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리 - 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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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리 - 모닥불

가요/슬픈 거 듣고 싶을 때

by 알록달록 음악세상 2020. 11. 2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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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득 따듯한 사람이 되고파요
이렇게 놀라운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
내 많은 사람 곁에 있어 고맙다고
말하지 못하고
지나쳐가니 속상해도
모닥불에 함께 비춰
우리 모든 바람이 불어도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내가 너무 행복해 돌아올 때
두 손 내밀어 웃어주렴
보잘것없이 그 무엇이든 좋으니
밝고 힘있게 웃어주렴
난 가끔 불편한 사람들도
울적으로 지나쳐
감춰지기를 바랐었고
너는 내가 그리도
반가운지 곱게 미소 지었어
모닥불에 함께 비춰
우리 모든 바람이 불어도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내가 너무 행복해 돌아올 때
두 손 내밀어 웃어주렴
보잘것없이 그 무엇이든 좋으니
밝고 힘있게 웃어주렴
내가 너무 행복해 돌아올 때
두 손 내밀어 웃어주렴
보잘것없이 그 무엇이든 좋으니
밝고 힘있게 웃어주렴
밝고 힘있게 웃어주렴

 

 

 

 

 

 

 

 

 

 

 

 

이어서 메모@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책 진짜 재밌다

 

 

 

 

 

50. 내가 하려는 말은 언어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이었다. (생략) 그 말은 절대로 이것이다 하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진귀한 색깔을 가진 나비였다.

 

그 생각을 하면 외로워졌다. 하나의 단어에서, 현학적인 사람들 앞에서 펼치는 주장이 아니라, 통역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지겨운 연인들이 간절하게 토해내는 하나의 중요한 단어에서도 오류가 발견될 수도 있다는 생각. 우리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전하는 것과 같다. 늘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신할 수가 없다(그럼에도 불과 몇 개밖에 꽃으로 피어나지 못할 포자를 수도 없이 날려보내는 민들레처럼 무작위적이고 낙관적인 원거리 통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51. 그러나 말도 완전히 내 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손에 오기 전에 이미 너무나 많은 손을 거쳤다. 나는 언어 속에 태어났다. 내가 그 질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ㅡ 이런 간접성 때문에 문제도 생기고 유리한 점도 생긴다. 유리한 점이란 수백 년간에 걸쳐서 사랑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해놓은 공동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느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클로이와 나는 사랑이 증오는 아니며,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마티니를 삼키며 사랑을 말할 때 그들이 어떤 영역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아볼 정도의 교육은 받았다.

 

 

 

 

52.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내린 가장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하지만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느끼는 매력은 독특하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 헌신, 홀림, 이런 단어들은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나는 마음의 언어의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식당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낭만적인 배경 때문에 사랑이 너무 두드러졌고, 따라서 진지하게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낭만은 저자의 의도와 언어 사이의 끈을 약화시켰다.

 

 

 

 

53. 감정적으로 게을러지는 방법은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인용을 하면 된다. 공적인 사랑의 표준 사전을 펼치면 된다. 거기에는 분위기에 맞는 준비된 주머니들, 거짓말과 캐러멜로 끈적끈적한 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는 마치 다른 사람의 더러운 시트 속에서 잠을 자듯이 역겨운 면이 있었다. 나 자신의 낭만적인 대화에는 나 자신이 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54.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뻔한 것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 눈이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입에서 매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클로이의 독특한 버릇들은 더 큰 완전성을 가리키는 기호들로, 그것은 연인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55.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략)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56. 사랑을 환상, 외적 현실과 관련이 없는 믿음,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강박과 구별해주는 경계선은 아주 위태위태하다. 물론 클로이가 식료품을 싸는 것이 그 자체로 귀여울 만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내가 그녀의 몸짓, 세이프웨이에서 우리와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는 달리 해석되었을 수도 있는 몸짓에 내가 부여하기로 결정한 어떤 것일 뿐이다.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는 윌의 질문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나에게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연인이 어떻게 그렇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는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훨씬 더 주관적이고, 아마도 신뢰할 수 없는 인식일 것이다.

