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비행기
Yes Turtles Forth album
New mind New song
철없을 적 내 기억속에
비행기 타고가요
Yeah Let's go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순 없어요
모든 준비 다 끝났어
곱게 차려 입고 나선
바깥 풍경마저 들뜬 기분
때가 왔어 하늘위로
날으는 순간이야
조금은 두려워도
애써 내색 할 순 없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전에 자주 비행했었잖아
친구들과 말썽장이
거북이 비행기로 올라타
준비됐나
수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쳐
마지막 게이트야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어
이럴 땐 침착해 좀 자연스럽게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순 없어요
Yes Remember
비행기를 타고 가던 너
따라가고 싶어 울었던
철없을 적 내 기억속에
비행기 타고가요
Yes Fly 다들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늘을 나르는데 아무걱정 없는 듯
왠지 철닥서니 없었나 문득
이런 내 모습 촌스러 입 다문듯
쳐다보지 말아요
다들 처음 탈 때 이러지 않았나요
딴 데 봐요
신경 쓰지 마요
나 혼자 이런게 나 좋아요
어떤 느낌일까 정말
새들처럼 나는 기분
세상 모든 것이 점처럼
보 여 지겠지
개구쟁이 거북이
비행기로 드디어 출발한다
수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쳐
마지막 게이트야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어
이럴 땐 침착해 좀 자연스럽게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순 없어요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순 없어요 Yes Remember
비행기를 타고 가던 너
따라가고 싶어 울었던
철없을 적 내 기억속에
비행기 타고가요
얼굴 천재
ㅋ_ㅋ
이거는 영화 엔딩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인데 CG가 아니고 현실 영상이라고 한다
너무 신기해서 가져왔다
로봇이 나보다 춤을 더 잘 춘다
노래도 좋다 (The Contours - Do You Love Me?)
저번에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이 너무 내 취향이었어서 책을 2개 더 빌렸는데,
하나는 [불안]이라는 책이고 또 하나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이라는 소설
그 중에 첫 번째 [불안]은 재미가 없어서 메모를 하나도 안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같은 작가의 책이라도 어떤 건 정말 재밌고 어떤 건 재미없기도 한 것 같다
어떤 책이 재밌다면 그 작가의 지식이 존경할만큼 방대했거나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가 너무 뛰어나서 그 사람의 인생관을 엿보고 싶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른 책도 재밌을 거라고 기대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재밌는 글이 써지는 건 아닌 듯하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저번 책(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처럼 메모하고 싶은 문장이 가득했고 작가가 심리를 묘사하고 그 밑에 깔려있는 동기를 분석하는 능력에 공감하면서 읽었다
단순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이나 인간들이 정해놓은 윤리의 관점에서가 아닌, 인간 생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올바른 사고 방식을 제안하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요즘 생각한 건데 영화, 소설, 시, 노래 가사 등 창작물들의 핵심은 감정과 심리 묘사인 것 같다
감정 묘사를 잘 못한 작품들은 거의 다 재미가 없었다
또 감정을 제대로 말하려면 자기 자신이라는 생명체에 대해서 정말 뼛속까지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난 내가 느끼는 기분, 내 심리를 말하는 것도 잘 못 하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이 천재라고 느껴진다
단순히 화난다, 슬프다, 기쁘다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한 복잡한 감정들과 그 감정이 생긴 이유를 말로 잘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부럽다
아무튼 알랭 드 보통이 쓴 책(소설과 에세이가 합쳐진 사랑 이야기의 책)은 진짜 진짜 내 취향인 것 같다
앞으로 알랭 드 보통은 내 인생 작가이구 이 책은 내 인생 책이다
1부 낭만주의
<매혹>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다른 사람이 영혼의 짝이라는 느낌, 이 확신은 아주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이름을 알 필요도 없다. 객관적 지식은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에 중요한 건 직관, 즉 이성의 정상적 작용 과정을 건너뛰기에 더더욱 정확하고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만 같은 자발적인 감정이다.
낭만적인 사람은 낯선 사람을 언뜻 본 순간부터 최단 경로를 밟아 그 사람이 실존에 대한 무언의 질문들에 포괄적 답안이 될 수도 있다는 장엄하고도 상당한 결론을 공언하게 된다.
이러한 강렬함은 사소하고 심지어 익살스러워 보일지 모르나, 본능을 존중하는 태도는 관계의 우주론에서 작은 행성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사랑의 이상들이 선회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근원적인 구심체이다.
낭만적 믿음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몇 세기 전에야 비로소 병이 아닌 어떤 것으로 판정받았다. 영혼의 짝을 찾는 일이 인생의 목적에 근접한 어떤 것으로서의 지위를 갖추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신과 영적 존재를 향하던 이상주의가 인간 주체에게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신성한 시작>
신혼 초는 물론이고 몇 해가 지나도록 라비 부부는 항상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 "둘이 어떻게 만났어?"(생략)
시작은 흔히 여러 단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을 받는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작은 사랑 전반의 모든 중요한 것들이 압축된 형태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는 주인공들이 최초에 부딪히는 일련의 장애를 극복하고 나면 그들을 두루뭉술허개 만족스러운 미래로 넘기거나 아예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 외에 할 게 없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라비 부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좀체 묻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마치 그들 관계의 실질적인 이야기들은 적절하거나 생산적인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들 부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진정 골몰해 있는 다음 질문에 답해본 일이 없다.
흥미롭고도 걱정스럽게도, 뚜렷한 파국이나 큰 행복 없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사랑의 진척에 관한 이야기로서 스스로에게 들려줄 만한 축에 들지 못한다.
그는 행여 실언을 하지 않을까 겁이 나 얘깃거리를 찾지 못하지만, 침묵은 우둔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는 걸 알기에 머뭇거림을 계속 방치할 순 없다. 그는 결국 다리 하중이 교각들로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장확하게 설명하고, 이어 젖은 노면과 마른 노면에서 타이어의 제동 속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에 대한 분석을 늘어놓는다. 이런 서툰 모습은 적어도 그의 진정성을 가리키는 부수적 징표가 되어준다. 애타게 원하지 않는 사람을 유혹할 땐 그리 불안해하지 않기 마련이니까.
라비는 이런 사건에 흔히 선행하는 무의미한 말들을 지어낼 힘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오만하거나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 될 대로 되라는 조급한 심정으로, 안내문을 읽고 있는 커스틴의 말을 중간에 끊고 두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와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 러브스토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봐야 한다. 러브스토리는 누군가 우리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가 아니라 평생 서로의 포로가 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나눌 때이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식물원 정문에서 커스틴은 라비에게 전화를 걸라 말하고, 다음 주 저녁에는 매일 한가하다고 일러준다. 그 순간 라비는 그녀의 얼굴에서 열 살 적에 지었을 법한 미소를 본다.
라비는 느린 걸음으로 토요일의 인파를 헤치며 쿼터마일의 집으로 향한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행운을 나눠주고 싶을 지경이다. 여하튼 그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인 관념을 지탱하는 핵심 과제 세 가지를 족히 통과했다. 사람을 제대로 만났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녀가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사랑에 빠지다>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편, 사랑은 약점에 관한 것, 상대방의 허약함과 슬픔에 감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약점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시기에(즉, 주로 초기에) 그렇다. 연인이 위기에 빠져 낙담하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우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지만 격원할 만큼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망연자실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지지자로서의 새 역할을 부여받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덜 부끄러워하게 되고 아픈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를 간파해내고, 신뢰하고 나눌 줄 아는 우리의 능력 총량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고 공감해주고 용서해준다. 사랑은 우리의 당황스럽고 난처한 영혼에 대한 연인의 통찰력에 바치는 감사의 배당금이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는 반드시 감추는 게 적절해 보였던 많은 비밀을 마침내 드러낼 수 있다는 순전한 안도감이 어느 정도 생긴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할만하거나 정신이 온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상'이거나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유치하고, 공상적이고, 거칠고, 희망에 들뜨고, 냉소적이고, 허약하고, 다중적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연인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눈감아줄 수 있다.
<섹스와 사랑>
식물원에서 첫 키스를 한 뒤 라비는 두 번째 데이트를 위해 하우가의 태국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생략) 대화는 어색하게 시작된다. 지난번의 그 친밀했던 사이로 되돌아갈 방도가 도무지 안 보인다. 다시금 단지 아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들은 라비의 어머니와 커스틴의 아버지, 그리고 둘 다 알고 있는 몇몇 책과 영화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는 감히 그녀의 손을 건드리지 못하고, 어쨋든 그녀의 손도 좀처럼 무릎을 떠날 줄 모른다. 그녀가 마음을 바꿨을 것만 같다.
그러나 식사 후 거리로 나오자 긴장은 사라진다. "우리 집에 가서 차 한잔할래요? 허브 차 같은 거?" 그녀가 묻는다. "여기서 멀지 않아요."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전망과 관련이 있다.
그는 그녀를 어루만지다가 말고 언제 처음으로 이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를 묻는다. 자만심이 아니라 감사와 해방감이 불러일으킨 의문이다. 상대의 답 없이는 단지 음란하거나 탐욕스럽거나 가엾기만 할지도 몰랐을 욕망이 감사하게도 상호적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실은 거의 처음부터였습니다, 라비 칸 씨." 그녀가 말한다. "궁금하신 게 더 있나요?"
"사실은, 그래요."
"물어보세요."
"좋아요. 그러면 어느 지점에서,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음... 원하게 되었는지...."
"섹스를요?"
