 없음을 인정했다. 당나귀가 노래를 못한다고 당나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나귀는 체질상 콧김을 뿜는 것 외에 다른 기회는 얻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 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에서 퇴짜를 맞는 것은 노래를 못하는 당나귀보다 견디기 힘들다. 나에게 퇴짜를 놓은 사람이 한때는 사랑을 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나귀는 원래부터 노래를 부를 줄 모르기 때문에 당나귀가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삼가는 것도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에게 퇴짜를 놓은 사람은 사랑을 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할 수 없어라는 주장의 현실성은 더욱더 소화하기가 힘들다.

 

 

 

 

 

122.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일반적이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123. 과거를 관찰할 수 있는 초월적 지점은 없다. 과거는 늘 현재 속에 구축되며, 현재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화한다. 또한 우리는 과거 그 자체를 위해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과거를 볼 뿐이다.

 

 

 

 

 

124.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그것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인간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피조물이다. 나는 내 분노를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의 죽음으로 그 분노를 상징하려고 했다. 나는 클로이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쪽을 택했다. 나 자신을 죽임으로써 그녀가 나한테 한 일이 무엇인지 내 몸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125. 입에서는 거품이 일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오렌지 거품들이 태어나 공기와 접촉을 하면 폭발했다. 탁자와 셔츠 칼라에는 밝은 오렌지색 막이 뒤덮였다. 나는 말 없이 산의 화학작용을 지켜보다가 자살의 비일관성을 깨달았다. 즉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선택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단지 클로이에게,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이란 그 의미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행동이라서 나에게 상대가 그 비유를 읽어내는 것을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나는 죽음으로 인한 무능력 때문에(적어도 세속적인 틀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을 바라볼 기회를 박탕당하게 될 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는 광경을 지켜볼 수도 없다면 그런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략) 나는 내 죽음을 그려보면서 나 자신의 소멸을 바라보는 관객 역할을 맡는 것을 상상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죽었기 때문에 내 궁극적 소망을 실현할 수 없었다. 즉 죽은 동시에 살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26. 어떤 식으로든지 자살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등식의 두번째 부분을 잊고, 죽음을 삶의 연장(자기 행동의 결과를 지켜볼 수 있는 일종의 내세로)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싱크대로 비틀거리며 걸어갔고, 내 위는 수축되면서 거품이 이는 독을 토해냈다. 자살의 쾌락은 유기체를 죽이는 끔찍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클로이는 내 무덤가에서 울고, 윌은 눈길을 피하겠지. 둘 다 호두나무로 만든 내 관에 흙을 뿌리겠지)에 있었다. 따라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은 죽게 되면 나의 소멸이라는 멜로드라마부터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행동일 터였다.

 

 

 

 

 

127. 왜 나의 콤플렉스, 모든 결함과 수모를 그 정반대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왜곡된 심리적 술수에 예수의 이름이 붙은 것일까? (생략) 예수는 그가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악과 대비되는 순결한 미덕과 의문의 여지 없는 선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은 단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려놓은 울 듯한 눈과 창백한 안색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내 사랑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가 비애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모든 덕은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오해받은 존재의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28. 기독교의 정점에 순교자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생략)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 로마 당국의 부패와 잔혹, 친구들의 배반 ㅡ 이 모든 것이 이 사람이 신을 자기 편으로 둔 사람이라는 증거(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증거)를 구성하는 데에 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

 

 

 

 

 

129. 자신의 미덕에 대한 느낌은 고통이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덕은 커진다. 예술 콤플렉스는 우월감과 얽혀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압제와 맹목에 맞서 패배자가 더 큰 덕에 호소하며 느끼는 우월감이다. 나는 사랑하던 여자에게 차이고 난 뒤, (예수처럼 십자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후 3시에 침대에 자빠져서) 내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켰다. (생략) 나는 도덕적으로 높은 자리라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죽음을 선고받았으나 역사의 순교자였다.

 

 

 

 

 

130. 나의 우월감은 일차적으로 내 고립과 고통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고통을 겪는다, 고로 나는 특별하다. 나는 이해받지 못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크게 이해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 틀림없다.

 

 

 

 

 

131. 자기 혐오를 피해가기 위해서 약점을 미덕으로 바꾸는 연금술에는 동정을 보낼 수밖에 없다. 나의 고통이 예술 콤플렉스로 진화한 것에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건강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혐오와 자기 사랑 사이의 미묘한 내적 균형에서 이제 자기 사랑이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132. 예수 콤플렉스란 자기 방어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여자보다 클로이를 사랑했는데, 이제 그녀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내가 그 견딜 수 없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처음부터 그녀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뒤집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버림받아 절망적인 상태일 때, 옆 방에서 들려오는 행복에 겨운 오르가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호텔방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정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133.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이 계속 미친 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지나친 의욕, 고통, 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 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식사, 죽음, 돈에 대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해서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

 

 

 

 

 

134.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혜가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까? 지혜는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한다. (생략) 그러나 지혜는 사랑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135.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 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두 능력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일지도 모른다.

 

 

 

 

 

136.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생략)

그러다가 어느 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철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 생활을 이야기해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나는 금욕주의적 철학을 내팽개치고 클로이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모조리 되풀이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137. 레이철의 모습은 나에게 금욕주의적 접근방법의 한계를 일깨워 주었다.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불가피했다. 불행히도 그 불합리성이 사랑을 반박하는 무기는 되지 못했다. 나무 뿌리와 싹을 먹기 위해서 유대의 산 속으로 물러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영웅이 될 기회는 사랑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서 금욕주의적 삶이 요구하는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금욕주의 안에는 뭔가 비겁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금욕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애정에서 생기는 위험, 사막에서의 삶보다 더 큰 인내심이 있어야 직면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항하는 서툰 방어였다. 금욕주의는 감정적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도사적 존재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요구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할 뿐이었다. 금욕주의자가 아무리 용감하다고 할지라도 최고의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 즉 사랑의 순간에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다.

 

 

 

 

 

138. 문제를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분모로 환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문제의 복잡성에 눈을 감아버릴 수는 있다. 낭만적 실증주의(문제에 진정한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와 금욕주의는 둘 다 사랑의 고민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부적절한 해답이다. 둘 다 모순들을 부둥켜안고 애를 쓰기보다는 문제를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자들은 사랑을 고통과 비합리성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으로 사랑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논증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좇다보면 틀림없이 받게 되는 상처를 피해갔다고 하지만, 감정적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심리적 지혜로 문제를 단순화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모두 고통 없는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지혜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지만, 그 지혜의 교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무시해버렸다.

 

 

 

 

 

139. 나는 좀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생략)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 (그 결론에 번호를 붙여서 단정하게 배치해놓는다고 해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140. 그 교훈은 더욱더 타당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철이 다음주에 저녁 식사를 하자는 내 초대를 받아들였고, 그 후로 그녀를 생각만 해도 시인들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떨림은 한 가지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ㅡ 내가 다시 한번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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