 

 

 

 

57. 개인적 판단은 두 명의 배심원의 판단으로 바뀌며, 바깥으로부터의 위협은 두 사람의 침대에서 나누어 가진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남의 험담을 했다. 그러나 악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상호 작용에서 24시간 윤리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느라고 축적된 거짓말에 가끔씩 산소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의 성격의 이런저런 특징에 대해서 너에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네가 이해를 못할 것이기 때문에, 또는 너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줄 것이기 때문에) 이해를 할 만한 다른 사람과 네 등뒤에서 그것에 대하여 험담을/이야기를 한다. 클로이는 세상에 대한 나의 판단의 최종 저장소가 되었다. 내가 친구나 동료에 대해서 느꼈지만 그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 내가 부인하려고 했던 그들에 대한 감정들, 이제 나는 그런 것들을 클로이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랑은 공통의 혐오를 확인함으로써 커나간다. 우리는 둘 다 X를 싫어한다는 우리는 서로를 좋아한다로 번역된다. 연인들 즉 범죄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충한 마음을 서로 얼마나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 서로 얼마나 충성하느냐의 증거가 된다.

 

 

 

 

58. 두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함께 이야기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 사전에서 정의된 담론의 언어로부터 멀어진다. 익숙함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두 연인이 함께 짜 내려가는 이야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이다. 그것은 공유된 경험의 축적을 암시하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관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언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과 달라진다.

 

 

 

 

59.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어떤 것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60.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것은 완전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유동성에 남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것을 도와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61. 사랑의 경계에는 두 가지 해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너무 많은 시선 밑에서 살아감으로 해서 생기는 해체이며, 또 하나는 너무 적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감으로 해서 생기는 해체이다. 클로이는 늘 전자가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질식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움직임이 뻣뻣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략)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도시 변두리의 오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어린 시절에 살던 집으로부터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젊음의 낭만주의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고전들이 가득 든 가방을 가지고 갔다. 그녀는 달의 표면 같은 사막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그 책들을 읽고 주석을 달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그녀는 평생 갈망했던 고독 때문에 방향감각이 흐트러지고, 겁이 나고,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주 조그만 시장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존재감, 자신의 경계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마침내 겨우 한 달 만에 그녀는 그 소도시를 떠나 피닉스의 한 레스토랑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러나 피닉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사회적 접촉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라는 것에 대한 모든 느낌을 잃었다. 그녀가 겪은 경험들은 언어로 정리될 수 없을 것 같았다.

 

 

 

 

62. 사랑이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면, 고독은 거울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상상력은 우리의 얼굴에 있는 베인 상처나 점을 자기 마음대로 꾸며내게 된다. 거울의 폐해가 무엇이든, 적어도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을 되돌려준다는 점, 우리의 가없는 상상력에 대응할 수 있는 분명한 윤곽을 부여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느낌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클로이는 사막에서 흐려졌다. 다른 사람들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녀의 성격의 윤곽이 흐릿해졌다. 그러자 그녀의 상상력이 그녀를 장악하여, 그녀를 괴물 같은 존재로 부풀려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상상력이 키워내는 편집증과 망상을 채워버렸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다. 그 반응은 우리 스스로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되돌려준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혼자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잘 포착되지 않는 우리의 경계에 대한 느낌을, 우리 자신의 성격에 대한 느낌을 우리에게 줄 수 있기 때문에 불가결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 없이 답을 찾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클로이 없이 정답을 찾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63.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완전히 알려면, 이론적으로는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 안에서 평생의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실마리를 가지고 전체를 엮어내는 탐정일 수밖에 없고 분석가(심리 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늘 너무 늦게, 이미 범죄나 주요한 행동이 저질러진 뒤에 현장에 도착한다. 따라서 침전물로부터 과거를 천천히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마치 깨어난 뒤에 꿈을 분석하듯이.

 

 

 

 

64. 그러나 클로이에게 거울 노릇을 한다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짜 거울과는 달리 이 비유적인 거울은 절대 수동적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거울이며, 탐색하고 배회하는 거울이다. 움직이는 형태의 크기를 포착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성격의 믿을 수 없는 복잡함을 포착하려 한다. 이것은 손거울이다. 그런데 거울을 잡은 손은 계속 흔들린다. 자기 나름의 관심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찾고 싶은 이미지가 정말로 존재하는 이미지일까? 정신은 거울에게 묻는다. 너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마음은 거울에게 묻는다. 너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




65. "나"의 확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주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 만일 스탕달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 없이는 성격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은 능숙하게 거울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왜곡되고 말 테니까.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 감정이입의 결핍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의 어떤 측면을 부인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그 말 속에 (거울 표면이 절대 고르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우리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왜곡한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 아닐까?