"뭐, 그렇지요."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녀가 놀리듯이 말한다. "솔직히 맨 처음에 레스토랑으로 걸어갈 때였어요. 당신 엉덩이가 예쁘다는 걸 그때 알았죠. 당신이 따분하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늘어놓는 중에도 내내 그 생각만 했어요. 그날 밤, 우리가 지금 누운 바로 이 침대에 널브러져서... 그 엉덩일 쥐어보면 어떨지 상상했어요... 이런, 여기까지. 나도 부끄러워지려 하네. 아무튼 그 순간이겠네요."
훌륭해 보이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친근한 농담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대단히 육감적이고 노골적인 환상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라비는 무척이나 놀랍고 즐거워지는 동시에, 근처에 자신의 성욕에 대한 죄의식을 가라앉힐 수 있는 힘도 즉시 거머쥔다. 매우 음전하게만 보였던 그때에도 늦은 밤 그에 대한 환상을 품었을지 모르며, 지금은 이토록 열정적이고 솔직하다니, 이런 발견으로 이 순간은 라비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하고 멋진 순간 중 하나로 점찍힌다.
성 해방에 관한 온갖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을 둘러싼 비밀과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은 사실 늘 그래왔듯이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의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애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할 운명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 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일생에 몇 번뿐일지 모를) 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들이 마친 행위를 '사랑을 나누다'라고 칭하는 데 수줍어할 일만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섹스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ㅡ인정, 애정, 감사, 내맡김ㅡ을 물리적 행위로 옮긴 것이니.
우리는 흥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드디어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연인이 나의 본모습에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발견의 기쁨이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구체적 요인들은 기이하고 비논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보다 건전하다고들 하는 다른 삶의 영역들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자질, 즉 이해, 공감, 신뢰, 조화, 관대함, 친절함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많은 에로틱한 자극의 이면에는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들에 대한 상징적 해소, 또는 친밀함과 이해를 향한 갈망에 대한 가슴 시린 암시가 깔려 있다.
첫 순간을 맞이한 뒤로 3주가 흘렀다. 라비는 손가락으로 커스틴의 머리를 거칠게 훑어 내린다. 그녀는 머릿짓과 여린 신음으로 더 많이, 제발 더 세게 해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그녀는 연인이 머리채를 움켜잡고 조금 난폭하게 채주길 원한다. 라비에게는 까다로운 진전이다. 그는 여자를 대할 때 진심으로 존중하라고, 양성을 평등하게 보고 사람을 사귈 때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애인은 평등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고, 성 균형의 일반 원칙들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녀는 일련의 문제적 단어들도 적잖이 좋아한다. 그녀는 마치 그가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응대하게끔 한다. 두 사람 모두 여기에 흥분하는 까닭은 실제로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자식, 나쁜 년, 쉬운 여자 같은 욕설을 상호 신뢰와 충성의 지표로서 공유한다.
침대에서는ㅡ평소에는 그토록 위험한ㅡ폭력이 더 이상 위험 요소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약간의 폭력을 안전하게 쓸 수 있고, 그로 인해 어느 쪽도 불행해지지 않는다. 라비의 일시적인 격분은 커스틴이 그로부터 그녀 자신의 복원력을 이끌어내는 순간까지 전적으로 그의 통제를 따른다.
어렸을 때 그들은 둘 다 친구들과 종종 몸을 부딪었다. 그럴 땐 때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커스틴은 소파 쿠션으로 사촌들을 세게 치면서 놀았고, 라비는 수영 클럽의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레슬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자 어떤 종류의 폭력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성인도 남에게 완력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철칙이다. 그러나 연인의 놀이라는 영역 안에서는 한 대쯤 치거나, 살짝 때리고 맞는 것도 이상하게 즐거울 수 있다. 가끔은 격렬하고 집요할 수도 있고 야만의 경계에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어느 쪽도 다치거나 죽을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커스턴은 상당히 엄격하고 권위 있는 여성이다. 직장에서는 한 부서의 관리자로 그녀의 연인보다 높은 보수를 받고 있으며, 자신감이 넘치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제 앞가림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라비와 침대에 있을 땐 나머지 삶의 피곤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탈출구로서 다른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순종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정확히 뭘 해야 할지 말해주게끔 하고, 그녀에게서 책임과 선택권을 가져가게끔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생각에 전혀 끌리지 않았지만, 그건 단지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사람일수록 신뢰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라비처럼 진심으로 친절하고 선천적으로 비폭력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갈망해왔던 건 주위에 자아의 보다 약한 부분을 내보일 만큼 괜찮은 오스만 권력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종과 지배 게임, 규칙을 깨는 시나리오. 특정 단어나 신체 부위에 흥미를 느끼고 집착하는 행위. 이 모두는 단지 특이하고 무의미한 것이나 경미한 광기와는 거리가 먼 소망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드물고도 진정한 친구와 함께 평소의 방어기제를 아무 문제 없이 벗어던지고, 극도로 친밀해지고 서로 용인되고자 하는 갈망을 공유하고 충족시키는, 막간의 짧은 유토피아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모든 게임이 그토록 짜릿해지는 진짜 심리적 요인이다.
<청혼>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 결혼을 했다. 신부의 토지가 신랑의 토지와 붙어 있거나, 신랑의 가족이 번성하는 농가이거나, 신부의 아버지가 읍의 치안판사이거나, 지켜야 할 성이 있거나, 양가 부모가 동일한 성서 해석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합리적인 결혼에서 외로움, 강간, 간통, 폭력, 가혹함, 육아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 생겨났다.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에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ㅡ감정에 의거한 결혼ㅡ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면제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결혼을 절실히 바라고, 본능에 압도되어 서로에게 빠져들고, 결혼이 옳음을 가슴으로 아느냐다. 현대는 '합리성', 그 불행의 촉매이자 회계적 요구에 물린 듯하다. 더 나아가 결혼이 경솔해 보일수록(예를 들어 만난 지 6주 만에, 어느 한쪽이 직업이 없을 때, 또는 둘 다 10대를 갓 넘겼을 때), 사실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외관상의 '무모함'이 과거의 이른바 현명한 결합이 유발됐던 그 모든 오류와 비극의 평형추로 간주되는 것이다. 본능의 명성은 수 세기에 걸친 비합리적인 '합리성'에 반하여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 반응의 유산이다.
다소 부끄럽지만 결혼의 매력은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로 귀결된다. 이는 꼭 우리 개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독신 생활을 최대한 성가시고 우울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듯하다. 일단 대학교 때까지의 자유분방한 학창 시절이 끝나면, 우정과 온정은 찾기 힘들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사교 생활은 숨이 막힐 듯 커플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시간을 보낼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러던 중에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면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 (이론상) 결혼한 후에야 섹스를 할 수 있었을 때, 사람들이 엉뚱한 이유로 결혼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안 현명한 관찰자들은 혼전 섹스를 둘러싼 금기들을 걷어내 젊은 사람들이 더 차분하고 덜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명한 판단을 가로막는 그 특정 장애물은 제거되었다손 치더라도 또 다른 종류의 갈망이 그 자리를 차지한 듯 하다. 동반자에 대한 갈망은 그 효과로 보자면 과거의 성적인 동기 못지않게 강력하거나 무책임할 수 있다. 52번의 일요일을 내리 혼자 보내면 개인의 신중함이 교란될 수 있다. 외로움은 무익한 성급함을 촉발하거나, 잠재적 배우자에 대한 의심과 양면가치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어떤 관계든 그 성공은 연인이 함께할 때 얼마나 행복한가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혼자인 것에 대해 각자가 얼마나 걱정하는가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그는 자신이 함께하기에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자신있고 확실하게 청혼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정황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교묘한 결과다. 독신 생활에는 정상성에 대한 잘못된 자아상을 지어내는 습성이 있다. 라비는 내적 혼란을 느낄 때 강박적으로 정리 정돈을 하는 경향이 있고, 일로 불안을 물리치려고 하며,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을 딱 부러지게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즐겨 입는 티셔츠를 찾지 못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지럽히거나 이제 그만 정리하고 와서 식사하라고 하거나 텔레비전 리모컨을 닦는 그의 습관을 꼬집어 잔소리를 하거나 무엇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 물어보는 건 고사하고, 곁에서 그를 지켜보기만이라도 하는 사람이 없는한 이런 기벽은 모두 깔끔히 가려진다. 목격자가 없을 때, 그는 올바른 짝을 만난다면 자신에게는 함께하기에 특별한 문제가 전혀 없을 거라는 관대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몇 세기 후에 사람들은 요즘 우리가 결혼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이해의 수준이 완전히 미개하진 않아도 적이 당황스럽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리고 일반적이고 비판의 성격은 띠지도 않은 심지어 첫 번째 데이트에도 적절한) 질문이자, 누구나 참을성을 가지고 온화하고 방어적 태도 없이 답하리라 기대할 질문은 아마도 이러하리라. "그래, 너는 어떻게 하여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지?"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 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으로서의 우리가 어떤 후보군을 그들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조금은 너무 옳기 때문에ㅡ왠지 지나치게 안정적이고 성숙하고 분별 있고 믿음직하게 여겨지기 때문에ㅡ거부하게 되리라는 것도 얼마나 필연적인가. 심정적으로 이러한 올바름은 이질적이고 거저 얻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자극적인 사람들 쫓는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이 더 조화로울 것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그 삶이 가질 좌절의 양식이 안심하리만치 친밀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별것 아닌 일들>
낭만주의는 직관적 합의의 철학이다. 진실한 사랑에서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을 쓰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으며,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 (마침내) 둘 다 세계를 완전히 같은 눈으로 보는 경이로운 상호 감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은데) 이케아 통로에 서서 어떤 잔을 구입할지 같은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 점점 더 언짢아하고 급기야 다른 쇼핑객들의 주의까지 끄는 건 완전히 시간낭비라는 걸 둘 다 똑같이 의식하면서도, 그들은 이케아 통로에 서서 어떤 잔을 구입할지 같은 사소한 문제로 다툰다. 20분 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보 같다고 힐난한 뒤 구입할 뜻을 접고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모든 집안 문제가 동등한 권위를 갖진 않는다. 상대방이 시리얼을 먹을 때 얼마나 소리를 내는지나, 발행일이 지난 잡지를 얼마나 오래 보관하고 싶어 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면 즉시 바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어떻게 포개 넣어야 하는지나, 버터를 사용한 뒤 몇 분 안에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무안을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이 대단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고민에 하찮고 별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결국 좌절하는 동시에 우리의 좌절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지 마저도 의심하게 되어 우리를 미덥지 않아 하거나 인내심이 부족한 청중에게 문제를 차분하게 설명할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가 자신이 몰두하고 실망하는 바를 더 예리하게 파악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불 밑에서 (실내 온도와 관련하여) 이렇게 설명 했을지 모른다. 당신이 한겨울에 창문을 열어놓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난 두렵고 속이 상해. 신체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 말이야. 앞으로 소중한 것들이 짓밟힐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럴 때면 당신에겐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학적인 금욕주의 너무 왕성한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상쾌한 공기가 아니라, 당신 특유의 매력적이지만 무뚝뚝하고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방법으로 나를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일까 두려워.” 이와 마찬가지로 커스틴도 시간을 엄수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면밀이 들여다봤다면,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라비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결국 공포 증상이야. 다른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는 거나 내가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거나 매한가지야. 안전의 욕구와 다르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걸 고려하면, 비록 조금이지만 그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나만의 미친 방법인 거야.”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라비가 6시 반을 얼마 안 넘겨 오레가노에 갈 채비를 하자고 할 수도 있었고, 커스틴은 그들의 침실에 밀폐형 창문까지도 달았을지 모른다.
