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하다. 고독하다. 적막하다. 적요하다. 단정하다. 진실하다····· 이 책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떠올린 단어들이다. 한 사람이 오로지 진실하게 쓴 일기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시집같기도 하고 자서전같기도 했던 소설인데 자전적인 느낌이 있어서 더 좋았다. 난 한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 때문에.
한강 작가의 글을 읽으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기분이 든다. 더 아름답지도 더 끔찍하지도 않은, 어떤 왜곡도 없이 온전하게 펼쳐진 세상. 우주. 인간이 내 눈으로 들어와서 몸 전체로 퍼진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사정없이, 피와 함께 손끝과 발끝까지 쏘아진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시작을 미루었다. 팔월부터는 이 낮선 나라의 수도로 잠시 옮겨와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두 달 가까이 시간이 더 흘러 추워지기 시작한 밤, 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 때문에 물 한 컵을 데워 알약들을 삼키다가 (담담하게)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강보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가 꼭꼭 싸여 있다. 자궁은 어떤 장소보다 비좁고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 갑자기 한계 없이 넓어진 공간에 소스라칠까봐 간호사가 힘주어 몸을 감싸준 것이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방금 무엇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사람. 갓 태어난 새와 강아지보다 무력한, 어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여자가 그 아기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본다. 당황하며 강보째로 아기를 받아 안는다. 그 울음을 멎게 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사람. 믿을 수 없는 고통을 방금까지 겪은 사람. 아기가 별안간 울음을 멈춘다. 어떤 냄새 때문일 것이다. 또는 둘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보지 못하는 아기의 검은 눈이 여자의 얼굴 쪽을 ―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 향한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 속에서. 하얀 강보를 몸과 몸 사이에 두고.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뻣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물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입김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그럴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고요에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날이 가까워질 때,
더이상 허락되지 않을 이 집의 어둑한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가고 커튼 없는 북동쪽 창이 짙푸른 박명을 들여보낼 때,
군청색 하늘을 등진 미루나무들이 서서히 깨끗한 뼈대를 드러낼 때,
그녀가 세든 건물의 누구도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일요일 새벽의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흰나비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넋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혼들은 자신들이 총살된 벽 앞에 이따금 날아들어, 그렇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거기 머무르곤 할까?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보다 사소하게, 그녀는 자신의 재건에 빠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넋은 아직 육체에 깃들어 있다. 폭격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아 새 건물 앞에 옮겨 세운 벽돌 벽의 일부―깨끗이 피가 씻겨나간 잔해―를 닮은, 이제 더이상 젊지 않은 육체 속에.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의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방금 지은 밥을 담은 그릇에서 흰 김이 오르고 그 앞에 기도하듯 앉을 때, 그 순간 느낄 어떤 감정을 그녀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해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권희철(문학평론가)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 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한강의 소설들을 다시 읽는 이 자리에서, 섬세한 해석을 통해 정확한 '답'을 찾아내기보다, 차라리 질문들 사이의 간격 혹은 변화를 더듬으면서 그 사유의 운동을 우리의 읽기 안에서 다시 발생시켜야 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절실하게 체험했던 것처럼, 인간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 저마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폭력으로 얼룩진 어떤 끔찍한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가 더이상 인간이 아니기를 바랄 때에만, 인간적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몸짓을 진지하게 수행할 때에만, 간신히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하고 있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으며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영혜는 실제로는 정신병원에 갇혀 죽어가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영혜는 되묻는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영혜의 몸짓이 그저 죽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왜 죽으면 안 되는 걸까? 왜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자들을 그리고 다른 인간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며 상처주는 것을 동반하거나 최소한 그런 사태 전반을 외면하는 것인데도. 그러므로 『채식주의자』 안에서도 이미 질문은 변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적 상황이 인간 이외의 것들을, 심지어 다른 인간들을 파괴하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나중에는 '그러나 인간적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윤리적 몸짓이 다만 죽음으로 귀결되는가? 그 결론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 죽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가? 윤리적 몸짓 안에서 우리가 인간적 삶을 껴안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인혜는 자살할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나무들은 목숨을 받아주는 대신에 인혜에게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 의미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살아 있으라! 너의 삶을 거둬가고 대신에 평화로운 휴식인 죽음을 선물할 나무는 세상에 없다. 너의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 있으라!' 더이상 견딜 수 없고, 더 앞으로 갈 수 없는 그 삶을 이어가라는 명령이므로 그것은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고, 이행 불가능한 것을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으므로 나무는 거대한 짐승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영혜의 질문을 이어받은 인혜는 서늘한 생명의 말을 건네는 초록 불꽃 짐승을 다시 떠올리며, 항의하듯 대답을 기다린다. 초록 불꽃 짐승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대체 어떻게 인간적 삶을 껴안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년이 온다』가 80년 5월의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범죄들에 근거해 증언하는 바, 권력을 차지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 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존재다. 한쪽에서는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하고 다른 쪽에서는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라고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존재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반복적으로 타인을 살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는 듯이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모조리 깎아내는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일이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질문들에 어떻게 아니라고 답할 것인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고자 했다. 군인들의 총에 맞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 그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쓰면서, 어찌해볼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의 걸었거나 삶의 경로를 이탈시켰다. 그들이 한 일은 그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 인간적인 어떤 것을 보존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권력이 '인간이란 죄책감 없는 폭력 그 자체이거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냄새나는 몸뚱이일 뿐' 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때,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타자가 가장 강력하게 나에게 이의 제기하고 나의 자리를 부인해서 내가 스스로를 초과할 가능성을 이끌어내게끔 하는가? 죽어가는 타인이.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물론 인간은 죄책감 없는 폭력 그 자체이거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냄새나는 몸뚱이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언제나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학살과 고문과 강제진압이 우리를 밀어붙이고 짓이기고 쓸어버리기 위해 온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한, '소년이 함께 온다. 죽어가는 타인이 언제나 함께 온다. 이 소년과 만날 때,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쓰느라 우리의 실존이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 스스로를 뛰어넘을 때, 우리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면서 인간적 삶은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인간적 삶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는가? 언제나 이미 도래하고 있는 소년, 죽어가는 타인과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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