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죠, 인간에게는 가장 좋은 점이 가장 나쁜 점이에요.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요. 떼어 낼 수 없는 양면 색종이 같은 거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나눠서 생각하는 사람은 정의의 편인 양 근엄한 표정으로 깃발을 거침없이 흔들며 걷다가 다른 사람을 후려갈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형이에요.
그건 마치 성긴 그물망으로 물고기를 낚는 것과 같아요. 그런 사람은 그물망에서 고기가 풍덩풍덩 떨어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죠. 그런데요, 그 사람이 풍덩풍덩 떨어뜨린 것이 정말로 귀중한 거예요. 알겠어요? 떨어진 게 인생의 참맛이라고요. 또 그게 인간의 재미있는 점이자 신기하고도 고마운 점이죠. 그걸 구석구석 음미하지 않는다면 사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네? 당신.
보리새우 생선조림이나 젓갈이 없으면 사는 게 재미없겠죠? 그런데 참치만 생포하려고 해도요, 그 뒤에 쓰레기도 흙탕물도 건지지 않으면 안 돼요. 진흙이 있으니까 진주가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저에게는 좋은 점과 나쁜 점보다, 그 사이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점이 제일 많아요.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인가 싶으면서도 그 쓸모없는 면이 고마워요.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도 재수 없는 인간도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죠. 보세요, 저 말주변 좋죠? 그래서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가 있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의 가장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점은요, 가십을 너무 좋아한다는 거예요. 싸움이 나면 당장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밀어요. 뭐야, 뭐야, 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쓰레기통에 쓰레기 버리듯이 제게 구시렁구시렁 험담을 잔뜩 내뱉고는 후련한 얼굴로 돌아가요. 저는 꼬치꼬치 캐묻고요.
저야 인간의 약점을 캐묻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만두질 못하는 거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나중에 자기혐오에 빠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과는 사이가 어색해져요. 그래서 저도 보답 차원에서 제 쓰레기를 버리러 가요. 그렇게 해서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거죠.
내 책은 그리 팔리지 않는다. 사는 사람이라고는 주변의 지인뿐인 듯하지만, 이따금 요코 씨의 책을 읽으면 굉장히 힘이 나고 격려가 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깜짝 놀란다. 나는 다른 사람을 격려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정도로 오만하게 굴 생각도 없다.
만약 남을 격려하는 능력이 무의식중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것은 나와 내 몸을 격려하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하자 상품을 어떻게든 여느 사람만큼 기능시키기 위해 내가 내 몸을 격려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명확한 의식 아래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아닌 고마운 무언가가 그렇게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추악하고 엉망진창이고 빌어먹게 지긋지긋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고 엄숙하고 옷깃을 여미고 넙죽 엎드리고 싶을 정도로 멋지다.
아들이 말했다. "나는 엄마를 조금은 존경하는 부분도 있지만 경멸도 하고 있어." "너 경멸할 수 있는 엄마를 둬서 운 좋은 줄 알아. 경멸하는 엄마를 밟고 올라 성장할 수 있잖아. 부모를 사랑하기만 하면 마더 콤플렉스의 화신이 될걸. 나한테 감사해라." "변변찮은 엄마를 둬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고맙다."
나는 기분 전환을 하지 않는다.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고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거의 언제나 한없이 우울하다. 게다가 몸은 게으르고 마음만 분주해서는 벌러덩 드러누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종일 걱정하느라 몸은 쉬되 마음은 쉴 틈이 없다. 취미도 없고 술도 마시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인생의 재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생이다. 그것이 재미있어서 그만둘 수 없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살고 싶다. 기분 전환 따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쪽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이상적인 아이 따위 현실에 한 명도 없는 것처럼 이상적인 교사 같은 것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다. 서로가 마찬가지인 셈이다.
평생 이끌어 줄 교사와 만날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 하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불운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인간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기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 다른 혼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다섯 살 때 보육원에 다니는 같은 반 여자아이가 놀러왔다. 그 아이는 내게 말했다. "저는 겐 짱을 좋아하는데요, 겐짱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러고는 아주 조용히 웃었다.
나는 그 여자애 안에서 성숙한 여성의 슬픔을 보았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어른스러운 면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특별히 어른스러운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아이 안에서든 아이의 혼과 어른의 혼이 함께 산다. 나는 아이가 순수하다고도 무섭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세월이란 인간을 옴짝달싹 못하게 서서히 옥죈다. 옴짝달싹 못하는 가운데 세상과 싸운다. 그냥 내버려 둬도 인간은 어른이 된다. 그중에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아이의 혼이 상처 나지 않은 채 그대로 자란 사람을 보면 몹시 감동하게 된다.
"엄마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랐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던가? 애초에 그런 바람대로 인간을 만들어 내겠다니, 그런 오만함이 용납될까?
완전한 인간 따위 없다. 만약 엄마가 나를 실패작이라고 한탄하면 나는 기분이 좋을까? 농담이 아니다. 수많은 결점이 있어도 나는 나답게 살고 울고 웃으며 인생은 멋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장 과정 중 한순간만을 보고 실패인지 성공인지 대체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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