협상을 위한 인내심이 없으면 비통해진다. 원인도 잊은 채 화가 나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는 쪽은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려고만 하고, 잔소리를 듣는 쪽은 자신의 반발이 합리적 반론이나 그도 아니면 가엾고 용서받을 만한 성격상의 결함에서 나온 것임을 더는 설명하고나 하는 마음이 없다. 양 당사자는 그들에게 똑같이 지루하기만 한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일상적 난제를 가진 관계는 이상하고 득 될 것 없이 도외시되는 주제로만 남는다. 자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양극단, 즉 더없이 행복한 관계 아니면 살인적인 파국이다. 그래서 미성숙한 분노, 한밤의 이혼 협박, 부루퉁한 침묵, 쾅하고 닫혀버리는 문, 평상시의 부주의하고 잔인한 행위 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기가 쉽지 않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은 다른 사람에게서 구할 수 없는 답을 준다. 일반 사회가 점잔을 빼느라 탐험하기 꺼려 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어쩌면 이것을 문학의 요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권위 있는 책들을 보면 이 저자는 어떻게 우리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 수 있었을까 하며 위안과 감사를 느끼고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견딜 만한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감각은 사회와 예술의 침묵에 약해지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커플들에 비해 우리 커플이 훨씬 나쁜 일들을 겪는다고 상상한다. 불행할 뿐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 대단히 드물고 기형적인 형태의 것이라 착각한다.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생략) 두 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생략) 조금 전까지 그들 눈에 크게만 보였던 갈등이 사실은 우주의 질서 안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이 풍경이 입증하는 영겁의 시간과 비교했을 때에는 무와 다름없다는 것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토라짐에 대하여>
"라비 씨, 어디서 일하세요?" 머리가 묻는다. 그는 턱수염을 기른 퉁명스러운 사내로 석유업계에서 일하고 있으며 대학 시절 한 때 커스틴을 흠모한 적이 있다.
"도시 디자인 회사에서 일해요." 라비는 마치 자신이 여자아이처럼 느껴진다. 더 강한 남성이 있는 자리에서는 가끔 그렇다.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소통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연애에서 달변가조차 파트너가 자신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할라치면 본능에 따라 함구하는 쪽으로 기운다. 무언의 정확한 독심술이 파트너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진실한 징표로 느껴진다.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때만이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애처로운 역설은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토라진 사람은 키 180센티미터에 성인의 직업을 견뎌내고 있을지라도,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리보다 어리게 여기는 것을 윗사람 행세로 보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ㅡ그리고 용서해주는ㅡ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
<섹스와 검열>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이함'과 '정상'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 차이는 언제나처럼 확고하며, 사랑과 섹스의 규범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을러서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벼르고 있다. 요즘은 짧은 반바지를 입거나 배꼽을 노출하거나 동성과 결혼하거나 재미로 포르노를 좀 보는 것도 '정상'으로 간주되지만,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적이어야 하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 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이 근본 원칙에 반기를 들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사람을 낙담시키고 혹독하며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일축될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변태라고 말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않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수용 가능하다는 대단히 가치 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ㅡ적어도 한동안은ㅡ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고도 고백과 솔직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게끔 하는 용기의 매우 귀중한 원천을 이루어낸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 비결이다.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 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남편의 시나리오에 다음과 같은 말로 대응할 수도 있었다. "당신의 그 공상은 생소한데다 솔직히 말하면 좀 역하기도 해. 그래도 그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 내가 상대적으로 편안한 것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처하는 내 능력이 더 중요하니까. (생략) 가끔 당신의 생각이 아무리 나를 괴롭힌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당신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그래서 당신 마음속 기이한 구석구석들을 알고 싶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싶어. 당신이 바라는 모든 일을 하거나 당신이 바라는 모든 존재가 되진 못할 거야.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서로 용기 있게 얘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는 있다고 믿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침묵과 거짓말인데, 그건 사랑의 진짜 적이잖아."
혹은 정반대로, 그녀는 불쾌해하는 자신의 태도 뒤에 항상 깔려 있는 심리적 취약성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뭐든 다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에게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토넬라에 대한 당신의 판타지가 정말로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야. 그저ㅡ언제나ㅡ다른 사람을 상상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것뿐이야.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나 혼자서 당신을 만족시키는 거야."
결국 라비는 말하지 않았고 커스틴은 듣지 않았다. 대신에 두 사람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함께 저녁을 잘 보냈다. 그러나 그들 관계의 엔진실에는 경고 등이 켜진 뒤였다.
우리가 파트너로부터 두렵거나 충격적이거나 구역질 나는 말을 거의 듣지 않을 때가 바로 걱정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다. 친절해서든 사랑을 잃을까 애절하게 두려워해서든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파트너가 달콤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상상을 은폐하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희망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보에 귀를 닫아버렸고 그럼으로써 그 희망이 더욱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감정 전이>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나 말이 한쪽으로부터 썩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온갖 짜증과 불안, 성마름, 냉랭함, 공황, 비난 등이다. 당하는 사람은 당황한다. 따지고 보면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요구하거나 싱크대에 설거짓거리 한두 개를 남겨두거나 상대방을 이용해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겨우 몇 분 지체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특이하고도 다소 과장된 반응이 나올까?이는 눈앞의 사실들만 가지고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현재 시나리오의 일부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동력을 얻은 듯하고, 특정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오래전에 형성된 행동 양식이 잠재의식 속에서 다시 떠올라 본인도 모르게 나타나는 듯하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과민 반응을 하는 사람은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ㅡ전혀 당해 마땅하지 않은 사람ㅡ에게 '전이'시키는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자신이 어느 시대에 속해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에 늘 능통하지는 않다. 과거에 강도를 당한 사람이 침대 곁에 총을 두고 자다가 바스락 소리만 나도 깜짝 놀라 깨는 것처럼, 마음은 다소 쉽게 비약을 한다.
곁에 있는 연인에게 더욱 안 좋은 소식은 한참 전이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차분히 설명하는 것은 고사하고 쉽게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반응이 상황에 완전히 적절하다고 느낄 뿐이다. 반면에 그들의 파트너는 상당히 다르고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결론, 상대가 유난히 이상하고 어쩌면 약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녀의 반응은 느끼지 않는 것이다. (생략) 운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강인함, 결국 눈물을 멈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녀에겐 작은 슬픔이라도 느끼는 것 자체가 사치다. 그녀는 다 부서지고 나면 다시 조각들을 어떻게 짜 맞추어야 할지 영영 모를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럴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곱 살의 어린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상처를 마비시킨다.
우리는 의식에서 거의 지워져버린 위기들이 오래전에 만들어놓은 대본에 따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져 폐물이 된 논리에 따르고,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밝히지 못할 의미를 좇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고, 정확히 어떤 사람을 상대하고 있으며, 앞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기에 약간 고달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전이에 말려들면 우리는 사랑이나 상황을 믿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불안에 빠져 즉시 과거가 지정해놓은 최악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과거의 혼란에 의거하여 지금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라하고 꽤 굴욕적인 일로 느껴진다. 우리가 우리의 파트너와 실망스러운 부모, 남편이 잠시 지체하는 것과 아버지의 영원한 유기, 더러운 빨랫감 몇 개와 내전의 차이를 모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기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증과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나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모든 게 네 탓>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ㅡ그 결과로서, 또한 대단히 이상하고 객관적으로 비상식적이고 아주 부당한 방식으로ㅡ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번번이 우리에게 혼란과 실망, 좌절과 상처를 안긴다. 세상은 우리를 지체시키고, 창의적인 시도에 퇴짜를 놓고, 우리를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얼간이들에게 보상을 주고, 우리의 포부는 그 암울하고 무자비함에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언제나 불평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책임 있는 사람을 알아내기가 너무 어렵고, 누구 책임인지를 확실히 알 때에도 항의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해고를 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이다.