 

 

 

 

66.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내가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은 순환적이다.

 

 

 

 

67. 클로이가 내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식사시간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 자신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활기차고 재미있어 보이려고 애를 썼는데, 식탁 건너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낯선 두 사람의 의심과 부딪히자, 평소의 자아로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잘못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뭔가 때문에 클로이는 한 마디로 대답을 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그렇게 난폭하고 분명한 과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제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것을 암시할 뿐이다.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68. 몇 년 전 클로이는 런던 대학의 학자와 한동안 사귀었다. 분석 철학자였던 그 학자는 책을 다섯 권이나 썼고 많은 학술지에 기고를 했는데, 그녀에게 하나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녀의 정신적 능력이 완전히 낙제점이라는 근거 없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떻게 했던 것일까? 이번에도 클로이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철학자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아메바의 형태를 자신의 기존 관념에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 즉 클로이는 아름답고 젊은 학생이지만 정신의 문제는 그에게 맡겨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저절로 예언이 이루어지듯이 클로이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인격 ㅡ 책을 다섯 권이나 썻고 많은 학술지에 기고를 하는 지혜로운 철학자가 기말리포트처럼 제출한 인격 ㅡ 에 대한 평결에 따라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철학자가 말하는 딱 그만큼 멍청한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69. 개인의 역사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전에는 제3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된다.("클로이는 귀여운/추한/똑똑한/멍청한 아이가 아닐까?"). 유년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내레이터 노릇을 해온 부모의 그릇된 이야기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항하는 투쟁은 유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가 누군가라는 문제의 결정을 놓고 선전전이 벌어진다. 현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수많은 이해 집단이 투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계속 왜곡되어 있다. 적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의 나태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맹목성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엄청난 선입관이 따른다. 별 근거도 없이, 진정한 이해에 요구되는 중립적 자세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람이 천재 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다. 기분 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유원지의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사람이 갑자기 3미터 길이로 늘어나기도 하고, 마른 여자가 뚱뚱해지기도 하고,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지기도 하고, 기린 같은 목이나 코끼리 같은 발이 생기기도 하고, 나쁜 인물이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하고, 뇌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길고 아름다운 다리가 생기기도 하고 다리가 없어지기도 한다. 나르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촉촉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약간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 가운데 어느 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명상이든 아니든.

 

 

 

 

70. 나는 그녀를 이해하는 데에 나의 여자와 남자에 대한 모든 경험을 이용했다. 매우 주관적이고, 따라서 왜곡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내 모든 이해가 작용했는데, 그 이해란 나의 생물학적 특징, 계급, 국가, 심리적 역사에 의존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바베큐 꼬치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연인들은 우리 본성의 복잡함 내에서 어떤 요소들을 꼬치에 꿰고 나머지는 무시했다. (생략)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전체는 아니다. 바비큐 꼬치가 달랐고 내가 다른 연인이었다면, 나는 다른 것들도 찾아냈을지 모른다.

 

 

 

 

71. 내가 클로이의 복잡함에 주의를 기울였다고는 하지만, 틀림없이 큰 부분을 생략하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감정이입이 부족해서 또는 성숙하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다. 나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생략 가운데도 가장 큰 생략을 저지르는 죄를 지었다. 그것은 내가 아웃사이더로서 클로이의 삶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죄이다. 나는 그녀의 내적인 삶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 절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우리는 나/너라는 양극, 나와 나 아님이라는 양극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클로이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다른 인간 ㅡ 그 말이 가지는 모든 신비와 거리를 지니고 있는 ㅡ 일 뿐이었다. 다른 인간(그 불가피한 거리는 우리가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구현되어 있다).

 

 

 

 

72. 우리는 직선적 경계나 직선 없는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가 축소되지 않는 사랑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사람, 유대인, 가톨릭 신자 등)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가진다. 우리가 그런 데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낙인이 틀렸다기보다도 그것이 분류 불가능성이라는 주관적 느낌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결국 늘 낙인을 찍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늘 단순한 "나"일 뿐이며, 낙인 찍혀진 부분들 사이를 쉽게, 다른 사람들의 선입관이 부가하는 제한 없이 이동한다.

 

 

 

 

73.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혀지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정의상 아주 좋은 바비큐 꼬치일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이해받고 싶어하는 점들에 대해서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클로이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우리에게 우리의 내재적인 유동성이 요구하는 대로 팽창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74. 다음 글에 다시 메모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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