우리가 파트너에게 부당한 요구들을 하고 그 곁에서 매우 부조리해지는 까닭은 우리 내면의 불명료한 부분을 이해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고통을 많이 해소시켜주는 누군가가 또한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고 감탄했던 어린 아이가 수십 년 뒤 어른이 되어 그때의 경외감에 별난 경의를 표하듯 상대방의 능력을 과장하는 것이다.
<가르치기와 배우기>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개념은 건방지고 부적합하고 몹시 해롭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또는 그녀과 변화하기 바란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진실한 사랑은 파트너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애롭고자 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헌신이 있기에 사랑의 처음 몇 달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갓 시작한 관계 안에서 우리의 취약성은 관대하게 다뤄진다. 수줍음, 서투름, 혼란은 빈정거림이나 불평을 낳기보다는 (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듯이)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까다로운 면들도 오로지 측은지심이란 필터를 통해 해석된다.
이런 순간들로부터 아름답지만 험난하고 무모하기까지 한 신념이 발생한다.
제대로 사랑받으면 반드시 나의 모든 면을 승인받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학생을 가르칠 때에는 최고의 배려와 인내만이 효과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절대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고, 특별한 기지를 발휘해야 하고, 수업을 할 때마다 깊이 스며들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하고, 한 번 신중하게 부정적 평가를 끼워 넣기 위해 최소한 열 번 칭찬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차분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교사의 차분함을 가장 확실히 보장하는 것은 수업의 성패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이다. 침착한 교사도 당연히 수업이 잘되길 바라지만, 고집 센 학생이 가령 삼각함수에서 낙제를 한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그 학생의 문제다. 화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학생들이 교사의 삶을 크게 좌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교사의 성실성을 지배하지 못하고, 교사의 자족감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도 아니다.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매끄럽고 성공적인 교수법의 필수적인 면모다.
하지만 차분함은 항상 사랑이라는 교실 밖에서 서성인다.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때의 '학생'은 단지 잠시 잠깐의 책임이 아니라, 평생을 건 약속이다. 실패하면 존재가 파탄이 난다. 그러니 우리가 자제심을 잃고ㅡ충고하는 행위의 정당성이나 고결함을 스스로 믿지 못함을 암시하는ㅡ서툴고 경솔한 말을 내뱉기 쉬운 것도 당연하다.
목표했던 바와 반대되는 결과에 이른다 해도 마찬가지다. 굴욕, 분노, 위협의 수준을 높여 개인의 발전을 앞당긴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꺾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신랄한 모욕을 감당한 결과로 더 이성적이 되거나 자신의 성격을 더 깊이 통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성격의 고질적인 측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따뜻하게 접근한다기보다 우리의 천성을 야멸치고 분별없이 공격하는 것만 같은 제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방어적이 되고 과민해질 수밖에 없다.
혹독한 수업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교사가 단지 미쳤거나 성질이 나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신들은 논리상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기댈 여지를 준다.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판정을 들으면, 우리는 파트너가 악랄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이나마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위안을 얻는다.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 친구 및 가족들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성숙함이란 낭만적 사랑이 사랑을 주기보다는 찾기를,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기를 추구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 편협하고 다소 인색한 감정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그들의 철저한 의존성,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ㅡ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랑이란 말은 갈수록 부정적 의미들을 내포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자기충족에 빠진 문화는 민족과 타인의 부름에 응하는 행동을 쉽게 등차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고 위로해주는 능력에 대한 보답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ㅡ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ㅡ어떤 보답고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 자율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ㅡ문자 그대로ㅡ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또한 남의 종이 되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것을 배운다. 나 자신의 외곡되고 만족을 모르는 본성에 끊임없이 응해야 하는 피곤한 의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부여받았다는 위안과 특권을 알게 된다.
아이는 어른에게 사랑의 다른 측면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수반한다는 점이다.부모는 울음, 발길질, 슬픔, 화가 진정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해야 한다. 이 해석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평범한 성인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해석 양상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은 자애심이다. 부모는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괴로워하고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단지 아이를 찌르고 있는 핀을 확인하고 제거해주면 아이는 즉시 타고난 천진함을 회복할 것이라고. 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심술궂거나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한다. 아이가 깨물 때 우리는 아이가 틀림없이 겁을 먹었거나 순간적으로 골이 났을 거라 생각한다. 또한 배고픔. 소화장애, 수면 부족이 기분에 서서히 미칠 수 있는 영향도 잘 알아본다.만일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인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사랑에 관해 또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달려 있는 그 존재 주변으로 어떠한 책임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할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힘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엉뚱하거나 우발적인 행동, 불안이나 순간적인 노염에 겁에 질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차적인 반사 행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야만인이 크리스털 잔을 쥘 때에는 반드시 가볍게 쥐려고 해야지, 자칫하면 그 우람한 손에 잔이 마른 낙엽처럼 부서질 수 있다.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란 쉽지 않은 선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날은 위해서다.
성인이 되어 맨 처음 관계를 형성할 때 유년기에 우리가 경험했던 자애롭고 이타적인 사랑을 찾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놀랍지 않다. 또한 그런 사랑을 찾기가 극히 어렵고, 우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아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나중에는 극도로 괴로워해도 이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남들에게 분노하거나 비난을 퍼붓기도 하고, 발작적으로 한 관계에서 다른 관계로 갈아타기도 하며, 깊이가 없다고 한쪽 성 전체를 탓하기도 한다. 우리가 비현실적인 탐색을 멈추고 성숙한 초연함 같은 것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 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완벽한 사랑을 요구하고 언제나 부재하는 많은 것들에 주목하기를 멈추는 것을 깨닫고, 그 대신 보상받을 가능성을 맹렬히 계산하지 않고 앞뒤 재는 것을 망각한 채 사랑을 (아마도 자그마한 사랑에게) 나누어주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랑스러움>
어린애 같은 건 어린애들만이 아니다. 어른들 역시ㅡ허세의 이면에는ㅡ장난스럽고, 어리석고, 엉뚱하고, 상처를 잘 받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겁에 질리고, 가엾고, 위로와 용서를 찾는 면이 있다.
우리는 아이에게서 사랑스러움과 여림을 보고 그에 따라 도움과 위안을 주는데 능통하다. 우리는 아이들 곁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최악의 충동, 복수심과 분노를 밀쳐놓을 줄 안다. 기대와 요구를 평상시보다 약간 낮게 재조정할 수도 있다. 화를 늦추고, 발현되지 않은 잠재성을 더 많이 의식하는 것이다. 이상하고 애석하게도 동료들에게는 보여주기 꺼려지는 정도의 친절함을 아이들에게는 쉽게 베푼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린애 같은 면에 조금 더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면 더욱 멋질 것이다.
<사랑의 한계>
아이의 시간을 아껴줄 수 있다면, 힘들고 긴 경험이 있어야 축적되는 통찰을 단번에 전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성급한 결론을 향한 뿌리 깊은 저항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우리는 인류의 백치 같은 행위들이 담긴 목록을 죄다 재조사하는 일에 관심을 타고나서 걸음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이 이미 고생하며 광범위하게 기록해놓은 것을 직접 알아내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낭만주의 전통은 양육의 법칙들을 의심하면서 아이들의 사랑스럽고 선한 본성에 거짓되고 위선적인 장식을 불필요하게 드리우는 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실제 아이들을 더 자세히 알고 나면 점차 마음이 바뀌어, 예절이 야만성에 가까운 어떤 상존하는 위험을 막아주는 게 명백하다는 견해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예절이 반드시 냉정하고 가학적인 도구일 필요는 없다. 그저 저녁 식사가 항상 난장판이 되지 않게끔 짐승 같은 면을 계속 단속하도록 가르치는 방법일 뿐이다.
부모의 다정함만으로 충분하다면 인류는 활기를 잃고 머지않아 사멸할 것이다. 인류의 생존은 마침내 넌더리를 내고 사랑과 흥분을 선사할 더 만족스러운 원천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을 채 세상으로 나아갈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세대와 세대를 잇는 가족의 존속은 젊은 세대가 마침내 위 세대에게 인내심을 잃어버리는 순간들에 의존한다. 그들 네 명이 앞으로 25년 뒤에도 서로 팔다리를 얽은 채 누워있고 싶어 한다면 이는 비극일 것이다. 에스터와 윌리엄이 집을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려면 라비와 커스틴이 우스꽝스럽고 구식이고 따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해야만 한다.라비와 커스틴은 독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너무 엄격하거나 소원하거나 위협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들이 판단하기가 어렵고 무서워 보이거나 그다지 곁에 있어주지 않는 엄마나 아빠에게 집착하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잘 안다. 그런 부모는 반응을 잘하고 안정적인 부모들보다 아이들을 더 바짝 끌어당긴다. 라비와 커스틴은 아이들이 평생 집착하게 되는 자기중심적이고 변덕스러운 부모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그래서 자연스럽고, 가까이 하기 쉬우며, 때로는 과장되게 바보처럼 굴려고 마음을 쓴다. 그들은 때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한쪽에 자신들을 깔끔하게 세워두고 자신들의 삶에 오를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만만한 사람이고자 한다. 또한 그들의 사랑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만큼 그 사랑의 훌륭함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낀다.
<섹스와 양육>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의 두려움과 불안정함을 관계가 시작될 때 한 번만 경험하고, 일단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공동 명의로 대출을 받고, 집을 구입하고, 자녀를 몇 낳고, 유언장에 서로의 이름을 넣는 등으로 명시적인 약속을 맺은 후에는 불안이 사그라질 거라고들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간격을 극복하고 우리가 필요한 존재라는 보증을 흭득하는 일은 단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틈이 생길 때마다ㅡ외박, 바쁜 기간, 야근ㅡ되풀이되게 되어 있다. 모든 막간에는 상대가 여전히 나를 원하는가라는 의문을 매번 새롭게 되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보증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을 수치스럽지 않고 기분 좋게 인정 할 만한 방벙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여러 해를 함꼐 보낸 후에도 욕구의 증거를 요구하려면 두려움이 가로막는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끔찍한 문제가 덧붙는다. 이제는 그 어떤 불안도 합당하게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재보증 같은 건 아예 생각지 않는 척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심지어 우리는 기이하게도 외도라는 배신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척 체면치레하려는 시도일 뿐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정말 마음을 쓰는 사람, 필요를 드러내기 두렵고 은연중에 우리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확보해놓고 비밀스레 보내는 고달픈 증거인 것이다.재보증을 승인해달라는 요구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미숙하거나 약한 사람들에게만 내려지는 저주가 아니다. 불안은 안녕을 뜻하는 별난 징후일 수도 있다. 불안은 우리가 상대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것, 일이 정말로 나쁘게 돌아갈 수 있음을 잘 알 정도로 우리가 여전히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신경을 쓸 만큼 충분히 애정을 쏟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활한 성교는 우리의 낭만적인 파트너와 그 아래에 놓인 부모의 전형을 과도하리만치 생생하게 연관 짓는 일을 차단하는 데에 달려 있다. 잠깐 동안은 성적 느낌이 애정의 느낌과 쓸데없이 혼동되지 안헤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는 아이들이 생기고 우리의 파트너에게 특별히 부모다운 면이 노골적으로 요구되는 순간 더욱 까다로워진다. 우리는 의식 차원에서는 우리의 파트너와 성적 금기의 대상인 부모가 물론 다른 사람이고, 그들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사람이며, 처음 몇 달 동안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행위를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상대의 성적 자아가 하루종일 걸치고 있어야 하는 양육자로서의 정체성 밑에서 점점 희미해짐에 따라 갈수록 더 큰 압박을 받게 된다. 그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 자신조차 실수로 가끔 파트너에게 쓰는) 바로 그 순결하고도 활기찬 명칭, '엄마' '아빠'다.
성적 흥분은 결국 옷을 벗은 상태와 거의 무관한 듯하다. 그 동력은 열렬히 열망하고, 전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기적적으로 접근 가능해진 상대를 소유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가능성에서 나온다. 성적 흥분은 고립과 단절이 만연한 세계에서 그 손목, 허벅지, 귓볼과 목덜미가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당도했다는 데 대한 거의 불신에 가까운 경탄의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기쁨에 차 만지고, 채우고, 드러내고, 벗기며 우리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의 연인은 얼마나 멀고 독립적으로 느껴졌는지 계속 몇 시간마다 확인하고 싶다는 특수한 개념이다. 성적 욕구는 확고히 친밀해지고자 하는 염원에서ㅗ 나오며, 그렇기에 사전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고, 그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매우 독특한 기쁨이자 안도감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깊이 의존하고 있는 파트너에게 섹스를 요구할 때 창피하고 자신이 과도하게 까발려진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재정 문제와 아이들 등하교시키는 문제, 휴일에 어디로 갈지, 어떤 의자를 살지에 대한 팽팽한 토론들을 감안하면 이는 너무 멀리 나간 친밀감일 수 있다. 특정한 복장을 입어달라거나, 내가 갈망하는 음험한 시나리오에 참여해달라거나, 특별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달라는 등 파트너에게 나의 성적 욕구를 관대하게 봐달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간청하는 입장으로 격하되거나 어떤 페티시 이름에데 소중한 감정적 자본을 다 태워버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부부 생활에서 매일 벌어지는 타협과 줄다리기가 요구하듯, 평정심과 권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 우리를 바보나 타락한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판타지를 맡기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대신 완전한 타인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여기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낮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것은 낭만주의 이념에서는 논리를 흭득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 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무하게 된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공상을 확실한 현실로 바꿀 수 없는 삶을 추구하는 대신에 판타지를 지어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는 대개 다수의 모순된 소망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물이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모면시킨다.
<빨래의 위신>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는 고통의 평등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괴로움의 복용량을 확실히 똑같게 측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 당사자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더 저주받았으며 파트너는 이를 인정하고 속죄하지도 않는다는 진지하면서도 경쟁적인 확신에 빠질 유혹이 상존한다.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4부 외도
<바람피우는 남자>
중년의 유혹자가 보이는 솔직함이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이다.
자신만의 매력에 의구심을 품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인지를 계속 알아내야만 하는 애처롭도록 불안정한 남자들이 어떤 위험한 짓을 벌이는가.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들이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찬성론>
그는 어린 나이부터 사회로부터 주입받은 생각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주 큰 잘못이다. 그는 신문에서 쓰는 말로, 쓰레기, 바람둥이, 사기꾼, 배신자다. 그럼에도 한편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정확한 성격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걱정이 들긴 해도 주의하기 위해서이고 부차적인 이유에서다. 내일이 잘 지나가고 하루하루, 한 해 한 해도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내심으로는 베를린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 자체가 정말로 나쁜 일이라고는 믿지 못한다. 혹시 이게 바람둥이의 영원한 변명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돌이켜보면 그들 결혼의 여정속에서 라비 칸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많았다. 그녀는 수입이 단 몇 달이라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건축으로 복귀하고 싶은 그의 소망에 강력히 반대했다. 라비의 친구들이 '따분하다'는 이유로 그를 많은 친구들과 단절시켰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그를 희생시키며 농담하는 버릇이 있다. 그녀 직장에서 일이 잘못되면 그가 짊어져야 했던 비난도,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한 모든 면에서 피 말라 하는 그녀의 불안도 그는 예상 못 했다. 이는 그가 스스로에게 말한 이야기들이며, 그가 스스로 경력 문제에서 망설이지는 않았는지 또는 그의 친구들이 실제로 스물두 살 때만큼 그렇게 재미있는 녀석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보다 더 단순한 추론 방식에 의존한다.
라비는 여전히 그 30분이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지, 그 자체로 그를 지옥 불에 떨어뜨려 마땅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당장 분노를 자극하는 힘은 비교적 약해도 귓전으로 흘려듣고, 용서할 줄 모르고, 부당하게 비난하고, 그를 무심결에 비하하는 버릇들과 한참 동안 무관심을 보이는 차가운 태도까지, 그녀의 습관에도 (덜 두드러져 보여도) 그에 못지않은 쓰라린 배신이 존재한다. 이 대장을 합산하고 싶진 않지만, 다들 깊은 상처를 준다고 하는 단 한 번의 행위로 그가 그렇게 쉽고 명확하게 문제의 원흉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만약 사랑을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라 정의한다면, 자주 시달리고 잔뜩 주눅이 든 남편에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가 거의 모르는 사람과 10분 동안 구강성교를 즐기고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결코 사랑이 아니라 속 좁고 위선적인 소유욕, 다시 말해 상대방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오직 그 경우에만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욕망에 불과하다.
라비는 이렇게 묻는다. 다른 하나의 존재ㅡ최고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공동 양육자이자, 공동 운전기사이자 사업 파트너가 될 누군가ㅡ에게서 모든 것을 구하려는 소망에는 유아적인 이상주의가 담겨 있지 않은가. 이런 실망과 분노를 만들어내는 개념이라니. 이 때문에 완벽히 즐거운 결혼 생활을 했을 수백만 쌍이 주기적으로 파탄에 이르는 거 아닌가.또 다른 사람에게 가끔 욕망을 느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쾌락과 자유가 넘치는 환경에서 자라고, 나이트클럽과 여름철 공원의 땀과 흥분을 경험하고, 갈망과 욕망으로 가득찬 음악을 들으며 살던 사람이 종이 한 장에 서명을 하는 즉시 외부로 향한 성적 관심을 포기할 거라고 어느 누가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신이나 더 높은 계율에 따라서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큰 잘못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가정에 근거해서?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그래서 어떤 절박한 호기심으로 단 한 명의 동시대인보다 더 많은 독특한 관능적 개성을 탐험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유혹을 느끼는 데 실패한 것, 사실은 '잘못된 것' 아닐까? (생략)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에서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반대론>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기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교훈이다. 잭이 네 소방차를 자고 놀게 해주렴, 그 아이가 한 번 갖고 논다고 해서 남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화가 난다고 바닥을 뒹굴면서 네 작은 주먹으로 카펫을 내리치지 마라, 네 여동생이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듯 너도 아빠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은 케이크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이 줄어들진 않는다. 사랑을 집안에 아기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계속 커진다...나중에 이 주장은 섹스를 둘러싸고 훨씬 더 합당해진다. 파트너가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떠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낯선 사람의 제한된 부위에 비볐다고 왜 파트너를 나쁘게 생각하겠는가? 어쨋든 그들이 모르는 사람과 체스를 두거나 명상 그룹에서 촛불을 켜놓고 사는 얘기를 친밀하게 주고받는다고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질투는 그 우둔함 때문에 우리가 설교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군침 도는 표적이 된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게 좋다. 대단히 볼썽사납고 어리석은 짓이긴 해도 일어나는 질투를 우리가 피해 가지는 못한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그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과거에 누군가를 어쩌다 배신하게 되었을 때 가졌을 상당히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말도 안 되지만 말이다.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타인들의 신의로부터 무의식적인 수혜를 받고 있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은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우리의 낭만적인 삶은 슬프고 불완전하게 끝날 운명이다. 우리가 강력히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두 가지 근본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곤란하게도 우리는 유토피아적으로 이 분열에 수긍하기를 거부하고, 대가 없이 어떻게든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순진하게 소망한다. 자유사상가가 모험을 추구하며 사는 동시에 외로움과 혼란을 피할 수 있고, 결혼한 낭만주의자들이 섹스와 애정, 열정과 일상을 통합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목을 가누는 방식은 실제로 그 사람이 자신 있고, 심술궂고, 예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눈이 암시하는 유머와 지성, 그의 입이 넌지시 말하는 상냥함을 실제로 지니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 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베를린에서 그를 이끈 것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새롭지만 제한적으로 진입해 결혼 생활의 문제를 회피해보겠다는 갑작스러운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깨닫게 되었듯이, 그런 희망은 허틍 감상에 불과했고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패배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잔인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그는 어느 쪽의 손실도 가볍게 보지 않는다. 로렌에게 작별을 고한다면 결혼 생활을 지키겠지만 그 자신의 애정과 원기의 중요한 원천을 포기하게 된다. 바람둥이도 성실한 배우자도 일을 바로잡는 게 아니다. 이 문제엔 방도가 없다. 그는 주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에 흐느껴 운다. 그가 잃어버린 것, 그가 위험에 빠뜨린 것, 그의 선택들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돌아왔는지를 생각하면서, 열쇠가 돌아가고 커스틴이 주방에 들어오는 사이 그는 겨우 마음을 추스린다.
다음 몇 주는 안도와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흘러가게 된다.
아내가 두 번에 걸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두 번째 물음에 그녀가 다시는 물어보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태도를 조절한다.
물론 우울감은 치료를 요하는 병이 아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이 각본에는 실망이 적혀 있었다는 확신과 마주할 때 유발되는 일종의 지적 슬픔이다.
우리만 선발된 게 아니다. 그 누구와, 심지어 천생의 배필과 결혼을 해도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켜 얻은 다양한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혼인 서약은 완전히 새롭게 쓰일 것이다. 제단에 서서 부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행위가 우리 인생에서 최악의 결정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공황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것도 약속합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구제불능, 우리는 정신이 나간 종입니다."
부부는 하객 앞에서 마지막 문장을 엄숙하게 따라 한 뒤 다음과 같이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비극에 속한다고 확신합니다. 특이하지만 온전하고 타협 불가의 이 제약이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질투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후회의 유일한 저장고로 삼을 것이며, 돈후아니즘의 삶으로 그 후회를 분산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불행에 이를 여러 경우를 조사했고 우리 자신을 결속시킬 사람으로 서로를 선택했습니다."
배신을 당한 배우자는 더 이상 제멋대로 상대방이 자신 하나로 만족할 줄 알았다고 불만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더 신랄하고 정정당당하게 이렇게 외칠 수 있다. "나는 힘들게 성사된 우리의 결혼이 상징하는 이 특별한 타협과 불행에 당신이 충성을 다할 거라 믿고 있었어."
이럴 경우 외도는 둘만의 기쁨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의 실망을 용기와 자제심으로 이겨내겠다는 상호 서약을 배신한 것이 된다.
<비밀>
어떤 관계도 온 마음을 다해 친밀하고자 하는 헌신 없이는 첫걸음을 떼지 못 한다. 그러나 사랑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을 혼자 간직할 줄 모른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면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것으로서의 억제는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 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또한 파트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간밤에 어디에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의심이 들어도(우리의 관계가 훌륭하다면 주기적으로 그럴 것이다). 날카롭고 무자비한 심문자처럼 굴지 않는 편이 좋다. 그저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라비에겐 베를린 사건에 대해 영원히 거짓말을 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 진실을 말하면 그로 인해 훨씬 더 큰 거짓, 즉 그가 더 이상 커스틴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그가 더 이상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 발아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진실이 거짓보다 그들의 관계를 훨씬 더 왜곡할 수 있다.
외도의 여파로 라비는 결혼 생활의 목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관계자들의 감정에 잠깐씩 일어나는 그 모든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한 해 한 해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로서 말이다. 결혼 생활의 정당성은 감정보다 더 견고하고 지속적인 현상들, 즉 나중에 수정 불가한 최초의 약속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족에 대한 무관심을 타고난 자식들이라는 존재에 있다.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의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기준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 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 생활이 둔화되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라비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뒤죽박죽이고 종잡을 수 없다는 걸 감지할수록 제도로서의 결혼이라는 관념에 더욱더 공감한다. 콘퍼런스에서 그는 매력적인 여자를 염탐하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까 고민했을지 몰라도 결국 이틀 후에는 커스틴이 없으면 죽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혹은 계속 비가 오는 주말에는 아이들이 빨리 커서 그가 평온하게 잡지를 읽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그를 혼자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루 지나 사무실에서는 회의가 길어져 퇴근 후 아이들을 재우는 시간이 한 시간 늦어질 것 같으면 비통함에 가슴이 조여오곤 했다.
그런 변덕스러움을 배경에 놓자 외교적 기술, 즉 항상 생각한 대로 말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절제력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눈에 들어온다.
라비는 모순되고 감정적이며 호르몬에 이끌리는 힘들이 끊임없이 그를 말도 안 되고 끝 간 데 없는 수백 개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이 모든 힘을 일일이 존중한다면 일관성 있는 삶을 영위할 기회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잠시라도 스스로 불만족스럽거나 남에게 거짓되어 보이는 상황을 견딜 수 있지 않은 한 절대로 더 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자신의 감정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 언제까지나 삶의 길잡이 별로 삼는 것은 라비에겐 무리다. 그는 화학적 혼돈의 존재로, 잠깐씩 이성이 활동할 때 고수할 수 있는 기본 원칙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외적 상황이 가끔은 자신의 가슴이 경험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안다. 아마도 그가 바른 궤도의 들어섰다는 신호이리라.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애착 이론>
부부의 어려운 역학 관계는 섹스까지 확장된다. 커스틴이 피곤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라비는 금세, 너무 금세 의기소침해진다. 그의 마음은 곧 자신이 역겹다는 강력한 서술에 집착한다. 이 자기혐오는 커스틴을 만나기 오래전에 형성된 것으로, 그 핵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비록 그러한 감정을 유발한 사람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섹스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저녁은 보통 다음 날 라비에게서 빈정거림이나 상처가 되는 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변모하고, 그렇게 해서 커스틴이 뒤로 물러나는 데 (말없이) 박차를 가하게끔 한다. 며칠 동안 담을 쌓고 지낸 뒤 라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커스틴의 차갑고 섬뜩한 태도를 비난한다.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자주 속을 뒤집어놓는 걸 보면 즐기고 있는게 분명하다는 의구심이 든다고 응수한다. 그녀는 남들이 실망을 안길 때(남이란 존재는 대체로 그런다) 숨어들어가는 슬프지만 이상하게도 안락하고 익숙한 머릿속 공간으로 후퇴하여 음악과 책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녀는 자기방어와 보호의 달인이며, 살면서 오랫동안 그렇게 훈련을 쌓아왔다.
그가 느껴온 실망을 커스틴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결혼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리라.
이 싸움의 핵심에는 신뢰의 문제가 있다. 두 사람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덕목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 부당한 실망을 극복해야 했고 그 결과 감정의 노출이 어색하기만 한 대단히 방어적인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공격 전략과 요새 구축에 능통하지만, 경계를 늦추고 자신의 약점과 슬픔을 인정할 때 오는 불안을 견디는 일에는 대단히 서툴다. 휴전협정을 맺은 후 일반적인 삶에 지독히 적응을 못하는 전사처럼 말이다.
라비는 불안해하면서 공격하고, 커스틴은 회피하면서 퇴각한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두려워한다. 둘 다 상처를 진심으로 인정하거나 느끼거나 또는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상처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불쾌하게 한 사람을 계속 믿는 데 필요한 비축된 자신감이 없다. 사실은 '화가 났거나' '냉담한' 게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가슴 아프고 애정을 받아 마땅한 '상처받은' 상태임을 분명히 하려면 상대방을 충분히 믿어야만 할 텐데도 말이다. 그들은 낭만적인 면에서 가장 필요한 선물, 즉 그들 자신의 취약점에 대한 안내서를 주고받지 못한다.
<성숙함을 향해>
불면증은 몇 주 계속되면 지옥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짧게, 가끔씩 하룻밤 정도 지새는 것은 반드시 치료를 요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오히려 중요한 정신적 문제에 도움이 되는 일종의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전해야 하는 중요한 통찰은 대개 밤이 되어야 찾아온다. 어둠이 내린 후에야 들리는 도시의 교회 종소리처럼.
불면증은 그가 낮 시간에 그 모든 까다로운 생각들을 애써 회피했던 데 대한 마음의 복수다.
일상의 삶은 현실적이고 비자기성찰적인 시각에 보상을 준다. 그 밖의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시간은 너무 없고 두려움은 너무 크다. 우리는 자기 보호 본능에 이끌려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받은 만큼 되갚아주고, 책임을 전가하고, 엉뚱한 질문을 삼가고, 우리가 나아가는 곳에 대한 달콤한 이미지에 붙박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독히 편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밤하늘에 별이 뜨고 동이 틀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가 더 이상 없는 드문 순간에야 우리는 보다 정직하고 덜 한정된 관점을 위해 우리의 자아를 풀어놓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낭만적인 사랑을 과하게 갈망하면서도 친절이나 소통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임을 알아본다. 솔직하게 행복을 좇는 것이 두려워 미리 실망하고 냉소하는 태도에 안주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 실패란 이런 것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침묵이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실패를 엄청난 재난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왔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실패는 사실 겁먹은 무위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든 것, 심지어 굴욕에도 익숙해진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 나쁘지 않게 보이는 습성이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분발심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천재의 몇몇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번의 실수로 갑자기 그렇게 된다. 상황이 몇 번만 꼬이거나 외부 압박을 어느 정도 받으면 그 역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가 자신을 제정신이라 여길 수 있게 하는 화학적 행운이란 부서지기 쉬우며, 인생이 제대로 시험해보기로 한다면 그 자신이 비극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그는 강하고 능력 있는 아내가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 곁에 있기에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몹시 쓰라리게 여길 때도 있었다. "불면증은 보기 안 좋아. 그냥 와서 자." 커스틴이 잠에서 꺠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이렇게만 말할 것이다. 그는 여러 번의 고통스러운 일화를 통해 그의 아름답고 지적인 아내가 위안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색한 게 아니다. 그게 남자들에 대한 그녀의 경험이고, 실망이 밀려들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방어 수단이었다. 단지 그녀가 힘든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에게 복수심과 분노의 대안이 생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스스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응은 냉소나 공격이 아니라,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그는 맥럴랜드 부인의 눈에서 호의가 비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안다. 처음에는 분했지만, 이제 부모 입장에서 공감이 간다. 그도 에스터의 남편을 고대하진 않으니 말이다. 어느 부모가 진심으로 허락하겠는가? 아이의 그 모든 필요에 18년 남짓을 맞춰주었는데, 어떻게 새롭고 만만찮은 사랑의 원천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길 바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진심으로 이 필수 불가결한 감정의 공중제비를 넘어, 내심 (또한 일련의 언짢다는 듯한 말을 통해서) 그들의 아이를 돌보는 복잡하고 독특한 임무에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손아귀에 아이가 잘못 들어가게 되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는 우월한 차원의 지식과 경험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첫발을 내디딘다. 부모는 한동안 놀랄 만큼 유능해 보인다. 과한 존경은 애틋하지만 대단히 문제적이기도 하다. 그들이 잘 모르고 우리를 어떤 곤란으로부터 전혀 구해주지 못하는 영역을 통해 그들에게 결점이 있고 때로 불친절하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갈 때, 그들이 그 비난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관대한 태도가 나타나기까지는 한참이 걸린다. 30대에 들어서일 수도 있고 임종을 지킬 때일 수도 있다. 허약하고 겁ㅈ을 먹은 그들의 새로운 모습은 심리적으로 언제나 옳았던 사실을 육체적인 방법으로 강력하게 드러낸다. 바로, 그들이 완전무결한 지혜와 도덕적 명확성보다는 불안, 두려움, 서툰 사랑, 무의식적 충동에 더 많이 좌우되는 불안하고 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의 단점이나 우리의 무수한 실망을 영원히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라비가 마침내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 때 좀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모든 인간이 그의 공감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온다.(생략)
그는 또한 자신에게 타인의 자애심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고서 관대해질 태세를 더욱더 잘 갖춘다. 남들은 원한을 품을 때 그는 상황을 고려하는 쪽에, 그리고 사악하고 나쁜 행동들에 드리운 일말의 덜 도덕적인 진실들에 더 관심을 보인다. 냉소는 너무 쉽고, 그래서 얻는 것이 없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사춘기에는 증오심마저 품었었는데 말이다. 야망을 펼칠 크고 영원한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작고 일시적인 것에서 기쁨을 얻다니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 자신이 영예와 강렬함을 원했다. 꽃에 붙들린다는 것은 위험한 체념의 상징이었다. 이제 그는 이해하기 시작한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겸양과 실망을 다룰 줄 아는 태도에서 나온다. 우리가 장미의 줄기나 블루벨 꽃잎에 감탄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무엇인가 영구적으로 망가져봐야 한다. 일단 더 큰 꿈들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타협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으면, 고요한 완벽과 즐거움을 간직한 이 자그마한 섬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다보게 된다.
성공의 전형들에 맞설 때 그의 삶은 깊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에 연연하는 것은 위대한 성취가 아님을 알게 된다. 씩씩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관대하고 희망적으로 보는 관점을 찾고 스스로에게 친구가 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겐 타인들 앞에서 의연함을 보여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그는 한밤중에 온욕을 한 뒤 밝은 불빛 아래서 자신의 몸을 살펴본다. 노화는 피곤해 보이는 것과 좀 비슷하지만, 잠을 아무리 자도 회복되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할 것이다. 올해의 이른바 못 나온 사진이 내년에는 잘 나온 사진이 된다. 자연의 친절한 속임수는 모든 일을 천천히 진행시켜 우리를 상대적으로 덜 놀라게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알았던 나이 많은 아저씨들처럼 언젠가는 그의 손에도 검버섯이 생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는 복잡하고 섬세하게 합쳐져 단지 잠깐 동안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와 조직들의 집합체다. 한 번 호되게 충돌하거나 추락하기만 하면 다시 무생물이 된다. 그의 진지한 계획들은 모두 모세관으로 이루어진 망가지기 쉬운 그물망을 통해 뇌로 꾸준히 흐르는 혈류 덕분이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작은 고장이라도 나면 이제 막 인생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깨달은 바는 즉시 소멸된다. 그는 우주의 영원함 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엔트로피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우연히 결집된 원자 무리이다. 문득 자신의 장기 어느 곳이 가장 먼저 망가질지 궁금해진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와 혼동하게 만든 방문객에 불과하다. 과거에 에든버러 시나 나무나 책처럼 자신을 지속적인 것이라 생각한 그는 그림자나 소리에 더 가깝다.
또한 그는 죽음이 아주 끔찍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시 분배되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뿐이라고, 오래전에 시작된 생명은 이내ㅡ그가 짐작하는 어느 순간에ㅡ그를 놓아주고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어두운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가는 길에 꽃 가게가 눈에 띈다. 분명 그 가게를 여러 번, 수도 없이 지나쳤을 테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면의 유리창에는 밝은 조명 아래 온갖 종류의 꽃들이 그득하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여자가 따뜻한 미소로 그를 반긴다. 그의 눈은 초봄 가장 먼저 피는 토종 꽃, 스노드롭에게 끌린다. 그는 여자의 두 손이 작은 다발을 만들어 얇은 흰색 종이로 싸는 것을 지켜본다.
"좋은 분께 선물할 건가 보죠?" 여자가 그에게 미소를 짓는다.
"아내에게 줄 겁니다." 그가 대답한다.
"운이 좋은 여자네요." 그녀가 꽃과 거스름돈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집에 돌아가면 이 일에서만큼은 꽃 가게 주인이 맞았음을 증명할 수 있길 바라본다.
<결혼할 준비가 되다>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결혼이 단지 그 이수 과정에 등록한 사람에게만 중요한 수업을 해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준비는 예식에 선행하기보다 대개 10~20년 후에야 갖춰지는 것이 정상이다.
라비는 자신이 단 한 번 결혼했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언어의 교묘함 덕분이라는 점을 알아본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 있어 사실상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은 이혼과 재혼을 겪어온 셈이다. 오직 한 사람과 말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집, 리넨으로 가득 채운 혼수, 벽난로 위에 진열된 자격증, 또는 소 몇 마리와 얼마만큼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그런 예였다.그런 뒤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이런 실질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금전을 따지고 계산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초점이 감정적 특질로 이동했다. 올바른 감정들, 그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 상대방이 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느낌, 다시는 상대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은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할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 옛 동창생, 인터넷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 등도 우리를 실망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삶의 현실은 우리의 모든 본성을 변형시킨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려 탓을 한다.
이렇게 위험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기 전에 그들을 깊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화를 내는지 즉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몇 해가 걸릴 수도 있다), 이론상 그 존재함은 처음부터 가정할 수 있다.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 일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재앙일 이유는 없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은 나의 외로운 내면을 이해하고, 나는 왜 하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미워하고, 상당히 특화된 성적 시나리오를 함께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있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은 철저히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대체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발을 못 맞추는 건 나머지 사람들이라고, 그렇지만 성숙은 자신의 광기를 감지하고, 적절한 때에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에 대해 당황스러워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대개 난감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한다.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이게 된다. 아이들은 마치 부모가 거의 항상 온정 어리고 기꺼운 마음을 유지하며 자발적으로 그들을 위로해주고 인도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견해는 사랑과 섹스가 한 줄로 맞춰지길 기대한다. 우리가 불만스러운 삶을 수용할 정도로 강해질 때 결혼할 준비를 적절히 갖췄다 할 것이다. 그러나 간통은 실현 가능한 해답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쪽도 간통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 깊이 단절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 단 한 번의 의미 없는 모험에도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반복적인 습성이 있다. 간통의 피해자는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낯선 이와 뒤엉켜 '배신'하는 동안에 그의 마음에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대로 알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여러 번 그들의 변명을 들을 수는 있지만 내심 한 가지만큼은 확신한다. 그들이 우리를 굴욕에 빠뜨리기로 작심을 한 것이며, 그들의 사랑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지위와 함께 남김없이 증발해버렸다고 말이다. 다른 어떤 결론을 주장한다면 파도와 싸우는 꼴이 된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이제 (평온한 날에는)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또한 다른 순간에는 최고의 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도 알리라 지레짐작하지 않고 우리의 제안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완벽한 경우에나 서로 가르친다는 개념에 애정이 없다고 일축해버릴 수 있다.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성은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러브스토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실제 관계는 거의 다 하자가 있고 불만족스럽다. 많은 경우 별거와 이혼이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를 자주 잘못 인도하는 미적 매체들이 부과한 기대에 따라 우리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은 삶이 아닌 예술에 있다.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정확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 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는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미래>
커스틴의 생일에 맞춰 라비는 하일랜드에 있는 대단히 호화스럽고 비싼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계획한다. 부부는 아이들을 포트윌리엄에 있는 커스틴의 사촌 집에 내려주고 19세기의 성으로 차를 몬다.
젊은 벨보이가 짐을 내려놓자 그들은 서로 곁에 있음에 어색함을 느낀다. 아이들이나 앞으로 24시간 동안 해야 할 특별한 일 없이 호텔 방에 단둘이 있어보기는 오랜만, 참으로 오랜만이다.
마치 정부를 만난 느낌이 들고 그들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에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 널찍하고 천장이 높은 그 방의 위엄과 고요함에 고양되어 그들은 더 격식을 갖추고 정중해진다. 커스틴이 낯선 배려심을 보이며 룸서비스 메뉴에서 어떤 차를 주문하고 싶은지 라비에게 묻고, 라비는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받아준다.
이 묘책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덜 물리고 익숙하지 않은 눈으로 오래 함께한 사람을 새롭게 보기 위함이다.
그는 와인의 심리적, 도덕적 역할을 감지한다. 와인이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을 감정과 의사소통의 통로과 활짝 열린다. 단지 곤경에서 대충 벗어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은 부당하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감정들에도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취하는 건 오랫동안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녀는 칭찬받는 일에 서툴다. 하지만 라비는 이제 그 사실을 알고, 그 모든 것을 낳은 원인ㅡ과거에는 아주 기분이 나빳지만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 자립심과 과묵함ㅡ을 안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의 눈이 얼마나 현명해 보이는지, 그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그리고 모든 면에서 그가 얼마나 미안해하는지를 이어나간다. 그러자 그녀는 평소처럼 금욕적인 소견으로 그의 말에 퇴짜를 놓는 대신에, 따뜻하고 조용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 말하고 그의 손을 꼭 잡는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핑 돌려는 찰나에 웨이터가 다가와 부인꼐서 더 필요하신 게 없느냐고 물어본다. 그녀는 살짝 흐려진 발음으로 "사랑이 조금 더 필요해요"라고 대답한 후 더는 말이 없다.
그녀도 술기운이 올라 용기가 생긴다. 약해지기 위한 용기다. 마음에서 둑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그를 거부할 만큼 거부해왔다. 언젠가 그랬듯이 다시 그에게 그녀 자신을 주고 싶다. 그녀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견뎌낼 수 있음을 안다. 소녀이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제는 자신의 어머니를 톰나허리치 묘지의 진흙 속에 묻고 두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여인이다. 지금까지 사내아이를 키워왔으니, 남자들이 여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전에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를 알고 있다. 남성의 고약함이 대개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새롭게 다진 강한 위치에서 그녀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그들의 약점에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짐을 느낀다.
"미안해요, 스포프 씨. 내가 항상 당신이 원하던 사람은 못 되어줬어."
그가 그녀의 드러난 팔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훌륭했지."
그들은 함께 이뤄온 것에 황홀한 충성심을 느낀다. 다투게 되고 화나고 웃음 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것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기까지 온 것,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노력하고 그때마다 새로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결혼 생활을 지켜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여기까지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많기도 많았을 텐데, 이별이 자연스럽고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을텐데 말이다. 결혼 생활에 머무른 것은 기이하고도 신기한 업적이며 두 사람은 그들만의 전투로 단련된 상흔 입은 사랑에 충성심을 느낀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라비는 그들의 아이들이 그녀의 배에 남긴 흔적들을 소중히 어루만지고, 아이들이 악의 없고 원초적인 이기심으로 그녀를 얼마나 헤집고 상처를 주고 소진시켰는지를 애틋하게 되새겨본다. 그녀는 그를 향해 새로이 일렁이는 부드러움을 감지한다.
그들은 풀밭에 베이스캠프를 만든다. 에스터는 부츠를 벗고 개천을 따라 달린다. 몇 년 있으면 여인이 되어 이야기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윌리엄은 개미집을 찾기 위해 개미들의 행렬을 추적한다.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다. 라비는 날개를 편 독수리처럼 땅 위에 누워 푸르름을 가로지르는 작고 평화로운 구름의 경로를 좇는다.
라비는 이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들을 부른 뒤, 바위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사진 속으로 달려간다.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한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고, 커스틴은 그가 부주의하게 저지른 일에 성마르게 한 마디 내뱉고, 그는 직장에서 직면할 힘든 문제들을 떠올리고는 두렵고 지루하고 망친 것 같고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이 사진의 최종 운명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미래에 이 사진이 어떻게 읽힐지, 보는 사람이 그들의 눈에서 무엇을 찾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진은 몇 시간 뒤 집으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나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일까? 또는 커스틴의 외도가 밝혀져 그녀가 집을 나가기 한 달 전에, 또는 에스터의 증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에? 또는 이 사진이 거실의 선반에 수십 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먼지 낀 액자에 담겨 있으면서, 부모에게 약혼녀를 인사시키기 위해 돌아온 윌리엄이 무심코 집어 들기를 기다리게 될까?
불확실성을 의식하는 만큼 라비는 더욱 열렬히 이 햇살을 붙잡아두고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는 커스틴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인내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ㅡ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ㅡ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옮긴이의 말
진짜 러브스토리
평범한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에 이른다.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결말이다. 결혼 제도가 확립된 이후로 이렇게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자 완성이었다. 어쨋든 반복 학습의 효과는 강렬해서 우리는 주로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동화의 품에 안겨 살 순 없고, 책을 덮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치열한 일상은 순진한 이야기에 비하면 탁하고 어두운 습지대다. 결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낭만에서 멀어져 에밀 졸라의 현실에 가까워진다. 영원히 사랑에 정박해 있는 결혼은 드물거나, 없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지치고 감정은 메말라간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소설과 에세이가 절묘하게 만난 이 소설에서 알랭 드 보통은 이제 낭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라고 일러준다. 결혼은 사랑을 완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덕스런 삶에서 사랑을 지속시켜주기 위해ㅔ 존재하는 거라고, 주인공 라비의 사랑과 결혼은 낭만주의에서 현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더불어 작가의 삶과 인생관도 궤적을 같이하는 듯하다. 마치 보통 본인의 이갸기 같아서다. 현학과 재치가 줄곧 그의 무기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친절하고 지혜로운 휴머니즘이 더욱 눈에 띈다. 그 무르익음을 키워낸 뜨거운 여름 햇살은 예술과 철학에 대한 일상적 성찰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의 예술론만 보아도 인간미가 있고 그 자체로 감동이 있다.
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수단이다. 예술은 복작성을 편집하여,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에 빠른 시간 내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 세계의 문제와 부당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데, 그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이 지푸라기처럼 작고 약하게 느껴진다. 쾌활함은 일종의 성과물이고, 희망은 축하할 일이다. - ≪아름다움과 행복의 예술》 중에서
삶의 추함을 인정하고 낭만주의를 띄어넘어 짧고 뜨거운 사랑을 일생으로 확장하는 일에는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이 성숙함에 이르는 길에서 두 사람은 토라짐, 갈등, 다툼, 배신 등을 겪는다. 일상의 비끗거림은 맹독으로 작용하기 쉽지만 성찰에 담그면 묘약으로 연금된다.
영원한 사랑처럼 완전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순간은 있어도 완전한 인생은 없다. 서로를 영혼의 짝이라 믿고 혼인 서약을 한 라비와 커스틴. 하지만 유년의 상처 때문에 한 사람은 불안 애착으로 치닫고 한 사람은 회피 애착으로 도피한다. 사랑 가득한 눈에 서로의 단점은 보이지 않거나 도리어 사랑의 촉매가 된다.
한편, 사랑은 약점에 관한 것, 상대방의 허약함과 슬픔에 감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약점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시기에(즉, 주로 초기에) 그렇다. 연인이 위기에 빠져 낙담하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우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지만 격원할 만큼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망연자실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지지자로서의 새 역할을 부여받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덜 부끄러워하게 되고 아픈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불러들였던 그 단점과 결핍들이 이후의 일상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호가실히 주장하며 파국을 재촉한다. 작가가 이번에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든 이에게 운명처럼 닥치는 지루한 일상과 변덕이 등장하고, 낭만적 사랑만큼이나 갈등과 충돌이 이빨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느 고비에서도 작가의 목소리는 인간성과 품위를 잃지 않는다. 토라짐, 질투, 권태, 불안, 심지어 물어뜯고 싸우는 순간에도 이를 방관하거나 부채질해서 막장을 연출하는 대신에 현묘한 미적 장치로 품위를 유지한다.
"그리고 내가 절대로 미친 짓을 하지 않는다는 불평에 대해서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밀가루 봉지는 거실 맞은편으로 날아간 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벽에 퍽 하고 부딪쳐 하얀 구름을 일으키고, 식탁과 의자들 위로 가라앉을 때까지 놀랄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멍청하고 잔인하고 돼먹지 못한 인간, 그거면 미친 짓으로 충분해? 그걸 치우는 동안 집안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제발, 절대 다시는 나한테 지루하다고 하지 말아줘."
그녀가 2층으로 돌아간 뒤 라비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무릎을 꿇는다. 사방이 밀가루 천지다. 치킨타월에 조심스럽게 물을 적셔 탁자 위와 의자들과 타일 틈새에도 그 많은 양을 훔쳐내다 보니 거의 한 롤이 다 들어간다. 그런 뒤에도 남아 있는 밀가루는 앞으로 몇 주 동안 눈에 띄면서 이 사건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는 밀가루를 치우면서 한동안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기억을 불러낸다. 바로 이 여자와 결혼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이다.
밀가루는 물을 섞으면 놀라운 점성을 보이지만 마른 상태에서는 부주의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한다. 무릎을 꿇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흩어진 밀가루를 닦아내는 장면보다 무엇이 결혼 생활의 본질인지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 일상의 멘토가 있다면 알랭 드 보통이 아닐까?
번역하는 내내 행복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이런 작가가 있어 친절하고 지적이고 속 깊은 친구를 둔 듯 든든하다. 보통의 메시지를 찾는다면,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완전해진다'일 것이다. 조선 시대의 백자 달항아리에는 불완전한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과 겸손함이 스며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의 참된 의미를 만났을 때 문득 항아리가 되고 싶었다. 달항아리까진 아니더라도.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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